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61-70

#61

차태주를 따라 되돌아간 회의실에는 퍼석퍼석 건조하고 썰렁한 공기가 흘렀다.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는 차태주와 사람만이 남겨져 다소 휑뎅그렁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쭈뼛거리는데, 차태주가 쪽으로 끝을 까딱 들어 올렸다.

“연우주 씨는 기업 면접이 처음입니까?

차태주가 얇은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느리게 열었다. , 나름대로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차태주 눈에는 사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나 보다.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응시하며 밭은 숨을 삼켰다.

“네, 그렇습니다 팀장님!

“좋은 자질을 많이 갖추고 있는데, 전혀 다듬어지지 않아서 본인이 그를 발휘하지 못하니 안타깝더군요.

“…….”

“우주 씨만 괜찮다면 오늘 면접에 대한 피드백을 간단하게 주려고 합니다.

“…그, 그래 주신다면 저야 너무 감사합니다.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호되게 혼이라도 날까 단단히 각오했던 것에 비해 이어진 말은 의외로 친절하게까지 들렸다. 무덤덤한 표정의 차태주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연우주 씨는 무엇보다 기업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필요하겠습니다.

“…아.

“기본적으로 직관이 좋은 편이라 업무 이해도는 빠를 같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인지하는지 모르겠는데, 구사하는 언어가 지나치게 모호하고 추상적이에요.

“…….”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봐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거든요. 회사에서는 굳이 시간 들여서 연우주 씨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뭐였는지, 관심 기울일 여유까진 없으니까.

“…….”

“내 뜻을 상대에게 제대로 이해시킬 수조차 없는데, 그래서야 같이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차태주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면접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조금은 재미있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평화주의자, 라고 말했을 차태주가 오만상을 찌푸리던 떠올라 순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서늘한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지는 것을 오래 보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 역시 그렇겠네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고요.

“…그, 그런가요?!

“뭐, 전공 영향도 있기야 하겠지만, 장난삼아 지원한 아니라 진지하게 기업, 특히 금융계 취업을 희망하고 있다면 본인이 정확히 단점 인지하고 고쳐야 겁니다.

차태주는 평온한 얼굴로 명료한 언어를 구사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무한 지지를 주던 천유현과는 조금 많이 다른… 치부를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리는 지적에 약간은 의기소침해졌지만, 따지고 보면 차태주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아휴.

빠릿빠릿하게 감사 인사를 하려다 나도 모르게 끝머리에 한숨이 터졌다. 천유현과 예행 연습을 하는 동안 자신감이 북돋아져서인지, 앞으로는 마음먹은 대로 게임 전개가 수월하게 쭉쭉 흘러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조금쯤은 있었다. 실제로 서류 전형도 떡하니 붙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차태주를 마주치자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인턴십에 최종 합격하는 결코 쉽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그렇다고 한숨 것까진 없고요.

“네, 네넵 팀장님!

“뭐, 우주 씨는 아직 2학년이니까,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겠죠.

이번에는 한숨 쉬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대신 , 앓는 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이런 말씀까지 하시는 보면 역시 면접에는 아예 떨어졌나 보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못내 쓰라린 느낌에 고개를 슬쩍 옆쪽으로 돌렸다.

“네에….

혀끝이 따끔따끔 씁쓸했다. 조금은 자신이 초라해지는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밖으로 여과 없이 내면, 스스로 나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같았다.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저는 미대에 다니고 있고, 저학년이기도 한데 오늘 이렇게 면접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당연히 장난삼아 서류를 넣은 것은 아니고요. 지난번에 팀장님과 말씀 나눈 것도 있고, 인턴십에 붙고 싶은 마음에 나름으로는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이 티가 났나 봐요.

달콤쌉싸름한 덩어리를 안으로 삼켜 내고 차태주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애초에 게임이 나한테 말도 되는 퀘스트를 주었는데, 여기까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다. 그리고, 지금이야 내가 어디로 봐도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단점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고쳐나가면 좋을지 방향성이라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

“덕분에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같아요.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셔서 피드백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고 있자면 심란해지는 마음과는 별개로 차태주의 조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온당했다. 떨어질 후보에게 굳이 시간을 내어 이런 얘기를 준다는 자체가 일종의 배려이기도 하고 말이다. 힘을 다해 긍정 회로를 돌리며 씩씩하게 인사하자 차태주가 대답 대신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음,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 기회에라도 팀장님과 함께 일할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어요.

이곳은 게임 속이고, 나는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갈 테니 실제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내가 기업에 취업하게 된다면 차태주야말로 이상적인 상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많이 혼나고 살벌하게 깨지겠지만, 그만큼 내가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울 있을 같았다.

“…….”

“…….”

생각 외로 정적이 길어져 눈앞의 차태주를 응시했다. 나를 향하는 눈동자가 흑연처럼 매끈하고 단단했다. 이윽고 단정하고 서늘한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데, 신경이 거슬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흥미가 자극된 같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봐도 될까요?

그를 둘러싼 기류가 묘하게 팽팽해지자 주춤,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면접은 사실상 떨어졌지만 게임은 끝난 아니니, 어떤 식으로든 냉랭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텐데…. 앞날을 생각하니 막막한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연우주 씨는 뭐랄까 , 일관적이기는 하네요.

희미하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고개를 바짝 위로 쳐들었다. 아니, 혹은 그게 아니었나? 놀란 마음에 다시금 눈을 떴을 밝아진 시야에서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트가 반짝이고 있었다.

[4]

대체 언제 호감도가 3% 올랐던 거지? 멍한 기분으로 눈을 여러 깜빡였다.

“이걸 해맑고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물정 모른다고 해야 할지.

“…….”

“그래서 욕심 나는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백지장 같은 사람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만져질 있을 같아서.

“팀장님, 그게 무슨….

높낮이 없는 어조로 제멋대로 지껄인 차태주가 말을 끝내자마자 ,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인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으려 했지만 이미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거두어진 다음이었다. 멀찍이 물러선 차태주는 조금은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마디가 굵직한 잘생긴 손이 ,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뒤이어 차태주는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쳐 회의실 문을 나섰다.

자리에 얼어붙은 키가 훤칠하게 날렵한 뒷모습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이제는 혼자만이 남겨진 회의실에 서늘한 향수 잔향이 감돌았다.

***

이를 드러내고 시원스럽게 웃는 강태양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며 혼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강태양이 볼에 뽀뽀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이불을 뻥뻥 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볼에 사뿐하게 닿았던 도톰한 입술의 감촉을 생각하면 깃털이 스치는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제는 지난번 이라윤 때처럼 가리고 아웅할 수는 없었다. 미칠 듯한 사랑의 열병까지야 아니겠지만, 강태양은 나에게 진지한 마음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강태양을 진지하게 연애 상대로 보거나, 혹은 강태양의 표현대로 그와 어떻게 한번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를 향하는 강태양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다 보면, 떨림이 전도되는 것처럼 기분이 울렁거렸다.

 

5 28

>> 집에는 들어갔어 연우주?

5 29

<< 늦게 봤다!! 어제 피곤해서 바로 자버렸어ㅜㅜ

<< 형은 오늘 훈련 ?

6 1

>> 이제 슬슬 스퍼트 올려야지ㅋ

>> 너는 이제 뭐하냐? 언제 방학해?

6 3

<< 이제 기말고사 끝나면 방학 ‘ㅅ’

<< 주말에 봉사 활동 다녀왔는데 병원에 형이 없으니까 뭔가 어색했어……

<< 민주도 많이 보고 싶은가봐! 귀요미ㅎㅎ

6 4

>> ㅋㅋ 너는 보고 싶고?

 

대화창을 거슬러 올라 그동안 메시지를 주고받은 흔적을 훑어 내렸다. 하지만 대화는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고 띄엄띄엄 떨떠름하게 중간에 끊겼다. 강태양도 복귀전을 준비하면서 바빠진 것도 있고, 타이밍이 묘하게 어긋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텍스트로만 봐도 갑작스러운 스킨십 이후 분위기가 한층 어색해진 느껴진달까? 서로를 다른 방식으로 의식하게 것만은 분명했다. 달라진 감정의 무게를 체감하자 전처럼 서슴없이 강태양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강태양이 나에게 진지한 마음을 키워 나가더라도 결국 나는 그런 강태양의 마음을 받아 수는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호감도가 올라갈수록 게임 공략에는 발짝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달라진 감정의 밀도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받게 강태양을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때문에 그동안 은근슬쩍 강태양과의 대화를 피해 오고 있었던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에 내가 원하는 것은 현실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그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게임 공략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 연우주?

묵직해지는 마음 한쪽을 뒤로 하며 핸드폰 화면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가다듬기도 , 연결음이 두어 울리기도 전에 강태양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은근한 피로가 묻어나 결이 거칠어진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태, 태양이 , 그동안 지냈어?

- …….

“뭔가 메시지로만 얘기하려니까 너무 답답해 가지고… 내가 먼저 전화 봤어!

              

#62

- 그랬냐?

강태양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묘한 긴장이 일어 핸드폰을 단단하게 고쳐 쥐었다.

“헤헤, 그동안 지냈지 ?

- …….

“…….”

아무 없는 것처럼 밝게 질문하자 강태양은 대답 대신 잠시 머뭇거렸다. 숨죽인 채로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호흡의 결에 집중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로가 조금은 낯설어져 있었다.

- 그럼, 당연하지. 내가 지낼 일이 어딨겠어?

공백이 오래 머무르기 강태양이 조금은 과장스럽게 큰소리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뽐내듯이 턱을 치켜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형, 복귀전 준비는 돼가? 요즘 컨디션은 어때?

- 잠깐 쉰다고 실력이 어디 가겠냐. 복귀만 , 다들 죽었어.

“으으, 완전 잘난 !

- 그나저나, 연우주 너는 요새 뭐하고 지내냐?

“나는 요새 인턴 준비하고 있었어, 금융 기업!

- 금융 기업 인턴? 네가 그런 것도 ?

“나 그래도 서류 전형은 붙었거든? 금요일에는 면접도 보고 왔어~

- 어이구, 그래 장하다 장해.

평소처럼 티격태격 투닥거리다 보니 뻣뻣하던 분위기도 서서히 자연스러워졌다. 집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차근히 밀려들었다. 고개를 느슨하게 뒤로 젖히고 통화에 집중했다.

“…우리 그때 형네 집에서 맛있는 먹기로 했었는데, 그치.

- 다른 없음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오든가. 내가 맛있는 줄게.

“어? 진짜? 갑자기 오늘 가도 괜찮아?

- 어차피 취미 같은 별로 없는 사람인 알잖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강태양이 , 바람 새듯이 웃었다.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나는 정작 다른 포인트에서 놀랐다. 그냥 하는 소리인 알았는데, 강태양이 정말 요리도 알았구나!

