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71-80

#71

“최종본 팀장님한테 무사히 보냈죠?

“네, 방금 메일 확인 하셨네요.

“어휴, 우리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 남은 팀장님께 맡겨 보자.

차태주의 개인 오피스에서 나와서 자리로 돌아갔을 때에는 급한 일이 수습되는 분위기였다. 아침부터 떨어졌다는 ‘폭탄’이 대강 해결된 모양이었다. 피곤한 기색으로 기지개를 켜는 팀원들은 다들 기가 빨리는지 초췌한 얼굴이었다.

“급한 이슈가 터져서 아침에 챙기지를 못했네. 우주 , 안녕하세요. 저는 민선재 차장입니다.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이제 슬슬 관심이 주어졌다. 민선재 차장을 시작으로 대여섯 되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팀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는데, 주로 삼십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팀원들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예리한 인상이었다.

“윤혜영 대리입니다. 반가워요, 우주 . 앞으로 업무 관련해서는 주로 저랑 소통하시면 돼요.

“안녕하세요 대리님! 그러잖아도 아까 팀장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아, 우주 방금 팀장님 방에 다녀오신 거구나.

“면접할 때도 팀장님이 우주 씨가 되게 인상 깊으셨나 봐요. 우주 씨를 뽑아야 한다고 완고하셔서.

윤혜영 대리와 가볍게 악수하는데, 팀장님과 먼저 이야기했다는 말에 팀원들이 조금 신기하다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아무래도 다른 팀원들은 나를 뽑기로 차태주의 결정을 100% 반기지는 않았던 듯했다.

“네, 제가 도와드릴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 주세요!

“그래요, 우리 입장에서도 우주 인풋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니까, 의견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해요.

“맞아요,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래도 우리 팀이 그런 면에 있어서는 나름 수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차태주 팀장님부터가 파벌이나 정치, 이런 질색하시는 철저한 능력주의자라. 직급보다는 개인 역량을 중요하게 보시기도 하고요.

“어우, 우리 팀장님 명언이 있지? ‘나는 세상에서 무능함과 변명을 가장 싫어합니다.’”

“하하. 좋은 건지 좋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만 잘하면 우주 씨도 팀장님한테 밉보일 일은 없을 겁니다.

팀원이 나누는 대화를 보며 차태주가 어떤 사람인지와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있었다. 면접을 때도 느꼈지만, 기본적으로 업무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은 팀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팀장님이 뼈도 추릴 정도로 빡세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어설프게 차태주 성대모사까지 하는 팀원들을 보면, 차태주 역시 권위적으로 무작정 아랫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혹시 제가 특별히 조심해야 거라도 있을까요?

“어디 보자, 우리 팀장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말귀 번에 알아먹는 사람?

김지원 과장의 말이 끝나자 다들 약속이라도 듯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서로를 흘겨보는 , 만하다는 얼굴이었다. 팀원들 역시 한눈에도 똑똑해 보이는 인상인데, 다들 차태주한테 당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우주 씨는 인턴이기도 하고, 빠릿빠릿하게만 하면 큰일 없을 거예요.

‘빠릿빠릿하게만 하면’이라는 단서에서는… 당연히 내가 정도는 주겠지 하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다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아닌데도 묵직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옆자리에 앉은 윤혜영 대리가 엑셀 시트를 나에게 공유해 줬다.

“우주 , 방금 내가 보낸 파일 열려요? 오늘 우주 씨한테 부탁할 일은, 비슷한 금융 애플리케이션을 런칭한 경쟁사 소셜 캠페인 리서치인데요.

“네, 파일 열립니다.

“일단 눈에 띄는 캠페인들은 제가 문서에 리스트업 뒀는데, 이용자 반응이나 파급력 같은 정성적인 부분이 궁금한 거라서 코멘트 위주로 반영해 주시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대리님!

시트를 열자 윤혜영 대리의 말대로 다섯 남짓한 캠페인이 리스트업 되어 있었다. 옆에 비어 있는 ‘코멘트’ 란을 내가 채워야 하는 듯했다. 유튜브 링크를 클릭하자, 광고 영상 아래로 4,052개의 댓글이 길게 늘어졌다.

, 이걸 전부 표에다가 넣어 둬야 하는 건가? 캠페인은 다섯 개이지만, 유튜브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트위터까지, 여러 채널의 게시물까지 확인하려면 이것보다 훨씬 많을 텐데…. 이걸 어느 세월에 전부 하지? 하긴, 다른 팀원분들은 워낙 바쁘셔서 직접 시간이 없으니까 나한테 시키는 거겠지?

“오늘 퇴근 시간 전까지는 있겠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당연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같아서 일단 대답부터 야무지게 했다. 그래도 회사에 와서 처음 맡은 업무이니, 보란 듯이 잘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든 퇴근 시간 전까지 주어진 업무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완벽하게 집중해서 일했다. 나중에는 시간의 흐름이 멎은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마우스 위의 손가락만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마지막 캠페인의 인스타그램 게시물 코멘트까지 입력했을 때에는 퇴근을 5 남겨 시각이었다.

“우주 , 이걸 이렇게 주면 어떡해요.

“앗, ?

“정성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 코멘트를 하나하나 리스트업 하는 아니라 중요한 트렌드를 짚어 달라는 거죠.

“아… .

“어쩐지 너무 오래 걸린다 했더니…. 우주 씨는 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 들었어요?

그래도 일한 양에 비하면 비교적 빨리 끝냈다고, 사실은 기적적인 속도라고 생각하면서 파일을 제출했다. 하지만 문서를 확인한 윤혜영 대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내가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았던 거구나….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윤혜영 대리의 얼굴에는 짜증이 조금 묻어 있었다.

“가이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데드라인 전에 미리 저에게 이야기를 했어야죠.

“죄송합니다, 대리님…. 여쭤보고 싶었는데, 다들 너무 바빠 보이셔서 제가 귀찮게 하는 걸까 봐서요.

“중간에 체크 못해서 이렇게 삽질하면 결국 일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번거로워요.

“…역시 그렇겠네요.

“앞으로는 우주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어지는 깐깐한 질책에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감정적으로 호되게 나무라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말투였다. 첫날부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이게 됐다.

“우주 씨는 오늘 첫날이니까 이만 퇴근해 보시면 돼요.

“아, 저기, 대리님! 고쳐야 부분 알려 주시면, 제가 바로 수정해서 드리겠습니다.

“이미 너무 늦어서, 제가 빨리 보고 넘기는 편이 나을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윤혜영 대리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마우스 스크롤만 내리면서 문서 내용 살펴보았다. 본인이 마저 처리해야 업무를 가늠하고 있는 같았다. 차라리 남아서 내가 전부 하고 가는 마음이 편할 텐데…. 그녀에게는 내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겠지.

“그, 팀장님께 인사드린 다음에 퇴근하면 될까요?

그런 윤혜영 대리 옆에서 손끝을 하나로 모아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긴장되는 상태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침 이후로는 차태주를 겨를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공략중이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던 호감도가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아, 팀장님 오늘 임원 미팅 길어지시는 모양인데, 그대로 직퇴하실 거예요.

“아, !

“워낙 바쁘신 분이라 일일이 신경 수는 없으니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면 돼요.

여전히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윤혜영 대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 다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팀원들의 일을 덜어 주지는 못할망정, 더하는 인턴은 실은 조금 귀찮을 있는 존재라는 나의 위치가 자각이 되었다.

“저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봐요.

“네, 대리님! 안녕히 계세요.

반면 전체를 관장하는 차태주 팀장님은 나와는 정반대로 하늘 같은 존재이겠지. 이대로라면 호감도를 쌓기는커녕 눈에 들기조차 어려울 같은데….

퇴근을 마치고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여름 해가 완전히 저물지는 않은 시각이었다. 빌딩 사이로 펼쳐진 하늘에 노을빛이 드문드문 물들어 갔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일렁일렁 움직이는 구름들을 멀찍이 더듬어 보았다.

이제야 천유현이 나를 걱정했던 이해가 조금 된달까. 회사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경험한 하루는 예상보다 훨씬 호되었다. 안에서 나는 소소한 존재일 뿐인데, 그에 걸맞은 일조차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앞으로 6 동안, 일도 연애(?) 무사히 해낼 있을까? 막막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고, 녹초가 몸을 간신히 이끌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피로가 밀려들면서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

어제 퇴근을 하고 나서는 기분이 울적하게 처졌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출근은 해야 하고, 이런 와중에도 나에게 주어진 제한 시간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줄어들고 있다. 어제 삼십 분으로는 모자랐으니, 이번에는 시간 일찍 새벽 출근길에 나서 지하철에 올라탔다.

다소 이른 시각이다 보니 열차 내에는 아직은 사람이 드문드문했다. 무사히 자리에 앉은 다음, 졸린 눈을 비비고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원래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지! 업무 일지 대신, 오랜만에 공략 일지라도 적어 요량이었다.

<차태주 분석 노트>

좋아하는 : 일잘러

싫어하는 : 말귀 알아듣는 사람

호감도 올려 보겠다고 어설프게 개인적으로 접근했다간 큰일 같은 느낌?!

공략법:

어제 하루 동안 알게 내용을 적어 내리기도 잠시, ‘공략법’ 파트에 다다라서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차태주 팀장님은… 대체 어떻게 공략해야 하지? 이라윤과 강태양은 일단 친해지기! 전략으로 밀어붙일 있었지만 차태주는 전혀 그런 통할 같지 않은 남자였다.

공략법: 일단 일부터 열심히 하자…?

그렇지만 일단 부딪혀 봐야 있지 않을까? 생각에 곰곰이 잠겨 있는 사이 때마침 지하철이 회사가 있는 여의도역에 도착했다. 혼자서 끙끙 앓아 봤자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이니 고민은 이쯤 두고 몸부터 움직이기로 했다.

              

#72

아직 팀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이른 아침의 사무실이 휑했다. 메일을 열어 어제 윤혜영 대리가 마저 작업한 문서를 읽어 보았다. 내가 리스트업 놓은 수십 장의 코멘트가 깔끔하게 요약되어, 실제로 애플리케이션 출시 캠페인에 도움이 만한 포인트만 부러지게 짚어져 있었다.

이런 결과물을 원하셨던 거구나…. 고쳐 주신 부분이 전부 납득이 가서 조금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윤혜영 대리가 차태주에게 여덟 시에 보고 메일을 보냈으니, 때문에 시간까지 회사에 붙잡혀 있었나 싶어서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우주 , 일찍 있었네요?

“안녕하세요, 대리님!

완성본을 다시 훑어보며 기억해야 내용을 간단히 메모하고 있는 동안 팀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홉 정각에 맞춰 출근한 윤혜영 대리가 나에게 인사했다.

“대리님…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괜히 때문에 늦게까지 고생하신 같아서요.

“어유, 정도는 야근도 아닌데요, . 오늘은 중간에 모르겠으면 바로 알려주고요.

“네!

“그럼 우주 씨가 오늘은 소비자 반응 설문 조사 정리를 도와주겠어요? 수치적으로는 정리가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코멘트 중에 유의미한 통찰을 추리려고 해요.

