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 91-100

#91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버튼을 , 누르자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느라 배경판의 강렬한 원색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그러다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발… 문서 작성 능력 걸리게 주세요!

회의에서는 다음 안건이 신중하게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혼자서만 조금은 다른 이유로 심각해져 손에 땀을 쥐고 집중했다. 한참을 빙글빙글 회전하던 룰렛이 거의 멈추고, 화살표가 개의 사이에서 간당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멈춘 곳은…

- 일주일 동안 메일, 보고서, 기획안 문서 작성 능력 3 향상

<SYSTEM> [특별 아이템 뽑기] 축하합니다! 룰렛 돌리기 결과로 선택된 아이템에 따라 일주일 동안 플레이어의 문서 작성 능력에 3 버프가 발생합니다.

세상에! 그대로 소리라도 지를 뻔한 간신히 참아냈다. 거짓말처럼 가장 원하던 능력치 버프 아이템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면 내가 아이디어만 열심히 짜내면, 문서 작성 능력치는 커버할 있으니까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회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까는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졌지만 이제는 다시 꿈과 희망이 차올랐다. 때마침 회의가 끝나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시간 남짓 밀도 있게 이어진 회의에 조금은 지친 기색의 팀원들이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우주 씨는 느닷없이 일을 떠맡게 됐는데도 씩씩하네요?

“팀장님도 , 아무리 입히기 전문이라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헤헤, 아니에요. 그래도 열심히 보려고요.

나로서는 황무지에 난데없이 떨어졌다가 간신히 지도라도 얻게 기분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압박감 충만한 상황이다 보니 생글생글 웃는 내가 의아하게 느껴진 듯했다.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팀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의욕 넘치는 인턴을 웃어넘기며 회의실을 떠났다.

***

월요일 회의까지 주어진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동안은 주로 다른 팀원들을 보조해 왔다면, 이번에는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처리를 해야 했다. 회사에 들어온 처음으로 차태주가 직접 나에게 할당한 업무인 만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와, 버프 아이템 효과 장난 아니잖아?

다행히 특별 아이템 뽑기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입력하면, 키보드 위에서 손이 저절로 움직여 문장이 자동적으로 완성되었다.

인풋: 몽이버스??에서 이용자들이 설정이랑 캐해석 하면서 즐길 있도록! 콘텐츠 하나하나 공개하면서 세계관 빌드업 하면 뭔가 팔로어들도 뒤로 갈수록 기대하게 듯…

아웃풋: 캐릭터 몽이를 중심으로 타깃 소비자가 몰입할 있는 일종의 유니버스를 구축, 연속성 있는 콘텐츠 게재 통해서 세계관을 서서히 확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소비자 참여 유도 브랜드 로열티 형성 가능.

가볍게 구상해 아이디어들이 모니터에 회사어로 변환되는 지켜보자 경이로웠다. 선에서 떠올려 생각들은 어설퍼 보였는데, 정작 문서에 간결하게 정리된 내용을 읽어 보자 제법 그럴듯했다. 역시 모든 아이디어가 포장하기 나름이구나!

게임에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빤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은 팍팍했던 현실 못지 않게 게임 속에서도 바쁘게 돌아다니며 애써야 했다. 이번에도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노력해야 하는 마찬가지였지만, 비교적 쉽게 있어서 일에도 훨씬 탄력이 붙었다.

1 노력해도 10 성과를 얻을 있으니까 충분히 노력할 만한 의지가 생긴달까? 덕분에 신이 나서 SNS 운영 기획안 작성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계정 컨셉과 콘텐츠 시안만 간단히 보려고 했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퐁퐁 샘솟았다.

“…흠, 그런데 너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 두었나?

금요일 퇴근 직전에 일을 꼬박 정리한 기획안을 훑어보았다. 막상 끝내고 보니 너무 좋을 대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활동을 구상한 아닌가 조금 소심해졌다.

사실 평소에는 의견을 반드시 설득시켜야만 한다는 강박이 딱히 없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좋다면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 기획안에는 돌발 퀘스트가 달려 있는 이상, 과정뿐만이 아니라 결과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니… 만약을 대비해 ‘몽이버스’ 기획안에 최근 다른 기업에서 진행한 비슷한 캐릭터 마케팅 성공 사례까지 덧붙였다. 그래도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이 이번 애플리케이션이 주로 겨냥하는 대상이라고 했으니, 그들의 취향도 나와 조금은 비슷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기획안 작업을 마무리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을 때는 아홉 남짓이었다. 이번 주는 거의 일주일 내내 야근이었다. 게임 클리어라는 목표가 있으니 이만큼이나 하지, 실제로 현실에서 회사 생활을 버티기는 정말 어렵겠다 싶었다.

그래도 MK에서 인턴 하면서 내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있었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사원증을 찍고 회사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지하철 역으로 이동하기 핸드폰을 꺼내 밀린 알림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2 - 천유현 관장님]

뜻밖의 알림에 고개를 가볍게 갸우뚱했다. 관장님이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지? 각각 얼마 8 23분과 8 52분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경매장에서 천유현을 마지막으로 뒤로 2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게임에 빙의한 이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천유현과 교류가 없었던 적은 드물었다. 일단 회사에서 눈앞에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내기에 급급하다 보니 당장은 천유현에게 구할 조언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우주 , 요즘에는 연락이 뜸했네요.] 7:20

[지난번 구매한 쿠르베 작품이 재단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보러 오겠어요?] 7:21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 보니 부재중 전화가 오기 시간쯤 전에는 천유현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기획안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시간 동안 확인하지 못해서 연락이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심각한 일이 아니라 그림 때문인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 우주 ,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아니죠?

통화 연결음이 두어 울리기도 전에 천유현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제대로 인사도 없이 다급하게 엉뚱한 질문을 건넸다. 평소의 나직하고 평온한 목소리에 조바심이 섞여들었다.

“아, 전혀 아니에요 관장님! 야근하느라고 핸드폰을 봐서….

- 그랬군요, 연락이 되지 않아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 그러실 알았으면 제가 핸드폰을 일찍 확인할 그랬어요.

- 아닙니다. 다만 게임이라는 워낙 돌발상황이 많다 보니까요.

핸드폰 너머로 희미한 떨림이 전해지는 것이 천유현은 나를 꽤나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데다가 시간째 연락 두절이었으니….

지난 주말 방송국에서 위험을 처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게임을 하는 동안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천유현이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게임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 그런데 회사에서는 인턴한테도 이렇게까지 야근을 시키나요?

“그러게요. 그나마 이번 주에는 오늘이 제일 빨리 퇴근했는데, 너무한 같아요.

재단에 새로 들여왔다는 그림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실제로 통화를 하는 동안에는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뾰로통한 불평을 늘어놓자 핸드폰 너머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웃음기가 사그라진 다음에는 말이 애매하게 끊겨 한동안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 지금 너무 늦었지만, 잠깐이라도 얼굴을 볼까요?

“아, 지금이요?

- 내가 우주 얼굴을 봐야 안심이 같아서요.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도 천유현은 한번 걱정했던 마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덩달아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끝이 딱딱해졌다. 그가 지금 얼굴을 없다는 알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주 !

이미 밖이었는지 천유현은 통화가 끝나고 이십 분도 되지 않아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롤스로이스가 아닌 BMW 세단에서 내린 천유현은 이곳까지 직접 운전을 모양이었다. 익숙한 슈트 스타일링 대신 얇은 반팔 스웨터와 면바지를 입고 있는 천유현은 의외로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회사 건물 바로 앞에 거칠게 정차한 BMW 뒤로 하고 천유현이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로의 표정을 확인할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자 평소보다 있던 그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한숨을 길게 몰아쉰 천유현은 깊이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저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평소에도 작은 사고는 쳐도, 큰일은 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러게요, 막상 이렇게 만나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

“우주 씨가 무사한 눈으로 직접 봐야 같았습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린 천유현이 달아오른 눈가를 가볍게 내리눌렀다. 조금은 머쓱해하는 같기도, 한편으로는 쑥스러워하는 같기도 했다. 문득 마지막으로 만났을 내가 그의 마음을 쓰이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털어놓았던 천유현의 말이 떠올랐다.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집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동시에 그날 헤어지기 직전 묘하게 흘러가던 기류가 연상되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니까, 게임 속에서는 NPC 역할을 맡고 있는 천유현이 내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적은 처음이었다. 나를 걱정하고, 조금은 조바심 내는 같은 그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그를 따라 BMW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에어컨을 오래 틀어 놓은 안의 공기가 텁텁하면서도 싸늘했다.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매자 자동차의 시동이 켜지며 엔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주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는데, 회사 생활이 많이 고되었나 봅니다.

“아, 관장님! 사실 요즘에 정신없었던 돌발 퀘스트 때문에 그런 건데, 제가 아이템을 뽑으면서….

“…….

“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은 천유현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는 대신 문득 옆자리의 나를 돌아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회갈빛이 눈동자에 착잡함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그러게요, 오랜만이어서 해야 얘기가 많이 쌓인 같네요.

그동안은 게임 진행 상황을 천유현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는데, 요즘에는 시간이 모자라다 보니 말들이 많았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유현이 눈썹을 가볍게 이지러뜨렸다. , 그동안 내가 자신을 찾지 않은 것이 서운하기라도 것처럼.

“괜찮다면 드라이브라도 잠깐 할까요?

              

#92

단정한 선을 그리는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어느새 다시 시선을 거두어 천유현은 내가 아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면 유리 너머로 새들어온 불빛이 이마에서 콧날, 턱선으로 날카롭게 이어지는 옆모습을 연하게 물들였다.

“…….

“…….

천유현은 그답지 않게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그를 먼저 찾았다면, 지금만큼은 천유현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닥인 천유현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 얕은 부유감과 함께 세단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대학교 기숙사 쪽이 아닌 낯선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번잡한 시내를 지나 도심 뒤편의 고즈넉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가로지르는 차선의 좁은 도로는 다소 아슬아슬했다.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는 동안 익숙한 풍경들이 어둠 사이로 흐릿하게 흩어졌다.

