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OHC Chapters 41-50

#41

처음엔 전무님이라는 말을 떼고 씨를 붙이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내다 버린 같았다.

“강진욱?

- 그래. 강진욱. ? 상관없잖아. 너랑 나랑 나이도 같은데.

그거야 그렇긴 했다. 애초 둘은 중학교까지 같이 나온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지난 3년간 꼬박꼬박 전무님, 전무님 하던 최선우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 그건 그것대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긴 처음엔 그렇게 전무님 소리를 하면서도 반응을 살피는 최선우를 보고 ‘네가 전무라고? 하면서 비꼬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년을 전무님이라고 불려 오히려 그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그렇긴 하지. 근데 새삼스럽네.

- 그러니까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어차피 기억도 없는데 굳이 존댓말까지는 필요 없을 같아. 그렇지?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대답하는 강진욱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저에게 지지 않고 대거리하는 최선우를 떠올리니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니. 내가 지금 억지를 쓴다는 거야?

“그럴 리가. 말이 맞다고. 여하간 먹을 , 생각해 두고 있어.

- 이젠 당당하게 쫓아오겠다는 소리를 하네?

“뭐?

- 아니야?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오려는 거잖아.

맞는 말이긴 했다. 이미 강진욱을 태운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복잡한 제주시를 벗어나 널찍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

* * *

강진욱의 담백한 답변에 선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일인가, 이게 지금.

선우가 짜증스럽게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남자 둘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장까지 자신을 태워 줬던 사람들이었다.

“너, 아주 당당하다?

-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심지어 강진욱은 제가 잘못한 없다는 뻔뻔하게 보호가 목적이었다는 소리도 지껄여 댔다.

“그러시겠지.

보호가 먼저인지 감시가 먼저인지는 없지만. 선우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다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쪽은 어제 마트에서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 택시를 타는 곳까지 짐을 들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버스 정류장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고 차도 태워 줘야 하고, 마트에서 무겁게 들고나오는 보고 짐도 들어 줘야 하고. 그렇지?

잠시 강진욱에게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을 보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물론 선우도 강진욱이 뭐라 말하는 들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너 이거 약속 위반이야.

- 그냥 먹으려고 거야.

“그럼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 하는 아냐? 순서가 뒤바뀐 같은데?

그냥 끼는 무슨. 졸졸 쫓아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난 타이밍을 보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같은데.

식당에 앉아 수상한 차들을 보고 있을 때만 해도 선우는 자기 뒤를 따라다니는 그냥 감시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도망친 전적도 있으니 강진욱의 성격상 그냥 두지는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별로 이해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사고가 보통 사람과 같다면 광공 캐릭터가 아닌 것을.

- 그래도 어쩔 없잖아? 굳이 떠나겠다고 하고.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대로 가둬 두는 네가 원하지 않을 같아서 그랬을 뿐이야.

아니나 다를까 강진욱이 역시나 미친 소리를 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사람을 감금하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가둬 둔다니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 그러니까 정도는 이해해야지.

진짜 말이 통하네. 말이 통해.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전히 자신 앞에 난처해하는 얼굴로 사람을 봤다. 선우가 주차된 차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 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선우에게 번이나 얼굴도장을 찍은 남자였다. 길을 물어보고, 차에 태워 주겠다고 말하고, 마트에서 짐까지 들어 주었던 친절한 여행객.

남자를 확인한 순간 선우는 김태열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말을 던지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마주친 남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마치 우연히 만나기라도 것처럼 굴었다.

〈강진욱이 보냈죠. 당신들?

〈예? 그게 무슨 말씀하시는 거죠. 아닙니다.

〈강진욱한테 들었어요, 저한테 감시 붙였다고. 시장까지 태워다 주고, 마트에서 힘들어 보이면 짐도 들어 주라고 하셨잖아요.

선우가 강진욱을 들먹여 따지듯 묻자 남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선우의 거듭된 압박에 결국 짐을 들어 남자가 실토했다.

사실 실토까지도 아니고 그냥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강진욱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핸드폰 보세요.

선우는 손을 내밀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지 않겠나. 사실 앞에 말은 그냥 찔러보는 식이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망설였다.

〈내가 강진욱한테 전화할까요? 지금 당신들이랑 있는데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느냐고?

선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짐을 들어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얼른 핸드폰을 건넸다.

기능은 제대로 할까 싶은 구형 스마트폰이었다. 패턴이 걸려 있어 남자에게 내밀자, 남자는 순순하게 패턴을 풀어 주었다.

바탕 화면에는 달랑 메신저 하나만 깔려 있었다. 선우는 망설임 없이 앱을 실행했다. 그러자 전무님이라고 솔직하게 적힌 대화명이 보였다.

아래에는 비서실장이라고 적힌 것도 보였다. 비서실장이라면 비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가장 상단 목록에는 비서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전무님 제주 공항에 도착.]

 

강진욱이 제주도에 왔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했던 역시나가 순간이었다. 같이 먹자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강진욱과 나눈 대화를 보고 나서는 오랜만에 목뒤가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명령만 주고받은 아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사진에 박제되어 실시간으로 강진욱에게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모르고 신나게 병원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가면서 들킬까 긴장을 했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지경이었다.

아니, 화를 내야 하는 맞는데 강진욱이 어떤 놈인지 알다 보니까 원래 저런 놈이지 하고 납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딴 이해하고 있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하…….

선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해는 무슨 놈의 이해. 아까 남자의 핸드폰에서 메신저 내용도 아주 황당하건만.

“야, 강진욱. 일단 집으로 . 만나서 얘기하자.

그렇게 말하고 선우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차피 자신에게 감시를 붙였으니 집도 알고 있겠지.