“네, 어제 대리님께서 작업하신 거랑 비슷하게 정리하면 될까요?

“맞아요. 전반적인 흐름이나 조금 튀는 코멘트 위주로 추려 주시면 됩니다.

오늘만큼은 팀에 보탬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윤혜영 대리가 새롭게 공유해 문서를 열었다. SNS 댓글이 아니라 설문 조사 서술형을 다루는 것만 제외하면 다행히 어제와 비슷한 형식인 같았다.

일단 시작해보고, 모르는 생기면 오늘은 바로바로 물어봐야겠다.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팽팽한 분위기 때문에 눈치 보이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겠다. 이곳에서 무사히 버티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강심장이 되어야 같다.

[태양이 ]

그렇게 시간 남짓 문서를 채우는데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액정 화면 위에 떠오른 강태양의 이름을 흘긋 쳐다보았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자 차장님 과장님이 애플리케이션 AB 테스트 결과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계시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아, 어쩌면 좋지….

팀원들이 딱히 나를 주시하지 않더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만 강태양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타이밍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연락일 분명했다.

“여보세요?

발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무실을 빠져나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자 밀폐된 공간에 목소리가 웅웅 묵직하게 울렸다.

- 연우주, 내일 하냐?

“형,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어. 내일 저녁 얘기하는 맞지?

- . 복귀전 하는 알고 있지?

“당연하지! 보러 가려고 경기 티켓 예매도 뒀잖아. 오후 7 맞지?

강태양의 복귀전이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과감한 스킨십과 함께 호감도를 단박에 50까지 찍고, 당장이라도 일을 것처럼 굴었던 강태양은 의외로 한동안 조용했다. 복귀전과 연동된다는 메인 퀘스트가 어떤 형식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인터넷 예매 사이트에서 티켓만 따로 두었다.

- 네가 그런 예매해. 당연히 내가 VIP 초청권 건데.

“아… 정말? 고마워 , 그럴 줄은 몰랐네.

- 그리고 7시는 너무 늦어. VIP 초청권 있으면, 경기 기자회견도 들어올 있으니까 일찍 .

“기자회견? 일찍이라면 언제 정도?

경기는 수요일 오후 7 예정이어서, 퇴근하자마자 월드컵 경기장으로 바로 달려갈 계획이었다. 양쪽을 챙기려다 보니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맞출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경기 기자회견이라니? 그보다 일찍은 나에게는 도무지 무리였다.

- , 싫어?

“앗, 그게 아니라, ! 사실 내가 이번 주부터 출근하고 있거든. 그때 말했었던 금융 회사 인턴 혹시 기억나?

미묘하게 머뭇거리자, 그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강태양이 곧바로 질문해 왔다. 그렇지만 나는 어제 출근한 데다, 아직 팀에서 몫도 하고 있는데…. 강태양의 복귀전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때문에 회사를 빠질 수는 없을 같았다.

- 그래서, 회사 때문에 복귀전에 오는 거야?

강태양의 목소리가 묘하게 울적해졌다. , 안돼! 그동안 어떻게 호감도 50까지 올렸는데, 루트 클리어를 코앞에 두고 메인 퀘스트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플레이어를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으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시스템을 원망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추가 도움이나 개입이 없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플레이어 보호가 필요한 상황으로 간주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당연히 가야지, 우리가 그동안 했던 말들도 있는데, 경기하는 모습 보고 싶어.

- 흐음….

“그냥, 이걸 어떻게 팀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이 되어서….

어쨌든 강태양의 복귀전을 보러 가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기는 했다. 그렇다면 연차를 쓰겠다고 차태주에게 말을 해야 텐데…. ‘무능함과 변명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차태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메아리쳤다.

“팀장님이 되게 깐깐하시거든…. 무섭기도 하고. 나는 고작 인턴이지만 그래도 팀장님께 보여야 텐데….

지금 이건 무능력에 속하는 상황일까 변명에 속하는 상황일까, 아니면 다일까. 어느 쪽이든 저렇게 기준이 칼같은 사람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 너무나 난처했다.

- 남자야?

“어?

- 팀장 남자냐고.

“어, 그렇지?!

상상만으로도 초조해져 심장이 울렁거렸다. 덕분에 말을 쉽사리 잇지 못하고 공연히 입술만 잘근거리는데 강태양은 나의 침묵을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못마땅해진 건지, 날카로운 목소리로 차태주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 사람 바꿔 . 내가 직접 얘기할게.

“아니, 그럴 것까지는…. 그래도 내가 직접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팀장님이신데.

- 우리 팀장님?

“아….

- 그래서, 팀장님이 오지 말라고 하면 경기에 거야?

팀원들이 수다를 다들 ‘우리 팀장님’이라고 하길래 무심코 내뱉은 표현이 강태양을 제대로 수틀리게 모양이었다. 기다렸다는 그를 낚아챈 강태양이 뾰족한 질문을 쏘아붙였다. 그게 아니야 , 나는 진심으로 경기를 보러 가고 싶다고….

“아니야, 형…. 내가 팀장님한테 얘기해 볼게, 당장 내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 그런데 우주야, 네가 팀장님이라는 사람, 설득 못하면 어떡해?

“으, ? 뭐라고?

- 나랑 너랑 아는 사이라는 믿을 수도 있잖아. , 어찌 됐든 나는 공인이니까? 그런데 그냥 응원하는 축구선수 보러 간다고 하면, 사람이 너한테 순순히 연차를 내주겠어?

, 그런가? 듣다 보니 그런 같기도 하고….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강태양이 나를 몰아붙였다. 이미 충분히 놀란 상태인데, 강태양이 없이 말을 이어 나가자 더욱 당황해서 어버버했다.

- 내가 직접 얘기할게, 우주야. 사람 바꿔 .

“아, 그건 아닌 같은데….

- 들어. 그렇게 하는 편이 가장 낫다니까?

알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채근할 기색이라, 일단은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 , 여전히 놀란 심장이 지끈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올랐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퍼덕퍼덕 가로저었다.

일단은 당장 내일 연차부터 차태주와 논의해야 같기는 했다. 코너에 자리한 차태주의 개인 오피스에 다다라, 열려 있는 유리문에 똑똑 노크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네, 급한 일이에요?

정면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던 차태주가 시선을 흘끗 들어 올렸다. 문간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는 간결하게 말했다.

“아, 네… 그게, 내일 하루 연차를 있을까 해서요.

“연차라고요?

“…….

“우주 , 이번 월요일부터 출근한 알고 있죠?

고개를 마저 들어 올린 차태주의 얼굴에 여실한 짜증이 번졌다. 일단 들어오라는 , 나를 향해 기다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데스크 위에 급하게 휘갈긴 메모가 널브러진 것이, 지금 무척 바빠 보이는데 타이밍마저도 잘못 잡은 듯했다.

“미리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내일 오후에 저에게 중요한 일정이 생겨서요….

“그 일정이라는 뭔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의자에 몸을 뒤로 길게 기댄 차태주가 나른한 얼굴을 했다. 일에 흠씬 파묻혀 있던 차태주가 때마침 적당한 유희 거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다. 차태주가 생각하기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나를 반쯤 죽여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내일 강태양 선수 복귀전 축구 경기가 있거든요. 강태양 선수가 저에게는 소중한 친구이고, 조만간 이적을 앞두고 있기도 해서…. 중요한 날이라서 저도 같이 가서 응원해 주고 싶어서요.

“우주 씨가 강태양 선수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입니까?

나의 설명이 탐탁지 않았는지 차태주의 수려한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몸을 다시 반듯이 일으킨 차태주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쪽 눈썹만 묘하게 이지러진 것이, 역시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

그래도 나보다는 사회생활 (?) 있으니까, 강태양 말이 맞았던 건가? 역시 응원하는 축구선수 경기를 보러 간다는 이유로 인턴이 휴가를 내는 보편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 서늘하게 이어지는 침묵에 덜컥 겁이 났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릴 있는 말인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래서 강태양 선수가 혹시 필요하다면 팀장님께 전화를 드리겠다고….

“핸드폰 이리 주세요.

말이 제대로 끝날 새도 없이 차태주가 핸드폰을 낚아챘다. 깜짝할 핸드폰을 빼앗긴 나는 태연자약한 차태주의 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아무리 상사라지만, 부하 직원 핸드폰을 말도 하고 가져가도 되는 거야? 아니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되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태주 루트에 진입해서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티, 팀장님….

익숙하게 통화 목록을 훑어내리던 차태주가 ‘태양이 형’이라고 이름 붙은 통화 기록을 발견하고는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짜증스럽다는 기색을 지워 내고, 금세 무덤덤한 표정을 되찾은 차태주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차태주입니다.

차태주의 원목 데스크 위에 올라온 핸드폰은 스피커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다. 차태주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 강태양의 이름이 반짝이는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잔뜩 졸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렇게 전화까지 줄은 몰랐는데….

- , 차태주 안녕하세요. 강태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강태양이 , 웃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내가 누군지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차태주에게 하대 아닌 하대를 하는 삐딱한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 회사 팀장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내일 하루 제가 우주 빌려 가겠습니다.

평소에 이런 쪽으로는 둔한 나이지만 지금 강태양이 차태주에게 은근슬쩍 시비를 거는 것이 느껴졌다. 삐딱한 목소리가 이름을 천연덕스럽게 언급하자, 차태주의 정갈한 눈썹이 움찔 떨렸다.

              

#73

“바쁘신 와중에 감사합니다.

- …….

“인턴한테 하루 연차 주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런 일로 강태양 씨와 직접 연락까지 하게 줄은 몰랐네요.

차태주가 평온한 말투로 대꾸했다. 미세한 웃음기가 섞여든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서늘한 표정에는 신경이 거슬린 기색이 역력했다.

- 보니까 우주가 그쪽을 많이 무서워하는 같길래, 걱정이 되어서요.

“하.

- 쪼끄만 혼낼 데가 어디 있다고, 설마 쥐잡듯이 잡고 계시는 아니죠?

“그럴 리가요. 제가 우주 씨에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

묘한 경쟁을 부추기는 강태양의 노골적인 싸움 시도에 , , 차태주가 핸드폰이 올려진 원목 책상을 무심하게 두드렸다. 차태주는 그대로 입매를 슬쩍 비틀고 얼굴을 유심히 훑어 내렸다. , 대체 이건 무슨 분위기이지?

- 차태주 씨는 모르시겠지만, 저랑 우주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거든요.

“…….

- 그래서 이번에도 단순한 경기 직관이 아닙니다. 커리어에 있어서도 중요한 경기이지만, 그보다 우주가 줬으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것까지 하나하나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요.

강태양은 나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차태주에게 노골적으로 과시했다. 강태양이 제멋대로 지껄일수록 오피스 안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나에게 흘긋 닿는 차태주의 시선이 보다 집요해졌다.

“아….

태양이 , 이분은 회사 팀장님이시라고! 차태주는 나에게 사적인 관심이 전혀 없는데, 그렇게 쓸데없이 자극하는 거야….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강태양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차태주와 통화를 하겠다고 했던 같다. 얼떨결에 휩쓸려 사람이 직접 대화하게 만든 것이 이제야 무척 후회되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연우주 씨는 얌전히 보내 드려야겠네요.