바스락바스락,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이자 불투명한 비닐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냈다. 차에 탔을 천유현이 내게 건넨 비닐봉지에는 비타민 음료와 바나나 우유, 알록달록한 젤리와 초코볼, 웨하스 따위가 들어 있었다. 분명 서둘러서 내가 있는 회사 쪽으로 왔을 텐데도, 야근했다는 말을 기억했는지 세심한 배려를 놓치지 않았다.

“와아….

내가 이런 좋아하는 어떻게 아셨지? 천유현이 챙겨 간식들은 하나같이 달착지근한 맛이라 취향에 들어맞았다. 묵묵하게 운전을 이어 나가는 천유현의 옆에서 몰랑몰랑한 젤리를 하나씩 까먹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안에 퍼지자 기분도 함께 사르르 녹아내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힘이 뻣뻣하게 들어가 있던 등줄기에 긴장을 풀고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문득 편의점 계산대에서 손수 군것질거리를 사는 천유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천유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쪽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묻은 바나나 우유를 서둘러 손등으로 닦아 냈다.

“저 은근히 배고팠나 봐요. 맛있어서 간식이 자꾸 입에 들어가요.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천유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쌍꺼풀 없이 눈매가 나긋하게 휘어지고, 입꼬리가 얕게 들썩였다. 편안한 옷차림을 그가 드러내는 감정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있잖아요, 저는 정말 관장님께서 저를 걱정하고 계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

“…….

“그동안 제가 관장님을 너무 귀찮게 드린 같기도 하고… 혼자서 있는 최대한 보려고 했었거든요.

“그럴 리가요. 좋은 일이 있는 아니었다니, 그거면 됐습니다.

“…….

“지난번에 만났을 , 우주 씨가 많이 힘들어했던 같아서 마음이 쓰였거든요.

역시, 그럴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게임 속에서 NPC 역할을 맡을 뿐이지, 천유현도 기쁨과 슬픔, 때로는 불안과 서운함까지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나는 그동안 그에게 다소 무심했던 같다.

“차태주의 호감도가 많이 오른 보니 우주 씨가 회사 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나 봅니다. 그새 새로운 공략 대상도 만난 같고요.

호수처럼 찰랑이는 깊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하게 향했다. 게임 시스템 접속을 마친 천유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덧붙였다. 지난 2 동안에 게임 진행 상황에 많은 진전이 있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관장님이랑 만났을 때만 해도 이대로 게임을 계속 있을까 막막했는데, 눈앞에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해치우다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그런가요?

“네, 팀원분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인 같고…. 물론 몸이야 힘들지만, 같이 하는 일이니까 으쌰으쌰 하게 되는 부분도 있고요.

그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천유현은 말에 가만히 기울이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운전을 능숙하게 이어나가 차량도 한적한 오르막길을 무리 없이 지나고 있었다.

“팀장님도 저는 인턴이니까, 너무 잘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부담을 많이 덜어 주셨고요.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볼수록 합리적이고 은근히 인간적인 면도 있는 같아요.

“…….

“솔직히 처음에는 도무지 연애 시뮬레이션 공략 상대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래도 지난번에 야근 마치고 팀장님이 집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그때 많이 친해질 있었어요!

물론 친해진 만큼 나에 대한 차태주의 기대치가 묘하게 올라간 같은 함정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낯선 환경에서도 작게나마 힘으로 하나하나 성취를 하며 느끼는 보람이 컸다. 그래서일까,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 우주 씨를 직접 태워다 주겠다고 하던가요?

뿌듯한 마음을 그동안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천유현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들뜬 기분이 드는 나와는 정반대로 천유현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찰나의 머뭇거림 끝에 이어지는 질문의 끝이 날카로웠다.

“네, 아무래도 지하철이랑 버스 타고 가려면 시간 넘게 걸리니까….

천유현이 지금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묘하게 변명처럼 대답을 늘어놓다가 말끝을 흐렸다. 눈꺼풀을 살짝 올려 뜨고 천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요. 우주 씨가 해야 하는 일은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얻는 것이어서, 이상으로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

“일단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우주 씨가 거절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 그런가? 나쁜 마음이라니… 차태주가 그런 의도로 나를 집에 데려다준다고 아닌 같은데. 물론 숨소리까지 의식될 정도로 좁고 밀폐된 공간에 차태주와 둘이서만 있으려니 평소보다 긴장이 되기는 했다. 안전벨트를 풀어 주면서 스킨십이 있을락 말락 손이 어깨를 스치기는 했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별일이 없었는데, 아니면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던 건가?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는지 고민하느라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유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우주 씨라면 원하지 않을 때에는 표현을 충분히 잘하겠지만요.

“…….

“생각해 보면 이제 우주 씨는 도움 없이도 공략을 나가고 있는데, 내가 괜한 말을 같네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천유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일그러진 입술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가 토라진 것처럼 들려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그런 아니라….

내가 방금 무슨 말실수를 건가? 하지만 좀처럼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던 천유현과의 대화가 오늘은 자꾸만 삐거덕거렸다.

어색함이 오래 머무르기 때마침 자동차가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천유현을 따라 안전벨트를 주섬주섬 풀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발걸음을 내딛자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피부 위로 밀착했다.

“…….

“…….

그동안 천유현은 내가 공략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진전이 있을 때마다 일처럼 기뻐하며 무한 지지를 보내 주었다. 까마득하게 성숙한 어른, 모든 고민에 답을 내어 있는 조력자처럼 보이던 그가 오늘만큼은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게임 NPC라기보다는 천유현 자체처럼 느껴졌다.

적당한 거리가 있고 선이 명확할 때에는 취해야 하는 태도도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평소에 단단히 두르고 있던 외피가 얇아진 천유현을 맞닥뜨리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얘기를 들어주고,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이상으로 그에 대해서 알고 싶기도 했지만….

“앗….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실외로 향하는 계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그대로 엎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곧바로 쪽을 돌아본 천유현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건넸다.

“우주 , 조심해아죠.

진회색으로 물든 천유현의 눈동자에 짧게 이채가 돌았다. 불쑥 내밀어진 크고 단단한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를 붙잡았다. 빈틈없이 맞닿은 손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균형을 금세 되찾을 있었지만 그다음에도 천유현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우리 사람은 기와지붕이 근사한 능선을 그리는 정자에 나란히 가까워졌다.

              

#93

늦은 시각이어서 전망대 주변은 한적했다. 어룽어룽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누는 대화 소리가 차분하게 올렸다. 버선코처럼 끝머리가 치켜 올라간 기와의 끝머리가 정자에서 평평한 흙바닥까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대로 팔각형의 정자를 바퀴 돌아서 전망대로 향했다.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반짝이는 별빛이 우수수 박힌 바다 같았다.

“와, 예쁘다….

솔직히 차를 타고 어둑어둑한 경사로를 타고 오를 때만 해도 정도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근사한 전망에 벅찬 기분이 차올랐다.

빼곡히 늘어선 전광판과 빌딩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불빛이 밤의 도시에 물결처럼 흘렀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는 고유한 색채가 덧입혀졌다. 소박하고 일상적이어서, 정작 안에 있을 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다.

불과 시간 전까지는 역시 다른 사람의 시야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 하나였겠지. 도시의 야경은 나에게는 낭만적인 볼거리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기도 했다. 방금 야근을 끝내고 와서인지 오늘따라 색다른 감상이 들었다.

“관장님, 여기서는 서울 시내가 끝에서 끝까지, 한눈에 전부 들어오네요!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봐도, 일상적인 풍경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신기하죠.

정확히 내가 느끼는 그대로의 말이었다. 깊이 공감이 되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어쩌면 이런 감상을 나눌 있는 상대가 있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천유현의 표현대로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곁에 있는 사람이 좋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

자각과 동시에 뭉클한 마음이 부드럽게 소용돌이쳤다. 선명한 불빛이 반짝이는 밤의 도시와 그로 인해 몽글몽글해진 기분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졌다. 지금 순간을 고스란히 포착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

하지만 핸드폰의 야간 촬영 모드를 켰는데도 막상 사진으로 찍은 야경은 생각만큼 예쁘지 않았다. 눈으로 봤을 때에는 별빛이 흐드러지는 것만 같았는데, 노이즈가 사진 속에서는 원래의 영롱한 색을 잃은 불빛이 흐릿하게 뭉그러졌다.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잡아 봤지만 만족스럽게 빛을 담아내기 쉽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뒤로 바짝 다가온 천유현이 핸드폰 화면을 흘긋 쳐다봤다.

“막상 사진으로 찍으니까, 눈으로 보는 느낌이 나와서요.

가볍게 웃음을 흘린 천유현이 어정쩡하게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겹쳐 쥐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아래로 끌어 내렸다. 다시금 아무런 방해물 없이 트인 시야로 초롱초롱한 야경이 펼쳐졌다. 어깨에 느슨하게 손을 얹은 천유현과 나란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떤 것들은 애써 붙잡아 두려고 해도 손끝에서 달아나 버리더군요.

“음….

“그렇다면 결국 머무르는 동안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최선이겠죠.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빛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산들거리는 바람 사이로 부드러운 숨결이 섞여 들었다. 떠나기 전까지 눈으로 담아 두고 마음으로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산책로를 따라 차근차근 걸었다. 산등성이의 고도가 높아서인지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건장한 나무가 드리우는 무성한 잎사귀에서 풀냄새가 솔솔 풍겼다. 어슴푸레한 빛을 묵묵히 내리쬐는 가로등이 은은한 정취를 더했다.

평평한 흙바닥 위로 자박자박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천유현과 나는 나란히 걷다가, 가끔은 서로를 앞서거나 뒤서기를 반복했다.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걸어도 괜찮았다.

일주일 내내 정신없는 회사 생활에 치이다 간만에 느껴 보는 여유였다. 게임 한복판에서 내내 심적으로 몰려 있다가 조급함을 내려놓을 있는 가장 좋았다. 눈앞의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기분에 취해서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그동안 무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천유현이 이곳에 나를 데려온 이유를 같았다.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정작 장본인인 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유현은 짧은 대화만으로 지금의 상태를 꿰뚫어 봤다. 그의 배려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일 있는 방법으로 넌지시 건넸다. 언제나 세심하게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기저에 있었다.

“저희 잠깐 앉아서 쉬었다가 갈까요?

새삼스럽게도 고마운 마음에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느슨하게 몸을 기대고 고즈넉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따금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정도만 들리는 적막함이 나쁘지 않았다.

