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rain Chapters 31-40

#31

저렇게 아픈 다리를 이끌어 가며 찾는 상대는 뻔했다. 집사를 찾아 계약에 쓰여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겠지.

해가 무렵까지 녀석의 검은 머리는 영상 속에서 나부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저택에 상주해야 집사를, 저리도 오래 찾지 못하다니 말이다.

모든 사용인은 현재 대외적으로는 저택의 중요한 행사를 위해 퇴근을 하지 못했다. 거대한 파티 홀에 전부 억류된 사용인들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 거세게 반발했으나 라일은 완고했다. 영상을 확인하면 할수록 의지는 굳어지기만 했다.

전부가 한통속으로 보였다. 아픈 녀석을 낄낄대며 바라보고 있던 사용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덕분에 저택뿐만이 아니라 본사의 업무까지 마비되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빌어먹을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길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이따금 행동이 어딘가 지나치게 거세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당장 라일의 의지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해일 같은 감정에 잠식된 와중에도 하염없이 영상 속의 해진에게서 시선을 수가 없어서.

“……저게 언제지?

“브라이트 씨의 양친이 돌아가시기 사흘 전입니다. 이전 계약이 종료되기 , 마지막 방문 예정일이었습니다.

“…….”

영상을 바라보는 라일의 눈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침통함을 감추지 못한 비서가 덧붙였다.

“……확인해 보니 결국 병원에 가지 못하셨습니다. 저희 측의 계약 위반입니다.

“…….”

‘오늘이 계약서에 명시된 날인가?

저택으로 잡혀 오다시피 해진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물었던 그의 부모가 죽기 이틀 전이었다. 라일은 이제야 녀석이 그날 운전사도 없이 도시를 멋대로 헤매고 있었는지 이유를 목도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었던 뒤에 녀석이 지었던 표정도.

그러고 보면, 허름한 모텔에 주저앉은 해진을 다시 찾아갔을 때도 이상한 일은 있었다. 그때의 해진은 분명 라일이 계약서의 ‘의무들’을 위반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저 말실수라 여겼는데, 실제로 저택 측이 위반한 계약은 가지가 아니었던 거다.

대체 녀석 부모의 죽음과 관련해 번의 죄를 지은 건지 가늠조차 힘들다. 그걸 알아야 보상이든 뭐든 시도를 텐데.

라일은 아까부터 진탕인 머릿속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한다. 그의 오랜 습관이자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무지 명확한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라일은 다시 운전사가 해진에게 폭언하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지금처럼 초연한 아니라 조금이나마 반발하는 모습은 살아 있는 같았다.

녀석에게는 그만큼 가족이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리라. 저런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행여 불이익이 돌아올까 말대꾸조차 강하게 정도로, 절실한 사람들이었으리라.

그걸 전부 짓밟은 죄를 대체 어떻게 가늠해야 한단 말인가.

“진은, 하고 있지?

저택에서 있던 일을 확인하면서 라일은 이따금 발작적으로 물었다. 본의 아니게 라일과 거친 히트 사이클을 보내느라 해진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아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깨어났을 때를 대비해 가운을 입지 않은 의사가 상주하며 그을 돌보고 있었다. 안쪽의 고통이 심할 테니 차라리 수면제로 자는 편이 낫다고 했다. 애초에 잠들지 않으면 바늘을 꽂을 없는 상태였다. 영양 보충을 위해서라도 해진은 줄곧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좀 전에 확인한 결과 아직 주무시고 있다고 합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비서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매번 라일에게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라일은, 눈치를 보던 보안 팀장이 내미는 영상을 받아 들었다. 해진이 CCTV 잡히는 영상을 간추려서 모양이었다. 추적하는 영상 속의 인물이 누군지 보안 팀장은 섣불리 묻지 않았다.

저택은 도시의 문화유산으로 취급될 만큼 오래된 곳이었다. 그래서 내부에는 중요한 장소를 빼고는 CCTV 없었다. 대신 베르무스가는 사용인들을 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방법이었으나 라일은 이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택 내부의 일에 이렇게 관심을 보일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은 어차피 회사 건물이나 펜트하우스 쪽에 있었기에.

보안 팀장이 넘긴 영상을 거칠게 쓸어 넘기던 라일은 문득 이상한 발견했다.

이건 뭐지.

담벼락에 붙은 CCTV 하나에 공교롭게도 해진의 방이 가까스로 잡혔다. 외부 감시 목적으로 만든 카메라에 잡힐 정도라니. 라일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해진이 본래 쓰던 방이 얼마나 구석진 곳에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식사 시간인지 녀석의 방문 앞으로 사용인들이 음식 트레이를 끌고 왔다.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용인들이 저들끼리 무언가 두런거렸다. 곳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깐 마디 주고받던 그들은 이상하게 노크 없이 다시 트레이를 들고 떠났다.

무언가를 잘못 가져온 것일까. 의아한 마음에 한참이나 그것을 보다 보니 뜻밖에도 방문이 살짝 열렸다. 사이로 불쑥 나오는 하얀 얼굴은 해진이다. 라일이 기이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영상 속의 그는 밖을 짧게 확인하고는 기운 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사용인들이 수거해 트레이는 아무리 영상을 뒤로 돌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라일은 바깥에서 쏟아붓는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진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은 없나.

“식당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일의 뜬금없는 소리에 보안 팀장은 제가 들고 있던 장비를 뒤졌다. 그리곤 이해할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브라이트 씨는 번도 식당에서 식사한 적이 없으십니다.

“……한 번도 없다니. 지난 5년간, 번도?

“네. 회장님. 애초에 브라이트 씨는 카메라가 설치된 주요 장소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저택 내부에서의 활동이 적으셨던 걸로 추정됩니다.

오늘은 하필 무거운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무거운 비가 도시를 점령하리라.

완벽하게 습도 조절이 되고 있을 저택 내부의 공기가 이리도 눅눅하게 피부를 옥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선연한 촉감이 저를 잔뜩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말이 없는 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보안 팀장이 가지 사진을 내밀었다. CCTV 영상을 캡처해 것들이었다.

“말씀하신 사안과는 관련이 없을지 모르나, 가지 이상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뭐지.

“몇몇 사용인들이 출근할 때와 퇴근할 특이사항을 보이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록상의 재산 목록에 결품이 부분은 없어서 지금 일일이 실제 물품과 목록, 그리고 사용인 출근 기록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내미는 사진들은 전의 같은 오전과 오후에 찍힌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옷이 바뀌었고, 어떤 사람은 가방의 부피가 달라져 있었다.

한두 번이었다면 눈에 리가 없었다. 그러나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많은 사용인이 이런 이상행동을 보였다. 빠르게 영상을 재생하는 보안팀에서 특이사항을 눈치챌 정도로 말이다.

대체 빌어먹을 저택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인상을 쓰며 사진들을 휙휙 넘기던 라일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옷장에 입을 만한 없더군요.

빗소리를 뚫고 해진의 말이 천둥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밖에서는 타이밍도 좋게 실제 천둥이 하늘을 울렸다. 고함 같은 소리를 들으며 라일은 홀린 태블릿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곤 밖으로 향했다.

“회장님?

하나둘 옮기는 발걸음은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성급했다. 고작 갔던 것뿐인데 녀석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뒤에서 놀란 비서와 보안 팀장이 따라붙었으나 라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진이 쓰던 손님방까지 도착한 라일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해진은 어차피 지금 다른 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집사가 이곳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방이 엉망인데, 그걸 치워야 사용인들도 전부 억류된 탓이다.

저번과는 다르게 응접실에 연결된 모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중 해진이 쓰던 침실 쪽을 잠깐 바라본 라일은 반대로 돌아섰다. 호화로운 손님방에 딸린 옷방 쪽이었다.

옷으로 가득해야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라일은, 이내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볼품없는 풍경이 그를 반겼다. 본래라면 공간은 손님의 편의에 맞춰 각종 의복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야 했다. 계절별로 옷을 바꾸는 물론, 손님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소품까지 맞춰 있도록 베르무스의 격에 맞는 관례가 존재했다.

그러나 목도리나 시계 같은 작은 소품이 놓여야 칸은 아예 비어 있었다. 간단한 보석류와 커프스가 있는 곳도 공허하기만 하다.

기본 셔츠가 걸려 있어야 공간도 군데군데 흐트러진 비어 있었다. 심지어 한쪽에 외투가 가득 있어야 부분에는 지금 계절에 맞는 옷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치 도적 떼라도 한바탕 휩쓸고 모습이었다.

              

#32

같이 들어선 보안 팀장은 만하다는 얼굴로 어딘가에 연락을 넣었다. 멍하니 옷방 안을 살피며 라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이리도 멍청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던가.

“……가린 녀석의 눈인데, 정작 내가 눈먼 병신이었군.

해진이 계약서에 쓰여 있는 막대한 보상 따위를 읽어보지도 않은 이유를 있었다. 애초에 녀석에겐 계약서 전체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여태 그랬던 대로 하나 까딱 하고 살게 테니까, 계약해.

자신이 이따위 오만한 말을 던졌을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이제야 있었다.

라일은 새롭게 알게 사실들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저택의 소동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라일은 빠르고 단호하게 움직였다.

일단 미뤄 두었던 회사 업무를 몰아서 처리했다. 갑작스럽게 건강 문제로 사라진 회장이 다시 나타나 흉흉한 기색으로 일을 처리하자 본사 건물의 직원들은 눈치를 살펴야 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고 있었지만 라일은 지금 그런 신경 겨를이 없었다.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혼란스러운 감각이 자꾸만 충동질을 일삼는다.

급한 일만 대충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라일은 서재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급하게 돌렸다. 일단 빌어먹을 저택에 도착하고 보니 해진의 소식이 궁금해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기에.

억류된 집사가 애타게 그를 만나야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지만 전부 무시했다.

“사용인 몇몇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실토했습니다.

