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rain Chapters 21-30

#21

들고 있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라일이 해진을 향해 매섭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관리를 똑바로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번을 지적해야 문제로 거슬리지 않을지, 문득 짜증이 났다. 라일의 근처에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가 이상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기에 그런 이들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해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라일은 미묘하게 납득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번에 해진을 데려온 순간 어느 정도는 해진의 중요성을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걸 믿고 저리 구는 걸까.

“음식 투정을 얼마나 생각이야. 적당히 하고 제대로 챙겨 먹도록.

“음식 투정이요?

덤덤히 되묻는 얼굴이 더욱 짜증을 부채질한다. 계약서를 들고 의사를 물을 때도 원하는 하나 말하지 않던 해진이었다. 분명 집사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으리라고 라일은 지레짐작했다.

“그래. 저번 계약 때처럼 까다롭게 굴지 말고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집사에게 말해. 고향의 음식이든 뭐든.

해진은 피곤해서 제때 트레이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음식 투정으로 비춰질 있다는 처음 알았다. 오래도록 굶을 쓴물이 올라오는 감각이 그의 속을 치고 갔다. 원래도 입맛이 없어서 아침을 거를 생각이었으나 이걸로 더욱 식욕이 사라진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밥을 먹는 정도로 허한 속을 달랠 없다는 안다. 그러니 받지도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킬 필요는 없었다.

어처구니가 조금 없었으나 화가 나진 않았다. 분연히 올라오려던 감정은 이내 기운이 없어 쓰러지듯 파스스 흩어졌으니까.

다만 물끄러미 라일의 빛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민했을 뿐이다. 집사가 하던 짓을 하던 그가 명령해서였구나.

집사의 행동과 라일의 말이 어쩌다 겹친 우연이라는 모르는 해진은 작은 오해의 싹을 틔웠다. 그간 라일이 자신에게 아예 무관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해진이 어떻게 방치당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검은 머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해진이 외국인일 거란 착각을 많이 한다. 흔하지 않은 외양이니 어쩔 없다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신상 명세를 해진보다도 자세히 보고 받았을 라일이 이런 말을 하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어설픈 무관심처럼.

거북한 냄새가 올라오던 음식 트레이가 생각났다. 불쾌하게 덕지덕지 묻어 있던 집사의 페로몬도. 그건 해진에게 호의보다는 그저 무관심으로 만들어진 폭력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받아서 억지로 삼켰어야 했단 말인가. 고작 자신이 까다롭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뭐야.

눈길을 받으며 라일은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녀석이 그저 고요하게 라일을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뱉었으니 뭐라도 반응이 돌아왔어야 정상인데.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한 해진의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초조한 조바심이 불쑥 올라왔다. 아까 마신 커피가 아니라 각성제라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녀석이 끔찍하리만큼 비어 있어서 어쩐지 아득하게 추락할 같았다.

“제 고향은 도시입니다. 베르무스 .

모처럼 날씨가 좋으니 일부러 창문을 열었으리라. 그러나 해진은 미련 없이 창문을 닫고 이내 커튼까지 닫아 버렸다. 행여 조금의 시선이라도 라일에게 닿지 않도록.

꽁꽁 싸맨 창문을 보며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명백한 거부감이 사이의 거리를 넘어 넘실넘실 느껴졌다.

갑자기 화창하던 하늘이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다.

***

녘이 되어서야 라일은 서재로 돌아왔다. 오래 그곳에 머물렀지만, 해진의 창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커튼까지 빈틈없이 두른 해진의 방은 멀리서 저택을 봤을 무척 눈에 띄었다. 맑은 하늘을 맞이해 투명한 창들이 즐비한 저택 한가운데, 홀로 점이라도 찍은 신경 거슬리게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의 저택인데 저리도 불편한 티를 내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괜한 오기로 라일은 점심까지 자리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돌아온 서재에서 라일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다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 해진에 관련된 서류가 있는 자리였다.

“……고향이 정말 이곳이었군.

검은 머리를 보고 해외에서 입양이라도 알았는데 해진은 처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는 있었다. 분명 이전에도 검토했던 서류였으나 솔직히 순간까지 잊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정보였으니까.

차라리 그의 오해에 기분 나쁜 티를 냈으면 나았을까. 무미건조하게 고향이 여기라고 말하고 사라지는 해진의 잔상은 귀찮게도 오래 그의 머릿속을 머물렀다.

그때 집사가 그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라일의 짧은 허락에 들어온 그는 정중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그때까지 해진의 사진이 박힌 서류를 보던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점을 물었다.

“진은 식사했나?

“아, 그것이…….

집사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곤 한참 생각을 거듭하고 나서야 대답을 꺼내두었다.

“아침부터 거르신 걸로 압니다.

다시 , 라일의 눈앞에 까슬까슬한 감각이 돌아다녔다. 추측으로 말하는 집사의 말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해진이 끝내 빌어먹을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역할을 똑똑히 일러두지 않았던가.

서슬 퍼런 그의 음성에 집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무척 억울하다는 투로 항변했다.

“제가 브라이트 씨의 고향 음식까지 준비해 갔으나 입도 대지 않고 밖으로 내치셨습니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톡톡 까끌까끌하던 감촉은 집사의 말에 금방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집사는 나름대로 손님 대접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뻔하지 않은가.

서류철의 글자를 훑던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곤 집사에게 새로운 정보를 던져 주었다. 또한 방금 알게 것들을.

“진은 이곳 출신이니 그냥 평범한 음식을 준비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불쾌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집사가 보지도 못한 음식만 계속 가져다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해진의 마른 몸은 그저 마디로 변명할 있을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성가신 문제를 앞두고 해답이 없어서 라일은 다소 거친 손길로 해진에 관한 서류를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

“무슨 일이시죠.

오늘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해진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챙겨 먹었다. 라일이 자꾸 지적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도 무작정 몸만 학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들어오는 트레이를 거르지 않고 적게나마 먹긴 했다.

지금까지 누워 있었으나 아예 잠들 준비를 하려고 몸을 씻고 나왔을 때였다. 무척 수상하게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사용인 하나와 마주친 .

“아……, 잠깐 청소를.

“청소는 아까 거로 아는데요.

사용인의 품에는 빳빳한 옷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걸어 나오던 곳은 응접실에 연결된 방이었다.

“흠흠. 청소입니다.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빤히 보면서도 사용인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어째 방에 옷이 제대로 가득 찼다 했더니 도로 가져갈 작정이었나 보다. 만사가 귀찮아진 해진은 그냥 몸을 돌려 침실로 사라졌다. 침실 문은 잠그고 자야지, 여상히 생각하면서.

“씨발, 더럽게 눈치 주네.

뒤통수를 향해 작게 소곤거리는 말은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그의 물건도 아닌데 가져가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

그런대로 흐린 아침,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해진은 저택 밖을 향해 걸었다.

다리 문제로 병원에 가야 한다는데 정작 넓은 저택을 걷느라 다리가 상할 같은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러나 애초에 병원 예약조차 의지로 잡은 없는 해진은 그저 비서가 보낸 사람에게 이끌려서 저택 현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번에야 눈을 뜨니 병원이었으나 사실 해진은 발로 병원을 찾아가는 내키지는 않았다. 특히나 곳까지 가서 이제는 없는 것들을 상기해야 하는 순간이 끔찍했다.

그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짜증 나는지 비서의 말을 전하러 사용인은 자꾸만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고작 눈길이 무섭다고 다리를 혹사하는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결국 해진은 묵묵히 느릿한 걸음을 고수해야 했다.

다만 차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고 나니 결정이 못내 후회되었다. 하필이면 라일의 출근 시간과 겹쳤는지 멀리서도 그의 화려한 금발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

사용인들이 저택 앞에서 질서 있게 움직이는 순간 해진은 걸음을 돌렸다. 구석진 곳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라일이 떠나면 앞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그를 안내하던 이는 여기까지 왔으니 일은 끝났다며 바쁘게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해진이 뒤를 도는 순간 거짓말처럼 라일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혼자 저택의 어두운 곳으로 느릿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라일은 다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택 사람의 대부분이 이쪽에 몰린 이때, 해진이 홀로 구석진 곳으로 향하고 있어서.

              

#22

옆에서 그에게 일정 보고를 하던 비서가 놀라서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을 보는 순간 라일은 본능적으로 일단 잡아야 한다고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이미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해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챈 다음이었다.

“아……!

“어딜 가는 거지.

형언할 없는 불쾌한 감정이 라일을 조종했다. 일단 거칠게 윽박지르고 나서야 어처구니없다는 해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무언가 오해했다는 깨달은 동시에, 라일은 행동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인식했다.

“브라이트 .

재빨리 따라붙은 비서가 일단 해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서의 오묘한 시선은 라일이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해진의 팔로 향했다.

“회장님. 브라이트 씨를 같이 모실까요?

분위기를 파악하던 그는 눈치껏 물었다. 일전에도 해진의 병원이 동선에 포함되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던 라일이니까.

“……어딜?

“오늘 병원 진료가 있으십니다. 제가 차를 준비할 테니 이쪽으로 주십사 아침에 사람을 보냈고요.

유능한 비서답게 그는 적절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건넬 알았다. 제가 무언가 오해했다는 깨달은 라일은 곤란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마주 보고 있던 해진의 무심한 시선이 아직 그를 붙잡고 있는 팔로 떨어지고 나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시선에 무게가 있는 것처럼 그의 손도 저절로 떨어졌다. 꼴이 이상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곤 됐다는 소리와 함께 물러나려고 했을 때였다.

“전 괜찮습니다.

해진은 잡혀 있던 팔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순간적으로 커튼 뒤로 사라지는 녀석의 잔상이 떠오른다. 지금은 대놓고 거부감을 나타내는 페로몬까지 내보내고 있어서 한층 그를 자극한다.

그날 기어코 식사를 거르다니.

“같이 가도록 하지.

“…….”

오기로 짜증을 담은 대답을 하니 해진의 눈빛에 금방 불만이 깃들었다. 눈동자로 세상 것처럼 때와는 다른 감각이 라일을 침범했다.

“가시죠.

적절하게 끼어든 비서가 한쪽을 가리키며 해진을 쳐다보았다. 차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저택 사용인들의 시선이 찌를 그를 향한다.

거북한 시선을 몸에 받으며 해진은 라일의 차에 올라타야 했다. 그랬듯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을 테니.

