Heavy rain Chapters 61-70

#61

페로몬 해소라는 소리에 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의 진의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이. 라일은 꿋꿋하게 눈길을 받아넘겼다.

이내 미약한 한숨 소리와 함께 해진이 물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같군요.

“……페로몬 샤워를 부탁하고 싶어. 매일 시간 정도. 그거면 다른 해소가 필요 없을 듯해서.

말을 꺼내면서도 라일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페로몬 샤워는 그대로 페로몬으로 상대방을 감싸는 행위였다. 보통은 친애의 증거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페로몬에 담는 감정에 따라 마킹을 위한 수단으로도 쓰였다.

이래저래 감히 해진에게 요구할 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라일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자신이 멋대로 버린 각인이 해진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다행스러울 없다.

“그 페로몬의 상성 때문인가요?

“그래.

그와 해진의 페로몬이 상성이 좋다는 이전 진료 이미 들켜 버렸다. 또한 숨길 있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핑계로 삼을 요량이었다.

긍정했으나 녀석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혹여 있을 사고를 걱정하는 아닐까 덜컥 겁이 치솟는다. 고민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이에 대한 대책도 내놓았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묶어 놔도 괜찮아.

“…….”

슬쩍 내리깔린 라일의 속눈썹이 아침 해를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찬란한 외모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곤혹스럽게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사용인들이 그를 상냥하게 대할수록, 라일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수록 해진은 불편했다. 어차피 놓고 가야 것들이다. 애초에 저택에서 그런 온정을 바란 없었다. 아니, 한때는 있었으나 기대는 무거운 비에 쓸려 내려간 오래였다.

그가 바라는 얼마 없었다. 당장 나갈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동시에 저택과도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일이 자꾸만 해진이 그어 근처를 배회했다. 러트에 정신이 나가 그의 근처를 배회하던 날처럼.

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계약 이후에 세워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전할 말이 있다기에 바짝 긴장하며 기다렸는데 의외로 뜻밖의 제안이 들려온다. 특히 라일이 제정신이라면 앞에 가서 페로몬 흩뿌려 주는 무에 대수란 말인가. 해진은 페로몬 샤워가 갖는 사회적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 그랬다.

하는 없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해진은 제안에 응해야 이유가 없었다. 그가 제게 잘못을 생각하면 더더욱.

다만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시도는 보려고 마음먹었다. 특히나 라일이 제시하는 보상들이 지금 그에게 건너온다면 일이 귀찮아지기도 했고.

“미리 주신다던 보상 말입니다.

“응.

설령 배가 필요하다고 한들 라일은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생각지도 못한 조건으로 걸었다.

“지급 시기를 원래대로 계약이 끝난 이후로 했으면 합니다. 지금 말고요.

“…….”

차라리 보상을 빼자고 말했다면 납득이 갔을지 모르겠다. 순간 라일은 무언가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해진은 이게 수락되지 않는다면 응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어쨌든 해진의 말에는 계약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좋은 말은 아니니 라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묘한 위화감은 뒤에도 한참이나 라일을 괴롭혔다.

***

초조하게 응접실에서 서성이던 라일은 자신이 너무 볼품없이 안을 맴돌고 있다는 깨닫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도 문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마 거둘 수가 없었다.

해진이 시간이었다.

그가 퇴근하고 매일 저녁 시간씩, 그들은 라일의 응접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직도 라일은 녀석이 그의 제안에 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머리가 진작 돌아버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아닐까.

게다가 해진이 조건이라고 내건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방에서 나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다시 해진에게는 이득 없는 협상을 했다는 깨달았다.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저를 향하는 작은 숨결이나 하얀 얼굴을 의식하느라 똑바로 처신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이는 장면에 홀려 버려서. 해진이 온다면 다시 원하는 것을 단단히 물어야겠다.

그때 밖에서 종이 울렸다.

종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맑게 개는 느낌마저 났다. 미묘한 심정이 라일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해진이 자신을 찾아오는 느낌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아…….

문이 시차도 없이 열리자 해진은 조금 놀란 낯이었다. 깁스를 목발을 짚은 녀석을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가는 편이 좋았을 텐데 해진은 왜인지 라일의 응접실에서 만나기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안쪽을 두리번거리면서 해진은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일은 모습을 초조한 심정으로 관찰했다.

해진이 강제로 히트 사이클 약물을 먹고 곳도 장소였다. 그래서 가급적 그가 찾아가는 방향으로 하고 싶었는데 녀석은 완고했다.

어쩌면 그의 페로몬이 공간에 남는 싫었을지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을 감추며 라일은 해진을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해진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결정한 순간 바로 편한 재질로 바꿔 소파였다.

“……정말 여기로 괜찮겠나?

“네.

몸을 감싸는 커다란 소파에 잠깐 놀란 해진은 불편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뭔가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어서 그랬다. 그가 굳이 라일의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일이 그에게 어처구니없는 페로몬을 내보인 이후 자꾸만 긴장감이 무뎌졌다. 무언가 호감이 생기거나 불편한 마음이 사라진 물론 아니다. 다만 본능적으로 긴장하곤 하던 몸이, 어느 순간부터 라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건 옳지 않았다. 그가 겪은 일들을 상기하면 분명 서러운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방어막이 저도 모르는 사이 스르륵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저를 지배하곤 하던 두려움을 상기하려고.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직접 ‘그 방’까지 찾아갈 용기는 아직 없다. 그래서 해진은 충동적으로 이곳에 오겠다고 말을 뱉고 말았다.

사실 히트 사이클이 있던 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라일의 방까지 힘겹게 후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뜨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과정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무언가 거북하리라 여겼는데. 놀라울 정도로 처음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살짝 입술을 짓씹었던 해진은 이내 그것도 그만두었다. 이제야 자신이 라일과 관련한 일에 심력을 쏟고 있다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면서 익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한다.

안으로, 안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아침에 제안으로는 부족한 같은데, 혹시 뭔가 바라는 조건은 없나.

“괜찮습니다.

무언가를 고심하던 해진이 다시 무표정하게 바뀌는 순간을 라일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예전 기억 때문에 괴로운 거라면 당장 자리를 옮길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녀석은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다. 페로몬을 읽으면 분명 약간의 당황이 느껴졌는데 무슨 일이었던 걸까.

초조하게 입매를 더듬다가 겨우 꺼낸 말에도 해진은 기계적인 말만 되풀이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하는 생각을 이토록 간절하게 했던 적이 있을까.

“네게는 없는 조건이었잖아. 무언가 주어야 .

한참이나 간절하게 쳐다본 끝에야 해진은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무언가 곤란하다는 듯한 페로몬이 느껴진다.

“……필요해지면 말하겠습니다.

끝내 라일의 시선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자체도 곤란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침묵하자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퍼뜩 드니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일단은, 대화를…….

더듬더듬 멍청한 소리가 흘러 나가자 해진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약간의 실금 같은 흔적은 라일의 몸을 쩍쩍 갈라지게 만들 힘이 있었다.

“굳이 대화까지 해야 합니까.

“…….”

입술이 바짝 마른 탓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초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질 같은 속내 때문에 절박한 페로몬마저 흘러 나가려 했다. 라일은 나지 않게 심호흡하며 이런 상태를 숨겼다.

“페로몬 샤워를 적은 있나?

“아니요. ……이전 러트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아닌가요?

“비슷하긴 하지.

당시 정신 차린 저를 향해 미약하게 달려오던 페로몬이 다시 떠올랐다. 정작 지금 눈앞에 있는 해진은 아까부터 흩어질 듯이 옅은 거부감만 흘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런 반응을 보고 나서야 라일은 녀석이 선뜻 제안에 응했는지 있었다. 페로몬 샤워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녀석에게만 불합리한 상황을 라일은 이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각인의 여파이리라.

              

#62

“진. 페로몬 샤워는 원래 이렇게 쉽게 만한 일이 아니야. ……네가 의미를 모를 있다는 간과했어.

“찾아보고 오긴 했습니다.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해진은 일단 페로몬 샤워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검색해 보았기 때문이다.

보통 형질이 있는 사람들이 페로몬 샤워를 경험하는 갓난아이 때부터였다. 알파와 오메가인 부모는 아이를 페로몬으로 감싸면서 안정감을 느낄 있도록 준다.

이렇게 겪은 페로몬 샤워의 경험이, 성장한 뒤에는 짝이 오메가나 알파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애정이라는 감정이 상황에 맞게 조정되어 상대에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도한 소유욕을 담는다면 마킹이 되는 식이었다.

다만 베타 부모 사이에서 자라난 해진은 친애적인 의미라고 쓰여 있는 텍스트에서 아무런 감흥을 찾아볼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사회적 뉘앙스에 의미를 두기엔 라일과 지금까지 페로몬 해소 또한 정상이 아니지 않았던가.

덤덤하게 상관없다고 말하는 해진을 라일은 모를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날 아침에 했던 것처럼 부탁하지.

조금 어수룩한 짓을 했던 그날 아침을 떠올린 해진이 머쓱하게 머리칼을 조금 매만졌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일단 페로몬을 개방했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무슨 감정을 담아야 할지 모르겠다. 덕분에 혼란만 담은 페로몬이 라일을 향했다.

“내가 대화를 하자고 , 네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조절이 쉬워지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개방하는 페로몬이 자연스러우니까.

“아.

해진도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감정들이 외부로 분출되는 경험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지금 어설프게 내보내는 페로몬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명확한 감정을 담는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해진을 보며 라일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살면서 고개를 숙인 적이 거의 없는 알파였다. 그런데도 녀석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도 바닥을 보게 되었다. 녀석의 옅은 페로몬이 힘없이 깔린 바닥을.

차마 상황에서 긍정적인 페로몬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설프고 거부감이 담긴 페로몬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게다가 해진에게 요청할 만한 대화 주제도 마땅치 않았다. 그가 가장 좋아할 만한 주제로는 가족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건 라일이 감히 먼저 입에 담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하고 싶은 얘기를 . 경청할 테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어렵다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읽었던 같은 그런, 사소한 것도 괜찮아. 무의식적인 감정을 떠올리는 중요한 거니까.

그의 설명에 해진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는 분명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러나 달큼한 숨이 툭툭 밖으로 흘러나올 때마다 라일은 스스로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는 없이 이제 그만 되었다고, 포기하려는 때였다.

