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rain Chapters 11-20

#11

당연하지만 라일은 그렇게 세세한 조항 따위는 기억하지 않았다. 집사나 비서가 처리해야 범주의 일이었으니까. 해진이 2주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만남 녀석이 벌벌 떨면서도 입에 담은 조항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막막했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을 사는 익숙했으나 원한을 푸는 심력을 쏟아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해진이 진짜 그를 원망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일이 쉬웠을 터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며 나열하면서도 해진은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곤란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라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도무지 제어되지 않는다.

2 방에서 거의 떠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해진의 페로몬은 너무 옅어서 밖까지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처럼 꼭꼭 숨겨 두기라도 듯이.

해진의 페로몬을 떠올리니 이상하게 목이 마르다.

“그럼 고소라도 하든지.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죠.

고소 운운하는 말에 해진은 무심코 자조의 미소를 흘렸다. 베르무스가를 상대로 법적 소송이라니, 차라리 하나를 밀림에 떨어지는 편이 훨씬 삶의 질이 좋으리라.

역시 잠깐 욱해서 이렇게 의미 없는 항변을 하는 아니었다. 해진은 다시 한번 절감했다. 계약으로 묶여 있다 한들 그는 한없는 약자였다.

불만을 토로해 봐야 바뀌는 없었다.

“…….”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던 라일은 해진의 입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몸이 이대로 굳어 버리기라도 것처럼.

그의 페로몬처럼 옅게 드러났다 사라져 버린 미소가 잔상처럼 남았다. 녀석의 입가는 언제 움직였냐는 고요하기만 했는데. 라일은 아까부터 타오르는 목구멍 안쪽을 의식하며 말을 골랐다. 자조의 미소를 흘린 해진은 어째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모습이 이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어쩐지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회장님. 가져왔습니다.

“…….”

그때 아래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뭔가를 들고 올라왔다. 계약서인가 싶어서 심드렁히 비서를 바라봤던 해진은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보고 라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이 제게 향하자 라일은 입이 한층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차가운 이성이 그에게 해야 일을 읊어 주었다.

“피검사를 해야겠어.

“…….”

“……마지막에 노팅을 해서, 확인차 검사가 필요해.

본래 러트가 끝나자마자 확인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해진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잊고 있었지만.

라일은 급기야 혼란을 느꼈다. 잊고 있었으나 그가 해진에게 노팅했다는 상기한 이후로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노팅은 알파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행위였다. 그저 본능이 자극받은 걸로는 끌어낼 없다. 그게 단지 유희가 목적이든 임신이 목적이든 알파의 의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라일은 누구에게라도 노팅할 의지가 없었다.

“하아…….

해진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밀었다. 눈치껏 자리를 잡은 비서가 들고 있던 주사기로 해진의 피를 채취했다.

녀석이 순순하게 구는데도 라일은 어쩐지 시선을 받아내기가 어렵다는 감상을 받았다. 한숨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흡사 그를 직접 두드리기라도 기분이 들었다.

해진의 입장에서야 일방적인 행위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보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용의도 있었다.

“이제 됐죠?

“……그래.

그러나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문지르며 해진은 덤덤히 말했다. 역시나, 라일에게 받아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의 팔목에는 아직까지도 희미한 멍이 남아 있었다. 몇몇 흔적은 너무 오래도록 묶였다 풀리기를 반복해서 쉽게 사라질 같지 않았다.

라일의 시선은 해진의 팔에 집요하게 머물렀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한창이다. 일단은 잠깐 물러나는 편이 좋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발짝 물러섰다. 기다렸다는 해진은 문을 닫았다.

“…….”

문을 닫고 나서도 앞에 한참 있던 해진은 생각에 빠졌다. 왜인지, 이게 끝이 아닐 같아서 곤란했다.

라일이 대체 저렇게 나오는지 궁금하긴 했다. 잊고 있던 노팅을 떠올리니 행동들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걸 알아야 할까?

해진이 저택에 남아야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처럼 의문도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지 않았다. 해진이 원하는 하나였다. 그저 안온하게 침몰하기만을 바랄 .

여기까지 떠올린 해진은 아주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다.

지혈하던 솜을 쓰레기통에 버린 해진은 작은 식탁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지갑을 챙겨 들었다. 캐리어에서는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나머지는 곳곳에 보란 듯이 펼쳐두었다.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던 가족사진은 일부러 따로 빼내어 품에 넣었다.

그렇게 다른 짐은 챙기지 않은 해진은 가뿐하게 밖으로 나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계단을 내려가는 조금 힘에 부쳤다. 층에 내려선 뒤에는 방에 머무를 기한부터 연장했다. 다시 가지고 있던 돈의 태반이 사라졌다.

뒤로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건물에 있는 식료품 가게로 향했다. 어차피 어제부터 방에는 먹을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게로 들어선 해진은 식료품을 조금 살피다가 곧장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 바로 밖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때마침 버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뒷문을 나선 해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대로 버스로 올라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더라도 해진을 따라올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

해진은 버스에 앉아 묵묵히 겨울 냄새가 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발목이 다시 시큰거렸다.

남은 짐이 아쉬웠으나 방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

“……진짜 있었군.

계약서를 차근히 살피던 라일은 혀를 찼다. 녀석의 말대로 병원에서 소식이 들어올 경우 해진에게 즉시 알릴 것을 규정한 조항이 있었다.

물론 어길 보상 방안도 없는 허울만 좋은 말이었다. 밑에 있는 다른 조항과 엮는다면 라일의 변호사는 성의 없는 사과 담긴 편지로도 사안을 해결할 있으리라. 그렇게까지 생각은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계약을 당시 해진은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았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녀석은 퇴원해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던 상황이었다.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리라.

그걸 빤히 보면서 무시한 라일이었다.

지금보다 살짝 앳된 얼굴의 해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계약서에 사인하며 벌벌 떨고 있는 하얀 손도.

“…….”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라일도 속이 편치는 않았다. 겨우겨우 끌어낸 감정적인 반응과 함께 나온 소리를 보면 해진은 조항들 하나하나에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니까. 실제로 라일 또한 조항을 준수할 것을 매번 요구하기도 했고.

“회장님.

“말해.

그때 그의 집무실로 들어선 비서가 입을 열었다. 손에는 급히 연락을 받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일단 브라이트 씨의 피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려하시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

알파와 오메가가 임신하려면 노팅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노팅을 한다고 무조건 임신하는 아니지만 노팅을 하지 않으면 100%라고 정도로 임신할 없다. 다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미약하게나마 확률이 올라갔다.

해진이 임신 가능성이 낮은 열성이라 망정이지 곤란한 일이 생길 뻔했다. 그는 아직 결혼도 후계도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유전자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질색이었다.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방종하게 구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마땅히 기뻐해야 일인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상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라일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말이 남은 기색이었으니까.

그러나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그는 놀라지 않을 없었다.

“그리고 브라이트 씨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뭐?

“주기적으로 브라이트 씨의 위치를 보고하던 경호원에 의하면 방에 돌아오지 않은 이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틀?

라일이 해진을 만나고 이틀 전이었다. 첫날 행방이 묘연할 연락이 없었는지, 갑작스럽게 불쾌한 기분이 치고 올라온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어낸 비서가 간단하게 덧붙였다.

“첫날 이미 체크는 했으나 방을 연장한 채로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 정도 기다렸다가 보고를 올린 겁니다.

“그래도 왜……!

여기까지 말하던 라일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해진은 협상 대상이긴 하나 집중 감시 대상은 아니었다. 경호원이 하루에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추후 협상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있어서는 일이라도 벌어진 구는 심정을 내리누르며 라일은 미간을 문질렀다. 잠깐 잠잠하던 두통이 다시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아니, 됐어. 판단이 옳아.

              

#12

그런 회장을 쳐다보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상사는 오만하고 제멋대로 때가 많긴 해도 같이 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황은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며 상과 벌이 확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타인 그를 오로지 실력 하나만 보고 높은 자리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해진 브라이트와 관련된 일에서는 종종 판단력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촉을 정리하며 비서는 서류를 넘겼다.

해진은 임신이 아니었다. 열성은 원래 임신이 힘들다고 했다. 외에도 해진의 피검사는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가령 그가 현재 다소 위중한 영양실조 상태라는 .

잠깐 고민하던 비서는 이내 해진 브라이트에 대한 정보를 갈무리했다. 다시 생각해도 라일이 불필요한 정보라고 쏘아붙일 만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향후 방침을 찾기 위해 덤덤하게 라일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할까요?

언젠가 녀석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했던 검은 책상을 두드리며 라일은 생각에 잠겼다. 다시 협상을 위해 찾아가려 했지만, 굳이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쫓아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주워섬기는데도 이상하게 미간은 펴질 줄은 몰랐다. 처음 계약할 세상 절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해진은, 이제 단호하게 필요 없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물론 해진의 동기가 저열한 금전 욕심이 아닌 알고 있다. 실제로 협상 조건을 위해 조사해 결과 그가 지급한 계약의 대가는 거의 전부라고 정도로 병원비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정보력으로 훔쳐본 해진의 통장에는 고작 주를 버티기도 힘든 돈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흘러가듯 생각하던 라일은 잠깐 멈칫했다. 이건 , 지난 5년간 해진은 자신을 위한 돈은 전혀 남기지 못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당연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찾는 따윈 라일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차피 그의 저택에서 생활하는 돈이 필요한 일이 있었을 없다. 그런 기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그의 귀에 들어왔으리라.

해진에 관해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라일은 불쾌함을 느꼈다.

톡톡 일정하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회장님?

“일단, 찾아내.

그런데도 일단 해진을 눈앞에 돌려놓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

해진은 마냥 앞으로 걸었다.

일단은 도망치듯 나왔으나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손에서 더는 놓칠 없는 사람은 용감해진다더니 자신이 모양이라고 해진은 덤덤히 생각했다.

늦가을이었던 계절은 어느새 겨울로 성큼성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저 제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은 그는, 계절이 저를 두고 달려가 버린다는 생각도 덧없이 흘려보냈다.

가장 두꺼운 옷을 입긴 했으나 바람이 매섭게 품을 파고들었다. 안에 있는 가족사진을 끌어안듯이 해진은 몸을 웅크렸다.