- …….

“본인이 가기를 원하는데, 팀장이라고 해도 억지로 회사에 묶어 권한은 없지 않겠습니까?

태연하게 대답한 차태주가 그렇지 않냐는 , 쪽을 돌아보았다. 싸늘해진 눈빛을 보니 차태주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시든 아마 그건 전혀 아닐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나서서 아니라고 손사래 수도 없고, 이걸 대체 어째야 하나 싶었다.

- 노고가 많으실 텐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하지만 빈정거리는 인사를 웃어넘긴 차태주가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전화가 끊기고 불안한 적막이 흐르는 오피스 안의 공기는 선뜩하다 못해 살벌했다. 덕분에 심장이 쪼글쪼글하게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

“…….

단정한 입술을 굳게 다문 차태주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의 밑바닥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끓어올랐다.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걷어붙인 셔츠 소매 위로 불거진 손목뼈가 눈에 들어왔다.

“연우주 .

웃음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예리하게 갈랐다.

“네, !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동공이 마구 흔들려 시선을 한곳에 없었다. 어딘가 위험하게 번뜩이는 차태주의 눈동자를 제대로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연우주 씨는 회사가 유치원입니까?

때마침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질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앞을 쳐다봤더니,

[10]

차태주의 호감도가 4% 하락해 있었다.

“대학생 인턴을 뽑는다지만, 하다 하다 이런 일로 지적해야 줄은 몰랐습니다.

“티, 팀장님….

“급박한 사정이라면야 연차는 있습니다. 물론 엊그제 출근해서 연차 얘기부터 한다는 , 저라면 행동입니다만 납득이 간다면 허락했을 겁니다.

“…….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나에게 직접 얘기해야지. 강태양 씨가 연우주 보호자라도 됩니까? 성인이 되어서 정도 의사 표현도 스스로 해요?

희미한 빈정거림이 스며든 목소리가 칼날처럼 성큼성큼 내리쳤다. 차태주는 험한 하나 없이 명료한 표현만으로 나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그가 단순히 감정적인 화풀이를 하는 아니었기에 더욱 말문이 막혔다.

“내가 우주 씨한테 못할 했습니까?

“아, 아뇨….

“그런데 표정이 그따위예요.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같은데, 틀린 말이 하나 없으니 오히려 목구멍에 얼얼한 덩어리가 뭉쳤다. 어쩔 모르겠어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자 차태주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런 반응에 슬슬 열이 받는지 내내 깔끔하던 목소리에 숨소리가 짙게 섞여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혹시라도 팀장님한테 오해를 살까 봐…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를 나무라는 순간에마저도 차태주는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다. 마디 마디가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이어서, 논리적으로 반박은커녕 내가 잘한 하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

“오해?

“네, 제가 당장 휴가를 내려고, 괜히 없는 말을 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하….

“저도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하지만 그게 충분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없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번만 생각했어도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엉겁결에 차태주한테 달려가게끔 당황한 와중에 나를 정신없이 몰아붙인 강태양이 원망스러웠지만, 결국은 내가 내린 판단이니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당장 아득하기만 기분에 얕은 한숨이 비죽 터져 나왔다. 그러자 차태주가 입술을 비스듬히 비틀었다.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샅샅이 훑는 시선에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솟아올랐다.

“많이 바쁘신데 저까지 괜히 팀장님을 화나시게 같아서… 너무 죄송합니다.

어쩐지 대답이 그를 받게 하는 같았지만… 그래도 다시 사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제야 차태주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는 알아차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몸을 뒤로 느슨하게 젖힌 차태주가 급격하게 피로해진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올릴 일도 아닙니다.

차태주가 핏줄이 , 불거진 매끈한 손등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말이 이런 쓸모없는 일로 네가 감히 나를 감정 소모하게 만드냐는 것처럼 들렸다. 억울하다고는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럽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만 나가 봐요.

“…네, 팀장님.

“회사에서 혼난 걸로 눈물 콧물 빼는 사람 질색이니까, 감정 추스르고요.

나에게 많이 실망하셨겠지…. 그래도 일부러 이러려던 아니었다는 알아 주시면 좋겠는데, 뭐라고 말을 더할 수는 없어서 건너편의 차태주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마저도 귀찮다는 , 차태주는 미련 없이 손등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안녕히 계세요, 팀장님….

고개를 숙인 , 대역죄인이 기분으로 차태주의 개인 오피스를 빠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포승줄에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걸음걸이가 어정쩡하게 주춤거렸다.

술렁술렁하던 사무실은 내가 팀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적막하게 얼어붙었다. 정적이 흐르는 와중 사방에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뒤통수에 따끔따끔 내리꽂혔다.

“하아….

이래서야 도무지 고개를 다시 수가 없네. 데스크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채로, 다시금 업무를 이어 나갔다. 그새 얼굴에는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저릿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아무 없었던 것처럼 일에 집중했다.

어쨌든 내일 연차를 써야 하니까 미리 일을 끝내 놓고 가야겠지….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잘한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서러운 , 어쩔 없이 서러웠다.

***

강태양은 이른 오후에 빠진 레인지로버를 끌고 기숙사 건물 앞으로 들이닥쳤다. 자연스럽게 나를 조수석에 태운 강태양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자신만만한 태도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들떠 보였다.

“야, 연우주.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하는 강태양의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반질거렸다. 자신에게 무슨 없냐는 , 기대감 서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태양 때문만은 아니었더라도, 강태양과 연관된 일로 팀장님에게 대판 깨진 나는 같이 희희낙락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앞에서 빤빤하게 웃는 잘생긴 낯짝에 씨근거리는 숨이 서서히 차올랐다.

“얼굴이 이렇게 부었어. 귀엽게시리.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강태양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손가락으로 볼을 건드리며 장난을 걸자, 그동안 애써 꾹꾹 누르던 것이 울컥 터뜨려졌다.

“아, 하지 .

“어, 내가 했다고?

“…나 어제 때문에 팀장님한테 완전 혼났단 말야.

내자니 너무 좁아 보일 같기도 하고, 어차피 일이니까 혼자 삭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강태양 앞에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자 강태양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강태양이 입매를 너그럽게 펼치고, 눈매는 정반대로 살짝 날카롭게 치떴다.

“회사에서 현실의 쓴맛을 보는 것보다, 로망인 운동선수랑 같이 인생을 즐기는 역시 좋지?

“그러는 형은 회사 다녀 것처럼 이야기한다?

“야, 스포츠 업계가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 그에 비하면 회사는 애들 장난이지.

“흐음….

“그리고 , 팀장? , . 웃기지도 않아서. 은퇴하고 그동안 모은 연봉으로 회사 차리면 내가 바로 사장이야.

이러니 운동선수로서 탑을 찍은 거겠지만… 역시 강태양의 승부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제도 느꼈지만 강태양은 차태주를 경쟁 상대로 점찍고 있었다. 쓸데없이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자니 헛웃음이 터졌다. 아니,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이런 힘을 빼서 되겠어?

“형 어제부터 되게 웃긴다. 사람은 회사 팀장님일 뿐인데 혼자서 괜히 열을 올리고 그래?

“그건 우주 생각이고. 자식이 스펙도 모자라는데 자기 권한으로 인턴 뽑았다며? 보면 촉이 오지.

“…나한테서 자질을 봤다고 해서 그런 거거든?!

“으휴, 이러니까 혼자서 두지를 못하겠다니까. 이걸 어디다 묶어 수도 없고.

, 가만 듣고 있자니 이제 슬슬 기분이 나쁘려고 하는데? 발언의 수위를 은근슬쩍 올리는 강태양을 찌릿 째려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옛다 이거나 받아라, 하는 느낌으로 무릎 위에 떨군 것은 오늘 경기의 스카이라운지 VIP 관람 티켓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공략캐릭터 강태양 루트 클리어를 위한 메인 퀘스트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제한 시간 06:00) [/아니요]

              

#74

기자 회견 초대권까지 살뜰하게 포함된 봉투를 열어젖힘과 동시에 강태양 메인 퀘스트에 진입하게 됐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공략캐릭터 [강태양]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 [월드컵 스타디움]에서 한나절의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 캐릭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보세요!

제한 시간 내에 클리어에 필요한 최소 호감도 70 달성한 , 메인 스팟인 [그라운드 골네트]에서 사진을 찍으면 퀘스트 수행이 완료됩니다.

(성공 보상: 강태양 루트 1 클리어, 플레이어 매력 수치 40 상승)

TIP: 메인 퀘스트는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누어서 진행됩니다. 전반전 ‘기자 회견’에서 컨디션이 결정되고, 후반전 복귀전에서 경기 도중 강태양의 활약에 비례하여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TIP: 전반전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지에 따라 오늘 하루 강태양의 능력치가 설정됩니다. 공략캐의 컨디션이 후반전 호감도 상승 확률에 막대한 영향을 치니, 퀘스트 성공을 위해 전반전에서 신중한 선택을 주세요!

강태양이 축구 선수여서인지, 오늘의 메인 퀘스트는 전반전과 후반전, 가지 파트로 나뉘었다. 축구 경기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기자 회견까지 메인 퀘스트에 포함된다니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별일 없이 지나가야 텐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태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이어 나갔다.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선들선들 흘러드는 좋은 여름날의 오후였다. 그렇게 우리 사람은 메인 퀘스트 진행 장소인 월드컵 스타디움에 가까워졌다.

***

찰칵, 찰칵, 회견 시작에 앞서 작동을 확인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했다. 수런거리는 대화가 소음처럼 울리는 회견장 분위기는 다소 부산스러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덕분에 누구든 딱히 사람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바쁘신 와중에 자리를 찾아주신 기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오늘 저녁, 치열한 대결을 앞두고 있는 클럽서울과 포항 어벤저스의 기자회견을 진행하겠습니다.

진회색 트레이닝 재킷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린 강태양이 늠름한 걸음걸이로 기자회견에 들어섰다. 쏟아지는 관심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강태양은 빤빤하면서도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강태양을 포함해, 감독과 선수 두어 명씩이 테이블에 앉자 사회자가 기자회견 시작을 알렸다.

“흐음….

아니, 사람을 신경 쓰는 이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유일한 예외인 강태양이 기자석 쪽으로 느슨한 시선을 던졌다. 매서운 눈매가 기자들 틈바구니에 앉은 나를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런 강태양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날카로운 기색이 누그러졌다.

“클럽서울 김오룡 감독님께 질문드립니다.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상대 전적으로 봤을 때에는 클럽서울은 포항 어벤저스에 비해 다소 밀리는데요. 오늘 경기는 클럽서울에게 있어 리그 후반부 중요한 분수령이기도 한데, 현재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올 한해 클럽서울은 더욱 강한 팀이 되었습니다. 감독과 선수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경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투지를 가지고 있고, 그를 현실로 만들어 능력도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다들 자신감으로 중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경기에서도 좋은 결과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부상에서 복귀하는 강태양 선수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도 아마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관심사일 겁니다. 득점왕에서도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며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던 시즌이라, 그간의 공백이 강태양 선수 개인적으로는 뼈아팠을 같은데요. 강태양 선수, 오랜만에 피치에 오르는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관례적으로 번째 질문을 감독에게 던졌으나 기자석에 앉은 모두가 강태양에게 눈독을 들이는 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질문은 곧바로 강태양을 향했다.