“……저번에 서재에 갔을 , 오랜만에 동화책 하나를 읽었습니다.

“…….”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해진의 음색은 무미건조했다.

“동물이 많이 나오는 책이었어요.

눈가를 찡그리며 내용을 떠올리는 얼굴에 라일은 홀린 주의를 빼앗겼다.

해진은 정말이지 사소하고 쓸데없는 내용을 계속 주워섬겼다. 마지못해 이야기를 풀어내듯이. 그런데도 아까보다 조금은 자연스러워진 페로몬에 라일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릴 적에 분명 온종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짧아서 이상했습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으며 라일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그가 행여 입을 열면 꿈같은 상황이 금방이라도 달아나기라도 하는 듯이.

***

해진이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돌아왔다.

라일은 이전보다도 철저하게 녀석의 동선을 염두에 두고 병원에 준비를 지시해 두었다. 덕분에 병원은 오랜만에 분주하게 준비에 한창이었다.

저번처럼 안아서 차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함부로 손을 수가 없었다. 라일은 녀석이 힘든 기색을 내비친다면 개입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휠체어라도 주면 좋을 텐데, 유난한 같다며 마크에게 거절 의사를 비쳤다고 한다.

그런데 해진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그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들어왔다. 오늘 해진이 외출복으로 선택한 옷이 무척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건 얼마 라일이 부탁을 위해 찾아갔던 녀석이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위아래가 같은 통이 넓은 편한 .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번 그것을 의식하니 못내 신경 쓰였다.

“……준비는 되었나?

“네.

병원을 가긴 가는데 라일이 그를 데리러 해진은 이해할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따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어차피 무슨 차를 타고 가든 그건 라일의 소유일 테니까.

게다가 해진은 그냥 의문을 흩어 버리려고 애썼다. 이따금 왜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그가 마음속에 숨겨 작은 상자가 터져 나갈 부풀어 오르곤 했다. 터져 나간 감정을 다시 주워 기력은 없으니 모른 척하는 낫다.

“가지.

병원 생각에 식욕이 없는지 해진은 아침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덕분에 라일은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 상태였다. 무사히 병원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녀석이 먹는 양을 체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이래서 입은 옷이 신경 쓰이는 건지도 모르지.

“…….”

“…….”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이제는 완연히 차가워진 같아서 라일은 다시 해진의 옷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얇게 입었지.

“할 말이 있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집요했는지 해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불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라일은 짧은 순간 무척 고심하며 말을 골라야 했다.

너무 과도한 관심을 보이면 분명 이상한 티가 테니 주의해야 했다.

“……아니.

“…….”

그의 어설픈 변명에도 해진은 다시 무심하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그들을 지배한 침묵 속에서 라일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간 그들은 이렇게 아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매일 저녁 시간, 라일에게 가까스로 허락된 시간이었다. 운이 좋다면 아침을 함께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간 해진은 나름대로 쓸데없는 대화 주제를 선택하느라 바빴고 라일은 조금이라도 해진에게 있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이따금 꺼내는 말들은 전부 해진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건물이나 현금이 필요 없는 사람을 지금까지 적이 없어서 어려웠다. 해진이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어 곤란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끝내 조용히 해진을 병원에 데려다 놓아야 했다.

***

서류에 서명하던 그는 문득 다시 해진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녀석이 입고 있던 옷을.

분명 얼마 전에 봤던 옷인 같았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같은 옷을 입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라일이 특별히 명령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해진이 그간 옷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깨달았을 라일은 필요 이상으로 넉넉하게 옷을 지급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다시는 같은 옷을 입지 않아도 되게끔 말이다.

마크에게도 해진이 입은 옷은 세탁은 하되 다른 곳으로 치워 버리라고 두기도 했다. 녀석이 마음껏 새로운 옷을 찾아 입을 있도록. 그런데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

다시 떠올리는 순간부터 이제 의문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혹시 해진에게 지급되는 물건들에 탈이 아닐까. 아니면 지급하는 옷들이 성에 차지 않는 아닐까.

그와는 다르게 같은 옷을 입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았을 해진이었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기이한 마음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택에 준비를 .

바로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그의 뜬금없는 명령에 비서가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고 짐작한 같았다.

“저택 말씀이십니까?

“진의 진료는 언제 끝나지?

“아직 시간쯤 걸릴 거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사이 저택에 다녀와야겠어.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비서는 침착하게 차를 대기시켰다. 그냥 버린다는 아니라 다녀온다는 이야기에 오늘 일정을 정리할 필요는 없다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한 마음처럼 저택에 빠르게 돌아가자 놀란 사용인들이 뛰어나왔다. 마크는 해진과 함께 병원에 동행한 상태였다.

“진의 옷방을 관리하는 사용인을 불러.

“네, 주인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사용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 라일은 곧장 해진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녀석의 응접실에 도착하니 사용인 하나가 그를 찾아 서둘러 오고 있었다. 거침없이 그를 스쳐 라일이 해진의 옷방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신가요, 주인님?

“…….”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라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벌겋게 물들었던 시야가 이제야 돌아오는 같았다. 우려와는 다르게 해진의 옷방은 정상적인 상태였다. 불시에 들어왔을 사용인들이 해진의 응접실을 열심히 청소하던 중이기도 했다.

              

#63

“진이 오늘, 같은 옷을 입었던데.

그의 착각이었을까. 혹시 모르기에 라일은 녀석의 옷을 관리하는 사용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이유를 아나?

“깁스 때문에 최근 입을 만한 옷을 고르기 힘드신 모양입니다. 오늘 입으신 옷은 얼마 전에 세탁해서 치워 두었는데 찾으셔서 다시 가져다드린 겁니다.

“……그렇군.

잠깐 사그라들었던 초조함이 금세 다시 그를 잠식했다. 멍청하긴. 진작 신경을 썼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입을 만한 옷이 없어 고민하면서 해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를 홀대한다고 생각했으면 어쩌지.

문득 드는 걱정에 숨이 막힌다. 그를 의아하게 보고 있는 사용인에게 라일은 가까스로 명령을 던질 있었다.

“옷을 주문해. 해진이 입었던 것과 비슷한 편한 종류를 넣어 . 같은 옷을 입을 필요 없도록 .

“네, 주인님.

“……그리고 옷방을 아예 정도 늘려. 일주일 간격으로 갈아치우며 바로바로 돌릴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사용인은 바쁘게 그의 명령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모든 명령대로 돌아가고 있는데도 라일은 계속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따위 것들이 해진의 눈에 차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상하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부족했다.

***

다음 아침 해진은 어쩐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어제 병원을 다녀왔더니 못내 피로가 쌓였다. 이렇게 나른하게 보내는 처지에 설마하니 몸이 힘든 아니었다. 무거운 역시 정신 쪽이리라.

어제는 주삿바늘도 봐야 일이 없었기에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커다란 기계에 발을 스캔할 때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버텨 냈다.

다리는 그런대로 회복 중이라고 했다. 물론 뼈가 조각이 났다가 붙은 탓에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과격한 운동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해진은 발로 천천히 걸을 있을 정도면 충분하니 다행이었다.

오늘도 어쩔 없이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해진은 느릿하게 응접실로 나갔다. 간단하게 세수로 정신을 일깨우고 옷방으로 가자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

그가 입을 법한 옷가지가 세트로 가지런히 옷방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작은 물건들을 임시로 올려 두곤 하는 테이블 위였다.

해진은 의심 없이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최근 깁스 때문에 찾곤 했던 통이 넓은 바지라서 선뜻 손이 갔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면서, 해진은 대수롭지 않게 이것들을 마크가 준비해 주었겠거니 생각했다. 다만 희미하게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조금 이상하긴 했다.

***

“입었나?

“네. 그대로 갖춰 입으셨다고 합니다.

“……별말 없었고?

“네.

어제 병원을 다녀온 피곤했는지 해진은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라일은 하염없이 녀석의 앞을 서성이다가 출근해야 했다.

“밥을 챙겨 먹도록 말을 전해.

“네.

“……내가 골라 옷이라고는, 말하지 .

“저택 측에 당부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녀석이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해진의 건강과 관련된 일도 아니니 다분히 불필요한 짓인데도.

어제 급히 명령한 결과 해진이 찾는 것과 비슷한 옷이 저택에 대량 비치되었다. 그중 하나를 손수 골라 코디해 두면서 라일은 페로몬을 조절하기 위해 애썼다. 혹시라도 녀석이 기분 나빠할까 .

이상함을 느끼고 거절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해진은 눈치채지 못한 같았다. 앞으로도 해진은 이런 호의나 배려가 라일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녀석이 나은 환경에 있는 것일 테니.

“보고를 이어 가도 되겠습니까?

“말해.

“해고된 사용인 명이 대출 신청을 했습니다. 변호사 선임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머리를 차갑게 만드는 보고에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진의 일에 관련된 몇은 길어질 뻔한 소송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끝이 허무하게 끝날 기민하게 눈치챈 것처럼.

그래서 라일은 사람을 심어 그들 주변을 조사했다. 소송이 무척이나 부당하며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일단 해진이 명확한 소송의 주체가 아니라서 그들은 희망을 찾았다. 애초에 라일이 놈들에게 제기한 혐의는 아무래도 그보다는 조금 죄가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개개인의 자금줄을 틀어막은 라일이었다. 그래서 몇몇은 대출을 받아야 변호사 선임을 위한 돈을 마련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접근한 그가 소유한 여러 대부업체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당 사업체가 그의 소유라는 것이 숨겨진 곳들.

“최대한 대출이 승인 있도록 .

“알겠습니다.

라일은 이따금 법에 저촉되는 상황을 꾸밀 이들을 운용하곤 했다. 그의 친족들도 모르도록 어릴 적부터 준비해 것들이었다. 만약 그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계획을 세워 있었다. 가볍게 누군가의 인생에 파탄을 고한 라일은 다시 해진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어차피 그들의 파탄은 스스로가 불러온 것들이었다. 지금 라일이 직접 겪고 있는 것처럼.

적당한 시간에 녀석이 식사를 챙겼는지 확인해야겠다고 덤덤하게 생각하며, 라일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

온실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처음 예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라일의 눈에 차는 모습은 아니었다. 분명 온실은 구색을 갖춘 정갈한 모습이었지만, 실내의 한계라는 답답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그곳에 준비한 라일은 해진을 초대했다.