라일이 매년 지급해 주었던 옷은 따뜻하고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어차피 그의 것이 아니니 아쉬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두꺼웠던 코트는 구경도 사이 어느새 방에서 사라졌다.

버스를 이리저리 옮겨 타다 보니 도시 외곽이 나왔다. 적당히 먹을 뒤에는 그저 걸었다. 곳이 없어서 위를 걸었다.

“엄마!

“뛰면 다쳐.

그러다가 다리에 감각이 거의 사라질 즈음 해진은 벤치를 발견해 앉았다.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아이들 놀이기구가 놓여 있는 동네에 흔히 딸린 공원이었다.

작은 아이가 엄마를 향해 달려간다. 베타인 중년 여성이 걱정스레 말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활짝 팔을 벌리고 있었다.

작은 동작에서 해진은 어렵지 않게 그의 양부모님을 떠올렸다.

‘해진!

햇살 같았던 어머니는 그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아 주는 좋아했다. 사춘기 무렵에는 해진도 조금 질색하는 티를 냈다. 친구들이 그랬으니 그래야 하는 알았다. 그러나 품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깨달았다.

바보같이, 그러지 말걸.

입양되기 전엔 모습이 무척 부러웠더랬다. 그래도 입양된 이후에는 번도 저런 장면을 멍하니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 있었으니까.

다시 모습을 홀린 보게 줄이야.

아직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해진은 무서웠다.

***

“아직 찾았다고?

마지막으로 해진과 러트를 보낸 3주가 흘렀다. 그나마 러트 후라서 오래 버틴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페로몬 체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으리라. 그나마도 이번에는 미약한 두통이 끊이지 않아 고통은 그대로였다. 기껏 요란한 러트를 보낸 의미가 없었다.

해진을 찾으라고 명하긴 했으나 당연히 라일은 다른 오메가를 계속 섭외했다.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막상 해진을 찾으면 계약은커녕 그대로 무시할 가능성도 컸다.

언제까지나 계약할 오메가를 마주하고 앉을 시간도 없어서 이번엔 그냥 비서에게 일임했다. 적당히 열성으로 구해 두라는 말과 함께. 막상 해소가 갈급한 시기가 되면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어제, 페로몬 해소를 위해 저택에 갔던 라일은 기어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불쾌한 짓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채로 라일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페로몬이 쌓일 대로 쌓여 머리가 멍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진과 몸을 섞던 방에 해진과 같은 열성 오메가가 앉아 있었다.

해진처럼 눈을 가리고 양팔을 묶은 오메가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왜인지 옷은 아직 입은 채라 라일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벗기기까지 해야 하는 귀찮음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라일이 이런 수고도 필요 없이 효율적으로 협조하는 해진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러니까 오메가는, 해진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일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거센 거부감이 그의 명치를 누를 정도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통약으로 하루를 버틴 지금 라일은 짜증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해진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했다.

“아무래도 현금만 사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CCTV 근처를 다니지도 않고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고가 있을 만한 곳이 없어서 수색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더군요.

“하.

그간 번도 해진에 대한 수색을 묻지 않았던 라일이다. 덕분에 비서는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해진의 정보를 잔뜩 업무용 태블릿에 띄웠다.

밀려드는 두통을 참으며 라일은 침묵했다. 해진의 행동이 여러모로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임신했다는 결과라도 나왔다면 이해가 됐으리라. 그의 아이를 목적으로 도망치고 있다면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그런데 자신과의 계약이 이렇게 거부감이 들었단 말인가. 얼마 남지도 않은 짐마저 전부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필요 없어.

환청 같은 해진의 말이 울리는 순간 두통이 묵직하게 가슴 쪽으로 내려왔다. 이해할 없는 현상에 그는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찾아서 앞에 두면 명확해지겠지.

“브라이트 씨가 두고 짐들은 어찌할까요.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

해진은 찾아낼 있으리라. 어차피 도시에서 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라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얼마 남았네.

떠돌다 보니 외진 곳까지 버렸다. 기온은 그사이 떨어져서 간단한 말을 하는 와중에도 허연 입김이 계속 나왔다.

해진은 멍하니 안개 숲을 바라보다 다시 ATM 화면을 쳐다보았다. 당장 다음 주를 걱정해야 하는 적은 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집도 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상황인데 말이다.

막연한 건조함이 코끝을 스친다. 이제 한겨울이었다. 거센 비로 유명한 도시의 겨울에는 함박눈이 흩뿌려지기도 했다.

그러니 겨울은 스러지기 좋은 계절이었다. 어디 가서 객사라도 한들 눈이 그를 덮어 테니.

잠깐 고민하던 해진은 그냥 남아 있는 돈을 전부 인출해 버렸다. 애초에 인출기를 찾기 어려운 외곽까지 데다가 여러 나눠서 뽑을 만한 재산도 아니었으니까.

막연하게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표지판 하나가 그의 시선을 잡아챘다. 스노우 레이크.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왔던 외지의 호수였다.

그걸 보니 뜬금없이 호수가 보고 싶어졌다. 막상 가서 곳에 혼자 있다는 실감하면 혹시 눈물이라도 날까 싶어서.

기계음을 내며 돈을 뱉는 인출기를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잔뜩 흐리고 온도도 제법 싸늘한 것이 내일도 비가 같다. 눈이 오려면 아직 조금 있어야 하겠지.

지금까지는 나름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돌아다녔다. 미약한 불길함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다리의 고통도 잊고 다닐 있었다. 5 만에 바깥 구경을 탓인 같았다.

당연하게도 라일은 그사이 번도 그를 찾아오지 못했다. 찾지 못한 것인지 찾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13

이렇게까지 열심히 도망갈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 해진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라일의 말처럼 임신이 걱정이긴 했으나 어차피 자신은 열성이었다. 모르지만 분명 임신은 쉽지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페로몬 조절조차 마음껏 못하는 실정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무거운 주제를 생각할 여유가 해진에게는 없었다.

계약할 오메가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직 그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라일은 이렇게 대놓고 피하는 사람까지 쫓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까지 쫓아온 여전히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해도 되겠지.

사실 이런저런 핑계를 것에 가까웠다. 며칠은 물만 겨우 먹을 정도로 몸을 혹사했기에 지친 것도 사실이다.

돈을 꺼내 갈무리한 해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래된 모텔을 발견했다. 만에 하나를 위해 기계와 떨어진 곳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터덜터덜 다리를 움직였다. 한쪽 다리가 질질 끌리며 낙엽 사이로 흔적을 만든다.

자신이 뭐라고 라일이 여태 저를 쫓겠는가.

멀리 가기엔 지금 해진은 너무 지쳐 있었다.

***

빛나는 호수의 물결이 반짝반짝 어린 해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육원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태어나서 이렇게 멀리 나온 처음이었다. 커다란 양아버지의 자동차도, 지나오는 길에 커다란 마트도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였다.

모처럼 하늘에 해가 쨍하게 떠오른 날이었다. 아직 집에서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해진에게 부모님은 소풍을 가자고 했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가족들은 모두 분주해졌다. 아버지는 소풍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러 차고로 향했고 어머니는 수선을 떨며 부엌으로 갔다. 형은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 상자를 내밀며 해진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말해 주었다.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좋은 날씨였다. 외진 곳에 있는 호수는 사실 그다지 풍경이 다채롭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도 없어서 우리 가족만의 비밀 장소라며 아버지가 익살맞게 윙크했다. 실제로 그날도 해진의 가족들만 호수 근처에 피크닉 매트를 펴고 앉아 있었다.

비밀 장소에 초대받고 나니 정말 가족이 같았다. 하늘은 푸른색이고 어머니가 샌드위치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야말로 찬란한 날이었다.

“……진……!

“아…….

아주 오랜만에 그리운 광경이 호수의 물결처럼 사라졌다. 먹먹하게 눈을 해진은 어둡고 곰팡내 나는 천장을 보며 서러움을 삼켜냈다. 익숙하게.

“문 열어!

멍한 정신 사이를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침범했다.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해진이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순간 해진은 그의 찬란한 기억이 어두운 악몽으로 덮여 버린 아닌지 고민했다.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라일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만한 힘이 남아 있었나?

그러다가 거세게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끊겼다. 겨우 몸을 일으킨 해진이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덜컥 잠금쇠가 돌아갔다.

소리에 해진은 이게 현실이라는 깨닫는다.

“…….”

끼이익 문이 열리자 근처에서 숙박하고 있던 투숙객들이 소란을 향해 거센 욕설을 던졌다. 어둠을 등진 누군가와 함께 서늘한 밤공기가 해진의 안으로 밀려들었다. 기껏 품에서 자아낸 얼마간의 온기는 덧없이 흩어져 버렸다.

아무 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와중에도 해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오만하게 굴던 그가 전엔 절박하게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진.

“…….”

밖에서 굴러다니던 초라한 모습 그대로 해진은 침대 위에 구겨져 있었다. 그걸 발견한 라일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급히 올라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린다.

해진이 돈을 인출하고 얼마 , 정보를 입수한 비서는 흔적을 찾았음을 라일에게 보고했다. 돈을 움직인다는 법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시대였다. 라일에게 뒷배 하나 없는 타인의 개인정보를 캐내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그렇게 기다리면 되었을 일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가만히 저택에서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렸을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어둠이 까맣게 내려온 , 라일은 마지막으로 해진이 멈춰 섰다는 은행 인출기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녀석이 남아 있는 돈을 전부 인출했다는 사실이 못내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근처를 수색하던 경호원이 해진이 멀리 가지 못하고 모텔에 숙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왔다. 동양인의 얼굴도 까만 머리칼도 흔하지 않은 도시다. 해진은 일단 흔적만 남긴다면 얼마든지 추적하기 쉬운 상대였다.

그걸 들은 뒤로는 라일은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경호원들이 주인을 돈으로 매수해 열쇠를 얻어내기도 전에 먼저 여기까지 올라왔다.

자신도 이리 급히 움직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일 스스로도 자신이 놀라운데 오히려 침입을 받은 해진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덤덤하고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

건조한 공기가 온통 목구멍으로 쑤셔박혔는지 이상하게 목이 탔다.

