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rain Chapters 51-60

#51

며칠 만에 라일이 아침에 그의 방에 나타났다.

종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해진은 기이한 예감과 함께 문을 바라보았다. 종소리를 듣고 대답하는 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피부가 올씩 일어나는 기분을 받았다. 어제 잠들기 그를 엄습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가진 다가오기라도 하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그를 바라보자 응접실로 들어서던 라일도 덩달아 몸을 굳혔다.

사이로 심장 소리가 기차처럼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해진 또한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 머뭇거리던 라일이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슬쩍 아래로 깔린 잘난 눈매가 어쩐지 며칠 전보다 초췌해진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 러트라서.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던 해진의 심장은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말이 맞았다. 5년이나 이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해진은 라일의 러트 주기를 꿰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어제 무심코 날짜를 봤을 몸이 먼저 깨달아 버린 것이다.

며칠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나타난 라일을, 해진은 이제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이 그토록 몰두해서 시간을 보냈던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이용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나.

저택에서는 들리지 않게 노크 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울렸다. 울렁거리는 속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굴었다. 그와 보낸 마지막 러트가 악몽처럼 천천히 해진에게 검은 손을 내밀었다.

“안심해.

순간 라일이 한숨처럼 마디를 꺼냈다.

화들짝 놀라 그의 눈을 마주하자 잔뜩 일그러진 라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이번엔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 왔어.

“…….”

낮게 깔린 라일의 목소리에는 진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안의 두려움을 쫓느라 여유가 없는 해진은 그걸 읽어낼 재주가 없었다.

조금 견뎌내면 있는 병원 따위랑은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환청 같은 노크 소리가 시작된 시발점을 떠올리는 순간 해진은 바짝 굳어 버렸다. 라일의 입에서 나온 러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아프게 몸을 찔러 온다.

어쩔 없이 기대를 품었다. 라일의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말에 기대고 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방에 비참하게 끌려가게 될까 . 서러움을 숨처럼 삼키게 될까 .

그래서 해진은 부디 말이 진실이기를 모순적으로 바랐다. 무력한 기대가 그를 옭아매듯 감싸 안았다.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한 해진은 다시 라일의 발끝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알아서 해결한다니, 다른 오메가를 구한 걸까. 정말로 자신을 저택에 계약 기간 동안 묶어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일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해진의 시선이 닿는 발끝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픈 착각이 들었다.

“앞으로 3일은 저택에 없을 테니, 편히 쉬도록 .

그가 말을 하고 나서야 해진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다시 마주치기 무섭게 이번엔 라일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도망치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녀석의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라일은 들이쉬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녀석의 반응은 딱딱했다.

절망하는 표정을 떠올리니 이상하게 온몸이 돌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써 움직이지 않는 걸음을 해진에게서 멀어졌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녀석에겐 위협이 테니까.

서재에서 눈을 반짝이는 해진을 라일은 안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는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것이 굉장한 착각이라는 깨달아야 했다. 잔잔한 물결은 정신 차리니 어느새 거대한 해일처럼 그를 덮쳐 왔다.

번이고 거대한 감정에 익사할 듯이 몸부림쳐야 했다. 눈을 감으면 해진이 보였다. 일이나 잠을 설치다가 겨우 기절하듯 잠이 들면, 이번엔 아프게 웃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라일도 똑똑히 알았다. 그래서 원인을 찾고자 며칠간 해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자꾸 해진의 모습이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찾아오지 못했다. 녀석을 앞에 두면 다른 생각을 겨를이 없어서, 도무지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던 라일은 금방 혼란에 빠졌다. 죄책감이 지나친 나머지 이리 영향을 받는 걸까. 안에 이렇게 제대로 양심과 도덕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없기에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러트가 다가온다는 깨달았다.

그제야 혹시 이게 페로몬의 작용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애초에 해진을 붙잡고 놓아주지 못한 빌어먹을 페로몬 해소 때문이 아니었던가. 러트를 성공적으로 보내면 머리가 조금은 맑아질 거란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억지로 자아내고 나니 문득 해진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주기는 녀석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저택을 나가야겠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라일은 자신이 녀석을 찾아와야 핑계가 필요했다는 깨달았다. 해진에게 태블릿을 굳이 직접 건네러 왔던 날처럼.

“후…….

다급하게 저택 입구까지 나온 라일은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러트는 러트인지, 방금 조금 그에게 옮겨 해진의 페로몬이 이토록 달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제대로 페로몬 해소가 아니었다. 여전히 다른 오메가를 마주하는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업무상 오메가를 마주해야 때조차 라일은 평정심을 유지할 없었다.

형질을 향한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정은 그간 아슬아슬하게 오메가에 대한 혐오로만 표출되곤 했다. 라일 자체가 형질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우성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해진에게 다시 몹쓸 짓을 기어코 제게 번져 버린 혐오는, 더는 균형을 이루지 못한 무겁게 그의 심장을 내리눌렀다.

해진이 심고 빗물이 틔워 싹이었다. 무럭무럭 자란 스스로를 향한 혐오를, 라일은 더는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러트 기간 내내 병원에 입원하는 택했다. 입원하는 동안 수면제로 억지로 몸을 잠들게 하며 페로몬을 해소할 것이다. 몸에는 좋지 않은 해소용 약물을 같이 투여하면서.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해진에 대한 상념으로 잠을 이룬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일이나 업무 공백이 있을 테니 라일은 미친 듯이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차에 올라타기 직전 다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짙게 남아 있는 해진의 체향이 점점 허공으로 흩어지는 무척 아쉬웠다.

***

라일은 꿈을 꾸었다.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를 하염없이 걷는 꿈이었다.

업무를 끝마친 그는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해진도 다녀간 있던 병원의 최상층에는 그를 위한 특수 병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주치의는 차라리 구역질하더라도 오메가와 페로몬 해소를 것을 권유했다. 그만큼 억지로 페로몬을 흐트러트리는 약물은 몸에 위험했다. 그러나 라일은 고개를 저은 침대에 누웠다.

도무지 해진 이외의 누군가와 살을 맞대는 거북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죄악감마저 느껴지는 상태를, 깨질 같은 두통이 엄습한 머리로는 차분하게 분석할 수가 없었다.

싸늘한 병원 침대에 눕자 문득 해진 생각이 났다. 녀석이 눈으로 병원 천장을 바라볼 대체 무슨 심정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수면제가 팔로 파고드는 감각을 느끼며 라일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그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가 자주 오는 도시는 비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조차 그저 흑백 영화의 인물처럼 무감각한 모습이었다. 거리에 스며든 라일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하염없이.

그때 문득 옆에서 불쑥 우산이 튀어나왔다. 건조하게 눈길을 돌리니 익숙한 얼굴의 비서가 우산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주위에는 함께 걷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어깨에는 두꺼운 코트까지 덮여 있는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최근이 조금 유달라서 그렇지, 라일은 보통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그는 계속 걸었다.

귓가에는 거센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오긴 했으나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라일은 또한 그러려니 했다.

걷다 보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내내 귀를 먹게 같았던 빗소리에 이제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형처럼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도 비에 녹아내린 어느새 사라졌다. 그렇게 한산한 회색빛 도시에 라일은 혼자 남았다.

그렇게 앞으로 걷는 순간, 문득 허공에 무지갯빛 아지랑이가 보였다.

“…….”

홀린 듯이 아지랑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보란 듯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무지개를 보면서 자신이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깨달았다.

아지랑이는 너무나도 옅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세찬 비마저 내려서 눈을 잠깐이라도 떼면 금방 사라져 버릴 같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라일은 천천히 걷던 걸음을 조금씩 재촉하면서 아지랑이를 따라갔다. 무지갯빛인 그것은 회색빛 도시에서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이 저걸 본다면 그처럼 탐낼 같아 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

 

              

#52

어느새 도시를 지나 초원이 밟혔다. 그것마저 지나가니 높다란 담이 나타났다. 익숙한 저택의 모습에 그는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을 꿈으로 보고 있는 아닐까. 꿈은 어릴 이후로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계속 비가 내렸다. 그의 발걸음처럼 하염없이.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아지랑이는 저택 안을 향하고 있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라일은 저택에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우산은 사라진 상태였다. 지붕 밑으로 들어왔는데도 귓가에는 계속 빗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어느새 시선 끝에는 익숙한 방문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를 거세게 잡은 것도 그때였다. 마크였다.

“도련님. 이러시면 됩니다.

“…….”

지금껏 헤쳐 지나온 비가 일시에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꿈이 아니었나. 라일은 갑작스럽게 그를 덮친 현실감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저택에 있단 말인가. 해진의 방문 앞에.

“정신이 드십니까?

아까 얼핏 봤던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주위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경호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멍한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아직도 시야가 온통 흑백으로만 보였다. 망가진 화면을 바라보듯 색이 빠진 세상이 혼란스럽다.

그때 뒤에서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모든 인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직 라일만은 뻣뻣하게 굳은 움직이지 못했다.

뒤에서부터 페로몬이 밀려든다. 아까부터 그가 따라온 찬란한 아지랑이가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라일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밖에서 소란이 일자 방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의아함을 나타내고 있던 얼굴이 라일을 보자마자 서서히 굳어 갔다. 어두운 세상에서 혼자 빛나는 해진은 굳은 얼굴을 하고도 무척이나 찬란했다.

굳어 있던 표정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라일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없다는 일그러지는 하얀 얼굴을 보며, 그는 심장이 멎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곤 이내 깨달았다. 강한 수면제를 먹고도 발로 저택까지 돌아온 이유를.

각인했다.

그것도 나를 원망스레 보는 눈길에.

<챕터 8>

이토록 강한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는데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저를 향한 하얀 얼굴이 지나치게 어여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라일은 멍하니 해진을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망가진 화면 같았던 세상은 그럭저럭 원래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해진 덕분에 복도에 있던 모두는 석상처럼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은 해진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굴에 서린 원망은 급기야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라일은 다시 심장이 철렁 아래로 쏟아지는 느꼈다. 눈빛만 봐도 지금 해진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있었다. 두려움을 담은 페로몬이 거대한 창처럼 그의 몸에 박혀 들었다.