“들었죠?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당당하게 남자들에게 집으로 태워다 것을 요구했다. 걸어서 거리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도보로 20 정도였으니.

하지만 강진욱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집에 있을 생각이었다.

보조석 남자가 재깍 달려와 뒷문을 열어 주었다. 살짝 웃는 얼굴은 선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자를 보는 선우의 눈빛은 고울 수가 없었다.

선의로 도와준 알았는데 사실은 강진욱의 명령 때문에 감시를 거였다니 어쩔 없었다.

“더운데 얼른 타세요.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권했다. 선우는 “에휴. 한숨을 쉬고 차에 올랐다. 시동도 끄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안엔 냉기가 가득했다. 확실히 덥지 않아서 좋기는 했다.

차를 타고 가니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선우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니 시야 끝에 파란 물결이 넘실거리는 보였다.

평소였다면 돌담까지 걸어가 멍하니 바다를 보면서 더위를 식혔겠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려던 선우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당 한쪽에 있는 파라솔이었다.

그래, 차라리 저기가 괜찮을 같았다. 어쩐지 강진욱을 안에까지 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인데 .

선우는 불퉁하게 생각하면서 파라솔이 펼쳐진 테이블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워낙 동네가 조용하다 보니까 차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낮은 담장 너머에서 한적한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승용차가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달칵.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보조석에서 비서가 내리는 보였다. 비서는 곧장 뒷좌석으로 가서 문손잡이를 당겼다.

“어지간히 챙기네.

괜히 심술이 돋은 말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밖으로 나온 역시나 강진욱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인데도 어두운 정장을 입은 강진욱은 전혀 더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여유로워 보였고, 덕분에 더더욱 그에게 시선이 끌렸다.

“생긴 말짱하지.

선우는 혼자 투덜거렸다. 겉모습만 봤을 누가 약간 맛이 놈이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사람을 감시하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걸 상대가 알게 되어도 당당한.

그때, 마치 선우가 어디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기라도 한다는 강진욱이 곧장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왔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선우는 모든 시간이 멈춘 같다는 착각을 했다. 분명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강진욱의 모든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강진욱의 눈빛이 저에게 꽂히는 순간,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저를 바라보는 강진욱의 시선만이 선우를 사로잡았을 .

마치 강렬한 여름의 햇살처럼.

              

#42

선우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눈살을 찌푸린 강진욱이 대문을 넘어왔다. 사실 제주의 대문은 대문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웠다.

기다란 나무 막대 3개를 걸어 두는 것이었는데, 선우는 저게 정낭이라 것도 며칠 지나고 중개인이 알려 줘서 알았다.

나무 막대 3개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뭐가 어떻다는 설명을 보기는 봤는데 기억은 나지 않았고, 선우는 그냥 막대 3개를 내려 상태였다.

어차피 집에 훔쳐 것도 없는데, . 그런 생각에서였다.

어설픈 대문을 지나 강진욱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은 내내 선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모델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면 강진욱을 이렇게 여유 있게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정말 강진욱은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미남이기는 했다. 체격이 편은 아니지만 다부져 보이고, 키도 껑충하니 크고, 다리는 길쭉하고.

그간 연애는 생각도 보고 꿈만 꾸던 선우에게 저런 남자가 집착해 준다는 고마워해야 일일지도 몰랐다.

“무슨 헛소리야.

스스로 떠올린 감상이 어이없어 선우가 혼잣말을 뱉었다.

“뭐?

그리고 말을 들은 강진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냐. 앉아, 거기.

선우는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강진욱 마음에 들지 않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별말 하지는 않고 선우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냥 들어가서 기다릴 그랬나.

잠시 후회가 들었지만, 선우는 마음을 바꿨다. 그래도 역시 강진욱을 안까지 데리고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변명 .

강진욱이 말이 아니었다. 선우가 꺼낸 소리였다.

“변명?

“그래. 뭐라도 말이 있을 아냐.

선우는 팔짱을 끼고 강진욱을 바라봤다. 일단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들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강진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정리된 마당, 깔끔한 ,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보이는 돌담.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집은 의외로 정감이 갔고 어쩐지 최선우와 어울리는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마침내 선우에게 다시 시선을 돌린 강진욱이 말했다.

“응?

강진욱에게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왔다. 그냥이라니.

“네가 시간을 달라면서. 쫓아가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했어. 시간을 주되 대신 네가 하는지는 알고 싶었으니까 어쩔 없잖아.

“하…… 진짜, 강진욱…….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강진욱을 보며 선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강진욱은 이런 캐릭터였다.

메인수와 말을 때도 뭔가 일반인 같지 않은 사고를 하고 행동해서 독자를 황당하게 만들곤 했다.

광공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전부 넘길 있는 자신이 그저 읽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선우는 밖의 편집자가 아닌 실제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강진욱을 앞에 두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간 선우가 오던 행동 때문인지 강진욱이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는다는 정도가 아닐까.

“넌 상식이 부족한 같아.

“뭐?

“보통 사람은 그러거든?

선우는 강진욱의 들썩이는 눈썹을 보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고 하기는 그렇겠지. 극우성 알파니까. 근데 그거랑 별개로 보통은 시간을 달라고 하면 그냥 기다리지, 너처럼 사람을 붙이진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우는 강진욱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말을 무시나 하면 다행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놀랍게도 강진욱에게서 질문이 돌아왔다.

“뭐?

“네가 곁에 없을 하는지 알고 싶으니 어쩔 없잖아. 그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선우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을 슬슬 문질렀다. 왜인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런 말을 . 당황스럽게. 곁에 없을 하는지 알고 싶다느니. 그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느니.