“적당히 하고 돌아와.

돌아오라니.

해진은 멍하니 흘러가는 머릿속으로도 반발심을 느꼈다. 거긴 해진의 집이 아니었다. 그의 따사로운 집은 진작에 처참하게 모르는 사람 손에 넘어갔다. 그런데 어찌 그곳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란 말인가.

며칠이나 굶었다가 몸을 녹이지도 못한 잠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해진은 도무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긴 집이 아니야.

“…….”

분명 눈이 마주치고 있는데도 라일은 해진이 저를 보지 않는 같은 느낌을 받았다. 페로몬이 쌓이다 못해 뇌를 찔러 대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순간 시작된, 무저갱처럼 모를 갈증에 라일은 머리가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하는 뭐야. 말해.

으르렁거리듯 흘러나오는 라일의 말에 해진은 슬쩍 시선을 바깥으로 던졌다.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경호원이 근처를 둘러싸고 있었다.

장면을 보며 그는 홀린 내뱉었다. 너무 작아서 늦가을 밤사이로 덧없이 흘러가 버릴 만한 목소리였다.

“사라지고 싶어.

“……미치겠군.

라일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만큼은 그의 이성이 판단하기를 기다릴 없을 만큼 초조함이 몸을 잠식한다.

어두운 안에 무너져 있는 해진은 너무 작았다. 그대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기라도 것처럼. 그래서 사라지고 싶다는 속삭임을 듣는 순간 라일은 자신이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깨달았다.

성큼 녀석을 향해 다가간다. 덕분에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데도 해진은 덤덤한 기색이었다. 그게 오히려 라일을 자극하는 바람에 그는 짓씹듯 곁에 있는 이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일반인을 납치라도 하는 상황이었으나 경호원은 의문 없이 앞으로 나섰다. 해진이 제게 가까이 오는 남자를 무심결에 바라보자 경호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들었다. 그대로 녀석을 기절시키려는 몸짓이었다.

경호원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제지했다.

“잠깐.

굳어 버린 경호원이 의문의 눈길을 내보이기도 전에 라일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녀석을 그대로 들어 올린다.

“아.

맥없는 소리와 함께 해진은 그의 어깨에 걸쳐졌다. 잠깐 저항하려고 버둥거렸으나 힘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힘이 빠졌는지 녀석은 이내 늘어지고 말았다.

“돌아가지.

그래서 라일은 해진을 들어 올린 순간 헷갈렸다. 일처럼 제대로 버둥거리지도 않는 해진이 짜증 나는 건지, 생각보다도 가벼운 무게가 짜증 나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계약을 일방적으로 끝낸 해진은, 그렇게 거의 만에 라일의 손에 끌려갔다.

<챕터 3>

엉덩이에 닿는 푹신한 소파의 감촉이 멍한 해진의 정신을 일깨웠다. 처음 라일과 계약할 때와 똑같은 응접실, 똑같은 가구였다.

결국 저택으로 돌아왔구나.

“…….”

설마하니 라일이 그를 직접 들어다 납치라도 하듯 끌고 줄은 몰랐다. 여러모로 의외의 상황에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다만 며칠이나 굶은 몸이 몸살이라도 걸린 것인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싸구려 모텔답게 난방 장치도 어째 시원찮더라니.

끌려들어 응접실의 쪽을 무의식중에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던 라일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뒤쪽에 있는 비서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매번 눈앞에서 명함을 버려도 무표정한 사람이었기에 해진은 얼굴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계약해.

“…….”

그놈의 계약. 라일은 자꾸 해진을 찾는 것일까.

라일에게 지난 5년간 존재감이 옅었던 해진이 최근 톡톡 거슬리는 것처럼, 해진에게는 그간 저를 방치하던 라일의 이런 관심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비서는 때마다 조건을 늘어놓기나 했지, 특별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피검사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지, 만약 그런 거였다면 여기로 끌려오는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향했으리라.

“원하는 뭐야. 사라지겠다는 개소리 말고 원하는 말해.

              

#14

인생에서 고꾸라진 사람은 이따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라일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자신은 그저 엎어진 자세 그대로 있고 싶을 뿐이다.

이제 와서 라일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양극단에 있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없을 테니까.

그래서 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저한테 이러는 거죠?

단번에 대답이 나올 거라 믿었다. 해진에게는 미처 설명할 가치를 느꼈겠지만 라일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입을 다문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일말의 틈새가 해진은 의아하다.

“……너만큼 편리한 상대가 없어서 그럴 뿐이야.

다만 이어지는 말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피식 흘렸다. 잠깐 흘러들어왔던 의문점은 모래알처럼 사락사락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래, 만하긴 했겠지.

해진의 절박함은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으리라. 아마 열성인 자신은 히트 사이클마저 적어서 좋았을 테니까. 라일은 오메가가 오메가답게 구는 무척 싫어했다. 그러니 히트 사이클을 맞아 눅진해진 오메가 따위는 질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택에서 처음 히트를 맞았던 공교롭게도 해진을 안았던 라일은 크게 불쾌해했다. 어쩔 없이 질척거리는 몸을 보며 혐오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안대를 썼음에도 혐오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로 불규칙하긴 해도 번이나 히트가 왔다. 기간을 라일은 철저히 피했고 해진은 약을 먹으며 버텨 내야 했다. 그렇게 히트가 끝나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다시 방으로 라일을 받아내야 했다.

그러니 이런 그가 편리하지 않을 없었다.

“그렇겠지.

덤덤하게 말하는 해진의 고개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짜증 나지만 시선이 정작 나게 다른 곳으로 향하면 이번엔 갈증이 났다.

이해 상태를 보면서도 라일은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충동적이었으나 저택에 무작정 데려온 후회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늦은 밤이라 넥타이 따윈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근처가 불편하다. 무언가 걸리기라도 라일은 목을 더듬거렸다.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라일은 꺼림칙하고 불길한 기분은 애써 무시했다. 그리곤 아까부터 별다른 대꾸도 없는 해진에게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이따위로 떠돌다가 죽을 거면, 나한테 쓰라고.

뜻밖에도 그건 해진에게 일종의 해답처럼 들렸다. 기묘한 평안의 정체가 그랬던가.

그나저나 몸이 한껏 바닥으로 끌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부어오른 목구멍은 막힌 알싸한 통증을 냈다. 몸이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혀 떠오른 생각은 금방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

대답도 없이 묘한 표정이나 짓는 해진을 보며 라일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짚었다. 이상하게 표정 하나에 기껏 눌러두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앞에 계약서를 집어 던지며 라일은 계약을 종용했다. 어차피 사람을 억지로라도 데려온 이상 어떻게든 설득을 해내야 했다. 순간 라일에게 다른 오메가를 찾는다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 그랬던 대로 하나 까딱 하고 살게 테니까, 계약해.

“…….”

무심결에 해진은 라일이 생각보다도 뻔뻔하다는 묘한 감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자조의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저렇게 표현할 만큼 저택에서의 삶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폐로 들어가는 숨이 이상하게 나오지 못했다. 몸의 주인처럼 그저 그곳에 머무르겠다고 고집이라도 부리는 듯하다. 그는 앞에 던져진 하얀 종이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돌리니 천장의 샹들리에가 이상하게 부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까부터 저도 모르게 해진의 속눈썹 가닥까지 세밀하게 관찰하던 라일은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옅은 해진의 페로몬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그저 바닥으로 흘러내리기만 했다.

이상한 조급증이 라일은 협박이라는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혀끝에서 튀어 나가는 말이 이상하게 거칠거칠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억지로 범하길 바라나?

해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의 감정 소모는 너무 버겁다. 지금의 그가 버텨 내지 못하리라. 게다가 해진은 아주 알고 있었다. 라일은 정말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그를 범할 있는 사람이라는 .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막힌다. 그제야 자신이 정말 저택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는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곳으로 끌려왔다. 앞에는 계약을 빙자한 구속이 놓여 있었다. 종이 계약서가 그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는 구역질이 일었다. 뒤통수는 시린 호수의 얼음에 부딪힌 차갑게 아팠다.

해진은 라일이 다시 그를 부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서 계약했을 때처럼.

“……진?

이번엔 잔인한 말을 버텨 만한 절박함이 해진에겐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해진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진!

바닥에 충돌하는 몸에는 무서우리만큼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기절하기 직전 바라본 라일은 그가 번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해진은 이따금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정도로 고요했다.

응접실에서 그대로 쓰러진 해진을 저도 모르게 품에 들었을 이미 펄펄 끓는 고열이 있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비서가 빠르게 움직인 덕에 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라일은 오전 업무도 미룬 해진이 눈을 뜨길 기다렸다.

어젯밤은 충동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업무를 미룬 순간조차 충동이다. 이동 시간까지 단위로 체크할 정도로 라일은 매사를 계획성 있게 움직이는 좋아했다. 그러나 해진과 관련된 일은 오래전부터 그의 계획과 어긋났다. 러트나 페로몬 체증이라는 치밀하게 시기를 계산할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쓸데없는 형질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여전히 해진은 그에게 있어서 비일상적인 존재였다.

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그가 생각하기에도 상황은 불합리하다는 안다. 사실 해진에게는 계약을 받아들여야 이유가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휘청이다가 길에서 객사한들, 그건 그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라일은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해진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을 또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눈앞에 일단 해진을 두면 있으리라는 가정은 산산이 조각난 오래였다. 그는 아직도 해진과 계약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없었다.

모양이 해진을 놓아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또한 이상하다.

어차피 납치라는 극단적인 수를 마당에, 라일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해진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어쩐지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시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제게 바라는 이토록 없을까.

“…….”

공교롭게도 해진이 눈을 라일이 한참 복잡한 속내를 고찰할 때였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바라본 하얀 천장은 낯익었다. 익숙한 병원 냄새가 해진을 긴장하게 했다. 그러나 습관적인 긴장은 이내 허탈하게 풀어졌다.

이제 그의 가족은 병원에 있지 않았다. 병원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다가올지도 모르는 불행을 걱정해야 하는 일은 이제 없었다. 이미 불행에 삼켜진 사람은 이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지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건조해서 뻑뻑한 눈을 억지로 돌리며 해진은 안을 훑어보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놀랄 법도 하지만 해진은 힘없이 시선을 돌릴 뿐이다.