“형 그러면 재료는 가는 길에 내가 갈게!

흘긋, 이제 점심이 지난 시각을 확인하며 활기차게 답했다. 게임 속에 떨어진 겨우 달이 내가 이렇다 주말 약속이 있을 리도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강태양과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

그래도 처음 보는 길은 아니라고 강태양이 사는 고급 빌라촌이 조금 익숙해졌다. 단지 안으로 들어서기 , 근처 마트에 들러 강태양이 보내 리스트를 참고해 장보기 미션을 수행했다. 식재료의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생소한 것들도 있어서, 집중을 기울여 마트 곳곳을 수색해야 했다.

리스트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쇼핑을 마치자 조금 뿌듯해졌다. 종이백에 담긴 식재료를 한아름 품에 안고 강태양의 집으로 향했다. 무사히 현관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연우주 왔냐?

토요일 오후, 강태양의 머리는 평소처럼 뾰족뾰족하게 세워진 대신 부드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게으른 사자처럼 어슬렁어슬렁 현관 앞으로 걸어온 강태양이 작게 하품했다. 느슨한 몸짓으로 팔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식료품 백을 당연하게 받아들었다.

“어이구, 들고 오는데 무거웠어?

“으음….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실은 조금 무겁긴 했다. 지난번 강태양이 내가 운동 부족이라고 구박했던 떠올라 강태양의 시선을 피해 저릿한 팔을 조심조심 주물렀다. 하지만 강태양은 금세 그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 웃었다.

“흠, 어디 보자.

가리비, 토마토, 대파, 마늘, 링귀니 , 루꼴라, 페퍼론치노. 강태양이 하나하나 꼼꼼히 식재료를 확인하며 조리대 위에 넓게 펼쳤다. 흘긋, 쪽을 쳐다보더니 큼직한 손바닥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헝클어트렸다. 불순한 의도가 전혀 섞이지 않은 담백하면서도 친밀한 동작이었다.

“오, 빠트리고 왔네?

“그럼, 당연하지! 원래 이런 되게 꼼꼼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의 팽팽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강태양은 느슨하면서도 여유로운 낯빛이었다. 정작 강태양은 별생각 없었는데 내가 오해하고 있었나?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자 강태양의 표정도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평온한 주말 오후, 오늘의 메뉴는 가리비 오일 파스타였다. 강태양이 직접 요리를 만들고, 나는 옆에서 강태양을 최대한 같이 돕기로 했다. 팔을 길게 뻗어 파스타 팬을 찬장에서 꺼내자 얇은 니트의 끝자락이 살짝 위로 올라가며 탄탄한 허리가 드러났다.

“뭔가 생각보다 되게 본격적이다.

“겨우 정도 가지고?

“그래도. 형은 평소에도 요리 집에서 자주 먹어?

능숙한 손길로 요리를 준비하는 강태양이 내심 신기했다. 이제 제법 구색을 갖춘 조리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쪽을 돌아본 강태양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밖에서 외식하면 MSG 과하고, 식사량 조절하기도 오히려 번거로워.

“그거야 그렇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요리가 많아서, 집에서 입맛에 맞춰서 먹는 컨디션 관리에도 나아.

인공 조미료가 몸에 나쁜 모르는 사람이야 당연히 없지…. 그렇지만 집에서 먹는 요리라고는 라면이나 계란프라이, 혹은 계란프라이를 얹은 라면 수준인 나는 괜히 뜨끔했다.

“연우주 지금 되게… 잔소리 듣기 싫다는 표정이다?

“아, 하하…. 그런 아니구…. 근데 , 나는 죽었다 깨나도 운동선수는 못할 같다.

“그럼 운동선수랑 친하게 지내야겠네.

“응?

“그 운동선수가 요리 만들어서 먹여 살릴지 누가 알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가볍게 던진 강태양이 뒤로 빠졌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오래 얼떨떨할 새도 없이, 덜그럭 소리와 함께 강태양이 가리비를 커다란 볼에 아름 담아 내밀었다. 강태양이 시키는 대로 꺼끌꺼끌한 껍질을 칫솔로 슥슥 문지르며 해감 먼저 시작했다.

강태양은 바닥이 깊은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페퍼론치노와 저민 마늘을 가볍게 볶았다. 이어 손질을 마친 가리비와 함께 송송 썰어 토마토와 대파를 팬에 넣고, 가장자리에 화이트 와인을 빙글빙글 돌리며 충분히 부었다. 팬에 담긴 재료가 팔팔 끓자 매콤쌉싸름한 향이 솔솔 올라왔다.

“면 삶는 우주 네가 볼래?

“아, 그럴까?

“응. 나중에 가리비 육수에 볶을 거니까, 너무 많이 익히면 .

김이 모락모락 솟는 팬을 나간 듯이 바라보고만 있자 강태양이 나에게 링귀니 면을 건넸다. 나도 정도는 있겠지? 냄비에 물을 한가득 담아 면을 삶았다. 인덕션 앞에서 낑낑대는 나에게 강태양이 8분으로 맞춰 앙증맞은 디자인의 빨간색 주방용 타이머를 내밀었다.

“아, 뜨거워!

그냥 타이머만 열심히 보고 있다가 때가 되면 면을 건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리에 손이 익지 않으니 동작 하나하나가 어설펐다. 링귀니 면을 건지다 삐끗하는 바람에 끓는 물이 손등에 흠씬 튀었다.

쓰라린 통각에 움찔 어깨를 떨자 강태양이 곧바로 손목을 잡아챘다. 그대로 싱크대 쪽으로 나를 잡아당기고는 발갛게 부어오른 손등 위로 흐르는 물을 콸콸 들이부었다. 뜨끈해진 피부 위로 차끈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는 내내 억센 손아귀 힘으로 나를 붙드는 강태양의 표정이 막히도록 진지했다. 번이고 손등을 흐르는 물에 씻겨 다음에도 강태양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연우주.

“…아.

“봐봐, 다친 없나 보려고 그래.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끝을 짧게 강태양이 고개를 기울이며 손등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거리가 너무 가깝기도 했고, 오래 붙들린 손목이 욱신거려서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읏, 그치만 아파서….

“아, 미안.

참다 못해 아픈 내색을 하자 강태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손을 풀었다. 손아귀 탓에 빨갛게 달아오른 희멀건 살갗이 탄탄한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었다. 민망한 기분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강태양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주방에서 왠지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이제 요리도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깊숙한 위로 마늘 기름을 두른 강태양이 미리 만들어 가리비 육수와 삶은 링귀니 면을 볶았다. 팬의 핸들을 가뿐하게 움직이는 강태양의 팔뚝에 굵직한 근육이 도드라지고, 남자다운 손등 위로는 핏줄이 우둘투둘하게 올라왔다.

“우주야, 아래에서 소금 꺼내 줄래?

요리에 제법 집중했는지 가늘어진 눈을 강태양은 입술을 지그시 다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강태양을 들여다보다 흠칫 놀라 찬장 아래쪽을 더듬었다. 대충 가늘고 하얘 보이는 것이 안에 조미료통을 집어 들었다.

“여기….

“이건 설탕이고, 옆에 .

“응, 알았어!

내가 건넨 조미료통을 받아든 강태양이 ,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이건 설탕이었구나…. 머쓱한 기분으로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소금을 꺼내 쭈뼛쭈뼛 건넸다.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요리에 강태양이 소금과 후추 간을 했다. 몸에 움직임이 워낙에 있고 절도 있어서 그런가, 별것 아닌 같아 보이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굉장히 그럴듯했다. 두툼한 팔뚝에서 벌어진 흉통으로 이어지는 선에 무심코 시선을 던지다 그대로 강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형 근데 되게 요리 잘하나 보다.

“나 원래 몸으로 하는 잘하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강태양이 별것 아니라는 대답했다.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평범한 잘난 척이었지만 말하고 나서 강태양이 괜히 혼자 움찔한 것이 문제였다.

“…아, 그렇구나!

흘끗, 시선을 던지며 강태양이 눈치를 살피는 탓에 역시 덩달아 당황해 발짝 늦게 대답했다. 덕분에 간신히 편안해진 분위기는 다시 급속도로 어색해져 갔다.

              

#63

“와아….

지글지글,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위에서 오일이 바짝 졸아붙었다. 고소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흥건하게 공기 중에 퍼졌다. 작게 탄성을 내뱉자 강태양이 뿌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 먹어 .

강태양은 요리용 나무젓가락으로 링귀니 줄기를 길게 들어 올렸다. 기대감을 머금고 나를 향하는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반질반질했다. 탱글탱글한 윤기가 흐르는 면발 쪽으로 고개를 깊숙이 기울였다.

“오, 맛있어!

스르륵, 입술을 타고 올라온 파스타 면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안에 번지는 고소한 맛에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리려다, 마찬가지로 쪽으로 머리를 향하던 강태양과 그대로 이마가 부딪힐 뻔했다.

간질이는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불상사(?) 피하기 위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나뿐만이 아니어서, 강태양 역시 바삐 움직이던 탓에 결국은 어깻죽지가 서로 부딪혔다.

[45]

스치듯이 지나쳐 그다지 아프지 않았는데도 강태양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불퉁한 표정을 강태양의 끝이 불긋하게 달아오르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머리 위로 빨간 하트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아, 하하….

아니, 누가 보면 때린 알겠어! 강태양은 지금 본인의 이런 반응이 분위기를 더욱 이상하게 만든다는 인지하고 있는 걸까? 상대 쪽에서 나를 묘하게 의식하니, 아무 생각 없으려던 역시 슬슬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예리하게 치솟는 긴장을 가라앉히며 파스타 접시를 꺼내 왔다. 테두리가 예쁜 파스타 접시에 동그랗게 뭉친 면을 넣고, 일부러 껍질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은 가리비를 가지런히 둘렀다.

마무리로 바질 가루를 조금씩 뿌리자, 산뜻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플레이팅이 완성되었다. 가리비 오일 파스타와 함께 준비한 통밀빵, 새우 샐러드를 식탁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와, 이렇게 두니까 되게 그럴듯하다!

워낙에 바쁘고 일상이 팍팍하기도 해서, 끼니는 대충 때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인데다 나는 옆에서 강태양을 거드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장을 재료가 제법 그럴듯한, 눈에는 근사한 요리로 탄생한 모습을 보자 뿌듯했다.

“원래 보기 좋은 먹기에도 좋다더라.

푸짐하게 차려진 요리를 골똘하게 바라보던 강태양이 내게 시선을 흘긋 던지고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강태양과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포크에 링귀니 면을 돌돌 말아서 한입 가득 넣었다. 쫄깃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에 입꼬리가 절로 들썩였다.

“으으, 너무 맛있어…!