그거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같이 들리잖아. 아니, 물론 이상하게 강진욱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뭐랄까. 속에 어떤 감정이 들어 있는 같이 느껴지니 이상하달까, 밑이 간질간질하다고 해야 할까.

“뭐, 어떻게 . 연락을 자주 하면 되잖아.

보통은 그렇게 한다고.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삼시세끼 먹을 , 자기 전에도 메시지 보내고. 이미 최선우와 빈번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강진욱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텍스트 말고 최선우가 하고 있는지 직접 없으니 사진으로라도 알아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거면 되지 , 사람까지.

“그렇게 했으면 네가 버스 정류장에서 졸고 있다는 몰랐겠지. 언제 버스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 그건!

“두 가득 무겁게 짐을 들고 택시 정류장에 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야. 그것 때문에 손이 발갛게 변했다는 것도.

분명 아까 감시자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랑은 분위기가 달랐다. 같은 장면을 말하는데 이렇게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야 남자들은 잘잘못을 추궁하는 것에 변명했을 뿐이고, 지금의 강진욱은 최선우를 걱정해서 그랬다는 의미로 말이니까 각각의 무게가 다르긴 했다.

“나는 그런 순간을 모르는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내게 말해 주지는 않겠지. 그러니 어쩔 없는 거잖아.

아니, 어쩔 수가 없어. 보통은 그런다니까?

“그래도 너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보통은…… 그냥 서로 이렇다 저렇다 대화만 하지.

선우는 새삼스럽게 강진욱을 바라봤다. 우리는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약혼했다고 해도 억지로 이어진 관계에 불과했다. 그럼 대체 지금 강진욱과 자신은 무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전에는 잘라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대화…….

“그래. 사람을 붙이는 아니라 지금처럼 물어보라고.

선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눈을 피했다. 볼에 시선이 느껴졌다. 강진욱이겠지.

“좋아. 앞으로 그렇게 할게.

강진욱에게 나온 대답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네 말대로 하겠다고.

강진욱이 저렇게 순순하게 굴다니. 뭐야. 이건 . 얼떨떨한 기분에 선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도 이제 먼저, 자주 연락해.

“어, 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선우가 볼을 긁적거렸다. 뭔가 얼렁뚱땅 일을 해결한 같았다. 찜찜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데 괜찮은 같기도 하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강진욱이 앞으로는 제멋대로 굴지 않겠다고 하니까 이만하면 됐지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점심은?

“글, 글쎄. 생각한 없는데.

일이 하도 휙휙 흐르다 보니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꼬르륵.

선우의 이성과 몸은 달랐나 보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강진욱의 시선이 가려진 배로 향했다. 강진욱은 소리 때문에 이러는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보단 부끄럽다고 할까.

뺨이며 뒤가 뜨끈해지는 같아 선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 저기. , 잠깐 기다려. 먹을 가지고 올게.

차마 강진욱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재빠르게 집으로 들어왔다.

주방으로 가니 아침에 미리 옥수수가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옆에는 씻어 놓은 천도복숭아도 있었다. 요즘 선우가 먹는 대부분 음식은 이런 간편한 것들이었다. 어차피 다른 먹을 수가 없으니 어쩔 없었다.

하지만 강진욱은 이런 거로는 간에 기별도 같긴 했다.

“그러게. 갑자기 들이닥치고 그래.

선우는 괜히 구시렁거리면서 일단 옥수수를 챙겼다. 이거라도 먹이고 밥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참이었다.

“헉!

돌아서던 선우가 놀라 움찔 떨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강진욱이 문가에 멀뚱히 서서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선우는 질문하며 재빨리 침실을 봤다. 다행히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다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강진욱이 있는 곳은 거실. 그러니 창문 아래에 붙어 있는 초음파 사진이 보일 리가 없을 텐데. 이래서 도둑이 발을 저리다고 하나 보다며 선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했던 것보단 잘되어 있네.

강진욱은 선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묻지도 않은 감상만 꺼내 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본래도 그다지 천장이 높진 않다. 그런데 강진욱이 들어서니 그야말로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강진욱이 위를 보려고 고개를 젖히자 코끝이 천장에 닿을 했다. 선우는 입을 벌린 모습을 봤다. 강진욱 키가 몇이더라? 작가가 보내 줬던 시놉시스를 얼른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다. 195센티, 아니 197센티였나 그랬던 것으로 기억했다.

한국인이 그렇게 수야 없겠지만, 소설적 설정이니까 그런가 보다. 실제로 그리 사람을 곁에서 적이 없으니 그냥 크겠거니 하고 짐작만 봤는데.

“진짜 크구나…….

선우가 내뱉는 감탄에 강진욱이 다시 고개를 바로 하면서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선우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다가와 낚아챘다.

“설마 이게 점심은 아니지?

“아니. 맞는데.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역시 이거 가지고는 되겠지? 그럼, 저기…… 먹을래?

선우는 엉겁결에 비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진욱이 바구니를 돌아섰다.

“됐어. 이거면 되겠지.

무심하게 밖으로 나가는 강진욱을 보다가 선우도 얼른 뒤를 따라갔다.

              

#43

도로 마당에 있는 테이블로 돌아간 선우와 강진욱은 마주 앉은 채로 옥수수를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 말도 없이 옥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선우는 내내 강진욱의 눈치를 봤다. 이런 먹게 생겼는데, 의외로 입에 맞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금세 하나를 먹어 치운 강진욱이 옥수수 하나를 손에 다시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달랑 옥수수만 두고 먹고 있었다.

“그, 저기,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묘했다. 다른 사람이랑 먹어 한두 번도 아니고.

“됐어. 내가 다녀오면 되지.

강진욱이 선우를 말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아, 아냐. 앉아 있어. 내가 거야.