오해를 풀어야 한다.

오로지 일념으로 라일은 해진에게 다가갔다. 이게 멍청하고 성급한 짓이었다는 녀석이 아예 도망치듯 완전히 물러나고 나서야 있었다.

비가 내릴 일그러지는 눈매를 보니 다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안심하라고, 했으면서…….

어쩔 없이 제일 기대하고 싶지 않은 라일에게 기대를 가진 것도 서러웠다. 그런데 기대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은 그날 밤처럼 비참하기만 하다.

옅게 내리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존재감을 내뿜은 이걸 위한 전조였을까. 너울거리는 라일의 페로몬이 해진을 둘러싸듯 끼쳐 왔다. 라일이 다가올수록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숨이 막힌 해진이 저도 모르게 근처로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덥석 라일에게 손목이 잡혔다.

“아니야. 그런 아니야.

“아니라고……?

아까부터 차가운 비를 맞기라도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웃긴 라일의 손도 저만큼 떨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붙잡힌 손은 놀랍게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라일이 강하게 쥐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처럼.

그때 눈치를 보던 비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병원에서 잠드셨는데 갑자기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이고 계시는 같습니다. 주치의를 호출했으니 겁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그제야 조금 이상한 것이 보였다. 비서의 어깨는 비로 엉망진창 젖어 있었다. 두려운 눈길로 돌아본 뒤쪽에도 비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손목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라일에게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일단 씻으시지요. 몸이 너무 차갑습니다. 브라이트 , 죄송하지만 이곳 욕실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마크가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라일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르게 저를 잡을 다가온 무색하게 라일은 손길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돌아가는 상황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해진의 시선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허락을 구하듯 저를 바라보는 마크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길에 해진을 향한 걱정이 가득 녹아 있어서 반사적으로 행동이었다.

얼어붙어 있던 공간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거짓말처럼 살아 움직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들은 재빨리 어딘가로 연락하며 밖으로 물러났다. 비서 또한 전화기를 들고 급히 뛰어나갔다. 마크는 사용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며 라일을 욕실 쪽으로 이끌었다. 사용인은 마른 수건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며 해진에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라일이 동요를 숨기지 못한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문득 해진은 몸이 더는 떨리지 않다는 깨달았다. 마치 지금까지 벌벌 떨리던 손이 아니라 라일의 손이었다는 것처럼.

***

“……음.

다급하게 라일의 저택으로 달려온 그의 주치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멋대로 병원을 빠져나갈 때부터 라일의 의료진들은 비상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주치의는 그가 샤워를 끝마치자마자 해진의 응접실에 들어설 있었다.

오묘한 타이밍 때문에 해진도 덩달아 그의 진료에 동석하고 말았다. 당연히 다들 빠져나가리라 생각하고 응접실에 어정쩡하게 박혀 있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침대 근처로는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이 앉아서 진료하는 장면을 보게 알았다면 다른 방이라도 갔을 텐데.

놀랍게도 여기 있는 누구도 해진이 동석하는 것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 내밀한 진찰을 내보이는 라일조차. 아까부터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왜인지 격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라일의 몸을 진찰하던 주치의는 다시 곤란한 낯으로 해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알파이기에 해진이 오메가라는 있었다. 아주 옅게 느껴지는 페로몬을 보면 열성이리라.

“주치의.

그때 그의 시선이 해진을 향하자마자 라일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함부로 그쪽을 바라보지 말라는 듯이.

놀란 주치의는 이번엔 대번 라일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의 오메가 혐오증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두통이 없다며 저를 찾아왔던 날의 라일이 기억났다. 상성이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도 맞은 것이냐고 진단 내렸던 그날을.

러트에 빠진 라일의 페로몬은 성난 파도처럼 응접실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알파인 주치의는 덕분에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쪽에 앉아 있는 오메가에게는 타격이 없는 보였다. 얼핏 얼굴에 미미한 거부감이 서려 있긴 했어도 말이다.

현재 라일은 사흘은 족히 잠들 만한 수면제를 투약한 상태였다. 페로몬을 억지로 해소하는 약은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러트에 사용하는 해소약은 그에게 임시로 처방하곤 하는 경구 투여약과는 고통의 깊이가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도 라일은 병원부터 곳까지 쉬지 않고 걸어왔다. 우성 알파의 괴물 같은 체력을 입증하듯 그는 저를 저지하는 경호 인력들까지 전부 제치고 끝내 병원 밖으로 나섰다. 수면제에 절은 상태로 어떻게 그렇게 움직였단 말인가.

무모한 라일의 걸음 끝에는 오메가 청년이 있었다.

“일단, 지금 잠드셔야 합니다. 깨어 있을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주치의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그에게 상태를 환기했다. 곤혹스럽게 얼굴을 구긴 라일은 저도 모르게 해진 쪽을 보았다가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진단은 나중이었다. 러트에 접어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불규칙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제어가 정도로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래저래 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리라.

잠깐 고민하던 주치의는 애써 해진 쪽을 쳐다보지 않으며 라일에게 제안했다.

“페로몬 해소가 되는 상황이라면 상성이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도 가까이해야 합니다.

              

#53

“그건 .

대답은 찰나의 틈조차 없이 튀어나왔다. 어딘가 화가 라일이 주치의를 성난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치의는 그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임시방편의 처방일 뿐이니까.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선 페로몬이 배어 있는 물건이라도 빌려서 곁에 두고 잠드세요. 다만, ……열성이신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면 단순히 물건으로는 부족할 있어서 여쭙는 겁니다.

다시 라일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하고 주치의는 해진에게 물었다. 가만히 빠져나갈 틈을 노리던 해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성이 맞는 오메가가, 설마 자신이던가.

이제야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라일의 ‘이상’이 이것과 관련되었다는 눈치챘다. 정말로 뭔가 몸에 문제가 생겼구나.

“진, 침실로 들어가. 들을 필요 없어. 아니, 아니. 우리가 나가지. 다들 나가.

초조하기까지 몸짓으로 라일은 벌떡 일어났다. 주치의가 만류라도 하듯 덩달아 일어난다. 이상한 모습을 해진은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 이곳에 들어오던 주치의는 알파 페로몬을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격한 움직임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오로지 커튼처럼 저를 둘러싼 라일의 페로몬뿐이었다.

“진정하세요. 괜찮으시다면 저분이 사용하시는 침실이라도 빌리시죠.

“……무슨 소리야.

주치의는 서서히 저를 옥죄듯 둘러싸는 라일의 페로몬이 불편해 인상을 찌푸렸다. 의도적으로 저쪽의 오메가와 사이에 페로몬으로 방벽을 두르고 있는 여실히 느껴진다.

빨리 처방하고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병원에서 준비했던 장비를 모두 가져왔습니다. 저분의 페로몬이 짙게 남아 있는 곳에서 다시 수면을 유도해 겁니다.

“…….”

생각지도 못한 처방에 라일은 곤란한 기색으로 입가를 가렸다. 처음부터 해진이 없는 곳에서 진단을 받았어야 했는데 실책이다. 욕실을 벗어나자마자 주치의가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미처 판단하지 못했다. 둔해진 머리는 다시 시야에 들어온 해진을 담느라 여념이 없어서 그랬다.

그때 모두가 침묵한 상황에서 마크가 앞으로 나섰다. 베타인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로몬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가지 확실한 , 저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라일의 페로몬이 미친 듯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정도였다.

“브라이트 씨께서 허락하신다면, 며칠만 다른 손님방에서 모실 있도록 하겠습니다.

해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정도로 상황을 넘길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이들이 반응하는 것처럼 여기가 온전히 그의 방도 아니었고.

다만 제게 닿는 라일의 시선은 자꾸 생경한 기분으로 관찰하게 되었다.

응접실에 짙게 깔린 라일의 페로몬은 번도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도 자욱한 페로몬들은 신기하게도 정작 해진에게는 바짝 다가오지 못한다.

마치 자신이 커다랗고 뜨거운 불이라도 된다는 , 묘한 느낌을 주는 페로몬이었다.

***

“혹시 잠이 오신다면 약은 드시는 좋습니다.

“……아니야. 넉넉하게 투여해.

라일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다시 멍하니 일어나 해진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 가지 않을 자신이. 차라리 아예 약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이 편하다.

각인했다는 고찰할 시간도 없이 라일은 서둘러 잠들고 싶었다. 러트가 심화할수록 자꾸만 해진을 향해 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번만 녀석의 서러운 얼굴을 본다면, 정말이지 죄책감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깨어나시면 진료를 받으러 오세요.

주치의는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기에 라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의 링거를 조정한 주치의는 방을 어둡게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금방 적막이 감싸는 공간에서 라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침실 가득히 배어 있는 해진의 페로몬이 마치 자장가라도 그를 어루만졌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극도의 안정감 속에서 라일은 까무룩 정신을 놓을 있었다.

***

“없었나요?

애타게 물었으나 마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씀하신 곳을 살폈는데, 없더군요. 혹시 다른 곳에 두신 아닌지요.

“아…….

사용인들이 준비해 다른 방은 마찬가지로 깔끔한 분위기였다. 다만 해진이 머무르던 곳과는 다르게 응접실과 옷방까지 따로 달린 모양새는 아니었다. 해진의 예전 방처럼 외관 건물에 있었으나 넓은 크기였다. 아마 최대한 라일과 곳에 있을 있도록 신경 같았다.

갑작스럽게 침실을 내어주게 해진은 얼떨떨하게 이곳으로 와야 했다. 덕분에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중요한 지갑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했다.