탱글탱글한 가리비살은 엄청나게 싱싱해서 달착지근한 맛까지 배어났다. 그에 올리브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풍미와 마늘의 감칠맛도, 페퍼론치노의 알싸함까지 더해지니 안에서 작은 폭죽이 터졌다. 아까 요리하고 남은 화이트 와인까지 잔씩 곁들이자 매콤함에 새콤함을 더해, 오일 파스타를 전혀 느끼하지 않게 먹을 있었다.

“형, 설거지는 내가 할까?

“놔둬, 이따가 내가 몰아서 하면 .

“그래도, 밥값은 해야….

“나랑 같이 놀아 주는 연우주 밥값이야.

입술에 반질반질하게 묻은 오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질문했다. 이렇게 끝내주는 식사를 얻어먹었는데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강태양은 접시가 널브러진 식탁을 뒤로 나를 거실 쪽으로 이끌었다.

블랭킷이 흐르듯이 걸쳐진 소파 위에 강태양과 나란히 앉았다. TV 켜자마자 해외 축구 경기가 실시간으로 송출되었다. 쪽을 슬쩍 쳐다본 강태양이 채널을 돌릴까 하길래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 그냥 두라고 했다. 강태양 집이 아니면 내가 어디서 이런 보겠어, 하는 생각이었다.

웅웅대며 올리는 경기장의 함성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서 소파 등받이에 등을 비스듬히 기댔다. 베란다의 넓은 통창으로는 노르스름한 오후 햇살이 따뜻하게 새어 들어왔다.

가볍게 와인을 잔씩 하기도 했고, 일단 배가 부르니까 나른하고 너그러운 기분이 들었다. 예민하게 곤두서려던 기류를 수면 아래 덮어 두고 느긋한 여유를 즐겼다.

“너는 귓바퀴가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생겼냐?

예고 없이 불쑥 뻗어 손이 귓가를 매만졌다. 화들짝 놀라서 , 어깨를 세차게 돌렸다. 방금 강태양이 별것 아닌 스킨십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역시도 강태양의 손길이 피부에 닿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자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휘둥그레 강태양이 은근히 눈치를 살폈다. , 강태양을 민망하게 하려던 아니었는데…. 괜히 과민 반응을 했나 싶어서, 아무렇지 않은 일부러 배시시 웃었다.

“형도 그럴 ? 그럼 세모난 귓바퀴도 있어?

“아냐, 나도 사진에서 귓바퀴 가끔 보는데 이렇게 생겼어.

“그런가….

듣다 보니 그럴듯한 같기도 하고… 여전히 확실치는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통 나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을 때에도 귓바퀴를 신경 써서 관찰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보란 듯이 옆얼굴을 들이미는 강태양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바퀴의 생김새를 관찰했다.

“형은 진짜 길쭉한 모양이기는 하네….

“거봐, 귓바퀴가 유난히 동글동글한 거라니까.

강태양은 다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꺼끌꺼끌한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귓불에 반복해서 문질러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옅은 취기로 눈가가 불그스름해진 강태양이 조금은 거칠어진 숨을 뱉었다. …지금 분위기는 대체 뭐지?

[️45]

올라갈 ,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붉은 하트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기다렸다는 강태양이 쪽으로 상반신을 깊숙이 기울여 왔다. 엉겁결에 소파에 반쯤 눕혀진 채로 점차 내게 가까워지는 강태양을 올려다봤다.

“헉…!

간질이는 숨결이 코끝에 스쳤다.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이대로는 !

스킨십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앞섰다. 강태양의 집으로 오는 내내, 혹시라도 강태양이 나를 진지하게 좋아하게 될까 걱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어영부영 스킨십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말 돌이킬 없이 오해가 짙어질 것이다.

끝내 강태양이 나에게 고백하더라도 나로서는 그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그때야말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모양새가 될지도 모른다. 절대 그것만은 막아야 !

“혀, ! 이건 아니잖아!

, 강태양의 가슴팍을 세차게 밀쳤다. 그와 동시에 눈을 번쩍 떠올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강태양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어 갔다. 거부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실망 어린 기색이 짙어져 갔다.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별로냐?

냉기 서린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적막한 공기를 타고 TV 경기장에서 전해지는 소음만이 수런수런 흘렀다. 이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강태양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다 못해 위험하게 일렁거렸다.

“…….”

“…….”

, 어떡하지. 나름대로는 최대한 강태양의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해서 내린 판단이었지만, 강태양은 이미 크게 상처받은 같다. 조마조마해하기도 찰나,

 [WARNING!] 위기 상황! 이대로라면 공략 캐릭터 [강태양] 호감도가 최대 10까지 떨어질 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위기감이 출렁출렁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다툼을 때에도 강태양의 호감도가 3% 떨어졌었지. 그렇지만, 스킨십을 거절했다고 해서 호감도가 10% 내려가는 거야? 나름대로는 애쓰고 있었지만 상황은 오히려 나빠지기만 했다. 이대로 강태양과의 사이가 어그러지면 게임 클리어도 불가능인데…. 강태양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다!

*플레이어 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기사회생 찬스가 작동합니다*

 [기사회생 찬스] 위기 상황 해결을 위해 시스템이 제공하는 힌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Tip: 해당 찬스는 게임 진행 동안 번만 제공됩니다. 사용을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기사회생 찬스라니? 이런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 건가…. 번의 기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지금 위기부터 모면하자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64

 

<SYSTEM> [기사회생 찬스] 발동으로 공략 캐릭터의 플레이어에 대한 지난 3초간의 생각을 투시할 있습니다. (잔여 사용 횟수: 2/3)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스템 창과 강태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지금 나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더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위해 상대방이 지금 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내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시스템이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걸까? 그보다, '투시'라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지금 얘가 가지고 노는 건가?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았을 , 강태양은 지금껏 여자가 되었건 남자가 되었건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 전전긍긍해 적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연애에 있어서 자신감이 넘쳐흐른다면 모를까.

그런데 연우주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관심 있는 것처럼 먼저 다가오고,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도, 다른 남자랑도 똑같이 다정해 보이고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잡아 볼라치면 곧바로 정색한다.

이쯤 되니 처음부터 사람 헷갈리게 하려고 작정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연우주 눈에는 강태양이 그렇게 매력이 없나 싶어질 지경이다.

 

궁금증을 품는 동시에 글자가 빼곡히 들이찬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아니, 정도를 기대한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눈동자에 힘을 주고 글자 글자 훑어 내리듯 강태양의 심리를 읽어 내렸다.

“아, 그래서….

강태양이 매력이 없다니, 물론 마지막 결론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떻게 해서 강태양이 그런 결론까지 다다랐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니, 강태양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하는 당연하잖아!

“…….”

“…….”

3, 2, 1. 정확히 3초가 지나자 언제 자리에 있었냐는 시스템 창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게임 속이라는 감안해도 마법 같은 일이어서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 아냐. 이렇게 정신줄 놓고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건 그대로 지금 강태양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불과했다. 오해를 풀고, 다시금 강태양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태양이 !

꿀꺽, 침을 삼키고 여전히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강태양을 서서히 마주 향했다. 날카로워진 눈빛의 이면에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자아가 흐릿하게 나부꼈다. 그러자 강태양을 향한 미안함이 더욱 커져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눈에 형이 별로겠어.

“그럼 뭔데.

강태양이 비뚜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조금은 누그러진 기색이었지만, 강태양 머리 위의 하트는 여전히 어두운 빨간색으로 불길하게 번뜩거렸다.

“나, 나는 사실 지금까지 스킨십 경험이 전혀 없거든!

“…….”

“또 형이랑은 지금까지 친구 사이라고만 생각해서, 이런 쪽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조금 놀라서….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솔직한 마음을 꺼내 놓았다. 말끝을 흐리면서 입술을 깨물자 위태롭게 깜빡이는 하트가 진동을 멈췄다.

“…….”

“…….”

다행히 호감도 급하락의 위기는 모면한 건가. 하지만 불과 전의 노곤노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우리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뻣뻣했다.

“그 들으니까 나는 오히려 비참해진다?

술이 표정의 강태양이 몸을 완전히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 허탈하다는 듯이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보자 지금 순간 강태양이 느끼는 감정이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그러자 단순한 우정으로 게임을 공략할 있을 거라고 믿어 자체가, 얼마나 순진하고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가 실감이 났다. 호감도를 올려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나를 좋아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상처받게 공략 대상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건지도 몰랐다.

“미안해, 형….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을 담아서 강태양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지금 순간 게임 공략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론적으로는 강태양이 상처받는 알면서도 어느 정도는 강태양의 마음을 이용해야 했다. 온전한 의도도 아니고, 내가 바라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사실이 가장 미안했다.

“됐어, 사과받자고 얘기 아니야.

산통 깨졌다는 , 팔을 휘적휘적 내저은 강태양이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럴수록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멀찍이 떨어진 강태양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보지도 말고.

“…혀엉.

“에휴, 너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데리고 내가 하겠다고.

그렇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를 향하는 모든 과정이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수는 없지 않을까? 게임 공략 대상은 연애 감정은 아닐지라도, 결국은 내가 인간적으로 아끼고 좋아하게 사람들이었다.

정해진 결말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만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ᅠ그들이 나아갈 미래를 격려하며, 상황이 허락한다면 소중한 추억을 쌓아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을 위해 있는 일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며, 이별하는 마지막에 내가 무엇을 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도 요새 오락가락하는 같다. 이적 문제 때문에 심란해서 그런가.

“…아직도 많이 고민 중이야?

나지막이 가라앉은 강태양의 목소리에 얕은 한숨이 섞여 들었다. 은근슬쩍 눈동자를 위로 치켜올렸다.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강태양의 손이 내게서 거두어졌다.

“어, 그렇지 .

“…….”

섣불리 말을 얹는 대신, 그대로 그렇게 강태양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기울여 듣고 싶다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상대방의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그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강태양을 응시했다.

“그냥, 자꾸 거기 봤자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드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니까 오춘기 비슷한 왔나 . …조금은 지쳤는지도 모르고.

“…….”

“그런 아냐, 간절히 바라 오던 꿈을 마침내 이뤘는데, 그다음에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

“…….”

“차라리 아예 포장을 보지 않은 채로 남겨 두면 실망할 일도 없겠지.

아직 이렇다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강태양은 객관적으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누가 보면 감히 네가 뭐라고 강태양한테 그런 마음을 가지느냐고,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강태양이 자꾸만 안쓰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걸까.

“형, 나는 형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갑자기 그게 소리야.

“…그치만, 진심인걸.

“기분 풀어 주려고 써도 , 났어.

물끄러미 나를 보던 강태양이 팔을 길게 뻗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굵은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눈을 조금씩 감았다 떴다 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성적인 의도는 전혀 묻어나지 않는 스킨십이었다.