도리어 당황한 선우가 서둘러 일어섰다. 도로 집으로 들어와 생수통에 있는 물을 따랐다. 찬물을 마시지 않은 탓에 냉장고에 넣어 두지 않아 물은 미지근했다.

고민하다가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넣었다. 요즘 그나마 복숭아 아이스티를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서 구비해 것이었다.

고민하다가 선반에 뒀던 천도복숭아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강진욱은 남은 옥수수마저 전부 먹어 치운 후였다.

강진욱과 옥수수라 도시와 시골의 극적 만남 같은 느낌이 드네. 그런 실없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전히 복숭아 좋아하네.

“어?

테이블에 천도복숭아 접시를 내려놓던 선우가 움찔했다. 하필 강진욱 생각을 하던 차라 지레 찔렸다.

“너 전부터 복숭아 좋아했잖아.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올 때도 개씩 챙겨 가고.

“어, 어…… 그랬나. 글쎄. 기억이…….

선우가 어색하게 웃자, 강진욱은 예사로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억이 난다고 했지.

그러게. 기억도 나지만 그때 걔랑 나랑은 다른 사람인데. 이상하게 식성이 비슷한 같네.

선우는 접시를 놓고, 잔도 강진욱 앞에 내려놔 주며 다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찡긋거렸다.

“복숭아 음료를 아주 입에 달고 살았어. 그래서 일부러 매점에다 네가 마셔야 하니 냉장고에 꽉꽉 채워 두라고 했었지.

강진욱이 혼자서 추억을 팔아 댔다. 선우는 매끈거리는 천도복숭아를 손에 쥐고 그러느냐는 표정만 지었다.

아니, 잠깐. 지금 이상한 말을 들은 같은데 아닌가? 아니겠지. 착각일 거야. 강진욱이 위해, 아니 서브수를 위해서 복숭아 음료를 매점 냉장고에 채우라고 했을 없잖아?

“근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네? 초·중학교 때쯤 아니야?

선우는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른 질문을 했다. 강진욱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강진욱은 선우가 묻고 나서야 자신이 그런 쓸데없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새삼스럽게 알아챘다.

정말 그게 뭐라고.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름이면 항상 복숭아 음료를 손에서 놓지 않는 최선우가 그려졌다.

“네가 항상 먹었으니까.

뭔가 아까보다 말투가 딱딱해진 같네. 선우는 슬쩍 강진욱의 눈치를 봤다. 정작 강진욱은 선우가 아니라 앞에 있는 잔을 보고 있었다.

“그래, . 그럼 그거 먹고 돌아가.

“뭐?

“밥 먹여 줬으니까 그만 가라고. 설마 있겠다는 소리는 하겠지?

선우가 묻는 말에 강진욱이 눈을 찌푸렸다. 사람의 대화를 듣던 비서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만약 강진욱이 지금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다면 이사 회의는 참여할 있을 터였다.

“전무님, 5시에 회의가 있으니 올라가 봐야 합니다.

비서는 일부러 회의가 있다는 강조했다. 물론 강진욱이 들으라는 아니라 최선우에게 하는 소리였다. 강진욱에게 다음 일정이 있다는 알려 주려고.

“뭐야, 회의도 있으면서 여기 왔어? 그것도 점심을 먹겠다고? 아니, ?

선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리에 강진욱은 그제야 자신이 제주까지 날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최선우가 김태열이랑 만나고 있는 사진을 봤기 때문이었다. 최선우와 김태열은 단순 동창생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같이 동거한 사이였다.

최선우가 태성건설에 들어왔을 집에 혼자 살았으니, 아마 입사 전에 김태열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김태열과…….

“걘 우연히 만난 거야.

김태열과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으려던 강진욱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선우가 선수 치듯이 대답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런 같기는 했다. 비서가 보고하기로 김태열은 회사 동료들과 왔다고 했으니까.

“식당에 것도 네가 감시하는지 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거고.

“아.

뒤를 이어 나온 선우의 말에 강진욱은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했다. 선우는 물을 마시는 강진욱을 보면서 천도복숭아를 씹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안에 맴돌았다. 아주 맛이 그냥 복숭아도 좋기는 했지만, 선우의 취향은 역시 새콤한 맛이 이쪽이었다.

“열성 알파라고 하던데.

“그래서 ? 그게 어쨌다고.

선우의 강경한 반응에 이번에도 강진욱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우는 자국이 남은 천도복숭아를 아래로 내렸다.

“자꾸 잊는 같은데, 기억 없는 맞아. 그러니까 과거의 일로 자꾸 왈가왈부 했으면 좋겠어. 누누이 말하지만, 너랑 내가 무슨 사이인 아니니까.

“그건.

“물론 약혼했다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을게. 보아하니 각자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런 같은데. 그보다는 너랑 개인적인 관계는 정리할 필요가 있을 같네.

“너와 관계?

선우에게서 생각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강진욱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억을 잃은 후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선을 긋던 선우가 아니던가.

“너랑 나랑은 동갑 친구야.

“……그래.

아마 계속 반말을 하겠다는 저런 식으로 표현한 같았다. 순간 뭔가를 기대했던 강진욱은 뭔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그대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갑이고.

“뭐? ?

“그래. 내가 니네 건설사 건물 주인이라며? 그럼 아냐?

갑이 뭔가 했더니 소리였나 보다. 최선우가 약간 어울리는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들었다.

본인 딴에는 건방지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같은데, 강진욱의 눈에는 그냥 귀엽게 보였다.

강진욱은 선우를 쳐다보다 손에 들린 잇자국 천도복숭아를 발견했다.

순간 희미하게 풋풋하고 싱그러운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선가 맡아 같다고 생각하다 앞에 과일이 있으니 당연하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들어. 함부로 굴지 말고.