급히 걸음을 옮기며 듣는 정황은 더욱 기가 막혔다. 베르무스가의 저택에서 손님이 배를 곯을 것이라, 대체 누가 예상할 있었겠는가. 그들은 고작 어젯밤부터 끼를 굶었을 뿐인데 이리도 쉽게 무너졌다. 고작 시간의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해진의 바짝 마른 몸이, 불거져 겨울 바람을 맞고 있던 발목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가 처음 발견한 화면에서 사용인들은 자연스럽게도 트레이를 도로 거둬 갔었다. 마치 하루 이틀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놈들을 화면으로 추적해 보았으나 CCTV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노크도 없이 거둬 트레이를 어떻게 했는지는 없었다. 다만 해진에게 갔던 그릇들이 비어서 뒤늦게 주방으로 돌아갔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정작 음식의 주인인 해진은 그날 내내 굶주렸는데 말이다.

그래서 라일은 이번엔 음식과 관련된 것들을 추적했다.

나온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고작 2. 그들이 사람 하나를 먹이는 것보다 굶기는 편하다는 알아차린 시간이었다.

저택에 들어온 해진은 고작 2 만에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녀석의 계좌에는 유난히 병원 근처의 ATM에서 현금을 인출한 기록이 많았다. 시기는 비슷하다. 2주에 부모님의 병문안을 가는 .

병원 측의 CCTV 기록까지 뒤진 결과 병원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돈을 정황이 발견되었다. 다리가 아픈 녀석에게 저택은 들어가면 잠깐 밖에 나오는 것도 힘든 곳이었다. 굶주린 배를 겨우 채우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양실조라는 진단이 만성적인 문제였다는 비서의 보고가 떠오른다. 저를 피해 도망친 해진이 약을 했는지 오해나 하던 태평한 자신이 떠오른다.

그게 저택의 문제인 것도 모르고, 해진에게 관리나 하라며 호되게 굴던 자신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있었다. 가장 최근까지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마른 뼈마디가 떠오를 때마다 라일은 도무지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담한 짓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말씀하신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핀 결과 예상대로 사용인들 몇의 계좌가 이상했습니다. 저택에서 지급한 이상의 현금이 종종 입금되거나 씀씀이가 크더군요.

이렇게 많은 인원을 강제로 억류하고 있는 당연하게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라일은 순간 모든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을 공고히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겨우 곰곰이 씹어 내린 끝에야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있었다. 분노였다. 라일은 지금 저택을 페로몬으로 채울 있을 정도로 속에서 무언가 끓는 느꼈다. 단지 이유를 없어 겨우 억누르고 있을 .

“그리고 문제의 약은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애초에 브라이트 씨가 회장님의 방으로 향한 목격했다는 증언은 거짓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집사가 해진을 강제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라고 하더군요.

증언을 얻는 과정에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왕왕 벌어졌다. 그러나 라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명령했고 비서는 착실하게 그것을 따랐다.

“그렇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 집사라고 합니다. 아마 약을 것도 그가 아닐까 추측합니다만…….

5년이나 이어진 기가 막힌 행보에 비서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인에 대한 학대와 범죄를 넘어, 베르무스라는 이름 아래에 벌어졌다고는 믿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대체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을까.

여태 아무것도 몰랐을까.

“또한 계약 위반을 저지른 운전사는 집사의 친인척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고용과 관련된 경비 업체 측의 문제도 발견되어 지금 조치 중입니다. 본사 쪽의 인원을 조금 끌어와야 같습니다.

“그렇게 .

저택의 안팎으로 문제가 없는 곳이 없었다. 애초에 적당한 구실만 하면 된다고는 생각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그렇게 죽어 나자빠진 이후 라일은 이곳을 철저하게 잠자는 곳으로만 사용했다. 일이 너무 바쁠 때면 펜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일도 많았다. 년의 절반은 출장 중이기에 더욱더 저택은 단순한 침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라일만의 부모님을 모독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베르무스라는 이름을 그저 허울 좋게만 남겨 둔다는 의미로 말이다.

호시탐탐 라일을 견제하던 친척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가 이리도 홀대하는 상징적인 장소지만 너희는 평생 이곳에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격정으로 라일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자신이 대체 해진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일단 걸었다.

그때 계속 보고를 이어 가던 비서가 돌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압수된 집사와 운전사의 휴대폰에서 브라이트 씨의 입막음을 도모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실제로 협박을 당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

말에 라일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비서는 혹시 해진이 여태 잠자코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라일은 그게 아니라는 안다. 만약 그랬다면 차라리 숨기려고 들었을 터다. 심지어 해진에게는 더는 약점이 만한 부분들이 없었다. 이전에야 가족들로 협박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쉬이 상상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혼자가 해진은 더는 잃을 없으니 그간 당한 설움을 표출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해진은 , 다시 저택에 돌아온 후에도 모든 참고만 있었을까.

“회장님, 아직 깨어나셨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닌…….

“조용히 .

한번 자각한 분노가 멋대로 흩뿌린 페로몬처럼 공기 중으로 넘실거렸다. 지금 그가 해진에게 이따위 추궁을 상황이 아닌 분명 안다.

그런데도 라일은 아무 말도 하고 운전사 앞에서 물러나던 녀석의 뒷모습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도무지, 지금 당장 해진을 보지 않고는 숨을 수가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비서를 완전히 물린 라일은 기어코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그는 1층에 있는 손님방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과 연결된 응접실을 거침없이 지나 녀석이 있을 침실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으나 무작정 들이닥쳤다.

그런데 막상 들어간 방은 비어 있었다. 분명히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하는데.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이불이 흐트러진 비어 있다. 거대한 방은 본래도 가구가 그리 많지 않아 휑한 느낌을 주는데, 이상하게 여백이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둥둥 울리는 심장이 익숙하다는 라일을 충동질했다. 거센 빗소리가 하나하나 전부 천둥소리인 그를 호되게 질타한다.

해진이 사라졌다.

“……진.

저도 모르게 자리에 굳어 있던 라일은 홀린 해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방에는 있어야 사람이 없었다.

“의사!

재빨리 다시 밖으로 뛰쳐나간 라일이 성난 음성으로 의사를 찾았다.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의사가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진은 어디 있지?

“네? 아직 주무시고 계실 텐데…….

“뭐?

모르는 사이 해진을 다른 방으로 옮겼으리라 여겼던 라일은 의사가 정확히 그가 나온 쪽을 바라보자 단단히 굳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언제야.

“대략 시간쯤 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걱정스럽게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물었다. 라일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이해할 없는 상황에 대해 추궁했다.

“안에 진이 없어. 내가 분명 경호를 명했을 텐데.

              

#33

“아, 급히 인력 보충이 필요해서 잠시 자리를…….

기실 해진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모든 인물이 파티 홀에 억류되어 있기에 행한 조치였다. 그러나 번뜩이는 라일의 눈빛을 비서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우선순위가 이쪽이 아니었던 듯하다.

“죄송합니다. 향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으로는 그래도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던 해진의 위치를 조금 위쪽으로 조정했다.

“당장 입구 쪽에 연락을 보겠습니다.

비서의 말을 들으며 라일은 해진의 부재가 확실해졌다는 비로소 느꼈다.

아까부터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걷잡을 없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단단히 땅을 딛고 있었으나 시야는 놀라울 정도로 어지럽다.

세찬 빗소리가 저택의 안쪽까지 침범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세찬 빗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견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

거칠게 낮아진 목소리가 초조하게도 저택을 울렸다.

***

바로 저택의 입구를 확인했으나 일단 정문으로는 통과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대로 멍청하게 서서 소식만 기다릴 없던 라일은 다시 해진이 누워 있었어야 곳으로 돌아왔다. 방에도 작지만 개인 욕실이 딸려 있다는 겨우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깨어난 그가 욕실에 갔을 수도 있는데, 그쪽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다니 멍청한 짓이었다. 당장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머릿속도 덩달아 비었다는 말이다.

무언지 모를 희망으로 다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막상 방에 들어서자마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려야 했다. 활짝 열린 욕실은 한눈에도 안이 비어 있는 보였기 때문이다.

뱃속이 잔뜩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달군 쇠로 명치를 찌르기라도 같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라일은 무의식중에 해진의 페로몬을 따라 침대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렇게 다리가 침대까지 도달한 순간, 그의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거센 비가 내리는 , 창문이 왜인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해진의 페로몬이 그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라일은 단번에 달려가 창틀을 뛰어넘었다. 한번 인식하고 나니 해진의 페로몬이 기이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방의 창은 본관 안쪽의 뜰로 이어지고 있었다. 앞뒤 가릴 없이 나서고 나니 몸으로 사정없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도 라일은 다급한 심정에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희미하고 애처로울 정도로 옅은 해진의 페로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계속되면 페로몬도 사라진다.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라일은 우산 따위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거침없이 뛰었다. 그의 구둣발에 치인 웅덩이가 사방으로 흙탕물을 튀기며 날뛰었다. 화초까지 마구 짓밟으며 뛰다 보니 어느 순간 잔디가 잔뜩 흐트러진 장소가 보였다.

그곳에서 누군가 엎어졌던 것처럼.

“진!

세상이 붉어졌다.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비가 마당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이때부터 라일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안뜰을 헤매고 다녔다.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잔뜩 흩어진 해진의 페로몬을 따라서.

이런 빗속에서는 페로몬이 금방 흩어지기 마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라일은 추격을 계속했다. 성급한 발걸음이 어느새 본관 저택의 뒤로 이어진 근처까지 닿았다.

다급하게 건물을 돌아 그곳에 디딘 순간 라일은 눈을 크게 떠야 했다. 하얀 옷을 입은 해진이 비틀비틀 걸어가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걸 인지한 순간에는 이미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무거운 비가 오는 , 해진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걷고 있다.

“진!

부름에도 뒤돌아보는 없이 비척비척 움직이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그대로 일단 해진의 행방을 확인하고 나니 붉게 물들었던 세상이 겨우 색을 되찾았다.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게다가 목적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숲이 있을 뿐인데.

금방 따라잡은 그는 앞뒤 가릴 없이 일단 어깨를 잡아챘다.

“진, 멈춰!

거칠게 몸을 잡아 돌리니 그제야 겨우 공허한 시선이 라일을 향했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는 일순 말을 잃었다.

분명 숨을 쉬고자 해진을 찾았는데 라일은 반대로 숨이 막혔다.