물론 간호인도 아닌 라일이 아직 그의 곁에 있는 의외였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왜인지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라일은 계속 이상할 모양이었다.

그는 석상이라도 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팔목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옆을 보니 링거가 달려 있었다. 그에게 주사되고 있는 링거 팩에는 베르무스 제약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상하게 눈앞의 라일보다 링거 팩의 로고가 그를 둔중하게 치고 지나갔다. 매서운 현실의 깨달음이었다. 베르무스 기업 산하의 병원에서 베르무스 제약의 링거를 맞으며 해진은 억지로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라일이 먼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상황에서 벗어날 없으리라고.

“계속 그렇게 척할 건가?

어딘가 성난 물음에 해진의 시선이 맥없이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의 존재를 무시한 아니었는데 이상한 반응이었다.

벌떡 일어난 라일이 해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라일의 구두 소리와 똑똑 떨어지는 링거의 물소리를 들으며 해진은 서러움을 다시 삼켜내야 했다. 잔뜩 부은 때문에 익숙한 행동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억지로 입을 열어 본다.

“삼 개월.

“……뭐?

“계약은 개월로 하죠.

              

#15

가장 좋은 역시 이대로 멀리 사라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해진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지금 상태가 살얼음 호수 같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저택에서 버틸 때와는 달랐다. 기절했을 때처럼 사소한 것으로도 그는 금방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다.

모든 놓아 버리고 싶다 한들 깨어지는 아픔까지 느끼는 아니었다. 그러니 차라리 라일이 건네는 거래를 받는 방법이라는 깨달았다.

이번에 그를 무작정 납치했듯이 라일에겐 얼마든지 초법적인 행동으로 해진을 강제할 방법이 있었다. 연고 없는 그의 존재가 법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사라지는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과정에서 아파야 하는 못내 두려웠다.

그러니 현실에서 라일이 제시하는 계약은 그야말로 해진을 보호하는 장치나 다름없었다. 번이고 도망만 치다가 겨우 돌아본 계약서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왜 개월이지.

“별 이유는 없습니다.

“너무 짧아.

“짧지 않아요. 그때까지 구하는 , 그쪽의 능력 부족이죠.

“…….”

다만 정도로는 부족하다. 해진은 한정 없이 그곳에 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오만한 라일의 성질을 건드리는 말을 부러 입에 담았다. 오기로라도 그의 의견에 승낙해 주길 바라며. 까슬까슬한 입술이 그사이 찢어져 맛이 났다.

약간의 고통을 감내한 평안을 기다리는 지금 그가 있는 최선의 방향이었다. 손목에 매달린 링거가 라일과 몸을 섞을 때처럼 그를 묶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후……. 그러지.

눈을 뜨자마자 얼굴로 천장만 보던 해진은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페로몬이 뇌까지 침범하다 못해 그의 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명했다.

게다가 대뜸 그렇게 피해 다니던 계약까지 승낙한다고 하니 라일은 슬며시 긴장되었다. 바라 마지않던 상황인데 해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무슨 속내인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쓰러진 녀석을 기다리며 라일은 나름대로 상태에 대해 분석도 참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가지 페로몬만 해소에 이용하다 보니 굳어져 버린 아닐까. 그러면 일단 해진을 저택에 들인 서서히 다른 페로몬으로 중화하면 되리라. 앞으로는 조금 귀찮아도 너무 계약만 유지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조건부라도 승낙하는 편이 이롭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개월이라는 단어가 까슬까슬하게 고막에 박혀서 무척 거슬렸다.

“그리고 예전처럼 언제든 그만둘 있다는 조항이 필요합니다.

해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자극하는 말을 쏟아냈다. 개월조차 보장되지 않을 있다는 사실에 라일은 갑자기 서늘한 겨울 공기가 병실 안을 침범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 기한은 채워.

“그 조항이 없다면 계약서가 제게 무슨 의미가 있죠?

“…….”

파르르 흩어지는 목소리였으나 내용은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터져 나와 피가 어두운 병실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싫다면 그냥 묶어 놓고 강제로라도 하세요. 그쪽이 제안했던 것처럼.

거칠거칠한 작은 입술에서 나온 소리가 이상하게 라일의 심장을 찔렀다.

제가 뱉은 말이 저렇게 잔인한 어조였던가.

“……그 조항은 이번에도 넣도록 하지.

어쩔 없이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사이 난리를 무색하지 않은 성과였다. 일단 지금은 정도로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다.

“쉬도록 .

짧게 내뱉은 그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볼일이 끝났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뚜렷한 목적 없이 병실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

“…….”

스르륵 닫히는 병실 문을 보면서 해진은 깊게 깊게 속으로 침잠했다.

조항 하나까지 따지고 들었으나 계약서는 그랬듯 그를 지켜 적이 없었다. 개월이라는 기간 또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라일에게는 그때 가서 얼마든지 말을 바꾸어 해진을 억류할 힘이 있었다.

라일이 먼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상황에서 벗어날 없으리라.

이번처럼 어설픈 행보로는 소용이 없다는 밝혀졌다. 그리고 왜인지 라일은 당장 그를 놓아줄 같지 않다. 그래서 그는 덤덤히 생각했다.

저택에서 나가려면 다음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그리고 해진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

“계약서를 준비해. 조건은 마지막으로 해진에게 제시했던 전부 넣어. 기간은 3개월.

기간이 이렇게 짧게 설정된 이상 제시했던 조건을 모두 지킬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해진은 솔직히 말하면 그가 제시하는 모든 물질적인 부분엔 관심이 없었다. 계약의 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래서 오기가 나머지 라일은 필요 이상의 보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주어진 것들이 실감 나지 않아서 저리 초연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손에 것들을 깨닫는다면 포기하기 힘들어질 테지.

“시가지의 빌딩 소유권과 레인 타워의 펜트하우스를 여전히 포함합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묵묵히 라일이 말하는 조건들을 메모하던 비서가 잠시 멈칫했다. 3개월로 단축된 기간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과한 처사였다. 대도시 헤비레인의 시가지는 돈이 있어도 땅이나 건물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해진이 언제든지 그만둘 있도록 조항을 짜라고 했을 비서는 조언해야 했다.

“해당 조건들은 개월의 계약 기간을 채우는 경우로 한정하시죠. 약속된 금전적인 보수는 경우에도 변함없이 지급하시고요.

“……그렇게 .

그제야 조금 감정적인 대응을 했다는 깨달은 라일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메모하는 비서 앞에서 그는 계속 병실을 훑던 해진의 눈길을 떠올렸다. 건조하기가 사막의 공기 같은 페로몬과 시선이었다.

“그리고 외출할 행선지를 반드시 알리도록 조항을 . ……위치 추적기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따로 보고하도록.

“네. 회장님.

에둘러 말했으나 비서는 단번에 알아듣고 메모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 해진을 쫓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또한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번 계약엔 개인 생활비 조항이 없었지?

“일단 브라이트 씨의 양친에게 들어가는 병원비가 적지 않은 액수였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저택 안에서의 생활은 부족함 없이 지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랬지.

“그럼에도 혹시 생활비 문제가 불거진다면 그걸 구실로 새롭게 계약을 유리하게 끌어오려고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

문득 변호사 하나 없이 계약서에 사인하던 작은 손이 불쑥 떠오른다. 미미하게 떨리는 하얀 손을 자신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생활비 조항을 넣을까요? 이번엔 병원비 지급이 주목표가 아니라서 불필요할 같습니다만.

“그래. 그때와는 다르니 신경 없겠지.

어차피 저택에서의 생활은 불편함이 없으리라. 라일은 까만 광택이 나는 책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짜증 나는 거슬림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

그때 메모를 끝마친 비서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라일이 기어코 해진과 재계약을 하게 줄은 몰랐기에 미뤄 두었던 보고 가지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이 건강한 오메가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일단 가장 먼저 비서의 머리를 스친 얼마 했던 해진의 피검사 내용이었다. 회장은 페로몬이 옅고 건강한 오메가를 원했다. 상대에게 건강 문제가 생겨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진은 이제 여러모로 라일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조건에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다.

의중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해진의 상태는 관련 사항이 되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보고할 때가 것이다.

“그런데?

“일단 저번 피검사 결과 영양실조가 위험한 수준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번에 병원 신세를 졌을 때도 비슷했고요.

“……영양실조?

“네. 이번에 입원한 병원에서도 여러 문제를 알려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브라이트 씨는 계약을 진행하기에 적합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괜찮으시다면 다른 건강한 오메가를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말을 길게 꺼내며 비서는 라일의 기색을 신중하게 살폈다. 그는 어차피 고용주의 말을 성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이지,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회장의 가치가 바뀐다면 또한 우선순위를 새롭게 짜면 일이었다. 이번에 결정되는 사안을 토대로 저번부터 묘하게 어긋나는 듯한 라일의 심중을 새롭게 이해하면 듯싶었다.

한편 비서가 하는 말을 들으며 라일은 아주 기가 심정이었다. 해진이 그의 저택을 떠나 있던 고작 달이 되는 기간이었다. 그사이 대체 몸을 어떻게 굴렸기에 영양실조란 말인가.

“설마 약이라도 손댄 건가.

세상 표정이나 비틀거리는 몸을 보면 의심스러웠다. 갑작스럽게 해진의 행적을 추적해야 하는 아닌지 짜증이 치솟았다. 그사이 어떤 새끼를 만나서 엉겨 붙었을지 어찌 안단 말인가. 단순히 찜찜함을 떠나 불쾌한 심정마저 라일을 감쌌다.

그러나 그의 오해를 불식하듯 비서는 다른 자료를 건네며 덤덤히 첨언했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16

“이건……?

“브라이트 씨의 병원 기록을 간추려서 모아 겁니다. 보시면 저택에서 생활할 때부터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섭식장애 쪽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해진은 몰랐으나, 그의 병원 진찰 기록은 착실하게 라일의 비서실로 보고되고 있었다. 건강 문제로 라일의 스케줄이 어그러지면 되기 때문에 비서가 알아서 관리하던 것이다. 그는 베르무스 산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어차피 병문안을 위해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다.