피식. 기어이 강진욱에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기껏 주인이니 뭐니 하면서 말을 꺼내 놓고 한다는 소리가 저래서야.

“그래, 그렇게 할게.

강진욱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진지해 보이지 않는 모습에 선우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여간 하나 마음에 드는 없었다. 잘생긴 것만 빼고.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기억도 없다면서.

“따로 알아봤지.

“따로 알아봐?

네가 그렇게 똑똑했던가? 강진욱이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같아서 선우가 울컥한 표정을 잠깐 지었다. 뭐야, 내가 정도도 하는 사람인 알았어?

“사표 던진 . 곧바로 은행부터 찾아갔어. 나한테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같아서.

“아아…….

강진욱이 그러느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최선우의 앞에 남아 있는 유산이 제법 되었다. 그걸 본인이 관리하기 힘드니 어딘가에 맡기긴 했을 것이고. 최선우의 부모님은 그가 성인이 되자마자 돌아가셨다. 대학 입학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근데 은행장이라는 사람이 대리인이 있다며 알려 주더라고? 그분을 통해서 알아보니까 내가 가진 재산이 제법 되더라고.

대리인과는 통화만 했고, 그때 정보라고는 서브수 앞에 남은 어마어마한 재산에 관한 것뿐이었지만, 선우는 굳이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으로서 권리 행사를 하고 싶어?

아니 , 특별히 그런 아닌데. 막상 강진욱이 묻자 선우가 멈칫했다. 사실 강진욱과의 사이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다는 것에 의의를 것이었다. 그런데 권리고 어쩌고 하면서 물으니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 함부로 굴지 . 의사를 확실히 존중해 주고. 싫다는 밀어붙이지 말고.

선우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감시도 하지 말고, 내가 하는지는 내가 내킬 말해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여러 말이 나갈수록 강진욱의 표정이 달라졌다. 특히 감시하지 말라는 소리에는 도로 눈썹 끝이 올라갔다.

강진욱은 가만 보면 외형은 아름다운데 성격은 포악하고 사나운 짐승을 보는 같다. 그런 짐승을 상대로 강하게 나가 봐야 소용이 없다. 달래고 구슬려서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수밖에.

선우는 그런 강진욱을 똑바로 보면서 이번엔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생각해 볼게.

“무슨 생각?

“너랑 긍정적으로 지내볼 생각을 보겠다고.

강진욱의 눈이 커졌다. 선우는 그런 강진욱을 가만 바라보면서 손을 말아 쥐었다.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강진욱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힐 생각도 없으면서 여지를 두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예 강진욱을 피해서 몰래 아이를 낳고 둘이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나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번은 기회를 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강진욱이 원작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적당히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앞으로 강진욱과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선우는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다른 방도를 머릿속에 생각했다.

강진욱이 가만히 선우와 눈을 맞췄다. 빛이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는 그대로 빨려 들어갈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꼴깍. 괜히 긴장한 선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

강진욱이 남은 물을 비우고, 빈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표정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빛이 가득했다.

뭐야, 싫은 거야?

선우가 속으로 투덜거렸을 .

“그래, , 그렇게 .

마침내 강진욱에게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44

강진욱의 대답을 듣자마자 선우는 어깨를 크게 들썩일 정도로 숨을 내뱉었다. 티는 내지 않았어도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선우를 강진욱은 가만히 관찰했다. 오랜만에 과거의 최선우를 떠올려서인지 예전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성인이 후의 최선우도 어렸을 알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긴 했다.

어렸을 최선우는 사랑받아 전형적인 도련님 스타일이었다. 자기중심적이었고, 본인 기준 아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쉽게 깔보기도 했다.

그랬던 최선우를 성인이 만나니 다르게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의욕이 없고 매사에 시큰둥하며 침울하다 못해 음침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사람들은 그게 최선우가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최선우는 달랐다. 어렸을 적의 당당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그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마치 중학교 3학년 막바지, 오던 그날을 생각나게 해서, 다시 한번 그때처럼 용기를 내도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해서, 그래서 강진욱은 지금의 최선우가 좋았다.

“좋아. 그럼 이제 돌아가.

“돌아가라고?

“그래. 중요한 회의 있다면서. 그럼 남은 일도 있을 아냐. 아무리 네가 잘릴 없는 철밥통이어도 일은 제대로 해야지.

선우는 드라마나 영화를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일은 내팽개치고 딴짓을 하러 다니는 장면을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회사가 놀이터도 아닌데 저렇게 책임감 없이 마구 자리를 비우는 말이 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강진욱이 그러고 있다. 자신과 점심을 먹겠다고 회사도 몰라라 하고 여기에. 책임감에 있어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선우에게는 두고 없는 .

강진욱이 못마땅한 눈썹을 움찔거렸다. 역시 저런 보면 성격 나쁜 짐승 같다니까. 선우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대신 끝나고 다시 . 시간이 너무 늦지 않는다면 저녁 같이 먹자.

“저녁을?

강진욱이 이번에는 눈을 살짝 키웠다. 설마 선우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래. 대신 너무 늦을 같으면 오지 말고.

선우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을 길들이려면 적절한 보상도 같이 따라 줘야 하니까.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 오든 오든 그건 강진욱의 몫이다. 왔다가 아침에 다시 정도로 강진욱이 자신을 생각할 같지는 않지만.

“좋아.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강진욱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제안해 놓고도 생각지 못한 반응을 돌려받자 선우는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했다.

“그럴게. 다녀와.

선우는 손까지 들어 보이며 팔랑팔랑 흔들었다. 강진욱이 그런 선우를 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봐도 당장 꺼지라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강진욱은 하고 웃음을 흘렸다. 스스럼없는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진욱이 자리에 일어서더니 그때까지도 손을 흔들고 있는 선우를 내려다봤다.