천천히 마크를 따라 외곽 정원으로 접어든 해진은 사뭇 놀란 얼굴이었다. 그간 이곳은 저택 입구 쪽에서도 보이지 않는 구역이라 황폐하게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잠깐 본관 쪽에서 느긋하게 보내는 사이 건물이 생겨난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깔끔한 검은 철골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아래로 계절에 맞지 않은 싱그러운 식물들이 촉촉하게 수분을 내뿜고 있었다. 온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끼쳐 오는 따스한 공기가 해진은 얼떨떨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라일은 조심스럽게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손은 자연스럽게 해진이 두르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받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얌전히 옷을 건넨 해진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조금 곤란한 낯을 했다. 무의식중에 라일을 너무 편하게 대한 같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라일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러지 말자.

“온실이 생겼군요.

“그래. 날이 추워졌으니까 식당에만 있으면 답답할 같아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해진은 일부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라일의 대답이 해진을 위해 커다란 온실을 지었다는 들려서 곤란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정신을 다잡는다.

식사가 시작되니 다행스럽게도 금방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따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온실 안을 맴돌았다.

아무리 마음을 억누르자고 다짐을 한들 새로운 자극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성인이 후로 해진의 삶은 지나치게 무채색이었으니까. 초록의 싱그러움이 자꾸만 시야를 멋대로 파고들었다.

“여긴 마음에 드나?

“……온실에서 식사하는 처음이네요.

라일은 별일 아니라는 해진에게 물었다. 시선조차 그의 앞에 놓인 메인 디시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긴장하며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저택에서는 가능한 알맹이가 없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게 흔적을 지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이 대화를 이어 나가는 생각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시간 라일과 마주 앉으며 해진은 그걸 깨달았다.

읽은 책이나 기사 따위에 관해서 설명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그들의 대화 시간에는 조금씩 해진의 기호가 담기게 되었다.

좋아하는 음식, 색깔. 취향의 책이나 관심 있는 기계 등등. 물론 해진은 자신이 이런 것들을 선호한다며 직접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주제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니 만약 언급한 물건들이 대뜸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면 당장 그만둘 요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일은 그가 그어 선을 지키듯이 변화를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말 그의 페로몬에만 목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무관심이 기껍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래.

시선을 간신히 바닥으로 처박은 라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꾸만 해진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가 버거웠다. 답답하다고 생각한 온실이 이상하게도 해진이 들어서는 순간 환하게 깨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녀석의 페로몬이 피부에 닿으면 라일의 속에도 온실이 생겨났다. 삭막하기만 했던 곳에 기적적으로 피워 푸른 수풀들이 녀석의 체향에 맞춰 살랑살랑 바람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만 커져서 큰일이었다. 해진은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으나 시선이 자꾸만 푸르른 화초나 꽃으로 향하는 라일은 기민하게 눈치챘다.

역시 온실을 크게 지어야 같았다. 이곳이 실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크게. 일단 이번 겨울엔 이곳을 쓰고 여름에는 다시 짓는 거다.

조금이라도 저택에 해진이 좋아하는 구석이 생길 있도록.

              

#64

“혹시 알레르기가 있는 꽃은 없나. 있다면 치우도록 하지.

“……없습니다.

홀린 듯이 꽃을 보던 해진은 마침 들려온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거리감을 두고자 노력했지만, 대답하지 않을 없었다. 알레르기는 위험하니 저리 묻는 것도 어쩔 없지 않은가. 다만 무언가 묘한 기색마저 떨칠 수가 없어서 절로 표정이 굳는다.

오히려 라일은 전혀 개의치 않는 굴어서 민망할 즈음, 그의 휴대폰이 짤막하게 울렸다.

메시지를 읽던 라일이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이번에는 해진을 똑바로 향한 시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크가 전달 사항이 있다는데 잠깐 들어와도 될까.

“네.

다시 묘한 기분을 느끼며 해진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동안 식사 시간에 워낙 예민한 모습을 보인 자신이었으니 저리 물을 수도 있겠지.

기분은 대체 뭘까. 저번에 느꼈던 미약한 분노와는 달라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련님. 공사 관련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분이 같이 계실 의논하는 편이 좋을 듯해서요. 브라이트 ,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주름진 마크의 눈을 보며 해진은 쓴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는 매번 해진이 저를 두려워할까 노심초사하는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은 저를 걱정스레 보는 눈길에 적응해 버린 오래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공사 때문에 소음이나 먼지가 심해질 같다고 하더군요. 브라이트 씨의 상황이 조금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

뜻밖의 결과에 라일은 곤혹스럽게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해진의 손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결국 조금 미뤄지고 말았다. 시장을 갈아치울 준비는 순조로웠으나 이번엔 문화유산에 미친 단체에서 연락해 것이다.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하필이면 고택이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 개소리를 입에 담는 바람에 라일은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지금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알기 위해 저택 구조에 대한 정밀조사를 맡겨 상태였다. 행여 그걸 사용할 해진을 위험에 빠트릴까 .

“일단 브라이트 씨의 방을 임시로 옮겨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본관의 손님방은 그것뿐이고 외관 쪽도 차차 어수선해질 같습니다만.

설령 외관 쪽은 괜찮다 하더라도 라일은 해진을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잔뜩 비에 젖은 구석진 방문 앞에 있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일이지.

본관에 있는 좋은 방을 가늠하던 라일은 순간 곳을 떠올렸다.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이 자제할 겨를도 없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매일 오는 응접실에, 실은 이어진 침실이 하나 있어.

모를 해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반사적으로 페로몬을 더욱 갈무리하면서 라일은 그걸 마주 보았다. 오늘따라 해를 반사하는 녀석의 속눈썹에 홀린 눈길을 사로잡힌다. 이토록 푸르게 만들어 온실에서, 라일이 바라보는 오로지 녀석의 검은 머리칼뿐이었다.

“……매일 오는 것도 너무 번거롭고 위험하니, 가까운 곳은 어떨까 하는데.

라일이 사용하는 저택의 주인이 쓰는 방이다. 그렇기에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부부의 침실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다.

그의 부모도 방을 사이좋게 나누어 쓰지 않았기에 의미는 퇴색된 오래였다. 다만 입에 담으면서도 뻔뻔한 제안을 해진이 부디 모르기만을 바랐다.

“…….”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의 시선은 라일과 마크의 얼굴을 통통 튀어 다니기만 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라일의 손바닥에는 흥건하게 땀이 배어들었다.

갈급한 심정을 갈무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라일은 저번부터 신경 쓰이던 부분도 애써 입에 담아 보았다. 근처에는 마침 그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던 목적에도 부합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처에도 서재가 있어. 저택에서는 가장 규모니, 이번엔 만할 거야.

저번부터 서재에 집착하는 같은 라일의 행태가 이상했지만, 해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신 온실로 오는 길에 마주쳤던 광경을 떠올렸다.

어쩐지 저택 내부가 조금 부산스럽다는 인상을 받긴 했다. 평소보다 문이 열려 있는 방도 많았고 오가는 사람들도 분주해 보였더랬다. 어딘가 대대적인 수리라도 필요해진 모양이었다.

벌써 5 넘게 이곳에 머무른 덕에 해진은 오래된 저택이 손이 가는 곳이라는 알고 있었다. 이번엔 공교롭게도 그가 있을 근처가 문제였던 걸까.

모든 소란이 때문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해진은 그저 곤란하다는 생각만 이어 나가야 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언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떨칠 수는 없었다. 라일과의 거리가.

물론 그간 그의 방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저택은 다리를 다친 이에게는 불편한 구조였다.

매번 불안한 저를 따라나서는 사용인들의 무리를 달고 라일의 방으로 향하는 , 색다른 곤란함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분명 처음엔 한두 정도가 저를 도와주듯 따라왔을 뿐인데 어느새 그가 움직이려 들면 쫓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게다가 저택의 주인이 수리가 필요해서 잠깐 방을 바꿔 달라는데 무어라 말을 보태겠는가.

“……고마워.

아까부터 묘한 기분이 계속 이어졌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라일의 인사를 들으니 그랬다. 분명 무언가 석연치가 않은데, 그게 정확히 뭔지 해진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정작 고개를 끄덕인 해진은 침실에 얌전히 모셔진 움직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뭐라도 거들어 볼까 싶어서 짐을 챙기려고 했더니 사용인들이 극구 만류했다. 결국 그들의 동선에 이리저리 방해만 되는 같아서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잠깐만 옮겨가는 건데 짐을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온실은 어떠셨습니까. 제법 신경을 역작입니다만.

그때 잠깐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던 마크가 종을 울렸다. 저택 안팎이 무척 번잡해서 일이 많을 텐데도 그는 시간에 정도는 해진의 상태를 체크하러 왔다.

어쩌면 감시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좀처럼 경각심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마크의 주름진 눈이 호선을 그릴 때면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해진에게는 조부모님이 없었다. 그를 길러 브라이트 부부는 그들의 부모를 전부 일찍 여의었다. 가까운 친척도 없어서, 간신히 가족이라는 곳에 편입되었던 해진은 사고 이후로 다시 홀로 사회로 밀려나고 말았다.

“멋있었어요.

마크는 직접 온실 배치를 전부 도맡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곳이 계속 황폐해서 내내 거슬렸다는 소리와 함께. 그래서 해진도 솔직한 감상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살면서 그렇게 멋진 온실을 처음이었다. 그런 곳을 통째로 빌려 식사 장소로 사용하는 것도 아마 다시는 하지 못할 경험이리라. 어차피 지나가 버린 일이다. 해진은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의식적으로 마크에게 온실 안쪽에 있던 푸른 아치형 입구가 특히 멋졌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이제 마무리가 겁니다. 시간쯤 뒤에 식사하고 바로 옮겨 가실 있을 듯하군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어머니의 수프가 먹고 싶을 때가 아니라면 해진은 특별히 무언가를 부탁해 적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크는 식사 시간마다 그의 의중을 묻는 멈추지 않았다.

“참, 잠자리가 바뀌셔서 잠을 설치실까 걱정이군요. 저녁에 간단하게 와인이라도 드릴까요? 드시고 나면 그럭저럭 잠이 겁니다.

“아, 와인이요…….

“음……. 검사 결과 상태가 많이 호전되셔서 조금은 괜찮다고 들었는데, 혹시 와인 말고 다른 술을 즐기십니까?

