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rain Chapters 41-50

#41

목이 탄다. 언제 잠들었지.

깼지만 누운 채로 멍하니 시간을 헤아리던 해진은 기억을 되짚었다. 과거를 헤매는 언제 해도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억지로 음식을 삼키고, 사용인은 악의 없는 칭찬을 했었지.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었다.

분명 괜찮다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다독였었는데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은 여전했다. 중간에도 계속 거대한 노크 소리가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지?

몸을 일으키려다가 거칠게 기침을 했다. 물을 마시고 싶었으나 물병이 있는 작은 탁자가 너무 멀었다. 방이 넓어지니 이런 불편하구나, 실없는 생각과 함께 해진은 다시 누웠다. 도무지 저기까지 의욕이 없어서.

그때 난데없는 종소리가 들렸다.

“……?”

휴대폰에서 나오는 그런 전자음은 아닌 같았다. 작고 청량한 종소리가 다시 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진. 일어났으면 들어갈게.

어둠 속에서 눈만 껌뻑껌뻑하던 해진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문을 바라보았다. 달칵, 이상하게 조심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일순 시야가 밝아졌다. 응접실 쪽은 내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던 듯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자 안쪽으로 들어오던 라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의아하게 손을 들어 들이치는 빛을 가리자 이번엔 다소 빠르게 문이 닫혔다.

“…….”

“…….”

성큼성큼 다가오는 라일의 발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사이 바닥이 푹신해지기라도 듯이 말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트레이를 아주 엉망으로 밀쳐 버렸다는 떠올린 해진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는데.

“몸은 어때.

“……괜찮습니다.

자신이 괜찮은지 고민하느라 대답이 박자 늦었다.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괜찮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대답할 아니었으니까.

잠깐 그런 해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라일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방금 빛을 정면으로 봐서인지 라일의 얼굴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론 노크는 하지 않을 거야. 이곳에서 일하는 모두가.

“…….”

반사적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던 해진은 묘한 눈으로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너른 어깨가 시야를 가리자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이 패닉에 빠져 꼴사나운 모습을 잔뜩 보였다는 .

그래도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굳이 억지로 참지 않아도 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순순한 행동에 라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묘한 침묵이 무겁게도 안을 맴돌았다. 한참 그렇게 해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라일이 물었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생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에 필요한 없나.

어두운 , 얼굴도 보이지 않는 라일이 물었다. 잠에서 깨어난 해진은 모든 꿈처럼 느껴졌다. 차차 적응되는 시야에 라일의 시린 파란 눈이 천천히 생겨났다.

눈을 무척 가까이에서 봤던 기분이 드는데.

“집사 옷이 싫어요.

불쑥 말해 놓고 금방 후회했다. 투정이라도 부리는 같은 상황이 거북했다. 라일에게는 아무것도 바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뜻밖의 말에 라일은 잠깐 입가를 매만졌다. 그리고 역시 묘한 기색을 느꼈는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치하도록 하지. 그리고 혹시, ……사용인들이 너를 홀대하나?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해진은 바뀐 사람들을 떠올렸다. 역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있었다. 단순히 이게 직업이라서가 아니라, 잔뜩 부서지고 무너진 해진을 안쓰럽게 바라볼 있는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이들을 무턱대고 미워할 있을 없었다. 해진은 애초에 그런 감정을 배우지 못했다. 그에겐 타인이란 애정과 관심을 갈구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니까.

한없이 비어 있는 그의 욕망을 열심히 채워 가족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이 있는 해진은 멀쩡한 사람인 지낼 있었더랬다. 가끔은 자신에게 이런 결핍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냉대가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단단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잘해 주세요, 다들.

“혹시 협박이라도 당하는 거라면…….

라일은 마치 걱정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재차 해진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들을 것도 없이 해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로 그들은 아무 죄가 없었으니까.

“그냥, 제가 문제인 거죠.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대로 무턱대고 뱉었다. 방에는 다시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득, 라일의 페로몬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묘한 밤이었다.

***

며칠간 아주 아슬아슬한 평화가 이어졌다.

해진은 따사롭게 내리쬐는 해를 보며 이상하게 순간이 위태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용인들은 여전히 친절했고 모든 것이 빠짐없이 그에게 제공되었다.

그런데도 천장 근처까지 닿은 장식장 위에 칼이 아찔하게 걸쳐져 있는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그가 옆에 지나갈 칼이 떨어져 발등을 찌를 같았다.

이제 밥을 가져다주는 사용인은 곁에서 그를 지켜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싶을 때면 트레이 위에 놓인 종을 울리기만 하면 되었다.

누군가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지 않으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해진은 그런대로 적당히 먹고 있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집사는 간단한 임신 진단 키트도 가져다주었다. 병원에 가서 피를 뽑으면 정확히 있었겠지만 아직은 버거웠다. 조금씩 상태에 적응부터 가야겠다며, 해진은 애써 이유를 붙여 그것을 뒤로 미뤘다.

혼자서도 간단하게 있던 키트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성 반응을 순간 해진은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나중에 피검사를 보긴 해야겠으나 한시름 놓을 있었다. 지금은 도저히 사실을 감당할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의미가 있는 일일까?

기계적으로 밥을 먹으면서 해진은 종종 무의미한 의문에 삼켜졌다. 다행스럽게도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종을 울려 생각에 함몰되는 일은 없었다.

해진이 좋아하는 베이컨이 아주 알맞게 익어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원래 조금씩 나오던 것들이 그가 먹기 시작하니 넉넉하게 접시 위에 올라오곤 했다.

그의 기호에 맞춰 변화하는 식단. 이런 배려가 가능했다는 , 해진은 처음 알았다.

침구는 여전히 매일 깨끗한 것들로 바뀌었다. 방에 있는 장식품들은 사라지거나 하는 없이 자리를 지켰다. 위에 먼지가 잔뜩 쌓이는 또한 있을 없는 일이었다. 사소하지만 작은 하나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해진은 이상한 기분에 시달렸다.

이게, 무슨 기분이었더라.

마침 식사를 했기에 해진은 생각하지 않고 종을 찾았다. 언제나 그의 손이 닿는 근처에는 종이 있었다. 다른 방을 때도 굳이 챙길 필요도 없이 찾기 쉬운 곳에 이런 종이 놓여 있었다.

다시 기분이 조금 미묘했다.

“네. 브라이트 .

“……마크 집사님.

“그냥 마크면 됩니다.

매번 그가 집사라는 호칭을 때마다 그는 허허 웃으며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다. 또한 마크는 이제 집사의 검은 정장을 챙겨 입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해서 혼났다며 이제는 좋아하는 옷을 입고 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부 그를 위한 배려라는 쉽게 눈치챌 있었다.

오늘 그는 따스한 밤색의 조끼를 셔츠 위에 겹쳐 있었다. 인자한 눈웃음과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오늘은 도련님께서 조금 늦게 퇴근하신다고 하더군요.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

말만 들으면 해진과 라일이 약속이라도 같았다. 마크는 그와 라일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친근한 어휘 선택을 자주 했다. 아마 그는 늦게 퇴근한다고만 말을 전했을 터다.

본래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는데, 해진이 화장실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라일은 매일 퇴근 후에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어쩌다가 속이 더부룩해서 밥을 조금 남기면 바로 마크를 통해 전언을 보내기도 했다.

사정을 들었는지 마크와 다른 사용인들의 눈에는 한층 상냥한 기운이 깃들었다. 특히 자신이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오해를 받았을 사용인은 개의치 않은 해진을 챙겨 주기도 했다.

고작 라일이 조금 신경 쓰는 걸로, 이런 일이 가능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시작으로 해진은 가지를 깨달았다. 계속해서 잊으려고 했던 이상한 기분이 더는 떨쳐낼 없게 되어 버렸다는 .

***

“변호사를 선임하는 애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닐 테니, 국선 변호사 제도를 이용하러 가겠지. 그쪽에 사람을 심어 .

“네.

해고된 집사가 변호사를 구하는 아주 혈안인 모양이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라일은 차가운 눈으로 놈이 찍힌 사진을 노려보았다. 통통하던 몸뚱이가 그사이 조금 홀쭉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보기 싫어진 라일은 사진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곤 아침부터 줄곧 신경 쓰이던 것을 묻는다.

“진은?

              

#42

“오늘 퇴근이 늦으실 거라 전해 두었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주무시라는 말도요.

“별다른 말은 없었나?

“없으셨다고 합니다.

“…….”

사실 해진이 저를 기다리지 않을 안다. 그러나 라일은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저를 기다려 달라는 염치없는 생각을 하는 아니었다. 다만 매일 가던 그가 연락도 없이 온다면 눈에 띌까 , 그게 마음에 걸렸다. 기이한 일이 아닐 없었다. 이렇게 타인의 감정 따위에 신경 적이 없는데.

최근 퇴근 후엔 줄곧 해진을 보러 가는 라일이었다. 물론 처음엔 이렇게까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하면 매번 저절로 발걸음이 해진의 방으로 향했다.

회사에서도 온종일 해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보고를 들어도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책임감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까지 녀석이 신경 쓰이는 걸까.

“알았어. 나가 .

“네, 회장님.

“……혹시 무슨 소식이 들린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네.

막상 방에 도착하면 침실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녀석의 응접실에 어중간하게 서서 얼굴을 살피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온종일 품고 있던 의구심이 해소되는 기이한 기분을 느낀다. 찾아온 저를 곤혹스럽게 쳐다보는 표정에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애초에 나란히 앉아 대화할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보고 받은 대로 밥은 먹고 있는 건지 해진의 얼굴은 나날이 좋아지긴 했다. 해쓱하던 볼에 아주 조금 살이 오른 것도 같았다. 다만 지나치게 하얀 낯빛은 여전했다.

이렇게 매일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가던 그가 불쑥 나타난다면, 기대 따위는 하지 않던 해진에게도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걸 알아차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걱정으로 붙여도 말을 붙인 것은 그저 그래서였다. 어쨌든 이제 생각하니 조금 과한 걱정이긴 듯하다.

머리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해진의 검은 머리칼을 애써 밀어낸 라일은 들고 있던 서류의 검토를 시작했다.