“다녀올게.

“어. 다녀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인사에 선우도 무덤덤하게 돌려주었다. 본인이 그렇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여전히 맑은 얼굴이었다. 강진욱은 그런 선우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찌나 다리가 긴지 강진욱이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길쭉한 몸체는 벌써 대문 밖에 있었다.

“뭘 다녀와야.

혼자 남은 선우가 불퉁하게 말했다. 자신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는 생각도 하고. 강진욱이 출근하는 배우자처럼 굴었다는 것만 못마땅해했다.

근데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 모를 일이다.

“에휴.

선우는 손바닥으로 뺨을 쓱쓱 문지르고,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우가 느긋하게 동화책을 읽으며 오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회사로 돌아간 강진욱은 따분한 얼굴로 이사 회의에 참여했다.

명목은 투르크메니스탄 신항만 건설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친목을 다지는 용도였기 때문에 특별한 안건도 없었다. 그러니 강진욱도 회의를 오래 질질 생각은 없었다.

의장을 압박해 회의를 1시간도 되어 속성으로 끝낸 강진욱은 저녁을 먹자 술을 마시자 달라붙는 이사들을 전부 뿌리치고 차에 올랐다.

“공항으로.

명령을 들은 운전기사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도시락은?

“준비해 뒀습니다.

보조석에 앉은 비서가 곧장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짐을 강진욱의 눈에 보이게 위로 들었다.

강진욱은 보자기를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비서도 얌전히 도시락을 무릎 위에 내려놨다.

최선우와 헤어진 제주 공항으로 향하면서 강진욱은 곧장 집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최선우가 먹을 만한 도시락을 준비해서 회사로 보내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렇게 도착한 도시락이 지금 비서의 무릎 위에 있는 것이다.

- 여보세요?

통화가 연결되면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선우였다. 강진욱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금 출발했으니 8시쯤 도착할 같아.

- 8시…….

강진욱의 눈썹이 꿈틀했다. 최선우의 목소리에서 난감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되묻는 말투에도 당장 날이 섰다.

- 아냐. 뭐라도 간단하게 먹어야 같아서. 요즘에는 일찍 먹어 버릇하니까 벌써 출출하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같지만, 최선우는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는 같았다. 강진욱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어차피 최선우가 말해 주지 않아도 강진욱은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전처럼 밀착 접근은 없지만, 거리에서 지켜보는 여전했다.

물론 가드는 전면 교체했다. 최선우에게 얼굴이 알려졌으니 어쩔 없었다. 강진욱은 애초 가드를 아예 치워 버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존재도 모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 챙겨 먹어야 . 그래야 살이 찌지.

대신 먹으라며 당부했다. 정말 최선우는 먹어야 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인데 요즘에는 제대로 먹는 같았으니까.

온통 채식에 양도 적었던 최선우의 식단을 떠올린 강진욱이 못마땅한 눈살을 찌푸렸다.

- 알았어. , 혹시 먹고 싶은 있어?

강진욱의 시선이 잠시 보조석에 앉은 비서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무릎에 올려놓은 도시락으로.

“없어. 그냥 쉬고 있어. 먹을 내가 가지고 테니까.

-? 됐어. 내가 준비해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던 최선우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끊겼던 말을 다시이었다.

- 그래, 알았어. 조심히 .

아마 최선우는 자신의 고집을 꺾을 없다는 알고 있는 같았다. 그러니 저런 대답이 나왔겠지. 그만큼 원했든 원치 않았든 최선우와 자신이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고.

최선우가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강진욱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 액정을 봤다. 최신 목록에 최선우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 비서]

강진욱은 망설이지 않고, 수정 버튼을 눌러 이름을 바꿨다.

[최선우]

적었다가 잠시 망설이고 다시 고쳤다.

[선우]

글자보다 글자가 괜찮은 같았다. 그사이 강진욱을 태운 차가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출발 층과 이어진 게이트 근처에 차가 멈추자 강진욱은 스스로 문을 열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비서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공항으로 들어갔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스튜어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차피 국내선은 보안 검색도 까다롭지 않았고, 공항 VVIP 강진욱은 더더욱 빠르게 검색을 통과했다. 10분도 되어 강진욱이 비행기가 활주로를 날았다.

* * *

선우는 전화를 끊고 머리를 긁적였다. 꺼지지 않은 액정에는 방금 통화를 마친 강진욱의 이름 바로 아래 김태열과 전화를 했던 내역이 남아 있었다.

오후 내내 김태열은 계속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메시지만 보내왔는데 선우가 읽지 않자 그다음에는 아예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용건은 한결같았다. 저녁을 먹자, 술을 마시자, 같이 관광하자.

동료들이랑 놀러 왔다면서 자꾸 자신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선우는 계속 거절했다.

물론 다시 오겠다는 강진욱 때문인 것도 있었고.

그랬더니 기어이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며 전화가 것이었다.

[. 15 후에는 나갈 있어. 아까 카페에서 만나자.]

김태열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까 전화를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 같았다. 선우는 짜증스러움에 한숨을 쉬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알았어.]

만난다고 하면 긍정적인 답이 돌아올 때까지 김태열이 계속 연락할 같았다. 그러다가 강진욱이 있는 자리에서 전화라도 하면 난감했다.

차라리 강진욱이 오기 전에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나을 같았다. 선우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아직도 낮처럼 하늘이 밝았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카페까지 걸어가려는데 조금 힘에 부쳤다.

요즘 부쩍 피로감을 느끼는 같았다. 식욕 부진과 빈혈, 체력 저하와 잦은 피로감 호소. 전부 달갑지 않게 찾아온 임신 증상이었다.