그사이 쫄딱 젖은 해진은 우연히 마주쳤던 어느 날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힌 몸은 퍼렇게 질려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꼴을 기가 막혀서 노려보던 라일의 시선이 해진의 발치를 향했다. 실내화조차 없이 맨발로 잔디밭을 가로지른 탓에 아주 엉망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불거진 발목이 보이자 이제는 걷잡을 없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까 자각한 분노는 쉽게도 그의 안을 잠식했다. 라일은 겨우 숨을 크게 들이켜며 의식적으로 진정하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에 닿는 해진의 몸이 너무 야위어서, 체온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성난 페로몬까지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격양된 순간이었다.

“제가, 제가 그런 아닙니다…….

파르르 피부에 닿는 숨결이 무척 아팠다.

희미하지만 끈질기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해진의 페로몬이 어느새 빗줄기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그게 담고 있는 한없이 서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감정마저 자기주장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덧없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멍하니 그런 해진의 모습을 살피던 라일은 역시 숨통이 틀어막혔다는 깨달았다. 대체 이러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말들이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여태 잠들어 있던 해진이 마지막으로 겪었던 일이 무엇인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알아.

“…….”

한숨처럼, 라일은 참담한 어조로 해진에게 말했다. 그따위 오해로 이렇게 잡으러 아니라는 알려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저도 모르게 훑듯 해진의 온몸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녀석의 한쪽 팔로 향한 것은. 링거를 그냥 잡아 버렸는지 피가 배어 나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흘러나온 핏방울은 해진을 찾고 겨우 돌아왔던 그의 시야를 다시 붉게 물들였다. 방울이 내리고 있는 무거운 비에 잔뜩 번지기라도 같았다.

“일단 들어가.

다급하다. 일단 무거운 아래에 있는 해진을 지붕 밑으로 보내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그가 입은 하얀 옷은 비에 잔뜩 젖어 몸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마르고 작은 몸이었다. 오랫동안 봐서 손에 닿는 감촉마저 생생하게 떠올릴 있는 몸이었다.

윤곽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라일은 반사적으로 웃옷을 벗어 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또한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없이 일단 해진의 다치지 않은 팔뚝을 잡은 저택 쪽으로 걸었다. 무거운 비는 라일의 속까지 금방 스며들었다. 태어나 이렇게 비를 맞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왜인지 발끝까지 젖어 들어가는 감각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미약하게 저항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는 해진이 저택 밖으로 가려는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는 다시 상기했다. 방향이 틀렸기에 망정이지 정도 거리라면 저택은 확실하게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애써 힘을 무시하며 라일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녀석의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려던 해진은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인지 비틀거렸다. 모든 애써 무시하려던 라일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의식중에 하얀 발목에 시선을 주었던 라일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

그는 그대로 해진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휘청이는 몸이 아무런 저항도 떠오른다. 쏟아지는 빗물보다도 무게감이 옅어 라일은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반사적으로 저항하던 해진은 순간 맥을 놓고 말았다. 애초에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해진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손에 링거가 꽂혀 있어서 일단 두려움에 빠졌던 그는 저도 모르게 도망쳤다.

다만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중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깐 기억이 사라진 뒤에 앞을 보니 숲이 보였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 해진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숲에는 호수가 있겠지. 그래서 자신이 여길 걷고 있었나 보다.

그들이 저택에 다시 도착하는 금방이었다. 해진은 분명 오래 걸었던 같은데 돌아오는 너무 순식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의사를 불러!

저택에 돌아가자 비서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우왕좌왕하며 누군가를 찾으러 갔다. 해진은 귀에 들린 의사라는 단어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라일은 거침없이 그가 떠나온 방으로 들어섰다. 일단 침대에 해진을 내려놓은 그는, 앙상한 양어깨를 쥐는 것으로 녀석이 저를 바라보게 했다.

마주친 눈은 왜인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어두운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꼴로 나간 거야.

라일이 화를 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진은 아주 오랜 끝에 눈을 떴고 비참했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쪽에 창문이 있었을 뿐이다.

저택으로 끌려오던 날이 생각났다. 자신이 잠든 얼마나 되었지? 벌써 며칠이나 흘러가 버린 걸까.

              

#34

“진.

아까부터 제대로 대답도 없는 해진의 상태가 라일은 몹시 불안했다. 활활 분출되는 분노와는 별개로 이상한 초조함이 그를 갉아먹는다. 쥐고 있는 양어깨에서 떨림이 느껴지자 그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들어 해진의 몸을 감쌌다.

자꾸 비척비척 사이를 걸어가던 뒷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해진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때 품에 들어 올린 뒤부터 묘하게 얌전하던 해진의 눈빛이 다시 허공으로 돌아갔다. 메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라일을 향해 기어 온다.

“지금은, 계약을 이행하긴 힘듭니다. 베르무스 .

페로몬 해소가 필요해지기라도 했나 보다. 해진은 라일이 저를 이렇게 다급하게 찾을 이유가 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뭐? 그저……!

그저,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해진을 걱정해서 말이라고? 이렇게 거센 비가 내리는 우산도 신발도 없이 그렇게 처량하게 있었냐고?

잘못이 아니니까 이렇게 도망칠 아니라 이쪽에 화를 내는 맞지 않느냐고.

이런 알량한 동정 따위를 입에 담을 있을 없었다. 라일은 난생처음 면목 없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절절하게 이해했다.

저택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는가. 너덜너덜하게 나부끼는 낙엽처럼.

그래서 라일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불붙은 분노는 이제 주체할 없을 정도로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감각은 해진의 페로몬을 양분 삼아 자꾸만 부피를 키워 갔다.

파리한 안색이 화가 날수록 라일은 다른 질문을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잔디밭에 새겨진 불규칙한 발자국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은 것처럼. 망설이던 그는 결국 한숨처럼 튀어 나가는 마지막 의문을 막지 못했다.

화를 내지 않고 스스로를 갉아먹기만 했는지.

“……왜 그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적어도 중요한 계약사항은 내가 무시하지 못했을 텐데.

“…….”

이러면 된다. 미약한 이성이 그에게 비명을 질렀다. 사실 분노는 해진에게 흘러 들어갈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무능이며 무관심이 낳은 문제였다. 그러니 피해자인 해진에게는 이런 질문이 가당치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감정이 툭툭 치밀어 올랐다. 잠깐 저택을 떠났을 계약 내용을 당당하게 챙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자꾸만 의구심이 남았다. , 똑바로 계약을 지키라고 라일에게 요구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지난 5년간 한마디라도 했으면 무언가가 바뀌지 않았겠는가. 일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자신이 녀석을 이렇게 망가트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면 뭐가 바뀌죠?

그의 이런 질문에도 해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공허하게 되물을 뿐이다.

“뭐라도 바뀌었겠지!

결국 라일은 애먼 화를 방에 쏟아내고 말았다. 그제야 허공만 보던 해진의 눈길이 다시 그를 향한다. 아까와는 다르게 미약하게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다시 그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분명 안으로 들어왔는데 습윤한 빗줄기가 여전히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전 이미 말을 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죠.

“뭐……?

순간 라일의 머릿속에는 해진이 퇴근하는 저를 불러 세웠던 밤이 지나갔다.

희미한 달빛이 서러운 얼굴을 비추던 밤이 생각났다. 해진이 그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날은 라일도 직접 목격했다. 서러운 하루의 흔적을 죽어버린 영상으로 내내 재생하지 않았던가.

, 네가 내게 왔었구나.

그의 부모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말하러 날이었을 것이다. 집사는 온종일 찾아도 그의 간절함을 무시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라일을 기다렸으리라.

지난 5년을 굶고 추위에 떨며 괄시를 당해도 참던 녀석이, 참다못해 겨우 용기를 날이었을 것이다.

라일은 그걸 한마디로 무시했다.

‘우리가 이렇게, 사사롭게 얘기할 사이던가?

지금 라일을 더욱 조르는 , 다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한들 바뀌는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는 당연하게 해진을 무시할 것이고 해진은 당연하게 시들어 가리라. 그의 해묵은 원망만 쌓여 있는 어두운 저택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쐐기를 박듯 말하는 해진의 음성에 라일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가렸다. 저택을 전부 휩쓸어 대던 분노는 끝내 종착점을 찾았다. 곳을 잃고 애먼 곳으로 향하려던 눈먼 원망이.

저택이 해진을 이렇게 만든 아니었다. 그저 라일의 탓이었다.

해진을 이곳에 처박아 놓고 번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라일이 오롯한 가해자였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 입을 막고 있는 손바닥에 닿았다. 축축한 감촉에 놀란 라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해진은 앞에서 라일이 무슨 페로몬을 내뿜든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비에 잔뜩 젖어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순간 실제로 목이 졸리는 느낌이 나서 라일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첩첩 쌓인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목을 조른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가까스로 돌아본 그곳에는 과거의 행동들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당기고 있다.

“…….”

모습은 확실히 이상하긴 했는지 해진이 처음으로 미약한 감정을 내비쳤다. 라일의 이런 동요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저변에는 라일에게 정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심함이 녹아 있었다.

그걸 깨닫자 라일은 더는 방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비겁하게도.

“……앞으로는.

“…….”

“앞으로는, 바뀔 거야.

가까스로 되다 한마디만 뱉은 라일은 다급하게 뒤돌아섰다.

그러나 말을 뱉으면서도, 과연 제게 이런 말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

“회장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일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옅은 해진의 페로몬은 비까지 맞았는데 끈질기게 그에게 묻어 있었다. 온몸을 잠식한 빗물보다도 끈끈하게.

갑자기 쫄딱 젖어서 직접 해진을 찾아 나타난 그를 보고 비서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덩달아 도망친 환자를 찾아 헤매다가 돌아온 의사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를 보자마자 라일은 해진을 떠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비를 맞았어. 옷을 갈아입게 하고, 온도를 높여 . 그다음에 팔의 상처를 돌보도록.

“네, 회장님.