“막상 영국에 가서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을 같아. …그리고 형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마음을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

“그래도 있잖아 , 누군가의 눈에는 형이 정말 부러운 사람이라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

“노력한다고 해서,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없는 건데, 그래도 형은 해냈잖아. 그래서 나한테는 형이 대단해 보여.

“…….”

“그리고 , 아직 근처에도 보지 못한 같은 사람들은…. 형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꿈을 키워 수도 있잖아.

“…….”

“하루하루 벅차고 힘들다가도, 그래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면서.

“…….”

“그러니 형이 계속해서 반짝반짝 빛나 주었으면 바란다면, 그건 역시 욕심일까?

말을 잇다 보니 북받치는 기분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난번 한강에서 대화를 나눈 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태양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같다. 처음에는 나랑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사람이었지만,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왔던 것을 알게 되며 마음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또한 그렇게 강태양의 외로움과 결핍에 밀접하게 닿을수록, 그가 진심으로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 역시 안에서 강렬하게 솟구쳤다.

“…….”

“…….”

강태양은 대답 대신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렇지만 완벽한 무표정이라기보다는 미묘하게 흐트러진 얼굴이었다.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색이 유난히 짙어져 바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안에 담긴 감정 역시 좀처럼 없었다.

“내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지, .

“…….”

“나 되게 이상하다, 자꾸만 앞에서는 평소에 하던 소리를 하게 되지?

예상보다 길어지는 정적에 귓가를 긁적이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한강에서 기습적인 뽀뽀를 당했을 때보다 지금이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왜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슬쩍 삐져나오고 말았던, 자신의 외로움과 결핍을 정갈하게 갈무리했다.

“그리고 당연히, 형이 영국에 가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예전에 말한 것처럼, 어떤 선택이 좋을지는 형이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ㄱ….

말을 미처 마치기도 , 불쑥 다가온 강태양이 입술에 뽀뽀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술의 촉감은 말랑하면서도 꺼슬했다. , 적나라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아주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에게 맞춘 강태양은 지난번처럼 수줍어하면서 쭈뼛거리지 않았다. 대신 승부욕이 이글이글 들끓는 눈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게.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잠깐 회까닥했었나 .

“…….”

“복덩어리를 걷어차는 것도 아니고, 프리미어리그에 갈지 말지 고민을 했지? 바라던 일인데.

“아, 하하… 역시 그렇지 ?

방금까지의 그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강태양의 굵은 얼굴이 투지로 넘쳐흘렀다.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강태양의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나를 한가득 담았다. 잠깐, 이건 단순히 반짝보다는 조금 위험하게 번뜩이는 느낌인데?

“응. 나는 원래 갖고 싶은 반드시 손에 거머쥐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러니까, 그거 지금 축구 얘기하는 맞지? 강태양 머리 위의 하트가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50]

곧이어 호감도가 한꺼번에 6% 급상승함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강태양의 호감도를 50% 이상 달성하였으므로, 현재 메인 퀘스트 진입이 가능합니다.[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강태양 메인 퀘스트 <신뢰의 조건> 발동이 [10 ] 강태양 복귀전 일자에 맞추어 자동으로 조정됩니다.

              

#65

6월에 접어들면서 캠퍼스에도 기말고사 시즌이 찾아왔다.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시험 대신 PPT 리포트로 대체하는 수업이 많았다. 시험을 본다고 마냥 기뻐할 것만도 아닌 , 교수님들은 그를 핑계 삼아 작정하고 엄청난 양의 과제를 배분했다. 얼추 기말고사 윤곽이 잡힌 것만으로도 기가 빨릴 지경이었다.

“이 말도 되는 범위는 대체 뭔데? 하나 깜짝 하고 정도면 무리되는 양은 아니죠, 하시는데 진심 책상 엎을 뻔했다.

“교수님들 하나같이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아는 거냐고…. 저희는 최소 인당 명씩은 방어해야 하는데요?

“이쯤 되면 공감 능력 부족이라고 본다. 다들 상아탑이 낳은 괴물이 되어 역지사지의 미덕을 잃어버린 아닐까?

수업이 끝나고 미대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 황병열과 유한나가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볼멘소리를 했다. 주로 불평으로 이루어진 만담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로서는 대화에 그다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게임 공략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시끌시끌한 대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죽죽 스크롤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강태양 복귀전 관련 기사가 수두룩하게 널려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이적설까지 같이 겹친 탓에 강태양의 일거수일투족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래도 우주는 좋겠다. 성과 사회 교양이라도 이미 A 확정이잖아.

“아, 진짜야. 성과 사회 교양이라고 사람 대체 누구냐? 조별 과제 폭탄 걸려서 B- 떴는데, 재수강하기도 너무 애매하고 아주 미쳐 버리겠어~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위기 상황을 간신히 수습하고 강태양 메인 퀘스트 진입 조건을 달성한 것은 물론 기뻤다. 호감도가 최대 10%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창을 봤을 때의 섬찟한 기분을 생각하면 죽다 살아났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다만 강태양의 복귀전과 동시에 진행될 거라는 메인 퀘스트가 어떤 형식일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게임 진행도 벌써 중반부에 접어들었는데 이라윤과 강태양을 제외한 나머지 명의 공략 대상은 루트를 제대로 진행조차 못했다. 남은 시간 안에 게임을 무사히 클리어하려면, 이번 강태양 메인 퀘스트도 성공해야 텐데….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걱정은 지금 순간 내가 느끼는 심란함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상하게도, 메인 퀘스트 예고를 접한 다음부터 내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고백을 거절당했던 이라윤의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상처받고 실망한 기색이었던, 그래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던.

강태양과 맞닿았던 입술을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물론 얼떨결에 입술을 빼앗긴(?) 충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날 강태양의 입맞춤이 선전포고만 같았다. 내내 이야기해 오던 안정된 관계, 진지한 연애의 대상으로 너를 선택하겠다고 공언하는 것만 같은.

“하아….

이라윤 때와 마찬가지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강태양이 나에게 고백을 수도 있다. 다중 공략 루트를 택하려면 그런 강태양의 마음을 거절해야 텐데…. 그때 강태양이 느끼는 실망감과 좌절감은 이라윤보다 하면 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안함이 마음의 빚처럼 차곡차곡 쌓여 심장이 시큰해졌다.

“야, 연우주. 어떻게 생각해? 아무 대답이 없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걷는데, 반응이 없는 의아했는지 앞서가던 황병열과 유한나가 쪽을 돌아보았다. 팔뚝 윗부분을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는 것만 같은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얼굴, 지금 납빛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게, 얘들아. 인생이란 뭘까?

“…….”

“나만 이렇게 힘든 아니겠지? 다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거겠지?

누군가의 눈에는 별일 아니겠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고찰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양팔을 들어 올리고 어깨를 으쓱하자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는 거야. 연우주, 우리 듣고 있기는 했어?

“이상하다. 평소에는 장학금에 목숨 걸던 애가 헛바람이 들어서는, 요새 늦봄이라도 타냐?

“아, , 면… 혹시 우주, 연애하는 아냐?

나에게는 나름 진지한 고민이었지만 친구들은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농담을 걸어올 뿐이었다. 그러다 유한나가 옆구리를 찌르면서 건넨 말에는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거든!!

“야,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급발진이야?

“맞아, 그러니까 오히려 수상한데? 우리한테 숨기고 있는 거지?

“말도 , 나는 앞가림 하기도 바쁘다구~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고개를 격하게 도리질했다. 게임 공략도, 안위도, 챙겨야 것들이 태산이었다. 강태양이랑 찐한 스킨십을 하지 않으면서도 메인 퀘스트 공략에도 성공하고, 그와 동시에 강태양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앞으로 행복해지고 사랑받을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심란한 와중 이런저런 생각들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진짜야, 연애 같은 시간 완전 없어.

하지만 들쭉날쭉한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돌진해야 하는 일은 하나, 게임 공략을 위해 강태양 루트를 클리어하는 것이었다. 입맞춤이라는 예상 밖의 변수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길은 계속해서 걸어야만 한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중심을 단단히 잡고 흔들려서는 ! 굳건하게 다짐하는데, 느닷없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평소라면 천천히 확인했겠지만 왠지 묘한 촉이 서서 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MK금융] 하계인턴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입사 절차와 계약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송부드렸습니다. 또한 출근 일자 조율을 위해 팀에서 별도로 연락을 드릴 예정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헉!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고는 단박에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합격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일이지? 좀처럼 믿기지 않는 행운에 얼떨떨해졌다.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PICK ME UP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차태주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기다렸다는 시스템 창이 떠올라 돌발 퀘스트 성공을 알렸다. 전혀 가망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보니 정말로 차태주의 호감도도 14%까지 올라 있었다.

“저거 저거, 감정 기복이 날뛰는 보니까 백퍼 연애하는 맞는데?

“연우주 지금 썸녀한테 연락 아냐?

세상에, 이건 정말 최상의 시나리오잖아! 핸드폰 화면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다 끝내 헤벌쭉 웃음을 터뜨리자 친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들의 은근한 놀림 따위에는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얘들아, 안녕~ 오늘은 먼저 갈게!

빨리 메일을 확인하고 입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무리에서 멀어졌다. 이로써 게임 클리어에 발짝 가까워진 셈이었다.

게임 속이기는 했지만 엄청난 스펙의 후보들을 물리치고 인턴 포지션에 당당하게 합격한 것이 못내 기뻤다. ‘대체 보고 뽑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랄까? 차태주처럼 빈틈 없고 기준이 높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정을 받았다는 뿌듯함도 함께였다.

그나저나 뽑힌 그렇다 치고, 팀에 들어가서도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야 텐데 가능하려나? 물론 붙어도 있을지도 걱정이기는 했다. 하지만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던 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배부른 걱정이라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은 맘껏 기뻐하면 될까?

드르르르-.

문자가 도착한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금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타이밍상 회사에서 전화가 아닐까 싶었다. 큼큼, 목을 작게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연우주입니다!

- 우주 ?

까슬하게 퍼지는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다시 고쳐 쥐었다. 차태주 팀장님이신가? 회사에서 전화가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차태주가 나에게 직접 전화할 줄은 전혀 몰랐다.

“티, 팀장님 안녕하세요!

- , 안녕하세요.

“그, 어… 그러잖아도 제가 인턴십에 붙었다고, 회사에서 방금 전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물어물 말을 이어 나갔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으니 지금 차태주는 모습을 있을 없었다. 그런데도 이대로 금방이라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할 수도 있을 같았다.

- , 지금쯤 연락이 갔을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차태주는 묘하게 흡족한 목소리로 답했다. 핸드폰으로 전해지는 회사의 소음에 얕은 웃음소리가 섞여든 같기도 했다. 사이로 들리는 나지막한 중저음에 귀기울이기 위해 잔뜩 집중했다.