차마 라일이 누워 있을 그곳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마크에게 대신 부탁했다. 그러나 방에 번이고 다녀온 그는 지갑을 보지 못했다고 말해 해진을 불안하게 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안절부절못하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래도 그들은 상처가 많은 해진을 유리 공예품을 보는 심정으로 보듬어 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라일이 그의 침실까지 빼앗는 모양새가 되는 바람에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련님이 깨어나시면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마룻바닥까지 들어내서라도 찾아드릴게요.

“맞아요. 지금 그곳이 어두워서 보였을 수도 있으니까.

사진을 잃어버린 아닌지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택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정말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대답하는데 이상하게 목이 조금 멨다.

***

하얀 시트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겼다. 페로몬 같은 것이 아닌 섬유유연제의 향긋한 내음이었다. 그곳에 얼굴을 묻은 누워 있던 해진은 문득 라일의 페로몬을 떠올렸다.

응접실에서 느꼈던 라일의 페로몬은 확실히 이상했다. 러트인데도 불구하고 얌전한 산들바람처럼 움직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저택을 나가겠다는 자신을 겁박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비록 페로몬이 그를 해칠 같은 기운을 담지는 않았어도, 뚜렷한 목적으로 몸을 파고들긴 했으니까 말이다. 같은 장소에서 겪은 일이라 그런지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두드러졌다.

분명 상성이 좋은 페로몬이라고 그랬지.

의사가 해진을 바라보며 했던 말도 떠올렸다. 습관적으로 드는 불안감 때문에 해진은 살포시 얼굴을 굳혔다.

이제야 라일의 이상한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저택에 그토록 해진을 잡아 두려고 했는지. 페로몬에 상성이 있다는 그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 라일이 저렇게 행동할 정도면 분명 영향을 미치기는 하리라.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계약이 끝난 후에도 라일이 저를 놔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자신은 가야 곳이 있는데.

꾸물꾸물 몸을 움직인 해진은 마크가 챙겨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그는 기계를 지문조차 쉬이 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쓰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용했다는 흔적도 없이 이곳에 두고 있도록 말이다.

차근차근히 알고 싶은 내용을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과연 페로몬의 상성이라고 검색하니 만한 정보가 많이 나온다.

[유전적으로 유난히 상성이 맞는 페로몬이 존재한다. 경우 알파와 오메가는 상대방을 향한 무의식적인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일 먼저 뜨는 내용을 보면서 해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경우가 많다지만 저와 라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페로몬과 관련된 지식이 그도 알아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뒤늦게 발현해 미처 몰랐던 것들도 많았다. 진작 찾아볼 그랬지 싶은 정보들이다. 홀린 듯이 여러 이야기를 읽던 해진은 손가락을 멈칫했다.

“…….”

이제 굳이 알아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필요 이상으로 적응하려고 드는 스스로의 행동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일단 필요한 부분만 빠르게 훑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한참을 문서 사이를 떠돌다 무얼 잘못 검색했는지 곁가지 지식까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뛰어난 상성은 각인의 조건 하나이기도 하다. 각인한 경우 상대의 페로몬이 없다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위험성이 있으며…….]

지식이 각인이라는 카테고리까지 넘어간 알게 해진은 다시 무표정하게 처음으로 돌아갔다. 각인이라는 현상은 영화 같은 곳에서 종종 보긴 했다. 역시나 지금 상황에는 필요한 지식이 아니리라.

조금 키워드를 추가해 가며 검색하자 드디어 원하는 내용이 나왔다. 상성이 유난히 뛰어난 페로몬이 있긴 하지만, 그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는 정보였다.

거기까지 살핀 후에야 해진은 한숨을 내쉴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아니면 되는 상황일까 긴장했는데 다행이었다. 라일은 그저 그가 제일 간편한 상대라서 계약조건을 내건 것이리라. 상황이 점점 변화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다른 걱정거리가 해진을 엄습했다. 그의 지갑은 어디 갔을까. 분명 라일이 오기 전까지 들고 있다가 침실 협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54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서둘러 나가느라 일단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올려 곳이 협탁이 아니었나?

그때의 상황을 반추하던 해진의 생각은 어쩔 없이 곳으로 흘러갔다. 사용인들이 다시 물건에 손대는 아닐까.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우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낮에 그렇게 저를 위하는 굴었던 사람들이 훔쳐 갔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슬플 같아서.

“…….”

한번 생긴 의심은 끝도 없이 자라나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을 가득 메울 있을 만큼 재빨리 몸집을 키운다. 이내 거대한 덩치를 가지게 그것은 해진을 묵직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자라난 의심 때문에 해진은 잠이 달아나는 느꼈다. 하필 방도 외관으로 바뀌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낮까지 있던 일은 전부 꿈에 불과하고 자신이 5 전으로 돌아간 아닌가 싶은 비이성적인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지갑을 찾아야 한다.

이런 상태로는 도무지 내일 아침에 그를 찾아올 마크의 얼굴을 제대로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다시 ‘집사’인 그를 보고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덜컥 겁이 들었다. 해진은 홀린 침대에서 빠져나와서 가운을 걸쳤다. 이제는 밤에도 제법 쌀쌀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빨리 지갑만 찾아서, 돌아오자.

***

소리가 날까 목발도 가져오지 않은 해진은 힘겹게 본관까지 들어와야 했다. 자신이 거처하던 방문이 보이고 나서야 덜컥 정신이 들었다. 밤중에 목발도 없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러나 지갑 생각을 하니 다시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도둑맞은 거라면 어떡하지. 안에 들어 있는 현금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곳이 없어 지갑에 넣어 사진뿐이었다. 하나밖에 챙기지 못한 가족사진이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방을 열면, 라일이 있겠지.

러트 중인 라일의 페로몬은 방문 밖으로 느껴질 정도로 진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해진은 자신이 러트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떠올릴 있었다.

이래저래 비이성적인 강박이 아닐 없었다. 실책을 깨달았다면 돌아가야 하는데 지갑의 존재가 신경 쓰여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추운 발목이 차가워지도록 제가 쓰던 방문 앞을 이리저리 맴돌아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몸은 자꾸만 위태롭게 흔들렸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어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볼이 차가워질 정도로 시간을 오래 지체한 탓이다.

이러다가는 사용인 누군가가 지나갈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더는 기다릴 없었다. 해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용기를 문고리를 잡았다. 숨을 참고 응접실에서 빠르게 옷방으로 들어가자. 손에 잡히는 것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빨리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문고리를 조금 안쪽으로 밀어 틈이 생긴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

해진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는 다리는 깁스 때문에 더욱 중심을 잡지 못했다. 깜짝하는 사이 바닥이 점점 가까워진다.

꼴사납게 응접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단단한 품이 그를 안으며 지탱했다. 진한 라일의 페로몬이 마치 쿠션이라도 해진을 감쌌다.

그러나 이번엔 겁을 먹은 나머지 바짝 굳어 버렸다. 자신을 빠짐없이 감싸는 페로몬으로 이미 품의 주인이 라일이라는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퍼뜩 고개를 들자 새파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큰일이다.

이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퍼뜩 정신이 났다.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러트 중인 라일에게 발로 걸어오다니.

진한 페로몬을 맡으니 숨이 막혔다. 가족사진 생각에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는 대체 어떻게 일어나 있는 걸까. 얼핏 듣기로는 일반적인 투약량의 배에 달하는 수면제를 투여했다고 들었다. 사흘간은 절대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보는 라일의 앞에서 해진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닫힌 문이 뒤에 닿는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발로 방에 자신을, 라일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성큼 다가온 그는 손을 해진의 머리 옆에 짚었다. 꼼짝없이 품에 갇힌 모양새인데 문도 없게 되었다. 라일이 고개를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볼의 솜털이 일일이 바늘처럼 비죽비죽 솟아올랐다. 근처에서 시작된 소름이 마치 젖은 캔버스에 물감이 번지듯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

절망스러운 감정이 해진의 머리를 관통했다. 라일의 페로몬은 점점 방을 자욱하게 채워 나가고 있어서 익사할 것만 같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는데도 라일은 왜인지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고개를 숙인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념이 없던 해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오랜 시간 뒤였다. 그동안 몸에 가해지는 어떠한 충격도 없다는 겨우 깨달은 것이다.

희미한 시선을 들어 고개를 트니 라일은 여전히 해진의 근처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체향을 들이켜듯이.

페로몬을 떠올리는 순간 가지 묘한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을 가득 채워 터뜨릴 자욱한 라일의 페로몬인데, 어쩐지 해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러트 시기의 페로몬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라일은 묘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해진의 양옆을 짚은 손은 미묘한 거리감을 가까이 오지 않는다. 없는 거리감이 겨우 그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손이 저를 도로 잡아챌 것만 같았다. 마치 히트 사이클이 왔던 그날 밤처럼.

두려움으로 가득한 페로몬을 숨기지 못한 해진은 같은 얼굴로 겨우 몸을 움직인다. 그렇게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라일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기묘한 안도로 뒤를 돌아본 순간 다시 숨을 멈췄다. 어느새 똑바로 자세를 라일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스 .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한숨처럼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라일은 고개를 슬쩍 기울일 대답을 하지 않는다. 확연한 이상 반응에 훨씬 겁이 났다. 하필이면 쪽에 그가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한 해진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두려움이 진하게 묻은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했다. 본래도 페로몬 수습에 능숙하지 못한 해진이었다. 이렇게 이해할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응접실 안에 있던 라일의 페로몬이 색을 바꾸었다.

“이게, 무슨…….

황당할 정도로 급변하는 페로몬의 느낌 때문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려야 했다. 그의 페로몬이 너무 직접적인 감정을 하나 담고 있어서.

그건 애정이었다.

번도 라일에게서 느낄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애초에 해진은 살면서 이런 원색적인 페로몬을 접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언어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베타였던 어머니의 따스함을 페로몬으로 풀어낸다면 이런 느낌일 같았다. 물론 그런 가족의 사랑보다는 조금 성애적인 의미가 담겨 있긴 했으나, 해진은 외에 비슷한 것을 떠올릴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두려움도 쉬이 날아가는 모양이었다. 가쁘기만 하던 숨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어서 라일의 눈을 드디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해진을 향하긴 하지만 어딘가 멍했다. 그제야 진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깨닫는다.