먹고 싶은 없다는 소리에 마크가 평소처럼 물러날 알았다. 그게 아니라 의외의 것을 묻는 바람에 해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제가, 술을 마셔 적이 없어서요.

“오, 그렇군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술을 아예 먹어 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처럼.

성인이 되자마자 저택에 들어왔던 그였다. 편하게 술이나 홀로 마시며 보낼 만한 세월도 아니었기에 번도 술을 마셔 적이 없었다. 그의 형이 종종 마시고 기분 좋게 그에게 엉겨 붙던 기억나지만 말이다.

잠깐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던 마크가 다시 시원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잘못이 아닌데도 눈치 보듯 그를 바라보는 해진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다.

“그럼 이참에 한번 경험해 보시죠.

“아…….

“제가 특별히 도수는 약하지만 좋은 와인으로 골라 오겠습니다. 물론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지만요.

마크는 저택에 숨겨 좋은 와인이 엄청 많다며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조금 그에게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사교적으로 구는 마크였다. 결국 해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그럼 모시러 오겠습니다. 필요한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꼬박꼬박 인사를 잊지 않는 그에게 마크는 다시 푸근한 웃음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했다. 와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경험해 보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래도 몸이 좋아지긴 모양이라면서 해진은 억지로 상황을 묻으려 애썼다.

대체 누구에게 숨기는지 알지도 못한 .

              

#65

오늘따라 저택으로 향하는 차가 사뭇 느렸다. 매번 시간이면 고질적인 도심의 교통체증인데도 라일은 갈급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 창밖을 내다봤다.

오후 즈음 해진의 이사가 무사히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혹여 중간에라도 마음을 바꾸는 아닌가 걱정했는데 녀석은 생각보다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막상 침실에 들어가서는 어색한 굴었다고 하지만.

소식을 들은 라일은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애초에 손님방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좋은 방을 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해진의 방은 멀어도 너무 멀지 않았던가.

아직도 이리 건네줘야 것이 많은데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진은?

“방에 계십니다. 아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물은 질문에 마크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평소와 같은 말인데도 감회가 새로웠다. 오늘 말하는 방은 라일과 응접실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다리가 날듯이 움직였다. 분명 쓸데없는 기대라고 이성이 외치는데도 몸이 달아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겨우 기거하는 방이 조금 가까워졌을 뿐인데 이토록 기꺼워 참기 힘들다니. 새삼 각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응접실의 문을 열려던 라일은 순간 멈칫하고는 조심스럽게 종을 울렸다. 안에서 나지막한 대답이 들려온다.

안으로 들어서니 평소보다도 해진의 페로몬이 조금 진하게 느껴진다. 녀석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손바닥만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

“늦으셨네요.

조금 들뜬 기분으로 들어섰던 라일은 순간 우뚝 멈추었다. 약속한 시각보다 늦고 말았다. 아차 심정이 그가 서둘러 그의 자리로 가며 해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멋대로 늦어서 기분이 상한 아닐까.

“미안. 오늘따라 차가 밀리는 바람에. 다음부턴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하겠어.

“……아뇨, 그렇게까진.

아마 도시에서 가장 바쁠 사람일 라일이다. 그에 반해 집에서 일이 없어 좀이 쑤시는 저였다. 심지어 이제는 침실도 바로 이곳에 붙어 있지 않은가.

부조리한 상황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라일을 바라봐야 했다. 진지한 얼굴이 무척이나 심각해 보였다. 설마, 진심으로 소리는 아니겠지.

해진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라일은 덩달아 초조해졌다. 저택이 워낙 외곽이라 오가는 시간이 없이 길어진다. 조만간 무슨 수를 쓰긴 해야 듯하다.

“옮긴 방은 어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

“…….”

이어지는 말에 해진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라일의 당부는 새로운 침실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예술에는 문외한인 해진의 눈에도 방에 쓰인 물건들이 범상치 않다는 있었다. 침실 한쪽에는 어디서 많이 같은 그림이 걸려 있기도 했고, 문손잡이 하나에도 세밀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사뭇 놀랐다.

게다가 침실의 크기가 광활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어색하게 응접실을 마주하는 형태로 침실이 이어졌나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응접실은 그저 하나의 통로로 봐도 무관할 정도로 저쪽에 배정된 공간은 무척 독립적이고 방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개 지나가는 손님이 만한 방은 아닌 듯한데.

“방이 너무 과분하더군요. 공사가 끝나는 대로 비워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편히 있다 가도록 .

이곳에 겨우 시간 만에 해진은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가 밀릴 때부터 한없이 갈급하던 마음이 점점 그를 몰아세웠다. 자꾸만 제멋대로 날뛰려는 페로몬을 제어하면서 라일은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일단 주의를 돌린 녀석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를 있도록 힘쓸 작정이었다. 분명 욕심을 부리면 되는데, 한번 방에 들어선 해진을 보니 자꾸만 탐이 났다.

가까운 거리가.

“그런데 보고 있었지?

“아……. 가족사진입니다.

그러나 기껏 말을 돌린 곳에는 뜻밖의 주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어설프게 욕심이나 주워 삼키던 라일이 눈을 크게 뜨며 등줄기를 긴장시켰다. 심장이 터져 나가기라도 듯이 초조하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응접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해진의 페로몬에도 미약하게 음울한 기운이 맴돈다.

섣부르게 욕심을 부린 스스로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속으로 퍼부은 라일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무겁게 가라앉은 녀석의 페로몬이 닿을 때마다 무거운 추가 온몸에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그때 시기적절하게 밖에서 종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해진의 대답을 듣고 문을 것은 마크였다. 손에는 음식이 조금 담긴 트레이를 밀고 있었다.

“낮에 말씀드린 와인입니다. 마침 시간이 적당할 듯하여.

“아…….

미처 보고 받지 못한 일이기에 라일은 해진 모르게 강한 눈빛을 마크에게 전달했다.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마크는 그저 허허 웃으며 눈길을 받아넘겼다.

처음에는 분명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해진의 입으로 넘어가는 음수량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려 드는 라일이었다. 극성맞은 태도를 고려하면 해진에게 와인을 주겠다는 소리를 하는 순간 저택으로 달려왔으리라.

마크 또한 해진의 상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번이나 병원을 다녀오면서 검진한 결과 몸은 충분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와인 한두 정도는 괜찮다는 의사 소견도 들었다.

그러니 이즈음 마크는 그에게 새로운 흥밋거리를 줘야 한다고 느꼈다. 무작정 건강한 환경만 조성하면 저렇게 젊은 나이의 청년에게는 무척 심심하지 않겠는가. 와인에 빠져 살게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게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물론 이런 사안으로 사이에 쓸데없는 오해를 심어 주고 싶진 않았기에, 일부러 라일과 함께 있는 이때 가지고 오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마크. 갑자기 술입니까.

역시나 눈빛이 무시당하자 그가 미간을 슬쩍 문지르며 말을 꺼냈다. 해진을 슬쩍 등진 그의 눈빛은 사나웠다. 그러나 마크는 믿는 구석이 있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브라이트 씨께서 아직 술을 번도 경험하지 못하셨다 하더군요. 의사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그들 사이에 와인과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늘어놓은 마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왜인지 술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하기라도 기분이 들어서 해진은 곤혹스럽게 입술을 살짝 물었다. 분명 그가 그런 요청을 만한 성격이 아닌 라일도 마크도 알겠지만 말이다.

트레이를 비운 마크는 미련 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침묵과 함께 낯선 와인병만 그들 사이에 남았다.

“……와인이 처음이라는 건가?

“술이 처음입니다.

“아.

마크가 던진 뜻밖의 정보 때문에 라일은 놀랐다. 그것도 와인이 아니라 자체가 처음이라니.

그러다가 문득 해진이 성인이 되자마자 저택에 왔다는 상기했다. 그전까지는 따위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가족을 위해 돈을 융통하느라 바빴을 테고.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식간이었다. 오랜 시간 고작 와인 고려할 겨를이 없게 만든 결국 라일이 아니던가.

씁쓸하게 비틀어지는 입매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애써 가리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와인을 향해 손을 뻗는 택했다.

그가 앗아 해진의 경험을 최대한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나쁘지는 않은 와인이니, 한번 마셔 .

그도 알고는 있었다. 해진의 상태가 다리를 제외하면 이제는 나아졌다는 것을.

저택의 모두가 세심하게 식단에 신경 결과였다. 예전에 임신 테스트를 하겠다고 해진이 스스로 피를 뽑았을 때부터 상태는 회복세에 있었다. 의사도 괜찮다고 하니 와인 잔쯤은, 괜찮겠지.

다만 모든 알면서도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차분하게 코르크를 와인을 따르면서 라일은 끝내 걱정 비슷한 말을 뱉어냈다.

“혹시라도 입에 맞지 않다면 뱉어도 괜찮아.

와인 잔이 웬만한 직장인 월급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뿐히 무시하면서.

“…….”

내색하진 않았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일의 손짓을 따라가던 해진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아래로 흘렸다. 그런데도 선명한 포돗빛의 액체가 잔으로 흘러 들어가는 장면에는 다시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없었다.

코르크 마개를 따는 것부터 뭔지 모를 커다란 유리병에 옮겨 담는 것까지, 라일의 손놀림은 능숙해 보였다. 해진은 이번엔 잔으로 와인을 옮겨 따르는 마디 굵은 손으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미약하게 퍼지는 와인 향에 주의를 빼앗긴 사이 잔이 앞에 가까이 왔다.

생각보다 와인의 향이 맛있게 느껴졌다.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어.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자 라일의 손이 주저하다 다시 잔으로 다가왔다. 도로 가져갈 것처럼.

해진은 반사적으로 잔을 손에 쥐었다. 멈칫하는 라일의 손목에는 무거워 보이는 시계가 슬쩍 보였다.

분명 맛이 없으리라. 향은 그럴싸하지만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종종 마시곤 하던 와인이 포도 주스 같아 궁금했던 해진이었다. 가족들은 절대 생각하는 맛이 아닐 거라고 그를 놀리곤 했지만.

“아…….

처음으로 맛본 와인은, 가족들의 말처럼 절대 포도 주스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척 맛이 있었다.

              

#66

“……어때.

해진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급변했다. 포근한 향을 해진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라일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얼떨떨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에서 왜인지 시선을 수가 없었다.

“……맛있어요.