***

소리 없는 한숨을 쉬는 해진을 라일은 거의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차를 순간부터 녀석은 줄곧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거부감이 역력한 페로몬이 흘러 다닌다. 짜증스러울 정도로 라일에게 보란 듯이 감정을 내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폐가 막힌 답답하기만 했다. 진한 페로몬을 지적하려고 라일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라일의 머리를 스쳤다.

해진의 페로몬이 이렇게 진했던가?

애초에 해진이 그의 저택에 오래 머물렀던 페로몬이 선천적으로 무척 옅었기 때문이다. 열성 오메가 중에서도 늦게 발현한 덕에 해진은 페로몬의 자체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저렇게 페로몬 조절이 미숙한데도 라일의 신경을 여태 거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강해진 존재감에 라일은 인상을 썼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점점 진해지는 페로몬이 폐를 점령할 굴었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탓에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왜인지 낡은 재킷을 입은 채였다.

계절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라일은 취급하지도 않는 싸구려인 것을 보니 직접 가져온 옷이리라. 심지어 바짓단은 살짝 짧은 앙상한 발목을 내보이고 있었다.

녀석의 페로몬에 잠식되며 천천히 꼴을 관찰한 라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 창문을 닫았을 때처럼 반항심이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금 시위라도 하는 건가.

“일부러 지급된 옷은 피하는 건가?

불만을 가질 만한 상황이라는 라일도 알았다.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선연한 거부감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거슬리기 시작했으니까.

뜬금없는 말에 멍하니 창밖을 보던 해진이 고개를 돌렸다. 라일이 무척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지적한 처음이라 의외이긴 하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안타깝게도 이제 해진에게는 그의 비위를 맞춰야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물건은 아니니까요.

여실히 벽이 느껴지는 페로몬은 한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그에게 전했다.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라일이 삐딱해지는 순식간이었다.

계약서에 있던 대가에 눈길도 주지 않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주는 뭐든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지급했으면 것이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도 부리는 건가?

“……자존심. 그럴 리가요.

헛소리나 다름없는 라일의 말에 해진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라고 만한 것이 해진에게 남아 있을까. 그에게 지금 남은 그저 안간힘뿐이었다. 적어도 저택에서 다시 쓰러지지 말고 발로 나가자는 미약한 오기 정도.

해진이라고 청승맞게 이런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사용인의 도둑질을 무시한 날부터 옷장은 점점 비어 갔다. 급기야 오늘 아침에는 계절에 맞는 두꺼운 옷은 전부 사라졌을 만큼 말이다.

집사가 애써 그에게 웃으며 다가왔을 무시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걸까, 아니면 또한 라일의 묵인일까.

“그게 바로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거지. 주는 입어.

그가 사정을 알든 모르든 해진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해진이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고자질 따위를 해서 무언가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진은 예전부터 이어진 계약 위반 사항을 라일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려고 했던 순간 좌절되었던 경험도 그를 매번 주저앉혔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라일이 입을 다물어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쩔 없이 해진은 덤덤하게 상황을 알려주었다.

“옷장에 입을 만한 없더군요.

사정을 모르는 라일은 순간에도 해진이 그저 그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집사에게 일러 직접 해진의 방을 채우라고 말한 얼마 전이었다. 그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소리를 해진이 입에 담으니 아까 떠올린 반항심만 머릿속을 맴돈다.

특히나 해진이 저렇게 강한 거부의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왜. 이번엔 만한 옷이 없었나?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해진에게 물었다. 마침 집사가 해진이 제가 지급한 것들을 팔아 치우곤 했다는 사실까지 들었으니까 말이다.

생활비도 없이 어떻게 지냈나 싶었는데 해답이 보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긴 아무리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힘들지 않았겠는가. 통장 잔고가 모양이었던 떠올리면 그마저도 시원찮은 수완이었던 분명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전에 지급한 옷들도 팔아 치웠다고 들었어. , 사정이 있었으니 이해 하는 바는 아니야.

“그런 없습니다만.

애써 그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으나 무덤덤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는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한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해진을 다그쳤다. 대체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단 말인가.

“귀찮게 자존심을 세우는군. 눈감아 테니 알량한 변명은 집어치워.

말을 꺼내 놓고 나서야 라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무시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진이 서러운 얼굴이라도 내보인다면 일이 거추장스러워질 뻔했다. 누군가를 달래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는 거북했다. 역시 계약서 조항에 언제든 그만둘 있다는 말은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창밖으로 돌아가려던 해진의 시선은 라일에게 똑바로 날아들었다. 다만 한없이 비어서 속에 빗물까지 담아낼 듯한 얼굴로.

갑자기 어느 날엔가 느꼈던 갈증이 그를 엄습했다. 거북하고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몰린 라일은 해진을 자극하는 쪽을 택했다. 차라리 녀석이 화를 내는 편이 낫겠다고 무심코 생각하면서.

“더 변명하고 싶나?

아까부터 이해할 없는 역정을 내는 라일을 보면서 해진은 생각에 잠겼다.

집사를 시켜 이상한 음식을 보낼 때도 느꼈으나, 라일은 해진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명했다. 그가 식사를 한다거나 옷이 부족했다는 정도는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라일은 기껏 해진이 진실을 입에 담아도 들을 의지가 없었다.

애초에 해진보다는 오래도록 그에게 충성한 집사의 말을 믿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진도 그건 알았다.

그렇다면 집사가 이렇게 해진에게 모질게 굴도록 만든 누구일까.

해진은 정말이지 라일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원망이라는 감정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지금의 종잇장 같은 해진이 들기엔 버거웠다. 그러니 라일이 그저 철저하게 무관심해서 저를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놓아주길 바란다.

지금 당장은 왜인지 편리한 해진을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그가 무조건 감내하던 예전과는 다르다는 깨달아 주기를 바란다. 다시 보니 마냥 편리하지만은 않다며 자연스럽게 계약도 끝내 주기를.

              

#23

그러나 자꾸만 모진 말로 기껏 잊으려는 상처를 헤집는 라일에게, 해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용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정말 라일의 탓이 아닐까?

“저택에서의 대우는, 직접 집사에게 그렇게 명령하신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해진은 입으로 비참한 행로를 다시 짚어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일일이 언급한다고 한들 과연 라일이 믿어 줄지 의문이다. 당장 해진이 옷가지를 내다 따윈 없다는 말도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가 조금이라도 의지가 있다면 질문에 번이라도 생각해 터다. 그의 서러움을 돌아볼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해진은 오히려 말을 뱉으면서 점점 기대를 죽여 나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애초에 라일이 해진을 이해하겠다고 과거를 들추는 따위, 리가 없지 않은가.

“지난 5년간의 생활도요.

“그래.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지듯 옅었다.

뜬금없는 소리를 뱉은 해진은 그대로 창밖으로 고요히 시선을 돌렸다. 거부감을 내뿜던 페로몬은 언제 그랬냐는 죽어 버렸다.

그러나 잔잔해진 안의 공기를 호흡하며 라일은 한층 숨이 막히는 느꼈다. 오히려 존재감 없는 페로몬이 그에게 벽을 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러는 거지.

때마침 차가 병원 앞에 들어섰다. 기사가 덤덤히 도착을 알리고 나서야 라일은 정신을 차렸다. 자꾸만 비이성적인 행동이 늘어나는 것이, 머리가 고장이라도 듯싶었다.

밖에는 비서에게 미리 연락받은 경호원이 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볼일이 끝나면 해진을 저택으로 다시 데리고 것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무표정하게 문을 열고 내리는 해진의 팔을 무심코 움켜쥐고 말았다.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

“…….”

녀석의 시선은 잡힌 팔을 봤다가 밖의 경호원으로 향했다. 라일이 조치를 직접 보란 듯이.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순순히 해진을 놔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녀석은 인사 한마디 없이 내려 병원으로 향했다.

뒷모습을 라일은 홀린 지켜보았다. 해진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어색했다. 바짓단은 여전히 발목이 드러나 시린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어색한 걸음걸이처럼 라일은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이제는 해진이 옷을 팔아 치울 이유가 없을 텐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해진은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넥타이가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

“아, 글쎄. 일부러 미적대더라니까.

“왜?

“앞에 주인님이 출근 중이신 어찌 알고, 마주치려고 발악하는 거지.

“더럽다 정말. 그렇게 벌고 싶을까.

꺄르르 울리는 웃음소리에 맞게 험한 말이 오갔다. 본관 안쪽 뜰을 다듬는 사용인들의 대화 소리가 지나치게 들렸다. 머리 바로 위에 해진의 방이 있다는 , 저들이 과연 모를까.

“기어코 주인님 차도 얻어 타고 말이야. 갑자기 그만두더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혹시 노리나. 열성 주제에.

“어이없다, 정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 당장 해진이 고개를 내밀어도 과연 험담을 그만둘지도 의문이다.

맥없이 침대에 늘어져서 대화를 듣던 해진은 그저 반대로 돌아누웠다. 희미하게 보이던 밖의 풍경마저 사라지고 대신 삭막한 내부가 시야에 가득 찼다.

며칠 라일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느꼈던 희미한 분노조차 흔적 없이 사라진 오래였다. 그날 검진 결과를 들은 뒤부터 해진은 도무지 기운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평생 제대로 걸을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셔야겠군요.

정처 없이 떠돈 뒤에도 관리를 소홀하게 탓일까. 의사는 무심히 뒤에 버티고 있는 경호원을 한번 바라보고는 발목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본래라면 사고 수술을 받자마자 꾸준한 물리치료로 관리해 줬어야 했다. 그러나 해진은 목발을 짚은 부모님을 살릴 돈을 빌리러 돌아다녀야 했다. 당연히 다리는 뒷전이었다.

분명 어쩔 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진단을 들으니 기분이 푹푹 땅으로 꺼지기만 했다. 이런 젊은 나이에 다리까지 말썽이라니. 앞으로는 정말 노동으로는 먹고살지 못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진은 병원에 대한 거부감만 한층 뚜렷하게 간직한 돌아와야 했다. 경호원이 그를 감시하며 저택으로 인도하는 것이 차라리 달가울 정도였다. 진료를 마치고 나와 병원 냄새를 맡는 순간 해진은 정말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가족들이 없으니 자신이 한없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심정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애초에 고아였던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가족들이다. 부모님은 해진의 이런 생각을 매번 엄하게 나무라셨다. 그는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면서.