“팀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실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어요.

- …….

“그리고, 사실 제가 붙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그것도 조금 놀랐고요.

- 음….

그에 대해 차태주는 딱히 이렇다 부정을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차태주도 쟁쟁한 후보들을 뚫고 내가 붙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가? 그치만, 나를 뽑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차태주잖아! 괜히 조마조마한 기분에 등을 반듯하게 곧추세웠다.

- 당연히 직접 전화해야죠. 내가 데리고 일할 팀원인데.

“아, 감사합니다….

- 손으로 뽑은 사람인 만큼, 우주 씨가 MK에서 어울리는 인재로 성장할 있을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 업무 시작일을 조율하려고 하는데, 가능하다면 일찍 당겨서 출근할 있겠어요? 다음 월요일 정도로.

“앗, 그런데 제가 이번 학기 수업은 거의 끝나가는데…. 아직 기말고사가 남아 있어서요.

- 어지간하면 리포트 제출로 대체가 가능할 텐데, 교수님들께는 제가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물론 나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는 게임 공략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현생에서도 워낙 잡고 학교생활 하던 몸에 익어서, 이렇게 서슴없이 학생의 본분(?) 어겨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차태주는 의사와는 관계 없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정리할 모양이었다.

“무,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야 저야 너무 좋지만요.

- 좋습니다. 출근일이 정리되면 팀에서 다시 연락이 겁니다.

직접 전화까지 걸어 것은 좋았지만, 차태주는 깔끔한 목소리와 군더더기 없는 매너로 용건만을 간결하게 전했다. 어쨌든 그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조금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라도 그가 제안을 물릴까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다른 뛰어난 후보들도 많았을 텐데, 그중에서도 저를 뽑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 , 번호 저장해 두고요.

“넵, 알겠습니다!

다만 차태주의 반응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전화가 끊겼다.

    

#66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천유현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먼저 전화를 적은 없었지만, 합격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들어서인지 오래 생각할 새도 없이 천유현의 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천유현은 조금도 거리끼는 기색 없이 나의 합격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줬다.

조금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응원이 든든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천유현의 도움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있었으니, 감사의 뜻으로 이번에는 내가 천유현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천유현은 약간은 망설이며 건넨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하자 기분 좋은 온기가 손끝에 저릿하게 퍼졌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뿌듯한 충족감 정도일까? 천유현이 일처럼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도 정말 감사했고, 칭찬과 격려를 퍼부어 덕택에 으쓱해졌다.

그리고… 물론 현실에서는 애초에 좋은 소식을 접할 일이 많이 없기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허물없이 기쁨을 나눌 사람 역시 없었던 같다.

“관장님, 여기예요!

거대한 백화점 건물 앞에서 천유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은 먼저 나왔는데도 왠지 모르게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정각에서 5 정도가 모자란 시각, 서울 한복판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롤스로이스가 주르륵 도로를 미끄러졌다.

“우주 , 먼저 있었군요.

기사가 뒷좌석의 문을 대신 열자 천유현이 차에서 내렸다. 천유현은 가벼운 여름 슈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청량하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이 멀리서도 한눈에 돋보였다.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다가온 천유현이 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에서 천유현을 만나서인지 새로우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에요, 저도 정말 방금 도착했어요.

“그럼, 이제 안으로 같이 들어갈까요?

“네, 좋아요! …어, 그런데 관장님.

“네?

“아니에요, 음… 그냥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관장님을 뵙게 되니까 신기해서요.

조금 들뜨는 같기도 하다는 말은 안으로 말아 삼키고 천유현과 나란히 백화점으로 향했다. 최근 문을 열었다는 백화점은 내가 직접 고른 약속 장소였다. 물론 천유현은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하고, 취향도 고상하니 어디를 가든 그가 만족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인 만큼, 오늘만큼은 내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었다. 백화점 내부에 들어서자 조경이 정원처럼 트인 공간이 넓게 펼쳐졌다. 중간중간 쉬어 있는 벤치도 있어서인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실내 식물관 같기도 했다.

“관장님은 이미 보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요새 여기가 제일 분위기가 좋다고 해서요!

“아니에요, 이야기는 들은 있지만 직접 방문하는 처음입니다.

“앗, 정말이세요?

“네, 실내 정원이 인위적인 느낌 없이 산뜻해서 기분 전환이 되네요.

“와아…. 같이 보고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높은 천장에서 드리워지는 싱그러운 잎사귀를 응시하는 천유현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를 해서 골라 장소였지만, 천유현의 눈에는 그다지 근사해 보이지 않을 같아 걱정이 많았다. 지금처럼 항상 사람이 기분 좋아지도록 격려해 주고 배려해 주는 천유현의 태도를 나도 많이 닮고 싶었다.

“관장님, 혹시 멕시칸 음식 같은 것도 좋아하세요?

“평소에 즐겨 찾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먹으면 입맛을 돋우기에는 좋더군요.

“아하! 그게 약간 멕시칸 같으면서도 퓨전? 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은 특이한데…. 일단 보시면 거예요.

“하하, . 오늘만큼은 우주 씨를 따라가야겠습니다.

내가 앞서 길을 안내할 있도록 천유현이 발짝 뒤로 물러나 줬다.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 식당가에 향한 다음 미리 익혀두었던 지도에 따라 예약해둔 식당을 찾았다. 제대로 자리가 맡아졌는지 번이고 확인했지만, 혹시 모르니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예약 애플리케이션을 다시금 열어 확인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독특한 문양을 그리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벽지였다. 멕시코 음식과 중국 음식을 동시에 컨셉으로 잡은 퓨전 레스토랑이어서인지 확실히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골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높은 천장 아래로, 과감한 곡선을 그리는 나뭇가지들이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부조화가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아드는 독특한 인테리어였다.

“연우주 고객님, 1 2 테이블 예약 맞으실까요?

“네, 맞습니다!

식당을 물색하던 언젠가 영감을 찾는 직업상 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던 천유현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천유현은 취향이 굉장히 까다로울 테니, 무리해서 어설프게 고급스러운 장소를 예약한들 강한 인상을 남길 수는 없을 같았다. 그래도 조금 신선한 컨셉으로 무장한 감각 있는 레스토랑은 천유현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주 , 예약해 레스토랑이 굉장히 특색 있네요.

“아, 그렇게 생각하세요, 관장님?

“네, 멕시칸과 차이니즈라면 대표적인 이민자 음식인데, 고급화한다는 발상 자체는 이제 흔하지만 둘을 합쳐 놓은 것은 처음 봅니다.

“맞아요, 저도 실은 처음 보는 거기는 한데….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같아요, 그렇죠?

그걸 알아봐 주고 표현해 주니 한번 뿌듯한 충족감이 손끝에 간질간질하게 번졌다. 관장님이 나에게 너무 다정하게 잘해 주시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역시 자꾸만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는 허니 치즈 퀘사디야고, 옆에 거는 아보카도 치킨 토스타다예요. 프라이는 여기 살사 소스랑 꿀이랑 곁들여 먹으면 맛있대요! , 조금 목이 마르실 때에는 완탕면도 있어요.

“막상 이렇게 나오고 보니 음식을 너무 많이 시킨 아닌가요?

“그래도 오늘은 제가 관장님께 대접하는 거니까요. 조금씩이라도 많이 드셔 주세요!

붉은색과 금색 테두리를 두른 화려한 문양의 접시 위에 아기자기한 멕시코 음식이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음식이 전부 나오니 괜스레 신이 나서 천유현에게 이것저것 소개했다. 나의 설명에 유심히 기울이던 천유현이 끝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처음에 MK금융 1층에서 등록을 하고, 대기실로 갔는데 혼자서만 완전 새까만 슈트를 입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새 면접 트렌드가 너무 격식 있는 것보다는 적당히 자연스러운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던데 저는 전혀 몰랐거든요.

“하하, 그랬어요?

“네, 게다가 앞선 면접자가, 이분이 그때 조별 과제에서 만난 분이기도 한데… 아무튼 엄청 표정이어서, 들어가기 전부터 너무 긴장되어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알았어요.

처음 인턴십 공고가 떴던 순간부터, 지원을 준비하고 면접을 걸쳐 끝내 인턴십에 합격하기까지 감정적 롤러코스터가 수십 심장을 타고 오르내렸다. 하지만 인턴십을 준비하며 고생했던 이야기를 기말고사에 한창 열을 올리는 황병열이나 유한나한테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공략 대상들과 나눌 있는 내용 역시 전혀 아니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제가 어떻게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관장님이 저를 도와주셔서겠죠?

“우주 씨가 좋은 사람인 회사에서도 알아봐 주어서겠죠.

그러다 보니 언제나 무한 지지와 함께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천유현 앞에서 무용담 아닌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천유현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성취감을 느낀 일이어서 절로 달뜬 목소리가 나왔다.

“히히,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팀장님 말이에요, 엄청나게 냉철하거든요. 눈만 마주쳐도 칼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

“네.

“아무리 봐도 마음이 약해져서라거나, 사심이 있어서 저를 붙여 사람은 아닌 같은데…. 대체 저에게서 보고 뽑아 주셨을까요?

“…흐음.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게 감사해서라도 앞으로 열심히 봐야겠어요!

하지만 차태주가 대화의 주제에 오르자 천유현의 낯빛이 다소 어두워졌다. 평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그럽고 부드럽게 받아주던 것과 대조적으로 지금 천유현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 어째서지? 내가 너무 오버했나? 아니면 얘기만 하느라 조금은 뽐내는 것처럼 느껴졌나?

“그 팀장이라는 사람, 이름이 차태주라고 했던가요?

              

#67

“네, 맞아요! 혹시 관장님도 아시는 분이세요?

“직접적으로는 아닙니다만, 이름을 들어 적은 있네요.

“아, 그러셨구나….

천유현이 차태주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못내 신기했다. 그렇지만 지난번에는 강태양과 이라윤이 직접 만나기도 했고, 게임 속에서 존재하는 ‘캐릭터’들 간의 접점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에게야 이곳이 게임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현실이니까.

그런데 여전히 천유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대체 왜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차태주가 그렇게 악명이 자자한 사람인가? 면접을 준비하면서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접했던 게시물들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분에 대해서 좋은 얘기를 들으셨나요? 혹시 제가 조심해야 부분이라도….

“아, 그런 아닙니다. 다만 기준이 굉장히 높은 사람일 같아서, 우주 씨에게 혹독하게 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

“인턴이라지만 회사에 다니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니까요. 게임에 들어와서 우주 씨가 해도 고생을 하게 되네요.

천유현은 다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부드러운 걱정을 건넸다. 잠깐 드리웠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표정이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전반적으로 섬세한 선을 그리면서도, 눈매와 콧등, 턱선에서는 강직함이 묻어나는 유려한 얼굴이었다.