포도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혀를 감쌌다. 분명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맛인데도 넘어간다. 내쉬는 숨을 따라 포도 향이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해진은 자신이 거대한 포도가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잘게 몸서리를 쳤다.

“다행이군.

마크가 골라 도수가 무척 낮고 단맛이 강한 와인이었다. 아마 와인을 처음 먹는 해진을 배려한 것이리라. 물론 와인 준비를 하다 말고 도망간 , 필시 라일이 무슨 우려를 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겠지만.

정말 입에 맞는 건지 녀석은 다시 와인을 홀짝 모금 넘겼다. 어설프게 잔을 쥐고 있는 하얀 손이 붉은 포도주색과 어울렸다. 살짝 분홍빛이 도는 손톱 위에서 은은하게 조절해 응접실의 조명이 반질거렸다.

이상한 갈증이 드는 바람에 라일은 잔에도 와인을 조금 채웠다.

“생각 외로 단맛이네요.

절대 그가 생각하는 맛이 아니라고 하기에 무척 시고 역한 맛이라고 상상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술을 먹은 다음 날이면 형은 죽을 것처럼 엎드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상상에 비하면 조금 떫긴 해도 무척 달았다.

“특히 종류로 준비해 주었군.

라일이 상표를 가리키며 말해 주었다. 와인은 종류에 따라 맛이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다시 혀끝에 들러붙은 단맛을 느끼려고 모금을 넘겼다.

“이것들도 먹어.

저녁을 챙겨 먹었다는 보고 들었으나 해진이 술만 연신 넘기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중간에 있던 치즈 플래터를 해진의 앞으로 바짝 밀었다. 혹시 거절하면 다른 안주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의외로 해진은 순순히 그중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가장 노랗게 생긴 치즈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탓이다.

해진이 와인을 잔이나 비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제서야 당황한 라일이 이번엔 와인이 담긴 디캔터 병을 슬쩍 쪽으로 당겨 왔다. 투명하고 와인이 가득 담긴 병으로 해진의 시선이 진득하니 달라붙는 것도 같았다.

“……너무 빨리 마시지 .

“괜찮은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녀석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인 와인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똘히 안에 담긴 액체를 관찰하는 행동이 신선했다. 이제야 나이로 보일 정도로.

살짝 지끈거리는 심장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라일은 해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다시 홀짝 와인을 들이켜는 아무래도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혹시 서재에는 봤나?

효과적이긴 했는지 해진의 시선이 대번 라일을 향했다. 평소보다도 미약하게 찌푸려진 눈가가 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자신이 혹여 말실수를 아닌가 싶어진 라일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요.

서재에 자신이 가야 하는 일이 있던가. 묘하게 서재에 집착하는 라일 때문에 해진은 침착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지갑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펼쳐진 채라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가지가 머리에 같이 들어오는 바람에, 입에서는 의도치 않은 말이 불쑥 흘러 나갔다.

“그때 동화책 말입니다.

“동화책……?

뻔한 말을 하는데도 되묻는 라일이 살짝 답답하게 느껴졌다. 대화를 시작하려니 목이 조금 타는 같기도 했다. 그래서 와인을 모금 마신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첫날 제가 말했던 , 동물이 많이 나온다는.

“응.

그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라일이었다. 아마 해진이 말하는 사소한 하나하나를 얼마나 세세하게 신경 쓰는지 안다면 녀석이 진저리를 치고 도망갈 만큼 말이다. 그걸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금방 무슨 책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뜬금없는 소리에도 동화책의 제목과 판권을 가진 출판사까지 주르륵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그러자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호수 표면에 떨어진 것처럼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어머니가 제가 있던 고아원에 봉사하러 오셨을 , 처음으로 읽어 주신 책이었어요.

라일은 순간 아무 말도 없었다. 덤덤하게 말문을 해진에게 그저 하염없이 눈길만을 보낼 .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해진의 페로몬에는 슬픈 감정이 여과 없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슬픔이 온몸을 매섭게 두드렸다. 그런데도 페로몬 온도가 따듯해서 라일은 더더욱 아픔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와인을 들어 모금 삼켰다. 해진은 달다고 연신 넘기던 와인인데 어쩐지 맛이 무척이나 썼다.

“금방 오실 알았거든요. 많이들 그러니까.

무릎에 있던 지갑을 들어 올린 해진이 마치 사진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내쉬는 숨조차 조심하면서 라일은 그런 해진을 관찰했다.

금방 발그레해진 볼이 오랜만에 해진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기껏 책을 와서 읽어 주시는데 집중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어머니가 떠나고 나니 너무 아쉬워서 혼자 그걸 읽었어요.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숨결이 가까이에 있는 피부부터 차근히 그에게 파란을 일으켰다. 처음 동화책 이야기를 꺼낼 , 어릴 적에 무척 오랜 시간을 두고 읽었다고 말한 라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해진이 지금 원하는 속에 쌓인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이라는 무의식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무렵 어머니는 다시 고아원에 봉사하러 돌아오셨어요. 저를 입양할 때까지, 동안이나.

다만 라일은 제어할 겨를 없이 흘러 나가는 페로몬을 막지 못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지 그는 도통 없었다.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해진의 햇살 같은 페로몬에 반응하듯 라일의 페로몬 또한 응접실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말하는 녀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존재감을 지우고 싶었는데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계속 잊고 있었는데 서재에 입구에 마침 꽂혀 있어서, ……신기했어요.

그걸 해진도 똑똑히 느끼고 있을 텐데 그는 별말 없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녀석이 동화책들은 아마 어린 라일을 위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정작 그는 동화책에는 금방 흥미를 잃고 보지 않았는데도.

“…….”

침묵하는 그를 두고 해진은 뒤로도 한참이나 말을 이어 갔다. 동화책의 내용도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기도 했다. 혼자 아무 말이나 마구 떠드는 생각보다 쉬웠다. 응접실에서 대화를 시작한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익숙해져 버린 것처럼.

평소라면 이러지 말아야지, 스스로를 제어했을 텐데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뱃속부터 따스한 기운이 올라와 머리가 조금씩 멍해진다. 계속 마시게 되는 와인은 다디달아서 자꾸만 갈증이 나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라일의 페로몬이 진하게 느껴졌지만, 또한 괜찮았다. 생각보다도 그의 페로몬이 불쾌하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 발현하고 만난 모든 알파의 페로몬은 거칠고 역겨워서 꺼렸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진은, 라일이 무섭긴 했어도 그의 페로몬까지 그렇게 느낀 적은 없었다는 문득 상기해냈다. 애초에 그의 페로몬은 느낄 일이 거의 없던 탓이리라.

이따금 느껴지는 페로몬도 묵직하다는 감상은 있었지만 불쾌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상성이 좋다는 소리가 거짓이 아니기라도 것처럼. 그래서 지금 무척이나 따사로운 기운을 품은 라일의 페로몬이 괜찮다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다. 와인을 너무 빨리 마시는 바람에 취했나 보다.

***

다음 아침, 해진은 모처럼 형을 절절하게도 떠올려야 했다. 숙취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던 형이, 그리도 술을 먹은 다음 괴로워했는지 실감할 있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들어 올리면 금방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라도 하는 같았다. 그가 정신적인 문제로 느끼던 울렁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몸의 괴로움까지 동반한 어지러움이라 힘들었다. 어디가 분명 아프고 힘든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없는 이상한 상태였다. 마치 생각과는 사뭇 달랐던 와인의 맛처럼.

와인을 떠올리니 갑자기 속이 울렁인다.

“진. ……괜찮아?

“으…….

해진은 체면도 거리감도 잊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요동치는 페로몬은 마치 취한 사람처럼 침대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모습을 지켜보면서 라일은 안절부절못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자며 그를 깨울 생각이었는데 안에서 들리는 신음성에 놀라서 뛰쳐 들어온 참이었다.

마크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금방 숙취에 좋은 음식들을 들고 달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라일은 어제 잔을 달라는 해진의 말을 거부하지 못한 자신을 거세게 나무랐다. 고작 와인 잔이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것이 분명하다. 마크 또한 이런 해진의 상태를 보고 모처럼 여유가 없는 얼굴로 침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67

“뭘 넘기실 있겠습니까. 토마토 주스를 드시면 나을 겁니다.

간청하는 목소리에 해진은 가까스로 시선을 빙글 돌렸다. 창백해진 얼굴은 보통 때보다도 처연한 인상을 주었다. 살짝 땀에 흐트러진 녀석의 앞머리를 보고 라일은 거센 충동을 느꼈다. 이윽고 이런 충동을 느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지만.

“안 되겠어, 의사를 불러.

“네, 도련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해진은 사태를 파악했다. 몸이 생각보다도 너무 아파서 덜컥 무섭긴 했으나 정황상 그냥 숙취인 같았다. 아침부터 의사라니 부담스러워서 마음이 불편하다.

“괜찮…….

“진. 금방 의사가 거야. 혹시 모르니까, ?

습관처럼 거부하려는데 라일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파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해진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침묵했다.

본능이 위기감을 느꼈다. 라일이 저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렇게 따듯하다 못해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을 정도로 자상한 페로몬을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습니다. 도련님, 내려가서 준비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마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여 해진이 의사를 보기만 해도 발작을 할까 그는 매번 의사가 방문할 때마다 먼저 내려가 세심하게 준비를 시켰다.

또한 이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있지도 않은 할아버지를 연상시킬 만한 자상한 태도를 그만두어 줬으면.

“그렇게 .

대답하면서도 라일은 내내 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이라도 깜빡일라치면 그의 주변에 몰려든 페로몬이 파도를 맞은 울렁였다.

제발, 이러지 않았으면.

“힘들면 그냥 잠들도록 . 일어나면 괜찮아질 테니.

일그러진 해진의 얼굴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라일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마크가 나가자 이번엔 사용인 하나가 물수건을 만들어 가져왔다. 사용인도 그걸 침대맡에 놓으면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해진을 바라보는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물수건을 받아 라일이 머뭇거리면서도 꿋꿋하게 해진의 이마를 닦아내었다. 사뭇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약간 차가운 물기가 닿으니 머리가 겨우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간, 해진은 그간 느꼈던 석연치 않던 감정이 무언지 알아내고 말았다.

어느덧 이들의 자연스러운 온기에 기대고 마는 자신이 불편했다.