의사는 상처라는 소리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지만 비서가 호출한 임시 사용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해진은 지금 너무 약해져 있기에 맨몸으로 비를 맞았다면 정말 빨리 조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빠른 움직임을 보며 라일은 축축하게 늘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빗물이 흥건하게 그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습을 비서는 전화를 걸며 라일의 방에 갈아입을 옷을 준비시켰다. 갑작스럽게 사용인들을 새로 고용하고 경비 업체를 갈아치우느라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떼던 라일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진의 창문은, 앞으로도 닫아 두라고 .

“창문을요? , 회장님.

비가 오는 여윈 몸으로 밖을 맴도는 해진의 모습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눅눅하게 젖어 드는 옷가지처럼 라일은 묘한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가지 사실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진이, 자신의 방이 바뀐 알고 있었나?

“음, 보고드린 바대로 방에 오기 전부터 줄곧 정신을 잃고 계셨던 걸로 압니다.

“…….”

일단 눈을 뜨고 창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방이 바뀐 당연히 알아챘으리라.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그게 맞았다.

그런데도 라일은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창틀을 넘는 해진의 페로몬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던 같아서.

먹먹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박히기라도 같았다. 걸음을 옮기는 것도 잊은 , 라일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디 덧붙였다.

“진에게 지금 상황 설명을 주도록 .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필요하다면 인력 충원도 고려해. ……경호도 빈틈없이 .

“네, 알겠습니다.

겨우 다시 앞으로 향하는 걸음이 이리도 무거울 수가 없었다. 마치 해진의 몫까지 비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아까 제자리를 찾은 분노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홀연히 씨앗 하나를 남기고 버렸다. 해진을 찾느라 흘러들어온 비는 속에 단단히 박힌 씨앗을 보듬기 시작했다.

조만간 싹을 틔워 내려는 듯이.

***

“제일 먼저 사실을 실토했던 명이 법정에서 브라이트 씨에 대한 학대 사실을 증언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직접 가담한 적이 없다면서 선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담한 적이 없다니, 전부 헛소리였다. 직접 모든 이를 의심하며 억류한 라일이었으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어째서 그의 귀에 이토록 아무 소문이 들리지 않았는지 있었다.

해진이 이곳에 초반에는 이따금 사용인들의 개인 SNS 등에 흔적이 흘러나오곤 했다. 횡령한 옷가지나 식자재, 어떨 배정된 비품과 자금까지.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런 흔적들은 놀라울 정도로 사라져 갔다. 해진에 대한 대우가 나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정확히 인식하고 입조심을 시작한 것이었다.

              

#35

처음에는 CCTV 잡힐 정도로 어설펐던 그들의 도둑질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져 갔다. 저택을 경비하는 경비팀의 인원까지 매수당해, 저택을 오가는 외부 업체의 차에 훔친 물건들을 싣기도 했다.

고작 손님 앞으로 배정된 예산이라고 하기엔 베르무스 가문의 명성이 지나치게 드높았다. 분기에 사용되는 액수만 해도 사용인 열의 연봉을 합친 것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그간 저택에 오는 오메가를 아껴서 그렇게 것은 아니었다. 그저 추후 계약에 문제가 것을 염려한 변호인단의 조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아무래도 바람직한 계약은 아니었으니까.

입을 다무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라일은 그들의 모든 계좌를 추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증거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결국 적극적인 방조자였다.

라일 자신을 포함해서.

“선처는 없어. 그까짓 증언은 중요한 것도 아니니, 어쭙잖은 헛소리는 전부 쳐내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해진을 법정 소송의 전면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는 좋든 싫든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해진을 만나 의향을 물어보기는 하겠으나, 과연 그가 기꺼이 이런 일을 승낙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일단은 녀석의 존재를 최대한 숨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의 죄는 차고 넘쳤다.

“로펌 드림K 일을 맡겼습니다. 저택 내부의 횡령만 혐의로 잡더라도 상당수의 인원이 법적 책임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언급하는 로펌은 도시에서 가장 대형 법무법인이었다. 베르무스 가문의 전문 변호인단도 있으나 다뤄야 소송이 많았기에 개별 사용인들에 대한 것은 그쪽에 맡겼다. 관련된 모든 이가 즉각 해고 처리된 당연한 일이었다.

“빠르게 결과를 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빈틈없는 조치이지만 라일은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보고를 듣는 내내 해진의 파리한 안색이 떠올랐다. 시선은 마치 그를 나무라듯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이제는 가슴에 박혀 버린 차가운 분노가 조금 녀석의 고통을 신경 쓰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니. 빠르게 진행하지 않도록 전달해.

“네?

“소송을 걸고 시간을 최대한 끌어. 최소한 5년은 법적 문제로 고통받을 있게.

이제 고작 이틀밖에 굶은 놈들이, 적어도 밥은 줘야 아니냐며 새로운 경호팀을 향해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야가 아직도 본래의 색을 되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대형 로펌에 연락을 돌려.

“더 진행하실 사안이 있으십니까?

“아니. 베르무스가 소송들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 머리가 좋은 놈들이니 알아듣겠지.

사실상 사용인들이 개별적으로 변호사를 구할 있는 길을 막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도시에서 베르무스의 반대편에 선다는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너무 일찍 끝나 버리면 되니 물밑으로 손을 . 적당한 변호사가 여러 붙었다가 빠질 있도록.

“……알겠습니다.

이제야 최소한 5년이라는 단서가 그저 내뱉은 말이 아닌 알아들은 비서는 신중하게 메모를 작성했다. 비밀로 해야 것들이 늘어나지만 어쩔 없었다. 라일이 원하는 단순한 처벌을 넘어 법적 소송을 진행하며 얻는 고통 자체였으니까.

마치 해진이 저택에서 오래도록 고통받았던 것처럼.

“그런데 이렇게 계속 가둬 수만은 없습니다.

“알아.

비서의 염려 섞인 말에 라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파티 홀에서 죄다 굶어 나자빠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이목이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 그의 저택은 분명 도시의 외곽에 붙어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까지 피하지는 못했으니까. 게다가 사용인과 경호팀까지 물갈이가 되는 실정이니 의심을 사지 않을 리가 없다.

“일단, 집사를 데려와.

잠깐 비서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라일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생각에 빠졌다.

‘왜?’라는 의문은 줄곧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처음엔 해진에게, 그다음엔 저택의 인원들에게.

당연하지만 그의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은 높은 연봉을 받는다. 해진에게 배정된 액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고액 연봉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며 범죄 행위를 이유가 무엇일까.

기록된 CCTV 전부 검토하며 라일은 해진이 어쩌다가 이런 늪에 빠졌는지는 어렴풋하게 알아차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만만한 손님이었으리라. 실수해도 언성 높이는 법이 없고, 확연한 불합리가 저를 덮쳐도 따지지 못하는 그런 손님.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의 주인이 무신경하게 방치하는 사람.

해진이 절실함에 점점 입을 다무는 사이 인간의 악의는 조금씩 커졌다. 종래에는 저택을 전부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욕심으로. 저들이 받는 많은 연봉이 고작 만만한 오메가 하나에게 들어가는 돈보다 적다는 못내 질투가 났을까.

그건 절대 해진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기회가 왔을 쉽게 인간성을 저버리는 놈들의 문제였다. 것이 아닌데 감히 탐하는 놈들의 잘못이다.

“데려왔습니다.

고작 이틀 사이에 상당히 초췌해진 집사가 경호원의 거친 손속에 서재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기름진 머리칼을 보며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라 굴러가는 눈알을 보니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주, 주인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거지?

차가운 분노와는 다르게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걸 보고 뭐라 오해했는지 집사의 얼굴은 금방 화색을 띠었다.

“이게 주인님과 저택을 위해서였습니다.

놈은 오해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같이 파티 홀에 억류되어 있다가 불려 나간 운전사가 온몸에 멍을 달고 돌아갔을 직감했으리라. 아주 많은 것들이 들통났다는 .

실제로 운전사는 고작 발길질 번에 미주알고주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가령 집사 놈의 더러운 취미가 오메가에게 억지로 이런 약물을 먹이기도 한다는 사실 따위의.

다른 사용인의 증언에 의하면 놈이 더러운 손으로 해진을 잡아끌었다고 했다. 히트 사이클이 와서 저도 모르게 막대한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을 해진을 말이다.

장면만 생각하면 이상하게 라일은 혈관에서 바늘이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열성 따위가 저택에 머무르는 아무래도…….

“그걸 , 네놈이 판단하지?

멱살이 잡혀 파리하게 흔들리던 해진의 얼굴까지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더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어에서 풀려난 그의 페로몬이 살의를 가진 집사에게 달려들었다.

“컥, 커헉!

페로몬으로 타인을 조종하는 질색이었다. 가끔은 야만적인 동물이라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순간 라일은 본능에 저를 맡겼다. 고작 저따위 거짓말 때문에 그렇게 해진을 겁박했던 놈에게.

숨이 막히는 금방 보랏빛 얼굴이 집사는 바닥으로 엎어졌다. 카펫 위로 질질 흘러내리는 타액을 보니 역겨움이 솟는다.

“내가 가만히 두고 본다고, 대신 저택의 주인이라도 같았나?

이번에 물갈이된 사용인 대부분은 선친이 죽기 전부터 일하던 이들이었다. 당시 자진해서 그만둔 사람들을 제외하면 라일은 그들을 그대로 계속 고용했다. 연봉 또한 상당 수준 올려 주었다.

그건 일종의 입막음 특별대우였다. 정원에서 치욕스럽게 죽어 버린 부모의 치부를 숨기려고. 무엇보다 저택 따위를 아끼는 마음이 없었기에 귀찮았다.

“커, , 살려…….

페로몬으로 놈의 숨통을 남김없이 틀어막으며 라일은 조소했다. 특별대우를 받고 단체로 정신이 나가기라도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들을 쉽게 내치지 못하리라 착각이라도 했을까. 베르무스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무리를 쥐락펴락하며 집사는 마치 저택의 주인이라도 착각을 키워갔으리라. 겉으로는 라일을 위하는 온갖 말도 되는 핑계로 합리화를 하면서.

그때와는 라일이 쥐고 있는 힘이 달랐다. 기고만장하게 주인의 자리를 넘볼 놈들이라면 뿌리까지 뽑아내야 때였다.

“그리고 입을 조심해. 앞으로 네놈의 처우는 진에게 달려 있을 테니.