그런데 그런 부모님은 이제 없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치게 우울한 감정이 해진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이게 전부 비이성적인 감상인 깨달았으나 그뿐이다. 정작 상태를 벗어나야겠다는 의욕은 솟아나질 않았다.

앞으로 트레이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모양이었다.

집사가 분노로 점철된 페로몬을 흩뿌리고 다음에는 여느 때처럼 해진의 방문 앞에 성의 없이 트레이가 놓이곤 했다.

거칠게 앞에 놓이는 음식 트레이 소리에 해진은 기운 없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 빨리 가져오지 않으면 음식이 사라질 텐데.

“…….”

오늘은 특히나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식사 시간을 놓쳤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이미 음식이 사라졌을 뻔해서 해진은 문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며칠간, 점점 늦어지던 기상 시간은 급기야 오후 늦은 시간까지 미뤄지고 말았다. 점심조차 지난 시간에 눈을 버린 것이다. 침대는 모래 늪이라도 같이 해진을 빨아들였다. 흐린 하늘은 오후인지 아침인지도 불분명해서 시간을 보고 새벽녘으로 착각할 뻔했다.

배가 고프니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거다. 해진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흘러가는 빗물처럼 덧없다는 알고 있다는 듯이.

속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것처럼 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식욕은 전혀 없어서 그의 안에 기묘한 뒤틀림을 만들어 냈다.

무거운 기분을 관조하던 해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자도 자도 잠이 왔다.

***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퇴근한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려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그는 여전히 바빴고 친척들은 틈을 계속 노렸으며 사회가 그에게 무거운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한결같았다.

그리고 해진은 잠잠했다.

라일에게 그간 생긴 변화는 가지였다. 이따금 해진을 떠올린다는 . 물론 한없이 거슬린다는 감정이 주로 들었다. 애써 잔상같이 떠오르는 얼굴은 억지로 밀어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꿈을 꾸지 않았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라일은 생각했다. 머리는 슬슬 다시 무거워져 조만간 페로몬 해소를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

본관에 들어서 늦은 시간에 트레이를 치우는 사용인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리 생각했다.

“거기.

“네, 주인님.

“그건 뭐지?

“아……, 브라이트 방에서 치우는 중입니다.

본관에서 식사를 만한 인물은 지금 해진과 그밖에 없다. 그러니 음식 트레이를 보고 해진을 떠올린 당연했다.

그런데 사용인이 트레이를 치우는 시간이 묘하게 거슬렸다. 뚜벅뚜벅 사용인이 쥐고 있는 트레이 앞까지 다가간 라일은, 지체 없이 음식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었다.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환하게 밝혀 복도 조명 아래 드러난다.

“진에게 갔던 음식이라고?

“네, 주인님.

사용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먹을 만한 음식들이 아니다. 신경 듯한 플레이팅까지 라일이 보기엔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런데 , 음식을 걸렀다고.

묵묵히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라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가던 그의 쪽이 아니라 해진이 묵고 있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뚜벅이는 발걸음 소리는 걸음마다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차에서 쓴소리 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그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유효했다. 라일은 도무지 해진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배길 상태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적당히 불쾌한 기분으로 해진의 앞에 도착한 라일은 그만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의 앞에 아침부터 쌓인 트레이가 개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여실히 알려주면서.

그걸 깨닫자마자 라일은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앙상한 해진의 발목이,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던 같은 것이 제멋대로 그의 머릿속을 떠다닌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 문에 거칠게 노크를 해도 안쪽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용인들의 방문도 이런 식으로 거절한 거겠지.

“진, 열어.

그가 소리 말을 하고 나서야 안쪽에서는 미약한 소음이 났다. 다리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달칵 문이 열린다. 소리를 보니 방문도 잠가 두었던 분명하다.

“……베르무스 .

“몸 관리를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하는 짓이지?

              

#24

자다 일어난 해진은 대뜸 찾아와 늦은 관리를 운운하는 그를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라일의 서슬 퍼런 시선을 따라가자 밖에 놓인 트레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남아 있지……?

비몽사몽간에 해진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제때 먹지 않으면 사라지는 아니었던가.

그러나 해진의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감정을 주체할 없었다. 대체 얼마나 까다롭게 굴고 싶은 걸까. 갈수록 야위어 가는 뺨을 보니 이런 감정은 더욱 거세지기만 한다.

녀석이 방어하듯 잡은 방문을 밀치며 라일은 안으로 들어갔다.

“억지로 데려왔다고, 지금 시위라도 하는 건가? 저택에서 굶어 죽기라도 기세군.

“……그냥 조금 식욕이 없어서 그랬을 뿐입니다.

“식욕이 없다고?

“네. ……계약엔 문제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시죠.

단지 식욕이 없다기엔 그간 라일이 보아 증거가 너무 많았다. 방문 앞에 쌓인 음식들까지 버린 이상 그는 이런 해진의 상태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사실 녀석이 굶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이리도 벽을 치는데 라일도 같이 무시하면 일이었다. 몸을 섞을 조금 거슬리는 정도지 이렇게 찾아와서 끼니를 챙기라는 소리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해진이 갈수록 여위어 가는 꼴을 때마다 라일은 기이한 갈급함에 시달려야 했다.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기라도 것처럼.

페로몬이 머리끝까지 쌓여서 뇌를 돌게 만드는 분명하다.

“그럼 기다려 필요는 없겠군.

“……네?

“당장 준비해. 페로몬 해소를 해야겠어.

***

“자, 잠깐, 차라리 먼저 가서 준비를…….

당황한 건지 아주 오랜만에 고저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도 라일은 도무지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 어찌나 앙상한지 손바닥으로도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진이 몸을 뒤틀 때마다 툭툭 불거진 손목뼈가 손아귀에서 날뛰었다. 그러면 라일의 심정도 덩달아 거세게 날뛰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걸음을 때마다 심장이 덩달아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하고 초조한 느낌.

전부 페로몬 탓이다. 체증이 심각한데 해진마저 거슬리게 구니 참을성이 바닥난 분명했다. 이럴 알았으면 괜한 아량으로 기다려 주겠다는 다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닥쳐.

서슬 퍼런 음성에 해진은 곤혹스럽게 이마를 찡그렸다. 어찌나 손아귀 힘이 거센지 체중을 실어 버텨 봐도 몸이 질질 끌려갔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이게 무슨 봉변인지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밥을 거른 이리도 화를 일인가. 그러다 이내 라일에게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페로몬이 그를 덮쳤다.

, 페로몬이 쌓여서 예민한 거구나.

익숙한 상황에 맞닥트리니 체념이 한발 빠르다. 생각해 보면 오래도 저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저 때가 왔을 뿐이다.

그러나 순순히 체념이 깃든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따라 주지 않는다.

“읏.

끌려가는 자세가 편할 없었다. 가는 도중 계단에 다리를 삐끗해 버린 해진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신음성을 참지 못했다.

순간 앞서가던 라일의 등이 우뚝 멈추었다. 해진은 그런 라일을 의아하게 쳐다보았으나, 라일은 이내 뒤돌아보는 없이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지나서일까 마냥 끌려갈 때보다는 조금 발을 내딛기가 편했다. 그렇게 본관을 벗어나 원래 머물던 건물까지 향하는 길을 보며 해진은 익숙하게 당황이나 서러움 따위의 감정을 삼켰다. 중간중간 당황한 사용인들의 얼굴이 보였으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길들을 외면했다.

그렇게 한참 고개를 숙인 끌려가다 보니 익숙한 복도의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조금 앞으로 나아가면 그들이 몸을 섞는 방이 나올 테지.

그걸 떠올리는 순간 해진은 거센 노크 소리를 들었다.

이게 뭐지.

미약한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왜인지 무릎이 풀썩 내려갔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해진은 비틀거렸다. 라일이 거세게 그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억지로 몸이 펴졌다.

발목은 살짝 시큰하긴 해도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라일은 아까부터 조금 걷기 쉬운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데도 다시 해진의 다리에서 털썩 힘이 빠진다.

“똑바로 .

“……윽.

해진이 일부러 지체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라일이 으르렁거렸다. 억지로 버텨 내려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오는 것도 뭔가 아스라이 같이만 느껴져서 기묘하다.

간신히 라일이 잡아당기는 대로 중심을 찾은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방’의 문이 보였다.

‘씨팔, 파는 애새끼 주제에 더럽게 뻣뻣하게 굴어.

그날따라 그렇게 부모님을 보러 가고 싶었을까.

아까부터 이상하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심장 소리와 흡사한 그것은 마치 거대한 천둥처럼 해진의 고막을 계속해서 두드려 댔다.

이윽고 문의 세밀한 문양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순간 귓가에 노크 소리가 한층 크게 울렸다. 그날 아침, 집사가 노크했던 것처럼.

“움직여.

멀뚱히 문을 바라보고 있자 라일이 그를 거칠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까부터 성가신 반항을 하는 꼴이 그의 화를 돋우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해진은 이미 체념한 오래였다. 이렇게 억지를 부릴 생각도 없었고.

등이 밀리는 순간 물에 빠지듯 해진은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맥없이 풀려 버린 무릎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닿았다. 익숙한 감촉이다.

그리고 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벗어.

‘엎드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해진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익숙하다. 익숙한 일이었다. 집사가 더러운 눈으로 저를 훑으며 저리 말했을 때도 해진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지난 5년간 번이나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이 걷잡을 없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사, 사실 시작하기 제가 급히 찾아왔을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던 건데…….

“뭐 . 손으로 계약엔 문제가 없을 거라 하지 않았던가?

라일의 말대로 계약엔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해진은 저택에 돌아오며 다시 익숙한 모욕을 삼켜야 한다는 것만 걱정했다. 이런 절망을 다시 곱씹게 줄을 모르고. 마지막으로 방에 있을 생긴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이 그렇게 도구처럼 망가지는 사이, 부모님은 쓸쓸하게 버렸구나.

‘지난밤 브라이트 씨의 양친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해진은 깨달았다. 계약이나 베르무스의 힘이 무서운 부차적인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자신이 상황을 감당할 없었다는 점이다.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주저앉아서 덜덜 떠는 손으로 옷을 벗던 해진은 그대로 허리를 꺾으며 땅을 짚어야 했다. 아까 들이켠 이후로는 폐가 움직이고 있질 않았다. 무언가가 그의 숨통을 쥐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난다고 해서 자신이 상황을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아니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지도 못할 정도로 절망하고 있었을 뿐인데.