“컨디션이야 최상입니다. 그동안 경기를 뛰지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했거든요. 그리고, 다들 저를 배려해 주신 건지 달은 쉬었는데 제가 아직 득점왕 선두더라고요?

“…….

“그래도 슬슬 제자리를 지키는 것에 위기감도 느껴지던 차인데, 오늘 이렇게 포항 어벤저스와의 라이벌전에서 만회할 기회가 주어져서 되어서 영광입니다.

강태양은 기자석에 빼곡하게 늘어선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어 보였다. 충분히 압박감이 느껴질 상황이었지만 그마저도 즐기며 능수능란하게 답변했다. 여유만만한 태도로 상대 팀을 은근슬쩍 도발하기까지 했다.

“오늘 경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질문입니다만… 강태양 선수의 EPL 이적설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FC 런더너스와 물밑 협상이 오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해외 진출에 대한 강태양 선수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오늘 강태양의 기분이 제법 좋아 보이자, 특종을 따보려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거취를 캐물었다. 강태양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적설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도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순간을 기다렸다는 , 눈을 날카롭게 반짝 빛냈다.

“물론 간의 세부 조율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일단 FC 런더너스에서 영입 제의가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의향이라고 한다면….

“…….

“기회만 주어진다면 당장에라도 프리미어리그로 달려가야겠죠. 망설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이적설에 대해 말을 아끼던 강태양이 불시에 선언하자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옆자리의 감독과 선수들도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깜짝 발표로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킨 강태양이 능청스럽게 끝을 까딱거렸다.

“강태양 선수,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해외 진출을 결정하게 겁니까? 지난 시즌 간에도 제의가 있었지만, 고사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클럽서울에서는 팀의 프랜차이즈인 강태양 선수가 떠나서 아쉬울 텐데, FC 런더너스가 그만큼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던가요?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제가 결정을 내릴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자리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예상 밖이라 좌중이 웅성거렸다. 헉… 설마 사람이 나를 말하는 아니겠지? 순간, 강태양이 테이블 쪽에서 정확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강태양의 홈그라운드였다. 먹잇감을 한곳에 몰아넣고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맹수처럼, 예리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몸이 움찔 떨렸다.

“늘 바라 오던 일이었지만, 정작 닥치고 보니 여러 가지로 고민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식구들이 있기도 하고요.

“…….

“보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라고들 하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면,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판단해야 텐데 다른 사람의 조언도 생각 외로 도움이 되더군요. 특히 이번 결정을 내리게 데에는 사람의 영향이 정말 컸습니다.

처음에는 프리미어리그 진출 자체에 방점을 두던 강태양의 발언은 점차 방향성이 묘하게 달라졌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던 강태양이 불쑥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강태양의 시선이 점점 짙어지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지만, 나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외람됩니다만… 강태양 선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과는 혹시 연인 관계입니까?

“오랜 바람둥이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사람에게 정착하는 건가요?

“몇 인터뷰에서 아직 첫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라면 설마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강태양은 쇄도하는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어깨만 크게 으쓱해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강태양이 보란 듯이 쇼맨십을 휘두르며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셔터 소리에 나는 그대로 혼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 설마 아닐 거야….

시간 ,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불쑥 짙어졌다. 동공이 엉망으로 흔들려, 지금 상황을 슬그머니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순간 기자회견 테이블의 강태양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것처럼, 강태양이 꿈도 꾸지 말라는 슬쩍 윙크했다.

“우주야, 덕분에 망설임 없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있게 되었어.

“…….

“오늘 시간 내서 이렇게 자리에 것도 감동이야. 정말 고맙다.

설마, 이거 실제 상황이야? 강태양은 여전히, 귀빈석에 앉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강태양에게 향하던 기자들의 관심이 이제 귀빈석에 앉은 나에게 내리꽂혔다.

카메라 렌즈는 쪽을 향하고, 마이크가 코앞까지 마구잡이로 들이밀어졌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이 무조건 싫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아닌데….

“우주 씨라고 했나요? 정확한 이름이 뭡니까? 나이는 살이에요?

“강태양 선수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보다, 사람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에요? 단순히 친구 사이입니까, 아니면 이상의?

“이적이 결정되면 강태양 선수와 함께 영국으로 떠날 계획입니까?

건수를 기자들이 눈을 희번득 뜨며 질문을 들이부었다. 체감상 기자회견장의 모든 사람들이 나만을 쳐다보는 같았다.

, 이쯤 되면 거의 게임 빙의 이후 최고의 위기 상황인데? 난처하고 곤란해서 심장이 따끔따끔 들어갔다. 그냥, 대답을 대강 얼버무리면 되려나?

“강태양 선수의 결정을 도왔다는 , 정확히 어떤 말이죠? 분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이대로 당장이라도 바닥 밑으로 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전반전: 기자회견* 기자의 질문에 대한 플레이어의 답변이 오늘 하루 공략캐 [강태양] 능력치를 결정, 후반전 경기 컨디션을 좌우합니다.

승부욕 [□□□□□□]

체력 [□□□□□□]

민첩성 [□□□□□□]

, 메인 퀘스트가 여기서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이야. 피하기는커녕, 이번에 역시 강제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나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면서도 경기를 앞둔 강태양이 최대한 에너지를 얻어갈 만한 답변을 해야만 했다.

              

#75

“어… 처음에 강태양 선수를 봤을 때에는, 타고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는 같아서, 솔직히 부럽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

“아직 제가 태양이 형을 아주 아는 아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곁에서 지켜본 태양이 형은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그런 형이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역시 설레고, 벅차는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리더라고요. 그래서 태양이 형이 넓은 무대에서 활약하고, 없이 즐겁게, 행복하게 축구할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그러면 국위선양도… 있고요?!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는 탓에 실은 어떤 이야기를 해야 가장 좋을지 깊이 고민할 새도 없었다. 더듬더듬 이어 나가다 보니, 듣기 좋게 말을 꾸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기자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를 황급히 덧붙였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전반전: 기자회견* 현재 플레이어의 답변에 따른 공략캐 [강태양] 정확한 능력치 수치를 산정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아니, 실제로도 잔뜩 긴장할 만큼 중요한 순간이기는 했다. 짧은 숨을 뱉고 테이블에 앉은 강태양을 흘긋 쳐다보았다. 의도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지,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없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전반전: 기자회견* 전반전 진행 결과 최종 결정된 강태양의 분야별 능력치를 알려드립니다.

승부욕 [■■■□□□] 연애 감정

체력 [■■■■■■]  공감력

민첩성 [■■■■■□]  진정성

뭐야, 이거 생각보다 너무 체계적이잖아! 승부욕이나 체력, 민첩성은 무작위로 선정된 항목이 아니라 나름의 기준에 따라 채점을 매긴 듯했다. 그래도 설마, 연애 감정까지 점수에 들어갈 줄이야….

그런데 이게 높은 점수야, 낮은 점수야? 분야에 따라 능력치가 들쭉날쭉한 와중, 전반전 결과가 후반전 호감도 상승에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전반전: 기자회견* 종합 점수: (85/100) 로맨틱한 요소는 다소 부족하지만, 전반적으로 우수한 컨디션

궁금해하자 답을 알려주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그럼, 정도면 전반전에는 나름 선방한 건가?

“어쨌든 가까운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경기가 중요하겠죠? 개인적으로, 포항 어벤저스의 에이스 권영태 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마디 있는데요.

오늘 나를 자리에 부른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는 , 강태양이 다시금 상대팀을 도발하며 관심을 자신에게로 가져갔다. 덕분에 숨을 돌린 나는 스르르 빠져나가려는 혼을 간신히 붙잡았다.

[50]

뾰족뾰족 세운 강태양의 머리 위에서는 호감도가 부르르 진동했다. 강태양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땅땅, 공언한 것이 무척 흡족한 듯했다.

하지만 입장에서는… 겨우 메인 퀘스트의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자 눈앞이 아득해질 뿐이었다.

이제 후반전에는 강태양에서 활약할 있도록, 관중석에서 열심히 응원하면 되는 건가?

***

해가 슬슬 저물어 무렵, 경기를 앞둔 월드컵 축구 경기장은 열띤 분위기로 가득했다. 경기 직관을 위해 매점에서 떡볶이와 생맥주를 구매한 스카이라운지 VIP석으로 향했다.

제각각 목에 타월을 두르거나, 플래카드를 관중석의 팬들은 곧이어 시작할 경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늘 경기만 이기면 우리 팀도 우승 슬슬 서지 않냐? 그동안 만년 2 소리 듣는 지긋지긋했어.

“야, 그런 함부로 하지 , 부정 탈라. 닥치고 응원이나 열심히 !

“그래도 시즌에 태양이 우승컵 드는 보면, 영국 보내면서도 마음이 편할 같아.

“근데 아까 강태양, 기자회견에서 너무 나대지 않았냐? 누가 보면 이미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이라도 ? 하여튼 일관적으로 재수 없단 말이야.

“그거야 어그로 끌려고 일부러 컨셉 잡는 거고. 강태양만큼 헌신적으로 팀플레이 하는 선수가 어디 있다고?

“그래도 강태양 비호감이야. 모든 사람이 이적 소식 궁금해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은 들러리야 뭐야.

“일단 말이 있으니, 오늘 경기 죽이라도 쑤면 제대로 가오 빠지겠네. 한번 보자, 강태양이 잘하면야 우리한테도 좋은 거지.

통로를 지나치다 강태양의 이름이 들리기에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분명 역시도 방금 전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태양을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서로에게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역시 근본적으로 강태양과 나는 결이 너무 다른 사람 같았다. 강태양에게는 즐거울 따름인 깜짝 이벤트가 나에게는 영혼을 탈탈 털어 버릴 정도의 빨림으로 다가왔다는 바로 증거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렇지만 까도 내가 깐다고, 다른 사람들이 강태양에게 트집을 잡는 것을 듣자 괜히 발끈하게 됐다.

오늘 경기, 강태양이 정말 보란 듯이 잘했으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태양은 실패로 인해 시무룩한 것보다, 당당하게 성공하고 ‘쟤 저래? 싶을 정도로 거들먹거리는 훨씬 어울리는 사람이고 말이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후반전: 복귀전* 강태양을 도와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메인 퀘스트 완수를 위한 조건인 호감도 70% 무사히 달성해 보세요!

플레이어의 축구 미니게임 컨트롤이 실제 경기장에서 공략캐 [강태양] 움직임과 연동됩니다. 경기가 끝나고 소속팀이 승리할 경우 기본 호감도 10%, 강태양의 활약상에 따라 추가 호감도 10%, 최대 20%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경기 시작 10 , 관중석에 앉아서 떡볶이 세팅을 무사히 끝냈을 때였다. 시스템 창이 떠오르더니, 게임용 핸드폰에 축구 미니게임이 자동으로 실행되었다. 스크린 가득한 게임 화면은 언젠가 강태양 집에 놀러 갔을 게임 컨트롤과 흡사한 구성이었다.