“…….

“…….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에서는 빛무리처럼 점점이 흩어진 별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전해지는 포근한 온기를 눈으로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미술관에서 만월 그림을 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를 괴롭히던 일상의 문제들에 초연해졌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밤하늘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네요.

“하하, 그런가요?

빛이 이동하는 시간 때문에 지구에서 있는 밤하늘의 별은 지금 순간의 행성이 아닌, 광년의 시간을 거슬러온 과거의 투영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별들 역시 다른 차원에서 흘러나온 빛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원래 살고 있던 현실도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지금 내가 머무르는 게임 속과 연결될 수는 없을까? 머릿속으로 차원 너머에 있을 공간을 까마득히 그려 보았다.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없지만, 그곳의 나와 이곳의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관장님, 요새 들어 저는 가끔 게임이 현실처럼 느껴져요.

“…….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정이 들어서 그런 걸까요? 게임이 아니었으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같아요.

현실에서는 삶이 너무 팍팍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나 과제를 해치우는 먼저여서 감정적인 교류는 사실 뒷전이었다. 게임 속에서처럼 인연을 맺는 사람 사람을 깊게 알아가고,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만한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덕분에 많은 배우고 느꼈어요. 나중에 현실로 돌아가더라도 게임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같고요.

“…….

“일단은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들한테 최선을 다해야겠죠. 돌아가서도 주변 사람들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재잘재잘 늘어놓는데, 천유현이 불쑥 내게 손을 뻗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정수리에 내려앉더니 이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애정이 깃든 손길이었다.

말을 멈추고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다봤다. 느릿하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담백하게 떨어져 나가는 대신 귓가로 내려왔다. 조금은 집요하게 구레나룻을 매만지던 손끝이 예민한 귓불 부근을 스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죠. 실제로 있는 우주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요.

“…….

“광활한 우주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어둠을 떠올려보면, 지금 순간 서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적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침내 천유현의 손이 귓가에서 떨어진 순간 숨을 안으로 , 들이켰다. 호흡을 가지런히 가다듬으면서 천유현을 따라 위를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가느스름한 달과 총총한 별이 나부끼는 밤하늘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이해할 있는 것은,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거의 없었다.

“저도 우주 씨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함께하는 순간 서로를 더욱 아끼고 친절해야겠지요.

광막한 우주에서 먼지 티끌 같은 우리의 존재는 결코 완벽할 없고 완전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손에 잡히지 않는 별똥별을 쫓아가는 대신 지금 내가 머무르는 순간에 충실해야 했다. 힘을 다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이 나중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후회를 줄일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까 게임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경험 했을 거라고 거요.

“네.

“…관장님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또한 같이 머무르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게임 속에 들어온 곁에 있어 사람은 다름 아닌 천유현이었다.

“막상 그때는 몰랐는데… 원래의 현실에 있을 저는 외로웠던 같아요.

“…….

“그래도 이곳에서 관장님을 만나면서부터는, 마음을 열고 솔직해질 있는 같아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지켜봐 주셔서 감사해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처음으로 배운 것은 누구에게든 나를 온전히 의존해서는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내심은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기를 바랐나 보다.

“이렇게 우주 씨를 만나게 것이 저에게도 정말 행운입니다.

“…….

“앞으로도 항상 우주 편이 되어 주겠습니다. 위험에 처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주 씨를 구할 테니, 걱정하지 말았으면 해요.

별세계 같은 게임 속에서 유일하고 완전한 , 천유현이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무심코 내게 다시 뻗으려던 손이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나무 벤치 위로 사뿐히 가라앉았다.

              

#94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 차창 밖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댔다. 이마에 닿는 유리의 차가운 촉감이 선연했다. 불과 얼마 천유현과 나눈 대화가 모두 꿈결같이 느껴졌다.

“…….

이제는 게임 속에서의 시간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루빨리 게임 속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지금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진짜 현실이었다. 그곳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몸뚱이는 무사히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게임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게임 공략에 성공하면 천유현을 포함해서, 깊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사람들을 더는 만날 없게 된다.

아마도 그때에는 시간을 돌이켜 보며 그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원래대로라면 로케이션 촬영은 주중에 끝나는 일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주 일요일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탓에 촬영이 주말까지 밀렸다. 토요일 아침, 이번에는 특별 스태프의 자격으로 다시금 양평의 촬영장을 향했다.

번째로 찾은 촬영장은 오늘 역시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가 흐릿했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에 기분마저 눅눅하게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외부 인력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촬영장에서 카메라 돌아가는 불빛이 빨갛게 깜빡거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을 없겠지.

적막을 틈타고 처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우기에서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아 내는 도지훈이 무릎을 꿇고 상대역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늘씬하게 마른 줄로만 알았는데, 물줄기에 흠뻑 젖은 얇은 셔츠 아래로 잔근육이 탄탄하게 드러났다.

“단 번만 나한테 기회를 .

“…….

“이대로 떠나지 , …제발, 버리지 .

도지훈은 이내 복받치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빼곡한 속눈썹에 대롱대롱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눈두덩이와 희고 깨끗한 피부, 새까만 눈동자의 색이 선명하게 대조되었다.

“와아….

스태프들 앞에서는 유약한 척을 놓고, 단둘이 있을 때는 나를 매섭게 몰아붙이던 도지훈이 처음에는 가식적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작정하고 배역에 몰입하는 도지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 절로 감탄이 나왔다. 도지훈은 애절하면서도 폭발적인 감정 표현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실제 도지훈이 연기하는 장면은 어깨 너머로 대본을 보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컷.

그대로 감독이 사인을 때까지 촬영장에 자리한 모두가 넋을 잃고 도지훈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이런 배우 클래스라는 건가. 다들 비위를 맞춰 가면서도 도지훈과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절로 이해 갔다.

스태프들이 건넨 두툼한 수건으로 흠뻑 젖은 몸을 감싼 도지훈이 몸을 느슨하게 젖혔다. 그리고 모든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나지막한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지면서 얼굴에 나른한 기색이 번졌다.

“아, 작가님 진짜 배우신 분이다, 대리 만족 완전 제대로 되네!

“여기서 조금만 해서 울려 보는 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도지훈은 없이 행동이겠지만 왠지 부끄러워졌다. 오랫동안 쳐다보기 어려워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스태프들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다음 촬영은 별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창문으로 빛이 새들어오는데도 실내는 어두웠고, 여름이었지만 공기가 묘하게 써늘했다.

이어지는 장면은 도지훈과 여자 배우의 키스신이었다. 감정이 격하게 끓어오른 상태에서 사람은 서로에게 갈급하게 매달렸다. 스킨십의 강도 자체가 아니었는데도 질척하고 농밀한 기류가 피어올랐다.

 

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이 끝나고 별장 밖으로 나오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촬영장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내일 오전 촬영분까지 마무리한 다음 스태프들이 다같이 서울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오갔다.

문제라고 한다면 오늘 하루를 보내는 동안 도지훈과 사이에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정도일까? 특별 스태프라는 호칭이 무색하게도 도지훈과는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어딜 . 나랑 같이 가야지.

“네, ?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촬영이 끝나고 전체 스태프가 머무르는 숙소로 이동하자마자 도지훈이 나를 지목했다. 손가락으로 집어든 열쇠를 까딱까딱 흔들어 보이는 것이 이대로 자신이 머무르는 룸으로 따라오라는 뜻인 같았다.

“돈 받은 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당혹스러운 발언에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받은 값이라니, 설마 특별 스태프로서 도지훈 케어를 해야 한다는 게….

“까먹었어? 한동안 너를 두고 관찰할 생각이라고 했잖아.

“…….

“혼자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 들어와.

[-1]

하긴,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마이너스 호감도를 보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아닌 같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그런 도지훈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를 데리고 무슨 일을 하든 그건 나를 고용한 도지훈의 고유 권한인 듯했다.

“네, !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도지훈에게 배정된 숙소에 따라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지훈과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은 무척이나 건전했다. 창가 테이블에 앉은 도지훈은 아이패드로 오늘 촬영 분량을 모니터링했고, 나는 건너편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서 쾌적하고 서늘한 실내 공기는 묘하게 평화롭게도 느껴졌다. 공언했던 대로 관찰만이 목적인 것처럼 도지훈은 이따금 아무런 없이 나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그럴 때면 장식장에 있는 피규어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하지만 평온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나는 그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전히 도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없었다. 그렇게 내내 집요한 시선을 얌전하게 받아 내다 괜히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였다.

“저기요….

“…….

“애초에 저를 저를 특별 스태프로 고용하신 거예요? 정말 계속 이렇게만 있는 거라면….

결국 침묵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먼저 질문한 것은 나였다. 말에 고개를 까딱 들어 올린 도지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단정한 입가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조연출을 통해서 이력서를 받아 봤어.

“…….

“미대생인데 지금은 금융 기업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면서.

“…그건.

“말만 앞뒤가 맞는 아니라, 이건 존재 자체가 모순 덩어리잖아?

날카로운 지적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게임 속에서 나는 완벽하게 자유 의지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니까 다소 엉뚱한 일들을 하게 됐는데, 사실로 인해 공략 대상에게 의심을 사게 줄은 몰랐다.

“너한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근원이 대체 뭘까.

“…그, 그렇게 수상해 보이면 저를 옆에 두면 되는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다치게 하면 어쩌려고요?

“네가 그럴 깜냥이나 되겠냐. 너는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있는 공격력도 없고 그만한 배짱도 없어.

“…….

“회까닥 돌아서 나한테 달려든다고 해도, 네가 무기를 들고 있는 아닌 이상 육탄전으로는 나한테 상대가 .

“…….

“몸수색이야 촬영장 들어올 마쳤을 테고. , 나를 독살하려고 한다면야 모를까.

예리한 시선이 나를 훑어내리더니 이내 ‘독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도지훈이 사악하게 웃었다. 오싹한 기분에 어깻죽지가 흠칫 떨렸다. 틀린 말은 없었지만 동시에 듣고 있기에 마냥 좋은 말도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야, 너한테 그런 역할을 맡기진 않았겠지.

“그러면 배우님이 보시기엔 제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같은데요?