‘……끝나면 병원에 가게 주세요.

운전사가 그따위로 굴었을 그냥 바로 나가서 택시를 탔어야 했다. 라일 따위에게 기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길로 저택을 뛰쳐나갔어야 했다.

가서 봤어야 했는데. 가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인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바보 천치같이 그거 하나를 해서.

“진?

“끅.

짜증스럽게 구는 해진을 차가운 눈길로 내려다보던 라일이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부터 미적대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해진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라일은 반사적으로 해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꺽꺽대는 막히는 소리가 녀석에게서 흘러나왔다. 얼른 어깨를 쥐고 고개를 들게 하니 파리하게 죽어 있는 안색이 보였다.

순간 라일은 이상하게 해진처럼 숨을 수가 없었다.

“이봐, ! 정신 차려!

가까스로 목구멍을 쥐어짜며 해진을 불렀다. 무작정 끌고 때부터 미친 듯이 경고를 울리던 심장이 순간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갈 굴었다. 겨우 머리를 돌려 다급하게 저택의 비상 전화를 박살 눌렀다.

무언가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불길한 기분이 척수를 내달려 뇌를 쥐어짠다. 이런 위태로운 감정은 해진이 앞에 왈칵 신물을 토해내는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진!

저도 모르게 해진을 끌어당겼다. 평소라면 뒤로 물러났을 해진이 털썩 쓰러지듯 라일의 품에 들어온다. 순순한 늘어짐이 불길함으로 벼려낸 송곳 같았다.

이대로는 같아서 라일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녀석을 들어 올렸다. 순간 풀썩 고개를 꺾으며 해진은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한숨같이 파르르 흘러나오는 말은 안개같이 흩어졌다. 시선은 라일이 아니라 아스라이 곳을 바라보고 있다.

“……미, 안해요, 가서…….

고장이 것처럼 숨을 들이켜기만 하던 해진은 이후로는 끅끅대는 소리조차 내질 못했다. 온몸은 그저 늘어져 없이 경련하기만 했다. 파리한 안색과 흰자위마저 보이는 눈을 보며 라일은 깨닫고 말았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해진도, 그도.

              

#25

<챕터 4>

“정신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

방에 딸린 응접실에 라일은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더러워진 옷가지를 갈아입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평소 같은 자기관리를 하던 라일답지 않게.

초췌한 모습을 곁눈질하던 비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거부감이 심하셔서 혈액검사를 하진 못했으나, ……겉보기에도 영양 문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식욕 저하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니 앞으로 신경을 쓰는 편이 좋겠습니다.

해진은 지금 병원이 아닌 본관의 방에 누워 있었다. 급히 달려온 차를 타고 라일이 직접 병원에 데려갔으나 그곳에 다다르는 순간 다시 죽을 듯이 자지러졌기 때문이다.

‘병원은, 싫어, .

두려움으로 점철된 페로몬에 라일은 질식하는 알았다. 그래서 급히 의사를 안까지 불러 해진의 상태를 살폈다. 순간에도 해진은 몸을 뒤틀어 가며 온몸으로 모든 것을 거부했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라는 소리에 그들은 그대로 차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왕진을 나온 의사가 천천히 진찰한 결과 트라우마 소견이 나왔다. 라일은 최대한 자세히 해진의 급작스러웠던 상태를 묘사했다. 그러자 최근 들어 해당 장소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일이 있었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라일은 그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미, 안해요, 가서…….

기절하기 직전 해진이 뱉은 말은 어디를 향한 것인지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무래도 부모의 부고를 늦게 들은 사실이 라일의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부모가 죽은 바쁘게 움직인 기억밖에 없던 그는 사실이 못내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당장이라도 죽을 같이.

그가 직접 움직이는 바람에 외부의 눈을 가려야 일이 많았다. 그래서 새벽에 덩달아 끌려 나온 비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수액이라도 맞는 편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주삿바늘에 거부감이 있으신 듯합니다.

파리한 해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 부근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마침 주삿바늘 소리를 들으니 말에 찔리기라도 같았다.

주삿바늘뿐만이 아니라 해진은 의사의 하얀 가운에도 발작을 일으키려고 했다. 덕분에 왕진 나온 의사는 최대한 병원을 연상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그를 살펴야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내 해진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아직도 풀썩 쓰러지던 해진을 잡아낸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해진을 방으로 직접 우악스럽게 끌고 갔던 손이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해진을 트라우마의 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녀석이 마른 무에 대수라고,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

“…….”

불쑥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올라올 굴어서 라일은 다급하게 입가를 가렸다. 잔잔한 떨림이 피부를 타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무언가 확연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저 한때의 충동이나 이상 반응 정도로 여겼던 상황이 이리도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해진의 상태에 초연하게 수가 없었다. 더욱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뱉은 말을 생각하면 더더욱.

문득 상성이 맞는 오메가를 만났냐고 물었던 의사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납득 가는 해설이겠지.

“이대로 계약을 파기하게 되면 보상 방안 등을 다시 조율해야 합니다. ……한 번도 계약 이행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위약금도 청구할 있습니다만, 어찌할까요.

고민에 빠져 있던 라일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비서도 제가 내뱉는 말이 못내 죄책감이 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아니, 그러지 .

다급하게 대답하면서 라일은 눈을 감았다. 다시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려고 했다. 해진의 파리한 얼굴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안쪽에 붙은 떠나지 않았다. 다시 숨통이 조여든다. 형언할 없는 의아함과 혼란 속에서 라일은 가까스로 하나의 감정을 떠올렸다.

짙은 두려움.

이건 라일의 감정이 아니었다. 해진의 페로몬이 잔향처럼 그에게 맴돌고 있을 뿐이다. 녀석이 쓰러지며 온몸으로 내뿜던 좌절이 무겁게 섞인 두려움이었다. 그게 마치 라일에게 고스란히 옮기라도 옅고 옅은 페로몬은 끈질기게도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덕분에 파리하게 숨을 쉬던 해진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앞으로도 해진을 상대로 법률 소송은 없도록 조치해.

“네. 그리고 회장님의 페로몬 해소도 시급합니다. 의사가 전언을 보냈더군요.

“……알아.

비서도 이런 상황에서 차가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라일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해진에게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일은 해내야 했다.

“브라이트 씨의 의료 지원은 부족함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

“그리고 계약자를 알아보겠습니다.

대충 의사와 라일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들은 비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해진에게 이상 계약을 강요하는 정말 짓이라고. 그러니 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라일은 생각이 다른 같았다.

“……그건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지.

“회장님, 브라이트 씨는 현재…….

“알아. 진을 억지로 어떻게 하겠다는 아니야.

미간을 거칠게 문지르며 라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엉망인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그는 해진이 쓰러진 다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서의 판단이 옳다. 그의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컨디션을 제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거부감은 조금 밀어 두고 새로운 계약자를 찾으라고.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괜찮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도 괜찮지 않았다. 이해할 없는 상태를 헤아리며 라일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해진이 발로 저택을 나갔다 돌아온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진은?

“……여전히 방에 있습니다.

라일은 잠들기 직전, 망설이다가 집사를 불러 해진의 상황을 물었다.

벌써 녀석이 발작을 일으킨 이틀이나 지났다. 본래는 해진이 일어나면 바로 얼굴을 보러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기묘한 망설임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깨달았다.

번도 이런 불확실성에 붙잡힌 없던 그는 일단 제자리에 멈춰 서는 택했다. 고작 얼굴 보러 가는 길이 자꾸만 신중해진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해진이 그렇게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아는 이상, 라일은 그걸 책임져야 했다. 계약과는 별개로 해진의 향후 치료 계획이나 보상 방안 등을 비서가 새로이 짜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게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들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실 모든 핑계보다는 묘한 예감이 그의 발걸음을 짓눌렀다. 왜인지 해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뀔 같아서.

“…….”

이제 라일은 자신의 이런 감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해진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어긋나기만 했던 그의 판단이었으니까. 과연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가.

그런데 해진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진의 식사를 챙기도록 . 부족함 없도록.

“……네, 주인님.

결국 그는 다시 판단을 보류하는 선택을 했다. 안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헤아리느라 라일은 집사의 표정이 묘하다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

“또 먹었다고?

“네. 집사님.

해진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트레이는 거의 양이 줄지 않았다. 그걸 보며 집사는 짜증스럽게 욕설을 속으로 삼켰다.

식사를 챙기라는 라일의 당부를, 집사는 억지로라도 밥을 먹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따라서 이번엔 휘하의 사용인들에게 트레이를 앞에 두는 아니라 직접 가지고 들어가게 했다. 그리곤 앞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켜보게 했다. 행여 해진이 다른 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오메가는 집사를 내쫓았을 때처럼 건방지게 굴었으나 라일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이제 쓸데없는 투정을 받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후로는 오메가도 저항을 관두곤 밥을 챙겨 먹었다. 비록 탐탁지 않게 적은 양이라도 말이다.

“빌어먹을.

저택에는 해진이 쓰러진 사건이 미묘하게 소문났다. 집사가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갔을 이미 라일이 해진을 안은 건물 바깥까지 나왔을 때였다.

이후 병원을 가는 듯하더니 뜬금없이 금방 돌아왔다. 그리곤 수액 하나 끼고는 며칠째 침대에서 나오질 않는 것이다.

라일이 직접 집사만 불러 트라우마 때문이라 설명해 주었으나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다면 대체 저택에는 돌아왔단 말인가.

해진이 납치되다시피 돌아온 모르는 집사는, 그가 부모님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가질 것이라면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죄책감도 합리화한 오래였다.

또다시 집사의 묵인 아래 이래저래 소문은 살을 붙여 갔다. 마치 해진이 라일을 압박하기 위해 꾀병이라도 부린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간 저택에 오메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라일을 압박하기 위해 애썼으니 자연스러운 추측이기도 했다. 집사는 그런 말들을 막기는커녕 곁에서 심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아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26

처음 해진이 저택의 가십거리가 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같은 열성 주제에 과분한 대우를 받는 오메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콧대 높은 오메가들처럼.

그러니 집사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택을 떠도는 소문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사는 점점 해진이 저렇게 꾀병을 부리는 탐탁지 않았다.

***

툭툭 가슴께를 보아도 답답한 속은 내려가지 않았다. 해진은 억지로 모금을 넘기며 허리를 펴고 앉았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으려니 아주 고역이었다.