강태양의 움직임이 나의 게임 컨트롤과 연동된다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스크린 모형 경기장에서는 클럽서울의 유니폼 색과 같은 붉은색 점이 깜빡거렸다. 그중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아마도… 강태양을 뜻하는 듯했다.

“말도 돼….

화살표 모양의 버튼을 누르자, 내가 조작하는 대로 붉은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경기장 내부에서도 강태양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화살표가 방향 이동이고, 가운데 동그라미 버튼을 누르면 슈팅이 되는 건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시험 삼아 화살표 버튼을 눌러 보았더니, 강태양이 엇비슷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같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그나마 전반전에서 강태양의 컨디션이 좋게 설정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노을이 울긋불긋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거대한 스타디움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관중이 운집해 있었다. 경기장 날개에서 하얗게 번쩍이는 인공조명이 진녹색 잔디 위로 내리쬐었다.

경기 시작이 임박하자 관중석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고조되었다. 와아아- 각자의 팀을 응원하는 함성이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때렸다. 조금은 다른 이유로 긴장한 나는 핸드폰을 바짝 움켜쥐었다.

삐이익-.

경쾌한 휘슬 소리와 함께 킥오프가 선언되었다. 둥그스름한 축구공이 하프라인에서 , 탄력적으로 튀어 올랐다. 포메이션을 이룬 선수들이 푸릇푸릇한 잔디 위에서 동시에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경기장과 동일하게, 핸드폰에서 실행되는 미니게임에서도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홈팀인 클럽서울이 선제 공격을 시작했다. 수비 라인을 길게 가로지르는 롱패스를 강태양이 바로 받아냈다.

강태양이 공을 잡기에 움찔 놀라서 화면에 버튼을 마구잡이로 연타했다. 하지만 마음만 급했던 탓인지, 손가락이 맥없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 ~ 헛발질이라니. 강태양 선수, 오랜만의 복귀전이라 아직 컨디션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요?

- 확실히 강태양 선수답지 않은 실수인데요~ 오늘 보는 눈이 워낙 많다 보니, 선수 본인에게 부담감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초적인 실수에 장내 아나운서가 탄식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당황해하는 강태양의 얼굴이 전광판에 대문짝만하게 잡혔다.

강태양이 난처하다는 짙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본인이 느끼는 컨디션은 충분히 좋은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영문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우우- 경기장 안에서 묵직한 야유가 울려 퍼지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제대로 실전이다.

나에게 있어 강태양 루트를 마무리하는 메인 퀘스트는 중대한 게임 관문이었지만, 강태양에게도 오늘 경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경기 시작 직전 기자회견에서 갖은 어그로를 끌었는데, 그래 놓고 복귀전을 망친다면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어쩌면 오늘은 강태양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될 순간일지 몰랐다.

사실을 깨닫자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에 실렸다. 자리에 앉은 핸드폰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혹시라도 손짓이 흐트러질까 숨도 제대로 크게 쉬며 컨트롤을 이어 나갔다.

              

#76

- 강태양 선수, 다시 잡았습니다. 안쪽 측면으로 쏜살같이 쇄도해 들어갑니다.

다시금 기회를 잡은 강태양이 이번에는 측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저돌적인 돌파에 상대팀 수비 라인이 순간적으로 교란되었다.

그러나 수비수들이 금세 공을 잡은 강태양을 에워싸, 지금 이상으로 깊숙이 전진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원형 버튼을 누르자 강태양이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 , 허를 찌르는 슈팅입니다! 철벽 수비로 유명한 어벤저스에서도 긴장이 바짝 되겠어요~

- 아쉽게 골대에 맞고 튕겨 나왔습니다만, 슈팅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 있는 느껴지는데요.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슬슬 게임에 감이 잡혔다. 경기장의 강태양도 자신감을 되찾은 듯했다. 그래, 있어! 내가 발컨이라 해도, 강태양은 리그 최고의 축구선수니까 받아내 거다.

팽팽한 중원 싸움 끝에 이번에는 포항 어벤저스가 공격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골키퍼 정면으로 맞은 슈팅은 도리어 시티서울에게 역습의 기회를 내어 주었다.

수비수가 재빨리 공을 걷어 내자, 시티서울의 미드필더가 길게 패스를 찔렀다. 이때다 싶어 게임 스크린 버튼을 연타했다. 가뿐하게 공을 받아낸 강태양이 감각적인 드리블과 함께 적진을 가로질렀다.

- 왼발 슈우웃! 강태양 선수의 강력한 슈팅이 골대 안으로 시원하게 빨려 들어갑니다!

- 클럽서울의 선제골이 기선제압을 톡톡히 하네요. 우리의 강태양 선수, 달여 만의 경기인데 감각이 전혀 녹슬지 않았는데요?

경기에 몰두한 강태양은 사냥하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본능을 발휘했다. 동물적인 반사 감각으로 수비수를 제치며 골대 앞으로 돌진했다. 군더더기 없는 포물선을 그리는 강력한 슈팅이 오늘 경기 득점으로 이어졌다.

“와아아!

게임 화면에서 역시 득점을 기념하는 팡파르가 화려하게 터뜨려졌다. 해냈어! 물론 나는 관중석에서 컨트롤 버튼을 누르며 거들 (?)이었지만, 강태양과 함께 귀중한 성취를 이뤄 것처럼 벅찬 마음이 들었다.

득점에 성공한 다음부터는 경기의 흐름이 클럽서울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경기장을 뒤흔드는 관중의 응원 소리와 함께, 강태양은 클럽서울 공격수들을 이끌고 골대 앞을 현란하게 헤집었다.

크고 작은 공격 기회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번째 골은 전반전 32, 상대 수비수의 반칙으로 얻어 프리킥이 계기가 되었다. 강태양은 190cm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로 몸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공중을 가로지른 축구공이 골대 앞에 다다랐을 , 강태양이 유연한 헤딩으로 골네트를 흔들었다.

후반전에도 클럽서울은 2:0으로 무난하게 승기를 잡았다. 경기 종료 5분을 남겨 시점, 강태양이 민첩한 발재간으로 명의 수비수를 따돌렸다. 절묘한 타이밍에 원형 버튼을 누르자, 강태양은 왼발 인사이드로 정확한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가 뒤늦게 팔을 뻗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상대편에서 손쓸 새도 없이 , 뻗어나간 축구공이 골대 안으로 매끄럽게 빨려 들어갔다. 현재 스코어는 3:0, 강태양이 번째 골을 터뜨리자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태양! 강태양! 강태양!

홈팀이 압도적인 승리에 가까워지자 경기장에서도 열띤 흥분이 넘실거렸다. 관중석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오늘 하루 경기에서 맹활약한 강태양의 이름을 연호했다. 귓전을 먹먹하게 때리는 환호성에 역시 고양감으로 손끝이 저릿해졌다.

“태양이 , 정말 최고야!

강태양은 푸르른 잔디 위로 , 무릎을 미끄러트리며 화려한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동료 선수들이 우르르 강태양을 에워싸고, 생동감 넘치는 그라운드의 현장을 경기장 스크린이 포착했다.

희열로 흘러넘치는 강태양의 얼굴이 스크린 화면 가득해졌다. 그를 알아챘는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인 키스를 여러 날렸다. 그러면서 능청스럽게 눈을 치뜨는데, ,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웃음이 절로 터졌다.

- 강태양의 해트트릭과 함께 경기는 3:0, 클럽서울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올해에는 클럽서울이 우승을 노려 수도 있겠는데요?

- 지금 기세만 이어 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늘 승리의 일등 공신인 강태양 선수는 K리그를 평정하고 유럽 리그에 진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경기 종료 , 대형 스크린이 오늘 경기의 MVP 선정된 강태양을 다시 한번 조명했다. 경기 도중 맹렬한 눈을 빛내며 무섭도록 승부에 몰입하던 강태양이 관중들을 돌아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럽서울의 선수들과 , 누구 하나 가릴 없이 승리의 환희를 만끽했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

*후반전: 복귀전* 승리 호감도 10%, 경기 활약상에 비례한 호감도 10% 공략캐릭터 [강태양] 호감도가 도합 20% 상승합니다.

<SYSTEM> 메인 퀘스트 클리어에 필요한 호감도 수치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반면, 경기 시간 90 동안 평생 없는 집중력을 모두 소진한 탓에 나는 온몸이 기진맥진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등받이에 흐물흐물한 몸을 기댔다. 쏜살같이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면서도 퀘스트를 성공한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아 맥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

경기가 끝난 관중이 떠나고 선수들이 빠져나간 스타디움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전동 청소 카트가 경기장을 바퀴를 돌며 잔디를 매끈하게 정돈했다. 평평해진 그라운드는 드넓은 광야처럼 인적 하나 없이 트여 있었다.

치열한 경기의 여운이 남은 그라운드 아래에서 뜨끈한 지열이 푹푹 치고 올라왔다. 바람 불지 않는 스타디움에는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가 가득했다. 한복판에 강태양은 꼿꼿한 풍향계처럼 완벽한 균형을 잡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

“…….”

멀리서도 강태양의 눈매가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무표정일 때는 다소 매섭게 느껴질 정도로 선이 다부지고 강인한 얼굴이었다. 강태양은 지평선 너머를 관조하듯, 경기장 날개에서부터 점점이 흩뿌려지는 하얀 빛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 우주야!

그러다 나를 발견한 강태양의 얼굴이 으깬 과일처럼 부드럽게 흐무러졌다. 어깨를 완전히 쪽으로 돌린 강태양이 완벽하게 무장해제된 상태로 웃었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를 온전히 마친 채였다.

“태양이 !

이유를 모르고 조급해지는 마음에 강태양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경기 도중 땀에 흥건하게 젖었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70] 위로 지난번보다 20% 상승한 호감도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SYSTEM> 주요 스팟인 [그라운드 골네트] 앞에서 공략 캐릭터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그대로 시선이 맞닿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 생각에 잠길 새도 없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저를 달라는 , 강태양의 바로 뒤에 있는 골네트에서도 빛무리가 번졌다.

“있잖아, , 내가 축구 그라운드에 직접 내려와 보는 처음인데….

“아, 그런가? 나한테는 같은 장소인데, 생각해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진 찍을까?

무척이나 뜬금없이 여겨질 법도 했지만, 강태양은 골네트 앞에서 사진을 찍자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퀘스트 완수를 향해 게임이 무난하게 흘러가도록, 시스템이 현재 상황을 제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경기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라운드를 배경으로 강태양과 사진을 찍었다. 직전의 격한 운동으로 강태양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깻죽지에 가볍게 팔을 두른 강태양이 도톰한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 비해 강태양의 옆에 나는 다소 긴장해 있고, 조금은 조심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어깨를 움찔 떨고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오래도록 남을 사진이라는 생각에 어설프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SYSTEM> [메인 퀘스트] “믿음의 조건”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플레이어 매력 수치가 40 상승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스타디움에 눈부신 조명이 드문드문 빛을 드리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 박진감 넘치는 축구 경기가 펼쳐져서인지, 그라운드가 맥박이 뛰는 것처럼 , , 얕게 박동했다.