다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이번엔 하얀 바탕의 검은 글씨가 녀석의 속눈썹이 떨어져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

거의 새벽에 가까운 . 라일은 가까스로 저택에 도착했다.

본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업무가 끝나면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도심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졌다. 쓸데없는 충동이라는 알면서도 라일은 내일 아침이 조금 바빠지는 기꺼이 감수했다.

그렇게 도착한 저택에는 마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별일 없었나.

저녁까지 새롭게 들어온 보고는 없었다. 그래서 가벼이 물었는데 마크는 말이 있다는 그를 한쪽으로 안내하며 대답을 꺼냈다.

뜻밖의 반응에 잔뜩 긴장했던 라일은 들려오는 소식에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별일은 없었습니다만, 브라이트 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네.

들려오는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박히지 않았다. 그간 해진이 먼저 라일을 찾았던 부모님을 보러 가지 못했던 그날 밤뿐이었으니까.

다시 떠오르는 기억에 라일은 씁쓸하게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잠깐 뛰어올랐던 마음이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방에 들를 생각도 라일은 바삐 걸었다. 이미 늦은 시간인데 자고 있진 않을까 고민한 것도 잠시, 종을 울리자 응접실의 문은 금방 열렸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빤히 그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이상하게 몸을 옭아맨다. 이해할 없을 정도로 긴장한 몸이 우스울 정도다. 고작 해진이 저를 먼저 불렀을 뿐인데.

“네. 들어오세요.

한마디에, 겨우 몸이 삐걱대며 움직이는 같았다. 해진이 가리키는 의자 쪽으로 다리가 홀린 듯이 걸어간다. 조종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문득 방에 찾아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아닐까. 어쩌면 이제 찾아오는 짓은 그만하라는 축객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해진이 꺼내 드는 소리는 상상 이상의 악몽이었다.

“이제 몸이 회복된 같으니 내일 저택을 떠날까 합니다.

악몽,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직 잠도 들지 않았는데 라일은 줄곧 보던 검은 꿈이 숨통이 짓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해진의 몸을 훑었다. 아직도 가냘픈 몸은 그가 얼마 품에 안았을 때처럼 마르기만 했다.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는 낯빛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한참 상태가 좋지 않을 때와 비교한다면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라일의 눈에는 말도 되는 소리였다.

“아직 멀었어. 무슨 소리야.

라일은 목소리가 흡사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성이 진동하는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랬듯 해진이 저택을 나가고 싶어 뿐이다. 이게 이렇게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올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이리 가슴이 진동하는지.

그의 말에 해진의 얼굴이 사뭇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무언가 저택에 녀석을 괴롭히는 것이 있는 거다. 대체 그게 무얼까.

“베르무스 . 저는 베르무스 씨와 계약 외에 다른 주고받지 않습니다.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새삼스러운 자각에 라일은 곤란하게 입을 가렸다. 정말로 매번 찾아오는 불편했던 걸까. 자신은 아무것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말은 실상 라일과는 아무것도 주고받고 싶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들 사이에 놓인 잘못과 그에 따른 책임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느낌일까. 뭔가에 찔리기라도 것처럼.

“……너에게 그런 요구한 적은 없는 같은데.

곤란하다는 얼굴로 꿋꿋하게 말을 잇는 라일을 보면서 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낮에 문득 생각난 이상한 감각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해진의 속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저 묘한 따가움에 불과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아픔이 점점 커져 갔다. 이제 돌아보니 그곳에 있던 상처가 컸다는 것처럼.

라일이 방에 찾아올수록, 해진의 안위가 궁금하다는 것처럼 굴수록 이상했다. 그는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해진에게 가해진 수모가 신경 쓰일 수는 있겠다. 책임을 운운할 정도면 해진이 고통받았음을 인식할 정도는 되는 같았으니.

그런데 라일이라면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하는 편이 이치에 맞지 않는가.

물론 해진에게 제공되는 물질적인 부분은 ‘책임’의 일환일 것이다. 다만 가장 궁극적으로 내민 조건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건강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라니.

그도 기사는 찾아보았다. 베르무스 저택에서 오메가가 어떤 수모를 겪고 있는지, 라일의 성벽에 대한 아주 저질스러운 소문이었다. 특히 지난번 라일이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일도 같이 엮여 더욱더 소문을 부풀렸다.

그가 저택에서 핍박받은 사실이나 기사가 말하는 뉘앙스와는 사뭇 궤가 달랐다. 게다가 이런 찌라시 같은 기사가 조금 새어 나갔다고 한들 과연 베르무스가 휘둘릴 정도였을까. 해진이 건강하게 저택을 나가는 장면을 대서특필할 작정도 아닌데 그가 진짜 건강해지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해진은 깊은 불안함을 자각했다. 역시 라일에게는 그저 해진의 몸뚱이가 필요한 아니었을까.

진짜로 건강해서, 그의 페로몬 해소를 받아 있는 건강한 말이다.

그런 아니라면 라일의 행동은 친근한 걱정이다. 그쪽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미까지 꺾으며 세심하게 챙기는 구는 여전히 이해 가지 않았지만.

덕분에 해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잊고 있던 따끔한 감각은 분노였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거부하고 싶었다.

“페로몬 해소가 필요하신 겁니까?

“대체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지금.

뜬금없이 라일의 심장을 숨도 쉬게 하던 해진은 급기야 그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자신이 무슨 오해를 갖게 건지.

애써 이성을 잡으며 라일은 대화를 이어 가고자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하게 정신이 혼몽하다. 정확히는 해진이 저택을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몸에서는 열이 나는 같았다. 잘못된 음식을 삼키기라도 뱃속부터 열이 들끓었다. 녀석의 페로몬에 실린 감정은 옅디옅었다. 그런데도 그게 커다란 고함처럼 라일의 피부에 닿았다.

페로몬이 닿는 세포 하나하나가 조금씩 달아오른다. 기이하게 타오르는 몸뚱이가 끝내 재로 산화할 거칠게 날뛰었다.

자꾸 이곳을 떠나려고 하지.

“별로 쓸모 있는 몸이 아닐 텐데요, 이젠. 고분고분한 몸을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진, 다물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했어.

단호한 라일의 음성에 해진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회피했다. 짙은 피로가 내려앉은 얼굴이 라일의 가슴을 효과적으로 후벼 팠다. 한숨은 마치 송곳처럼 그를 꿰뚫었다.

“차라리 몸이 필요하다고 하시죠. 쓸데없이 배려하는 행동까지 하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불편합니다, 이런 .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이 끊겨 나가는 느꼈다.

              

#43

언제나 해진과 그의 사이엔 두꺼운 벽이 있었다. 라일도 그걸 알았다. 애초에 그런 벽이 있기를 희망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벽의 존재가 이리도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저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해진에게 라일은 쉽게 동요했다. 기이할 정도로 불안한 마음이 그를 거세게 흔들었다. 마치 해진이 저택을 나가는 순간 심장이 멈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난 그가 성큼 해진에게 다가갔다. 걸음으로 충분했으나 해진은 여전히 멀리 있는 같아서 초조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졌다. 라일은 해진을 가두듯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으스러트리듯 잡았다. 이런 자신을 피하고 싶은지 해진은 의자에 깊숙하게 기대었다.

“필요하다면?

“……읏…….

얼굴을 가까이하자 체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라일은 해진이 곁에 없어도 녀석의 페로몬을 쉽게 떠올릴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마치 세상이 해진으로 가득하기라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열성인 그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을 텐데.

속에서 헤엄치는 막히는 환희였다. 이해할 없는 상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눈앞이 다시 붉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매분 매초 신경 써서 갈무리하는 페로몬조차 제대로 가둬 없을 정도로.

진한 라일의 페로몬이 해진의 공간을 채웠다.

“페, 로몬, 읏…….

“필요해서 그런 거면, 얌전히 여기 있을 건가?

해진의 의도는 그도 알았다. 그가 제공하는 모든 배려나 온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거겠지.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머리가 이해했다. 애초에 그가 이토록 뿌리 깊은 불신을 갖도록 만든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자꾸, 떠나려고 하니까.

“진. 대답이 없어. 계약대로 하자고 하면, 이곳에 있을 건지 묻잖아.

빗속에서 잔뜩 헤매 앞으로만 걷던 위태로운 다리. 그가 소식조차 모르도록, 얼마 남은 짐까지 버리고 사라졌던 그날. 지금까지 자꾸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해진의 모습이 라일을 거세게 자극했다.

우성의 페로몬은 금방 지배력을 가진 공간에 머물렀다. 라일은 이제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근 해진의 페로몬에 질식할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얗기만 하던 해진의 얼굴이 금방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에는 달큼한 페로몬이 녹아 있었다. 매번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자극적인 체향이었다. 이번에도 충동질에 손쉽게 넘어가 버린 라일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해진의 몸을 파고들었다.

시선이 홀린 듯이 유려한 목선으로 향한다. 언젠가 라일은 저곳에 있는 페로몬 샘에 이를 박아 넣은 적이 있었다. 마치 과즙이 배어 나오듯 뿜어져 나오던 빗물 향을 상기하니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

자꾸만 벗어나려는 해진의 모습은 손끝 하나까지 라일의 신경을 거슬렀다. 이렇게 손에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정도로.

위험하다. 라일은 순간 해진을 놓쳐 버리는 위험한지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이 위험한 건지 분간할 없었다. 중요한 어느새 녀석의 빗장뼈 가득히 남겨 두었던 그의 자국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는 점이다.

위험하다.

라일은 계속해서 페로몬을 퍼부었다. 집사를 압박할 때처럼 살의를 가진 페로몬이 아니었다. 한없이 음탕하고 원초적인 본능으로 벼려 것들이었다.

입술을 깨문 해진은 팔을 움켜쥔 그의 아래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사이에 빠듯하게 갇혀 있는 해진을 보니 기이한 충족감마저 느껴진다. 달뜬 얼굴로 녀석이 다리 사이를 움찔거리는 볼수록 그랬다.

페로몬 해소를 때도 라일은 이렇게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았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필연적으로 오메가에게 신체 반응을 일으키기에 매번 꺼려 왔다.

자신이 그랬을까.

손이 홀린 듯이 해진의 뺨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촉촉하게 감기는 피부를 보니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감각이 좋았다.