라일은 아무 말이 없을까.

며칠이나 지났으나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계약 이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화를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다시 그날 상황을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올라왔다. 간신히 모금을 마신 해진은 반사적으로 떨리는 손을 이불 위로 내리눌렀다.

미처 깨닫지 못할 차라리 괜찮았다. 그러나 한번 그곳에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알아차린 후에는 이미 늦었다. 그는 도무지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서는 방에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늦어 버렸다는 알지만, 고작 생각이나 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 두려움이 해진의 뇌를 마비시켰다. 급기야 이제는 병원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어쩌면 라일은 이대로 저를 놓아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단히 망가진 봤으니까.

그러나 파르르 떠올랐던 희망은 덧없이 공기 중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익숙한 불길함이 허공에서 해진을 노려본다. 마치 그가 밥을 제대로 먹는지 감시하듯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눈길처럼.

갑자기 이렇게까지 그의 식사를 억지로 챙기는 걸까.

***

아침부터 라일을 엄습한 두통은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끝내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라일은 하는 없이 오후 일정을 모두 미룬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급할 이런 휴식이라도 조금은 도움 되었으니까.

“후…….

최근 들어 컨디션 난조가 잦다.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으나 틈을 보이면 필연적으로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사사건건 참견하길 좋아하는 그의 작은아버지 같은 사람이 들러붙기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샤워 안의 소파에 털썩 앉은 라일은 무의식중에 해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종종 떠오르는 해진의 잔상은 이제는 습관이라도 것처럼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몸이 원하는지는 뻔했다. 페로몬을 당장이라도 쏟아내자는 거겠지.

정말이지 귀찮은 몸이었다.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이완시켰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주인님.

집사는 눈치껏 필요한 것들을 챙겨 왔다. 그리고 좋지 않은 안색으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주인을 보며 지금 가장 필요할 오메가를 입에 올렸다.

“브라이트 씨를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뭐?

문득 해진의 부모가 죽었는데도 라일을 우선시하던 집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방에만 들어가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에게 대체 하라는 거지.

아무리 집사의 충성심을 인정한다지만 조금 과하다. 계속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집사의 행동들이 오늘따라 두드러졌다. 그래도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예민한 상태라서 라일은 화를 숨기지 않았다.

“집사.

“네, 주인님.

게다가 라일은 이미 해진을 가만히 두라는 명령을 내린 있었다. 이건 집사의 권한을 넘어서는 건방진 짓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녀석에게 손대는 파렴치한 짓을 하길 바라는 아니라면 지금 이따위 말을 해서는 되리라.

그래서 거칠게 집사를 다그쳤다. 실수는 정도면 차고 넘쳤다.

“내가 진을 가만히 두라고 분명 얘기했을 텐데. 감히 명령을 우습게 아는 건가?

“하오나, 주인님의 상태가…….

상태가 걱정이라면 다른 오메가를 부르라는 소리를 해야 맞다. 저렇게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는 해진을 부르겠다는 매정한 소리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집사의 알파 페로몬도 유난히 거슬렸다. 다시는 입에 해진의 이름을 담지 않길 바랄 정도로 불쾌하다.

“쓸데없는 하지 . 나가 .

“……알겠습니다.

집사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났다. 라일은 짜증스럽게 다시 의자에 길게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의 동요가 커서 그런지 머리가 다시 쪼개질 아팠다.

와중에도 라일은 집사의 태도에 대해 명확한 조치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자꾸만 톡톡 거슬리던 감각들이 일순 송곳처럼 그의 머리를 찌르는 듯했다. 역시 내일 출근 직전에 다시 한번 단단히 당부해야겠다.

일단 지금은 정도로 명확하게 말해 두었으니 괜찮으리라. 집사는 그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순종해 왔으니까.

그래서 라일은 무의식적인 믿음이 끝내 무슨 일을 만들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집사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라일의 행동이 최근 무척 이상하다.

페로몬 체증이 심해지면 일에 지장이 간다. 그의 주인은 일에 지장이 가는 무엇보다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고작 오메가의 투정 따위를 이렇게까지 봐줄 이유가 없었다. 라일이 본격적으로 회장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건강 문제로 일찍 저택에 돌아온 일이 번도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열성 오메가 놈을 싸고도는 모습이 집사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귀찮아하는 주인을 위해 매번 하던 ‘준비’도 그만두게 하더니, 어느 순간 오메가 놈의 식사를 챙기라고 성화였다. 저게 짝을 챙기는 알파 같지 않은가. 그도 열성이지만 알파이기에 이런 종류의 경계에는 민감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선대의 일로 혐오감이 짙어도 주인은 어쩔 없는 알파였다. 애초에 같은 알파로서 주인을 동경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오메가를 멀리하는 집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페로몬이 섞이면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는 것을 하러 참는단 말인가.

어쨌든 주인이 매번 페로몬 해소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느니 이쪽이 훨씬 나았다. 문제는 하필 대상이 해진이라는 점이었다.

집사는 다시 초조하게 손바닥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저택의 운전사 자리에 넣어 친척은 아직 무사히 근무하고 있었다. 본래 저택의 사용인들은 철저하게 신원 검사를 해야 들어올 있었다. 이건 분명한 집사의 월권행위였다.

오메가가 말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주인이 무시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만약 운전사를 문제 삼을 거라면 진작에 조치가 취해졌을 .

문제는 운전사에게만 있는 아니었다. 집사는 얼마 전에 해진의 옷장에서 옷가지가 사라졌다는 보고 받았다. 한번 도둑질에 들인 사용인들이 그새를 참고 건드려 버린 것이다. 놈은 특히 옷을 가지고 나오는 장면을 오메가에게 정면으로 들키기도 했다고.

“병신 같은 새끼들…….

거면 흔적이 남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주인이 직접 명령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을 저지르면 곤란하다. 게다가 해진의 방이 본관으로 옮긴 이상 함부로 드나들면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멍청한 사용인들은 정도를 몰랐다. 뒤늦게 알아차린 집사가 되돌리려고 했을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저번 계약 당시 해진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했던 , 그의 물건을 횡령한 등등. 해진과 얽힌 집사의 과오가 너무 많았다. 분명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뒤를 돌았을 어느새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무거운 잘못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집사를 향해 위태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에서, 행여 주인이 오메가를 계속 곁에 두기라도 한다면.

“안 되지, 그건 돼…….

그랬다가는 평생을 바쳐 일을 잃게 되리라. 단순히 실직으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노후 자금 하나 남기지 못한 소송에 휘말리리라.

만약 해진을 내쫓을 있다면?

“…….”

하나만 사라진다면 아무것도 들키지 않고 지나갈 있었다. 라일이 한번 오메가에 대한 혐오를 조금 해결했다면 다른 오메가에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진이 하루라도 빨리 저택을 나가 줘야 했다. 행여 라일이 애먼 알파의 소유욕이라도 깨닫기 전에.

문득 정신을 차린 집사는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방으로 가는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흠흠.

아니지. 그는 지금 고작 제가 일이 들킬까 이러는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해서였다.

선친이 너무 일찍 버린 탓에 집사는 주인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본 유일한 어른이었다. 전대 집사도 사건 이후로 급히 사임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일은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집사는 순간 자신이 라일을 위해 무슨 수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그의 주인이 페로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있지 않은가.

설령 처음으로 주인의 명령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어느새 방에 도착한 집사는 구석진 서랍장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투명하고 무미 무취의, 무언가에 넣기 좋아 보이는.

“……이거라면.

오메가용 히트 사이클 유도제였다.

              

#27

원래는 콧대 높게 구는 오메가와 재미를 보려고 비싼 약이지만, 어쩔 없었다. 당장 라일의 이상 반응도 해결하고 눈에 거슬리는 오메가도 처리할 좋은 방법이 아닌가.

분명 페로몬 정체를 해소해 정신이 라일은 다시 제대로 판단을 내리리라. 애초에 집사는 이걸 자신이 먹였다는 것도 숨기고 해진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다.

가끔 어떤 열성 오메가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히트 사이클을 이용하곤 했다. 본래는 노팅 없이는 임신 확률이 극히 낮지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장담할 없었다. 특히나 히트 페로몬에 정신이 나간 알파가 흥분해서 노팅이라도 하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으로, 오메가들은 종종 이런 짓을 벌인다고 들었다.

라일은 본래도 오메가가 질척거리는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해진의 히트 사이클 때도 거부감을 보였던 집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진이 히트로 인해 오메가 티를 잔뜩 낸다면 혐오감을 다시 일깨우리라.

게다가 정신이 들었을 , 녀석이 임신이라도 작정으로 덤벼들었다는 알면 분명 크게 분노해 내치겠지.

모든 어디까지나, 라일을 위해서였다.

***

저녁이 시간,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흠칫 놀란 몸을 진정시키며 쪽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날의 노크 소리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애써 다독였다.

그러나 이윽고 문이 열리고 집사의 검은 양복이 보이는 순간, 해진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브라이트 .

“…….”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음식 트레이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식사 시간이 되면 사용인들은 해진의 허락도 없이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곤 했다. 마치 그의 거부는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그러다가 오늘은 아예 집사가 나타났다. 저번에 나가라고 단호하게 내보낸 뒤로는 해진과 마주치는 것도 피하던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만면에 웃음을 걸고 등장한 그가 보기 싫었다.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트레이도 싫다. 본래 이렇게까지 음식을 거를 생각이 아니었어도 거부감이 만한 일이었다. 며칠째 자리에 서서 사용인들이 그를 감시하는 것도 거북했다.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인데 이리도 그를 가만두지 않는 걸까.

“자, 어서 드시죠. 너무 적게 드시면 됩니다.

“……나중에…….

“브라이트 .

“…….”

다른 사용인도 거북한 마당에 집사를 앞에 두고 태연히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방금 그날의 일을 떠올린 탓에 그렇잖아도 없던 입맛이 사라졌다.

그래서 며칠 체념으로 순응하던 해진은 오랜만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순간 웃음기를 지운 집사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억지로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과한 악력에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 그런데도 집사는 음식까지 하나 집어서 그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주인님께서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르셔야죠.

“윽…….

억지로 안에 들어온 고기를 씹으며 해진은 뒤로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이상 생각은 없는지 집사는 물러났다. 덕분에 해진은 고개를 수그린 입에 들어온 것을 씹어야 했다. 거북함과 서러움을 고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삼킨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아직도 귓가에는 그날의 노크 소리가 들리는 같았다. 집사의 검은 옷이 눈을 감아도 불쑥불쑥 그의 상념을 침범할 때가 많았다.