“해당 문제가 지속된다면 보고드리려고 모아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병원 기록들은 당장 계약 이행에 방해될 정도로 위중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비서는 그저 때를 기다렸다. 정도의 미미한 사안을 라일에게 보고했다면 전부 ‘쓸모없는’ 정보로 분류되었을 테니까.

“…….”

비서가 건네는 그간 해진의 행적을 라일은 그만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베타인 비서는 느꼈겠으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어하던 페로몬이 왈칵 쏟아질 정도였다.

어째 매번 마른 몸이 거슬린다 했더니 결국 모양이었다. 짜증스럽게 서류들을 넘기며 라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반응을 유심히 보면서 비서는 객관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았다.

“어쨌든 장기 계약에는 적합한 분은 아니신 듯해 말씀드립니다.

말을 무시한 라일은 계속 서류의 내용을 살폈다. 비서가 준비한 요약본을 넘어 언제 무슨 일로 해진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지 세세한 기록들까지.

기록에 따르면 몸이 아주 약간 좋아도 해진은 병원에 갔다. 아마 병문안을 주기적으로 가니 접근성이 좋았던 덕도 있으리라.

세심한 발자취를 보면서 라일은 무언가 어긋나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꼬박꼬박 병원은 알면서 정작 몸은 그렇게 마를 때까지 방치했다는 말인가.

이해할 없는 그의 행보에 인상을 쓰던 그는 비서가 한쪽에 치워 두는 서류에 문득 눈길을 주었다.

“그건 뭐야.

“아, 그건 이번 병원 입원 나온 진단 기록입니다.

비서가 서류를 홀린 가져온 라일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의심과는 다르게 해진의 약물 검사 등은 깨끗했다. 다만 그저 한없이 상태가 엉망일 .

게다가 뜻밖의 사실까지 그의 눈길을 잡아챈다.

“……진의 다리에 문제가 있었나?

“네. 사고 후유증입니다. 초기 계약 당시에도 확인했으나 계약 이행에는 지장이 없어서 넘어가셨습니다.

보고는 들었으나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모양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왼쪽 발목이 박살이 났다가 수술로 회복된 모양이다.

부분을 라일이 유심히 보자 고민하던 비서는 덧붙여 말했다. 해진 대신 의사를 만났을 들었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무리하면 되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

순간 라일의 머릿속에는 일부러 한쪽 다리를 끌며 저항하던 해진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그가 녀석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저택 안으로 끌어당길 때의 일이다.

만약 일부러 그런 아니었다면.

분명 그때 해진은 왜인지 도시를 헤매고 있었다고 했다. 병문안을 가겠다고 저택의 차도 채로 홀로 나갔다고. 그렇다면 필시 무리를 했을 것이다. 정말 일부러 반항하듯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라일은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를 고쳐 맸다.

아무리 매듭을 매만져도 이상하게 목이 답답하다.

***

늦은 저택으로 돌아간 라일은 서재 의자에 깊게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일정이 어그러진 탓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잠깐 충동을 부린 것치곤 번거로운 대가를 치른 것이다.

잠에 빠지기 아직 처리해야 일이 남았다. 저택의 일은 대부분 집사에게 일임했으니 이제 해진이 돌아올 것을 알려줘야 했다.

“……브라이트 씨가 말입니까?

“그렇게 됐어. 준비해 두도록.

“네. 방은 어떻게…….

그저 마디로 끝날 명령이었는데 집사의 질문이 이상했다. 어차피 지난 5년간 해진이 살던 방이 있으니 주인만 돌아오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일은 문득 녀석의 방이 외진 곳이었다는걸 떠올렸다.

거긴 해도 들지 않고 저택의 주요 시설과는 너무 멀었지.

“진의 상태가 좋은가?

“저기, 그게……. 전부 정리했습니다.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처분했다는 소리가 의아했다. 라일은 금방 침실로 떠나려던 몸을 내리눌렀다. 집사의 안색이 아까부터 불편해 보였다.

“난 그런 명령은 적이 없는데.

“죄송합니다.

집사는 즉각 허리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으나 라일은 손을 휘젓고 말았다. 불쑥 이상하다는 생각에 말하긴 했으나, 사실 해진의 방을 유지해야 이유도 없었다.

최근 들어 라일의 심기도 무척 불편했으니 사소한 문제는 임의대로 처리했으리라. 그는 적당히 상황을 흘려들었다.

“그……, 사실 정리랄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물건 대부분은 브라이트 씨가 개인적으로 처분하셔서…….

“……그래?

다만 피곤함에 상황을 대충 흘리는 라일과는 다르게 집사는 바짝 긴장했다.

베르무스가의 집사로서 자부심을 가진 그는, 최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 그의 친척을 운전사 자리에 몰래 앉힌 것도 문제인데 하필이면 그놈이 사고를 버린 것이다.

아무리 우습더라도 오메가가 병원에 가는 계약에 명시된 사항이었다. 집사는 조건을 지켜야 의무가 있었다. 웬일로 해진이 저를 찾는다는 귀찮아서 무시했는데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마지막은 그로서도 기분이 찜찜한 결말이 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부모의 죽음까지 빠르게 알리지 않은 실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아무 없이 그만두고 나가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설마, 돌아오다니.

사실 해진의 방에 남아 있던 물건들은 이미 사용인들이 없이 가져가 버렸다. 본래 사용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진의 물건에 손을 대는 알고 있었으나 집사는 그저 묵인했다. 어차피 그의 선에서 해진에게 지급하는 물건들이었고, 고작 창부 같은 놈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정도의 고급품도 많았으니까.

다만 정도로 그쳤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간 도둑질에 들인 사용인들이 해진이 떠난 알자마자 일을 버렸다. 또한 베르무스가의 저택에서는 있어서는 일이었다. 이제 관련자를 색출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들의 범행 동기를 설명하려면 집사의 오랜 묵인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를 테니.

그러니 무조건 숨겨야 한다. 가능하면 오메가가 입을 열기 전에 다시 저택을 발로 나가면 좋을 .

“그럼 새로 준비할 것이 많겠군.

“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시 만한 상태도 아니어서……. 방은 그대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오해하고 혐오감을 느낄 만한 말을 던지니 과연 그의 주인은 크게 인상을 썼다.

가장 최근에 오메가를 직접 준비시켜 방에 몰아넣었던 집사는, 평소처럼 옷을 벗기려 하자 욕설을 내뱉던 오메가 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저택에 방문하는 오메가들이 전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해진을 다시 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아니. 위치를 옮기지.

어차피 전부 새로 준비해야 한다면 굳이 방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위치를 옮기는 것도 고집할 필요가 없었으나 라일은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회상할 뿐이었다.

구석진 방문 앞에서 비에 쫄딱 젖어 있던 녀석의 모습을.

“본관에 있는 손님방을 주도록 .

“……본관 말씀입니까.

본관은 라일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손님방은 당연하지만 베르무스가의 중요한 손님이 묵는 곳이다.

그의 말을 들은 집사가 황망히 되물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베르무스 저택까지 모셔야 하는 중요한 손님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어차피 남는 방을 해진에게 준다고 해서 나쁠 없으리라.

“문제 있나?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집사의 반응이 어째 이상했다. 아까부터 무언가 톡톡 거슬리듯 그를 자극하는데, 마땅히 짚이는 곳은 없어서 라일은 그저 집사를 바라보았다.

문득 해진의 무척 마른 몸이 떠올랐다.

“그런데, 진이 밥을 많이 걸렀다던데.

태연한 그의 질문을 들으며 집사는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꼈다. 혹시 오메가가 무언가를 나불거린 아닐까.

조금씩 라일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변명이 만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가, 식사를, 하시는 편이라…….

보아하니 예상대로 해진은 입이 짧게 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라일은 여전히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손님이 까탈스럽게 군다고 한들, 그걸 관리하고 맞추는 집사의 역할 아니던가.

“그럼 잡아 놓고라도 먹였어야지. 취향이 있다면 맞춰 주고.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는 역할 아닌가?

“그, 그것이…….

집사가 금방 곤란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보면서 라일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그의 선친 대부터 저택에서 일했던 집사는 가끔 이렇게 거슬리게 때가 있었다. 아직도 라일의 어릴 적만 기억하면서 저택 문제는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구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은 이따금 주인의 권위를 미세하게 침범하기도 했다.

라일은 그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17

거대한 저택은 대를 이어 내려온 오래된 곳이었다. 덕분에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사임한 집사를 제외하면 그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집사가 후임으로 점찍어 놓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라일이 허울만 좋은 저택에는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제일 이유였다. 그의 부모가 어처구니없게 죽어 발견된 곳도 저택이다. 저택을 차지하고 있는 베르무스가를 장악한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시의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으리라.

어쨌든 이번만큼은 집사의 행동이 거슬릴 정도로 도를 넘었다. 특히나 해진과 관련한 실수가 너무 잦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일은 가차 없이 사실을 지적했다.

“저번부터 실망하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집사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베르무스가의 젊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걸 묵묵히 내려다보던 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한 찜찜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났다.

아직 머리가 조금 무겁지만 라일은 바쁜 일정들을 소화해 냈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불편해도 숨기며 생활하는 데는 익숙했다.

다만 오늘은 회장실에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알파인 그는 아까부터 불편한 낯을 숨기지 않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라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

그러거나 말거나 급한 일을 끝마친 라일이 드디어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잊고 있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이 녀석, 어른을 이렇게 모셔 두고…….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모신 아니라 멋대로 쳐들어오신 아닙니까. 비서 명까지 매수해 가면서.

“…….”

다니엘 베르무스는 두툼한 턱을 움찔하며 라일의 기색을 살폈다. 그저 숙부라는 관계를 이용해서 억지로 찾아온 꾸몄는데 그가 비서를 매수해 놨다는 어찌 알았다는 말인가.

그를 향해 건방지게 턱짓하는 라일을 보면서 다니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린 녀석이 이렇게나 성장할 줄이야.

라일의 아버지이자 그의 형이 갑작스럽게 죽고 다니엘은 잠깐 꿈을 꾸었다. 아직 어렸던 라일을 대신해서 거대한 베르무스가의 주인이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성장한 라일은 금방 그의 자리를 치고 올라왔다. 막대한 유산 상속 소송 끝에 다니엘은 패배했다. 그날 이후로 라일은 이렇게 줄곧 시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다니엘은 더욱 화를 삼키지 못했다.