“베르무스 ?

“…….”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면 라일은 꼼짝도 하지 않은 해진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았다. 반대로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해진의 페로몬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허공에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라일의 팔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눈에 들어왔다. 링거가 꽂혀 있던 팔목이었다.

“상처가…….

덜컥 무서워진 해진은 역시 마크나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심스럽게 쪽으로 향했으나 라일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선만 움직일 뿐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이를 악문 이번엔 침실 쪽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발짝 정도 그와 떨어지자 라일이 드디어 움직였다.

입술을 짓씹으며 어설프게 페로몬을 풀어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적당한 의지를 담지는 못했다. 다급한 심정을 뭉뚱그린 무언가의 감정이 라일에게 스르륵 흘러간다.

거짓말처럼 그는 조금 빨리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절뚝거린 해진이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스스로를 미끼로 삼고 있는 같아서 덩달아 조급해진다.

그렇게 근처까지 다가온 순간 해진은 그의 등을 침실 쪽으로 밀어냈다. 의외로 라일은 순순히 안으로 사라졌다.

“읏.

재빨리 침실 문을 닫아 버린 해진은 성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리 때문에 속도가 결코 빠르지 못했으나 복도로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침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55

복도에서 사용인을 만난 해진은 겨우겨우 라일이 상처를 입었음을 알릴 있었다. 놀란 마크와 다른 이들이 라일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몇몇은 남아서 목발도 없는 그를 챙겼다.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베타인 그들이 페로몬을 맡아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의 전체와 가득히 남아 있을 라일의 애정 서린 페로몬을 떠올리니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그만 .

처음으로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저택을 전부 때려 부술 기세로 화를 내었다. 매사 덤덤한 표정이던 아버지도 그날만큼은 성난 목소리를 자제하지 못했다.

열두 살의 어린 라일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무표정하게 고민했다. 저게 그렇게 싸워야 일이던가.

그들의 결혼은 어린 라일이 보기에도 이미 예전에 파탄이 있었다. 애초에 마치 뛰어난 형질을 만들어 내는 지상과제인 친족들과 경쟁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다른 친족 중에도 우성은 없었다. 그러니 그중 가장 뛰어난 알파인 라일은 분명 ‘성공작’이다.

그러니 서로 누구랑 배가 맞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말싸움하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먼저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화가 나머지 페로몬으로 아버지를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성이라는 프라이드로 아버지를 찍어 누르는 덕에 더욱더 그가 멀어진다는 어머니는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라일이 이해 하는 어머니 쪽이었다. 외도를 주제에 당당하게 구는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확실하게 멍청한 짓이었으니.

그러니 자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러는 걸까.

‘……내가 당신에게 각인만 하면, 당신도 돌아봐 주겠지?

그냥 화를 내고 끝났으면 이런 의문은 들지 않았으리라. 각인을 사람은 영원히 상대에게 종속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쌍방 각인 따위 영화에나 등장하는 환상 같은 이야기다.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각인하길 바랐다면 차라리 이해가 쉬웠겠지.

그래서 저렇게 집착하며 자신이 아버지에게 각인하길 갈구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라일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

눈이 부시다.

꿈을 부유하던 라일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렇게 오래 잠들었는데도 무척 피곤했다. 수면제를 삼켰으면서도 결코 깊게 잠들지 못했다는 것처럼. 깜빡이는 시야로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한가운데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보였다.

“…….”

언제 피곤했냐는 그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앞에 있는 녀석이 너무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빛나다 못해 금방 사라질 옅은 모습이라서.

그가 일어나자 해진은 이내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팔목의 페로몬 쪽에 코를 살짝 대더니 다시 앞으로 내밀길 반복했다. 이상한 행동이 아닐 없었다.

페로몬을 그에게 내보내고 있는 건지, 팔의 궤적을 따라 비를 닮은 체향이 라일에게 끼쳐 온다. 분명 열성이라 가볍디가벼운 비중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그런데 해진의 페로몬은 신기하게도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의 우성 페로몬을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 버렸다.

라일은 멍하니 행동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해진의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녀석은 시선을 아래로 흘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페로몬은 아주 어설픈 자장가, 희미한 안정감 그리고 커다란 곤란함이 뒤섞인 이상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내내 무표정하던 해진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심장이 떨어지며 잠이 달아난다.

“진.

“어…….

반사적으로 그는 입을 열어 해진을 불렀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분명 녀석의 침실을 강탈하듯 잠이 들었고…….

해진이 여기 있지?

그걸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벌떡 일어났다. 침대가 커다랗게 출렁일 정도로 황급한 움직임이었다. 덩달아 놀란 해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은 다시 바닥을 내리찍었다. 고작 녀석이 얼굴을 조금 찌푸려서.

“진, 여기 있어.

많은 수면제도 소용이 없었던 걸까. 자신이 녀석을 찾아가 서러운 얼굴을 하게 만들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모여 그의 안에 격정을 만들어 냈다. 라일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떨리며 해진의 눈썹 하나까지 어찌 움직이는지 관찰할 때였다.

녀석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곤란한 입을 열었다. 행동에 라일의 목구멍은 바싹 말라 조여든다.

“……자꾸 찾아오셔서요.

“내가……?

사실 해진은 라일이 깨어난 모르고 앞에서 어설픈 짓을 하던 민망해서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작은 행동 하나에 라일이 어떤 격정으로 내면을 부수고 있는지 해진은 길이 없었다.

페로몬 조절은 보통 사춘기 발현한 후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일이었다. 물론 발현하며 깨달은 본능이 있기에 해진 또한 어설프게 있기는 했다. 실제로 감정의 기복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페로몬도 그런 본능의 작용이었으니까.

다만 이번처럼 명확한 의지를 담아 페로몬을 내보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페로몬 샘이 있는 손목까지 라일 쪽으로 뻗어낼 자세가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자각이 있었다.

당연히 잠든 배회하는 알았던 라일이 이런 바보 같은 자세를 똑똑히 보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무슨 짓을 했지?

“…….”

잠이 깼는지 그의 목소리가 무척 낮게 잠겨 있었다. 머쓱해진 해진은 잠깐 그의 안색을 살핀 다시 시선을 피했다. 라일의 눈동자에는 다시 거센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지갑을 찾겠다고 방에 찾아왔다가 해진은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당분간은 절대 근처에 오지 말아야지 다짐까지 하면서.

그런데 놀랍게도 뒤로 이번엔 라일이 복도를 배회했다.

사용인들이 한바탕 뒤집힌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해진은 식사하러 이동하던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라일을 보고,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러트의 본능을 이겨 해진을 찾아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좀처럼 두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해진이 얼굴을 굳히는 순간 저택의 복도가 다시 ‘그’ 페로몬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으나 라일은 기껏 해진의 근처로 와서는 아무것도 하고 그저 맴돌기만 했다. 담요를 들고 그런 라일을 따라다니는 마크의 연로한 신체가 너무 안타까워서 해진은 하는 없이 상황에 끼어들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다시 그를 침실로 밀어 넣었을 때처럼 페로몬을 뿌리며 앞에서 걸었다. 정말 미끼가 것만 같아서 때때로 두려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라일이 또다시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정 서린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그게 민망해서라도 해진은 라일을 침실에 묶어 놔야 했다. 가끔 이곳에 와서 자신의 페로몬을 채워 놓고 가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점점 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스울 정도로 맹목적인 라일의 페로몬이 그의 경계를 자꾸만 흐트러트린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상황이 해진에게 버겁고 불편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대체 꿈에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페로몬이 실제 자신을 향하는 당연히 아니리라. 그래서 해진은 괜히 알고 싶지 않은 라일의 사생활까지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페로몬을 벗어나려면 두려워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니 아이러니했다.

끝내 당신이 절절할 만큼 애정으로 이루어진 페로몬을 퍼붓는 바람에 자신이 이런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난다.

“미안.

대답이 궁색해진 해진이 말을 고르고 있는데 무거운 말이 떨어졌다. 순간 라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지갑은 번째로 방에 왔을 이미 찾아내었다. 그가 말했던 협탁과 사이 아주 어중간한 곳에 지갑은 떨어진 끼어 있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덤덤하게 말한 해진은 천천히 침실을 벗어났다. 그의 사과에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이 라일의 망막에 새겨지듯 남았다.

저도 모르게 무저갱 같은 속에서 튀어 나간 사과는 받는 이가 없어서 덧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뒷모습을 보면서 라일은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침실에 남은 해진의 페로몬은 라일의 자책감만 자극했다.

어설프지만 페로몬에 새겨진 안정감은 깨어난 라일을 유혹하듯 그곳을 맴돌았다. 자신이 녀석의 페로몬을 가까이하고 싶어질수록 라일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결국 도망치듯 자신의 흔적만 남아 있는 그의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차가운 물을 틀어 샤워기 아래에서 라일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러트를 편법으로 보낸 덕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생겼다.

각인했다.

자각하고 나서야 라일은 각인의 순간을 다시 떠올릴 있었다. 진작 알지 못했는지, 누군가가 그의 뇌를 이리저리 휘젓는 같은 무서운 감각이었다.

‘그 방’에서 러트를 보낸 해진은 부모님의 부고를 듣고 원망 서린 얼굴로 라일을 쳐다보았다. 바로 순간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무거운 빗줄기 같은 원망으로 라일을 파고든 것이.

원망을 타고 무엇이 흘러들어왔는지 깨달았을 , 이미 늦어 있었다.