“자, 천천히 드시죠. 어서.

“…….”

포크를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해진은 억지로 힘주어 버텼다. 차라리 빨리 입에 욱여넣는다면 집사도 빨리 나가겠지 생각하면서.

집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그런 해진을 지켜보았다. 입씩 넘길수록 해진은 토할 같은 기분을 참아야 했다. 앞에 놓인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 드셨군요.

“…….”

마지막 고기를 삼킨 해진은 입을 가린 대꾸할 없었다. 그런데도 음식을 비웠다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지 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트레이를 수거해 갔다.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해진은 다시 답답한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집사까지 나서서 저렇게 행동하는 보니, 라일이 이번엔 단단히도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마른 무에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렇게 억지로 밥을 먹여서 하려고.

그날 해진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거북한 속이 자꾸만 안에서 요동쳤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그냥 저택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서러움과 함께 억눌렀다. 차라리 라일이 식사 따위를 챙기지 않았다면 이대로 놓아줄 거란 희망을 품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괴로움에 시달린 끝에 잠든 깊은 . 갑자기 몸에서 괴로운 열기가 솟기 시작했다.

***

“흐윽…….

심장이 아플 만큼 거세게 뛰었다. 온몸이 뜨거워서 벅벅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꿎은 위를 잡아 뜯어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가시질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한 오래되지 않아서 감각은 번밖에 겪어 보지 못했다. 그래도 해진은 이게 히트 사이클의 전조라는 본능적으로 있었다.

다만 멍한 머리는 와중에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깨달았다. 아무리 히트 사이클 주기가 불규칙하다 한들, 며칠 전부터는 먼저 예상할 있을 정도로 상태가 변화하곤 했기 때문이다. 분명 저녁까지만 해도 히트 사이클이 만한 상태는 아니었는데.

최근에 심적으로 동요할 일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끔은 이런 갑작스러운 히트 사이클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해진은 자꾸만 억지로 입에 음식을 욱여넣던 집사가 떠올라 불안함을 감추질 못했다. 몸에서 페로몬이 마구 뻗쳐올라 허공으로 흩어지는 비죽비죽한 가시가 몸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같다.

이윽고 달도 없는 어두운 , 그의 방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흥. 꼴에 오메가라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멋대로 들어온 집사를 보며 해진은 절망에서 허우적거렸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은 항상 빗나가질 않는 걸까.

“일어나.

“시, 싫…….

“조용히 . 성가시게 굴기는. .

손으로는 손수건을 탓에 집사는 손으로만 해진을 붙잡아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런데도 해진은 악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부실한 상태에 더해 집사의 알파 페로몬이 찍어 누르듯 그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집사도 같은 열성이라 평소라면 어느 정도 거부를 했을 텐데, 히트 사이클이 상황에서는 그저 정신을 차리기도 버거웠다.

“아, 윽……!

해진이 중간에 엎어지든 말든 집사는 계속 우악스럽게 그를 잡아끌었다. 침대에서 끌려 나온 모양새로 해진은 복도를 비참하게 질질 끌려갔다.

처음에는 집사가 자신을 겁간이라도 하는 알았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보며 해진은 점점 까맣게 가라앉는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상황에서 라일의 페로몬을 접촉한다면 정말이지 큰일이 텐데.

다만 생각과는 다르게 해진의 몸은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사용인들은 없는 어두운 복도라서 비참한 꼴을 널리 보이는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상황에서도 다른 이의 시선을 걱정해야 한다는 해진은 한없이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번도 들어선 없는 낯선 방문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안에 라일이 있다는 알아차릴 있었다.

, 이러려고 그렇게 억지로 밥을 먹였구나.

번이고 속으로 자문해 보아도 상황은 라일의 의지일 뻔했다. 억지로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약까지 먹이고 편하게 안으려는 수작이었을까. 자신이 제대로 계약을 이행할 없어서, 싫은 히트 사이클마저 이용할 생각을 했을까.

“으, , 싫어. 제발…….

“후…….

이루 말할 없는 비참함에 해진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는 사실이 그를 한층 좌절하게 했다. 부모님의 죽음에도 흘리지 못하던 눈물을 결국 비참함에 몰려 뚝뚝 떨구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서글펐다.

“얌전히 들어가.

“윽.

중간중간 음욕에 눈길로 해진을 쳐다보던 집사는 가까스로 그를 라일의 응접실에 집어 던졌다.

힘없이 몸에 닿는 카펫의 감촉을 느끼는 사이 뒤에서 문이 철컥 닫혔다. 번뜩 고개를 해진은 얼른 돌아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밖에서 잠그기라도 했는지 헛손질만 뿐이었다.

“안 돼…….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라일의 침실과 이어진 거대한 응접실이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없는 방문들이 많이 보였다. 분명 처음 보는 구조였으나 해진은 너무나도 손쉽게 라일의 침실을 찾을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페로몬 때문에.

“흐, 으……, .

무릎이 덜덜 떨렸다. 다리 사이에는 기분 나쁜 열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을 겪지 못한 해진은 이런 자극적인 감각에 전혀 면역이 없었다. 그나마 실수로 라일과 히트를 보낸 뒤로는 전조 증상이 오자마자 미리 약을 먹곤 했으니까.

잠깐 정신이 아득해진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자신이 어느새 라일의 방문 앞까지 기어 왔다는 깨달았다. 푹신하게 감겨드는 카펫의 감촉마저 자극적이었다. 내뿜는 숨결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날숨에 얼굴이 것만 같았다.

              

#28

. 돌아가야 .

생각은 자꾸만 덧없이 흩어졌다. 아까부터 조절을 전혀 하고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바닥에 잔뜩 고였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음탕하고 애절한 페로몬이었다.

라일이 평소처럼 페로몬 관리라도 잘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인지 오늘따라 그의 페로몬이 짙게만 느껴진다. 분명 일부러 그러고 있는 분명하다. 해진이 이렇게 직접 그의 앞으로 기어가길 바라는 것이겠지.

압도적인 우성 알파의 향기가 그를 천천히 잠식했다.

.

까드득 바닥을 긁는 손톱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아픔에 잠깐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갑자기 방문 앞에 머무르던 라일의 페로몬이 해진에게 끼쳐 왔다. 순간 해진은 자제심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흐읏…….

홀린 듯이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몸은 저절로 앞으로 움직였다. 한발 다가가다 풀썩 다리가 꺾이자 다시 기어서라도 방문으로 다가갔다.

혼몽한 와중에도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보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끝내 이성의 외침을 듣지 못한 문고리를 잡았다. 라일이 누워 있을 그곳으로.

알파가 저기에 있어.

“…….”

문은 관리되었다는 증명하듯 소리 없이 열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해진을 덮친 페로몬은 무척이나 사나웠다. 그렇게 라일이 흘린 체향에 감싸인 해진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 오로지 본능만 남아 고개를 쳐든다.

“……진?

피곤함에 절어 있던 라일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본래라면 한없이 깔끔하게 페로몬을 조절하지만, 오늘은 마음껏 자제 따윈 하지 않고 있었다. 페로몬 체증이 심할 어쩔 없이 하는 임시방편이었다.

갑자기 오밤중에 문이 열려서 인상을 쓰길 잠시, 방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라일은 눈을 크게 떴다.

“…….”

어딘가 멍한 얼굴로 해진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응접실과는 다르게 두꺼운 러그가 깔린 곳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덜컥 떨어지는 그의 몸을 순간 라일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해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이윽고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해진의 페로몬을 느꼈다.

본능이 알아차렸다. 히트 사이클이란 .

“이게, 무…슨…….

무심결에 해진의 페로몬을 들이마신 순간 라일의 이성이 뒤로 물러나라는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몸은 반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해진은 자리에 주저앉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거칠게 구르다 왔는지 잠옷은 엉망으로 구겨져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봐도 제정신이 아닌 몰골이었다.

그러나 하얀 얼굴이 저를 올려다보는 찰나 라일은 익숙한 예감을 맞이했다.

이번만큼은 해진을 피해 다닌 자신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녀석을 마주하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건 사실이었다.

자신의 몸이 줄곧 원하던 해진이라는 절실하게 느끼고 말았다.

“……진.

라일의 음성이 바닥에 짓쳐 낮게 가라앉았다. 해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곤 있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보면 또한 본능과 거센 싸움을 하고 있는 분명했다.

그걸 알았으니 라일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히트 사이클이긴 하나 열성에게 저항할 힘이 그에게는 충분히 있었으니까.

분명, 그럴 텐데.

“진.

무언가 어긋나 있었다. 압도적이어야 그의 페로몬은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했다. 반면 한없이 옅고 희미한 해진의 페로몬은 손쉽게 라일의 몸에 침투한다. 그저 온몸이 해진에게 순응하듯 고개를 조아리는 것처럼 말이다. 본능은 자꾸만 그저 옅은 페로몬이 원하는 주라며 속삭였다.

해진의 페로몬이 고인 발끝부터 오싹한 감각이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라일은 그게 거대한 빗물에 삼켜지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서늘한 감각은 그의 피부를 잡아먹었다. 그렇게 머리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잠식할 때까지.

이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다 라일이 문득 다시 숨을 들이켰을 , 그는 어느새 해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녀석의 페로몬이 눈앞의 알파를 원하고 있어서.

아니, 해진은 그냥 알파를 원하는 아니었다. 앞에 있는 라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진에게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라일은 거대한 힘에 떠밀렸다. 마치 운명처럼. 정신을 차렸을 이미 해진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한 뒤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냉철한 이성이 마지막 발버둥처럼 다시 그에게 외쳤다.

“으, 흣……!

그러나 라일이 겨우 끄집어낸 이성은, 미약하게 흘러나온 신음성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파스스 흩어졌다.

남은 오직 눈앞의 해진을 원하는 본능뿐.

***

“아, , 으…….

질척이는 소리가 안을 울렸다. 창밖의 거센 빗줄기와 조화를 이루듯 물기 어린 소리는 한참이나 거세게 침대 위를 범람했다.

해진은 몸이 표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센 풍랑을 만난 아플 정도로 뾰족한 쾌감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와중에도 새파란 등대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택에서는 그를 따라붙는 시선이었다. 차갑고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시선.