“분명히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

“사실 현실에서의 삶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어서, 저는 이런저런 어려움에는 나름 단련이 되어 있답니다!

게임에 빙의하게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라, 하루빨리 공략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됨과 힘듦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의 삶도 난이도가 낮지만은 않았다. 물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의지대로 삶을 헤쳐 나간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저를 응원해 주시는 관장님도 계시잖아요.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걸요.

“…….”

“덕분에 모든 낯설었던 곳이지만, 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던 같아요.

, 마지막 말은 조금 오버였나. 게임 공략을 하며 겪는 일들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천유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했다. 애틋함과 거리감이 모호하게 뒤섞인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우주 씨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제야 같습니다.

“아, ?

“다른 누가 선택되었더라도, 우주 씨만큼 일을 해낼 없었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택, 이라는 표현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게임에 들어올 때에, 만월 그림 앞에서 누군가 나를 간절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의지로 이곳까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찾았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동안은 빨리 게임을 무사히, 신속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천유현의 말을 듣고 게임 속에 들어오게 이유를 떠올리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보인 천유현이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숨을 짧게 안으로 삼켰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관장님과 만나게 것도 신기한 인연 같아요.

괜히 분위기가 묵직해질까 , 이번에는 가벼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이제 식사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트로우를 물고 피냐콜라다를 빨아 삼켰다. 내가 움직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유현이 시선을 찬찬히 내리깔았다.

“그러게요, 인연이라는 묘하네요.

이어진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금은 착잡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만 일어날까요?

말을 마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천유현을 향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봤다. 빛이 새들어오는 통창을 등지고 천유현의 속눈썹이 부드러운 그늘을 그렸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사도 될까요, 관장님?

“우주 씨가요?

“관장님께서 도와 주셔서 인턴십에 붙었으니, 그렇게 하게 주세요!

“하하,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처음 계획대로 당당히 계산대로 나아가 점심 식사를 결제했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있는 선에서는 조금은 동등하게 그와 관계를 맺고 싶었다. 비교적 부담 없이 이렇게 천유현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있는 역시 게임이라서 좋은 아닐까?

푸드 코트에서 이어지는 복도의 벽면에는 실크 스크린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스타에서 즉흥미술 화가, 제삼 세계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콜라주 초상화였다.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봤지만, 실물이 주는 압도감은 핸드폰 화면과는 확실히 달랐다.

“백화점에 이렇게 포스터를 전시해 보니까 신기하네요, 그렇죠?

오늘 천유현과의 약속 장소를 백화점으로 고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록 천유현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언젠가 그가 새로운 영감을 찾아다닌다고 했던 말만은 기억에 남았다. 벽면에 전시된 포스터들을 넌지시 가리키자 천유현도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요즘에는 소수를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가치를 더하는 예술에 역시 관심이 많이 갑니다.

“…….”

“어떻게 보면 오늘 우주 씨가 저를 데려와 백화점 건물 자체도 예술적 가치가 가미된 건축물이라고 있고요.

다채로운 색감의 실크 스크린 포스터를 지그시 바라보던 천유현이 덧붙였다. 우와, 멋있다…. 미술관 관장답게 천유현은 식견이 뛰어난 데다 자신만의 미학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예술 재단에서 본업을 하는 천유현의 모습 역시 보고 싶어졌다.

“저도 나중에 화가로 데뷔하게 되면 이렇게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이런 것도 천유현이 이야기하는 영감이라고 있을까? 천유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의욕이 생생하게 솟구쳤다. 역시 하루하루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감동을 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에 집중하던 천유현이 문득 흐무러지게 웃었다. 유려한 눈매가 가늘게 휘어지더니, 단정한 손을 내게로 불쑥 뻗었다. 곧이어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아….

뭐지, 방금 두근거렸지…? 얼떨떨한 기분에 바쁘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오랫동안 빙의해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과몰입하고 있었나 보다. 밀려드는 긴장에, 천유현의 손이 거두어질 즈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짝 뒤로 물러났다.

“관장님,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당황스러운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천유현의 시선을 피했다.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돌리려 했다.

“우주 씨만 괜찮다면, 괜찮다면 슈트를 선물하고 싶은데요. 입사 선물 해서요.

이제 슬슬 마무리하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천유현이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이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남성복 매장이 늘어서 있었다.

“앗, 그렇지만….

천유현에게는 매번 받기만 하는 처지이지만 오늘만큼은 조금이라도 보답할 있는 하루였으면 했다. 그래서 약속 장소도 내가 주도적으로 정했고, 천유현에게 점심 식사도 대접했으니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주 씨는 아직 대학생이니까 혼자서 슈트를 고르기가 애매할 수도 있을 겁니다.

“…….”

“고생 많았고,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받아 준다면 내가 기쁠 겁니다.

면접을 보러 갔을 혼자서만 아빠 같은 슈트를 어설프게 걸치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민망함이 선명했는지, 점심을 먹는 동안 그에 대해 천유현에게 가볍게 투덜거렸다. 천유현은 내가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걸까?

“너무 받기만 해서 죄송한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차마 거절도 하겠어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자꾸만 쭈뼛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천유현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는 자연스럽게 나를 아래층으로 이끌었다. 남성복 매장 층의 브랜드들은 죄다 나에게는 낯설었는데, 천유현은 처음부터 미리 정해 것처럼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분이 입으실 슈트를 고르고 계실까요?

“제 선에서 먼저 살펴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따로 부탁하겠습니다.

거울을 중심으로 양옆에 슈트 재킷이 빼곡하게 늘어선 매장에 들어서자 빳빳한 옷감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싸하게 퍼졌다. 세련된 태도로 깍듯하게 인사하는 직원을 물린 천유현이 행어 쪽으로 직접 다가섰다. 눈에는 비슷비슷하게만 보였지만, 천유현은 예리한 안목으로 슈트 재킷을 딱딱 짚어 냈다.

“우주 씨한테는 너무 심각한 느낌보다는, 조금은 산뜻한 느낌이 어울릴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천유현이야말로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아래에 재킷을 가져다 댔다. , 그러고 보니 나랑 관장님이랑 차이가 은근히 났구나. 무심한 손길이 끝과 목덜미를 스치는 동안 숨을 잠깐 멈춘 채로 천유현을 올려다봤다. 가까운 거리라 촘촘히 내리깔린 속눈썹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셔츠랑 팬츠까지 같이 입어 보겠어요?

천유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브라운과 블루가 연하게 섞인 체크 재킷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누가 뺏으려는 하는 아닌데도 천유현의 손에서 재빠르게 재킷을 낚아챘다. 이어서 직원이 건넨 셔츠와 팬츠를 탈의실에서 갈아입었다.

“어머, 정말 어울리시네요. 풋풋하면서도, 어깨도 떨어지니 예쁘고.

거울을 보고 멀뚱거리자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찬사를 내뱉었다. 모르는 눈에도 천유현이 골라 슈트는 남의 옷을 빌려 입었던 것처럼 어설펐던 면접 슈트와는 전혀 달랐다. 회사 출근에 적합하게 격식 있으면서도 적당히 캐주얼하고, 활동적인 느낌도 묻어났다.

“흠….

막상 입고 나니 나름대로 어울리는 같아서 내심 마음에 들었다. 약간의 기대를 품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정작 옷을 골라 천유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곧이어 성큼 다가온 단정한 손이 넥타이에 닿았다.

“아, 감사합니다….

무심한 손길이 바로 아래에서 넥타이를 매만지자 괜히 뜨끔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으로 시선을 살짝 돌렸더니 집중하느라 일자로 다물린 천유현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넥타이를 마저 고쳐 천유현은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조금은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 내리던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꾸만 애를 물가에 내보내는 같은 기분이 들죠?

              

#68

, 정도로 걱정하실 일은 아닐 텐데…. 천유현이 나를 섬세하게 신경 주는 느낌은 좋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느껴질 만큼 내가 그에게 미성숙하게 굴었나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으음… 그동안 제가 관장님한테 너무 어리광을 부렸나요?

조금은 멋쩍어진 기분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상황에 알맞은 행동을 하려고 조심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다른 사람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얘기를 쫑알거린 적이 없었다.

“하하, 아닙니다. 우주 씨는 항상 잘해 오고 있는데, 내가 괜한 노파심이 드는 겁니다.

“…….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아닙니다만, 회사는 정글이라고도 하고요. 우주 씨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조금 순수한 면도 있으니까요.

그대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이유를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눈빛 때문이 아닐까? 부드러운 눈빛에서는 순간 나를 격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확실하게 전해졌다. 조금도 혼탁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회갈빛 눈동자에는 언제나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저기… 관장님, 그러면 이거 말고 다른 입어 볼까요?

“아, 옷이라면 눈에는 우주 씨랑 어울리는 같은데, 어때요?

“아, 실은 저도 마음에 들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걸로 정하도록 하죠.

계산대로 향한 천유현이 능숙한 태도로 슈트를 구매할 때에는 가격표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천유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스스로는 감당할 없는 것들을 매번 받는 입장에서 결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관장님!

결국은 오늘도 천유현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만났다가 것들을 받아 버린 모양새였다. 슈트 벌과 여벌 셔츠 개가 담긴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뒤뚱뒤뚱 백화점 밖으로 나섰다.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들면서 쨍쨍한 햇빛 아래 초록색 잎사귀가 반짝였다.

“우주 .

이제 슬슬 천유현과도 헤어질 타이밍이었다. 멀찍이 길게 뻗은 도로에서는 천유현의 롤스로이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 옆을 돌아보았다. 따사로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천유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오늘 내가 했던 걱정들은 잊어 주세요. 분명 회사 생활도 우주 씨다운 방식으로, 잘할 있을 겁니다.

천유현이 나에게 건네는 조언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조건 없이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나를 단단히 지지해 주는 천유현을 만날 때면 마음의 힘이 솟아났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하는 사람은 아닌데, 조금은 걱정이 되면서도 천유현의 기대만큼 실제로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관장님은 항상 저를 좋게 봐주셔서… 회사에서 팀장님이나, 다른 분들도 그렇게만 생각해 주신다면 좋을 텐데요.

“회사는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니까요. 일을 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

“지금까지 내가 우주 씨라면, 그런 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잘할 같은데요?

담담한 어조로 날카롭게 핵심을 꿰뚫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태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일에 대한 대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면접 연습 살짝 엿보기는 했지만, 만월미술관이나 예술 재단을 경영하는 천유현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우주 씨가 인턴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다 보니 조직에서 텃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럴 때에는 하나만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스스로를 믿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든 얕보이지 않는답니다.

확실히 내가 생각해봐도 단순한 스펙으로는 도저히 붙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으니, 모든 사람이 나를 환영하지는 않을 같다. 천유현의 말처럼, 주눅 들지 않고 회사 생활을 해야겠다. 결연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또….