집사에 관한 다른 로펌에 맡기지 않고 그의 변호인단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

라일은 저를 피해자라고 묶을 생각은 없었으나, 이번 일에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약물을 사용해 오메가에게 강제로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중대 범죄였다. 그런 오메가를 겁간하는 물론, 거기에 다른 알파가 휘말리게 계략을 짜는 것도 중대 범죄다. 고작 횡령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무거운 형량을 안겨 주리라.

어쩌면 집사는, 라일이 이번 일을 덮으려고 해진을 압박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다시 베르무스가의 약점을 손에 틀어쥐고 싶어서.

놈이 이걸 의식하고 행동했는지, 진심으로 이따위 짓이 그를 위함이라 착각했는지는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허흑, !

과연 형량으로 집사의 죄를 갈음할 있을지는 미지수다. 가지 확실한 라일은 일을 절대 쉽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36

“치워.

놈의 변명은 예상 그대로라서 들어 것도 없었다. 그의 차가운 명령에 경호원이 들어와 집사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마찬가지로 알파인 그는 라일의 막대한 페로몬에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불쾌한 페로몬이 코를 스치자 라일은 습관적으로 해진을 떠올렸다. 겨울 공기 같은 옅은 내음에 다가가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나 라일은 방을 뛰쳐나가는 대신 천천히 얼굴을 가리며 의자에 깊숙하게 기댔다.

애초에 놈이 저렇게까지 행동할 있었던 , 결국 라일이 그렇게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지난 5년간 해진을 그렇게 다뤄 왔으니까. 마음껏 휘둘러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처럼 사용했으니까.

놈과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라일은 못내 끔찍했다.

***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브라이트 .

“…….”

사근사근한 말투의 사용인이 해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간질간질한 음색이 어색한 해진은 그대로 시선만 내려 음식을 살폈다. 환자에게 적당한 묽은 수프와 샐러드가 보인다.

지금은 이조차도 아직 버겁다. 부어올랐던 목구멍은 가라앉았으나 식욕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용인의 시선이 버거웠다. 먹는 감시하던 눈길들이 잊히질 않는다.

해진도 사정은 전해 들었다. 얼굴이 익숙한 비서가 찾아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기 라일을 기억은 있었으나 자는 사이 이렇게 상황이 변할 줄은 몰랐다.

창밖에는 확연하게 많이 늘어난 경호 인력들이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저택의 분위기가 급변한 셈이다.

물론 가장 변했다고 생각하는 역시, 전부 새로 물갈이된 사용인들의 태도였다.

“…….”

가까스로 한숨을 삼킨 그는 겨우 스푼을 들어 올렸다. 물론 사용인들이 예전처럼 그릇을 비울 때까지 곁에서 그를 감시하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먹는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라고 주었다.

그리고는 해진이 뭔가를 먹을 있도록 수시로 트레이를 들이는 것이었다. 새로운 방법이 부담스러웠다.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숟갈 뜨기도 전에 토기가 올라오지만 참았다. 지금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그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진이 보기에도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

“네. 무리하지 마세요. 나중에 가져오겠습니다.

입을 가린 해진은 숨을 참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안쓰러운 눈길이 피부에 박히니 비참했다. 저택에서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감정이었으나 오늘따라 울렁인다. 사근사근한 말투가, 시선이.

사람들은 이제 없다고 했는데.

트레이를 수거한 사용인이 방을 나서자마자 해진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심코 라일이 앉아 식사하던 장소에 내리쬐는 해를 발견한 해진은 기이한 충동에 시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흠칫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새로 바뀐 이들은 무턱대고 그의 방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다.

그걸 알지만, 해진은 잠긴 목소리로 밖을 향해 대답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노크 소리가 다시 울리고 테니까.

“브라이트 . 실례합니다.

그러나 노크 소리를 견디지 않은 후회했다. 집사 옷을 입은 이가 들어오자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 괜찮아요.

이불을 끌어 올리며 해진은 시선을 피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집사는, 이전 집사와는 다르게 노신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눈가는 웃음길을 따라 인자하게 주름져 있었다. 조용조용한 말씨는 언제나 부드럽게 안을 흘러 다녔다. 무엇보다 베타였기에 알파 특유의 불쾌한 페로몬이 없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검은 집사 때문에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늘은 모처럼 해가 나는군요. 안뜰 정원에서 시간을 가져 보시는 어떠신지요.

티가 나게 위축된 해진을 안쓰럽게 보며 노신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얼마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된 집사의 전임 집사였다. 라일의 부모를 모시던 그는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회의를 느껴 집사 자리를 내려놓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저택에 긴급하게 집사 자리가 비어 버렸고, 라일의 끈질긴 요청에 잠시 돌아오기로 했다.

다만 오자마자 너무나도 뜻밖의 손님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집사의 만행을 간추려 들었을 참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해고된 집사는 그가 키워 제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가 있는 곳이 아닐 텐데요.

“그럴 리가요. 저택 내부에서 브라이트 씨가 자유롭게 다닐 있도록, 도련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알파이나 열성인 탓에 열등감을 품에 안은 제자가, 노신사는 안쓰러웠더랬다. 그래서 빠르게 집사 자리에 승진하려는 그의 욕구를 차라리 바람직한 욕망의 표출이라 이해했다.

마침 라일의 선대가 그렇게 버리는 바람에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조금 비뚤어진 열등감이 마음에 걸렸지만 헤쳐 나가리라 믿었는데. 대체 어쩌자고 그런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전해 들은 바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다. 노신사는 더는 열등감을 이해하고 싶지도, 변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주름진 시선이 다시 이불을 쥐고 있는 해진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라일 도련님은,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는가.

“…….”

분명 라일의 명령을 그대로 전했음에도 해진의 눈에는 금방 경계심이 깃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위축되어 벌벌 떨었다면 이번에는 확연한 경계였다. 마치 그런 자유가 제게 허락되었을 없다는 뿌리 깊은 불신마저 보인다.

이렇게 잔뜩 다친 모습을 보며 노신사는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 청년을 햇살 아래로 나갈 있게 주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시길.

그러나 해진은 좀처럼 경계를 풀어 주지 않았다. 이쯤 되니, 노신사는 이전 사용인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매번 순순히 물러나는 며칠 동안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안타깝게도 해진은 번도 먼저 그들을 찾지 않았다.

조용히 물러나는 노신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자 힘으로는 저택 밖으로 나갈 없을 것같이 삼엄해진 경비가 안타까웠다.

***

“오늘도 침실 밖으로는 걸음도 나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

해진의 소식을 들으며 라일은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졌다.

비겁하게 바뀔 것이란 한마디만 던진 도망쳤다. 그런데 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얀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자꾸 귓가에 빗소리가 들렸다. 며칠은 비도 없이 맑은 날이 이어졌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라일은 원한을 사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업이 돈을 번다는 필연적으로 다른 이의 몫을 탐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때로는 그것이 정당했지만, 대부분은 다른 경쟁자를 없애는 방식으로 베르무스는 성장해 왔다.

한참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에는 테러에 번이나 휘말린 적도 있었다. 도산시켜 버린 회사가 원한을 품고 행한 일이었다. 본사 앞에는 거대 기업인 베르무스를 비난하는 시위가 왕왕 벌어지기도 했다.

모든 알지만 라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기업 이미지 악화로 매출이 하락하지 않는 말이다. 그가 걸어야 하는 길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해진은 달랐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누군가를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단순한 계약 관계라고 변명하기엔 이미 라일이 먼저 나서서 너무 많은 선을 부숴 버렸다.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깨달았을 이미 늦어 있었다.

“밖에 나가도 된다는 , 똑똑히 전달했나?

“네.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그저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

곤란하다. 해진의 일에는 이리도 객관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을까.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이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은 녀석의 몸을 탐했던 떠올리면 심장이 뛰었다. 필시 본능에 함몰된 감각이 거북하고 불안한 탓이리라.

덕분에 라일은 처음으로 가야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없는 저택 내부의 CCTV에는 해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조차 적이 없을 정도로 극도로 외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며 라일은 이제는 익숙하게 의심을 떠올렸다. 사용인들이 그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았는가 하며.

해진이 스스로 나오기를 거부했을 수도 있으나 중요한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안에 갇혀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을 .

그런데 도통 쉽지 않았다. 사용인들을 전부 갈아치웠음에도 녀석의 경계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뿌리 깊게 핍박했는지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지난 5년간의 행적이 많이 보였다면 파악이 쉬웠을 텐데.

              

#37

라일은 한숨을 쉬며 CCTV 이렇게 적은 원인을 떠올리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불륜이나 일삼는 한심한 꼬리를 밟히지 않겠다고, 그의 아버지는 그나마 있던 저택의 감시 체계를 이렇게나 줄여 버렸다.

선친은 귀족이었던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며 사용인들을 진짜 하인이라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이 오늘따라 짜증이 났다.

“회장님.

“말해.

“이번에는 새어 나간 정보를 막을 수는 없을 같습니다. 단순히 저택이 봉쇄된 것을 떠나, 일전에 회장님께서 브라이트 씨를 모시고 병원에 갔던 사실이 같이 엮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때의 목격자 쪽에서 정보가 새고 있는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부 막을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적당히 힘과 돈을 써서 무마해 버릴 작정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트라우마로 쓰러진 해진을 병원에 데려갔던 일이 엮이다니,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어떻게?

“……그것이, 베르무스가의 저택에서 오메가가 다쳐 나간다는 소문입니다만…….

“…….”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서 라일은 그만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이 내는 악의적인 소문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길을 잃은 와중에도 그가 해야 일들은 이렇게 착실하게 생겨나고 있었다.

찾아낸 해답은 하나 있었다. 해진에게 바뀔 것이라 했으니, 일단 바뀌어야 했다. 말을 백번 전해도 믿지 않는다면 행동으로 직접 알려야 하겠지. 어이없을 정도로 그를 떠밀어 대는 책임감을, 라일은 그렇게 표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매번 해진이 무얼 하는지 물을 때마다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임 하나 없이 밥도 깨작인다면 건강하던 사람도 당장에 우울증에 걸리리라.