그런데 시선이 오늘만큼은 기이한 열기를 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순간 파란 눈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알싸한 아픔이 느껴진다.

“아……!

문득 정신을 차린 해진은 자신이 똑바로 누워 있다는 알아차렸다. 그리곤 위를 덮친 라일이 저를 거세게 흔들고 있다는 것도.

아래쪽에서는 커다란 그의 성기가 성급하게도 짓쳐 들고 있었다. 둔중한 울림이 저를 번씩 건드릴 때마다 해진은 자지러졌다. 살면서 이렇게 과한 자극을 받은 적은 없어서 도무지 혼몽한 정신을 일깨울 없었다. 아래쪽에 뜨거운 성기가 차오르면 놀라울 정도로 허리가 움찔거렸다.

예전에 겪었던 히트 사이클도 이렇지 않았다. 그때의 라일은 엎드린 어쩔 모르는 해진을 보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신 나간 허리를 흔드는 아니라.

심지어 라일은 그들이 보통의 연인이라도 해진의 목덜미에 자꾸 얼굴을 부볐다. 문득문득 이를 세워 페로몬 샘이 있는 쪽을 자극하기도 했고 그의 빗장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뜨겁고 촉촉한 감촉에 해진은 몸서리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사람의 몸이 맞닿을 때마다 실제로 누군가와 몸을 섞고 있다는 실감이 나서 두렵다.

“아, , 으읏!

입에서는 없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그에게 섹스는 견디고 삼켜내는 것이었으니까.

간지러운 느낌이 온몸을 돌아다녔다. 일부러 눈을 감고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라일이 달려들어 그의 목을 물어뜯어 놓았다. 흡사 짐승의 교미 같았다.

해진은 애써 입술을 짓씹으며 제정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열성인 그는 히트 사이클도 짧게 끝나곤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라일의 페로몬이 이렇게 주변을 가득 메운 보면 슬슬 히트 시간도 끝나 가는지도 모른다.

무겁고 버거운 페로몬이었다. 이렇게 절제력 없는 그의 페로몬을 처음 제대로 느끼게 해진은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열성인 그가 있는 한계가 있었다. 라일의 페로몬이 방향에서 해진을 원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본능은 그저 행복하게 허리를 흔들라고 그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계속 그의 안을 헤집는 라일에게 낭창하게 안겨 들라고 외치고 있다. 그게 이상 끔찍할 수가 없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해진이 겨우 손을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라일의 어깨에 겨우 닿는다. 거짓말처럼 라일이 멈춘 것도 순간이었다.

“흐윽…….

틈을 해진은 겨우겨우 몸을 돌렸다. 가까스로 엎드린 자세가 되니 왜인지 줄곧 저를 향한 떨어지지 않던 라일의 시선에서 해방되었다.

이대로 앞으로 기어가 벗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등을 돌린 것으로 족하다는 , 히트가 끝나 감에도 오메가의 본능이 라일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불로 입을 막듯 고개를 숙인 해진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춘 라일은 왜인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해진은 라일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알아차렸다.

“흡.

그때 스르륵 다가온 라일이 그런 해진의 옆으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마치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다가오기에 눈을 질끈 감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라일은 포기하지 않고 그런 해진을 따라다녔다. 두려울 정도로 기이한 반응이라 해진은 바들바들 떨며 이불로 아예 얼굴을 처박아야 했다.

이러는 거지.

“……진.

그런 해진을 부르며 라일은 갈급함을 느꼈다. 목소리는 낮게 잠겨 몽롱하기만 하다. 오래도록 페로몬 체증에 시달린 그는 처음으로 극도의 해방감을 느꼈다. 냉철한 이성도 밤새 잠재울 만큼 강렬한.

해진의 페로몬이 실처럼 몸에 달라붙어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거부할 없는 진리인 그의 척추를 파고들어 갈구하게 만든다.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페로몬은 난생처음 맡는 기쁨이었다.

              

#29

그런데 조금 전까지 어여쁜 신음을 흘리던 해진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극도의 흥분 사이에 간간이 숨어 있는 두려움.

두려워하지.

이성이 마비된 라일은 본능으로 판단했다. 자신이 해진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그저 눈앞의 그에게 매몰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해진의 페로몬은 알파의 음심을 유혹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일단 얼굴을 보는 포기하고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내음을 닮은 해진의 페로몬이 그런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부 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쾌감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종류였다. 본능에 잠식된 라일은 홀린 듯이 계속 해진의 몸을 탐했다. 그것밖에 있는 없다는 것처럼.

특히나 자세는 묘한 익숙함마저 느껴진다. 아래 깔린 해진을 으스러지듯 끌어안으며 라일은 뼈가 불거진 어깨를 애무했다. 익숙한 자세와는 다르게 사뭇 낯선 감촉이다. 입술 끝에 보드랍게 들러붙는 피부와 체향이 낯설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때 다시 크게 흠칫 놀란 해진에게서 감정이 쏟아졌다. , 두려움.

갑작스럽게 저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페로몬에 라일은 위기감을 느꼈다. 집착으로 끈적하게 뭉친 본능의 밑바닥이 고개를 쳐들었다. 처음으로 찾은 안식이었다. 그가 혐오감을 느끼지 않은 유일한 페로몬이었다.

무엇보다, 해진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놓치면 된다.

“아, , 아……!

일념 하나로 라일은 본능에 저를 맡겼다. 크게 놀란 앞으로 기어가려는 해진을 붙잡았다. 진작 이렇게 안에 가득 안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의 성기 끝이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질척하게 젖은 해진의 안쪽은 예전과는 달리 수월하게 그의 성기를 삼켜냈다. 빠짐없이 아래를 감싸는 해진의 내벽에 라일은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다는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아, 아읏, , 으…….

파들파들 떨리는 해진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래서 라일은 그를 더욱 끌어안았다. 불쑥 성기의 끝부분이 길어지다가 안쪽의 살짝 막힌 부분을 퉁퉁 건드렸다. 이윽고 성기는 제가 가야 길을 찾아냈다.

오메가의 자궁구를 거칠게 열어젖힌 성기는 그대로 속으로 진입했다. 그리곤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것처럼 체구를 점점 동그랗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

해진의 몸은 이제 라일까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요동쳤다. 엎드린 자세가 조금 부담이 된다는 발견한 그는 해진을 끌어당겨 옆으로 눕게 했다.

더듬더듬 그러쥐고 있던 손을 내리자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가 느껴진다. 자신으로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충족감을 알려주었다.

놓쳐서는 된다. 절대로.

“흐윽…….

그렇게 시간이나 라일은 해진의 안쪽을 차지한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쏟아낸 정액이 해진의 속을 가득 채워 흘러넘칠 때까지. 집요하게.

***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같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해진은 바싹 마른 자신을 느꼈다. 이리도 버석버석하니 불이 쉬이 붙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눅눅한 욕정에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사이 몸속을 맴돌던 페로몬이 잔뜩 빠져나간 같았다.

뻑뻑한 눈을 돌리다가 자신이 아직도 라일의 침대 위라는 눈치챘다. 창밖은 이미 어슴푸레한 색깔이다. 먹먹한 머리로도 해진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곁에는 라일이 잠들어 있었다. 정사가 끝나고 곁에 잠들어 있는 라일이라니, 제게 사근사근한 사용인들만큼 비현실적이다. 그제야 해진은 겨우 깨달았다. 역시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

이유마저 고민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해진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가 옷을 찾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주워 입는데 온몸이 끈적거렸다. 지금 느끼는 비참함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라일이 옆에서 잠까지 청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페로몬이 해소된 이상 정신을 차리리라. 그러면 애꿎은 해진만 방에서 꺼지지 않았다는 질책을 듣겠지. 너덜너덜한 몸을, 더는 질책 근처에 수가 없었다.

겨우 옷을 대충 꿰입으니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이 바로 앞이었다. 해진은 충동적으로 창틀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순간 아래로 보이는 땅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

벌벌 떨리는 손은 차마 창문을 열지 못했다. 번이고 머리로는 창문을 열어젖히는 상상을 했으나, 끝내 그러질 못했다.

고민만 하는 사이, 어느새 너른 초원이 보이는 저편에서는 해가 떠올랐다. 희미하기만 하던 지평선이 어느 순간 팍하고 터지듯 빛으로 휩싸였다. 여태 어두웠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해진은 겨우 뒤로 돌아 비척비척 걸었다. 돌아갈 곳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에 잔뜩 고인 라일의 페로몬을 헤치고 나오니 아팠다. 그저, 모든 곳이.

***

“…….”

반짝 눈을 순간 라일이 느낀 극도의 청량함이었다.

성인이 이후로 그는 번도 묵직한 페로몬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특히나 ‘그 사건’으로 우성화된 페로몬은 갈수록 질풍노도처럼 날뛰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런 증상은 심화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리도 맑은 정신이라니.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킨 라일은 정신과는 다르게 몸은 몹시 찝찝하다는 느꼈다. 평소 덥게 자는 선호하지 않기에 무척이나 이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청량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의 페로몬이 극도의 불안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에는 갑자기 추를 욱여넣은 묵직한 감각이 둔중하게 들었다.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파인 자리를 보며 라일의 머리는 어젯밤을 회상했다. 모처럼 맑아진 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하나도 남김없이, 어제 이곳에서 해진과 무엇을 했는지.

“……이게 무슨.

정말이지 말도 되는 짓을 하고 말았다. 히트 사이클이 오메가를 멋대로 안은 것도 모자라 노팅까지 하다니. 그것도 행위 자체에 트라우마를 안고 쓰러진 사람을 말이다.

우성인 자신은, 힘들긴 해도 해진의 히트 사이클도 버텨 냈어야 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본능에 저를 맡길 아니라. 혼란스러운 감각이 그를 쥐어짜듯 괴롭히는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옆이 비어 있지?

사실을 자각한 순간 라일은 무의식중에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가운을 꿰입는 손길은 성급했다. 다리가 의지를 미처 보내기도 전에 절로 움직였다.

해진은, 어디 있지.

문을 박차고 나간 라일은 홀린 듯이 움직였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면서도 걸음걸이의 방향은 확고했다. 이상하게도 해진의 페로몬이 마치 공기 중에 색을 칠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페로몬은 불안하게 밖으로 향해 있었다. 그것을 따라 라일은 다급하게 복도로 나왔다. 드문드문 움직이던 다리는 이내 흡사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이게 이상한 알면서도 그는 점점 빨라지는 걸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거의 기다시피 걸어갔는지 해진의 페로몬은 유난히 바닥에 쓸쓸하게 고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계단에서는 한층 얼룩덜룩해지는 궤적을 보며 라일은 모를 갈급함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는 페로몬이 가장 짙게 느껴지는 곳으로 다다랐다. 새로 배정한 해진의 방이었다.