필시 그렇게 본능에 몸을 맡겼으리라. 피가 배어 나오도록 깨물고 있는 해진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물지 .

“…흡…….

“하지 말라고.

뺨을 쥐었던 손바닥에 힘을 주어 눌렀다. 그런데도 해진은 벌벌 떨면서 입술에 상처를 내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초점이 점점 사라지는 눈이 녀석의 정신이 침몰하고 있다는 알려주었다.

그간 이미 녀석의 속을 잔뜩 헤집어 라일이었다. 저런 생채기 하나가 무에 대수라고 이리도 화가 난단 말인가. 배어나는 피가 그의 눈알에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이해할 없는 갈급함으로 라일은 차갑게 내뱉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한텐 신음도 들려주기 싫어서?

그러나 한껏 이죽거린 말에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입이……, 찢어지고 싶진, , 않으니까…….

‘입이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듣기 싫으니까.

“…….”

의자를 넘어트릴 해진에게 다가가던 라일은 순간 우뚝 멈춰 버리고 말았다.

“……으, 읍…….

뭔가 이게 아니다.

세찬 비를 뒤집어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라일은 자신이 본능에 휘둘리고 있다는 불현듯 깨달았다. 차가운 이성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저 페로몬에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난…….

이러려던 아니었다. 끝도 없이 저지른 과오를 책임지고 싶었을 뿐이다. 먹고 입던 녀석을 조금 보듬은 내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미안해서.

그런데, 지금 무슨 짓을 거지?

“나는…….

이렇게 페로몬으로 한껏 압박하려던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 화가 난다고 이렇게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녀석을 몰아세우려고 아니었는데.

내가 그랬지.

“……무서워.

한숨 같은 목소리에, 라일은 불에라도 뒤로 물러났다. 미미한 두려움을 담은 해진의 페로몬이 수천 개의 바늘이라도 그를 찔러 댔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몸짓은 형편없이 초라했다. 아직도 팔로 자신을 보호하듯 끌어안고 있던 해진이 무심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볼 만큼. 시선에는 아직까지 두려움이 녹아 있었다.

자신이 녀석을 저렇게 만들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라일은 자신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성급한 다리는 응접실에 딸린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오후 내내 비어 있던 속에서는 거북함으로 이루어진 신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새로 데려왔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역겨워 이렇게 허리를 꺾으며 괴로워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라일은 거칠게 속을 비워냈다. 그런데 번이고 짓을 반복해도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입고 있는 옷이 잔뜩 엉망이 정도로. 그렇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니 거울 속에 엉망이 얼굴이 보였다.

라일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아주 익숙한 감정을 떠올렸다. 해진이 라일의 곁보다 거센 빗속을 선택했던 , 그에게 사정없이 박혀 들었던 작은 씨앗이 비로소 싹을 틔웠다.

그건 자기혐오였다.

<챕터 7>

‘이 아이는 나처럼 우성이 거야.

라일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의 부모는 라일의 금발과 파란 눈을 보란 듯이 손님에게 내보이는 즐겼다. 금으로 자아낸 듯한 금발은 피가 진한 알파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의 파란 눈을 보며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은 우성의 피가 나왔다며 미소를 지었다. 특히 우성 오메가인 어머니는 사실을 유독 자랑스러워했다.

다만 칭찬 어디에도 라일의 노력에 대한 없었다. 그가 이루는 성취는 전부 우성 알파이기에 당연하게 따라오는 취급했다. 다섯 , 서툰 손놀림으로도 최선을 다해 어머니에게 꽃을 만들어 날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만든 완벽한 종이꽃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라일은 의문을 가졌다.

형질을 빼면 과연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이 아이는 나처럼 우성이 거라고, 베르무스의 알파 우성이!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라일이 형질을 발현한 남들과 비슷한 사춘기, 열네 살이었다.

***

우성은 보통 아주 이른 나이에 형질을 발현한다. 라일이 열두 살이 넘을 때까지 발현하지 않자 아버지는 정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외도를 라일이 발현하지 않은 탓이라고 했으니 그런 것이겠지.

집착에 가까운 그녀의 행동이나 우성이 아닌 아버지를 은근히 무시하는 행동은,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린 나이지만 라일은 이제 형질 타령에 쉬이 휘둘리진 않았다. 고작 페로몬이 없는 것뿐, 그의 삶은 여전히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업 성적은 최고였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정도로 몸도 쑥쑥 자라났다. 그를 뭔가 부족하다는 보는 어머니가 유일했다.

아주 어릴 가졌던 의문에는 이제 단호한 해답이 생겼다. 설사 이대로 알파로 발현하지 못한다 한들 라일은 라일이었다. 여전히 베르무스가의 적통이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열네 , 우성이 아닌 그냥 알파로 발현했어도 라일은 그러려니 했다. 새롭게 생긴 페로몬이라는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흐음. 그쪽이, 도련님이야?

불쑥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운명의 그날은 이렇게 악취로 기억되곤 했다.

              

#44

발현한 얼마 되지 않은 열네 살의 라일은 이게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는 쉽게 눈치챘다. 어머니의 따스한 내음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어딘가 꺼림칙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

페로몬을 이해하는 본능적인 영역이었다. 그래서 페로몬에 눈뜨기 시작한 라일도 페로몬의 의도를 이해하는 쉬웠다. 질척거리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묘한 .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정부 주제에 제게 흘릴 만한 페로몬은 아니었다.

‘더러운 냄새 집어치워.

‘페로몬을 냄새라고 하는 실례라는 , 학교에서 배웠니?

분하다는 허리를 틀며 말하는 오메가의 몸짓에는 습관과도 같은 교태가 녹아 있었다. 마치 아버지의 앞에서는 이렇게 굴고 있다는 듯이. 그게 그의 혐오를 자극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라일은 뻔뻔한 작태에 불쾌한 낯을 참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움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버지가 정부를 저택에까지 들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혐오는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 라일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권태였다. 알파인 하나 믿고 마냥 무능한 친족들, 고작 오메가 페로몬에 홀려 집안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는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성이라는 형질에만 집착해 서서히 미쳐 가는 어머니.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역시나 저택에서 감히 정부 따위가 제게 말을 붙이는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다. 경호원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아버지의 머릿속은 이해하기를 포기한 오래였다.

‘너 따위가 감히 말을 붙이는 거지?

순수한 의문이었다. 오메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라일에게 이따위 행동을 보이는 걸까. 이상하게 역겨운 냄새까지 흘려대면서.

모처럼 해가 드는 저택 외곽의 정원에서 책을 보던 라일은 경호원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곳은 그의 저택이었으니 자신이 자리를 피하는 이치에 맞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런 그의 물음이 오메가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모양이었다.

‘하. 따위?

‘알아들었으면, 꺼져.

차갑게 내뱉은 순간 갑자기 막대한 페로몬이 그를 향해 밀려왔다.

‘모르겠는데? 아직 어린 새끼가, 꼴에 베르무스라고.

아주 저열한 목적을 가진 페로몬이었다. 이제 발현한 아이에게는 절대 하지 말아야 행동이기도 했다. 페로몬 샘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아이들은 외부 페로몬에 영향받기 쉬웠다. 그러니 이건 페로몬 기관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는, 무척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오메가는 라일이 쓰러지는 꼴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힘을 다해 그에게 페로몬을 퍼부었다.

심장이 튀어나오기라도 듯이 뛰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눅눅한 악취에 몸이 반응한다는 것이 라일은 끔찍하게도 싫었다.

‘무슨, 짓을…….

‘여기서 지내보니까, 베르무스도 사실 별거 아니더라. 네가 그렇게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 입장도 아니라는 거지.

‘젠, 장…….

‘땅에 처박히는 기분은 어때? 우리 도련님은 이런 처음 겪어 보려나?

처음으로 겪는 무력한 기분은 진흙탕을 닮아 있었다. 음침하고 무거워서 그대로 라일을 집어삼킬 같은, 아주 거북한 기분이었다. 거센 불쾌함은 악취가 나는 것들을 연료 삼아 태우며 그를 살라 먹었다. 이따위 것에 휘둘리는 자신이 끔찍하리만큼 한심했다.

이에서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악무는 순간, 라일의 속에서 이번엔 조금 다른 종류의 불길이 일어났다. 속에 이따위 저열한 페로몬 공격에 저항할 힘이 있다는 깨닫는 순간 라일은 참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거지 같은 오메가의 면상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는 욕망뿐.

‘이게, 씨발, 우성이었어? 으윽……!

‘내 앞에서, 꺼져.

살의를 담은 페로몬은 소년이 내뿜기에는 너무 무겁고 단단한 것이었다. 해쓱하게 질려 버린 오메가는 벌벌 떨며 그를 피해 반대편으로 기어갔다.

꼴사납게 더러운 흔적을 남기고 가는 오메가를 노려보며 라일은 이를 갈았다. 저택에 저딴 들여온 아버지가 이상 한심하게 느껴질 있을까.

불쾌하긴 해도 단순히 한바탕 지나가는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터다.

그날 , 평생 그를 괴롭힐 끔찍한 두통이 시작되지만 않았다면.

***

‘얘가 이러는 거야! 의사!

‘최, 최근에 오메가의 페로몬에 다량 접촉한 있으신지…….

‘뭐? 저택에 오메가는 나랑……, 빌어먹을 창놈 새끼가 설마…….

서슬 퍼런 어머니의 음색에 의사가 쩔쩔매는 소리가 들렸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라일은 어렴풋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했다. 오메가의 페로몬 때문에 몸이 이렇게 아프구나.

며칠을 앓고 라일은 무거운 머리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정밀 검사 결과 우성이라는 밝혀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지 않았다.

***

두통의 이유에 대해 묻자 의사는 당황하더니 다시 주렁주렁 그에게 기계를 매달았다. 검사 결과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이 극도로 발달한 탓이라고 했다.

뛰어난 우성다운 결과라고 했으나 라일은 그저 시큰둥했다. 이따위 악취를 맡으니 두통이 심해지는 아니겠는가. 페로몬 해소를 남들보다 자주, 많이 해야 한다는 소리는 끔찍한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따위 창놈 페로몬을 맞고 우성이 됐다고? 너도 아비랑 똑같아.