“회장님. 지금 상황에서, 브라이트 씨는 적어도 건강한 모습으로 저택을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마찬가지로 착잡한 표정을 지은 비서는 무언가 도움이 자료가 있을까 싶어 태블릿을 뒤적였다. 모습을 보던 라일은 무거운 일거리를 늘려 주었다.

“그리고 저택 내부에 CCTV 늘려.

그가 보는 곳에서 해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꼴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일어났던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라일은 똑같은 일에 다시 당하느니 그냥 권총으로 머리를 버릴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적어도 저택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귀에 들어와야 했다.

“대대적으로 내부를 손보실 계획이십니까?

잠깐 해진의 불편한 다리가 신경 쓰였으나 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CCTV 다는 이상을 필요는 없겠지. 낡아 빠진 저택은 어차피 CCTV 다는 것조차 품이 들어간다.

“아니, 일단은 눈이 닿는 곳이 없도록만 .

그러니까 이건, 그냥 지나간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함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

라일이 해진을 찾아간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빌어먹을 제대로 먹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가 저질러 본사의 일도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해진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트 사이클이 지난 해진은 시도 때도 없이 체온이 변화했다. 겨우 그를 진정시켜 진찰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너무 갑작스럽게 우성의 페로몬을 많이 접촉한 탓이라고 했다.

설명을 듣는 내내 기묘한 간질거림이 피부 밑을 돌아다니는 감각을 느꼈다. 또한 해진의 페로몬에 영향받은 분명하다.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라일은 저택으로 돌아와 녀석에게 향했다. 발걸음이 사뭇 다급했으나 정작 라일은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저택의 본관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그에게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CCTV 체계의 구축이 끝날 때까지 임시로 세워 이들이었다.

곁을 지나가던 그는 문득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경호팀에 알파가 이렇게 많았던가.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회장님.

“아니. 계속 수고해.

경호 같은 직업에는 알파의 비율이 높았다. 그러니 새삼스러운 감상이 아닐 없었다. 아무래도 열성 알파였던 집사를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서 그러리라. 라일은 불쾌한 감각을 그렇게 생각하며 넘겨 버렸다.

계단을 오르니 해진의 방문이 보였다. 익히 밝은 파스텔 색조의 음각 무늬가 요란하게도 시야에 박혀 든다.

해진의 침실 앞에 잠시 멈춰 있던 라일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잠깐의 틈을 지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시간이 느려지는지 이상한 일이었다.

“…….”

“…….”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해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같았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한 순간 라일은 자신이 녀석과 살가운 인사를 처지가 아니라는 깨달았다.

엉거주춤 일어난 해진이 침대맡으로 내려섰다. 앙상한 발목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얘기 하지.

녀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랑이는 머리칼을 보니, 방문을 열었을 당시 녀석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와는 다르게 해진은 자연스럽게 뒤돌아 침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향했다. 자그마한 뒤통수에 라일의 시선이 진득하니 따라붙었다.

서로 마주하고 앉은 뒤에야 해진은 다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게 이상하게 긴장된 탓에 라일은 본론을 성급하게 꺼내 들었다.

“비서가 먼저 대충 사정 설명을 거로 아는데.

“네.

순순히 대답하는 해진에게는 얼핏 보였던 표정은 흔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흔적도 없었다.

무심한 반응에 라일은 불편한 심정을 숨겼다. 이제 잘했다는 소리를 듣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아니다. 그저 전부 일이라는 구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해고한 놈들에게는 소송을 거야. 다만 법적 소송의 주체로는 세우지 않을 생각인데.

“…….”

“소송의 당사자가 되고 싶다면 변호사를 지원해 주겠어. 다만 그렇게 되면 재판에 출석해야 할지도 모르고.

“전 그냥, 아무것도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

생각도 하지 않는 태도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입가를 매만졌다. 비서에게 미리 들었으니 생각을 미리 정리해 놨을 수도 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

순간 맨발로 밖을 헤매던 녀석의 모습이 생각나는지.

“……그럼 그들은 횡령이나 다른 업무 태만으로밖에 처벌받지 않게 거야. 괜찮겠나?

그것밖에, 라고 표현하기에는 라일이 계획하고 있는 보복은 훨씬 컸다. 그런데도 괜히 도발하듯 해진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도 녀석은 재차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분명 집사에게 놈을 죽여도 시원찮을 정도로 수모를 당했을 텐데, 대체 .

“요새 계속 침실 안에만 있다고 들었어.

“……그렇습니다만.

이유 모를 갈급함으로 라일은 내뱉었다. 보고를 받을 때마다 움직임 하나 없는 해진의 태도는 확실히 피해자의 그것이었다.

물론 다리도 아프니 당분간 몸을 보전하는 편이 좋으리라. 문제는 식사량도 시원찮아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너무 안에만 박혀 있는 문제는 아닐까.

어쩐지 며칠 사이에 해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도 같았다.

“이제 집에서 홀대할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 마음껏 돌아다니도록 . 필요한 있다면 말하고.

말을 뱉고 나니 다시 녀석의 다리 상태가 걸렸다. 병원을 있어야 정확한 상태를 진단할 텐데, 파견되었던 의사는 당분간 정신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중요하다고 했다.

라일의 말에도 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도 꿋꿋하게 열리지 않는다.

살짝 마주쳤다가 사라진 해진의 눈빛이 궁금했다. 슬쩍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은 녀석이 라일의 앞에서 창문을 닫아 버렸던 그날처럼 해진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직도 옅게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해진의 쇄골이 사이로 얼핏 보였다. 옅어진 흔적을 보니 이상하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계속 그런 해진을 살피던 라일은, 본래 방에 들어오자마자 하려고 했던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일단, ……그간 있던 일은 사과하지.

“…….”

여전히 해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차피 이럴 것이라 예상하고 왔는데도 침묵이 무언의 질타로만 느껴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한 없는 라일은 이런 상태가 이상하다는 자각했다.

애써 정신을 추스른 라일은 침착하게 준비해 말들을 꺼내 들었다.

“특히 그날, 노팅을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러시겠죠.

덤덤하게 긍정하는 해진과는 다르게, 정작 입을 라일은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이 마치 송곳을 뱉는 느껴졌다.

이래서 페로몬에 휘둘리는 몸뚱이는 불편한 거였다. 어쨌든 덕분에 차가운 이성을 다시 일깨운 라일은 서류 가지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와 관련해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겠어.

              

#38

이번 노팅은 저번과는 차원이 다른 실수였다. 그때보다 집요하고 오랜 노팅을 데다가 하필 해진이 히트 사이클 중이었다. 열성이니 그래도 임신 확률은 낮을 테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없었다.

그는 차마 해진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수술을 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새로운 후계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분명, 설령 원한을 사더라도 억지로 해진을 병원으로 밀어 넣는 맞으리라. 그런데도 라일은 여러 가지 방안 차마 그것만은 가져올 수가 없었다.

최선으로 택한 것이 지금 내민 서류였다. 양육비는 지원하겠으나 이상의 상속 문제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애초에 그가 실수하지 않았으면 되는 일인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라일은 해진과 관련해서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어렴풋하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러한 라일의 걱정이 무색하게 해진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반항하지 않고 수술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덤덤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라일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컸다.

분명 기꺼운 일이었다. 애초에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해진의 입장에서도 원치 않는 아이일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 이렇게 초조하지.

안을 소용돌이처럼 휘감는 감각이 이제 도를 넘을 정도로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정상이 아니다. 해진이 라일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며칠 상태가 이상했던 것처럼 라일 자신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영문 모를 불쾌함은 애써 내리누른다. 해진과의 협상은 예상보다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보상으로 원하는 있다면…….

“베르무스 .

“…….”

단호하게 말을 끊고 들어오는 음성에 이번엔 등줄기가 서늘했다. 라일은 무심코 비가 온다고 생각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상이 무색하게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다.

“이제 이곳을 나가고 싶습니다.

“…….”

이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라일은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삼켰다. 자신은 해진이 당연하게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언제든지 그만둘 있다는 조항은 해진이 요구한 하나의 조건이었다. 마치 그가 예전 계약을 부모를 보러 가는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의 조건마저 뭉갠 전적이 있던 라일은 이번 요구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되었다.

분명 그랬는데, 차마 선뜻 그러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다시, 생각해 줬으면 하는데.

“이유는요.

슬쩍 다시 눈을 내리깐 해진이 건조하게 물었다. 내뱉은 미약한 한숨은 라일의 피부를 쩍쩍 갈라놓을 달려들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알게 모르게 라일을 감싸고 있던 해진의 페로몬이 미약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감각이 마치 거대한 사포처럼 거칠게 느껴져서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잖아. 책임이니 일단 이곳에서 회복에 주력하도록 . 지원은 아낌없이 테니.

그래. 그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해진은 저택의 전무후무한 피해자였다. 그러니 라일에게는 그런 해진의 건강을 염려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자꾸만 빗속에서 등을 보인 걷는 해진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녀석은 지금 그의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그러나 겨우 짜낸 대답에 해진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비스듬하게 올라온 시선이 라일의 끝에 닿는다.

“우리가, 사사로이 그런 신경 사이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사롭게 얘기할 사이던가?

벌써 번이나 들은 환청이, 이제는 해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수한 의문으로 구성된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언젠가 동요하는 라일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던 것처럼, 철저히 기대가 배제된 목소리였다.

그걸 깨달은 라일은 무심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해진의 페로몬에 얼핏 닿았던 손등에 통증이 느껴진다. 사포같이 거칠거칠하던 감각이 이제 걷잡을 없이 까칠해져 마치 피부가 쓸려 나가기라도 같았다.

차라리 해진의 말이 비꼬는 감각을 담고 있었다면 나았을까.

“……기사를 전부 막을 수가 없었어.

“기사요?

“그래.

멍하니 손등을 바라보던 라일은 비서가 일러 주었던 핑계를 떠올렸다. 아까부터 은연중에 들이마시던 해진의 페로몬이 속부터 시작해 저릿저릿하게 온몸을 타고 흘렀다. 수천 개의 개미가 속을 헤집는 같아서 그는 주먹을 쥐어야 했다.

더는 이상한 것들이 속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지금 베르무스가는 익명의 오메가를 핍박하고 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지.