“일부러 방심할 만한 상대를 보낸 다음,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흐리려는 작전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꼬시려고 한다거나?

“…….

“일단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하고 있어.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도지훈은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같다. 순간 발끈했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입을 ,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흘린 말이겠지? 그렇다 해도 그의 추론이 성큼 실제 상황에 가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아웅다웅하는 대신 모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지금 이상으로 도지훈에게 수상하게 보여서는 됐다. 설마하니 게임 캐릭터가 정체를 알아낼 일이야 없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앞에서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게서 고개를 돌린 도지훈은 다시금 모니터링에 집중했다. 도지훈의 날렵한 옆선이 흐릿하게 비치는 발코니 쪽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까맣게 비치는 밤하늘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젠장할.

그러던 갑작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도지훈이 입술을 짓이겼다.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싸늘한 기색의 도지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느덧 도지훈이 모니터링하고 있던 장면은 야외에서 비를 맞으며 상대역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던 신을 지나서, 별장의 키스신으로 넘어가 있었다.

“…….

“…….

“…내일 오전에 재촬영을 요청해야겠어.

망설인 끝에 도지훈이 입을 열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지훈은 인성은 별로지만 연기 하나만큼은 끝장나게 잘하는구나 생각했는데, 대체 ?

“감정을 터뜨려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만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꼴이 가관이군.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목소리의 끝이 날카로웠다. 물론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는 도지훈의 얼굴에서는 패배감마저 느껴졌다.

“으음….

예민한 반응에 덩달아 화면을 내려다봤다. 물론 화면 도지훈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가, 확실히 상대 배우를 압도하기보다는 다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느낌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배우님 연기 되게 좋았는데요?

아니, 충분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롭게 보일 정도였다. 촬영장에서는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알았는데, 도지훈은 의외로 치밀하게 계산하는 편이구나. 물론 저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면이 있으니 그만큼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건가 싶다가도….

“그러는 너는 연기에 대해서 뭐라도 아는 있나 ?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면 스스로가 가장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도지훈이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아…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실제로 내가 연기에 대해서 아는 없었다. 그래도 시청자의 눈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는데… 하지만 말을 차마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눈을 바짝 깔았다.

“지금 당장 별장으로 가야 .

“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연기를 한다 해도 그대로야. 그곳에서 직접 감정선을 다시 잡지 않는 이상에는.

이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캐릭터의 감정선에 몰입하는 좋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에 별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숙소에서 연습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밝으면 조명이라도 어둡게 세팅할 있을 텐데.

“뭐 ? 따라오고?

“…저도 같이 가는 거예요?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선 도지훈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특별 스태프’가 커버해야 하는 일의 범위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듯했다.

              

#95

혼자 가시면 되잖아요, 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스태프들은 잠자리에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내가 가든 가든, 도지훈은 지금 당장이라도 별장으로 가겠다는 기세였다. 나에게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밤길에 사람을 혼자 매몰차게 내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숙소 밖으로 나가자 추적추적 빗방울이 흙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으슥한 밤길을 따라 도지훈과 별장을 향해 걸었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길이 험해서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대로 꼬박 삼십 분을 걸어 별장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 멈춰선 도지훈이 하고 있냐는 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고고한 배우님을 위해서 묵직한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나무 우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낮에도 써늘한 분위기를 풍기던 별장이었지만 밤에는 한층 음산했다. 연식이 오래된 나뭇등걸 바닥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올라오고, 발짝 발짝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어느새 젖어 어깨에서 빗방울을 툭툭 털어 냈다. 흘긋 쳐다본 도지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전구를 밝혔는데도 실내가 다소 어두컴컴한 탓에 안색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아니,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밤에 여기까지 오자고 거야….

도지훈은 어떤 면에서는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범하고 결단력 있었다. 스토킹을 두려워하면서도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한 나를 특별 스태프로 고용한 것처럼,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야밤에 별장에 가야겠다고 무턱대고 우겨 댔다.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튀는 그의 선택을 평범한 사람인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는 생각을 포기하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겠지. 모른 변덕이라도 맞춰 줘야 루트 진전에도 가망성이 있을 테고 말이다.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구겨 앉은 도지훈이 대본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캐릭터를 이해하고, 감정선에 다시 몰입하려고 하는지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실제 촬영이 이루어지던 오후와 똑같은 환경이었다. 다만 카메라와 다른 스태프진 없이 이곳에는 도지훈과 둘뿐이라는 것에만 차이가 있을 .

“계속 거기서 쳐다보고만 있을 거야?

발짝 물러난 곳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데, 도지훈이 고개를 꺾었다. 갑작스러운 기세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심기가 거슬린 거지?

“연기를 하려면 상대역이 필요할 아냐.

도지훈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일러 줘야 하는 답답하다는 식이었다.

“저… 저랑 연기를 하시겠다고요?

, 물론 지금 이곳에는 우리 단둘뿐이니까… 상대역인 여자 배우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감정선 몰입이 필요해서 이곳까지 오셨으면서, 저를 보면 되려던 몰입도 깨지지 않겠어요?

“나무 막대기 데리고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적어도 살아 쉬는 인간이니까.

도지훈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숨을 있는 제외하면 딱히 내가 나무 막대기보다 나을 것도 없다는 뉘앙스였다.

“…하아.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고용주인 도지훈 앞에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비척비척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막상 그의 옆자리에 앉자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마이너스 호감도 역시 경고등처럼 보였고 말이다. 하지만 도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손을 뻗었다.

“네가 버리지 않는 , 절대로 다치게 하지 않아.

애처롭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몸이 반사적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굴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아… 알겠어요.

, , 볼을 건성으로 두드린 도지훈이 빈정거렸다. 기왕 연기 연습을 시작했으니 이대로 쉽게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도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읽어 내렸다. 나름대로 작품 상황에 몰입하려고 애썼다. 어쨌든 도지훈 기준에 만족스러운 연기를 해낼 있게 때까지는 나를 들들 볶아 분명했다.

“하암….

그렇지만 절로 하품이 새어 나오는 것은 막을 없었다. 숙소에서 나올 때에도 이미 시가 넘었는데, 대체 지금은 시인지 가늠조차 되지도 않았다. 아니야, 도지훈에게 최대한 협조해야 모든 끝난다.

“네가 버리지 않는 , 절대로 다치게 하지 않아.

합을 맞춘 끝에 도지훈이 다시금 대사를 읊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그대로 시선이 맞물렸다.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가까이서 맞닥뜨리자 저절로 애틋한 마음이 생겨났다.

“아….

아냐, 이대로 천사 같은 얼굴에 넘어가서는 . 지금 나는 제멋대로 구는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상황이라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흠, 역시 나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같은데.

그러자 도지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느닷없이 상대 배역 타령을 하나 했더니 이것도 테스트의 일종이었나 보다. 의심 많은 성격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분명히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사람 말을 믿어요?

“입장 바꿔 생각해 . 네가 나라면 쉽게 믿을 있겠어?

도지훈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내가 도지훈이라도 나를 수상하게 여겼을 테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1]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빈약한 호감도 수치를 보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대로라면 게임을 클리어할 확률이 제로였다. 도지훈은 나를 연애 대상이 아닌 위험인물로 점찍고 있으니, 지금처럼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도 호감도가 오를 없었다.

“진짜, 배우님도 참….

“내가 ?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연덕스럽기만 얼굴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순간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떠보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추측하려면 피곤하지도 않을까?

하지만 도지훈은 무슨 말을 봐야 통하지도 않을 사람인 듯했다. 타들어 가는 속은 뒤로 하고, 군말 없이 연기 연습만 이어 나갔다.

우르릉- -!

그때, 갑자기 실내가 번쩍하더니 소리가 울렸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창문 쪽으로 달려가자 바깥에서는 하늘이 뚫리기라도 것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갑자기 너무 많이 오는 같은데요?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절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좀 기다리면 금방 그치지 않겠어?

“그러지 말고… 다른 스태프들한테 연락을 볼까요?

“됐어, 괜히 크게 벌이기 싫어.

이대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청하는 좋을 같았다. 하지만 도지훈은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는 ,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니 정말, 누가 보면 여기까지 오자고 사람이 나인 알겠어!

폭풍우가 심상치 않은데, 이대로 태풍이라도 오는 아니겠지? 오늘 안에 무사히 숙소로 돌아갈 수는 있을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창가를 서성거렸다.

파밧-!

불꽃 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전구의 불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완벽하게 깜깜해진 시야로 시스템 창이 햐앟게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밀폐된 기억”

현재 플레이어는 별장에 조난당했습니다. 공략캐릭터 [도지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장소에서 안전하게 대피하세요!

(성공 보상: 호감도 10 상승, 별장과 연관된 공략 캐릭터의 과거 정보 수집 확률 대폭 상승)

              

#96

아니, 이것마저 게임 퀘스트였던 거야? 그야말로 돌발 퀘스트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전개였다.

처음에는 날씨도 심상치 않은데, 정전까지 되다니 기분이 찝찝한 정도였다. 그런데 조난이라니…. 어쩌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일 있겠다 싶었다.

“배우님, 지금 옆에 계세요?

“…….”

“…….”

여전히 사방은 물건의 윤곽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있었는데도 혼자가 것만 같은 기분에 다급하게 도지훈을 불렀다.

“배우님, 배우님?

그러나 한동안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빗줄기가 바람과 함께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따갑게 울렸다. 덜컥 겁이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 여기 있어.

발짝 늦게 약간 억눌린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깜짝 놀랐어요!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말로 조난된 거라면 구조 요청이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패닉에 빠져서 퀘스트를 망칠 수는 없었다.

지금 있는 일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라이트 기능을 켰다. 당장 주변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만으로도 공포감이 한층 수그러들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전부터 해결해야 텐데…. 핸드폰 라이트로 실내를 밝히면서 현관 근처로 천천히 나아갔다. 두꺼비집의 스위치가 내려갔나 싶어서 살펴봤지만, 아예 배터리가 나간 모양인지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배우님, 아무래도 전기가 아예 나간 같….

그래도 핸드폰 배터리가 23% 한동안은 버틸 있겠지? 후하,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거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도지훈에게 상황을 알리려던 나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헉, 허억….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지훈은 방금 전까지 연기 연습을 하던 가죽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서둘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괘, 괜찮으세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꺼….