결과를 어머니는 거의 발작 증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지친 라일은 귀찮아서 모든 무시했다. 일관성 없는 비난이니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부모가 하는 말이 전부가 아닌 너무 일찍 깨달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우성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말은 무미건조했다. 어머니의 히스테릭한 반응과는 다른 무관심한 대응이었다.

모든 것들이 라일은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저 미미한 두통이 지속되는 거슬릴 .

그렇게 우성이 되고 얼마 , ‘그 사고’가 일어났다.

***

, ! 소름 끼치는 소리가 적막을 찢어발겼다.

그래도 두통 때문에 선잠을 자던 라일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물가물한 머릿속에도 방금 소리가 이상하다는 감상이 스쳤다.

이상하게 사위가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무렵 라일은 기이한 예감에 밖을 확인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가 밖으로 나선 순간 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인 인식하자마자 라일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베르무스의 저택에서 총을 쏘고 있다는 말인가.

이쪽도 호신을 위해 총을 챙겨야 하는지 고민할 무렵 총성이 울렸다. 비명도 간간이 마당을 울렸다.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아주 고요한 적막만 흘러내렸다.

발걸음이 홀린 듯이 한쪽으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불쾌한 오메가의 냄새, 어머니의 페로몬 그리고 아버지의 페로몬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달도 밝은 , 라일은 외곽 마당의 잔디를 밟고 나서야 자신이 맨발이었다는 깨달았다.

‘…….’

주변에서 사용인들이 그를 말리듯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라일은 정면에 곧게 시선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우악스럽게 잡는 손들은 전부 차갑게 쳐냈다. 번을 반복하자 더는 그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알았으나 소름 끼칠 만큼 사위가 적막했다. 그가 사박사박 잔디를 밟는 소리가 들릴 만큼.

그렇게 다가간 마당의 끝에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심장 부근에 구멍이 있었다. 어머니는 알아볼 없을 정도로 얼굴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총을 보니 밤중의 소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있었다.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라일은 상황에 의구심을 가졌다. 형질이 대체 뭐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때 문득 발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들로부터 흘러나온 시뻘건 핏물이 어느새 그에게까지 닿았다. 형질이 이렇게 유전되었다고 나타내기라도 하는 같았다.

‘……도련님…….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당시의 집사였던 마크가 그를 불렀다. 무섭도록 떨리는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라일은 차분하게 명령했다.

‘주변 입막음시키고, 경호팀 호출하세요.

‘…….’

‘그리고 본사 쪽에 연락해서 감시 영상 가져오라고 하세요.

놀란 마크가 그를 만류했으나 라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제는 발바닥을 전부 적신 그들의 피를 보면서 그저 깨달을 뿐이다.

자신은 앞으로도 영영 형질이라는 사랑할 없겠구나.

그날은 라일이 열다섯이 되던 날이었다.

***

그날 , 저택에서는 시체가 발견되었다. 아버지의 정부였다.

CCTV 영상에는 어머니가 그의 배와 머리를 쏘는 장면이 똑똑히 녹화되어 있었다. 나중에 부검 결과 정부의 속에는 아버지의 씨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총구가 배를 먼저 향했는지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알파의 노팅은 확고한 의지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

라일은 자신의 이런 과거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작은 상처라도 있었던 라일이 어렸을 적뿐이었으니까.

막상 일이 벌어지고 라일에게 남은 슬픔이 아니라 혐오와 경멸이었다.

그래서 라일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이리도 뿌리 깊게 혐오해 마지않았던 짓거리를, 해진에게 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해진을 곁에 잡아 두고 싶은 욕망이.

              

#45

“브라이트 씨가 저녁까지 거르셨다고 합니다.

“…….”

비서가 전하는 저택의 소식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어젯밤 그따위 짓을 뒤로 해진은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부터 줄곧 이불만 뒤집어쓰고 누워 있다는 소리에 라일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오늘 하루를 회사에서 어찌 버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거의 망상과 그의 과오가 뒤엉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계속 불러일으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일은 머리에 총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 보고드릴 안건은 이게 끝입니다만, 펜트하우스로 모실까요.

“……아니, 저택으로 가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하루를 끝낸 라일은 자신이 이런 상태인지, 원인을 찾는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해진이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 다시 숨을 있을 같았다.

***

어두운 . 해진은 멍하니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다.

이렇게 숨을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이 아래로 침잠하는 순간이 온다.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묘한 상태. 온도는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서늘한 공기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까도 들었던 같은데 계속 울리고 있는 건지 그사이 시간이 지나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진.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곁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있자 어딘가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의 이불을 잡아서 슬쩍 내렸다.

“…….”

“굶지 말고 뭔가를 먹어.

가까스로 눈을 뜨니 파란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눈높이였다.

문득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는 지금 빈틈없이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제 위압적인 상황 때문에 기운이 빠져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상황을 떠올리면 자꾸만 힘이 빠져나갔다. 며칠이나 먹어 겨우 그러모았던 티끌만 감정이 다시 해일에 쓸려나가기라도 것처럼 말이다. 고작 줌도 되는 그의 감정을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막대한 페로몬이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이따금 꿈을 부유할 기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당시에는 분명 그의 의사를 무시한 라일이 저를 안을까 한껏 겁을 먹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잔향처럼 제게 남은 그의 페로몬을 곱씹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과연, 그가 정말 저를 해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묘한 일이었다. 기묘한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로몬이라는 존재를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없는데 직감이 먼저 깨닫고 마는 그런 신기한 감촉.

그런데 라일은 갑자기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졌을까. 그것도 그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선.

“…….”

얼굴을 떠올릴 때면 해진은 의무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사실 해진이 깊게 고민해야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가 다시 해진을 겁박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3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그를 놔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격한 반응을 떠올리면 다시 몸이 절로 굳어 버린다. 그러면 해진은 잠깐 그를 들어 올렸던 기묘한 감각 따윈 재빨리 놓아 버린 다시 아래로 아래로 침잠했다.

“다시는 그런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먹어.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라일의 눈은 어느새 가까이에 있었다. 뜻밖에도 그가 누워 있는 해진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이 낯설었다. 상황도 무척이나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압적으로 쏟아붓는 주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따듯하던 라일의 페로몬이 다시 코끝을 스친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이해할 없는 문제들을 감당하기엔, 그에겐 남은 것이 너무 없었다.

***

“후…….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라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해진의 상태는 미묘했다.

어딘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인형처럼 침대에만 앉아 있는 여전했다. 다만 집사나 사용인이 음식을 들이면 조금씩 먹으려는 움직임은 보여주는 같았다. 먹는 양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묘하게 불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해진의 모습이 , 마지못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기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죽은 듯이 바닥에 깔리는 페로몬을 보면 감이 틀린 아니리라.

덕분에 라일은 온종일 목이 매달린 사람이 같은 심정을 느껴야 했다.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아침저녁으로 해진을 찾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먹으라며 음식을 코앞에 들이밀고 싶었으나, 그러면 식사를 강제하는 같아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매번 찾아가서는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고작이었다. 정작 해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말이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는 해진과는 다르게 이번엔 라일 본인이 밥을 거르게 되었다. 녀석의 잔뜩 깨져 있는 페로몬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세포 하나하나가 터져 나가는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가능성 방안은 역시 해진을 가고 싶은 대로 놔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라일은 안의 욕심만큼이나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없었다. 해진이 과연 나가서 몸을 제대로 지킬까?

라일은 이미 밖에 나간 해진이 어떤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는지 확인한 있었다. 아무리 그에게서 도피하느라 그랬다지만 발견한 당시 해진의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다시 녀석이 영양실조에 걸린 더러운 모텔에 누워 있는 꼴을 발견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머리가 돌아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최소한 밥이라도 챙겨 먹을 의지를 심어 줘야 했다.

적어도 녀석을 놓쳤을 , 녀석이 그대로 어딘가에서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자기혐오까지 가세한 책임감이 자꾸만 그를 질책했으니.

한참 초조하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브라이트 씨의 일로 고민하십니까?

“그래.

며칠간 반복된 일이기에 비서의 추론에는 거침이 없었다. 잠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라일에게 가지 조언을 던진다.

“환경을 조금 바꿔 보시죠. 매일 안에만 계시니 바깥 공기를 조금 쐬며 식사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음.

“마침 내일은 모처럼 해가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전 일정도 비울 있습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소리에 라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해가 좋은 창문을 열고 그를 내려다보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은 안뜰에서의 식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

멍하니 너머의 하늘을 감상했다. 오늘따라 내리쬐는 해가 이상 찬란할 수가 없었다.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니 종소리가 울렸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라일을 떠올렸다.

“네.

“…….”

역시나 완벽하게 갖춰 입은 라일이 그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해진은 매번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가.

평소처럼 밥을 먹으라고 당부할 거라 여겼으나 라일은 의외로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해진의 얼굴을 곤혹스럽게 살피던 그가 결국 시선을 슬쩍 옆으로 피했다.

차마 마주 보고는 말하기가 힘들다는 것처럼.

“진. 오늘은 밖에서 식사하는 어떨까 하는데.

뜬금없는 소리에 해진은 라일의 가슴팍에 머물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물론 모처럼 좋은 날씨였다. 해진의 힘없는 눈길조차 저도 모르게 찬란한 정원에 닿을 만큼. 그런데 그게 라일이 굳이 찾아와서 권할 정도의 일이던가.

결국 해진은 묻지 않을 없었다. 지친 그조차 의문을 쉬이 떨치지 못할 만큼 라일은 꾸준하게 이상하게 굴었다.

“왜요?

“……네가 너무 먹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적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말과 함께 미약하게 흘러나온 라일의 체향에서 스쳐 지나가는 절박함을 읽고 혼란스러웠다. 혹시 자신이 페로몬 신호를 읽는 것조차 못할 만큼 망가진 아닐까.

“일단 시도만 . 불편하다면 내가 자리를 피해 테니까.

묘한 페로몬을 관찰하던 해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의 눈이 미미하게 크게 떠지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이게 함께 식사하자는 뜻이었다는 깨달았다.