              

#56

이제야 해진을 다시 저택에 데려온 뒤부터 녀석의 페로몬이 그리도 진하게 느껴진 이유를 있었다. 열성인 해진의 페로몬은 지난 5년간 번도 라일에게 자취를 남긴 적이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심지어 빗속에서도 녀석의 페로몬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는데도 말이다. 거대한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을 이루고 있던 얄팍한 현실이 사실은 불투명한 얼음이라서 파사삭 깨진 것처럼. 그는 해진을 다시 이곳에 데려오면서 자신이 페로몬 해소를 제때 하지 못해 판단이 흐려졌다고 변명한 적도 있었다. 정작 녀석을 다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렇게 러트를 보내 모처럼 머리가 활짝 개었을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모든 순간을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페로몬은 박자 빠르다는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나는 경우가 있을까.

“하아…….

없는 예감에 라일은 잘게 몸을 떨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흠뻑 적시는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하다.

다만 라일은 가지는 이해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각인에 집착했는지 이유를 말이다.

이건 상대에게 페로몬으로 표현할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잔인한 증거였으니까.

“숨겨야 .

그래서 라일은 각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래도 억지로 해진을 잡아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서 그의 각인 사실까지 알려지면 그건 녀석을 향한 다른 족쇄가 것이다.

그나 다른 누군가의 압력으로 해진을 억지로 주저앉히는 짓을, 있을 없었다. 녀석에게는 이미 그런 고통이 차고 넘치니까. 그러니 숨겨야 한다.

덕분에 라일은 좌절했다. 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이제는 명확한 자각을 가진 해진을 잡고 싶다고 갈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이 감히 바라지 말아야 바라고 있었다는 비로소 깨닫는다.

거센 물줄기가 비라도 되는 라일은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

임시로 사용하는 침실로 돌아온 해진은 제게 희미하게 들러붙은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져 곤란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막상 깨어난 라일을 보니 역시 기분이 이상하다. 기를 쓰고 페로몬 해소의 출구인 해진을 찾아오는 보면 분명 그의 몸이 원하는 바는 뚜렷했다.

그런데 막상 러트의 본능을 꺾어 가면서까지 해진에게 약속을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쓸데없는 것을 알아 버린 해진은 곤혹스럽게 팔을 툭툭 털어냈다. 그곳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라일의 체향을 흩어내려는 듯이. 그러나 페로몬은 그의 손으로 자리를 옮겼을 따름이다. 끝내 생각을 거듭하게 되는 해진의 머릿속처럼 말이다.

“휴…….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일이 저를 잡으러 어두운 모텔 방까지 왔을 무언가 확실하게 어긋났다는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계약이 끝나면 가야 곳이 있는데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애써 모든 감정을 해진은 안에 꼭꼭 묻어 두었다. 다시는 열어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속에는 그간 해진이 차곡차곡 모아 것들이 잔뜩 눌려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위급한 상태마저 그는 외면했다.

전부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이었다. 걸어 나갈 있을 정도로만 몸을 회복하며 무관심하게 머무르다 가는 . 해진이 지금 있는 최선이리라.

***

정신을 추스른 라일은 일단 출근부터 해서 쌓여 있는 일을 처리했다. 단지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책상 위에는 다양한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병원을 찾아간 그다음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일부터 처리하고 늦게 저를 찾아온 라일을, 주치의는 어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몸은 어떠십니까.

“……썩 좋지는 않군.

제대로 페로몬 해소가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라일은 이제 두통이 없던 시기가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가장 주치의가 깊은 눈으로 라일을 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묻는다.

“각인하셨습니까.

“그래.

어차피 예상했었기에 라일은 덤덤하게 긍정했다. 만약 그저 해진에게 집착하는 모습만 보였다면 부정하고 넘어갈 있었으리라. 오메가에게 집착하는 알파의 본능은 흔한 것이었으니까. 오메가 혐오증이 있는 라일이니 그것도 부자연스러워 보였겠으나 각인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러나 그가 수면제에 상태로도 이상 반응을 보였다는 끝내 문제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의사가 그의 저택에 왔을 해진을 보이거나 녀석을 감싸듯 페로몬을 움직이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너무 많은 단서를 흘리고 말았다.

다만 주치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안다는 애써 각인 상대를 묻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인 알고 계시겠죠.

“그래.

각인하게 되면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이 없으면 죽고 만다. 페로몬 해소가 아니라도 주기적으로 각인 상대와 접촉하지 못한다면 몸이 망가지는 것이다.

라일은 이제 해진이 떠난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이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야.

그걸 알면서도 라일은 덤덤하게 분석한 상황을 읊었다. 해진이 끝내 그의 곁을 떠나고자 한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녀석이 그립다.

이게 제게는 맞는 벌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보니 뇌가 아주 망가진 모양이다.

그런데 라일의 이런 모습을 보던 주치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무슨 소리지?

설마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나 싶어서 라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각인은 단순한 페로몬의 작용이 아닙니다. 감정과 결합한 오묘한 문제지요.

“…….”

뜻밖의 말에 라일의 찌푸려진 표정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의 어머니도 그렇게 집착하던 아버지에게 끝내 각인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있던 것이야말로 진하고 깊은 감정이었으리라. 그런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감정이라니. 라일이 기억하는 각인의 순간 그는 해진과 이렇다 감정의 교류를 적이 없었다. 그저 녀석의 마른 몸이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였을 .

“뭔가 잘못 알고 있는 아닌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각인이라는 절대 흔하지 않습니다만, 현상이 감정과 페로몬의 결합 작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

의사의 반박에 라일은 그만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다시 페로몬은 박자 빠르다는 격언이 생각날까.

그의 심각한 얼굴에 무언가 사정을 짐작했는지 주치의는 일단 검사 결과를 넘기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번에 러트까지 겹치는 바람에 페로몬 체증이 아주 위험 수준입니다.

“참고하지.

“……이제 페로몬 해소는 각인 상대 이외의 분과 하실 없습니다. 거부 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또한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접촉하셔야 합니다. 아주 소량이라도요.

걱정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라일은 덤덤하게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자신 또한 각인에 대한 정확한 연구 자료를 모아보겠노라 말했다.

“그래.

모든 경고에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마음이, 라일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라일은 곰곰이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각인이 감정의 산물이라는 말을. 분명 그럴 리가 없었다. 각인이라는 운명처럼 이어져야 사람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사실 그는 각인이라는 지식은 알고 있었으나 그게 실제 존재할 거라 생각해 적도 없었다. 주변에 각인했다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냥 로맨스 영화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나.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해진에게 이렇다 마음을 품은 적은 없는 같았다. 그저 지금까지 했던 행동은 전부 각인이 저를 휘두른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멀리서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어딘가를 가는 중이었는지 해진이 목발을 짚은 걷다가 그를 발견하고 짧은 탄성을 내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일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수가 없었다.

분명 지금까지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했던 같은데 모두 잊어버리고 마주친 해진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조금은 살이 오른 하얀 얼굴 같은 것들을.

눈치라도 보듯 숨죽여 관찰하는데 해진이 의아하게 그런 라일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계속 고파서 참기 힘들다.

“베르무스 .

“응.

대답이 이렇게 멍청하게 들린 적이 없는 같다. 그런데도 라일은 멍하니 해진의 입술만 바라보는 짓거리를 그만두지 못했다.

“러트는 끝나신 겁니까.

“응.

심장이 뛰는 소리가 요란하다. 앞에 있는 해진이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인상을 찌푸릴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군요.

멍청한 대답을 반복하고 나서야 라일은 해진이 말을 의도를 깨달았다. 해진이 방금 나온 곳을 보니 아직 본관에 있는 녀석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리라.

그제서야 다급해진 라일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방으로 바로 돌아갈 있도록 조치를…….

“방은 괜찮습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녀석은 거절 의사를 내뱉었다. 아주 가볍고 고민이 담기지 않은 어투였다. 어차피 해진은 방이 어디에 있든, 크기가 작든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말이다.

              

#57

다만 작은 말씨는 라일에게는 폭풍처럼 무겁게 와닿았다.

혹시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해진이 쓰던 방은 저택의 본관에 있는 유일한 손님방이었다. 애초에 본관이라는 직계 가족들의 내밀한 장소였다. 그곳에 손님을 묵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대우였던 것이다.

“본관에는 손님방이 그것뿐인데, 혹시 마음에 들었다면 다른 방으로 주겠어.

말을 들은 해진은 순수한 의문을 가졌다. 본관에서 유일한 방이라니, 말만 들어도 중요도가 느껴지는 단어가 아닌가.

“왜 그런 방을 제게 주셨죠.

그런 방을 굳이 제게 배정해 줬단 말인가. 외관에 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실제로 해진이 임시로 사용하는 방도 손님 대접을 위해서라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기대감 없는 의문에 라일은 그만 말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여전히 멍청한 같아서.

각인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던 거다. 다시 해진을 무작정 데려오면서 대뜸 방을 충동이 의미하는 역시 이거였다.

저택에서 해진보다 중요한 없다는 이미 자신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녀석이 이곳에 머무른 5년간 이상한 일은 있었다. 저택 예산 손님에게 할당되는 금액이 매년 눈에 띄게 상승해 왔던 것이다. 최근 사용인들의 비리를 조사하면서 숫자를 보고 약간의 의문을 가진 있었다. 자신이 배정한 금액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어서.

그런데 모든 주는 라일은 몰랐다. 받는 해진은 더더욱 모른다.

뭐라 형용할 없는 심정이 그는 잠깐 입가를 매만졌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으니 해진의 눈길은 여전히 그런 라일에게 향해 있다.

시선을 계속 받고 싶다는 거센 충동 속에서 라일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저택의 가장 중요한 손님이니까.

“그런가요.

말을 들은 해진은 반응이 없었다. 아까부터 기민하게 해진의 눈치를 살피던 라일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있었다. 녀석은 자신이 하나뿐인 손님이라 그렇게 되었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이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녀석을 향한 관심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뜻이 없다고 치부하도록 말이다.

“어쨌든 이미 옮겼는데 다시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만.