어설프고 멍청한 짓이었다. 흔적도 없이 저택을 나가자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를 둘러싼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무의식중에 기대 버리고 마는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웠다.

겨우 몸에 힘을 주어 물수건을 밀어냈다. 그런데도 라일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그만두질 않았다. 이렇게 자꾸 저를 흔드는 그가 거북했다. 서러울 정도로.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래서 해진은 잠으로 도망치는 택했다.

***

며칠이 흘러 드디어 깁스를 풀어내는 날이 다가왔다.

한쪽에 무거운 달고 다니는 생각보다도 불편한 일이었다. 예상보다 오래 하게 깁스 때문에 매번 목욕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사용인들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그건 해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더는 기대고 싶지 않다는 의지 말이다.

“가지.

“…….”

자연스럽게 해진의 병원에 동행하려는 라일을 보면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자꾸 따라오는 의아한 마음보다, 같이 차를 타고 무의식중에 알고 있던 스스로에게 놀랐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에 슬쩍 시선마저 돌렸으나 라일은 꿋꿋하게 그의 근처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부축을 주고 싶다는 듯이.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해진은 슬쩍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많이 길어서 다듬을 때가 되었다. 저번에는 마크가 도와줬으니 다시 부탁을 봐야겠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던 해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지?

거의 틈도 없이 흘러나온 라일의 질문에 해진은 무심코 시선을 마주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니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걸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기에 해진은 그냥 다시 앞으로 걷는 택했다. 깁스가 이상하게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라일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진료가 끝나면 가고 싶은 곳은 없나?

“……가고 싶은 곳이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묻는 걸까. 억지로 의심을 자아내면서 해진은 라일을 바라보았다. 숨겨 의도 같은 찾고 싶어서.

“깁스를 풀면 아무래도, 돌아다니기 편해지니까.

그러나 그가 찾은 그의 페로몬뿐이었다. 그것도 한없이 부드러워 피부에 닿을 즈음엔 사르르 흩어지고 마는 이상한. 해진이 그걸 눈치챈 순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단단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내색하지 않고 곁에서 차를 향해 걸었다. 걸음이 깁스를 자신이 따라가기 벅차지 않을 정도로 느리다는 해진은 문득 깨달았다.

페로몬은 빠짐없이 갈무리되었으나 잔향이 남았다. 숲을 닮은 페로몬이 최근 들어 자주 느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파인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제어를 잘하던 사람이, 마치 그게 힘들어졌다는 것처럼.

“진?

이상함을 느낀 해진이 이번엔 조급하게 라일의 눈을 마주했다. 일부러 집요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그를 관찰한다. 그러자 다시 코끝에 희미하게 라일의 페로몬이 스쳤다.

또다. 이렇게, 따스한 페로몬을.

“……호수가 보고 싶어요.

그래서 해진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분명 불필요한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을 텐데 막을 겨를도 없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호수?

“네.

뜻밖의 장소가 나왔지만 라일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호수인지 솟아오르는 의아함은 자연스럽게 내리누르면서.

***

“급히 오느라 사람들을 전부 통제하진 못했어.

“……통제요?

“응. 우리 가문 소유인데, 보통 때는 개방해 두는 편이라.

그게 못내 미안하다는 구는 라일의 말투에 해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역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좋지 않았다. 이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막대한 경호 인력을 보면서 뭔가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을 떠올렸을 무렵이었다. 여기가 베르무스의 소유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눈앞의 호수는 절경이었다. 그도 헤비레인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를 익히 알고는 있었다. 찾아오는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베르무스의 소유였다니.

잔잔하고 넓은 호수는 빠짐없이 관리된 모습이었다. 가운데에는 줄기 인공 분수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호수를 따라 걸을 있도록 산책로도 정갈하게 정비된 모습이었다. 곳도 없이 깨끗한 잔디밭 위에는 사람들이 피크닉 매트를 펴고 누워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호수보다 훨씬 관리되고 좋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드나?

“예쁘네요.

“…….”

해진의 대답은 사뭇 시큰둥했다.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으나 미처 가리지 못한 페로몬에는 관심 없다는 티가 났다. 그걸 보고 초조함을 내리누르는 이제는 라일에게 익숙한 행위였다.

와인을 마신 이후 해진이 조금 이상했다. 본래도 무뚝뚝하게 굴긴 했으나 유독 페로몬이 거칠고 불안정해 보인다. 온실에서 식사하자는 제안도 번이나 거절당했다. 평범하게 식당에 가는 거부하지 않아서 주의 깊게 식사량을 살피고 있었다.

라일에게라면 얼마든지 그럴 있으나 지내던 마크나 사용인들과도 서먹해졌다고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저택의 모든 CCTV 확인했으나 이상한 행동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변화는 아마도 해진이 만들어 것이리라.

그게 저택에 있는 모든 것에게 정을 붙이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라서 갈급함이 들었다.

그나저나 호수를 좋아하는 걸까. 지금 호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무감각하였으나 이곳을 말한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차차 호수를 매입해야 할지 라일은 신중하게 고민에 빠졌다.

“회장님.

그때 주변 통제에 나섰던 경호원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역시 완벽하게 이목을 가리기는 힘들 듯했다. 이곳은 베르무스의 사유지이긴 해도 사회 환원 차원에서 일반 시민에게 개방해 두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시간이 조금 있었다면 완벽하게 주변을 통제했을 텐데.

모처럼 해진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해서 마음이 못내 다급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몰려든 인파를 보니 경솔한 자신이 이리도 어리석을 없었다.

경호원들이 근처에서 사진을 찍게 하고 있지만, 이목이 쏠리는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괜히 해진의 얼굴이 매스컴에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는 다시 뒤쪽의 경호원에게 눈짓해서 해진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릴 있도록 지시했다.

“진. 이걸 착용하는 편이 좋겠어.

경호원이 같이 가져온 선글라스와 모자를 해진에게 내밀었다. 라일의 옆에 있던 사람이라는 알게 되면 해진이 곤란해질 것이다. 녀석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해진의 얼굴이 방송을 탄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속이 뒤집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68

“이건…….

손에 들린 선글라스나 모자를 조금 어색하게 바라보던 해진은 이내 군말 없이 그것을 착용했다. 그래도 아까부터 몰려드는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호수에 혼자 온다는 선택지가 있었을 터다. 그러나 막상 호수에 오고 싶다고 말할 해진은 라일이 같이 가는 자리라는 분명 인식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스며들어 버린 것처럼.

“불편해도, 잠깐만 참아.

“…….”

말없이 모자를 눌러쓰는 해진의 머리칼이 조금 길어진 보였다. 저도 모르게 뒷덜미에 삐죽 나온 머리카락으로 향하던 라일의 손이 가까스로 닿기 전에 멈췄다.

그러나 시선은 하염없이 아직도 훤히 드러난 녀석의 하얀 목덜미에 머물렀다. 날씨에 맞는 두꺼운 옷을 입은 해진이었으나 무언가 허전해 보여서 참기 힘들었다.

“이것도 두르는 좋겠어.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목에 걸쳐 두기만 했던 목도리를 풀어냈다. 코트 안쪽에 길게 늘어트려 두었던 것이었다.

“…….”

얇은 목도리를 보며 해진은 짧게 고뇌했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민다. 얼굴을 최대한 노출하고 싶지 않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민 손이 무색하게 라일은 직접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바로 후회가 덜컥 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사정없이 피부에 들러붙었다. 코까지 목도리에 파묻히니 라일의 페로몬 내음이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저택에 가자마자 돌려드릴게요.

거의 발작하는 것처럼 해진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요.

딱딱하게 굳은 말투가 귀에 박혔다. 얼굴을 거의 가려 버린 탓에 해진이 무슨 표정인지는 라일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막대한 거부감을 띠고 있었다.

저택에는 해진의 물건이 많았다. 그러나 라일은 해진이 그것을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았다. 조금이라도 받지 않기 위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보면 있었다.

그게 전부 저택에는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 같아서 라일은 통증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

무례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가 튀어 나갔으나 라일은 개의치 않고 대답한다. 오히려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의 목도리를 정돈해 주기까지 했다.

해진은 얼굴이 전부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괜히 마른침을 삼키면서 해진은 호숫가에 주저앉았다. 그들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서는 기운이 올라왔다. 무언가 준비할 있었는지 라일이 옆에서 머뭇거리는 보였으나 그냥 무시했다.

고개를 슬쩍 아래로 숙이니 호수 표면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라일은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은 그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해진이라고 이러한 대접들이 편하지 않은 아니었다. 오히려 설움으로 자아낸 지난 5년을 떠올리면 햇살 같은 시간이라는 부정할 없었다.

사람들의 온정에는 굶주린 자신이었다. 이토록 쉽게 스며들 알면서도 진작 어떻게든 저택을 빠져나오지 않은 잘못이었다.

인생에서 없는 따스한 환경이었다. 그를 빠짐없이 사랑으로 감싸 가족들, 저택의 다른 이들.

“추우면 말해.

그리고 라일.

그는 이러면 되는 사람이었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라일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해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쑥 거부감이 올라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주하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이러면 되는 건데.

그래서 해진은 계속 호수에만 시선을 던졌다. 인공적인 내음이 물씬 나는 잔잔한 물결을 보며 생각을 거듭한다.

괜찮다고. 어차피 이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깊은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제대로 사회 경험도 없는 해진은 그런대로 얄팍한 방법으로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다.

“…….”

“…….”

뒤로 둘은 한참이나 말없이 호수 물결에만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해진의 시선은 줄곧 호수를 향했고 라일의 시선은 다른 곳을 맴돌다가도 끝내 해진의 얼굴로 머물렀다.

수면에 반사된 햇살이 이상하게 해진에게만 잔뜩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찬란한 광경을 대놓고 바라볼 수는 없어서 라일은 겨우겨우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느라 필사적이었다.

그럼에도 라일의 시선은 이따금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을 쫓았다. 그다음엔 까딱거리는 그의 발끝으로 향했다. 깁스가 없어 한껏 가벼워 보이는 발끝이 움찔움찔 잔디 위를 노닐었다.

다시 호수까지 바퀴 돌고 돌아 해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라일은 새로운 사실을 자각했다. 녀석이 이렇게 예쁜 얼굴이었던가.