지금 순간만큼은 이곳이 강태양과 나만을 위한 공간인 것처럼, 관중이 없는 축구장에서 서로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나,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크기로 유명하거든. 게다가 여기는 홈그라운드고.

“…….”

“그런데 오늘 경기할 때에는… 관중석에서 우주 네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떨리더라.

“…….”

“아까 해트트릭 세리머니, 생각하면서 건데 혹시 봤어?

슬그머니 질문을 건네는 강태양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평소 감정 표현이 강렬하고 풍부한 강태양이지만 지금만큼은 쑥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난번 한강에서처럼, 당황해서 쭈뼛거리는 대신 애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세리머니 당연히 봤지, 경기 너무 봤어, 오늘 정말 잘하더라, 멋있었어.

지금 순간 그에게 있는 말들은 사실 많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강태양의 지긋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나, 실은 우주 너한테 말이 있어.

              

#77

“네가 지금까지 나를 친구로만 왔다는 알아.

“…….”

“그치만 이제는 내가 옆에서, 그냥 친구인 못하겠어.

“…….”

“연우주, 좋아해. 너한테 평생 올인할 마음으로 하는 얘기야.

조금은 멋쩍어하면서도 차근차근 말을 이어 나가는 강태양의 눈동자가 확신으로 단단하게 빛났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잔잔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나랑 연애하자, 연우주.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줄게.

상대편 골대로 서슴없이 돌진하던 때와 같이 강태양이 진취적으로 선언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충분히 그를 쟁취할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SYSTEM> 공략캐릭터 [강태양] 1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스토리 진행을 위해 선택이 가능한 단독 엔딩 루트와 다중 공략 루트가 자동으로 생성됩니다.

<SYSTEM>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 5 안에 진입 희망 루트를 선택해 주세요. [단독 엔딩 / 다중 공략]

만약 내가 강태양과 같은 마음이었더라면, 아마 지금은 평생에 가도 잊지 못할 극적인 순간이 되겠지. 하지만 그의 마음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강태양의 설렘에 비례해 미안함만이 커졌다.

“태양이 형….

그런 미안함조차 섣불리 내서는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같은 곳에서 상대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가 느끼는 감정의 온도 차가 선명했다. 이제 대체 어쩌면 좋지….

“…….”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어딘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강태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마 그를 오래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혹으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남자로 보여서 그런 거야?

한참을 머뭇거리던 강태양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리고, 그대로 강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밭게 터져 나왔다.

강태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고백이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같았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저돌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움켜쥐어 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듯했다.

“네가 나랑 연애를 아직 봐서 그럴 수도 있어.

“…….”

“일단 시작만 보면, 연우주 너도 금세 나에게 빠질걸?

입꼬리를 끌어올린 강태양이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뻣뻣하게 굳은 눈매가 바르르 진동했다.

번째로 겪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보다 훨씬 힘겹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거절의 말로 다시금 그의 마음을 헤집어야 했다.

“내가, 지금 연애를 상황이 아니어서 그래, .

“…하, 우주야.

“…….”

“미안하다, 너한테 부담 주거나 불편하게 하려는 아닌데.

“…….”

“그냥… 나는 너한테 되는 건지,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진심이었던 만큼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 거절을 힘겨워하는 강태양의 표정이 느릿하게 일그러졌다. 감추거나 덮으려고 하지만, 실은 깊이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자책감과 자괴감은 나에게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이런 상황까지 치닫게 것이 결국은 전부 책임인 같았다.

“아니야, 형… 내가 어딜 가서 형처럼 멋진 사람을 만나겠어.

달싹이는 입술을 간신히 열자 목이 얼얼하게 메었다. 정말로, 게임에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강태양 같은 사람을 절대로 만날 없었을 것이다.

불편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무수한 소문 속의 유명인사에서 시작해, 차츰차츰 교류하면서 감춰진 속내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결국 사람의 인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로 강태양이 나에게 다가오기까지.

“형, 내가… 주어진 시간 안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

“지금은 사실 일을 나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시간도 거의 없고, 다른 일에는 집중할 여유가 도무지….

어느덧 강태양을 진심으로 아끼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은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었고, 게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공략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내가, 내가 도와주면 되잖아.

물론 사실을 강태양에게 이해시키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말을 끝까지 듣는 대신 강태양은 무턱대고 제안했다.

“우주야, 우리 같이 영국으로 가자. 많아.

“…형.

“네가 하고 싶은 것들, 그거 미술, 하고 있게 줄게. 정도 능력은 .

“…….”

“그러니까… 좋아해 주면 될까?

불안한 기색으로 조급하게 말을 늘어놓던 강태양의 얼굴이 돌연 와그작 일그러졌다. , , 굵직한 눈물방울이 잘생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감으로 겉을 단단히 둘렀지만 강태양이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껴졌다. 영영 사랑을 돌려받지 못할까 , 어쩌면 자신이 본질적으로 사랑받을 능력을 결여했을까 .

“형… 정말 미안해.

강태양의 마음과 동화되어 역시도 울음이 왈칵 터졌다. 강태양을 좋아하고, 강태양이 잘됐으면 좋겠고, 강태양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진심조차 지금 순간 강태양에게는 상처를 후벼파는 칼날이 있었다.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강태양 앞에서 죄인이 수밖에 없었다. 묵직해진 심장이 엉망으로 욱신거렸다. 그를 끌어안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

“…….”

입술을 짓이기듯 깨문 강태양이 어깨를 고요하게 들썩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굵직한 눈물방울은 잔디밭 위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부풀어 오른 가슴팍이 거친 호흡에 따라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강태양에게 차마 다가설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는 나는 자리에 박힌 있었다. 마찬가지로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만 슥슥 닦아 냈다.

“지금 이대로 감정을 너에게 강요한다면, 이기적인 일이겠지.

그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로를 가다듬은 강태양이 나를 향해 웃었다. 여전히 눈매가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 강태양이 못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마음이 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 너를 포기한 아니야.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고.

“…….”

“그 일이라는 끝나면 네가 나에게 반할 수밖에 없도록, 그동안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게.

<SYSTEM> 캐릭터 동시 공략이 가능한 다중 엔딩 루트로 자동 진입했습니다.

<SYSTEM> 현재 플레이어 매력 수치가 70 달성하였으므로, 새로운 공략 캐릭터 루트 진입이 가능합니다.

강태양의 다부진 선언과 동시에 게임 스토리 진행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동시 공략이니, 다중 엔딩이니, 이상은 그런 말들을 보고 싶지도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70/100] : 1 공략 완료, 다중 루트 선택으로 공략 진행 일시 중단

루트 진입 조건: 매력 10 이상, 대학교 소아병동 봉사활동 에피소드 진행

엔딩 장소: 월드컵 스타디움

공략법: 매력이 흘러넘치고, 성적 에너지가 폭발하지만 의외로 강태양은 사랑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자신이 없는 편이다. 그런 강태양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강태양이 먼저 스스로를 믿을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한다.

TIP: 호감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스킨십부터 섣불리 진행할 경우 공략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갈 있으니 유의 바람.

이상형: 마음 한구석에 남몰래 감추고 있는 그늘을 밝혀 주는 햇살 같은 사람. 세상사에 묻지 않고 순수하고 천진한 면모를 간직한, 자신이 직접 지켜 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사람.

상징: 파란색 아스타 [꽃말: 상대에 대한 신뢰]

기숙사 방에 돌아와서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자 앨범 페이지,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 안에는 벚꽃에 이어 파란색 아스타가 화려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경기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업데이트된 캐릭터 정보를 확인하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강태양과 함께 시간이 불과 줄의 요약본으로 정리된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한 전략을 따위를 따지는 ‘공략법’을 보고 있자니, 정말 시스템은 강태양을 하나의 공략캐로 취급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난 달간 강태양과 직접 소통해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게임 공략은 일종의 비즈니스이니,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헤쳐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그렇게 떨어지듯이 단순하지가 않았다. 시간을 같이 보내고, 감정을 교류하다 보면 자연히 ‘진심’이라는 생겨났다.

하지만 게임 과제는 본질적으로 그런 상대를 가장 나쁜 방식으로 상처입혔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발버둥쳤지만, 이래서야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논다고 해도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수만 있다면 파업하고 싶다. 게임에서 리타이어 하는 방법은 없겠지?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니까, 낯선 세계 속에 평생 갇히는 건가….

까슬해진 얼굴을 감싸자 눈물이 핑글 돌았다. 게임에 빙의된 이후 모든 일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지금만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플레이 자체에 현타가 와서 자꾸만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게임을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뭉글거렸다.

당장은 게임이고 뭐고,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게임 애플리케이션은 자꾸만 푸시 알림을 보냈다. 끈질긴 진동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마자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SYSTEM> 현재 공략캐릭터 도지훈 루트 추가 진입이 가능합니다. 업데이트된 정보를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해 보세요!

지금 나랑 장난해? 짜증이 울컥 밀려들어서, 알림을 눌러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둥글게 돌돌 말았다. 새로운 캐릭터고 뭐고 당장은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78

전날 대로 되라지, 마음먹으며 무작정 뻗어 버렸던 것과는 다르게 새벽 여섯 시가 되자 성실하게 눈이 번쩍 떠졌다.

잠에서 채로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을 슥슥 비볐다. 일단 회사에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근 준비부터 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공정 중인 제품처럼 지하철에 실려 덜커덩덜커덩 여의도로 향했다.

출근 시각을 10 앞두고 회사 건물 27층에 도착했다. 그대로 경영혁신팀이 자리한 사무실로 들어서려다 그에 앞서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 나는 머리 한쪽이 삐죽 솟은 데다 와이셔츠 단추를 번째부터 완전히 잘못 끼우고 있었다. 거기에다 멍한 표정까지, 누가 봐도 ‘나 정신 놓고 있습니다’하는 모양새였다.

꼴로 용케도 30 넘게 지하철을 타고 왔단 말이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슥슥 쓸어 넘겼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탓에, 팔을 들어 올리자 근육이 저릿하게 땅겼다. 체력에 크게 무리가 만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소모가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차태주 말처럼 회사가 유치원도 아닌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지. 일단 퇴근할 때까지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찬물을 얼굴에 연거푸 끼얹고 사무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팀원들이 한데 모여든 사무실은 평소보다 웅성거렸다. 그들 하나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쪽으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어, 우주 ~

“아, 안녕하세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쪼로로 달려가 꾸벅 인사했다. 다들 입가에 웃음기가 매달려 있는 보면 나쁜 일은 아닌 같은데…. 팀원들이 묘하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주 , 이거 우주 맞죠?

어리둥절해 있는데, 김지원 과장이 내게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조회수가 10000 이상에 달하는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 게시글이었다.

제목: 강태양 숨겨둔 애인 공개(?).gif

ㅋㅋ EPL 진출하면서 영국으로 보쌈해갈 예정이라고

몹시도 자극적인 게시글의 주인공은 슬프게도 나였다. 플래시가 팡팡 터지던 기자회견장에는 영상 촬영 카메라도 있었나 보다. 움직이는 사진 나는 색색깔의 마이크가 끝까지 드밀어진 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아… 그게 제가 맞긴 한데….