작은 골방 같은 곳에 해진을 없었다. 이전에 쓰던 해도 들지 않았던 구석진 방이 떠올라서 라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그가 제공하는 편의 자체가 마음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해진이 제가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악몽 같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네가 그곳에 원래대로 머무르는 사용인들 동선에도 제일 편할 거야.

“그렇군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내건 변명은 여전히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자괴감으로 얼룩진 입매를 가리기 위해 라일은 고개를 숙이며 입가를 가렸다.

볼일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이,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위태롭게 걸으며 그를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함부로 녀석을 부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아.

“무슨 일이지.

희망과 비슷한 무언가가 라일의 가슴에서 반짝 빛났다.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 라일에게 해진은 슬쩍 뒤돌며 말했다.

“그럼 방에 남아 있을 페로몬은 전부 지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작게 반짝이던 불씨는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녀석의 우려대로 방엔 라일의 체향이 덕지덕지 남아 있으리라. 그게 불편하리라는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순간 그는 해진에게 존재를 통째로 거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덕분에 각인의 효과를 절절하게 깨달았다.

이제 해진이 하겠다는 무엇도 거부할 없으리라는 .

“조치하지.

끝내 비틀려 버린 입매에서는 자조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

라일의 인생에서 없던 중요한 과제가 생겼다.

“…….”

그의 본능은 끝도 없이 해진을 갈구하고 있었다. 감히 그의 옆에 남아 주기를 바랄 없는 상황인데도, 해진이 필요하다.

각인이 감정의 결과라는 주치의의 말을 라일은 끝내 이해할 없었다. 그런데 어차피 이미 버린 각인은 돌이킬 없으리라. 돌아갈 없다는 점에 안정감이 느껴져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해진이었다. 성급하게 다시 녀석을 가둘 있을 없다. 그러니 적어도 해진이 라일에게 몹시 중요한 사람이라는 알리고 싶었다.

애초에 녀석이 여태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 라일을 몸서리치게 한다.

“진은 일어났나?

“네.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래.

러트가 오기 , 고민의 해일 속에 몸부림치느라 며칠이나 녀석을 홀로 식사하게 했다. 당시 해진의 식사량은 다시 미묘하게 줄어들었다. 녀석은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라일은 도무지 녀석을 홀로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찾아갈 핑계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꺼운 스스로가 역겹다. 식당으로 향하던 안뜰을 지나던 라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날이 차가워져서 이제는 안뜰에서 식사하는 어렵게 되었다. 아무리 난로를 많이 비치해도 몸이 약한 해진에게는 위험한 날씨다. 그러다 문득 그의 저택에는 온실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크.

“네, 도련님.

“어머니가 가꾸던 온실, 아직 남아 있습니까.

분명 온실은 그가 외곽에 있는 정원을 황폐하게 만들 당시 같이 버려져 관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두통의 시발점이었던 외곽 정원을 화풀이라도 하듯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기틀은 남아 있습니다, 도련님.

“거기 다시 꾸며 두도록 하세요. ……식사할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마크는 여느 때처럼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점점 빨라지는 걸음 끝에 라일은 해진의 방에 들어섰다. 살짝 놀란 얼굴이 눈에 박혀 들었다. 습관적으로 눈치를 살피게 라일은 참담하게 고민에 빠졌다. 찾아온 것이 실수였던가.

“……혹시 내가 와서 불편한 거라면 나가도록 하겠어. 걱정하지 .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했다. 이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통감한 라일이 주춤 물러서며 물었다. 그런 그를 어딘가 빤히 바라보던 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번씩 저를 비켜 물러날 때마다 심장이 갈래갈래 찢어지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요. 이제 오실 거로 생각해서 조금 뜻밖이었을 뿐입니다.

잠깐 놀란 굴던 해진은 이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라일은 문득 얼굴에서 그리 많은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깨달았다.

그가 겨우 끌어낸 바람같이 흩어지던 미소가 전부였으니까.

“……이제 매일 거야.

어쩌면 말을 해진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말라고 선언한다면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녀석은 어색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일은 해진이 방금 삼킨 것이 ‘왜’라는 질문이었다는 짐작할 있었다.

겨우 그걸 모른 척하면서 둘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해진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식당으로 향하는 , 라일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교대하러 가는지 저택의 뒤편을 지키던 경호팀 인력이 복도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엔 알파가 몇몇 섞여 있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가 경호나 보안업에 종사하는 흔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저택에 상주하면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전부 베타였지만 말이다.

문득 라일은 경호 인력 알파가 이렇게 저택 안까지 드나드는 일이 많은지 궁금해졌다.

***

“…….”

해진의 머리칼을 닮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라일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까 문득 떠올린 궁금증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임시로 저택 내부의 경비를 서던 알파를 신경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새삼 그를 자극했다.

“잠깐 들어와.

결국 참다못한 그는 비서를 호출했다. 서둘러 들어온 비서는 긴장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최근 계열사 흡수합병 건으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계열사 실적이 부진한 곳을 끝내 정리하기로 것이다. 결단에는 라일의 숙부인 다니엘 베르무스의 탓이 컸다. 단순히 사업이 부진한 것을 떠나 엮여 있는 다른 계열사의 재무 건전성까지 위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니엘 숙부는 강제로 사업이 정리당하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른 사업에 들어갈 예산까지 끌어다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는 뻔뻔한 논리에는 과연 라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덩달아 바빠진 비서는 최근 새로 채용 공고를 내보낸 참이었다. 인력 충원이 시급했다.

“저택 경호팀에 알파가 몇이나 있지?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오메가 형질은 명도 없습니다만.

라일의 성질을 익히 알기에 그의 저택에는 사용인까지 오메가는 명도 없었다. 이번에 전부 교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아. 알파가 몇이야.

그러나 뜬금없이 신경 쓰지도 않던 알파 형질을 찾는 라일을 보며 비서는 일단 대답을 서둘렀다. 의중을 고민하면서.

“알파는 경호팀에 , 사용인 중엔 하나도 없습니다.

“…….”

알파가 명이나 있었던가.

대답을 듣는 순간 라일은 조금 거슬리는 정도였던 사안이 이제 무시할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58

그러다가 문득, 혹시 해진이 다른 알파를 본다면 불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핍박하던 집사도 알파가 아니었던가.

분명 그러리라. 이걸 뒤늦게나마 알아차렸으니 이제는 바꿔야 때였다.

“일단 알파는 저택에 들어가지 하게 .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전부 좋은 조건으로 사직을 권고하고.

“……알파 형질을 가진 사람은 전부 외곽 경비로만 빠질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만, 전체 해고는 힘들 있습니다.

역시나 의외의 사안에 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정을 보았다. 당연하지만 베르무스의 계약조건은 무척 후하다. 웬만해서는 먼저 그만두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조건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당한다면, 당연하게도 반발이 있으리라.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말이다.

“왜지?

“일단 경호 팀장이 알파입니다. 또한 적당한 이유가 없다면 반발이 일어날 겁니다.

“…….”

분명 일리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알파가 저택에 존재한다는 깨닫는 순간부터 라일은 이해할 없는 조급함에 시달렸다.

“왜 그러십니까?

“진이 알파를 불편해할 거야.

“아.

의아하게 묻는 비서에게도 그가 걱정하는 부분을 짚어 주었다. 눈치가 빠른 비서는 대번에 만하다는 표정이 되어 같이 고민에 빠졌다.

“잘 설득해 . 반발이 같다면 좋은 조건으로 본사로 이직을 권유해. 정도면 불만이 사그라들겠지.

차근히 마찰이 없게 그들을 저택에서 빼낼 생각을 하던 라일은 문득 걱정이 치미는 바람에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진을 핑계로는 쓰지 . 엄한 화살이 돌아갈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해진에게 원망이라도 돌린다면 골치 아파진다. 해코지라도 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해진을 위한 경호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경호를 붙이면 답답해할 테니 저택 자체를 철옹성으로 만드는 나을 듯하다. 저택은 쓸데없이 너무 넓었으니 대비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전반적으로 저택 경호 인력을 늘려. 베타로.

“그것도 조치하겠습니다.

이미 저택의 보안 체계는 저번에 갈아엎어서 충분했다. 그걸 알지만, 비서는 묘한 예감에 눈을 굴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혹시 진에게 부적절한 언사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단단히 교육해.

“알겠습니다.

그의 세세한 지시를 빠짐없이 적으며 비서는 라일이 걱정하는 뭔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저번 같은 사태를 아예 처음부터 방지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용건이 끝난 같은데도 라일은 비서에게 물러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의아하게 시선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계약서에 명시한 보상을 진에게 미리 지급하는 문제가 있나?

“명시된 계약 기간을 충족하지 않고,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그래.

보통 지급해야 주면 문제가 되지만 미리 지급하는 괜찮으리라. 비서도 이걸 알지만 그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왜인지 해진이 그것들을 선뜻 받지 않을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서 또한 해진이 보상 방안을 적은 계약서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리 지급하는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을 같습니다. 다만, 브라이트 씨가 거부하시면 어떻게 할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라일 또한 예상했다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회장을 천천히 관찰하면서 비서는 아까 튀어 오른 예감을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왜인지 해진과 엮이는 일이 많아질 것만 같다는 예감이었다. 역시 인력 충원을 서둘러야 같았다.

***

종일 그를 괴롭히던 경호팀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라일은 일에 집중할 있었다. 흡수합병 건으로 직접 찾아온 다니엘 숙부가 귀찮게 구는 바람에 시간은 걸렸다. 물론 그를 만난 아니었다.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그를 보지도 않고 쫓아내느라 신경이 거슬렸다.

밤늦게야 저택에 돌아온 라일은 그를 맞이하는 마크에게 습관처럼 물었다.

“진은?

“주무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번엔 방이 아니라 외관에 있는 뜰로 움직였다. 무척 늦은 시간이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택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니 야간작업을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힌 장소가 보였다. 그가 오전에 말해 온실이 있는 자리였다.