***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날이 쌀쌀했다. 방에만 있어서 몰랐으나 날씨는 이미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이치는 한기에 해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후회가 들이쳤다. 함께 식사하자는 소리인 알았다면 거절했을 텐데. 아무리 라일이 이상하게 군다고 해서 같이 밥을 먹어야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까 느꼈던 페로몬도 사실 착각에 불과한 같았다. 지금은 여느 때처럼 라일의 페로몬은 흔적도 없었기에.

그렇다고 이미 나왔는데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다.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든 쌀쌀한 공기라서 해진은 그저 기계적으로 앞으로 향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음식을 뜨는 시늉이나 하고 작정이었다.

이따금 누군가가 안의 물기를 말라 버린 같은 감각이 들었다.

              

#46

“다리가 아픈가?

“……아니요.

사실 차가운 공기에 닿아 발목이 시큰거리긴 했다. 내지 않고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걸음 떼자마자 라일의 시선이 다리를 향한다.

그나저나 자신의 다리가 아픈 알고 있었던가.

뜻밖의 사실에 다소 놀랐던 해진은 이내 관심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상태는 계약을 당시부터 라일에게 보고가 되어 있으리라. 언제부터 그걸 기억했는지는 몰라도.

덤덤하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걸음을 뗄수록 다리가 계속 시큰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발목을 삐었었지. 이후로는 거의 누워만 있어서 아직까지 아픈 줄은 몰랐다.

계단을 내려갈 조금 곤혹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앞에 불쑥 손이 나타났다.

“잡아.

“…….”

앞에 놓인 라일의 마디 굵은 손을 내려다보던 해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이 저를 곧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옆의 벽을 짚으며 홀로 내려가기를 선택했다.

“괜찮습니다.

“…….”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가는 녀석을 보며 라일은 허공만 움켜쥔 손을 물렸다. 그리곤 말없이 뒤를 따랐다. 다리를 헛디디는 아닌지 지켜보면서.

분명 다리에 통증이 있어 보이는데 해진은 끝내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미간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 저도 모르게 내민 손은 허무하기만 하다.

그는 거리감을 억지로 깨부수려 하지 않았다. 녀석이 내보이는 벽은 여전히 목을 조르듯 초조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에겐 강제로 그걸 깨부술 자격이 없었다. 다만 그는 걸음을 아주 조금 느리게 만들었다. 해진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향한 곳은 언젠가 라일이 아침을 먹었던 안뜰의 중앙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해진은 바뀐 안뜰의 풍경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저건…….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

나뭇잎은 어느새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테이블은 조금 커다란 것으로 바뀌었고 주위로 휴대용 난로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날랐다. 한쪽에는 음식을 따스하게 보관할 있도록 보온 장치가 달린 트레이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마크가 해진에게 정중히 한쪽을 손짓해 보였다. 얼떨떨하게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해진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들어가 .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하얀 얼굴에 서린 불안을 제일 먼저 눈치챈 라일은 세팅이 끝난 확인하고 명령했다. 잠깐 사이에 안뜰에 가득하던 사용인들이 흔적도 없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늦가을의 적막한 공기가 사이를 메웠다. 그런데도 아까 느꼈던 싸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해진의 근처에 유독 몰려 있는 난로들 덕분에 공기가 훈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해진은 특히 발치에 가까이 놓인 난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발목의 통증이 온기에 물들어 감에 따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들지.

라일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인 것을 고려했는지 테이블에는 많은 음식이 올라와 있지는 않았다. 바로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가 놓여 있었다. 수프에서 피어난 따스한 김이 끝에 습윤한 기운을 만들었다.

하는 없이 스푼을 들어 그릇을 바라보았던 해진이 그대로 입을 살짝 벌린 멈추었다.

“…….”

“……속이 좋지 않은 건가?

무관심한 해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긴장한 바라보던 라일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저러다가 화장실로 뛰어간다면 역시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녀석은 어딘가 멍한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뿐이었다.

“……스텔리네.

아침으로 올라온 수프는 흔히 보이는 모양은 아니었다. 맑은 국물에 스텔리네라는 파스타의 종류를 넣은 특이한 음식이었다.

일반적인 파스타와는 다르게 스텔리네는 길쭉한 면이 아니라 잘게 잘린 형태다. 특히 잘게 자를 새끼손톱만 모양으로 가공하곤 했다. 덕분에 수프 속에는 작은 별이 잔뜩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그래도 라일 또한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건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어딘가 굳은 수프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만두었던 주방장이 얼마 전에 복귀했지.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라 오랜만에 올린 모양이야.

설명이 길었지만, 해진은 반응이 없었다.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면서 라일은 쓴웃음을 감추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혹시, 싫어하는 음식이라면 억지로…….

“오랜만에 봐서요.

“……그래?

파스타야 흔하지만, 확실히 스텔리네는 흔하게 있는 면은 아니었다. 적어도 헤비레인에서는 말이다.

해진은 무심코 어머니가 주시던 수프를 떠올렸다. 이것과는 냄새가 매우 달랐으나 안에 들어 있는 별들은 똑같았다. 처음 수프를 먹을 어머니가 말을 해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엄마가 하늘에서 특별히 별이란다.

고작 살이었으나 저런 거짓말에 속지 않을 나이는 되었다. 그러나 입양된 처지에 눈치가 보였던 해진은 그저 웃으며 말을 넘겼더랬다.

다만 처음 먹는 따뜻한 수프는 진짜 하늘에서 가져온 것처럼 맛있었다.

“흔하게 팔진 않을 텐데…….

“그런 편이지.

식료품점에서도 들여놓지 않는 종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특별한 수프가 먹고 싶을 때면 해진은 곳까지 파스타를 사러 심부름을 가야 했다.

“어머니가 쓰시던 파스타 면입니다. 이렇게 먹는 집이 흔하지는 않던데, ……우연이네요.

줄곧 수프만 내려다보며 말하는 해진에게서, 라일은 홀린 눈을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해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모처럼 길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떠오른 미소는 이내 가을바람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이미 흔적도 없어서, 라일은 저도 모르게 스푼을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우연이네.

멍하니 해진의 말을 따라 하며, 라일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페로몬처럼 옅은 웃음은 꿈에서 감히 상상하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아팠다. 대체 어디서 이런 통증이 올라오는지 수가 없었다. 한참 고심하고 나서야 통증의 근원은 심장이라는 알았다.

해진은 바로 앞에 앉아 있었으나 아까 끝내 닿지 않았던 손처럼 도무지 잡을 없을 것만 같았다. 덕분에 라일은 속에서 물이 올라와 제대로 식사를 수가 없었다.

반면 해진은 며칠 만에 수프 그릇을 비워냈다.

***

뒤로 해진의 아침에는 자연스럽게 수프가 올라왔다. 유달리 먹는 메뉴라서 마크 또한 세심하게 준비하곤 했다. 방보다는 가급적 바깥으로 이동해서 식사할 있도록 조치도 잊지 않았다.

대부분 해진 혼자 안뜰에서 식사하거나 식당을 이용했으나 종종 라일도 함께했다. 마음 같아서는 매끼 해진이 먹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식사하자고 한다면 해진이 부담을 느낄 같아 함부로 권하지 못했다. 대신 라일은 해진과 함께할 무조건 스텔리네 수프를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라일은 가지 묘한 점을 눈치챘다. 걱정된 나머지 라일은 매일 해진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는지 세심하게 보고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하게 그와 함께 식사할 때면 해진의 식사량이 조금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설마하니 라일 때문은 아니리라. 아마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무의식적으로 편히 느껴지는 아닐까. 줄곧 혼자 외롭게 먹어 왔을 테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라일은 다시 해진에게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을 꺼냈다. 거절당한다면 마크라도 함께 식사하라고 권유해 작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해진은 그렇듯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최근 들어 점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어졌다. 일단 입에서 거절이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라일은 크게 숨을 내쉴 있었다.

다시 비가 연이어 내리는 날씨가 되었다. 덕분에 안뜰에서의 짧은 기분 전환은 힘들어졌다. 대신 라일은 저택에 있는 식당으로 해진을 초대했다. 여러 식당 규모는 작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도록 꾸민 곳이었다.

“…….”

“할 말이 있나?

오늘따라 해진은 앉자마자 앞이 아니라 라일의 앞에 놓인 그릇을 뚫어져라 보았다. 습관적으로 등줄기를 긴장시킨 그는 애써 동요를 숨기며 물었다.

일부러 스텔리네 수프를 먹고 있는 그를, 기분 나빠 하는 아닐까.

“스텔리네 수프를 좋아하시나 봐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지만 해진이 처음으로 의아하다는 그에게 질문했다. 덩달아 앞에 놓인 수프를 바라보며 라일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런 편이지.

사실 라일은 음식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냥 어머니가 좋아하던 특이한 음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음식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해진조차 오늘은 다른 수프를 찾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스텔리네를 앞에 두었다. 어쨌든 일주일이 넘게 좋아하지도 않는 수프를 고집한 보람은 있었다. 해진이 처음으로 그가 말을 걸지 않아도 무언가를 물었으니까. 물론 정작 물어본 당사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눈치였어도 말이다.

              

#47

그들이 식사할 수발을 들어 사용인들도 테이블 곁을 오가지 않았다. 해진이 싫어하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라일이 매번 당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울리기를 한참, 라일은 해진이 왼쪽 무릎을 무심코 문지르고 있는 눈치챘다.

“…….”

일단 조용히 계속 식사를 이어 가며 녀석의 왼쪽 다리를 곁눈질한다. 해진이 다친 곳은 정확히는 발목 쪽이었다. 그러나 최근 식사 때는 밖으로 나와야 했던 해진이었다. 다리에 무리가 아닐까.

초조하게 식탁 밑에서 몰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라일은 때를 기다렸다. 마침 녀석이 식사를 마쳤는지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혹시.

“네.

“……병원에 생각은 없나?

“…….”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싶은지 해진은 물끄러미 라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단 병원 소리에 당장 도망가지 않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 아래 어떤 폭풍이 있을지 몰라서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다리가 아픈 같아서.

“아.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무심코 무릎 쪽을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요새 발목에만 있던 통증이 무릎까지 올라온 기분이 들긴 했다. 아무래도 발목에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자세가 뒤틀린 탓인 것도 같았다.