“세상에, 어제 여기 다녀온 거였구나. 우주 , 정말 강태양 선수랑 그렇고 그런 사이에요?

“헉, 그런 전혀 아니고요!

“우주 쑥스러워하는 , 너무 귀엽다~.

“그럼 정말 인턴 끝나자마자 8월에는 영국으로 가는 겁니까?

“와… 프로 축구선수는 대체 어디를 돌아다녀야 만날 있는 거지?

고화질 클로즈업 사진 인물은 어디로 봐도 나인데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마지못해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주변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너나 없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아, 하하, 하하….

아휴, 난감해서 미치겠다. 화제의 인물인 강태양 덕분에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있었다. 강태양은 정말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자회견장에서 폭탄 선언을 했던 걸까?

소소한 일반인인 나한테도 정도인데 강태양 본인한테는 훨씬 하겠지? 강태양은 지금 괜찮으려나….

하지만 어제 강태양을 걷어차 놓고, 나에게는 그를 걱정할 자격이 없는 같다. 게다가 당장 눈앞에 엎질러진 물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들 일이 없나 봐요? 아침부터 여유들을 부리고.

“어머, 팀장님 오셨어요?

때마침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왼손에 차태주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림처럼 떨어지는 슈트 재킷을 입은 차태주의 존재감은 언제나처럼 선명했다. 그의 등장과 함께 분주하게 오가던 잡담이 일시에 멎었다.

“요새 내가 우리 팀을 너무 편하게 풀어 줬나?

“팀장님,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저희 지금보다 업무 로드 올라가면 길로 노동청에 신고해야 합니다.

“엄살 부리기는.

오늘 아침 팀장님의 심기는 어떠신지 눈치를 살피던 민선재 과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가벼운 타박을 건네면서도 차태주 역시 아침의 화제가 내심 궁금한 눈치였다. 나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팀원들 쪽으로 차태주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여전히 김지원 과장의 핸드폰 화면 안에는 잔뜩 당황한 채로 입술을 벙긋거리는 내가 있었다. 그를 흘긋 내려다본 차태주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덩달아 긴장한 나는 ,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린 차태주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우주 어제 볼일은 봤고요?

이어진 질문은 얼핏 평온하게 들릴 만큼 정갈한 목소리였다. 방금 심드렁하게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것과는 다르게 골똘한 시선이 조금 오래 얼굴 부근에 머물렀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머리 위에는 [10] 어제의 소동 끝에 4% 하락한 호감도가 반짝였다.

“…….”

“…….”

없냐는 , 차태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나름대로 나에게 기회를 주는 같기도 했다. 이대로 내가 굽히고 들어가면, 어제 일은 없었던 것처럼 모른 넘어가 주겠다는 .

“…네, 팀장님.

말끝을 애매하게 얼버무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최선을 다해 변명해야겠지만… 결국은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리며 차태주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출근은 했지만 다른 ‘공략 캐릭터’인 차태주를 보자 숨이 , 막히는 듯했다.

이제는 게임 공략 대상과 유대감을 쌓는 일이 덜컥 겁부터 났다. 어차피 이번에도 끝에 다다라서는 상처로 너덜너덜해지고 텐데…. 지금과 같은 감정 소모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하.

숙인 머리꼭지 위에서 짧게 혀끝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가 차거나, 어쩌면 한심하다는 것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차태주를 둘러싼 공기가 뾰족뾰족하게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뒤이어 조금은 거칠게 몸을 돌린 차태주가 개인 오피스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대로라면 차태주에게 단단히 찍히는 아닌가…. 호감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호감도를 의식하는 스스로에 대한 현타가 일어 한숨을 내쉬었다.

***

마지막 정신력을 간신히 쥐어 짜내서 금요일까지 회사에 출근했다. 무슨 생각으로 회사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때문에 팀에 지장이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업무는 어떻게든 마쳤다. 따로 혼나지는 않은 보면 어찌어찌 문제 없이 마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주말이 되자 몸과 마음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의무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내 잠복해 있던 허탈함이 다시금 와르르 밀려들었다.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56 (남은 시간: 43 20시간 52)]

아직 마지막 공략 대상인 도지훈은 제대로 만나 보지도 못했다. 난이도가 높은 루트라고 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공략에 돌입해야 텐데…. 나에게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알면서도,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아서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도, 애써 태연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강태양의 얼굴이 잔상처럼 시야에 머물렀다. 그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정에 동화되었던 만큼 마음에도 둔탁한 통증이 남았다. 어떻게 보면 ‘게임’일 뿐인데, 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감정적으로 흠뻑 몰입해 버렸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처음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천유현에게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확인하는 대로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와 함께였다.

음… 무슨 일이지? 조금은 의아한 마음으로 천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어 남짓 울리기도 전에 천유현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잠긴 목소리가 새지 않도록 큼큼, 목을 가지런히 가다듬고 천유현에게 인사했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 우주 , 주말이라 쉬고 있는데 연락을 했나요?

“아니에요, 제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혹시 무슨 일이세요?

- 따로 선약이 없다면, 오후에 열리는 비공개 미술품 경매에 우주 씨와 같이 가고 싶어서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천유현의 집무실에서 봤던 프란츠 베르하른트의 작품도 비공개 경매에서 구입했다고 했었지. 그때에도 역시 천유현은 미술관 관장이어서 드문 기회가 주어지나 보다,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어, 그런 곳에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 물론이죠, 내가 직접 데려가는 건데요.

“음…. 사실 제가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기는 해서요, 관장님.

현실에서는 원해도 없는 곳이니, 평소였더라면 신이 나서 한달음에 달려갔겠지만… 오늘만큼은 솔직히 게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 이번 경매에는 간만에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우주 씨가 본다면 분명 좋아할 같습니다.

평온한 목소리로 천유현이 나를 재차 설득했다. 고민이 되는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아닌 천유현과 함께라면 괜찮을 같기도 하고….

경매 개최까지 불과 시간 남짓만을 앞두고 있어서 천유현이 급하게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제안을 수락하자 천유현이 그길로 집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흘긋 쳐다본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이 말그대로 엉망이어서 황급히 외출 준비를 했다.

 

기숙사 건물 앞에서 천유현을 기다렸다. 골목을 돌아 부드럽게 정차한 롤스로이스에서 천유현이 내렸다.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가서는데, 얼굴을 확인한 천유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우주 , 얼굴이 그래요?

“아….

이번주 내내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눈두덩과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 있었다. 멋쩍어지는 기분에 손바닥을 들어 얼굴 전체를 가리듯이 매만졌다. 나름대로 냉찜질을 하고 나온다고 했는데 그게 티가 많이 났나 보다.

“혹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거예요?

              

#79

“아니에요, 별로 그런 건….

“괜찮다면 나에게 이야기해 줄래요?

눈앞의 천유현은 무척 걱정스럽다는 기색으로 얼굴을 살폈다. 큰일이었다. 세심한 시선에 그동안 애써 괜찮은 , 꾹꾹 눌러 놓았던 속상함이 다시금 퐁퐁 솟구쳤다.

“그게….

하지만 정작 입술을 열자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길을 잃어버린 기분으로 천유현을 올려다봤다. 천유현이 괜찮다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냥, 너무 막막해서요.

“…….”

“앞으로도 게임을 계속 해야 텐데, 이대로는 도무지 잘할 자신이 없어서….

혼자서 끙끙 앓던 고민을 밖으로 간신히 꺼내자, 그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슬아슬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핑글 돌았다.

“하아….

게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공략을 이어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에 자꾸만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놀란 듯이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천유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주 .

순간, 단단한 팔뚝이 나를 안으로 억세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동작에 어리둥절해져 눈을 두어 깜빡이자, 이미 천유현에게 단단하게 안겨 있는 채였다. 셔츠에 감싸인 탄탄한 가슴팍 위로 뺨이 동그랗게 문질러졌다.

“…히끅!

노골적일 정도로 생생한 감촉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깜짝 놀라서 눈물이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서 흘긋 시선을 들어 올리자 천유현의 얼굴이 초조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 낯설다고 생각하기도 찰나, 미간을 단단히 좁힌 천유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천유현의 품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채로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은은한 체향이 코끝에 퍼지고 부드러운 온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이런 식의 포옹은 익숙지 않아서 몸이 저절로 경직되었다. 들썩이던 가슴팍이 천유현과 맞닿은 채로 빳빳하게 굳었다.

그를 알아차린 천유현이 발짝 늦게 품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내게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천유현의 움직임이 그답지 않게 어색했다.

“과, 관장님….

내가 빙의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NPC랑도 스킨십이 가능한 건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처음부터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는지 천유현 역시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곧이어 아무 없었던 것처럼, 오른쪽 어깨에 가볍게 닿아 오는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일단 차에 타고, 차분하게 얘기할까요?

“아, !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천유현의 옆선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길거리에서 천유현과 반쯤 부둥켜안고 있었다는 알아차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짧게 내젓고 천유현을 따라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뒷좌석에 천유현과 둘이서 나란히 앉는 것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져 몸을 뒤쳤다. 천유현의 롤스로이스는 운전석과 뒷좌석이 불투명한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었다. 공간은 충분히 넉넉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밀폐된 실내였다.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 공기가 써늘해서 피부 위로 솜털이 뾰족 곤두섰다. 가죽 시트에서 특유의 텁텁한 향이 올라와 목을 작게 가다듬었다. 별로 멀지 않은 , 옆자리에 앉아있는 천유현이 의식되어서 흘긋 쳐다봤다.

“관장님….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에 오묘한 이채가 돌았다. 평소보다 조금 탁해진 회갈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향했다. 천유현은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요일에 강태양 루트까지 무사히 공략을 했군요. 축하해야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게임이, 생각보다 감정 소모가 엄청 심하더라고요.

게임 공략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자괴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강태양은 나름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같다. 어떻게든 상처를 봉합하는 방법을 터득한 채로. 결국은 책임져 수도 없는데, 그가 애써 갈무리한 마음을 내가 괜히 파헤친 아닌가 싶었다.

“게임 공략에 성공하고 나면 저는 현실로 돌아갈 텐데, 그러고 나면 저도, 다른 사람들도 결국엔 누구 하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을 같아요.

“…….”

“그래서 어제는 이대로 게임을 계속 하는게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건 됩니다.

천유현이 잘라 선언했다.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흠칫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제야 천유현은 다시금 평온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이제 와서 포기하면 지금까지 아깝잖아요. 우주 ,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는데.

“…….”

“상대의 마음을 받아 없다고 해서, 우주 씨가 느꼈던 감정이 거짓이 되는 아니니까요.

“…….”

“그동안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겠죠. 그러니 강태양이라는 사람도 우주 씨를 좋아하게 테고요.

“…….”

“함께 보낸 시간이 소중했고, 서로에게 뜻깊었다는 사실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차분하고 담담한 격려가 이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천유현에게서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설정값에 따라 정해진 답을 내놓는 같았던 그동안과는 다르게, 묘하게 출력이 삐걱거리는 같달까?

“그렇지만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요.

“…….”

“제가 게임에 너무…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걸까요?