***

여느 때처럼 라일의 아침은 분주했다. 자신의 출근 준비도 있지만, 해진의 일과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접 가서 챙길 있다면 수월했겠으나 마크나 다른 사용인을 통해야 했기에 번거로웠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고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저 녀석이 거부감을 느끼고 도망치고 싶어질까 조심할 뿐이었다.

그래서 해진이 눈을 뜨기도 전인 이른 아침. 그는 조용히 녀석의 옷방으로 사용되는 곳에 들어갔다.

녀석의 옷에 대한 기호 파악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은 깁스를 채로도 편한 위주로 골라 줘야 했기에 그나마 선택지가 적었으나 오늘은 다르다. 깁스를 풀고 입는 옷이니 무엇을 골라 두는 편이 좋을지 라일은 어젯밤부터 고심했다.

생각할수록 호수에서 바라본 녀석의 찬란한 얼굴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 해진이 얼굴을 온갖 방법으로 가리고 있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의아할 따름이지만.

그러나 옷방에 들어서자마자 라일은 걸음을 우뚝 멈춰야 했다.

“…….”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구석에 낡은 캐리어가 곱게 싸여 있었다. 그가 지시해서 뒀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낡고 중저가 모델인 캐리어에는 어린아이가 붙일 법한 유치한 스티커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녀석에 관한 모든 일에 예민한 라일은 캐리어 근처에 놓여 있던 물건도 사라졌다는 눈치챘다. 분명 해진의 개인 물품들이 쓰기 편하게 이곳저곳에 있었는데.

“어젯밤 늦게 짐을 챙겨 두셨습니다.

“…….”

그를 보좌하려고 같이 들어선 마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일은 불이라도 캐리어에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짐을 쌌지. 밤늦게까지 해진에게 입힐 옷을 고심해 두길 다행이었다. 낡은 캐리어를 순간 라일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어졌으니까.

***

“다니엘 베르무스 님께서 약속을 잡기 위해 비서실로 연락을 넣으셨습니다.

“용건은?

“이번 합병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데, 정확히는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후…….

숙부는 드디어 미리 약속을 잡아야 그를 만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했다. 번이나 경호원에 의해 건물 밖으로 ‘모셔진’ 끝에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멋대로인 여전했다. 숙부는 그의 후견인으로 잠깐 활동했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라일을 어린 조카를 대하듯 편하게 굴었다. 그가 자리에서 직접 숙부를 끌어내려 한직에 박아 후에도 말이다. 어쩌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겠지.

“언제 시간이 비지. 최대한 짧게 잡아.

“오늘 오후에도 잠깐 시간이 비긴 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때로 잡고, 경호팀 대기시켜 .

“알겠습니다.

비서는 바로 들고 있는 태블릿을 조작했다. 밖에 있는 비서팀에게 일정을 하달하기 위해서다. 미간을 문지른 라일은 다시 서류에 집중하려 했다.

검은 글씨를 때마다 해진 생각이 난다.

“…….”

순간 심장 부근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 흉통이었다. 의아하게 그곳을 한번 바라보았던 라일은 의자에 기대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글씨가 부옇게 흔들거렸다.

“…….”

애써 무시하며 눈썹 위쪽을 슬쩍 문지르는 순간 해진의 낡은 트렁크가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윽.

라일은 순간적으로 치미는 통증에 잇새로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실제로 머리를 맞았어도 이런 통증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전체가 쪼개지는 느낌에 그는 허리를 꺾으며 바닥으로 서류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회장님?

“문 닫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던 비서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서슬 퍼런 음성에 재빨리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다급하게 달려온 비서가 라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분명 멀쩡하던 회장이었는데 잠깐 뒤돈 사이에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아니.

굳이 의사를 보지 않아도 라일은 두통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익숙하게 감내해 오던 페로몬 체증이 조금 가혹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해진이 떠날 준비를 해서, 그랬을 뿐이다.

다시 트렁크의 잔상이 지나가자 라일은 한쪽 이마를 짚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익숙하게 숨기곤 했던 통증이 오늘만큼은 도무지 숨길 수가 없다.

“회장님! 병원 이목을 가려 두겠습니다, 당장…….

“저택으로 가지.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어차피 해진의 페로몬이 충분히 그의 곁에 있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의사에게 가도 처방은 하나일 테니 저택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만큼 해진이 곁에 있어 주진 않을지라도.

              

#69

“저택으로 가면 . 오후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건강 문제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 잘해.

“……알겠습니다. 바로 대기시키겠습니다. 나오시기 호출해 주세요.

애써 평정을 가장한 비서가 태연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라일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적어도 외부에 나지 않을 정도로 아픔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저택에 가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통증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

어떤 정신으로 저택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저택에 닿아 해진의 페로몬을 느낀 순간 조금 만해졌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라일이 만들어 환상에 가까운 잔향이었다. 그래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여 방으로 향했다. 침실로 바로 들어갈 있지만, 일부러 녀석의 방과 맞닿은 응접실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해진이 이곳에 남긴 자취를 느끼고 싶어서.

그러나 뜻밖에도 응접실에는 해진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면 보통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기에 라일은 종을 울리지 않았다.

“베르무스 ?

“……진, 여기 있었군.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종도 종이지만 그가 저택에 돌아왔다는 사실도 미처 알리지 못했다. 비서도 그도 몰려드는 이목부터 처리하기 위해 바빴던 탓이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해진을 보며 그는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통증이 심한 상황에서 해진이 그에게 거부감이라도 나타내면, 정말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페로몬의 잔향이라도 모으려는 추잡한 짓은 그만두고 빠르게 침실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해진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은 것은.

“어디 아프십니까?

“……조금.

거짓말은 수가 없었다. 그냥 그의 본성에는 이제 해진에게 무언가를 가릴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각인의 무서움을 새삼 뼈저리게 느끼면서 라일은 녀석의 안색을 살폈다.

의사의 말대로 무언가 이상한 눈치챈 아닐까.

“페로몬 체증입니까?

“그래.

다행스럽게도 해진은 그간 계속 보아 왔던 증상을 떠올렸다. 두통이 심해지면 예민해지는 라일을 저택에서 제일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페로몬 샤워를 지금 드릴까요.

“……괜찮겠나?

“네.

오히려 해진은 저렇게 눈치 보듯 구는 라일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 뒤면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아파서 저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해야 조금 당기는 문제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무언가 잘못이라도 하는 얼굴로 주춤주춤 그의 맞은편 의자로 다가왔다. 가까이 보니 안색이 더욱 엉망이었다. 무심코 이렇게 권할 만큼.

“……이쪽에 누워 계시죠. 어차피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데.

“…….”

해진이 가리킨 가까운 소파는 기다란 모양이었다. 사람 넷은 거뜬히 앉을 만큼.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통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직 세상에서 라일에게만 진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이 걱정을 조금 담고 있어서였다.

라일은 함부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해진이 걱정하는 대상은 분명 그가 아니리라. 그의 페로몬 체증이 심화하면 위협받을지도 모르는 스스로를 걱정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페로몬은 많은 뉘앙스와 감정을 담지만, 속내를 전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몸이 축난 사실이었기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저 발짝이라도 해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욕망껏 해진에게 가까운 쪽으로 머리를 뉘었으나 녀석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병원은 가셔도 되는 겁니까?

“이미 처방은 받았어.

“아…….

이제 보니 테이블 위에는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의자가 필요해서 응접실에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일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슨 책인지 살폈다. 녀석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그러나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부옇게 흐려진 글씨가 해진의 속내 같았다.

평소라면 능력껏 이성을 챙겼을 텐데 오늘따라 더욱 힘들었다. 진짜로 감정에 휘둘리기라도 하는 각인한 몸이 자꾸만 해진을 향한다.

그래서 라일은 마치 한숨처럼 욕심이 밖으로까지 튀어 나가는 제어하지 못했다.

“네 얘기를 .

뜻대로 되지 않는 때문에 답답한 속내가 잔뜩 꼬여 진창을 만들었다. 비가 잔뜩 정원 같은 바닥이었다. 그곳에서 라일은 질척거리는 걸음을 내디딘다. 어떻게든 해진에게 가까이 가려고.

다만 이성은 자꾸만 제자리에 멈춰 서려고 했다. 본능을 거스르고 정도만 하려고. 그건 추한 모습이었기에 해진이 금방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같았다. 그러면 깨질 듯한 두통이 그를 엄습한다.

결국 라일은 누워서 눈이 부시다는 듯이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려 버렸다.

행동이 정말 좋아 보이긴 했는지 녀석은 그냥 의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시야가 가려진 덕에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제 얘기를요?

“그래. 아무거나.

해진은 객관적으로 주제를 주워섬기는 척했으나 라일은 속에 녀석의 기호가 녹아 있음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겉으로 내지는 못해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 말들을 때면 해진의 페로몬이 살짝 변하곤 했기에 알아차릴 있었다. 열성에 조절도 미숙한 해진의 페로몬이지만 라일은 그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기민하게 파악할 있었다.

전부 각인 탓이다.

“으음…….

갑자기 대화를 시작하게 해진은 조금 곤란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라일이 팔로 얼굴을 가린 덕에 편하게 시선을 돌리기 좋았다.

누워 있는 그의 장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넉넉하고 소파가 그가 누우니 키에 맞춘 듯이 들어찼다. 회사에 때는 빈틈없는 차림인 그는 오늘도 완벽한 외양이었다.

다만 오늘따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과 초췌한 안색이 눈에 띄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해진이 이번에는 들고 있던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료한 나머지 서재에 가서 아무거나 뽑아 것이었다. 서재는 라일이 번이나 가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전에 갔던 곳보다도 훨씬 규모가 방대했다.

하필 뽑아 책은 흔한 연애물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서로의 운명을 찾아낸 이들이 졸업 파티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걸 참고 계속 읽은 다름이 아니었다. 주인공 하나인 교내 최고의 킹카가 그의 형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우상이었던 자랑스러운 .

“형은 학교에서 엄청난 유명인사였어요.

“…….”

라일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가 해진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있었다. 이곳에서 기묘한 대화를 시작한 뒤로 그는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해진의 페로몬에 집중하느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분명 해진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물건들이 새로 생겨나거나 바뀌거나 하지도 않았다.

마디 말을 하면 겨우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할 뿐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심으로 그의 태도를 설명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도 해진은 그가 말에 기울이고 있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있었다.