문득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의사가 조심하라 당부했던 것이 떠오른다. 병원을 생각하니 따라오는 습관적인 불안함도.

어쩌면 라일은 해진에게 다른 진료를 요구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간단한 키트 검사만 하고 말았기에 아직 임신의 위험성은 남아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해진이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라일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강제로라도 그를 병원으로 끌고 갈까.

“생각 보겠습니다.

“……그래.

빤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라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미묘한 감각이 다시 해진을 덮쳤으나 이내 그것을 담담하게 흩어 버렸다.

***

“…….”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다. 가까이에 붙여 소파에 웅크리고 앉으니 기온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깜깜한 바깥을 바라보면서 해진은 날짜를 헤아렸다. 이제 정도만 있으면 저택을 나갈 있을지도 모른다.

시야에 라일과 함께 식사했던 안뜰이 보였다. 어둑어둑해서 보이지 않아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창문은 고정된 열리지 않았다. 가끔 그가 자리를 비우면 환기를 시키는 같긴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곰곰이 아침에 라일이 했던 제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다리가 다시 욱신거리자 손으로 가만가만 발목을 매만졌다.

완전히 걷게 되는 바라지 않았다. 저택을 나간 뒤에는 홀로 걸어 찾아가야 곳이 있으니까. 그러니 늦기 전에 병원을 한번 보는 것도 좋으리라.

게다가 라일을 시험하듯 굴긴 했으나 해진 또한 임신이 걱정되긴 했다. 그가 책임져야 생명이 없다는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다만 병원을 떠올리면 심장이 거세게 진동했다. 이미 싸늘해져 버린 부모님을 확인하러 가던 날이 자꾸 생각났다.

하나둘 쌓인 호흡이 감당할 없어졌을 즈음, 해진은 가까스로 어머니의 수프를 떠올렸다.

특별한 먹는 특별한 수프. 다만 특별하지 않은 날에도 그가 먹고 싶다고 하면 결코 거절하는 법이 없던 어머니. 무엇보다 해진을 데려온 제일 처음으로 주신 따스한 음식.

작은 무리를 떠올리며 해진은 절실하게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밤바람이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폐를 터트릴 쌓인 호흡이 서서히 자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히 마음을 진정시킨 해진은 이내 어렵게 결심했다.

병원에, 볼까.

***

다음 아침, 어김없이 찾아온 라일에게 해진은 병원에 가고 싶다고 조용히 말했다. 잠깐 침묵하던 그는 낮에 바로 있게 조치해 두겠다고 했다.

모처럼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깨달은 해진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입고 옷을 정하고 공들여 몸도 씻었다. 다가올 상황이 겁나기도 해서 일부러 바쁘다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갖춰 입은 해진은 침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이자 맨발에는 푹신한 러그가 부드럽게 감겨 왔다. 분명 침대 주변에만 있던 러그는 날이 갈수록 범위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전체가 이렇게 러그 천지가 되었다.

원래 겨울이 되면 이렇게 바닥을 러그로 채우는 걸까. 그동안은 러그는커녕 수건 하나 제대로 받기 힘들었기에 해진은 원래 이런 체제인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침실에 들어섰는데 응접실 바깥에서 종소리가 났다. 마크인가 싶어서 해진은 얼른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왼발이 움직이다가 그만 두꺼운 러그에 걸리고 말았다. 무릎이 덩달아 풀썩 꺾인 당연한 수순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너무 푹신한 러그 때문에 엎어졌는데 러그 덕분에 다치지는 않은 것이다. 오묘한 상황 때문에 해진은 조금 찌푸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진!

그때 뒤에서 라일의 놀란 목소리가 성급하게 가까워졌다.

“어…….

“왜 그래. 다리가 아픈 건가?

시간에 라일이 저택에 있는 걸까. 분명 자신과 어색한 아침을 먹고 출근한 거로 아는데 말이다.

상황이 의아해서 얼떨떨하게 보고만 있으니 라일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넘어진 상태라는 깨달은 해진이 덤덤하게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몸이 떠오르는 빨랐다.

“읏……!

“걱정하지 . 아무 짓도 한다고 했잖아.

반사적으로 버둥거리자 라일이 짓씹듯 내뱉었다. 그리곤 무척 다급한 걸음걸이로 빠르게 밖으로 움직였다. 해진도 덩달아 다급히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많이 아픈 건가?

“……제가 걸어갈 있습니다.

“…….”

그제야 녀석이 생각보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인지한 라일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멈추었다.

파란 눈이 없는 감정을 담고 저를 향하는 , 해진은 잠깐 두고 보았다. 다시 코끝에 라일의 페로몬이 살짝 스쳤다. 마치 그가 너무 동요한 나머지 감정의 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어색한 상황이 아닐 없었다. 해진은 한숨을 내뱉듯이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 넘어진 것뿐이에요. 바닥이 너무 푹신해서 발을 헛디뎠습니다.

“…….”

녀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왔던 라일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장면을 순간 심장이 멎는 알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들어 올렸다. 최근에는 그래도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은 여전히 날아갈 가볍기만 했다. 녀석의 몸이 가볍게 느껴질수록 라일의 마음은 한없이 바닥으로만 가라앉는다.

내려 달라는 어깨에 조심히 얹은 해진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푹신한 러그는 그가 지시해서 깔아 것이었다. 처음에는 침대 주변만, 나중에는 그마저 발에 걸릴까 전체로. 저택의 어느 방에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러그를 까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배려가 다시 해진을 넘어지게 하다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해악인 아닐까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는 한편 품에 해진을 들고 있으니 기이한 충족감이 라일을 잠식했다. 최근 잠도 거의 정도로 기이한 불안에 시달리던 정신이 고요한 호수 수면처럼 잠잠해졌다.

이대로 해진을 놓기 싫다는 충동이 다시 강렬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차까지만, 이대로 데려갈 있게 .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으나 해진은 까만 시선을 그에게 보일 뿐이었다. 최근 들어 녀석이 저런 눈을 때면 입안이 바짝 마르며 달라붙곤 했다. 가끔은 시선 때문에 말라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

해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만류하듯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페로몬에서는 별다른 거부 의사가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라일은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피며 앞으로 움직였다. 성급하게 방을 나선 것과는 다르게 걸음이 무척이나 느렸다.

문득 그는 해진의 방이 자신의 방과 너무 멀다는 깨달았다.

***

“……연락은?

“없습니다.

라일은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해진을 기다렸다.

일단 회사로 돌아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해진의 다리는 정밀 검사가 필요해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했다.

병원에 들어서면서 녀석은 몸을 잘게 떨었다. 무리하지 말고 다음에 와도 된다는 소리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전에 패닉 상태로 왔던 때보다는 심적 동요가 덜한 듯싶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라일은 일부러 해진이 움직일 만한 동선에는 사람과 물건을 미리 모두 치워 버렸다.

또한 그의 부모가 있던 병동과 정반대의 건물을 오로지 해진의 진료를 위해 사용할 있도록 지시해 두었다. 덕분에 해진은 하얀 병원의 내벽 외에는 아무것도 마주하지 않고 진료실로 들어갈 있었다.

              

#48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으나 라일은 고민 끝에 물러나기로 했다. 혹시 그가 곁에 있는 것이 해진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녀석이 그나마 편하게 생각하는 마크가 동행하도록 지시했다.

어차피 병원이 근처였기에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검진이 끝나면 녀석을 다시 저택에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며 별일이 없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한참 대기하는 와중에 마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임신 여부에 대해 검사하지 않는지 물으십니다.

‘무리하지 말라고 . 진은 바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확실하게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할 있을 같으면 그렇게 하라고 .

솔직히 라일은 이번 검진에서 혈액 테스트는 고려도 하지 않고 있었다. 책임감 없이 잊어버린 아니었다. 임시 키트 진단 결과 음성이라고 하기도 했고 열성 오메가의 임신은 확률이 무척 희박하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겨우 용기 병원에 들어간 해진에게 주사를 디밀어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그저 다리가 걱정되어 병원을 권한 것뿐인데 혹시 무언가를 오해한 아닐까.

가정을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도무지 일에 집중할 없었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피를 뽑다가 해진이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아닐지, 가정을 하면 할수록 도리어 라일의 피가 말랐다.

번이나 비서에게 마크에게서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비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다고 했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하자니 병원 쪽이 무슨 상황인지 없어서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때 비서의 핸드폰이 울린다. 라일은 반사적으로 매섭게 그를 바라보았다.

“……곧 진료가 끝날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가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일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크의 성격상 시간의 여유를 두고 연락했을 테지만 비서는 별말 없이 상사의 뒤를 쫓아 나갔다.

최근 들어 해진과 관련된 일에는 유난히 이성을 잃어버리는 라일의 뒷모습을 비서는 묘한 눈초리로 관찰했다.

“아.

그때 라일이 뭔가 잊었다는 뒤를 도는 바람에 비서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펜트하우스 쪽을 준비해 두라고 . 잠시 뒤에 보러 간다고.

“펜트하우스를요?

“그래. 진에게 주기로 했던 . 관리는 되어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펜트하우스는 해진이 저택에서의 3개월을 채워야 획득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비서는 군말 없이 연락을 넣으며 다시 상사의 뒤를 따라갔다. 산적한 일거리도 있었으나 비서는 최대한 일정을 미뤄 보려 애썼다. 또한 해진에게 마음이 쓰이는 사실이었으니까.

다소 성급한 걸음걸이로 라일은 주차장을 향해 갔다. 갑자기 펜트하우스를 준비하라는 충동적이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최근 식사 방식을 바꾼 뒤로 기분 전환을 위해 환경을 바꾸는 유효하다는 배웠기 때문이다.

걸음을 가볍게 하는 대체 무슨 기대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 라일은 바삐 걸었다. 해진이 있는 곳을 향해서.

***

휠체어에 앉은 해진은 어색하게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번듯한 건물에 들어서서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때까지도 어색함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특히나 휠체어를 밀고 있는 라일이라는 점이 어색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진단 결과 발목은 역시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고정해 필요가 있다고 해서 깁스를 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소리에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다.