“용건은요?

피곤하다는 라일은 미간을 문질렀다. 앞에 앉은 다니엘은 그야말로 금방 터질 것처럼 시뻘건 얼굴이었다. 그나마 바로 내쫓지 않고 이렇게 상대를 주는 친족에 대한 예의라는 모를까.

어쨌든 베르무스의 일원답게 다니엘은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곤 이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라일을 떠보는 말을 던졌다.

“요새 저택으로 오메가를 많이 불러들인다는 소리가 있더구나.

순식간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바쁜 사람의 집무실에 찾아와 고작 하는 얘기가 이런 것이라니.

친족 회의에서 라일의 이런 상태를 신경 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심점이 적통 후계자를 원하는 어쩔 없었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게 이렇게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서 해야 정도로 중요한 말인지 라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혐오증은 나아진 게냐.

“신경 끄시죠. 말이 그게 다면 나가세요.

“네 녀석은 정말…….

열등감으로 가득한 그의 숙부는 때로 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욕심을 내곤 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패배하더니 아직까지 이렇게 욕심에 휘둘린다.

더는 참아 없었던 라일은 즉시 경호원을 호출했다. 그가 호출한 뭔지 알아챈 숙부는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끌려 나가기 전에 먼저 발로 사라졌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알파 같은 모습에 라일은 혐오스러운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회장님.

“들어와.

나가는 숙부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비서가 그를 불렀다.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라일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까 일을 일단락하긴 했으니 잠깐 머리를 식힐 요량이었다.

“매수된 비서는 해고해.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찾아오는 짓은 하게 하도록.

“접근을 완전히 막습니까?

“아니, 약속을 잡게 .

“알겠습니다. 매수된 쪽은 전에 사직 처리해 두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끓어올랐던 감정을 내리눌렀다. 부모님의 장례식에 와서 그를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라도 바라보던 친족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혐오는 그가 가장 떠올리는 감정 하나였다. 주변 환경이 그렇게 이끌었기에.

뒤로도 비서는 숙부 앞이라 함부로 내보일 없었던 중요 안건들을 보고했다. 라일은 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오후 일정을 고민했다.

그때 비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언가를 확인한 비서가 업무용 서류철에 메모를 남겼다.

“무슨 일이지?

“아, 브라이트 씨의 퇴원일이라 차를 보내려고 합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잔잔한 파동이 라일을 훑고 지나갔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오늘, 빗방울이 집무실의 창을 다닥다닥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해진은 그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얌전히 있다는 보고는 이따금 들었는데 오늘이 퇴원이었군.

“같이 가지.

“네?

놀란 되묻는 비서를 보며 라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은 충동으로 가득했다.

“퇴근하면서 데리고 가지. 병원이 근처니까. 계약서 마무리도 있고.

그러나 이번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저택으로 가는 길목에 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에도 어차피 해진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으려면 오늘 얼굴을 맞대기는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되물었던 비서는 이내 의문을 지우고 충실하게 대답했다. 창밖의 거센 빗방울에 시선을 던지면서 라일은 충동을 애써 무시했다.

***

“…….”

“…….”

막히는 정적이 안을 지배했다. 분위기를 간파한 비서는 종종 뒷좌석의 눈치를 살피며 손에 태블릿을 조작했다. 라일의 일이 끝났다고 해서 그의 일까지 끝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퇴원 차가 온다는 소리에 기다리고 있던 해진은 안에 라일이 있어서 잠깐 당황했다. 다만 조수석의 비서를 보며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얌전히 올라탔다.

페로몬 해소를 때가 아니면 마주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나마 페로몬 해소도 얼굴을 맞대며 한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일의 페로몬은 갈무리되었다. 덕분에 해진은 그의 의중을 없었다. 애초에 그는 페로몬을 조절한다거나 느낌을 읽는 것엔 서툴렀다. 베타밖에 없는 집안에서 성인이 되어서야 겨우 열성으로 발현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자동차는 없이 저택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서면서 해진은 문득 해방감을 느꼈다. 뒤에서 페로몬을 라일이 유심히 읽고 있다는 것도 모른 .

“가시죠.

비서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마중 나왔던 집사도 방을 안내하기 위해 옆에 동행했다. 라일과 함께 해진을 몰래 살피는 집사의 눈길에는 미미한 경악이 서려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다시 침묵의 길이 시작되었다. 치료를 받았다지만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다리가 조금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쑤시는 것도 사고 후유증이라 어쩔 없었다.

다리를 끄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해진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다리를 향한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돌아보았다.

“……?”

그러나 옆에 있는 라일은 묵묵히 앞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함이 가시기도 전에 해진은 연이어 의아함을 느꼈다. 제가 원래 있던 방도 아니고 응접실도 아닌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번도 없는 본관 쪽이었다.

그곳에 있는 커다란 손님방 앞에서 라일이 문득 말했다.

“앞으로 방을 쓰도록 .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신경 듯한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환한 내부와 밖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을 바라보던 해진은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굳이 저택으로 향하는 차를 때부터 말이다.

“…….”

방에 들어서며 라일은 무심코 해진의 표정을 살폈다. 의아함을 담은 표정을 보면서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이내 창밖까지 훑어본 해진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짧게 드러났던 흥미는 덧없이 흩어졌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비어 버릴 같아서 라일은 문득 초조함을 느꼈다.

“계약서입니다.

안내를 마친 집사가 돌아가자 비서는 방에 딸린 작은 응접실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개인 화장실만 겨우 딸려 있던 이전 방을 기억하는 해진은 어색하게 그곳의 소파에 앉았다.

부드러운 천이 손끝에 스치니 더욱 어색하기만 하다. 너무 넓어서 화장실까지는 한눈에 닿지도 않는 좋은 방을 굳이 자신에게 주는 걸까.

어차피 무슨 방이든 그에겐 상관없긴 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다면 이런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18

“꼭 저택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까? 저번에 빌려 방도 멀지 않아 괜찮을 텐데.

가볍게 말을 꺼낸 해진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짐을 버리고 나왔던 허름한 단기 룸과의 거리를 가늠이라도 하듯이. 오늘따라 유리창을 다독이는 빗소리가 거세게 느껴졌다.

말을 하고 보니 좋은 생각처럼 느껴졌다. 처음 계약할 때야 자리가 무척 절실해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다른 생각도 떠올려 있는 아니겠는가. 마지못해 계약에 응하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휘둘리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진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밖의 거센 빗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눅눅하고 거대한 불쾌함.

“안 .

“하지만…….

“진, 저택에 있는 조건이야.

“…….”

저도 모르게 강하게 내뱉고 뒤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새 해진의 눈길이 그를 향한다.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미약하게 진동하던 그의 페로몬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파르르 흩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기대 따윈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짐은 이미 챙겨 놨으니, 허튼 생각하지 .

밖이 이리도 습한데 목구멍 안쪽은 말라붙어서 쩍쩍 달라붙기라도 기세였다. 그러나 모든 애써 무시한 라일은 그저 녀석을 압박할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거센 라일의 말투에도 해진은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동의했을 뿐이다.

저를 비켜 나가는 시선을 왜인지 잡아채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올라왔다. 그러나 최근 이런 충동에 익숙해진 라일은 가까스로 그걸 내리누를 있었다.

곁에서 둘의 이야기를 지켜보던 비서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해진의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앞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방금 제안이 거절당했으니 무어라 한마디 법한데도 말이다.

열성인 해진은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가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진득하니 계약서를 읽는 동안 옅은 페로몬이 안에 희미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페로몬이라면 응당 담고 있는 미약한 감정이 왜인지 그에게는 없었다. 그저 한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기만 하는 무미건조한 체향.

라일은 왜인지 아까보다도 한층 안이 건조해졌다고 느꼈다.

“보상 방안은 5페이지에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

뒤로도 비서는 라일을 대신해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모든 설명에도 해진은 그저 계약서를 넘길 뿐이다.

서류를 들고 있는 하얀 손을 라일은 무심코 쳐다보았다. 작고 힘이 없었지만 흔들림 없이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는 손이다. 그가 기억하는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는데.

서류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눈길이 이상하게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무렵, 계약서 중간에서 멈춘 해진은 그대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원하는 조항은 찾았으니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비서가 말한 보상 방안은 해진이 멈춘 바로 뒷장이었다.

그대로 서류를 내려놓은 해진은 펜을 들었다. 그리곤 서류의 서명란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 생각을 정리한다. 끝까지 읽어 보지도 않는 무모함에 라일이 인상을 쓰자 해진이 불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걸 , 손을 묶는 수갑으로 바꿔 줬으면 좋겠는데요.

“……뭐?

무얼 말하는지는 금방 알아들을 있었다. 그러나 묶지 말라는 소리도 아닌 이상한 제안에 라일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표정을 살피던 해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에 라일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를 긴장시켰으나 정작 해진은 피곤하게 눈을 내리깐 탓에 그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적어도 혼자 준비할 있도록 주세요. 집사 앞에서 옷을 벗고 싶지 않습니다.

“뭐, 라고……?

순간 라일을 덮친 깨달음이었다.

집사가 해진의 양손을 묶는 알고 있었다. 라일이 간과한 사실은 상태로 해진이 옷도 벗으려면 필연적으로 집사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간 관심이 없던 라일은 그저 편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일전에 해진 대신 이곳에 왔던 열성 오메가가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를.

지금까지 알파인 집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진을 벗기고 묶도록 만든 꼴이었다. 그리고 볼품없이 꼼짝도 하는 녀석의 수습마저 그런 수치 속에서 이루어졌을 테지.

다름 아닌 라일 자신이 명령한 결과였다.

“안 됩니까?

“……그러지.

아까부터 눈길을 잡아채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던 라일은 언제 그랬냐는 곤란하게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똑바로 해진을 마주 보기가 거북했다.

분명 녀석이 감내하든 그가 아니었는데, 이제야.