이곳에서 살아가는 천유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세계는 나에게 단순히 게임일 뿐이었다. 어차피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갈 것이라면 모질게 마음 먹어야 하지 않을까. 감정적으로 깊이 몰두할수록, 목표를 달성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일을 단순히 게임으로 치부할 없기 때문에 상처받는 거겠죠.

“…….”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천유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천유현의 얼굴은 다소 착잡해 보였다.

“아무리 그러겠다고 마음 먹어도, 누군가를 완벽히 이용할 없으니까. 우주 씨는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서요.

“…….”

“어쩌면 그래서 자꾸만 우주 씨에게 마음이 쓰이는 같기도 하네요.

“…….”

“아니면 역시도, 우주 말대로 모든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걸까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천유현이 말을 멎고는 나직한 웃음 소리를 흘렸다. 바람 새듯이 흐르는 웃음에서 희미하게 자조적인 기운이 묻어났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창문 쪽을 바라보는 천유현의 옆모습이 어딘가 쓸쓸했다.

“나와 같이 미술품 경매에 주겠어요? 오늘 우리에게는 기분 전환이 필요할 같네요”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천유현을 멍하게 바라보다, 발짝 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고개를 잘게 끄덕거리자 부웅, 소리와 함께 롤스로이스가 도로 위를 순탄하게 미끄러졌다.

***

천유현과 나란히 도도한 회백색의 갤러리 건물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 갤러리 전체를 대관해서 진행하는 비공개 경매에는 소수의 자산가와 미술품 컬렉터가 사전에 초청되었다. 차가운 무표정에, 격식 있는 드레스와 슈트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한 실내 분위기가 엄숙했다.

“오늘 비공개 경매에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단상에서부터 전해지는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과감한 터치가 도드라지는 회화 작품이 무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스크린에 작품 정보와 시작 가격이 나타났다. 나까지 덩달아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첫 번째 작품입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국내 신진 화가인 유시안이 2019년에 발표한 추상화 시리즈인데요.

작품 소개가 마무리되자 경매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객석에 조용히 앉은 참여자들이 날렵한 동작으로 패킷을 들어 올리며 입찰에 참여했다.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경쟁자를 제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얻어 가겠다는 치열한 각오가 느껴졌다.

그림에서 조각상, 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이 경매를 통해 소개되고, 하나하나 응찰이 이루어졌다. 작품에 대한 가치가 실시간으로 매겨지는 현장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경이롭게까지 느껴졌다.

“지금 오른쪽에 있는 작품이야말로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라고 있겠는데요. 색채의 마법사라고도 불리는 화가 알랭 쿠르베가 말년에 생트로페 해변에서 머무르면서, 특유의 섬세한 화풍으로 프랑스 남부 휴양지의 아름다운 정경을 담아낸 회화입니다.

두툼한 천이 거두어지고 새롭게 드러난 작품을 보며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물결처럼 흐르는 활달한 터치로 생동감 있게 묘사된 해변은 세상의 공간이 아닌 것처럼 눈부셨다. 화사한 색채에서 묻어나는 낭만적이면서도 포근한 분위기 때문인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우주 씨는 작품이 특별히 마음에 드나 봐요?

“아, 그런 같아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이네요.

좋은 그림일수록 많은 사람이 널리 보고 즐겨야겠지만, 워낙 아름다운 작품이어서인지 묘하게 소유욕이 자극됐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천유현이 넌지시 질문해 왔다. 속마음을 들킨 같은 기분에 머쓱하게 웃었다.

“이 작품은 경매 7 원에 출발해서 5천만 올라가겠습니다.

입찰 시작과 함께 천유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패킷을 들어 올렸다. 움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자리의 천유현을 돌아보았다. , 단순히 예뻐 보인다는 이유로 구매를 결정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가격인데?

“과, 관장님! 혹시나 때문에 그림을 구매하는 아니시죠?

“우주 씨가 안목이 있는 같은데요? 역시도 프리뷰 전시회에서 보고, 눈독을 들이고 있던 작품입니다.

              

#80

물론 패킷을 들어 올린 것은 천유현뿐만은 아니었다. 오늘 경매의 기대작이라는 인사치레는 아니었는지, 객석의 사람들은 없이 입찰에 뛰어들었다. 패킷을 확인한 경매사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림에 값을 매겼다. 치솟는 가격에 비례하여 긴장감이 고조되는 경매장은 총성 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3 5, 14 확인합니다.

순식간에 그림의 가격은 시작가의 배인 14억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물론 그만큼 값을 매기기 어렵게 가치 있는 작품이기는 했지만, 감았다 뜨면 억대씩 오르는 그림의 가격에 심장이 아프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가격의 오름세가 놀라운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정도쯤은 으레 있는 일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적당한 가격에 그림을 매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 5천만 원입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15 여쭙니다.

옆에 있는 천유현도 마찬가지였다. 경매장의 치열한 분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가 냉철한 표정으로 패킷을 들어올렸다. 이미 가격이 오를 만큼 올랐다고 판단했는지 선뜻 추가로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없었다.

“알랭 쿠르베의 <해안에서> 천유현 대표님께 14 5천만원에 최종 낙찰 되었습니다.

땅땅, 경쾌하게 경매봉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천유현이 그림의 주인이 되었다. 적막한 실내 공기 사이로 아쉬움 섞인 탄식이 나지막하게 번졌다.

“우와….

내내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경매를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내가 직접 참여한 아니었지만, 천유현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림을 얻었다는 사실에 묘하게 뿌듯해졌다. 들뜬 마음으로 그를 돌아보자 천유현이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경매가 종료되자 직원이 천유현에게 다가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어서 사람은 작품의 양도 절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전액 현금 지불이라니, 낙찰가는 나로서는 좀처럼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엄청난 금액이어서 눈앞에서 오가는 대화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와, 이제 그럼 그림이 완전히 관장님 소유가 거네요.

“하하, . 늦어도 다음 중으로는 그림을 받아 있겠어요.

“…저한테는 모든 완전히 다른 세상 얘기 같아요.

“우주 씨도 머지 않아 미술계의 일원이 텐데요.

정말로 그럴 있을까? 그동안 막연하게 상상만 왔지만, 실제로 미술계의 현장을 경험하자 감회가 남달랐다.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그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역시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요. 관장님, 그러면 그림은 나중에 만월미술관에도 전시할 예정이세요?

“큐레이터와도 논의를 거쳐야겠지만, 여러가지로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와….

“다음번에는 그림을 보러 재단을 찾아 주세요. 미술관에 정식으로 전시하기 전이라도, 우주 씨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오늘 경매장에서 구매한 그림이 만월미술관에 전시될 수도 있다니, 상상으로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과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천 대표님 요즘 지내세요? 알랭 쿠르베 작품은 대표님께서 가져가셨네요. 프리뷰 때부터 눈독 들이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디렉터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예상보다도 경쟁이 치열했던 같습니다.

“대표님이 자본으로 밀어붙이시면야, 좀처럼 당해 사람이 없겠죠.

갤러리 복도로 나서자 오늘 비공개 경매에 참여한 인사들이 하나둘 천유현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들은 방금 경매장에서 패킷을 들어 올리던 이들이기도 했다. 발짝 뒤로 물러나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업계 동향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옆에 계시는 분은?

“아직 정식으로 데뷔는 했는데, 화가입니다. 재능 있는 친구여서 최근에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연우주라고 합니다.

“천유현 대표님 안목이라면야 말할 것도 없겠네요. 나중에 우주 작품도 경매장에서 만나 날을 기대할게요.

그러다 관심이 나에게 닿았을 , 천유현이 흔쾌히 나를 대신 소개해 주었다. 단순한 서비스라는 알면서도, 다음을 기약하는 이야기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올랐다. 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느낌으로 발끝이 두둥실 떠올랐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화가로서 스스로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갤러리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어느덧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늘 위에 부드럽게 흩뿌려진 구름 사이로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스며들었다. 빛무리가 지나간 자리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석양 특유의 고즈넉한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저녁의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아침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알게 되었다. 천유현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워 이곳까지 따라왔지만, 처음에는 사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한 미술품 경매는 확실한 기분 전환이 되었다.

“관장님, 오늘 일부러 저를 이곳에 데려와 주신 거죠? 제가 게임 때문에 힘들어 같아서….

말에 천유현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이제야 나를 향한 천유현의 배려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계속 해야만 하는 건지…. 목표가 흐려진 기분에 조금 울적했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다시금 이정표를 찾을 있었다.

“감사해요, 관장님. 덕분에 기운이 나는 같아요.

“별말씀을요.

“…….”

“앞으로도 게임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 씨가 너무 의기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노력 없이 원하는 것을 당장에 얻을 수는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과정에서 조금도 지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이런저런 역경을 겪는 와중에도 처음에 내가 모든 것들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잊지 말아야 했다.

“우주 씨가 현실로 무사히 돌아가서, 꿈을 이룰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서 좌절하고, 무너지려고 그동안 많은 날들을 버텨 아니니까. 게임 속에서 보낸 60 남짓한 날들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겪어온 삶까지 포함해서 생각해도 역시 그랬다. 오늘 짧게나마 눈앞에 스쳐 꿈을 되짚어 보니, 제대로 부딪히지 않고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런데 관장님, 관장님은 제가 현실로 돌아갔으면 하시는 거죠?

“네?

“어떻게 보면… 제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관장님을 다시는 수가 없는 거니까요.

나를 향한 천유현의 온전한 지지 덕분에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가닥도 잡혔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서운한 기분도 솟았다. 언제나 일처럼 나를 도와주는 무척 고마웠지만, 천유현은 가끔씩 나를 현실로 돌려보내서 안달이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주 씨가 원해서 이곳에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니까요.

사실 그동안 천유현과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장난을 거였는데, 천유현은 그런 나의 질문에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잠깐의 공백 끝에 무척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서 오히려 내가 머쓱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신경 쓰는 것도 좋지만, 그러느라 우주 씨가 너무 지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봤으면 해요.

“…….”

“저에게는 우주 씨가 어떤 마음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말을 마친 천유현이 무심코 쪽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그러다 손바닥이 미처 뺨에 닿기 ,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어 갔다. 우리는 얼마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기숙사 앞에서 멈춰선 롤스로이스에서 내리면서 하늘에 희끄무레 솟아오르는 초승달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뭉게뭉게 부풀어 오른 구름 사이로 달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오늘 하루 내가 천유현과 보낸 시간처럼 편안하면서도 모호한 빛깔이었다.

평소에 단단히 두르고 있던 벽이 꺼풀 벗겨진 듯한 오늘의 천유현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마냥 평탄하고 여유롭게만 보이던 사람이 조금씩 동요하는 모습을 내비치자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묘한 충족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NPC로서가 아닌, 인간 천유현을 엿보게 기분이랄까?

그렇게 조금은 서로에게 가까워진 것처럼.

여전히 나는 천유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이 없었지만, 천유현은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고, 가장 두려워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같았다. 오늘 역시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를 격려해주고, 내가 필요로 했던 말을 건네 주었다.

어쩌면 내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어쩌면 천유현에게도 필요한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에 이렇게 일처럼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게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면 천유현은 더는 만날 수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단순히 혼란스러운 이상으로, 그와 조금 가까워지고 그의 정체를 파헤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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