도지훈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팔을 길게 뻗었다. 그러나 와중에도 도지훈은 제게 가까워지는 손등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날카롭게 맞받아쳤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식은땀이 이렇게 많이 나고 있는데요?

깜짝 놀라서 이마를 짚어 보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뒤늦게 팔목을 움켜쥔 도지훈의 손바닥 역시 덜덜 떨고 있었다.

“호들갑 것도 없어. 별장에서만 나가면… 그러면 금방 괜찮아질 거니까.

입술을 짓이기듯 깨문 도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밭은 호흡을 뱉어 내는 가슴팍이 위태롭게 들썩거렸다. , , 여전히 창문 너머로는 매서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이대로 비를 뚫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조연출에게 연락을 취했다. 도지훈과 단둘이서 별장에 있다는 말에 황당해하면서도, 다른 스태프들이 우리를 데리러 별장에 오겠다고 했다.

“…십 정도만 기다리면 거예요. 지금 바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얼굴이 파리해진 도지훈이 고개를 간신히 끄덕거렸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별장 안에서 도지훈과 내가 의지할 만한 것이라고는 핸드폰 라이트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태프들이 미니밴을 타고 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밖에서도 문이 열린다고요?

위태롭게 몰아치던 비바람에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고장이 모양이었다. 안팎으로 문을 열려는 시도를 거듭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워낙 늦은 시간인 데다가 외진 곳에 자리한 별장이다 보니 수리 업체가 오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 했다.

“배우님, 앞으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같다고 하는데….

사실상 별장 안에 갇힌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자 도지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도지훈의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퀘스트고 뭐고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수납장에서 담요를 꺼내 오한으로 덜덜 떨고 있는 도지훈의 몸을 감쌌다.

“아….

그러느라 그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도지훈의 눈동자가 해묵은 공허감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대체 그가 무엇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지 없었지만….

“이제 별장 밖으로 나갈 있을 거예요. 앞에 스태프들도 있고, 수리 업체에서도 오고 있다고 하고요.

“…….”

“일시적인 상황이니까, 문제가 해결되면 숙소로 돌아갈 있을 거예요.

역시 지금 상황이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나까지 흥분하거나 불안해하면 도지훈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같아서,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 저도 곁에 있잖아요.

밀페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감각이 그의 공포를 자극하는 같았다. 도지훈의 손을 잡아주면서, 숨을 제대로 있도록 유도했다.

“하, 후으….

숨을 거칠게 헐떡이던 도지훈이 고개를 떨구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목덜미가 안쓰러웠다. 일부러 핸드폰을 높게 들어 올려서 도지훈 쪽으로 불을 비추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소리에만 집중해 보실래요?

핸드폰으로 메트로놈을 재생시켰다.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감정 대신 규칙적인 초침 소리에만 집중할 있도록. 그대로 20분쯤이 지나자 도지훈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때마침 도착한 수리 업체에서도 문을 열어 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긴 한데, 대체 어쩌자고 늦은 밤에 배우님을 데리고 여기까지 거예요?

마침내 빠져 나간 여전히 별장 밖에서는 장대비가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차마 도지훈에게 돌리지 못하는 비난이 대신 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같아요.

별장 안에서 붙어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스태프들 사이에 둘러싸인 도지훈은 쪽을 흘끔 쳐다보더니 이내 본체만체했다. 잘잘못이나 책임을 따질 만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냥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래도 도지훈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같아 다행이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밀폐된 기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도지훈]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지만, 도지훈과 함께하는 동안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들은 우연이라기엔 너무 찝찝했다. 도지훈이 만족하지 못한 장면을 포함해 내일 오전 남은 촬영분이 약간 있었지만, 중요한 장면들은 아니었기에 양평 로케이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드라마 촬영, 앞으로도 이어 나갈 있는 걸까?

***

새벽녘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의연하게 행동하려 애썼지만 오늘 벌어진 일이 나에게도 충격이었는지, 숙소에 돌아온 다음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지훈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일부러 신경 쇠약한 척하면서 다른 스태프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같았다.

시스템 창에서는 별장이 도지훈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장소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모니터링을 하면서도 도지훈은 별장 안에서 겁에 질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러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도지훈이 별장에 갇히는 상황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서는 없었다. 자세히 물어서도 되고, 궁금해해서도 됐다. 하지만 굳이 늦은 밤중에 별장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 나름대로는 공포를 직면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부모님 돌아가신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불안과 두려움으로 갑작스럽게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밤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지훈이 아니라 현실 속이든, 게임 속이든 누구라도 일을 겪지는 않았으면 했다.

물론 모든 것들은 추측에 불과했다. 실제로 도지훈에 대해서 거의 아는 없음에도 경험에 빗대어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에게 동질감이나 연민을 느낀다는 이유로 도지훈은 더욱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간밤의 사건은 대강 수습이 되었으니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있었다. 그럼에도 아침이 밝은 , 차량이 서울로 출발하기 나는 도지훈이 머무르는 방문에 노크했다.

“또 무슨 속셈으로 나를 찾아왔지?

지금처럼, 도지훈은 오만한 얼굴로 나를 내리깔아 보았다. 특권 의식에 둘러싸인 것만 같은 도지훈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냥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잠깐… 배우님한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이해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도지훈이 거쳐 세월이 어땠는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도지훈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두고 편견을 가지는 대신, 열린 마음으로 그를 대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얼굴 기분 아닌데. 아니, 네가 아니라 누가 됐든간에 말이야."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 올린 도지훈은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날카로운 말투로 나를 몰아붙이는 그는 지금 상황이 불편해 보였다. 수치스러워하는 같기도 했다. 아마도 어젯밤 의도치 않게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결백을 호소할 생각이라면 이번 일은 충분히 참작할게. 실제로 먹일 생각이었다면. 상황에서 구하려고 하지는 않았겠지.

“…….”

“아니면, 나한테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거야? 그렇다고 해서 특별 스태프를 그만두게 생각은 없으니까 헛된 기대 따위 하지 말고.

[9]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뾰족한 말들이 연이어 쏟아지는 동안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도지훈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호감도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아니라….

“…….”

그럼 대체 뭐냐는 , 비뚤게 팔짱을 도지훈이 나를 흘겨보았다.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

“그리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난다 해도 모든 괜찮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는 배우님께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머뭇머뭇, 말을 이어 나가는 동안 도지훈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썹을 슬쩍 치켜뜬 그의 수려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역시 모른 넘어가는 나았을까. 의도와는 다르게 도지훈은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을 불쾌하게 여길지 몰랐다. 괜한 오지랖을 부린 탓에 기껏 돌발 퀘스트로 올려 놓은 호감도마저 떨어질 같았다.

“내 앞에서 피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이어지는 까끌까끌한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떠올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도지훈은 어디로 보든 위로받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같잖다고 생각하는 같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의 말이 흥미를 자극했던 걸까,

[16]

도지훈의 호감도는 하락하는 대신 7% 가파르게 올라 있었다.

“연우주라고 했나. 보면 볼수록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한단 말이지.

“…….”

“다음 주말에는 단단히 각오하고 촬영장에 오도록 . 나도 앞으로가 기다려지네.

지금까지 루트 난이도가 극악이었던 것과 다르게 불과 시간 안에 17% 올라 버린 호감도에 얼떨떨했다. 동시에, 호감도가 훌쩍 오르는 데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상대는 도지훈이 처음이었다.

              

#97

회사에 출근한 다음부터는 , 지난주 금요일에 제출한 기획안을 다시 읽어 보며 10 시작 예정인 회의를 준비했다.

오늘 아침에 기숙사를 나서기 전에 확인해 보니 게임 플레이는 73일차, 차태주의 호감도는 32%였다. 여기서 호감도를 10% 올리면 메인 퀘스트 진입에 성큼 가까워질 테니, 여러모로 중요한 시점이었다. 돌발 퀘스트를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니야, 연우주! 있어!

긴장을 풀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선을 다해서 아이디어를 짜냈고, 거기에다 특별 아이템 뽑기 기능까지 써먹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회의실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안건에 따라 차근차근 회의가 진행되었다. 오늘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이번 금요일로 예정된 VVIP 대상 프리 런칭 파티였다. 애플리케이션을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에 바이럴을 확산하기 위해 소수의 인원을 초청한다고 했다.

“이벤트 대행사 통해서 RSVP 체크는 꼼꼼히 챙겨 주시고요.

“와, 이제 슬슬 애플리케이션 출시가 실감 나면서, 조금 떨리는데요?

지난 개월 동안 전념해 프로젝트를 선별적으로나마 대중에게 공개하는 자리였다. 덕분에 팀원들도 금요일 행사를 많이 기대하고 있는 같았다. 덩달아 설레기 시작한 나도 도움이 있는 부분들은 최대한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으로, 우주 씨가 SNS 운영안 조금 설명해 보세요.

“네, 팀장님!

차태주가 노트북과 연결된 회의실 스크린에 떠오른 기획안을 흘끔 확인했다. 많이 떨렸지만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몽이라는 캐릭터를 활용해서 SNS 운영하는 만큼, 단순한 홍보성 콘텐츠보다는 장기적으로 어떻게 구독자들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같습니다.

“…….”

“그래서 친밀하게 다가가는 , 누구나 공감할 있는 방식으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있도록, 가지를 중점적으로 두고 생각해 봤는데요.

특별 아이템 뽑기 기능이 아이디어를 회사에서 통할 만한 단어로 다듬어 주었지만, 그를 팀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나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태도가 중요할 같아서 자신감 있게 발표를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MBTI 테스트와 비슷하게, 소비성향 테스트로 관심을 유도할 있을 텐데요. 각자의 성향에 따라 몽이가 직접 맞춤형 자산관리 플랜을 선보이면서, 이용자가 몽이를 처음 알아가고, 친해질 있을 같습니다.

“…….”

“그다음으로는, 화면의 예시처럼 인스타툰으로 캐릭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이어 나갈 있습니다. 돈을 모은다는 것은 결국 현재의 행복, 미래의 안정 사이에서 선택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나가는 것일 텐데, ‘절망편 미래’에서 찾아온 몽이가 자신의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와주는 스토리 라인을 하나하나 풀어 예정입니다.

“…….”