무언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지 천유현이 머뭇거렸다. 의아한 마음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시선이 맞닿자 천유현이 그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관장님!

“기본적으로는 상사인 차태주랑 모든 논의해야겠지만, 혹시라도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나에게 곧바로 알려 주세요.

평소 그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로 읊조린 천유현이 입매를 단단하게 굳혔다. 서늘해진 표정이 풍기는 낯선 위압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관장님한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 너무 고맙지만…. 천유현이 회사에서 겪는 어려움을 자신에게 이야기 달라고 하는 것인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같은 MK 계열사이고 하다 보니 내가 도움이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아…!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는데, MK금융과 만월미술관을 경영하는 MK예술재단은 같은 MK그룹에 소속되어 있었나 보다! 게임 세계에서 천유현이 가지는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자 감탄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

지난번 차태주가 전화를 이후 입사 준비는 빈틈없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호언장담했던 대로 차태주는 기말고사나 남은 출석 일수를 리포트로 대체할 있도록 해결해 주었다. 졸업생이기도 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산학 연계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해서 교수님들과의 네트워크가 짱짱한 모양이었다.

게임 진행에는 제한 시간이 있으니, 빠르게 출근해서 차태주를 만나는 나에게도 좋은 일이기는 한데…. 당장 다음 월요일로 출근이 결정되자 떨리기도 하고,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해서 마음이 들썩거렸다. 미리미리 공부라도 두자는 생각에 업무 관련 내용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 우주 선배

불시에 핸드폰 상단에 떠오른 메시지 알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헉, 라윤이잖아?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이라윤이었기 때문이었다. 루트 클리어와 함께 고백을 거절한 다음부터는 이라윤과 이렇다 교류가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덜컥 이름만 부르는 메시지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라윤아 안녕!! 그동안 지내고 있었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심각한 일은 아니겠지? 두근두근 뛰어오르려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답장했다.

그렇게 서둘러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조금은 반갑다는 마음이 비죽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없는 건가…. 그동안 이라윤이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인으로서는 아니라도 라윤이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 저야 비슷하죠 ~

>> 그보다 우주 선배, MK금융 인턴 붙었다면서요?

<< 헉… 맞아!! 근데 라윤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 이미 학교에 소문이 자자한걸요~ 학교 전체에서 명만 뽑혔다던데, 축하해요 선배!

<< 고마워… T.Tㅎㅎ 운이 엄청 좋았던 같아

이라윤이 내가 인턴십에 붙은 것을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학교에 이미 소문이 퍼졌다니….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그때 익명 커뮤니티에서도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보면 다들 관심 있어 하는 포지션이기는 텐데…. 그래도 어쩐지 민망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그런 준비하고 있으면서 저한테는 아무 말도 해주고, 서운한데요?

>> 우주 선배, 합격 사주실 거죠?ㅎㅎ

그러나 이어진 이라윤의 말에는 더욱 크게 당황해서 느슨하게 기댄 등을 바짝 곧추세웠다. 나한테 서운하다고?!

하긴, 라윤이 입장에서는 얘기를 직접 들은 아니라 소문을 통해서 접한 거니까 말이다. 이라윤이 그렇게 생각할 알았다면 당연히 먼저 얘기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 조금 시간을 달라 그래서 나로서는 이라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겠는 기분에 선뜻 답장도 못하고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 당연하지!! 우리 라윤이 먹고싶은 있으면 뭐든 말만 !

그렇지만 질문에 대한 답이 늦어지면 오해할까 , 정신을 퍼뜩 차리고 핸드폰 화면 위에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라윤이가 나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풀어 주고 싶었다. 덕분에 이라윤과의 약속은 일사천리로 잡혔다.

              

#69

이라윤이 정한 약속 장소는 학교 근처의 아기자기한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은은한 주홍빛이 감도는 실내 조명이 페이즐리 패턴의 테이블 위로 내리쬐었다. 벽면에는 옹기종기한 다육식물 테라리움이 근사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일요일 점심시간이다 보니 소개팅하는 커플이나 여자들 무리가 테이블에 앉아 있어 화사하고 새초롬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레스토랑에 먼저 도착해서 메뉴를 살피고 있는데 짤랑, 종소리가 울리며 유리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이라윤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훤칠하게 키가 이라윤은 칼라에만 배색이 들어간 깔끔한 폴로 티셔츠와 연청 스트레이트 진을 입고 있었다.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평소와 같이 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와중… 조금 남자다워 보이는 왜지? 머리를 조금 짧게 자른 이라윤은 3 남짓한 사이에 어깨가 넓어진 같았다.

“우주 선배, 일찍 도착했네요?

아니… 이전보다 잘생겨지는 가능하기나 얼굴이었나? 이라윤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걸어오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닿았다. 금세 테이블에 건너편에 앉은 이라윤이 눈매를 가볍게 찡긋해 보였다.

“라윤아!

조금 멍해지는 기분과 함께 입을 열었지만… 그다음에도 말을 섣불리 잇지 못하고 안으로 꿀꺽 삼켰다. 잘생겨졌다!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인 감상이었지만, 고백을 거절한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는 아무래도 괜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고요히 맞닿은 시선이 한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너는 , 얼굴 되게 좋아 보인다!

“그래요? 우주 선배는 볼살이 빠진 같아요.

“앗, 그랬나?

발짝 늦게, 최대한 가치 중립적인 표현으로 이라윤을 칭찬했다. 되돌아온 말에는 괜히 의식이 되어서 부근을 매만져 보았다. 어제 잠을 늦게 자기는 했는데 그래서 조금 초췌해 보이나?

“선배, 인턴 준비하느라 너무 고생 많이 아니에요?

“그랬나? 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확실히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인턴 준비를 하느라 이래저래 신경 써야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입맛이 없어서 끼니도 평소보다 챙겨 먹지 못했다. 정작 나는 자각하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이라윤은 알아차리다니 신기했다. 고개를 바쁘게 끄덕거리자 이라윤이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라윤아, 오늘 먹고 싶어? 오늘은 형이 줄게!

“어, 정말로 합격 쏘는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이라윤이 도착하기 팔랑팔랑 넘겨 보고 있던 메뉴를 테이블 반대쪽으로 내밀었다. 고심 끝에 링귀니 크림 파스타와 부라타 치즈를 곁들인 프로슈토 피자, 살치살 스테이크 샐러드로 메뉴를 정했다.

주문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금세 나왔다. 선명한 색감과 고소한 냄새가 테이블 위로 퍼지자, 오랜만에 식욕이 당겼다. 함께 주문한 자몽에이드와 라임에이드를 이라윤과 함께 , 맞부딪혔다.

“어제 얘기했지만, 그래도 다시 인턴 합격 축하해요 선배.

“앗, 고마워 라윤아!

“선배는 전공도 미술이고, 아직 2학년인데도 인턴으로 뽑혔다니 대단한데요?

“히히, 실은 나도 내가 어떻게 붙었는지는 모르겠어.

이라윤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무척 쑥스러워졌다. 귓가를 조심조심 매만지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자기 목이 타는 기분에 자몽 에이드를 들이켜는데, 어느새 이라윤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져 있었다.

“설마, 우주 선배 매력을 면접관이 알아본 아니에요?

“엥, 무슨 그런 말도 되는 소리를 .

인턴 붙었다고 너무 사람을 띄워 주는 아닌가? 낯부끄러운 소리에 바쁘게 손사래를 쳤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라윤은 여전히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학교에 소문이 났다는 정말이야? 나한테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해서….

인턴십 때문에 학기를 일찍 마무리한다고 하자 황병열이랑 유한나가 우리한테 말도 하고 준비했냐고 등짝을 퍽퍽 두들기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은 전혀 몰랐다.

물론 게임에 빙의한 처지이긴 했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라윤보다도 소식이 늦었나 싶기도 하고. 결국 나는 이쪽 세계 사람은 아닌데, 사실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원래 그런 소식은 본인만 빼고 얘기하는 거니까요.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소식인데 어때요? 괜찮아요.

“음… 그런가?

“정 신경 쓰이면, 정면돌파 하면 어때요? 그러잖아도 희연 선배가 우주 선배 면접 영상 찍어서 학교 유튜브 채널에 올리면 딱이겠다고 하던데.

“어, 희연이가 학교 유튜브를 운영해? 걔는 홈마라는 하느라 되게 바쁜 알았는데.

“그때 저희 영상 올린 다음에 학교 유튜브 홍보팀에 PD 스카우트 받았대요. 제가 보기엔 완전히 적성 찾은 같아요.

“헉, 그게 정말이야?

“네, 희연 선배 이제 트위터 팔로워 대신에 영상 조회수에 집착하는데… 선배 들어간 다음에 콘텐츠 조회수가 평균 1.5배는 늘었다나? 제대로 진심이더라고요.

, 장희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지. 물론 홈마 업무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장희연은 재능과 카리스마까지 정말 보통이 아니었어서…. 넓은 판에서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있을 같았다.

“그런데 라윤이 너는 요즘에도 희연이랑 연락하나 ?

이라윤의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질문했다. 그래도 우리 명이서 같이 재미있게 영상 찍었는데…. 장희연은 조별과제가 끝나자마자 덕질해야 한다고 칼같이 돌아서고, 이라윤도 고백 이후로는 나와 거리를 두고 지냈으면서 둘이서는 꾸준히 연락하고 지냈나 보다.

“그냥 가끔씩요. 콘텐츠 촬영할 모델이 필요한가 봐요.

“그렇구나….

이라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물론 내가 이라윤의 고백을 거절했으니 잘한 것도 없고,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도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머리로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아주 약간 조금 서운해졌다.

“안 그래도 희연 선배가 우주 선배는 어떻게 지내냐고, 둘이 같이 있는 사진이라도 보내라고 난리예요.

“아, 그랬어?

“말 나온 김에 지금 사진 찍을까요?

“앗, 그럼… 우리 오랜만에 셀카 찍을까?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이라윤이 예전처럼 같이 셀카 찍기를 제안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라윤이 테이블을 돌아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화면 안에 가득해진 우리 사람의 얼굴 위로 포근한 오후 햇살이 반짝였다.

“라윤아, 지금 표정 너무 진지해. 웃어 !

평소답지 않게 뻣뻣하게 긴장한 이라윤의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어깨를 작게 으쓱인 이라윤 역시 따라 웃었다. 처음에 조금 경직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나중에 찍은 사진들은 한층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가장 나온 사진 장을 골라 장희연과 같이 있는 단톡방에 보냈다. 0.1초도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뜨더니, 답장이 실시간으로 도착했다.

>> ㅋㅋㅋ둘이그냥 사귀지

장희연의 시크한 감상이 이라윤과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틈새를 파고들었다.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라윤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진 것이 느껴졌다. 역시 괜히 조금 더워지는 기분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배, 제가 오늘 보자고 있잖아요.