공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쪽 정원을 벼르고 있었는지 마크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황폐하게 방치되던 곳에는 온갖 공사 장비가 즐비했다. 어수선한 모습에도 라일은 꼼꼼하게 진행 상황을 눈에 담았다.

“온실 안쪽에서도 밖에 있는 같은 분위기로 조성합시다. 필요하다면 규모를 늘리세요.

“근처의 정원도 세심하게 손보겠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은 걸립니다.

온실 하나를 새로 꾸미는 결코 오래 걸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라일은 불만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신경 주세요.

“네, 도련님.

감시라도 하듯 한참이나 공사 현장을 노려보고 나서야 라일은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택 내부로 들어서자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잠든 조금 되었다고 했으니 이건 그의 착각이거나, 정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녀석의 자취를 본능이 잡아내는 것이리라. 그는 예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깨달았다.

체향에 집중하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문득 벽을 짚고 내려가던 녀석이 생각난다. 중후한 색의 저택 벽에는 해진의 하얀 손이 잔상처럼 벽에 남아 있었다.

갑자기 걱정이 치민다. 곁에 아무도 없을 해진이 다리를 헛디딜까 . 다리가 저택에 머무르면서 악화하기만 할까 .

“…….”

“왜 그러십니까?

“……저택 내부도 조금 손봐야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오래된 저택은 너무 위험했다. 일전에 CCTV 개수를 늘릴 진작 같이 손봤어야 했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정이 아니었나.

“어디를 손보려고 하십니까.

그의 옷시중을 들겠다고 안으로 따라온 마크가 의아하게 물었다. 곰곰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라일은 그에게 외투를 건넸다.

“진이 다니기 수월하도록 안전하게 보수하려고 합니다. 조만간 비서가 저택 보수를 논의하기 위해 방문할 겁니다. 그때 같이 의논하시죠.

“네.

그의 각인 사실은 주치의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라일은 앞으로도 해진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사실을 모르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라일은 아직 해진에게 감정까지 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모든 그저, 향후 자신이 살아가는 필요하기에 의무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진은 최근 저택에서 합니까?

“음……. 대부분 방에서 머무르십니다. 아무래도 밖이 산책하기 좋은 날씨도 아니어서요.

“……서재에는 갑니까?

“그쪽으로는 걸음 하지 않으신 되었습니다.

“…….”

무척 무료할 텐데 서재에도 가지 않는다니.

안에만 있을 해진을 떠올리니 갑자기 초조함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면서 마크에게서 등을 돌린다.

“알겠습니다. 이만 쉬세요.

“편히 주무시지요.

달칵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라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같은 신문을 여러 뒤적일 정도로 없을 터다. 그런데도 서재에조차 걸음 하지 않는다니 덜컥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득 서재 앞에서 어쩐지 못마땅하게 저를 쳐다보던 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서재가 너무 볼품없어서 그런 아닐까.

저택에는 서재가 다섯 정도 있었다. 해진에게 안내한 곳은 그중 가장 가까운 서재였지만 가장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직계가 사용하는 서재가 아무래도 가장 기품있게 꾸며져 있긴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가려면 해진의 불편한 다리로는 계단을 너무 많이 지나야 한다.

“…….”

저도 모르게 침대 앞을 서성거리던 라일은 이번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저택 개보수 방안이 점점 방대해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비서에게 연락한 라일은 비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주문을 두었다. 저택 내부에 안전시설을 비롯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겠다고 말이다.

퇴근했으나 비서는 성실하게 답장을 보내었다. 속에서 약간의 당황을 읽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조만간 비서의 봉급은 올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약속한 바와 같이 라일은 다음 아침 어김없이 해진을 찾았다. 녀석은 어떤 기대도 담지 않은 무덤덤한 얼굴이었으나,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라일은 무심코 안도했다.

어제 해진과 아침 식사를 뒤로 라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매시간 녀석의 입에 들어가는 빠짐없이 보고 받았으나 정작 그는 속이 역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이 바쁘면 정도 강행군은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상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아침에 해진과 마주하니 조금 식욕이 돌았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라일은 앞에 놓인 스텔리네 수프를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해진도 오랜만에 수프를 요청했다고 한다.

원래도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는 시간은 아니었기에 둘만 있는 식당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해진이 먹는 음식 등을 헤아리던 라일은, 테이블에 장식으로 놓인 화초에 시선을 주었다.

“혹시, 좋아하는 식물이 있나?

              

#59

금방 지금 짓고 있는 온실로 생각이 당연했다. 이왕 꾸미는 , 해진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어도 나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손을 우뚝 멈춘 해진이 라일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라일은 수프를 넘기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드는 느꼈다.

“…….”

아무 말도 없는 해진의 태도에 라일은 하는 없이 준비했던 다른 말들을 쏟아냈다. 묘한 긴장이 그를 잠식한다.

“……조만간 경호 인력들이 보충될 거야. 혹시 네게 무례하게 구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말해 주도록 .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지만…….

어떤 말을 해도 내내 무표정하던 해진의 눈썹이 갑자기 미미하게 꿈틀했다. 거대한 불길함을 느낀 라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이미 그런 일을 겪은 건가?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주면…….

아예 들고 있던 스푼을 놓아 버린 라일은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두었다. 무릎을 파고드는 손아귀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성급한 질문을, 해진이 칼로 잘라내듯 끼어들었다.

“베르무스 .

“……응.

대놓고 말을 끊었는데도 라일은 순순히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태도를 빤히 바라보던 해진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한숨이 얼마나 크게 라일의 몸을 뒤흔들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또다시 나온 질문이었다. .

지금껏 라일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이리 해진이 신경 쓰이는지 없었으니까.

지금은 이유를 안다. 다만 이제는 이유를 알기에 질문에 대답할 없었다.

“……그냥.

그러니 공허한 핑계만 밖으로 흘러나갈 뿐이었다. 기실 해진의 의문은 지금까지 라일이 가지고 있던 무관심에 대한 질타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너무 알고 있기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며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궁금해서.

마디를 끝내 덧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해진 또한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다음 아침 라일은 어두운 얼굴로 서재에 앉게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진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종을 울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같이 아침을 먹겠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어제 제가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해진이 밥을 굶기 시작할까 라일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녀석의 목숨이 이제 저의 목숨이니 이리도 신경 쓰이는 거다. 그런 것치곤 해진 몰래 근처에서 서성거린 시간이 길었지만 라일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마크가 방에서 식사하겠다는 해진의 의사를 전해 주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라일은 일단 서재로 들어왔다. 저택 개보수를 의논하기 위해 비서와 마크도 함께였다.

그들이 의견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참담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건 일종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질문의 연장선이리라.

해진은 분명 계약과 관련한 아니라면 그와 아무것도 주고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이유 없는 관심 또한 허락되지 않는 것이리라. 라일은 선을 똑똑히 느꼈다.

참담한 심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의자에 기대었다.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있었던가.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쫓아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걸 정말 진행하실 겁니까?

“그래. 전부.

“하필 이쪽 구역을 정리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택 설계도를 보던 마크가 의아하게 한쪽 구역을 짚으며 물었다. 거기는 해진이 두려워하는 ‘그 방’이 있는 곳이다. 이따금 해진의 동선을 보고 받을 라일은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다리가 아플 텐데 녀석은 묘하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곤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산책이 목적인 알았다. 그러다가 해진의 동선에 맞춰 저택을 보수하려고 설계도를 순간 멍청한 자신의 머리를 버리고 싶었다.

녀석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제게 트라우마를 안겨 방을 피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방이 존재했다는 인식도 하게 전부 바꿔. 근처 복도부터 시작해서 해당 구획에 통일된 실내장식까지 전부. 그게 된다면 건물을 아예 없애 버려.

“…….”

“…….”

이건 단순히 계단에 손잡이를 덧대는 수준의 공사가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비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방’이라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마크는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일단 침묵했다.

그도 이게 막무가내 같은 지시라는 인식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과한 공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도 이따금 해진을 괴롭게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흉포한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파괴의 범위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우습다.

“회장님. 그렇게 대대적인 보수는 금방 끝납니다.

잠자코 있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해진과의 계약 기간을 꼬집은 것이다.

그걸 제일 아는 라일이었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 달력을 번이나 확인하는 자신이었으니까. 사실 시한부 선고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인 것도 맞았다.

“알아. 그래도 .

그걸 알지만, 뭐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해진만 잡을 있다면.

***

오후가 되어 동안 결국 라일은 입으로 아무것도 넘기지 못했다. 허기가 지는 상황에도 해진이 이런 심정이었을지 떠올리면 물이 올라왔다. 아마 앞으로도 녀석이 함께해 주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영영 넘기지 못할 거라는 예감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우성 알파답게 뛰어난 체력을 지닌 라일은 내색하지 않은 업무에 몰두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일일이 컨디션을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회장님. 번즈 시장이 10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면 바로 모셔. 그리고 비서도 동석하도록.

헤비레인 시의 시장인 번즈가 급히 라일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왔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에 라일은 다소 급한 요청에도 승낙 의사를 보냈다.

잠깐 다른 업무를 진행하는 사이, 시장은 금방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베르무스 회장.

“오랜만입니다.

간단하게 서류를 정리한 라일은 시장을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다소 들뜬 얼굴로 들어온 그는 비서가 가지고 들어온 차를 모금 마시더니 급하게 용건을 풀어 둔다.

“베르무스의 저택이 공사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출근하자마자 그의 유능한 비서는 저택 보수 계획을 정리한 공고를 올렸다. 전문가를 섭외하기 위한 절차였다. 공고를 올리고 얼마 시장이 헐레벌떡 전화했을 , 라일은 그의 용건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올리신 공고를 보니 아주 대대적인 공사로 보이더군요.