“…….”

해진의 눈빛이 점점 꺼멓게 죽어가는 보니 그의 속도 흙탕물처럼 흐트러졌다. 감각을 모조리 무시한 라일은 가장 중요한 가지에 의지를 담았다.

붙잡아야 한다.

“공교롭게도 그건 사실이고. 추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협조가 필요해.

“제게 바라시는 겁니까.

“이전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저택에서 요양 ,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나가. 그게 필요해.

“…….”

단지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추문까지 잠재울 있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해진은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굴고 있었고 라일은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녀석이 저택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남은 계약 기간만 채우다가 간다고 생각해도 좋아. 그러면 규정해 놓았던 보상이 함께 따라갈 테니.

까맣게 죽은 시선마저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그들 사이에는 덧없는 약속만 까맣게 자아낸 서류가 의미 없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바짝 말라 달라붙는 목구멍을 애써 움직이며 라일은 쐐기를 박았다. 덧없는 시선일지라도 마주 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기이한 생각을 하면서.

“난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야.

“…….”

서류 위의 글자를 덧없이 읽으며 해진은 생각에 잠겼다. 번이나 반복되니 모를 수가 없었다. 라일은, 확실히 이상했다.

특히나 노팅을 번이나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이상 반응이었다. 아무리 해진이 이런 형질에 관해 무지하다고는 하다 노팅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알았다.

임신 여부를 떠나서 알파의 의지가 개입되는 행위가 어떻게 실수로 번이나 일어난 걸까.

설마하니 라일이 노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보아 라일은 그런 집착을 가질 만한 알파가 아니었다. 그러니 몸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다.

늦은 제가 묵던 숙소까지 들이닥쳤던 라일을 떠올린 해진은 까맣게 죽어가는 마음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왜인지 라일이 그를 놔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베르무스 .

“……말해.

“다른 오메가를 찾는 ,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뭐?

뜬금없는 물음에 라일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다른 오메가라니.

그러나 이내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떠오른다. 해진을 다시 데려오면서 라일은 분명 결심한 있었다. 페로몬이 구속력이라도 갖는 아닐까 의심하며 다른 오메가와도 계약해 해진의 잔상을 지우겠다고.

이후로는 계약 기간 또한 짧게 잡아야겠다고 고민했었다. 몸에 이상 걸리적거리는 생긴다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그걸 생각도 하고 있었지.

“분명, 말하면 이제부터 바뀔 거라고 했죠.

“……그래.

목이 타들어 가는 같았다. 라일은 지금 제가 대체 어떻게 소리 내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없었다.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은 해진의 페로몬에는 짙은 체념이 녹아 있었다. 오랜 기간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굳어 버린 감정이었다.

그간 저택에서 홀로 저런 무거운 감정을 빚어내 왔다는 것처럼.

“저는 이제 떨어질 곳이 없어요.

“…….”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해진의 말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라일이 그대로 무시하고 짓밟아도 저항할 없을 것처럼 약하디약했다.

그런데도 라일은 도무지 그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최후통첩처럼 느껴지는 말을 절대 가볍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계약 기간이 3개월이라 했던 말이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눈이 곧게 마주쳤다. 그래서 라일은 아무런 대답도 수가 없었다.

<챕터 6>

해진을 돌보던 의사가 돌아가기 라일을 찾아왔다. 일단 몸살이나 히트 사이클의 여파는 지나갔기에 저택에서 아예 나가는 길이었다.

“몇 정신과 진료를 권했습니다만, 전부 거부하셨습니다.

“……이유도 말했나?

그래도 라일도 염두에 두고 있던 사안이었다. 지금처럼 바늘 하나에도 저렇게 경기를 일으킨다면 앞으로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리 때문에 혹시 진료가 필요해도 병원에 수가 없으니 곤란했다.

“그것이……. 겉보기에 멀쩡하기만 된다고 하시는데 ,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지요.

“…….”

건강하게 걸어 나가란 말을 보기에만 멀쩡하면 되지 않냐고 받아들이다니. 라일은 답답한 가슴 때문에 옷이 불편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39

“일단 정신과 진료를 계속 강요하는 것도 스트레스 요인이 있습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태로는요. 일단 체력 회복이 중요한 시기로 판단됩니다.

“그래.

“다만 전문분야가 아니니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시는 권합니다.

“참고하지.

인사를 남긴 의사는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섰다. 그럴 만도 했다. 라일이 안겨 막대한 진료비를 들고 신경 것이 유독 많았던 환자도 뒤로하는 것이니까.

그런 의사와는 다르게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고민으로 빠져들었다. 일단 몸을 회복해야 다음 치료를 하든 텐데 해진은 도통 기운을 차리질 못했다. 듣기로는 여전히 식사량이 형편없다고.

매번 확인할 때마다 좋은 소리가 들려오질 않는다. 착잡한 심정이 라일은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내며 두통을 참았다.

계약의 끝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소리가 이리도 거슬리는지.

가야겠다면 놓아줘야 한다. 정말 녀석을 감금이라도 아닌 이상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일단 임시로 데려다 놓고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던 같은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3개월이라 약속하고 해진을 다시 저택으로 데려온 3 정도 되었다. 그러니 이제 달이 조금 넘는 시간만 남은 셈이다.

그걸 떠올리자 다시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라일은 자신이 방금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는 상기했다.

여러모로 답답한 나날이었다.

***

지갑 속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면서 해진은 가만가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어도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부모님의 얼굴은 자꾸만 병원에 누워 있던 마른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 아닌가.

이왕이면 가장 좋았던 시절의 얼굴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진은 틈이 때마다 지갑에 꽂아 사진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눈에 담았다.

히트 사이클로 인해 ‘사고’가 생겼던 이후, 정신을 차린 해진은 뒤늦게 지갑을 찾았다. 침대 사이에 끼워 것은 다행스럽게도 침실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안에 사진을 보고 해진의 것으로 짐작해 챙겨 두었다고 했다. 청소하다 그걸 발견한 사용인은 해진이 지갑을 떨어트려 침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매일 같이 침실의 시트와 이불이 바뀌었다. 청소하는 범위도 엄청 꼼꼼해졌다. 덕분에 더는 지갑을 숨길 만한 곳을 찾을 없게 해진은 낡은 캐리어 안에 지갑을 넣어 두어야 했다. 그래도 이제는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 같아서 다행이었다.

멍하니 사진을 보는 사이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가족의 사진이 저를 지켜 주기라도 것처럼 지갑을 쥐었던 해진은 대답했다. 음식을 올린 트레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어떨 정신 차리면 이틀이 있기도 했다. 그런 멍한 와중에도 식사 시간은 고역이었다. 저기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여전히 바늘같이 아프다.

그래도 해진은 억지로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형편없는 상태가 문제라면 해결하면 일이었다. 똑바로 걸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조건이라면 밥을 먹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억지로 모든 음식을 삼켜내자 잠자코 있던 사용인이 얼른 다가와 트레이를 거둬 갔다. 그러면서 깨끗해진 접시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악의 없는 상냥한 음색이 해진에게 거침없이 쏟아졌다.

“요새는 드시네요.

“…….”

누가 안에 같이 있는 부담스러워한다는 알아차렸는지 사용인은 일이 끝나면 금방 자리를 비워 주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를 수거한 사용인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박혀 있던 해진은 툭툭 가슴을 두드렸다. 억지로 삼킨 탓인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억지로 포크를 들려 주던 검은 옷의 집사가 기억난다.

“욱.

벌떡 일어난 해진은 구르듯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발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신경 겨를이 없었다.

변기를 잡자마자 구토가 올라왔다. 겨우 삼켜낸 음식물은 그간 쌓인 울음이라도 되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허억, 우욱.

여전히 해진은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버거웠다.

***

CCTV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빠짐없이 잘해 두었나? 서버는 원래대로 이곳 본사에 자동 백업되도록 만들어.

감시 체계는 확실히 이원적으로 두는 마음이 편했다. 저도 모르게 선친의 전례를 따라가는 같아서 라일은 불쾌했으나 무시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CCTV 기록까지 은폐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네. 한번 보시겠습니까.

태블릿 하나를 조작해 화면을 띄운 비서가 라일에게 그걸 내밀었다. 화면에는 저택 내부의 복도 하나가 들어왔다. 침대 시트를 사용인 하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라일은 충동적으로 지시했다.

“……진의 방을 .

“네.

비서는 별말 없이 해진의 방에 딸린 응접실을 화면 위로 띄웠다. 해진의 침실과 화장실에는 당연하지만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다. 외의 모든 곳에는 CCTV 설치될 거라는 말도 빠짐없이 두었다. 특히나 손님방의 옷장은 주요 감시 대상이라는 점도 알려주었다.

전례가 있어서 어쩔 없이 조치였으나 불편한 것도 사실이리라. 그런데 해진은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잠깐 멍하니 미동 없는 응접실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 속으로 불쑥 검은 머리가 들어왔다.

“…….”

순간적으로 당황한 라일은 재빨리 화면을 끄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화면 가득히 녀석의 모습이 들어오니 왜인지 몸이 덜컥 굳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진은 이상하게 작아 보이기만 했다. 분명 요새는 밥을 적당히 먹고 있다고 했는데 마른 몸은 여전해 보인다.

옷방에 볼일이 있는지 해진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옷방 문이 달칵 열릴 때까지 라일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러니 감시를 위해 곳에 CCTV 설치한 것만 같았다.

그걸 자각한 순간 라일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버렸다. 눈치를 보던 비서가 얼른 태블릿을 가져갔다.

“……요새는 먹는다고?

“네. 점심 식사도 남기지 않고 드셨다고 했습니다.

“…….”

잔상처럼 남은 해진의 모습이 자꾸만 앞을 떠다닌다. 분명 여전히 지나치게 말라 보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라일은 이제 습관처럼 의심을 떠올렸다. , 무슨 일이 생긴 아닐까.

이전의 범죄자 새끼와는 다르게 라일이 초빙한 이번 집사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선친의 일로 사임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계속 집사 자리에 남아 있었을 .

그러나 라일은 이전 집사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앞에서는 납작 엎드리던 놈을 치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저녁에 진의 방으로 찾아갈 거야.