선우는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만약 강진욱과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언젠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속에 있는 아이가 아이라고.

그러려면 형질도 밝혀야 하고, 언제 아이가 생긴 것인지도 말해야 한다.

“그날 작정하고 강진욱에게 거라고 말하면 되겠지.

아무렴. 그랬다가는 강진욱의 광공 버튼을 누르게 될지 몰랐다. 그럼 정말 원작대로 목숨이 위태로워지겠지.

“그럼 일단 오메가였다는 것부터 말해야 하나?

사실 베타가 아니고 열성 오메가라고. 그럼 그걸 숨겼다고 물어볼 텐데. 그것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언제 발현했냐고 하면?

고민하면 할수록 점점 답이 없어졌다.

“하아…….

어쨌든 말하긴 해야 하는데. 선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분히 고민해 봐야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강진욱에게 무조건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선우는 미처 알지 못했다.

              

#45

강진욱이 비행기가 하늘 위를 나는 순간, 선우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직원 이외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말은 기껏 언제 오느냐고 닦달하던 김태열도 도착하기 전이라는 의미였다.

얼굴을 찌푸린 선우는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더운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지 팔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쓱쓱 문지르며 천장을 보니 에어컨이 머리 위에서 휙휙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추워질 같은데…….

자리를 옮길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이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귀찮았다.

어차피 김태열이랑 오래 얘기할 것도 아니고.

머리칼을 휭휭 날리는 에어컨 바람을 무시하며 선우는 다시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바다는 오늘도 에메랄드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마 여기에 계속 있다가 보면 멋지게 해가 지는 풍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쯤 자신과 저녁을 먹기 위해 제주로 날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정도 여유까지는 없었다. 아쉽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김태열이었다.

“왜 들어오고 전화야?

선우는 다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카페 바깥을 휘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입구에서 서성이는 김태열이 보였다.

- 어디야?

“들어와.

- ?

김태열이 얼빠진 얼굴로 카페를 기웃거리더니 선우를 발견하고 웃었다. 선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오는 김태열을 바라봤다.

“먼저 있었네? 웬일이야, 니가.

“…….”

서브수는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았는가 보다. 선우는 김태열이 꺼낸 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하나 알았다.

“내 쪽이 가까우니까.

“그래? 숙소가 근처야?

어지간히 어디서 묵는지 알고 싶은 김태열이 카페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김태열은 여전히 선우가 민박에서 머물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선우도 굳이 정정해 생각은 없었다.

“응, 근처. 근데 마실 거야?

선우가 대충 대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김태열도 아주 궁금했던 아니었는지 바로 메뉴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올게. 모카 프라푸치노 사다 주면 되냐? 아니면 민트 초코 프라푸치노?

달콤하고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였다. 서브수는 그런 좋아했구나. 하나 새로운 정보를 잠시 생각한 선우가 복숭아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복숭아? 웬일로 그런 마셔. 알았어. 내가 쏜다!

김태열이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하고는 몸을 돌렸다.

뭐지? 느끼한 표정은?

남겨진 선우가 뜨악한 얼굴로 김태열을 쳐다보다가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엉? ?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은데. 초콜릿 케이크 있으면 하나 가져다줘.

갑자기 진하고 달콤한 케이크가 머릿속에 그려진 선우가 주문했다. 그간에는 전혀 그런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한번 생각하니 당장 먹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선우가 혀로 입술을 살짝 긁었다.

“초콜릿 케이크? 그래.

김태열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카운터로 향했다. 예전부터 선우가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기에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선우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혼자 남은 김에 핸드폰을 확인해 봤다.

아직 강진욱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한창 하늘 위를 날고 있나 보다.

〈여전히 복숭아 좋아하나 보네.

분명 강진욱은 그렇게 말했는데. 비슷한 시간을 알아 김태열은 선우가 복숭아 아이스티를 주문하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강진욱이 잘못 알고 있는 건지, 김태열이 착각한 건지.

“뭐, 아무렴 어때.

누가 틀렸다고 해도 그건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김태열이 쟁반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앞에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를, 선우 앞에는 복숭아 아이스티를 놓았다. 이걸 보니 프라푸치노는 그냥 김태열이 좋아해서 소리인 같았다.

목이 말랐던 터라 선우는 일단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시원한 음료가 목을 타고 내려가니 속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왜 보자고 했어?

번에 3분의 1 사라진 음료 잔을 내려놓으며 선우가 곧장 용건을 물었다. 선우와 마찬가지로 빨대를 소리 나게 빨던 김태열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냥 , 여기에 있으니까 얼굴이나 보자고.

퍽이나 그렇겠다. 봐도 뭔가 이유가 있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선우가 아무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이번엔 김태열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본인이 보기에도 너무 티가 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같았다.

“아니. , 저기,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지나지도 않아 김태열이 입을 열었다.

“너 이대로 물러설 아니라 전무한테 오메가라고 밝히는 어때?

“무슨 소리야.

“회사도 그만두고, 전무랑도 끝냈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야. 어제 동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까. 회사에도 아파서 그만둔 거라고 했다면서?

김태열은 마치 누가 들으면 소리라도 한다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 병명이 뭔지는 모르냐?

선우가 묻자 김태열이 멈칫했다. 말투에 약간 쌀쌀맞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태열은 자신이 잘못 느꼈으려니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파서 그랬다고만 들었지. 물론 알게 것도 , 너희 비서실에 주임 있지? 주임이랑 친한 애와 동료가 아는 사이라 들은 거야. 소문이 도는 아니고.

비서실 직원과 친한 애와 동료, 거기다 김태열까지. 정도면 그냥 웬만큼 만한 사람한테는 퍼졌을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선우는 이번에도 일단 입을 다물었다.