“겨우 개인 공간에 관한 공사 따위가, 이렇게 시장님까지 오실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크흠, 그것이 아니지요. 어찌 베르무스 저택에 대한 상징성을 간과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돌리는 없이 비아냥거리는 라일의 말투에 시장은 멋쩍게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정치인답게 외양에 신경 그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슬쩍 손목에 있는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그냥 개보수도 아니고 건물 하나를 통째로 구조 변경을 하는 모양이던데, 아시다시피 베르무스의 고택은 도시의 문화유산이 아닙니까.

실제로 베르무스의 저택은 지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이긴 했다. 베르무스 가문이 도시에 터를 잡은 그보다도 오래되었다. 중간중간 개보수를 꾸준히 했기에 생활하는 어려움은 없었으나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에서는 간혹 문화유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베르무스를 귀찮게 했다. 대부분은 정치 자금을 뜯어내려는 우아한 협잡질에 불과했으나 이따금 고택의 경관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경제 활동 부분만 극도로 발달한 대도시답게 적당한 관광지도 없는 처지였으니까.

문제는 설령 그의 저택이 문화유산 취급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시장이 직접 찾아와 어설픈 참견을 주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다니엘 숙부나 친족회와 자주 만난다더니, 성가신 짓을 꾸미고 있었던가.

“제 말은, 이걸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라 도시를 위한 마음으로 생각해 주십사 하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크흠, 물론입니다.

말이 중간에 끊긴 불쾌한지 시장은 연신 헛기침을 댔다. 정치인답게 노련하게 불쾌함을 표하고 싶다는 . 물론 앞에 있는 어린 회장을 무시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아, .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하고 왔는지 그가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자 얼떨떨하게 대답을 주워섬긴다. 모든 반응을 무시하면서 라일은 다시 시계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실은 제가 다른 회의가 있습니다만.

“아아. 이것 바쁜 사람을 붙들고 실례했군요. 이쪽이 급히 끼어든 거니 얼른 자리를 피해 드려야죠.

“멀리 나가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것인지 시장은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무덤덤하게 맞잡아 라일은 자연스럽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의 내쫓기듯 밖으로 서둘러 걸음 하면서도, 시장은 미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60

“저택 개보수는 취소할까요?

곁에서 꼴을 지켜보던 비서만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물었다. 시장이 집무실에서 사라지자마자 손수건으로 손을 문지른 라일은, 그걸 휴지통에 미련 없이 던져 넣으며 대답했다.

“아니. 후원하는 정당을 바꾸도록 .

“……후원 정당을요.

“그래.

“…….”

말도 없다는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다시 일거리를 얻은 비서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발걸음은 생각보다 사뭇 가볍다. 최근 일이 많긴 했는지 라일이 막대한 보너스와 임금 인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비서의 뒤로는 낮게 읊조리는 라일의 음성만 남았다. 어딘가 서늘한 온도였다.

“시장이 바뀔 때가 되었지.

가만히 두고 보던 친족들 또한 밟아 때가 되었다고 라일은 덤덤히 생각을 이어 갔다.

***

“오셨습니까. 페로몬 해소는……, 하신 모양이군요.

그를 맞이하던 주치의는 라일의 안색을 보자마자 황급하게 말을 선회했다. 각인까지 놓고 페로몬 해소는 하겠다는 답답한 환자 때문에, 그는 최근 논문을 찾느라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 다른 방안은 없나.

“제가 페로몬 해소에는 정공법이 제일 안전하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알아. 때로는 편법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쓰게 웃는 라일의 얼굴을 보면서 주치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노파심에 전화로 연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없이 외국의 사례까지 전부 뒤져서 방안을 찾아내야 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정도는 가능하시겠지요.

“……아마도.

바로 오늘 아침 얼굴을 마주하는 거부당했기에 라일은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치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각인을 이상 다른 의약품은 소용이 없어요. 어쩌면 강제로 페로몬을 해소하는 약조차 이제 들지도 모릅니다.

“…….”

각인은 세계적으로 무척 희귀한 사례였다. 베타에게서는 없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만 일어나는 특이한 결합이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영혼의 결합이라 칭하기도 했다. 로맨스 영화나 따위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이유였다.

영혼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치의는 어쨌든 이것이 과학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없는 기현상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각인한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변화가 생기는 아니었다. 각인을 당사자도, 각인의 상대방도 평소처럼 모든 타인의 페로몬을 느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라일처럼 일방적으로 각인한 경우이다. 각인을 쪽은 페로몬 해소를 위한 몸의 결합을 각인 상대방과만 있다. 게다가 페로몬 해소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상대의 페로몬이 없으면 몸의 세포가 서서히 죽어 나갔다.

마디로 각인을 버린 당사자에게만 무척이나 파괴적인 결합이 아닐 없었다.

“같은 공간에 앉아서 페로몬 샤워를 받으세요. 최소한 하루에 시간 이상은 해야 합니다.

들고 있던 논문을 내려놓으며 의사는 피곤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만약 각인이 조금이라도 흔한 현상이었다면 분명 법률이 제정되었으리라. 각인하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약 각인 상대방이 페로몬 제공을 거부한다면 금방 말라 죽고 말테니까 말이다.

어쩌다가 각인이 되는지 메커니즘은 아직 상당 부분 불명확했다.

“음……. 열성도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긴 겁니다. 되면 최소한 긍정적인 페로몬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입니다.

페로몬 샤워에 긍정적인 페로몬이라니. 난관도 이런 난관이 없었다. 라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과연 무도한 제안을 해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가장 좋은 역시 페로몬 해소를 적극적으로 하는 거죠.

말을 들어 주지 않지만, 주치의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거듭 강조했다. 역시나 라일은 듣지도 않고 필요한 부분을 물었다.

“혹시, 상대도 내가 각인한 있나.

“설마 아직 알리셨습니까.

“대답이나 .

열성이라는 소리에 라일의 각인 상대가 누군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갈수록 가관인 상황에 의사는 암담한 마음으로 그에게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상대에게 각인 사실도 알리지 않고,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다만 어차피 숨기기는 어려우실 텐데요.

“그건 무슨 소리야.

“각인한 당사자는, 그러니까 베르무스 씨는 상대방에게 맹목적인 감정을 품게 됩니다. 강렬한 감각이기 때문에 상대 앞에서 페로몬을 완벽하게 갈무리하는 점점 어려워질 겁니다.

“…….”

“게다가 갈무리하지 못하는 페로몬은 아주 근원적인 감정을 담은 나오게 됩니다. 일부러 꾸며내기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상대방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숨길 없다는 과연 뜻이었다. 라일은 어렴풋하게 어머니가 사실을 알고 있던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를 향한 심중을 오해 없이 드러내고 싶기라도 했을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그게 아니라,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을 버텨 내는 일이었다. 어차피 페로몬을 병적으로 갈무리하는 라일이 잘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의 방문 목적 가장 중요한 부분을 처리해야 했다.

“일단, 주치의도 앞으로 입단속에 힘써 주면 좋겠군.

지금까지 얌전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던 라일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페로몬 따위를 흘리지 않아도 거대한 압박감이 주치의를 향해 쏟아졌다.

마주친 그의 눈에서 어쩐지 광기마저 보인다는 생각이 무렵, 의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숨이나 경력이 아까운 실정이었다. 각인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하며 움직이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주치의는 문득 평생을 우성 형질을 억누르며 살아오던 라일이, 최근 들어 우성답다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렸다.

***

라일은 요즘 아침에 눈을 뜨는 두려웠다.

꿈에서 한없이 서러운 해진의 얼굴만 바라보다 눈을 뜨면 덜컥 겁부터 드는 것이다. 그래, 이건 겁이었다. 얼굴을 실제로 보게 될까 무섭다는 어느샌가 라일은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매번 애써 갈급함을 내리누르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해진의 앞으로 향할 즈음에는 거의 뛰듯이 걷고 있는 그는 몰랐다.

종을 집어 라일은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네.

다행스럽게도 안쪽에서는 대답이 들려왔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해진은 무표정하게 들어오는 라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통이 넓어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위아래 색이 같은 보면 세트로 옷인 모양이었다.

깁스가 보일 정도로 통이 넓은 바지를 유심히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해진의 안색을 살폈다. 긴히 논의할 있다는 연락을 미리 해서 문을 열어 것인지, 여느 때처럼 아침을 같이 먹어도 되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단 해야 말을 먼저 하기로 라일은 계획을 세웠다.

“잠깐 앉아도 되겠나.

“네.

조심스럽게 해진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앉으니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고작 걸음뿐인데 그게 기꺼워서 몸이 날뛰려고 했다. 차분하게 평정을 가장하면서 라일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지금 해야 하는 제안을 해진이 얼마나 거북해할지 가늠하면서.

“우선, 이전 계약에 규정되어 있던 보상을 지금 즉시 지급하려고 .

“…….”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왜’라는 질문이 여전히 녹아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라일은 일부러 그런 해진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제 내내 검토한 제안은 녀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지금부터 부탁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아.

해진의 의문은 당연했다. 라일은 그간 계속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저택에 데려왔을 때도, 홀로 각인을 때도. 그러니 이제 라일에게 무엇보다도 해진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이 납득가지 않으리라. 그래서 라일은 구실을 만들려고 한다. 그의 제안에 해진이 이유를 찾을 있도록. 조금이라도 곁에서 만회할 기회를 찾을 있도록. 녀석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저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별거 아닌 보상이라도 품에 안겨 주고 싶었다. 이해할 없지만 각인했다는 핑계는 많은 생각을 미뤄 놓을 있게 주었다.

“내 러트 기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

눈을 뜨니 옆에 있는 해진을 보고 무척 놀랐더랬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초지종을 알아냈다. 혹여 해진을 찾아가 거칠게 다룬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다행스럽게도 조금 멍청한 꼴은 보이긴 했어도 돌이킬 없는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해진은 먼저 나서서 그의 방에 페로몬을 베풀러 주었다고.

“……그게 보상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때와 비슷한 일을 주면 좋겠어. 페로몬 해소의 대안으로 찾아낸 방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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