그간 라일의 무관심에 차갑게 아팠던 해진에게는 아이러니한 심정이 아닐 없었다. 과거의 그에게 머지않은 미래에 라일이 이토록 그에게 집중해 것이라고 말한다면 분명 믿지 못했을 터다.

“미식축구팀 주장도 하고, 성적도 우수하고. 형을 보면 하이틴 로맨스물의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죠.

그걸 알면서도 해진은 안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익숙해지고 말았다. 슬프게도 해진에게는 이제 붙잡고 가족의 추억을 논할 사람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의 햇살 같은 가족들을 기억해 주는 이가 없다는 조금 서글펐다. 누군가는 간혹 친절했던 브라이트 가족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역시 정도로는 부족했다.

물론 대상이 하필 라일이 역시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라면 이렇게 해진의 말을 들어 줘야 의무가 있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단순히 가족의 이야기를 핑계가 필요해서 이런 합리화까지 하는 걸까. 그저 누군가를 붙잡고 속에 쌓인 추억을 토해내고 싶어서.

“원래라면 저도 여러 차별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형의 동생이라서 다들 친절하긴 했죠.

한번 물꼬를 트니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이런 상태를 보며 해진은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분명 없는 있다가 저택을 나가자고 호수를 보며 다짐했는데.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달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모든 것에는 깊은 의미가 없으리라.

오히려 떠날 곳이니 마음껏 쏟아내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그를 지배한다. 희미하게 흐르는 라일의 페로몬이 너무 따듯해서 이런 제멋대로의 생각에 면죄부라도 주는 같았다.

“형이 제가 인종차별을 받을까 엄청나게 챙겨서, 적어도 앞에서 이상하게 구는 사람은 없었네요.

오히려 그런 형의 극성 때문에 해진은 깊게 교류할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입양된 직후에는 자신의 존재가 형에게 누가 될까 초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뒤로는 그럭저럭 웃으면서 다닐 있었으나 여전히 마음이 맞는 친구는 찾지 못했으니 끝내 적응하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체구도 작은 동양인 입양아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을 해진은 경계하지 않을 없었다. 형과는 다르게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70

#70

“제가 적응을 해서 형은 저를 졸업 파티에도 데려갔죠. 자기가 졸업하기 전에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그리움을 담은 페로몬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여태껏 해진이 보여준 가장 편안하고 밝은 페로몬이었다. 덕분에 라일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부유감을 느껴야 했다. 녀석은 한참이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렇게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처음이라서 라일은 내쉬는 숨조차 조심했다.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 팔을 올린 자세가 문득 후회되었다. 눈을 드러내고 있었으면 그래도 해진이 어떤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훔쳐볼 있었을 텐데.

“여자친구라도 사귀라면서 억지로 끌고 갔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곳이었어요.

그러나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라일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해진은 거의 평생을 베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여자친구라는 소리가 그래서 더욱더 이성적인 뉘앙스로 다가왔다. 그런 단어가 해진의 입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뱃속이 잔뜩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위장이 전부 녹아내려 속에 생겨난 진창으로 흡수될 것만 같았다.

녀석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라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원하던 얼굴은 훔쳐보지 못했다. 해진은 갑자기 움직이는 그를 그저 놀란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런데도 동그랗게 변한 녀석의 눈을 홀린 바라보게 되었다.

“네 키스는 누구였지.

졸업 파티와 여자친구.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라일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해진이 동경했다고 말하던 형의 학교생활은 라일의 생활하고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혈기 왕성한 개새끼들이 넘쳐나는 학교 파티 소리를 듣자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고작 두통이 조금 심하다고 자제심이라는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감히 질투 따위를 이유가 없는데도 순간 그게 궁금해서 입을 열고 말았다. 그걸 들으면 자제심을 잃은 몸뚱이가 어찌 반응할지 없는데도.

그러나 그의 말에 해진은 한껏 당황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그건…….

곤란한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을 따라 라일의 심장도 떨어졌다. 이를 악문 그는 흙투성이가 심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짓밟고 싶었다. 멍청한 행동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서둘러 수습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쉽지 않았다. 요동치는 페로몬을 겨우겨우 제어해 본다.

“아니, 질문은 잊어.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

“……그게 아니고, 번도 봐서요.

그러나 눈가를 찡그린 해진이 대답한 예상 이상의 답변이었다.

“……한 번도?

“하필 졸업 파티 직전에 발현해서, 정작 파티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저번에 와인이 아니라 자체를 처음 먹는다고 했을 놀라움을 표현했던 라일이었다. 그래서 해진은 이번 질문도 그런 놀라움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형의 노력에도 여자친구는커녕 친구조차 제대로 사귀지 못했던 해진이었다. 애초에 친구라는 그런 식의 과보호로 생겨나는 아니었다. 게다가 체구가 작은 편인 해진은 베타 여성에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괜히 변명이라도 하듯 말하고 나니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왔다. 키스도 부끄러웠던 건지 괜한 변명이 부끄러운 건지 헷갈린다.

어쨌든 해진은 고개를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할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라일이 형과 똑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욱하고 말았다.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갑작스러운 발현 때문에 일생에서 번뿐인 졸업 파티를 가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가족들은 많은 위로를 주려고 애썼다.

사고가 날의 외식도 위로의 연장선이었다.

“…….”

해진의 오해와는 다르게 라일이 그걸 재차 물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분명 해진이 약에 당해 겪었던 히트 사이클 , 그들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도 경험이 없다니.

반사적으로 라일은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험한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로 총으로 머리를 쏴야 이렇게 멍청하게 굴기를 그만둘 건지 의아했다.

아무래도 해진은 히트 사이클 때의 기억이 별로 없는 듯했다. 녀석의 페로몬에 취한 자신이 얼마나 짐승같이 녀석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는지 라일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거다.

아니, 기억은 해도 저렇게 말할 있지 않은가. 그건 녀석에게 낭만적인 키스 따위가 아니었을 테니 얼마든지 없는 일로 있다.

불쑥 튀어 오르는 가정에 라일은 대신 싸늘한 비가 몸에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아까 통증이 있던 가슴 부근에서는 재차 통증이 일었다. 욱신거리는 감각을 내버려 라일은 계속 입을 가린 뻣뻣하게 굳어 있어야 했다.

그래. 녀석에게 그건 기억하고 있든 말든 전부 상관없는 일이리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경험이었을 테니.

“그렇군.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는 한참 뒤에나 겨우 덤덤하게 대답할 있었다.

***

긍정적인 페로몬이 효과적이라는 의사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어제 그렇게 목을 조르고 싶은 대화를 했는데도 상태가 괜찮아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일은 오전을 무리 없이 보낼 있었다. 어제 오후 일정이 통째로 사라진 덕에 밀린 일이 산적해 있었다. 비서실에서는 회장이 갑자기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사라진 일에 대해 의아해하는 눈초리였으나 적당히 무마해 두었다.

다만 하필 어제 그렇게 통증을 느끼기 직전에 다니엘 숙부와 약속을 잡아 실책이었다. 라일은 어설프게 무언가를 변명하는 대신 그냥 빠르게 다시 일정을 잡는 택했다. 귀찮게 그의 상태에 대해 냄새를 맡으면 곤란해진다.

통보에 가까운 연락에도 라일을 보러 와야 했던 다니엘 베르무스는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크흠. 어제는 그렇게 갑자기 약속을 취소한 게냐.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뿐입니다. 자료는 준비해 오셨습니까?

뭔가 낌새를 읽으려는 눈치를 살피는 숙부를 그는 덤덤히 마주 보았다. 저렇게 탐색하는 눈으로 본다 한들 그의 상태를 짐작할 없으리라. 일단 겉보기에 라일은 한결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실속 없는 실랑이를 끝에야 다니엘 숙부는 돌아갔다. 대체 언제 영광을 저리 잊고 설쳐 대는 건지 라일은 도무지 이해할 없었다. 심지어 다니엘이 생각하는 ‘영광’이란 결국 그의 아버지가 죽으며 잽싸게 가로챈 것이 아니던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가 씩씩대며 집무실을 나가는 라일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조만간 베르무스의 성씨 하나 믿고 덤비는 이들은 전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래도 해진의 일로 머리가 정신없는데 거슬리는 정도가 지나치다.

“후…….

앉아 있던 소파에 길게 기대니 환한 조명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라일은 빛나는 것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해진을 떠올렸다. 호수 표면의 반짝이는 파란이 녀석의 얼굴에서 일렁이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출근 직후부터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어느덧 오후 시간이었다. 연말이 다가와서 온갖 결산 문제가 올라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야근을 하더라도 일을 처리했을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저택에 돌아가고 싶어서.

다시 깨질 듯한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다니엘 숙부 앞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에게 이런 고질적인 건강 문제가 있다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되니까.

잠깐 고개를 숙인 안의 통증을 다스리던 라일이 이내 마음을 굳혔다. 아무래도 오늘도 일찍 저택에 돌아가야 같다.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외부로 고통을 표출할 만한 일이 생기면 되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예방 차원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변명을 주워섬기면서 라일은 애써 외면했다. 그저, 해진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자신이 이리도 서두른다는 .

***

“윽…….

“브라이트 . 처음부터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해진은 안뜰에 마련된 작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길을 깔았는지 발에 채는 하나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길이었다.

의사는 깁스를 풀었으니 이제 재활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창하게 없고 그저 조심스럽게 산책을 주기적으로 하라고 했다. 저택 건물 안이라도 걸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해진에게 마크가 이런 곳이 있다며 알려주었다.

마치 그가 이런 재활 운동이 필요할 알고 만들어 두기라도 같은 길이었다. 안뜰을 여러 다녀갔는데 이런 곳이 있었나 생각하던 해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지금 저택 내외부가 온통 번잡했다. 공사를 하는 김에 이런 길을 하나 만든다고 해서 이상할 없었다.

그렇게 한참 손에는 목발을 들고 걷는데 앞에서 구둣발 소리가 났다.

“도련님이 오셨군요.

라일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미리 연락을 주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해진은 소식을 알려주는 마크에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가 집에 돌아오는 이렇게 매번 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은 의연하게 삼켜냈다. 매일 저녁 응접실에서 만나고 있으니 알아 두라는 차원인가 싶기도 했고.

그래도 발을 제대로 디디는 힘에 부쳐서 해진은 가만히 채로 다가오는 라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이라도 있는 서두르는 걸음걸이로 곧장 해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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