“…응, 라윤아!

고백 다음 만났을 때에는 이라윤이 나를 대하는 일이 조금은 껄끄러워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기색 전혀 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점심식사를 했다. 장희연의 문자가 서로 모른 덮어 두려 했던 것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내자, 이라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화의 운을 띄웠다.

“이제 여름 방학에는 자주 텐데, 선배가 그동안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해서요.

“에이, 내가 라윤이 너를 어떻게 까먹어!

“그래도, 인턴 하면서 일하고, 새로운 사람 만나느라 정신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치만….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우주 선배에 대한 마음 접은 아니에요.

짙어진 눈동자와 굳게 다물린 입매까지, 이라윤은 방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역시 이것이 이라윤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70]

호감도 수치는 전과 변함없이 여전히 이라윤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심장이 묵직하게 차오르고, 흉곽이 빼곡해지는 듯한 느낌에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선배도 많이 바빴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대생인데, 진로를 갑작스레 트는 거니까 얼마나 일이 많았겠어요.

“…아.

“지금 당장은 우주 선배한테 커리어에 집중하는 중요한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 선배가 준비가 때까지 내가 기다릴 거라는 , 기억해 주세요.

짙은 갈색을 머금은 이라윤의 동공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앗…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같은데…! 지난번에 내가 아직 누군가를 사귈 처지가 아니라고 것을 생각 깊은 이라윤이 깊이 헤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지자면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기도 하고,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뭐해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마음에 답하는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줘요.

“…….

“우주 선배 상사한테 혼날 , 저번처럼 같이 고기 구워 먹으러 가도 좋으니까.

말을 마친 이라윤이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라윤이 네가 나보다 낫구나…. 슬쩍슬쩍 드러나는 의기소침한 표정에서 이라윤이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있었다. 하지만 부담스럽게 자기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이라윤은 여전히 나와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라윤아, 정말 고마워!

진심을 가득 담아 그런 이라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일차적인 공략은 끝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라윤과의 인연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앞으로 게임 속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역시 이라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괜히 한번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보았다. 그날 놀이공원 관람차 앞에서 이라윤과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셀카와, 비어 있던 꽃다발 안에서 돋아난 보송보송한 벚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이라윤과 사이에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만은 여전했다. 그런 마음이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서 조금은 안도감도 느껴졌다. 연애적으로 특별한 사이가 되는 아니더라도, 마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 신뢰감과 유대감을 되새기자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70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51 (남은 시간: 48 23시간 46)]

출근을 앞둔 월요일 아침, 새벽같이 눈을 뜨자마자 시스템 창을 맞닥뜨렸다. 플레이 51 차라니, 벌써 제한 시간도 절반이 지나가 있었다. 처음 게임에 빙의되었을 때에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어찌 저찌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이라윤 루트는 공략을 완료했고, 강태양은 이제 진입을 앞두고 있는 메인 퀘스트에 성공한다면 루트 클리어도 있을 것이다. 차태주는 간신히 제대로 접점을 만들 있었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라고 봐야 하고… 도지훈은 강태양 루트를 클리어하고 매력 수치를 올리면 만날 있는 건가?

이라윤 루트가 마냥 쉬웠다는 아니지만, 확실히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 확실하게 클리어한 루트는 하나뿐이고, 마지막 공략 대상은 만나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면 못내 초조해졌다. 그럼에도 게임 공략에는 조금씩이나마 진전이 있었고, 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만 잘해 보자, 연우주!

스스로에게 약속하듯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다짐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천유현이 선물해준 체크 패턴 슈트를 입고 있었다. 섬세한 안목으로 골라 , 나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걸치자 갑옷을 단단히 두른 것처럼 자신감이 충전되었다.

넘치는 의욕과는 다르게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분명 30 정도는 여유 있게 나왔고, 지난번 면접을 보면서 적도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도 무슨 마가 끼었는지, 중간에 길을 한번 잘못 드는 이어 엎친 덮친 격으로 지하철까지 연착되었다.

그러는 바람에 회사 건물에는 정시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내 데스크에서 사원증을 낚아챈 다음, 경영혁신팀이 있는 27층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출근하게 인턴 연우주입니다!

“우주 왔어요? 잠시만요.

첫날부터 지각이라고 혼이 나지는 않을지 잔뜩 긴장한 채로 인사했다. 그러나 정작 들어선 사무실에서는 다들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빠서, 처음 인턴에게 신경 겨를까지는 없는 듯했다.

쭈뼛거리다 일단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세팅되어 있는 이메일 계정을 열었다. 외계어의 나열 같은 메일 제목을 살피다 흘긋, 옆쪽을 돌아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으면 좋을지 물어보고라도 싶었는데, 급박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한마디 꺼내기가 어려웠다.

“우주 .

딸깍딸깍, 마우스를 움직이며 새롭게 도착하는 메일을 하나씩 클릭해 보고 있을 때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시원한 향이 뒤에서 번졌다. 흠칫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아보자, 가까이 다가온 차태주가 바로 뒤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황급히 인사하자 서늘하고 단정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올라왔다. 커피를 픽업해 오는 길이었는지, 떨어지는 네이비색 슈트 차림의 차태주는 오른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초록색 로고가 선명한 건물 1 프랜차이즈 커피샵의 일회용 컵에서 향긋한 원두 향이 피어올랐다.

“아침부터 폭탄이 떨어져서 다들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팀원들과는 이따가 천천히 인사들 하고, 우주 씨는 나랑 먼저 잠시 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차태주가 관리하는 경영혁신팀은 널따랗게 오픈된 오피스의 구획을 전부 차지했다. 차분하고 세련되게 조성된 공간이었지만 안을 타고 흐르는 공기만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차태주와 함께 싸늘함이 감도는 오피스 복도를 걷는 동안 ‘지금 이게 파이널 버전 맞아요? ‘첨부 누락된 같은데 지금 바로 메신저로 보내 줘요’ 같은 다급한 요청이 귓가에 휙휙 내리꽂혔다.

“이쪽이 개인 오피스입니다. 안으로 들어와요.

복도 끝자락, 전면 유리가 투명하게 둘러싼 차태주의 개인 오피스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창백한 조명 아래 생기 없는 흰색 위주였던 바깥의 사무실과 다르게, 차태주의 공간은 블루그레이 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군데군데 배치된 깔끔한 원목 스피커나, 레트로한 영화 포스터, 영어 원서 때문이지 사무실보다는 세련된 비즈니스 호텔 라운지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회사에서 보게 되니 반갑네요, 우주 .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널찍한 원목 데스크 건너편, 세련된 곡선을 그리는 사무 의자에 앉은 차태주가 쪽을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조금은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공간과 빼닮은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는 길에 헤매지는 않았고요?

“네, 괜찮았습니다!

처음 출근한 회사가 모든 낯설고 생경하기만 나와는 정반대로 차태주는 깔끔하면서도 능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방이 분주한 와중에서도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단단히 쥐고 있다는 자신감이 돋보였다. 그런 차태주 앞에서 어설프게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수월하게 길을 찾은 것처럼 대답했다.

“인턴이지만, 회사에 놀러 왔다는 생각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6주가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우주 씨도 많은 배워 가고 팀에도 기여하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니까요.

“네, 팀장님!

“또 우주 씨는 출시 예정인 애플리케이션의 사용층이랑 나이가 가장 겹치니까요. 이용자단 피드백이나, 반응을 이끌어 내는 측면에서는 좋은 인사이트를 있을 거라고 보고요.

“…….

“세세한 가이드 라인은 윤혜영 대리가 옆에서 붙을 거지만, 전체로 돌아가는 업무에 있어서도 우주 씨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을 겁니다.

유려하고 빈틈없이 이어지는 말들은 차태주가 언젠가 표현한 대로 기업의 언어로 가득했다. 마디도 놓쳐야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기울였다. 노트와 펜을 가져왔더라면 차태주가 발음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받아 적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 팀의 일원이 환영합니다.

어느새 빳빳하게 등줄기를 곧추세운 나에게 힐긋 시선을 던진 차태주가 입꼬리를 설핏 올렸다. 뒤에 있는 널찍한 창으로 시린 빛이 새들어와, 차태주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

“나한테 궁금한 있습니까?

[14]

떨어지는 질문과 함께, 차태주의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 수치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얘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들었고, 직접 보면서 배우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연애 시뮬레이션이고, 내가 회사에 출근한 이유는 차태주를 공략하기 위해서인데….

번째 돌발 퀘스트를 무사히 클리어해서일까, 호감도가 올라간 차태주는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새로 들어온 인턴에게 베푸는 팀장으로서의 친절, 내지는 아량에 가까워 보였다. 봐도 공사 구분이 확실해 보이는 차태주에게 개인적으로 파고 들어갈 만한 틈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아, 저기요, 팀장님.

“네, 듣고 있어요.

“팀장님은 …어떤 팀원을 가장 좋아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으니, 게임 공략에 필요한 정보라도 수집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취향(?)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질문하자 차태주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앗, 그러니까 말은… 보통 팀원들에게서 어떤 기대하시는지, 제가 그걸 알면 팀장님을 도와드릴 있을 같아서요.

“흠….

“얼핏 들은 얘기이지만… 이번 인턴십에 저보다 훨씬 스펙이 좋은 사람들도 많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혼자서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대체 보고 저를 뽑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 주신 만큼 열심히 잘해 보고 싶습니다!

칼같이 냉정한 분위기에 사적인 맥락은 전부 덜어 내고 말을 이었다. 몸을 느슨하게 뒤로 기댄 차태주가 내게 비스듬한 시선을 던졌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에 옅은 흥미가 번졌다.

“내가 리스크에 배팅하는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네, ?

“연우주 씨를 뽑은 이유 말입니다. 분명히 연우주 씨한테 어떤 자질을 같은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조직 생활에서도 빛을 발할 있을지는 모르겠어서.

묘하게 집요해진 차태주의 시선이 얼굴을 훑어 내렸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차태주는 무덤덤한 무표정을 되찾았다. 차태주와 마주 앉은 나는 여전히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등허리를 바짝 곧추세운 채였다.

“내 판단이 맞다는 증명하는 , 앞으로 6 동안 연우주 씨가 해야 몫이겠죠.

“…아.

“그러니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봐요.

자리에서 일어선 차태주가 쪽으로 다가와, 긴장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차태주의 단정한 입꼬리가 얕게 들썩였다. 무작정 따르기에는 모호하게만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정확한 의중을 캐물을 수도 없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켜 내고, 힘차게 대답하자 차태주가 격려하듯이 끝을 까딱였다. 이제 그만 나가 봐도 된다는 , 길고 정갈한 손가락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14]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호감도 수치를 흘끗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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