“이렇게 몽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몽이버스’를 확장해 나갈 있을 텐데요. 요즘 20, 30 사이에서 인기 있는 실제 오프라인 장소에 몽이를 합성해서 등장시키는 콘텐츠를 통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면 좋을 같습니다. 몽이가 실제 현실에 있는 캐릭터처럼 친밀하게 느끼고. 몰입감을 더할 있도록요.

“…….”

“저희 애플리케이션 특징이 필요할 때엔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내내 금융 상담이 가능하다는 것이니까, 일상 속에서 나와 함께하는 몽이라는 컨셉이 맞아떨어질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발표를 마치자 회의실에는 정적이 일었다. 팀원들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기획안이지만, 다년간 업계에서 구른 선수들의 눈에는 우습게만 보일 같았다.

“팀장님, 솔직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말입니다…. 확실히 팀장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신 같은데요?

가장 먼저 입을 것은 김지원 과장이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팀원들 사이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얕게 터졌다. 그제야 순간 조용해졌던 회의실에 감돌던 분위기가 적대적이 아니라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 지난주 내내 야근하는 같더니, 이렇게 알찬 준비하고 있었구나?

“저는 캐릭터 세계관 확장시키는 거랑, 콘텐츠 컨셉 전반적으로 좋은데요. 팀장님은 어떻게 보세요?

바로 옆자리에 앉은 윤혜영 대리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렸다. 민선재 차장은 내가 예시로 제안했던 몽이 인스타툰 스케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제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얼굴과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저기, 팀장님….

하지만 아직 차태주에게서만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차태주 쪽을 슬금슬금 쳐다보게 되었다. 그런 눈빛이 애타 보였는지 차태주가 입꼬리를 설핏 끌어올렸다.

“기대 이상으로 줬네요. 아이디어도 자체도 좋은데, 전달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도 엿보입니다.

“…….”

“기본적인 틀은 살리되, 세부 디테일은 조율해서 이대로 추진해 봐도 좋겠습니다.

<SYSTEM> [돌발 퀘스트] “아이디어 뱅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차태주]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SYSTEM> 공략캐릭터 [차태주]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다행히 결정권자인 차태주 역시 좋은 피드백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 클리어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고생 많았어요, 우주 .

[42]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는 차태주의 머리 위로 대폭 상승한 호감도가 반짝거렸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역시도 헤벌쭉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업무 능력을 중시하는 차태주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뿌듯함이 굉장했다. 이제 고작 4 인턴일 뿐이지만, 그래도 직장인이 느끼는 보람이 무엇인지 같았다.

***

퀘스트 클리어에 성공하고 차태주를 포함한 팀원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있었다. 하지만 SNS 운영안은 팀에서 돌아가는 여러 가지 업무 하나였을 , 이대로 일은 끝나지 않았다. 금요일 런칭 파티를 앞두고 기본적인 행사 준비는 이벤트 에이전시에서 담당하고 있었지만, 막내인 내가 챙겨야 일들도 많았다.

[차태주: 우주 지금 시간 괜찮아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후에는 다시 새롭게 주어진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메신저 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우주: , 팀장님!]

[차태주: 옥상으로 잠깐 올라올래요?]

갑자기 팀장님이 무슨 일이시지? 여전히 깜빡이는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갸우뚱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 층에는 옥상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적당한 키에 맞춰 조경된 푸릇푸릇한 나무들 사이로 슈트 차림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먼발치에서도 눈에 띄는 길쭉한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벤치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아, 우주 .

나를 발견한 차태주가 끝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길쭉한 손가락을 튕겨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간결하지만 우아한 손동작이었다.

“어, 저는 팀장님 담배 피우시는 몰랐어요.

“뭐, 가끔씩만요.

“이제 애플리케이션 출시 코앞이라서 스트레스 많으시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로 차태주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그런 그가 쪽을 돌아보더니 , 가볍게 웃었다.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 수치가 [42] 얕게 진동했다.

“그래도 우주 씨가 많은 도움이 되어 주고 있어요.

“저는 다른 팀원들에 비하면 아직 많이 모자라니까요….

“아니에요. 아까 올려 기획안, 회의 끝나고 나서 꼼꼼히 훑어봤는데 놀랐습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태주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로도 다소 놀란 듯한 눈치였다.

“면접 때만 해도 우주 씨가 포텐은 있지만, 전혀 다듬어져 있지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정제된 보고서를 작성하다니, 습득력도 빠르고, 이번 기회에 우주 씨를 다시 봤어요.

갑자기 면접 차태주가 내가 기업의 언어를 전혀 모른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라 민망해졌다. 그래, 그런 피드백을 주셨었지. 물론 특별 아이템 뽑기 기능을 썼기 때문에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정말 기뻐요.

“…….”

“저를 믿고 뽑아 주신 만큼, 팀장님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역시 기쁜 마음이 앞섰다. 따로 불러서 격려를 주는 차태주가 고마워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우주 씨한테 걸고 있던 기대는 충분히 충족되었습니다.

그대로 차태주가 길게 팔을 뻗더니,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가볍게 훑어내렸다.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작게 감았다가 떠올렸다.

“아, 네….

호감도가 조금 올라서일까. 여전히 회사 안에서 상사와 부하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차태주와 나누는 대화가 예전보다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옥상 정원의 한가로운 풍경에 스며들면서 눅지근한 분위기가 번졌다.

“우주 씨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 있는데요.

차태주가 무언가 중요한 말을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98

“내 기준이 확고한 편이라서, 부하 직원에게도 요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런데 월등한 스펙을 갖춘 사람을 뽑아도, 나를 복제하지 않는 이상에야 일하는 완벽히 성에 차지는 않더군요.

“…….”

“오히려 너무 혹독하게 몰아붙이다 보니까 중간에 버티고 나가 떨어진 사람들도 수두룩했고 말입니다.

짧은 기간 그와 일했지만 차태주는 확실히 만족할 만한 수준의 업무가 나올 때까지 팀원들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만 집요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워낙 유능하고 말과 행동에 불일치나 모순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졌다.

“그런데 우주 씨를 처음 보고 나서 계속해서 눈에 밟혔는지…  내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같네요.

“…….”

“내가 이미 잘하는 것들을 똑같이 잘하는 아니라,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과 사람을 대하는 누군가가 필요했나 봅니다.

처음에 입사했을 때에는 혼자서만 팀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데서 오는 압박감이 컸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원래 팀에 있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색다른 생각을 있기도 했다. 팀장인 차태주로부터 내가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벅차올랐다.

“너무 과찬이세요, 팀장님…. 그치만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한텐 정말 의미예요.

단순히 이름뿐인 단기 인턴이 아니라, 노력과 성과를 인정받고 팀에 받아들여지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커다랬다. 단순히 칭찬을 받아서 으쓱한다기 보다는 몫을 실제로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보람이었다. 이제야 안에서 자리를 제대로 찾은 같았다.

“앞으로 우주 씨가 MK금융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도 기대됩니다.

“…….”

“처음 우주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얘기를 하게 줄은 몰랐는데… 나랑 같이 정식으로 일해 봐도 좋을 같네요.

쨍쨍한 햇빛을 등지고 차태주의 곧은 눈썹뼈 아래로 나지막한 그늘이 드리웠다. 그동안 쌓아올린 상사와 부하 직원의 유대감 위로 미묘한 애착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태연하게 덧붙인 말에는 뜨끔했다.

“…아!

나부터도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노력하면서 회사 생활에 과몰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지금 이곳이 게임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지만… 결국 나에게 회사 생활은 시한부일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말이 있는 표정인데요.

또한 처음부터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회사도 아니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차태주는 나에게 배신감을 느낄까.

“…….”

묘하게 불편해지는 마음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차태주는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빤한 시선에 발짝 늦게야 ‘아니에요, 아무것도’라고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건드리고 싶어집니다.

내가 시원한 대답을 내어놓지 않자 차태주는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옥상의 공기가 바싹 마른 것처럼 팽팽했다. 그대로 보이지 않는 선을 성큼 넘어서, 팔을 길게 뻗은 차태주가 검지로 볼을 건드렸다.

“일단 프로젝트 마무리 잘하는 거에 집중하고,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얘기하죠.

그대로 턱선을 스치듯이 내려간 손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더니, 차태주가 먼저 자리를 떴다.

멍해진 기분으로 차태주의 손가락이 스쳐 갔던 뺨을 매만졌다. 옥상 입구를 향하는 널찍한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깔끔한 그의 성격처럼, 지금까지 떨어지는 같았던 차태주와 사이의 관계가 조금쯤 헝클어지고 있었다.

***

다행히 월요일에 마음에 번진 작은 소란에 오래 얽매이지 않아도 됐다. 애플리케이션 출시가 막바지 단계에 이른 만큼, 이번 주는 VVIP 대상으로 하는 프리 런칭 파티를 준비하느라 쏜살같이 흘러갔다.

금요일에는 행사가 열리는 도심의 커뮤니티 호텔로 바로 출근했다. 애플리케이션의 소비자층이 20, 30대인 만큼 행사장은 느슨하면서도 개성적인 분위기로 조성되어 있었다.

무늬가 뚜렷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벽면 위로 야자수가 삐죽빼죽한 초록색 잎을 멋스럽게 드리웠다. 독특한 디자인의 라탄 조명이 천장에서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내리쬐었다.

정식 출시를 앞두고 주요 관계자에게 애플리케이션을 먼저 선보이는 이번 행사에는 경제, 테크 분야의 인플루언서와 얼리어답터뿐만 아니라 회사 임원진을 포함한 귀빈이 초청되었다. 오후가 되어 내빈들이 속속 도착하자 차태주가 애플리케이션 방향성과 출시전략에 대한 발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MK금융 혁신경영팀장 차태주입니다.

다른 팀원들과 함께 행사장 뒷줄에 쪼르르 앉아 있다가, 발표 시작과 함께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매끈한 슈트를 차려입은 차태주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그가 객석을 도전적으로 응시하자 문득 학교 강연장에서 처음 차태주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오늘 자리에서 애플리케이션 민트를 처음으로 소개할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만 지난 개월간 전념해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지금의 차태주는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 냉랭한 태도로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수려한 선을 그리는 얼굴이 오늘만큼은 희미하게 들떠 보였다.