급기야 창밖에서는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에 맞춰 거센 빗줄기가 한층 창문을 매섭게 내리쳤다. 숨만 들이쉬어도 냄새가 나는 날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슬쩍 입가를 가린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버거울 정도로 목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대답을 들은 해진은 덤덤히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했다. 손이 덜덜 떨리던 순간이 위에 겹쳐 보였다.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계약서를 끝까지 보지도 않는 해진을 마찬가지로 신경 쓰던 비서가 머뭇거리다 선언했다.

해진은 여전히 막대한 보상 쪽에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

찜찜함이 남았는지 비서는 서류철을 갈무리해서 직접 해진에게 건네주었다. 시간이 뒷부분을 보라는 정중한 말과 함께.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위아래로 흔들리는 그의 고개는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볼일이 끝났으면 나와야 한다. 그런데도 라일은 어쩐지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만 느껴졌다. 의아한 해진의 시선을 뒤로 맞으며 방을 나서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회장님.

“…….”

대답은 없었으나 오래 라일의 곁에서 일한 비서는 그게 무언의 긍정임을 알았다. 마치 아까 해진이 힘없이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무언의 긍정을 했던 것처럼.

잠깐 앞으로 말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지 가늠하던 비서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라일과 베르무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자신이라도 해진에게 부채감이 드는 사실이었으니까.

초법적인 영역을 간혹 오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베르무스 기업의 기본은 법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납치까지 당한 해진은 동의할 없겠으나 그래도 이렇게 끝까지 계약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때문이었다.

해진이 파악한 것처럼 너무 힘의 격차 앞에서는 오히려 이런 계약이 보호막이 된다. 계약을 빌미로 약자를 핍박하는 어중간한 격차 앞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베르무스는 이런 종이 증거 따위 남기지 않고 해진을 휘두를 힘이 차고 넘쳤다.

그러니 방금 해진의 지난 5년간의 단면을 비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는 특히나 성별이 명확히 구분된 베타이기에, 이런 추행이나 마찬가지인 일에는 다소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계약은 해진과 라일 사이의 문제였으니까.

“그런 방법까지 종용하는 과한 처사입니다. 늦게 발현했다고는 하나 오메가이시니까요.

말을 꺼내면서도 비서는 유심히 라일의 표정을 살폈다. 회장은 아까부터 어딘가 갈급한 얼굴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도망이라도 치는 느낌이라 비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알아.

모를 긍정에 비서는 인상을 썼다. 라일이 알고도 그런 건지 이제 알아차린 건지 무언가 모호하다. 그러나 무엇이든 사실 상관없었다. 그의 상사는 고작 이런 걸로 가책을 느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비서는 덤덤하게 놓치고 있을 만한 점을 짚어 보았다. 어차피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그의 말을 라일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비서가 취해야 태도가 조금 명확해지리라.

“조금 적응하실 시간을 주는 나을 같습니다. 아직 건강 문제도 있고요.

그러나 순간 라일이 급히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비서의 다리가 꼬일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진의 몸은, 아직도 좋지 않나?

“당분간은 영양 섭취가 중요하고 과격한 움직임은 삼가는 좋다는 의사 소견입니다.

불쑥 손을 들어 올린 라일이 입가를 감쌌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되는 것처럼.

그걸 지금까지 흔히 있던 두통이라고 판단한 비서가 휴대폰을 들었다. 만약 해진에게 시간을 작정이라면 약의 도움이 필요하게 테니까.

“괜찮으십니까? 바로 약을 준비할까요?

페로몬을 억지로 해소하는 약이었다. 작용에서 있듯이 몸에 좋지는 않았다. 만약 부작용만 없었다면 이리 힘들게 오메가와의 결합을 시도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비서의 말에 라일은 눈에 띄게 흠칫 놀랐다.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순간만큼은 당황을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 순간 두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

“……아.

문득 눈을 해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다는 깨달았다. 요즘 들어 까무룩 잠들었다가 흠칫 놀라며 깨어나는 일과였다. 그만큼 하는 일이 없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으나 라일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집요하게 계약서를 들이밀기에 사인하는 순간 방에 끌려가기라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19

덕분에 그저 누워서 시간을 죽이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조금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이런저런 일을 시도했겠으나 의지가 없었다.

쓸데없이 높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진은 멍하니 그곳의 정교한 무늬를 헤아렸다. 설득이 되어 외부에서 묵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연하지만 해진은 라일이 박은 조건들을 협박으로 알아들었다.

하다못해 원래 쓰던 방이라도 배정되었다면 편했으리라. 방이 너무 광활한 탓일까, 해진은 자신이 더욱더 작게 쪼그라들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원래 방은 저택의 외부로 통하는 길과 가까워서 좋았다. 따위 귀찮기만 일이다. 당장 무언가 시도할 생각은 없어도 이렇게 저택 가장 안쪽에 있으면 곤란했다.

누워 있던 해진은 손만 움직여 침대 매트리스 깊숙한 곳을 파헤쳤다. 그곳에 걸리는 지갑을 꺼내 안을 살피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사진과 약간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제자리에 숨겨 두면서 해진은 생각에 빠졌다. 그에게는 어차피 신용카드가 없었으나 있다 한들 없으리라. 이번에 발각된 아무래도 현금 인출 기계를 이용했기 때문일 테니까.

그러니 현금은 마지막 기회가 . 당연하지만 라일이 제시하겠다고 물질적인 부분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이대로 3개월만 버티면 라일이 알아서 그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을 필요도 없이 무사히 걸어 나갈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계획이 어그러진다면.

상황을 상상하던 해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먼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휴…….

무심코 라일의 이상행동을 떠올린 그는 그냥 한숨을 쉬며 도로 자리에 누웠다.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저 무너지지 않는 있는 최선이었다. 여전히 이상은 버겁다.

필요해지면 알아서 부르겠지.

다시 천장의 무늬를 따라 그릴 있을 때까지 눈으로 훑던 그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긴장했던 해진은 힘없이 누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라일의 부름이라면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강제로 문을 것이다.

예상대로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였다. 웬일인지 그는 직접 음식을 올린 트레이를 밀고 있었다.

“브라이트 . 식사입니다.

“…….”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 집사가 겨우 그의 식사를 직접 챙기겠다고 것도,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것도 모두 불쾌했기 때문이다.

저택에서 집사를 마주하는 순간은 모두 불쾌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되지도 않는 미소를 안으로 걸어오는 모습은 보기 거북했다.

“식사량이 적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몰라 동향의 음식을 준비해 보았는데, 어떠신지요.

‘천박한 오메가 주제에 말이 많군. 벗겨서 묶어 두라는 주인님의 명령이다.

“…….”

그가 만면에 웃음을 지은 들어 올린 음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리고 검은 머리긴 해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해진은 당연히 뭔지도 모를 음식이었다.

“혹시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시다면…….

“집사님.

아무리 불쾌해도 해진은 참아야 했다. 서러움이 밀려오면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삼켜 냈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을 이불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죽였다. 그러면서 같이 죽인 그의 마음과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러움을 다시 버텨 재간이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저택을 뛰쳐나가고 싶어질 테니까.

설령 무슨 방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네, 브라이트 .

“나가 주세요.

“그게, 일전에는…….

“나가 주세요.

해진은 그저 덤덤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앵무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집사가 대체 바라는지는 안다. 일전에 제가 저지른 실수를 라일에게 말하지 말라는 거겠지.

설마하니 라일이 해진의 말을 듣고 그를 처벌할까 걱정하는 아니리라. 단지 상황이 계약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고작 잘못을 덮기 급급한 이의 사정 따위 해진이 알아줄 필요가 없었다.

저택에서 그의 사정을 알아준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집사는 모멸감으로 얼굴을 붉힌 물러났다. 다소 강하게 닫히는 방문 소리가 들린다. 이러니 해진은 의문이었다. 자신이 앞에서 욕을 것도, 그의 옷을 벗기려 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모욕감을 느끼다니.

그가 두고 음식에서는 거북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음식은 그의 양부모가 찾아다 해진의 뿌리와도 상관없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집사가 진득하니 흘려 놓고 불쾌한 페로몬까지 맡으며 뭔지도 모를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다가가 음식 뚜껑을 닫은 해진은 트레이를 그대로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곤 비가 들이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고요한 바람 소리가 흘렀다.

비가 안을 침범하는 장면을 침대에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방을 나온 집사는 고풍스러운 복도를 걸으며 이를 갈았다. 건방진 창놈 자식이 이렇게 그의 앞에서 뻗댈 줄이야.

성인이 해진은 조금 윽박지르는 것으로 무척 고분고분하게 굴곤 했다. 그간 라일과 계약한 오메가들이 저택에서 부리던 행패를 생각하면 아주 손쉬운 손님이었다. 솔직히 주인이나 손대는 고급 창부를 이리저리 벗기는 재미도 은밀하게 즐길 있었다.

물론 그간 조금 심하게 방치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른 사용인들은 몰라도 집사는 해진이 혼수상태인 양부모의 병원비를 갚기 위해 저택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동정심을 가져 볼까 했더니, 저렇게 시건방지게 나올 줄이야.

문득 저택을 나갔던 말도 무시한 떠나갔던 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꼴이 가여워서 조금 잘해 줄까 했더니 금방 다른 콧대 높은 오메가처럼 굴지 않는가. 예전의 해진을 생각하면 조금 어르고 달래는 걸로 금방 입을 막을 있으리라 여겼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와 같은 열성인 주제에 짜증이 났다. 열성 형질 따위로는 주인에게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너무 과분한 방까지 받지 않았는가.

까드득 이를 갈며 집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라일이 무슨 생각으로 다시 해진을 데려왔는지는 이해할 없었다. 그러나 해진이 다시 사라지는 편이 자신의 사소한 실책도 가릴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말이리라. 있으면 빠르게 말이다. 집사는 이것이 그의 주인을 위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전에 시건방진 태도는 조금 눌러 필요가 있었다. 라일이 없는 저택에선 집사인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연한 아니던가.

빌미만 생긴다면 오메가가 발로 나갈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이게 저택의 주인을 위해서였다.

***

“잠은 주무십니까?

“그런대로.

이리저리 붙어 있던 기계가 떨어졌다. 라일은 흐트러졌던 옷을 가다듬으며 그의 주치의 앞에 앉았다.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은 없으시고요.