어쨌든 목발까지 하나 받아서 나올 때까지 해진은 훌륭하게 버텨 내었다. 중간중간 어지러워서 토하고 싶은 기분이 이따금 들었으나 저번처럼 병원 입구만 보고 발작을 일으키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그가 진료받은 곳은 부모님이 계시던 곳과 분위기나 환경이 무척 달랐다.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다른 병원에 아닌지 의아할 정도였다.

완전히 다른 건물에 오가는 의료진도 없어서 의료 장비가 몸에 닿을 때만 긴장하면 되었다. 심지어 의사도 그를 배려한 것인지 하얀 가운을 입지 않았다.

피를 뽑기 위해 바늘을 꽂던 순간은 확실히 고역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결과를 모르고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버텼다. 다행스럽게도 해진에게 버거운 짐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나오자 라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깁스를 그를 보자 라일은 어쩐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설마 데리러 오기까지 줄은 몰랐기에 해진은 묘한 얼굴을 한참이나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당분간 다리를 쉬게 하는 좋다는 의사 소견을 마크가 전하니 그는 대뜸 휠체어를 구해 오도록 지시했다.

어쨌든 해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휠체어를 라일이 직접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거의 왔어.

“…….”

괜찮다면 잠깐 어디를 들르자고 하기에 해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저택에 가기 라일이 들러야 곳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차에서 저를 데리고 내리자 조금 당황하지 않을 없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이기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니 바로 현관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나왔다. 처음부터 인증을 통해 움직이는 보면 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엘리베이터인 같았다.

새삼 베르무스의 재력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해진은 휠체어에 기대었다. 그냥 발목이 아플 때도 거동이 편하진 않았는데 아예 깁스를 하는 바람에 더욱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재차 삼엄한 인증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광활한 내부가 들어왔다. 넓은 창으로 트인 도시의 풍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깔린 하얀 대리석과 곳곳을 장식한 고급스러운 가구가 잡지에나 나올 장소처럼 보였다.

해진은 심드렁하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어쩔 없이 시선이 가긴 하나 아직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때.

“……높네요.

대뜸 나오는 질문에 그는 어색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라일은 진짜 해진과 함께 공간에 볼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 반응에 라일은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는 깨달았다. 볼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을 고른 적당한 대답을 내놓는다.

“계약서에 명시된 펜트하우스가 여기야. , 네게 지급될 곳이지.

“……뭐라고요?

멍하니 휠체어에 기대어 있던 해진이 놀라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깔끔한 라일의 정장에 뒷머리가 까슬하게 스쳤다.

“계약의 대가로는 너무 과분한 곳입니다.

잠깐 동요하는 듯하던 해진이 이내 딱딱한 말투로 라일에게 말했다. 잠깐 그를 향했던 하얀 얼굴은 매정하게도 다시 앞으로 향했다.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면서 라일은 해진이 끝내 계약서를 끝까지 읽어 보지 않았다는 눈치챘다. 당시에도 해진은 제가 요구했던 조항이 쓰여 있는지만 확인하고는 서명했다.

조금 곤란한 기분이 라일은 입가를 매만졌다. 겨우 정도로 과분하다고 하는 해진이었다. 과연 계약서에 쓰인 다른 대가들을 본다면 무슨 소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간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가 껄끄러웠다. 물론 해진이 겪은 고난에는 마땅히 보상을 지급할 예정이었다. 다만 죄책감으로 이루어진 분명한 까슬한 감각이 자꾸만 안을 맴돌아서 문제였다.

결국 라일은 한숨을 내쉬듯 담담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인했으니 어쩔 없어.

“…….”

잠깐 그를 뒤돌아보았던 해진은 이제는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라일에게는 뒷모습이 멀게만 느껴진다.

제게 허락된 녀석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라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나타내듯 중량감 있는 페로몬이 느껴진다. 들어왔을 두리번거리던 해진의 시선은 이제 고집스럽게 무릎만 향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해진을 데리고 거실의 창가로 다가갔다. 계속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이 반사적으로 창밖을 향했다. 그의 저택에서는 없는, 아니, 웬만한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헤비레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눈에 담는 해진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와는 다르게 라일에게는 풍경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녀석의 옆모습만 라일은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병원은 정말 다리 때문에 권한 거야.

“네.

“억지로 임신 테스트를 받게 생각은 없었어.

“네.

아까부터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해진은 짤막한 대답 이상을 들려주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정말 라일의 말을 믿어서 그런 아니라는 , 그는 똑똑히 알았다. 그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리라. 애초에 해진은 라일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녀석이 끝내 읽지 않았던 계약서처럼 말이다.

그걸 알아차린 라일은 씁쓸하게 입매를 비트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49

깁스가 있으니 씻는 불편했다. 그러나 해진은 사용인들이 도움을 준다는 거부했다. 남자가 오메가라면 이런 부분이 애매해졌다. 베타인 이들에게는 같은 성별의 잣대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베타로 자라 해진은 한층 애매한 구분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힘들었다.

겨우 힘든 사투를 끝낸 그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리 한쪽이 깁스 때문에 묵직했다. 당분간은 병원을 오가야 한다고 했다. 벌써부터 그날이 걱정되어 큰일이었다.

그래도 저택을 걸어 나가려면 어쩔 없지.

애써 자신을 다독이던 그는 돌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다녀온 펜트하우스가 생각난 탓이다. 설마하니 그런 계약서에 있었을 줄이야.

고민하던 해진은 침실을 나가 옷방 쪽으로 향했다. 그가 목발을 짚어야 해서 침실에는 러그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계약서가 이쪽 어딘가에 놓여 있었던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 있네.

그의 낡은 트렁크 근처에서 계약서는 금방 발견되었다. 사용인이 멋대로 굴러다니는 놓아둔 듯했다. 서둘러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휙휙 페이지를 넘기자 그가 열어보지도 않았던 곳에 라일이 말한 것들이 쓰여 있었다.

역시나 아주 과한 보상들이.

“…….”

펜트하우스는 물론 건물의 소유권까지 양도하겠다고 쓰여 있는 글자들을 해진은 망연하게 읽고 읽었다. 외에도 지급되는 현금 또한 지나치게 많았다. 언젠가 라일이라면 그저 돈으로 모든 보상하는 어울리지 않은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걸 고스란히 적어 놓은 것만 같은 계약서였다.

그가 주저앉아 있던 모텔에 라일이 쳐들어오던 순간이 생각난다. 사납고 차가운 밤공기의 내음이 문득 해진을 덮치기라도 같았다. 이렇게나 많은 보상을 이미 놓고, 대체 해진에게는 건강해질 것을 조건으로 것일까.

대체 라일은 그에게 원하고 있기에.

계약서 위의 활자를 톡톡 두드리며 한참 살피던 해진은 이내 셈을 포기했다. 애초에 건물의 소유권 같은 그의 짧은 지식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가치였다. 라일의 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얼 바라든 저와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깊게 생각하지 말고 돌려주면 일이었다.

***

다음 아침, 어김없이 식사를 같이하자며 찾아온 라일에게 해진은 조용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건 .

“보상이 너무 과하더군요.

“…….”

라일은 계약서 대신 제게 곱게 다가온 해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제 펜트하우스를 보고 녀석이 내비친 반응으로 예상했던 바였다.

펜트하우스를 보여준 여러 가지 의도가 있었으나 가장 목적은 하나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계약이 진짜 지켜질 거라는 확연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도리어 역효과가 났던가.

라일은 애써 덤덤하게 계약서를 받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해진의 손을 끌어와 다시 쥐여 주었다.

짧게 맞닿은 피부가 왜인지 아쉽다.

“이런 필요 없습니다.

“진, 이미 사인해서 어쩔 없어.

“불편해요.

꿋꿋하게 제게 내민 손에는 고집이 묻어났다. 이건 해진의 원래 성격일까, 라일은 최근 많은 것이 궁금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릴 아는 이가 저택에서는 그토록 숨을 죽이고 살았을까.

“알아.

“…….”

덤덤하게 긍정하는 라일을 보며 해진은 끝내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불쾌함이 드러나는 미간을 새삼스럽게 관찰하면서 라일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는 어떻게든 보상들을 해진에게 쥐여 작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해진이 받은 피해는 마땅히 보상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해진이 라일이라는 수단 외에도 자립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만약 저택을 나간다면 거처할 곳도 없고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살아남기가 무척 버거울 테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해진이 고한 끝이라는 벽이 라일의 숨통을 조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시기가 올지 말지와 상관없이 해진이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 언제라도 고작 푼이 없어서 밥을 굶지 않도록.

제게 입은 피해가 분명한데도 모든 것들을 부담으로 느끼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있었다. 그저 라일이 그에게 보상한다는 행위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모든 부모의 목숨값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추측한 것들을 굳이 해진에게 읊어 주진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강제로 안겨 주는 거야. 편하라고.

“…….”

어차피 떨어질 곳이 없는 라일의 평판이었다. 애초에 이걸 안겨 주며 저를 용서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해진이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 있으면 해서.

“그러니까 너는, 없이 받으면 .

그걸 받으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며 말하는 라일의 얼굴을 해진은 오래도록 관찰했다.

이따금 이렇게 라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예전과는 너무 다른 행동을 하거나 너무 다른 표정을 지을 .

그리고 지금처럼 묵직한 페로몬을 저도 모르게 갈무리하지 못할 .

라일의 페로몬은 옅게 코끝을 맴돌고 사라지곤 했다. 느껴지는 페로몬만 놓고 따지면 우성답지 않은 미미한 존재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풀어져도 금방 깨닫고 스스로를 옥죄는 습관이 사람처럼.

잠깐 떠올랐던 불쾌함은 이내 익숙한 의문으로 바뀐다. 그러나 해진은 애써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침묵을 택했다.

이상해진 라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자고 분위기도 아니기에 라일은 그대로 출근하는 택했다.

본관에서 나와 안뜰을 지나며 그는 반사적으로 저택의 곳을 쳐다보았다. 해진의 창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안뜰을 지날 2층을 올려다보곤 했다. 해진은 그날처럼 창밖을 내려다보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창문을 없도록 라일이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녀석이 창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일은 당연히 없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그곳을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렇듯 해진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아마 보상도 끝까지 받지 않을 작정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새로운 방안을 세워 봐야 하겠지. 이토록 무언가를 깊게 고민해 라일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생각을 거듭할수록 무언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그를 잠식했다.