“네, 그럼 집사에게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니. 알리지 .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 누군가가 저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

퇴근을 마침 저녁 시간대였다.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가늠한 라일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해진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단지 진짜로 먹고 있는지만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라일은 바쁘게 녀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저택 곳곳에는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된 카메라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저택의 외양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 훼손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썼다고 했다. 저택의 보존 따위 라일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며 몇몇 사용인을 마주쳤다. 전부 낯선 얼굴이지만 신원 하나는 확실하게 보고 뽑았다. 앞으로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생각을 흘려보내며 라일은 해진의 방을 두드렸다. 안쪽에 사용인이 없는지 아무런 응답이 없기에 일단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렇게 해진의 침실까지 다가간 라일은 문득 안에서 들리는 고성에 고개를 번뜩 들어야 했다.

“브라이트 ! 괜찮으세요?

해진의 이름과 함께 사용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용인은 침실 안쪽에 있는 화장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응접실과 연결된 메인 화장실과는 다르게 작은 세면대와 간단한 용무만 있는 공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안에는 식사용 트레이가 한쪽으로 거칠게 밀려나 나동그라져 있었고, 반쯤 남은 음식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난장판이었다.

“브라이트 !! 열어 보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무슨 일이야!

사용인은 갑자기 나타난 라일을 보고 놀란 낯을 했다. 화가 라일이 재차 묻자 다시 걱정스럽게 화장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브라이트 씨께서 갑자기 속이 좋으신지 뛰어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한참 지나도 나오셔서…….

“진. 열어 .

말을 듣자마자 라일은 사용인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던 사용인과는 다르게 힘이 들어간 손으로.

안에서는 소름 끼치는 적막만 흘렀다. 사용인의 말대로 그저 속이 좋았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미친 듯한 불안함이 라일을 잠식한다. 그렇게 한참 문을 두드리는데 문득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고 티끌만큼 남아 있는 그것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40

“진!

그걸 알아차린 순간 라일은 눈앞에 불꽃이 튀는 감각을 느꼈다. 두드리는 손에는 이제 힘이 너무 들어가서 문이 부서질 흔들렸다. 그런데도 안쪽에선 대꾸 하나 없었다.

심장이 어딘가에 끼어서 쥐어짜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걸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조금 물러났다가 있는 힘껏 어깨로 문을 밀었다.

여태 굳게 닫혀 있던 것과는 다르게 문은 싱겁게 부서졌다. 라일은 성급하게 잔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향했다. 해진의 페로몬이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진! 정신 차려! 의사를 불러! 당장!

“네, !

얼굴이 흥건하게 젖은 해진은 세면대 옆에 구겨진 앉아 있었다. 방금 라일이 문을 부수며 들어왔는데도 허공을 보며 멍하니 있기만 했다.

모습에 미친 듯이 불안해져서 얼른 다가가 해진의 어깨를 감쌌다. 살짝 흔들며 주의를 끌어 봐도 시선은 돌아오질 않는다.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진, 무슨 일이야. 정신 차려 .

“……눈.

“뭐?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몹시 작았다. 라일은 해진의 입가로 바짝 붙으며 귀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끌어안은 해진의 몸은 조금씩 계속 떨리고 있었다.

“눈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

“쳐다본다고?

“계속.

“내가 누군진 알겠나? 여길 봐봐.

안에 들어오는 해진은 정말이지 작았다. 이렇게까지 작은 체구였나 싶을 정도로.

어깨를 손에서는 앙상한 뼈대가 느껴졌다. 형언할 없는 참담한 심정이 라일을 감싸고 올라왔다. 아까 어딘가에 단단히 끼인 같던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옥죄이고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라일은 그대로 해진을 안아 들어 올렸다. 의사를 부른다 해도 시간이 걸린다는 상기하자마자 몸이 절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저항 하나 없이 품에 안긴 해진의 팔이 아래로 늘어졌다. 불길한 몸짓을 보며 라일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 노크 소리가 들려.

자꾸 모를 소리를 하는 해진 때문에 마음이 끝도 없이 다급했다.

***

“무슨 짓을 했어. 설명해.

“그것이…….

저택을 나간 하루밖에 의사는 다시 불려 상황이 얼떨떨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해진의 상태에는 이상이 없고 정신적인 문제일 거란 말만 했다. 혹시 그게 아니라면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해야 있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병원에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일은 트라우마에 빠져 벌벌 떠는 해진의 모습을 이전에도 있었다. 병원에 억지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저번처럼 발작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방도가 없는 상황에 라일은 못내 화가 났다.

일단 해진을 눕혀 함께 있던 사용인을 거세게 추궁했다. 억울한 얼굴이긴 하나 사용인은 열심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분명 해진은 며칠 놀라울 정도로 밥을 먹어 주었다고.

“그래서 요새 드셔서 좋다고 말씀드리고 있는데, 주인님이 노크하시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라니. 해진도 분명 자꾸 노크 소리가 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문제일까.

무엇보다 말을 들어도 진실인지 수가 없었다. 침실 안까지는 CCTV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새로 바뀐 사용인이 해진을 홀대할 확률은 적긴 했다.

답답한 상황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에는 아직도 벌벌 떨던 해진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작고 미약하던 떨림은 라일의 머리에 닿을 즈음엔 거대한 지진이 되었다.

“집사는 어딜 거야.

지켜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집사는 공교롭게도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을 했다고.

차마 의자에 앉을 수도 없어서 라일은 초조하게 해진의 방에 딸린 응접실을 왔다 갔다 했다. 도무지 멀리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눈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그는 해진이 구역질을 했다는 떠올리곤 곤혹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임신한 걸까. 이런 쪽으로는 관심을 적이 없기에 언제쯤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없었다.

몸으로 먼저 그걸 알아차린 해진이 패닉에 빠졌을 수도 있겠다. 원치 않은 아이라서 그렇게 동요를 했을지도.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거칠게 문지른 라일은 문득 천장에 새로 달아 CCTV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이 계속 쳐다본다는 말도 했었지.

CCTV 달아 혹시 감시로 느껴진 아닐까. 감시가 목적이긴 했으나 라일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느꼈을 수도 있겠다. 녀석은 원래 감정표현을 하지 않으니 집사는 미처 거부감을 읽지 못했을 거고.

이러나저러나 전부 라일 자신이 원인인 같았다. 애초에 해진이 저런 트라우마를 갖게 것도 자신 때문이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숨조차 크게 수가 없었다. 행여 호흡이 다른 방에 누워 있을 해진에게 닿아 버릴까 .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던 사용인들과 라일은 반사적으로 응접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가 오늘따라 천둥처럼 느껴졌다. 해진이 언급하고 나니 이유도 모른 그게 못내 거슬렸다.

그의 눈짓에 얼른 가까이 있던 사용인 하나가 문을 열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을 했다던 집사였다.

“집사. 이런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집사를 바라보던 라일은 한숨을 쉬며 한쪽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같이 다가와 반대편에 앉은 집사는 뜻밖의 소리를 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얼마 전의 , 불미스러운 일로요.

“뭐라고요?

뜬금없는 소리에 라일은 인상을 썼다. 노신사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용인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급히 돌아오기라도 .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속내를 조금 떠보고 싶어서 저택 업무에 불만 있는 척을 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말하세요. 일로 고소를 당해도 해결해 테니, 빨리.

직감적으로 해진의 상태에 관해 묻고 왔다는 눈치챈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솔직한 모습을 보며 푸근하게 웃던 노신사는, 돌연 낯을 굳혔다.

“……제임스 그놈이 , 돌이킬 없는 짓을 했더군요.

“…….”

넋두리같이 집사의 이름을 부르며 한탄하는 그를 라일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압박에 쓴웃음을 지은 노신사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렵다는 그간 있었던 자세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해고되기 얼마 전까지는 브라이트 씨가 밥을 먹을 때까지 곁에서 감시하게 했다더군요.

자꾸 누가 쳐다본다는 , 이런 뜻이었을까.

머리를 맞은 같은 기분이었다. 라일은 그간 해진이 밥을 굶기만 했지, 이런 쪽으로까지 학대당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놈들이 해고되기 얼마 전이라는 분명, 해진이 말랐다는 것을 라일이 신경 쓰기 시작할 때였다.

그저 먹이라고 했을 뿐인데.

“특히 그들이 준비했던 마지막 식사는 집사가 직접 가지고 들어갔는데, 강제로 먹였다고 합니다.

마치 사육하는 가축이라도 들이듯, 해진을 그의 앞에 밀어 넣으려던 집사의 만행이 떠올랐다. 이제야, 집사가 그의 명령을 대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차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짓누르면서 라일은 의자에 기대었다.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과거에 저지른 잘못만이 거미줄처럼 놓여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가, 저를 너무 껄끄러워하셔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응에 확연한 이유가 있어 보여서요. 특히 복장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듯하더군요.

집사라는 존재 자체가 해진에게는 대못 같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아닐까. 검은 정장을 입은 집사를 바라보던 라일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이렇게라도 원인을 알았다면 당장 조처를 해야 했다. 한번 그걸 미루었다가 무슨 꼴을 봤는지, 이제는 충분했다.

“……집사, 당분간은 의복은 다른 입어 주셔야겠습니다. 집사…라는 호칭도 그만두죠.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도련님.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라일은 해진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번이고 그것이 뇌에 새겨질 때까지.

“그리고 앞으로 방에 노크는 하지 마세요.

“노크 말씀이십니까?

“네. 모든 저택에서 하게 하세요. 대신 종이라도 달아서 다른 방법으로 알리도록 하죠.

무의식적으로 시선은 해진이 누워 있을 침실로 향했다. 응접실을 불안하게 내내 돌아다니면서도 끝내 시선은 그쪽을 향했다. 어차피 굳게 문으로 막힌 곳이라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라일은 끈질기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눈을 감아도 해진의 잔상이 눈앞을 맴돈 자는 되었으니까.

“도련님.

“말씀하세요.

“그럼 이제 손을 치료하시죠.

뜬금없는 소리에 라일은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문을 부술 다친 것인지 미약하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보고 나서야 아픔이 느껴진다는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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