“모든 것이 안에서 간편하게 해결되는 디지털 네이티브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객은 언제나 대화에 목마릅니다. 하지만 상담 인력을 동원할 경우에는 제대로 대화에 이르기까지의 대기 시간 때문에 고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이러한 상호 손실의 아이러니를 해결할 있는 것이 바로 24/7 상담 가능한 AI 상담사입니다.

차태주가 유려하게 발표를 이어 나가는 동안 옆에 앉은 팀원들에게도 들뜬 열기가 전염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부터도 차태주가 ‘몽이버스’를 소개할 때에는 벅찬 마음이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인턴으로 함께한 역시 이럴진대, 지난 개월간 노력과 시행착오, 그리고 무수한 야근을 걸쳐 목표를 위해 피땀 흘려 팀원들은 감회가 새로울 같았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차태주가 발표를 마치자 행사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차태주가 뿜어 내던 압도적인 자기 확신과 카리스마가 여운처럼 감도는 행사장의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누구라도 반박할 여지 없이 성공적인 발표였다.

발표 세션이 끝난 다음에는 내빈들을 대상으로 하는 파티가 진행되었다. 객석에서 흩어진 사람들은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사용하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다. 가벼운 핑거푸드와 샴페인을 트레이에 받쳐 직원이 파티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파티장의 분위기는 산뜻했다. 인플루언서들끼리는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인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한편 팀원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생새우 카나페를 한입 베어 물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우주 .

바로 그때, 천유현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서 천유현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천유현은 빈틈없이 몸에 맞는 슈트를 걸친 세련된 모습이었다. 대낮의 파티장 한복판에 그는 유난히 훤칠해 보였다.

“관장님! …세상에, 지금 꿈꾸고 있는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요.

“여기서 관장님을 줄은 몰랐어요. 혹시 어떤 일로….

“행사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우주 씨가 말한 것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궁금해지더군요.

“아…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관장님 오신 알았으면 제가 챙겼을 텐데요.

“괜히 일하고 있는 사람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오는 파티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조금 얼어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안도감이 물씬 올라왔다. 오늘 이렇게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 한층 반가운 마음이었다.

“‘몽이’라는 캐릭터가 우주 씨가 고안한 맞나요?

“아니에요, 그렇게까지는… 제가 거는 원래 있던 캐릭터에 그냥 설정만 추가한 거여서요.

“세계관이 꽤나 치밀하던데요? 보고 있다가 묘하게 설득당할 뻔했습니다.

“히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관장님 미술관이랑 재단 때문에 많이 바쁘실 텐데, 저는 이렇게라도 뵙게 되니까 좋지만요.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우주 , 슈트가 어울리는데요.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천유현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어서 일부러 천유현이 슈트를 입고 왔다. 그러잖아도 아침에 윤혜영 대리가 옷이 어울린다고 했는데…. 쑥스럽지만 동시에 기분이 좋기도 해서 배시시 웃었다.

“우주 , 거기서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발치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재잘재잘 떠들던 대화가 단박에 멎었다. 싸늘한 얼굴의 차태주가 휘적휘적 이쪽으로 걸어왔다.

              

#99

“헉, 팀장님…!

게임 속에서 NPC 공략캐가 만나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태주의 머리 위에서는 새빨간 하트가 호감도를 매달고 깜빡거렸다. 천유현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

“…….”

사람 모두 심드렁한 얼굴이었지만 말없이 서로를 훑어내리는 시선은 집요했다. 짧은 탐색의 시간 동안 뻣뻣한 긴장감으로 공기가 바짝 당겨졌다.

“차태주 팀장님이시죠? 오늘 발표 흥미롭게 봤습니다. MK예술재단 천유현 대표입니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천유현이었다. 빙긋이 웃어 보인 천유현이 차태주에게 가볍게 손을 건넸다.

그러나 차태주는 인사를 건네는 천유현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대놓고 사나운 기운을 풍기는 차태주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딱히 내가 잘못한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공략 대상인 차태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차태주입니다.

입꼬리를 비튼 차태주가 천유현과 악수했다. 서로 손을 , 맞잡고 있는데도 차태주가 은은하게 풍기는 적대감은 완전히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시에 머리 위의 하트가 위태롭게 부르르 떨렸다.

큰일 났다. 차태주는 지금처럼 게임 다른 캐릭터들과 엮이는 상황을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강태양과 통화를 다음에도 호감도가 떨어졌었지!

[47]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차태주를 올려다보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바로 순간, 걱정했던 대로 호감도가 폭락하기는커녕 오히려 5% 상승했다.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늦기 전에 보는 좋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끔뻑였다. 차태주는 보란 듯이 그런 나의 어깨에 손을 얹은 다음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화 도중에 노골적인 방해를 당한 천유현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천유현은 마치 시스템에 발이 묶이기라도 것처럼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지 못했다.

“어… 제가 다음번에 연락 드릴게요, 관장님!

“그럼 이만.

그런 천유현을 본체만체, 형식적인 목인사만을 차태주가 이번에는 나를 세게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그를 따라서 파티장을 나섰다.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만,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호텔 복도는 인적이 거의 없이 한산했다.

비척비척 걷는 동안에도 방금 상황을 곱씹느라 혼란스러워졌다. 그동안 NPC 천유현은 게임의 스토리 진행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바깥에서 안을 지켜보는 관전자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오늘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끼어든 같아 기분이 묘했다.

“흐음….

그러다 갑자기 차태주가 멈춰선 탓에 그대로 그의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 몸을 돌린 그가 나를 골똘히 바라보더니, 탐탁지 않다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정갈한 얼굴에 짜증의 기미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우주 주변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네요. 지난번 강태양 선수도 그렇고, 천유현 대표까지.

“…….”

“일반적으로 대학생이 만나기에는 쉽지 않은 인물들일 텐데요.

차태주가 내게 비스듬한 시선을 던졌다. 질문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들과 어떻게 만났는지, 지금은 어떤 사이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하는 느껴졌다. 오늘 행사도 업무의 연장선이어서인지, 그는 고유 영역을 침해받은 것처럼 불쾌해했다.

“그게, 그러니까….

막상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혔다. 게임 인물들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야 할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고백을 거절한 이후 강태양과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고, 천유현은…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도와주는 조력자이니까.

“…….”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에 대해서 과도한 설명을 늘어놓는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있을 같아서였다. 그동안 부하 직원으로만 나를 대하던 차태주의 담백한 태도에 질척한 의도가 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번의 루트의 결말이 어땠는지 알고 있기에, 차태주와의 거리가 좁아지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팀장님, 우주 , 거기 있었네요! 저희 회식하러 가야죠~

때마침 파티가 끝났는지 팀원들이 컨퍼런스 룸에서 빠져나왔다. 왁자지껄 떠드는 무리의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면서 차태주와의 거리가 다시금 자연히 멀어졌다. 대화가 애매하게 끊긴 탓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떨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가 있는 각도에서는 차태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회식 장소는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정갈한 룸은 널찍해서 팀원들이 전부 들어가고도 공간이 넉넉했다. 석판 위에서 소고기가 구워지면서 지글지글한 소리가 들렸다. 다들 이미 맥주 잔씩을 걸쳐서 가볍게 들뜬 분위기였다.

“긴 프로젝트 동안 믿고 따라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짤막한 건배사와 함께 허공에 올라간 잔이 부딪혔다. 그를 신호로 팀원들이 긴장을 풀고 회식 자리에서 편안하게 풀어졌다. 고기를 먹어치우고 술을 들이켜면서 두런두런한 대화가 오가자 실내가 금세 어수선해졌다.

“유튜브에 행사 리뷰 영상 올라온 봤어요? UI 엄청 매끄럽고 직관적이라고 호평이 자자해요. 선재 차장님 갈려 나간 보람이 있으시겠어요?

“몽이 말투는 별로라는 같은데… 아니 이게 결국은 세계관이랑 이어지는 거라서, 우리도 생각이 있는 건데 말이야.

“개선점은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고, 어차피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일해야 텐데 오늘은 먹고 즐깁시다.

저녁 즈음이 되자 벌써부터 오후 행사 스케치 영상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누군가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 하나를 틀어 보기도 했다. 모두의 관심사가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반응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먹고 노는 중요하다는 논리로 금세 핸드폰이 치워졌다.

“우주 씨는 그렇게 많이 먹고 있어요? 법카 찬스 있을 확실히 써먹어야 한다니까.

“아, 대리님! 아니에요, 열심히 먹고 있는데….

“하하, 우주 비었네. 나랑도 한번 해요~

옆자리에 앉은 윤혜영 대리가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잔을 들어 올려서 잔을 받았다. 처음에는 다소 쌀쌀맞은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사수로서 나를 많이 챙겨 윤혜영 대리와도 많이 친해질 있었다. 배시시 웃으면서 잔을 맞부딪혔다.

“팀장님, 좋은 날에 표정이 이렇게 어두우십니까?

“내 표정이 좋습니까?

소맥을 꼴깍꼴깍 삼키는데 얼핏 들리는 대화에 귀가 쫑긋해졌다. 상석에 앉아 있는 차태주 쪽으로 슬금슬금 시선을 돌렸다. 입꼬리를 비튼 차태주가 전혀 아니라는 ,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 상실감 비슷한 느끼시는 아닙니까? 오래 기획하던 프로젝트니까. 자식을 독립시키는 것처럼, 후련하면서도 시원씁쓸한 기분?

“야, 임마. 개소리하지 . 임원이랑도 싸워서 관철시켰는데, 팀장님이 너같이 나약한 놈인 아냐.

“아 그건 그렇죠. 팀장님 아니다 싶으면 하시니까 떨리면서도 뿌듯하고 좋은데… 화살이 나한테 올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 직원들이 투닥거리는 것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차태주가 문득 피식 웃었다. 쌍커풀 없이 차태주의 길고 날렵한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피로한 까칠하게 곤두선 표정이기는 했다.