녀석이 어딜 가도 부족함이 없게끔 계속해서 무언가를 안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녀석이 언젠가는 저택을 나갈 거라 생각하면 절벽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라일은 자신이 대체 해진을 놓아줄 준비를 하는지, 잡을 준비를 하는지 헷갈렸다.

***

“전 분기 대비 매출 실적 보고를 준비 중입니다. 이르면 다음 주에 받아 보실 있을 듯합니다.

“저번처럼 엉터리로 올려 보내면 당장 반려시켜.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으면 내려갈 준비 하라고도 전하고.

가족 기업답게 베르무스의 성을 사람들은 계열사에 적당히 포진해 있었다. 라일의 눈에는 마땅찮은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전부 배척하지는 않았다. 열다섯의 나이에 후계 전쟁에 뛰어든 라일은 험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중 가장 빠르게 치고 올라갈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들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방법도 같이 썼다. 마치 조금 수그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그들에게 기회가 것이라 착각할 있도록.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것인 함부로 구는 꼴을 없었다. 특히나 저번에 멋대로 찾아왔던 다니엘 숙부 쪽은 특히나 엉망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참고 봐줄 있을지, 그는 적당한 시기를 재고 있었다.

“네. 다음은 해고된 사용인들과 관련해 지시하신 일에 대한 보고입니다.

“말해.

“적당한 국선 변호사가 배정될 있도록 힘을 썼습니다. 아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집사는 볼만한 꼴로 로펌을 전전했다고 들었다. 가뜩이나 저택에서의 일도 문제인데 배우자로부터 이혼장도 받았다고 했다. 불법 약물 따위를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정식 소송도 시작되지 않은 혐의를 슬쩍 알리도록 라일이었다.

“몇몇 피고인은 변호 자체를 포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으니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죗값을 줄여 보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없지. 충동질을 있을 만한 주변 인맥을 조사해.

“네. 그건 시일이 조금 걸립니다.

“상관없어.

비서는 묵묵히 받은 명령을 태블릿에 정리했다. 한번 복수를 결심한 베르무스의 저력은 무시무시했다. 덕분에 비서의 일거리가 무척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조만간 일을 도와줄 인선을 보충해야겠다고 계획했다. 그때 한참 서류를 보며 고심하던 라일이 물었다.

“진은 하고 있지?

어느 순간부터 라일은 질문을 무척 자주 했다. 덕분에 해진의 근황은 비서의 업무 중요도 최상단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슬쩍 아까 파악해 소식을 확인한 비서는 즉시 보고했다.

“신문을 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음?

자신이 녀석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나오는 바람에 밥을 먹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서류를 처리하는 내내 자연스럽게 하얀 여백을 차지하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계속 눈에 밟힌다.

그런데 뜬금없는 소식에 라일은 의아함을 나타내었다.

              

#50

말을 꺼낸 비서 또한 의아하다는 눈치라서 도움은 되지 않았다.

“……혹시 무료하신 아닐까요. 아시다시피 저택은 만한 것이 많은 곳은 아니니까요.

“아.

그의 말이 정답인 것도 같았다. 저택에도 물론 TV 따위의 물건들이 빠짐없이 비치되어 있긴 했다. 그런데 해진의 성격상 그런 찾아다니며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응접실에 의례적으로 놓인 신문을 집어 아닐까.

해진에게 조금씩 주변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긴 같아서 문득 가슴이 간지러웠다.

***

그날 저녁 라일은 퇴근을 서둘렀다.

회사를 운영한 이래 번도 저택에 돌아가는 시간을 기다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곳에 해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미리 연락해 두었기에 응접실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을 울리자 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시간 되나? 어디를 같이 갔으면 하는데.

“……어디를요?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해진의 얼굴에는 대번 경계가 어렸다. 덕분에 라일은 다시금 찬물을 뒤집어쓴 같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실례했군. 서재를 안내하고 싶어서. 마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시간이 무료하다지.

“아.

그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해진은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난 5년간 있었던 일을 습관적으로 떠올린 탓이다.

낮에 정말이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낡은 핸드폰으로는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평소라면 침대에 묻혀 흘러가는 우울을 잡기 바빴지만 조금씩 무료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성공적으로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그가 조금 단단해지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어쨌든 오늘만 같은 신문을 번이나 읽었던 해진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생각인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라일이 눈에 들어온 그때였다.

“좋아요.

“……휠체어를 준비해 올게.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라일은 어쩐지 한층 굳은 얼굴을 했다. 해진은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여기야.

“…….”

서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가 머무르는 방에서 복도를 따라가다가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해진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휠체어까지 가져오기에 무척이나 곳에 있는 알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빛을 무어라 이해했는지 라일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그에게 물었다.

“혹시 너무 볼품없나? 다른 서재로 가도 되긴 하지만 여기가 제일 가까워서.

“…….”

“그쪽은 계단도 지나야 해서 힘들 같은데. 조금만 시간을 주면 가까운 곳에 서재를 새로…….

“아니요.

라일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에 해진은 그냥 서재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재는 볼품없다는 말이 실례일 정도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쪽 복도로는 번도 적이 없었기에 여기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사실 해진은 본관 한가운데에 누군가 그를 떨어트리고 간다면 길을 잃을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외관이야 5년이나 지내며 알게 모르게 다닐 수밖에 없었으나 본관 쪽은 금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냄새라 해진은 조금 풀썩이는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원래 해진은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부모님께 보답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긴 했으나 그냥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즐겼다. 결핍으로 이루어진 어린 시절엔 지식으로 저를 채우는 것으로 포만감을 느끼려 애썼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은 해진의 버킷리스트 하나였다.

전부 지나간 일이지만.

잠깐 설레었던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해진은 떨어진 마음을 개의치 않고 천천히 서재 안을 눈에 담았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에 있는 책은 전부 마음껏 봐도 .

“네. ……감사합니다.

“…….”

뜻밖의 인사에 라일은 순간 말을 잃었다. 대신 그는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 한가운데 아늑하게 생긴 소파가 있었다. 이곳에서 바로 책을 보기도 좋은 구조였다.

“책 목록은 여기 들어 있으니까, 검색하기 편할 거야.

“아…….

“책은 마크에게 부탁해서 꺼내 달라고 하도록 . 올라가면 위험하니까.

다리가 아픈데 책을 어떻게 찾아다니지, 고민하던 해진은 뜻밖의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서재에는 태블릿이 놀라울 정도로 어울렸다.

저택에 얼마 되지 않았을 , 라일의 비서가 태블릿을 들고 다니는 것도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학에 합격하면 준다고 했던 같은 기종이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해진은 탁자에 놓인 태블릿을 손에 들었다. 그가 성인이 되기 직전 겪은 발현열이 끝나고 얼마 ,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해진은 그걸 외식하러 나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렇게 개봉했던 태블릿은 사고가 나면서 그의 발목과 함께 박살이 버렸다.

그때와는 외양이 조금 다른 물건 같았다. 하긴 시간이 그렇게 지났으니 새로운 기종이 나올 때가 되었으리라. 마음은 계속 발치에 굴러다녔지만, 해진은 천천히 태블릿을 자세히 관찰했다.

“…….”

옆에 앉아 있던 라일은 그런 해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짝이는 검은 눈은 밤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신기하다는 손에 태블릿을 이것저것 눌러 보는 모습이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비로소 해진이 나이로 보였다.

분홍빛 도는 녀석의 손끝을, 조금 상기된 볼을 핥듯이 바라보던 라일은 멍하니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제 해진은 밥을 곧잘 챙겨 먹었다. 아직 하루의 대부분을 침실에서 보내곤 했으나 종종 산책을 권유하면 의욕을 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오늘만 해도 서재에 가자는 소리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라일은 아주 조금 한숨 돌릴 있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한 상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있을 만큼은 말이다.

자신은 해진의 어두운 표정 하나에 이리도 심장이 옥죄는지. 고작 뜨고 상을 물리는 녀석의 마른 손목은 그리 신경 쓰이는지.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리 많은 주고 싶은지.

라일은 비로소 무척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하는 건가?

신중하게 태블릿을 이리저리 만지던 해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침실에는 그렇듯 혼자뿐이었다. 허공에 흘러간 목소리가 조금 머쓱한 기분을 주었다. 잠깐 쪽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태블릿의 화면에 집중했다.

서재를 안내받은 며칠, 다시 지루한 일상이 지나갔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오던 라일은 일이 바쁜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누군가와 같이 아침을 먹는 일상이 되었다는 그제야 깨달았다.

깨달음은 씁쓸한 맛이었다. 그래도 이내 괜찮아질 있었다. 어차피 편한 시간은 아니었기에 해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라일은 어느 불쑥 찾아와 태블릿을 내밀고 갔다.

아무래도 서재에서 너무 오래도록 만지작거린 원인인 같았다. 신기해서 그런 사실이었으나 라일이 신경 주길 바란 아니었기에 부담스러웠다.

얼떨결에 받아 기계를 해진은 하루 넘게 그냥 응접실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다시 무료한 나날이 시작되니 없이 눈길이 갔다.

호기심이 정말이지 아주 오랜만에 내면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어차피 받은 것인데 깨끗하게 쓰다가 여기 두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충동적으로 포장을 뜯고 이것저것 건드리다 보니 시간이 아주 갔다. 자신의 낡은 핸드폰으로는 하기 힘들던 인터넷도 빨랐다. 어느새 해진은 홀린 태블릿에 빠져들었다. 처음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던 날처럼.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중간에 마크가 잠깐 다녀간 같은데 너무 몰두했나 싶어서 이제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휴…….

자꾸 이렇게 저택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해진은 자신을 죽이고 숙여서 없는 있다가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살아난 호기심이 자꾸 그의 의지를 톡톡 건드렸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조금쯤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묘한 반발심이 드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보느라 휴대폰을 들었던 해진은 무심코 날짜를 살폈다. 얼마 전에 살펴본 것처럼 이제 뒤면 계약은 끝이다.

순간 묘한 불안함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해진은 덤덤하게 태블릿의 화면을 끄며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가 쓸데없는 여유를 찾는 바람에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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