녀석의 방이 이렇게 멀었나?

“똑바로 ! 감히 저택에서 이런 짓을!

라일은 불안한 페로몬의 궤적을 보며 저택 어딘가에 해진이 쓰러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녀석의 방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집사의 목소리가 무슨 일인지 복도 밖까지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멀리서부터 해진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개방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막연한 불안감이 넘실댄다. 기이한 감각에 라일은 인상을 쓰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밖에서 비죽비죽 웃음을 흘리며 안쪽을 바라보던 사용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일을 보고 당황한 낯을 했다. 그들은 얼른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렸으나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사용인의 얼굴이 왜인지 라일의 시야에 박혀 들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매, 조롱의 의미를 확연하게 담은 눈빛들.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라일의 시선이 오랫동안 사용인들의 뒤통수에 들러붙었다. 사위가 이상할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간다. 발걸음은 아직도 이리 다급한데 흘러가는 시간은 홀로 느려지기로 같았다.

그렇게 해진의 방에 들어서 시선을 앞으로 순간, 라일은 고요히 숨을 삼켰다.

“네놈이 짓을 내가 똑똑히 보고할 거다. 어떻게……, 아니, 주인님!

“…….”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커서 집사가 지르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선은 계속 침대 위에 있는 해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참하게도 너덜너덜한 해진에게.

집사에게 한쪽 멱살을 잡힌 해진은 종이 인형처럼 침대 위를 나부끼고 있었다. 집사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계속 이리저리 흔들었기 때문이다. 숨이 막히는지 양손을 들어 올린 모습은 힘이 없었다. 대충 꿰입은 옷은 마치 라일의 방에 찾아왔던 밤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해진의 상반신에는 라일이 남겨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30

“마침 오셨습니다. 글쎄, 오늘 청소를 하다가 방에서 이걸 발견했지 뭡니까.

집사가 그를 향해 내밀었으나 라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해진의 몸에 있던 붉은 흔적이 마치 물감처럼 번져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밝은 파스텔 색조로 꾸며 해진의 방이 온통 끔찍한 피로 물들기라도 것처럼.

라일은 마치 고장이 것처럼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분명 청량하기 그지없던 머릿속은 이미 핏빛으로 진탕이 오래였다. 녀석의 얼굴은 몸에 열꽃처럼 붉었다. 숨이 막히는 건지 열이 나는 건지 모호한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이리저리 혼몽하게 나부끼던 해진의 시선이 아주 느릿하게 라일에게 향한 것은.

눈동자는 원망조차 없이 비어 있었다.

“이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당장 쫓아내야……, 끄으으, , 그러…….

어느새 해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집사의 팔부터 잡아챘다. 부러트릴 가해지는 거센 압력에 집사는 금방 꼬리를 말고 해진의 멱살을 놓아 버렸다.

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녀석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로 떨어진다. 손에 잡혀 있던 집사의 팔을 더러운 것처럼 털어낸 라일이 저도 모르게 그를 받아 들었다.

마치 라일을 쳐다본 마지막 기력이었다는 것처럼 해진은 눈을 감은 채였다. 새까만 속눈썹은 불규칙적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품에 넣은 몸은 불덩이 같았다.

“주인님, 불편하신 곳이라도…….

“……불러.

“네?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줄곧 해진에게만 고정했던 시선을 겨우 집사 쪽으로 돌린다. 이제 라일은 시야를 온통 잠식했던 붉은색이 걷잡을 없이 짙어짐을 느꼈다.

그의 요동치는 감정에 따라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페로몬이 안을 메웠다. 베타인 사람들도 무심코 한기를 느낄 정도로 진한 파동이었다.

“의사를 불러! 당장!

“네, !

그의 분노 가득한 고함에 쪽에 있던 사용인 하나가 뛰쳐나갔다. 다른 이들은 상황이 무척 뜻밖이라는 얼어붙은 채로 라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일은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뜻밖이라니. 이렇게 해진을 구경거리인 지켜보고 있던 것도 모자라, 의사를 부르는 의외라는 반응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의 혼란과는 다르게 심장은 착실하게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늘어진 해진의 무게감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오히려 라일을 숨이 막힐 정도로 잔뜩 짓누르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들이야.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겨우 짓눌린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질문은 공허하게 안을 맴돌 뿐이었다.

거세게 내뿜고 있는 페로몬과는 다르게.

***

막히는 침묵이 라일의 서재를 지배했다. 급히 저택으로 불려 비서는 아까부터 찌릿한 감각이 피부를 찌르는 느꼈다. 베타인 제가 느낄 정도니, 알파인 집사는 아주 숨이 막힐 지경이리라. 증거로 책상 앞에 있는 집사는 거의 목이 졸린 듯한 얼굴이었다.

본래라면 페로몬을 가닥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라일이다. 순간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증거였다. 그의 숙부가 베르무스라는 이름에 먹칠을 가면서까지 라일을 공격했을 이후로 처음이었다.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는 사나운 페로몬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일관적이었다. 치의 오차 없이 울리는 소리가 그래서 소름 끼친다고, 비서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나저나 집사가 말한 사실일까. 비서의 시선이 라일이 아까부터 노려보고 있는 작은 병으로 향했다.

“다시 말해 .

“그……, , 메가 놈의 방에서, 흠흠, 발견한 겁니다. 화장실 구석에, 크흠, 숨겨 두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주변에서 들어 아는데, 히트 사이클 유도제인 틀림없습니다.

목이 졸린 더듬거리던 집사는 마지막에 가서는 제법 의연하게 말을 마쳤다. 그걸 발견한 자신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애써 허리를 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곁에 비서가 보기엔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라일의 시선은 계속 작은 유리병에만 박혀 있었다.

“진이 저런 구해 시간이 있었나?

다시 침묵하던 라일이 불쑥 물었다. 그의 질문에 집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것이……,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듣는 순간 소름 끼치게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나가 .

“네. 오메가 놈은…….

“나가 . 진은 그대로 두고.

“……네.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로 집사가 물었으나 라일은 차갑게 명령하기만 했다. 고개를 조아린 집사는 페로몬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기꺼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집사의 말에 의하면 해진이 직접 히트 사이클 유도제를 먹고 라일의 방으로 향했다고 한다. 비서가 해진이 하러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을 던졌을 , 뻔하다는 임신이 목적이었던 아니겠냐고 집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번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약병은 확실한 증거로 해진의 방에서 발견되었다. 해진이 밤중에 몰래 라일의 방으로 향하는 봤다는 사용인의 증언도 있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해진이, 차라리 정신을 잃고 계약을 이행하자고 이런 짓을 했을까.

“…….”

석연치가 않았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해진이 이곳에 돌아온 라일의 눈꺼풀 안쪽에 자리 잡은 티끌은 이제 눈동자를 살라 먹을 존재감을 키웠다.

그래도 날이 밝는 대로 집사에게 태도를 똑바로 하라고 일러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일어난 일이 너무 예상 밖이 아니던가.

해진이 진짜로, 저걸 손으로 삼켰다고?

“어찌할까요. 회장님.

“…….”

비서의 시선도 계속 약병을 향하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리고 라일은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집사는 , 해진을 모르고 있을까.

그의 성격 따위를 파악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약병을 구하러 나갈 시간이 있었냐는 물음에 모르겠다고 대답한 거슬렸다. 매번 녀석이 식사했냐는 물음에는 바로바로 대답이 나온 적이 없었다. 손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그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항상 모르고 있었을까.

“진에게 경호를 붙여. 그리고, 사용인들을 전부 억류해.

“……전부 말씀이십니까.

어찌할지 묻긴 했으나 라일의 명령은 급작스러웠다. 사용인을 전부, 그것도 억류하라니. 저택은 거대한 만큼 많은 수의 고용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부’라는 말에는 방금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온 집사까지 포함되었다.

“그래.

비서의 되물음에도 라일은 덤덤하게 긍정을 내비쳤다. 일단 고개를 숙이며 외부의 경호팀에 연락을 취하던 비서는 다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라일의 명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사해.

“뭘 조사할까요.

줄곧 유리병에 향하고 있던 라일의 시선이 겨우 비서를 향해 올라갔다. 무표정하게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제게 닿는 사나운 눈매를 보며 비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아주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이 든다.

“진이 집에 뒤로 있었던 모든 일을.

라일은 자신이 근본적인 무언가를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마 페로몬조차 갈무리하지 못한 그는 이제서야 참담하게 인정했다. 그가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계속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때늦은 자각이었다.

<챕터 5>

‘아, 높으신 분이랑 계약은 내가 턱이 있나. 어쨌든 오늘 끌고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니까?

“…….”

라일의 시선은 업무용 태블릿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차고지로 사용되는 공간은 저택을 두른 높은 담에 맞닿아 있었다. 담에는 감시를 위한 CCTV 있지만, 사용인 대부분은 그것이 녹음까지 된다는 점은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라일은 저택 내외부의 영상을 담당하는 보안팀을 호출해야 했다. 저택까지 그들을 불러들이는 ,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위를 확인한 이후 14 만에 처음이었다.

보안팀과 경호팀은 일부러 분리해 두었기에 저택의 모든 감시 자료는 베르무스 본사의 보안팀으로 전송된다. 저택의 경호팀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자료를 조작할 우려가 있기에 선대가 조처였다. 물론 라일은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아버지의 의심병이 도진 결과라는 안다.

당시에도 부모님이 죽어가는 장면을 뽑아 어린 라일에게 보여줘야 했던 보안 팀장은, 이제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서며 저택이 어딘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높기만 무정한 담벼락은 어린 주인에게 매번 몹쓸 장면만 보여주게 만들지 않는가.

‘씨팔, 파는 애새끼 주제에 더럽게 뻣뻣하게 굴어.

운전자로 보이는 인물 앞에 해진이, 라일은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런 어이없는 폭언을 듣고도 녀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영상에서 물러났다.

뒤로도 한참, 비슷한 시간대의 영상 속에는 해진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얼핏 화면 구석에 걸치는 장면만 봐도 누구 하나 제대로 해진을 상대하는 이가 없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