“팀장씩이나 되어서 이런 자리에 말이 많으면 여러분들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직원들과 가볍게 잔을 부딪힌 다음 차태주가 소맥을 들이켰다. 회식 자리에서의 차태주는 평소와 다르게 팀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는 차태주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렁거렸다. 초조한 기분에 물기가 맺힌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닫힌 공간에서 오랫동안 고기를 구워서인지 혀끝에 닿는 공기에서 매캐하고 텁텁한 맛이 났다. 나도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가만히, 숨죽인 채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차태주를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시선이 얽혀 순간에는 도망치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긴 팀장님 원래도 저희가 잘해도 당연히 정도는 해야 하지, 하면서 무덤덤한 편이셨죠.

“서운했단 얘기로 들리는데요.

“아유, 아닙니다. 이게 원래 저희 팀장님 디폴트 모드인데, 우주 들어오고 웃기도 하고 하셔서 잠깐 까먹었을 뿐입니다.

한번 눈이 마주친 다음부터 차태주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동안에도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묘하게 엇갈리며 부딪힐 때마다 울렁울렁한 기분이 들었다. 때마침 나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제로 오르자 흥미롭다는 , 차태주의 새까만 눈동자에 얕은 이채가 돌았다.

“하긴, 우주 쫄랑쫄랑 돌아다니면서 인사하는 보면 귀여워서 나도 웃음 나오더라. 덕분에 요새 회사 다닐 나요?

“아유 우주 씨야 우리 복덩어리죠. 이렇게 빨리 적응하고 줄은, 사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텐데 말입니다.

“차 팀장님은 아셨겠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본인 판단 따라오라고, 우주 뽑았던 아닐까?

말을 끝으로 회식 자리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옆의 윤혜영 대리도 왠지 뿌듯한 얼굴로, 잘하고 있다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우리 우주 , 나한테도 받아야죠!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화끈거렸다. 갑작스럽게 나에게 쏠린 관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김지원 과장이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벌써 소맥 잔을 연거푸 들이켠 후였지만 다시금 공손하게 잔을 기울였다.

그때 차태주가 예고 없이 자리에서 냉큼 일어섰다. 술자리의 주의는 여기저기로 흐트러진 이후라 딱히 그를 별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는 같았다.

그러니까,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얼떨결에 다른 팀원들과 잔을 맞부딪히면서도 미닫이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나서는 차태주가 신경 쓰였다. 진짜 오늘 팀장님 표정이 좋으셨나, 평소보다 조금 딱딱해 보였던 같기도 하고….

“으음….

팀원들의 성화에 이겨 잔을 통째로 비웠다. 바닥을 드러낸 잔을 말끄러미 내려다보자니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분위기 사이로 흐릿한 숨결이 묽게 퍼졌다.

어느덧 술자리의 주제는 윤혜영 대리의 소개팅으로 이동했다. 우우우, 요란하게 부추기는 듯한 소리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대로 시선을 내리까는데 차태주가 떠난 자리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아 마시면서 은근히 취했는지 시야가 빙글 돌았다. 균형을 잡기 위해 허벅지를 잠깐 짚었다가, 덩그러니 남겨진 핸드폰을 집어 들고 쫄래쫄래 밖으로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조금 같았다. 드문드문 흐릿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수평선을 지나 아득하게 펼쳐졌다. 밀폐된 안과 다르게 트인 공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끈덕지게 밀착해 왔다.

일단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좀처럼 차태주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신 건가, 아니면 길이 엇갈렸나…. 불과 마지막으로 봤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떠올리니까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데, 골목 쪽에서 훤칠한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온 차태주는 나를 발견하고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조금 커졌다가,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팀장님.

가까워진 그에게 옅은 담배 내음과 서늘한 향수 향이 풍겼다. 까맣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동안 회사에서의 그가 깔끔하게 정제된 분위기였다면, 그런 포장이 전부 벗겨진 지금은 강렬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을 가감 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 핸드폰… 자리에 놓고 가셨길래, 필요하실 같아서요.

서슬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같아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눈동자가 엉망으로 흔들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피식, 바람 새듯이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태주가 내게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100

“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차태주의 얼굴은 선선히 물러서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자칫하면 서로의 숨결이 스칠 것처럼 차태주와의 거리가 여전히 지나치게 가까웠다는 것만 제외하면.

대체 , 이대로 나에게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 이제 와서 보니까 전혀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리려고 연거푸 고개를 내저었다. 입꼬리를 희미하게 틀어 올린 차태주는 그런 나를 집요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도 나도 이미 술을 많이 마신 후였다. 얼핏 멀쩡한 얼굴이었지만 차태주는 눈가와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에서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잔잔하게 들끓었다.

“고맙네. 연우주 씨가 생각을 주고.

나른하게 풀어진 표정으로 차태주가 중얼거렸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자 나에게 나지막한 그늘을 드리우는 어깨가 새삼스럽게 넓고 탄탄했다. 시선을 의식한 그가 두어 발짝 내게서 물러서 주었다. 느긋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아니에요, 팀장님 여기 핸드폰….

사방이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냉담한 표정을 차태주의 날렵한 얼굴선과 또렷한 이목구비만큼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래도 거리가 확보되어서 다행이라고, 그나마 숨을 돌렸을 때였다. 쭈뼛거리며 내민 핸드폰을 받아드는 대신 차태주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

끝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아슬아슬하게 가늘어진 실이 , 끊어졌다. 불시에,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어버리는 차태주 때문에 심장이 발끝까지 덜커덩 떨어졌다.

여름용 드레스 셔츠의 얄팍한 아래로 단단한 몸과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차이가 나는 탓에 얼굴은 차태주의 목덜미와 쇄골 부근에 있었다. 나를 가두기라도 하는 것처럼 힘이 들어간 팔뚝이 허리를 단단하게 감았다.

이게 대체….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를 밀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이 닿는 부위라도 줄여 보려고 어깨를 들썩거렸지만 그럴수록 커다란 덩치가 나를 더욱 옭아맸다.

“연우주 상사는 누구죠. 회사에서 누구한테 가장 보이고, 인정받아야 합니까.

낮게 가라앉은 까슬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여전히 차태주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어서,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없었다. 이내 망설이듯 길게 몰아쉬는 숨에서 단순히 술기운이라고는 치부할 없는 약간의 음습함이 묻어났다.

“…팀장님이요.

긴장이 울렁울렁 올라와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스르륵, 손가락에서 힘이 풀려나감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답을 순순히 내어주었다. 그제야 허리를 다부지게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도 힘이 느슨해졌다.

“팀장님, 이러다 누가 밖에 나오기라도 하면….

“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습니다.

고개를 치켜든 차태주의 침잠한 눈동자에 희미한 열기가 묻어났다. 갑자기 그가 완연한 어른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차태주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러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한편, 지금의 그라면 무슨 일이든 있을 같아서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아….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로, 반쯤 체념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차태주의 목덜미 쪽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탓에 공교롭게도 피부 위로 숨결이 바로 닿았다. 목빗근이 움찔 떨리더니 차태주가 느슨한 동작으로 나를 길게 떨어뜨렸다.

물끄러미 나를 차태주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원하는 가지지 못하고 물러나는 유감이라는 , 턱선이 바짝 당겨진 얼굴에서 연한 불만족이 묻어났다.

“우주 씨가 팀원들이랑 어울리는 좋은 일이죠.

동의를 구하려는 말은 아닌 같아서 살그머니 벌어지려던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그에게 시선을 되돌려 주기만 했다.

“적당한 유대감이랑 친밀감은 분위기나 성과 도출에도 도움이 되니까, 우주 씨가 윤활유 역할을 주는 고마운 거고.

“팀장님….

“허덕거리는 와중에도 속없이 웃고, 사람 사람 없이 마음 쓰고 다니는 눈에도 예뻐 보이는데….

“…….”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는 ,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돌연 멎었다. 조금은 빈정거리는 말투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태주는 모든 무척이나 귀찮다는 것처럼 냉소적인 얼굴을 했다.

“저기, 팀장님….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걸까. 차태주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차태주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가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모든 독차지하고 싶어지는데.

“…….”

“우주 씨가 나만 보고 웃어 줬으면 한다면 욕심입니까?

[50]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차태주의 호감도를 50% 이상 달성하였으므로, 현재 메인 퀘스트 진입이 가능합니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 알림창이 떠올랐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시스템 창과 그늘진 차태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공략 대상들과는 다르게 차태주는 나한테 업무 외에 사적인 관심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이전 루트에서 공략 캐릭터들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힘들었어서, 단순히 상사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담백하게 접근할 있어서 의욕적으로 회사 일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그어진 선을 성큼성큼 침범하고, 다소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욕심을 드러냈다. 차태주가 나를 이상 부하 직원이 아닌 연애 상대로 보고 있다는 부인할 없었다.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

“…그냥, 오늘 팀장님한테도 중요한 날인데, 괜히 때문에 기분 상하신 같아서.

그런 차태주의 마음을 받아줄 없다면, 부지불식간에 흐려진 선을 다시금 명확하게 그어야 했다. 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메인 퀘스트를 생각하면 차마 그렇게 수도 없어 심란해졌다. 대답을 흐리며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고 시도하자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 바람 빠지듯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휴가에는 예정입니까?

하지만 차태주는 물러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눈치라도 것처럼, 느슨해진 거리를 다시금 저돌적으로 좁혀들었다. 이번 프리 런칭 파티가 끝나고, 다음 월요일에는 전원에게 리프레시 휴가가 주어질 예정이었다.

이제 와서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상황은 내가 간절히 원하고 있던, 한편으로는 끝끝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는…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쉬는 날에 상사가 불러내면 싫어하나요?

차태주가 미묘하게 입술 끝을 휘었다. 떨어지게 반듯한 사람이 묘하게 건들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하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아뇨. …팀장님이라면 괜찮을 같아요.

여전히 깜빡, 깜빡, 반짝이는 시스템 창이 아니더라도 지금 순간이 차태주 루트에서 메인 퀘스트 진입 분기점이라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못내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는 나랑 같이 있는 걸로 합시다.

끝끝내 나에게서 원하는 얻어낸 차태주는 그제야 흡족한 기색을 했다. 술기운으로 혼탁해져 있던 눈동자가 다시금 평소의 또렷하고 이지적인 빛을 되찾았다. 무엇 하나 거리낄 없다는 당당하게 버텨선 차태주의 너른 어깨 위로 흐릿한 밤하늘이 가뿐하게 내려앉았다.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차태주 메인 퀘스트 <뜻밖의 구원> 발동 D-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