“알잖나. 스트레스라고 하면 빌어먹을 페로몬뿐인 .

최근 들어 상태에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라일은 은밀히 병원을 찾았다. 지금까지 상태가 좋지 않아 찾은 적은 있었으나 두통이 없어서 의사를 찾은 처음이었다.

의사는 당황한 모양새였으나 금방 평정을 되찾고 진찰을 시작했다. 그는 라일의 페로몬 체증 현상을 알고 있는 되는 사람이었다.

작은 사안이라도 그냥 넘어갈 없었다. 특히나 해진을 저택에 데려온 순간 두통이 사라졌다는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해진과 러트를 보낸 페로몬 해소를 번도 하지 못했다는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다.

“으음. 일단 페로몬 체증 상태가 호전된 아닙니다.

출력된 그의 검사 결과를 보며 의사는 진단했다. 소리에 라일은 미약한 실망감을 감출 없었다. 혹시라도 오메가와 몸을 섞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생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행운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두통이 없지.

그렇다면 호전된 보이는 상태는 이상 반응이 맞았다. 조금의 불확실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라일은 의사에게 적합한 해답을 요구했다.

침착하게 검사 결과를 살피던 의사는 안경을 추어올렸다.

“일단 두통이 해소된 상성이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접촉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일 있습니다.

“…….”

무심코 해진을 떠올린 라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성이 맞는다니, 곤란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이건 미미하고 일시적인 방법일 뿐입니다. 아무래도 성관계로 하는 페로몬 해소와는 비교도 없죠. 혹시 최근에 우성 오메가를 만나셨습니까?

당연하지만 오메가를 힘들게 안는 것보다 그냥 같은 방에 앉아 있는 훨씬 낫다. 미미한 방법이라도 절실했던 라일은 실망의 감정을 애써 숨겼다.

마지막 단추를 끼우며 그저 무미건조하게 해진을 떠올린다.

“아니. 계약한 열성 오메가야.

그러나 기대 없이 말에 의사는 주름진 눈을 치켜뜨며 의아함을 표했다.

“열성이요? 으음……, 그건 이상하군요.

              

#20

“왜지?

“열성이라면 임시방편도 소용없습니다. 애초에 과하게 나온 페로몬이 우연히 작용하는 거니까요. 열성에겐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

그의 인생의 유일한 변수가 자꾸만 톡톡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부모님이 일찍 사고로 버리고 상속 전쟁에 휘말렸을 때도 라일은 의구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예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해진에 관한 것은 자꾸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최근 들어 바뀌어 버린 녀석의 태도뿐만이 아니다. 라일 자신의 이상한 행동도 문제였다.

애써 의문을 접어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자주 접촉하는 것으로 그렇게 가능성은 없나?

“흐음. 농밀한 접촉이 자주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열성 오메가와 상성이 아주 맞을 경우가 되겠지요.

묘하게 의사의 말이 귓바퀴에 매달려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시계를 흘끗 주시한 라일은 최근 그를 가장 충동적으로 만들었던 사안을 상담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이 지나칠 정도로 거북하다는 소리를 해도 될까.

이건 라일의 위치에서는 위험한 말이었다. 만약 해진 이외에는 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결국 그는 당분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메가가 거북한 라일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한때 지나친 거부감 때문에 병원의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빨리 해소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지금도 위험 상태입니다.

“그러지.

떠나는 그를 보며 의사가 차트를 정리했다. 그리곤 그나마 희망적인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두통 문제는 그리 걱정 하셔도 같습니다. 두통이 심해지면 문제지만, 애초에 페로몬 작용에 민감하신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니 다행인 일이었다. 페로몬 해소 따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빼앗길 있다면 그에게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시간에 있는 다른 중요한 일이 아주 많으니 말이다.

톡톡 거슬리는 잔상을 밀어내며 그렇게 라일은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갑작스레 떠오른 해진의 얼굴이 머리 한구석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

늦은 저택으로 돌아온 라일은 오랜만에 피로를 느꼈다. 페로몬 체증 자체가 해소된 아니라는 의사의 말이 맞는 듯했다.

저택의 입구에는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사용인들이 있었다. 늦은 밤에는 이제 제법 겨울의 냄새가 공기를 떠돌았다. 머릿속으로 겨울에 있을 중요한 업무 사항들을 체크하던 라일은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건조한 공기 사이로 문득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해진이 조금 장소를 지나가기라도 모양이었다.

“진은 하고 있지?

무의식중에 멈췄던 발걸음은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곁에 따라붙어 보고를 하던 집사가 뭔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멀리 던졌다.

“계속 방에 있습니다.

집사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미적지근한 불쾌함이 라일을 감쌌다. 해진은 조금 이곳에 다녀간 것이 아니던가. 방에 있는 거면 있는 거지 계속 방에 있다는 대답은 뭐란 말인가.

무심결에 떠올린 질문은 가벼운 시작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꼬임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말없이 계속 걷기만 하자 집사가 슬쩍 눈치를 살피곤 물었다.

“준비를 시킬까요?

질문을 듣는 순간 라일은 다시 우뚝 다리를 멈추었다.

“주인님?

까슬거리는 무언가가 눈꺼풀 안쪽에 박힌 같았다. 평소에는 분명 존재감이 없다가도 잘못 시선을 돌리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거슬려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저택에 도착했기에 라일은 미련 없이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리곤 서늘하게 묻는다.

“왜 그간 진의 옷을 직접 벗긴 거지? 그런 과한 명령까진 적이 없는데.

“네? , 주인님을 위해서.

집사의 눈이 찢어질 부릅떠지는 거슬렸다. 열성 알파인 그는 페로몬 하나 간수하지 하고 쩔쩔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걸 보니 갑자기 걷잡을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라일은 분명 끈과 안대를 준비하라고만 명령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해진은 아예 묶인 상태로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곤 했다. 당연하지만 라일은 과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편리하다고만 느꼈다.

집사는 그를 보필하고자 의도했으리라. 행동이 다소 과한 감이 있더라도 말이다. 여기까지 떠올렸음에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집사를 매섭게 질책할 뻔했다. 그게 해진에게 지나치게 모욕적일 거란 생각은 봤냐고.

그러나 까슬한 말이 혀끝에서 튀어 나가기 전에 라일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모욕을 운운하기엔 애초에 손을 묶으라고 시킨 자신은 그런 말을 자격이 없었다.

또한 이상한 감상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그런 계약을 했고 라일은 충분한 대가를 지급했다.

이제 와서 이리도 신경 쓰이는 굴어야 이유가 있던가.

“……앞으로는 일엔 관여하지 . 말만 전하고 방에 들어가지 말도록.

가까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라일은 그저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3개월조차 채우지 않고 나갈 구는 해진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직접 말할 정도라면 지금까지 과정이 못내 거슬렸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딘가 목이라도 졸린 해괴한 목소리로 집사는 대답했다. 의아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라일은 이내 상황을 깨닫고 혀를 찼다. 어느새 자신이 잔뜩 화가 페로몬을 근처에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부를 필요 없어.

의사의 조언대로 페로몬 체증 문제가 심각할 정도인지 조절도 정도였다. 그런데도 라일은 해진을 부르지 않은 방으로 돌아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두통도 없으니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겠지 판단했을 .

다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라일의 생각과는 다르게, 미약한 분노의 페로몬은 잔향처럼 남아 계속 집사를 압박했다.

***

휴일이 찾아왔다. 보통 해의 대부분을 일로 보내는 라일에겐 흔하지 않은 날이다. 물론 휴일이라곤 해도 집에서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은 모처럼 화창한 해가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일은 오랜만에 본관 안쪽의 뜰에서 아침 식탁을 맞이했다.

이곳 헤비레인의 사람들은 해가 뜨면 대부분 밖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따사로운 햇살이 귀한 도시였다. 여기서 나고 자란 라일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관의 건물은 사각형으로 안뜰을 둘러싸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닌 이상 외부에서는 본관 안뜰이라는 내밀한 영역을 염탐할 없는 구조였다.

덕분에 라일은 마음 놓고 앞에 놓인 서류철을 탐독했다. 놀랍게도 그에겐 아무것도 하고 쉬는 휴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활자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머리 위쪽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용인들조차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올려다본 곳에는 뜻밖에도 해진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

저택은 오래된 곳이라 높이가 높지 않았다. 덕분에 상대의 표정까지 바라볼 있는 거리라서 둘은 서로를 마주 수밖에 없었다.

해진은 드물게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왜인지 얼굴에서 시선을 없게 라일은 적절한 말을 꺼내지 못한 한참이나 그렇게 올려다봐야 했다.

그러나 모처럼 드러난 생동감은 천천히 숨을 죽이듯 사라졌다. 해진이 점점 안의 감정을 죽여 가는 모습을 홀린 바라보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덤덤한 부름이 그를 일깨웠기 때문이다.

“베르무스 .

‘라일.

“…….”

불린 이름이 순간에 생각나는 걸까.

“할 있으십니까?

계약서에 사인한 해진은 다시 정중한 태도를 견지하려는 굴었다. 그게 나쁜 일이 아닐 텐데 라일은 이상한 감상이 저를 감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의 변화는 어느 순간부터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막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대신 그는 앞에 놓인 커피로 목을 축였다. 따뜻한 액체가 안쪽을 어루만지니 차갑게 얼었던 정신이 깨어났다.

그의 행동이 뭔가 말을 하기 전의 준비라고 생각했는지 해진은 여전히 멀뚱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진짜 뭔가 말을 꺼내야 상황이 라일이 곤란하게 낯을 찡그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녀석의 얼굴이 이전보다도 해쓱해진 같기도 하다.

“식사는 했나?

문득 해진의 방을 쓸데없이 본관에 배치했다는 후회를 하며 라일은 입을 열었다. 마침 그의 앞에도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던 터라 자연스레 흘러간 생각이었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해진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이런저런 상념을 자연스럽게 잊었다.

아직 먹었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다니.

불쑥 드는 의문은 불쾌함을 부채질했다. 어느 보았던,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해진의 몸이 불쑥 떠오른다. 그렇게 접촉을 자제했는데도 손바닥에는 딱딱한 감촉이 기다렸다는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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