“여하간 그런 거면 쫓겨난 것도 아니고, 사직서도 아직 절차상으로 처리가 됐다면서. 그러면 그…… 보상이라든가 그런 기대해 봐도 되는 아냐?

“보상?

“그래. 애초에 그쪽에서 전무의 약혼자로 만들 때도 그랬잖아. 일단 붙어 있으면 적절하게 보상해 주겠다고.

뭐야, 그게. 그건 마치 강진욱과의 약혼이 계약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처럼 들리지 않는가.

선우는 놀란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김태열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하긴 기억이 없어서 이것도 모르지? 하여간 그랬었어. 나도 강진태 부사장님의 비서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을 옆에 있어서 얘기를 바로 들었거든.

“강진태 부사장 비서?

강진태 부사장이라면 강진욱의 형을 말하는 것이다. 말은 서브수가 강진욱의 약혼자가 되는 일에 그가 지대하게 개입했다는 걸까.

아니, 정확히는 강진태와 최선우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 잠깐 보자고 얘기가 있다면서.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소리라고 했었어. 일단 태성건설 주인이 너니까.

주인 얘기는 어제도 들었던 거고. 그보다 선우는 강진태라는 사람과 자신이 엮여 있을 거래의 내용이 궁금했다.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듣지는 못했는데. 여하간 보상 어쩌고 했으니까 뭔가 있긴 있지 않았을까?

김태열은 실속 없는 소리를 놓고 어설프게 웃었다. 선우는 아이스티를 마시며 들은 얘기를 정리해 봤다.

일단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강진욱과 서브수의 약혼은 회장과 강진태 부사장의 주도로 이루어진 같았다.

하지만 그들과 어떤 거래가 오고 갔는지는 선우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계약서라도 썼을까?

일단 같은 걸로 보상하겠다 하지는 않았을 같은데. 얘기를 하는 보면 그거랑도 관련이 있는 같기도 하고.

‘강진욱도 알고 있을까?

뭔가 알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그만둔다고 했을 쫓아다니면서 자꾸만 그만두지 못하게 아닐까.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랬다는 핑계나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그랬다는 핑계보다 이편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애초 강진욱의 아버지나 형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 서브수를 붙여 거라는 사실을 꿰고 있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뭔가 굉장히 찜찜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털어 선우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되짚어 필요가 있었다.

 

@1. 김태열은 서브수가 열성 오메가인 알고 있다.@

@2. 김태열은 서브수와 강진태 부사장 간에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도 알고 있다.@

@3. 김태열은 서브수와 고등학교 동창이며, 년간 동거한 사이이다.@

@4. 김태열은 최소한 고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서브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장 아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한 끝에 선우가 김태열을 바라봤다. 지금 시점에 가장 먼저 알아야 것이 무언인지 결정이 되었다.

순간 선우와 눈이 마주친 김태열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느물거리는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다른 제쳐 두고 외모만 봐서는 역시 강진욱이 훨씬 낫다고, 와중에 저도 모르게 비교하면서 선우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하나 물어보자.

“어. 그래. 뭐든 물어봐. 근데 강진태 부사장 관련해서는 나도 자세히 몰라. 그건 도움이 거야.

아직 질문도 꺼내기 전인데 김태열이 벌써 슬쩍 빼듯 말했다.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선우도 김태열에게 듣고자 강진태와의 거래와 관련된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네가 봤을 내가 전무를 정말 좋아한 거로 보였어?

              

#46

곧바로 대답할 알았던 김태열이 드물게 말을 망설였다. 김태열은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한동안 최선우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뭐, 처음엔 아닌 알았어. 솔직히 너한테 들었을 , 전무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같았거든.

최선우가 강진욱을 싫어했다고……?

“그래서 부사장 비서가 연락했을 때도 처음에는 만난다고 했었고.

“거부했었어? 내가?

아까 보상 어쩌고 때문에 뒤의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당연히 서브수가 강진태의 비서와 만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 강진욱이랑 만날 생각 없다면서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비서가 또다시 전화해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문제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거지.

“그럼 얘기 알고 가서 만났는데 전무와 약혼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는 거네.

“그렇지.

뭐야. 그럼 대체 3 동안 스토커처럼 강진욱을 따라다니고 사진 찍고, SNS 올렸던 뭔데?

그건 아무리 봐도 짝사랑하는 상대를 몰래 훔쳐보고 기록했던 흔적이었다. 물론 선우가 SNS 처음부터 끝까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 1 동안의 기록은 훑어봤는데 전부 강진욱의 외모 찬양, 자기 마음 고백, 강진욱과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리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느냐는 원망과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원래 싫어했다고? 아니지. 처음에는 싫어하는 알았다는 어느 순간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수도 있잖아.

“싫어하는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거야?

일단 선우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어. 전무 비서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을 때도 전날 무지하게 마셨어. 그것 때문에 첫날부터 1시간 늦게 출근했고.

아무리 회사가 가기 싫었다고 해도 첫날부터 지각해 버리다니. 나름대로 일하는 있어서 책임감이 있는 선우로서는 상상도 소리였다.

물론 서브수야 낙하산이니 그렇다고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 그래 그거야 자신이 빙의하기 일이고 따지고 보면 과거의 일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선우는 김태열에게 말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마시면서 나한테 비서실 직원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네, 성격들이 이상하네 하고 한참 욕했잖아.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사무실도 구리고, 책상은 불편하고, 일도 없어서 시간은 엄청나게 가고, 밥은 귀찮게 이동해서 먹어야 하고. 물론 비서실 직원들보다는 전무를 많이 비난했지만.

이쯤 되니 선우는 가지 같았다. 비서실 직원이 서브수를 따돌린 순전히 강진욱의 지시나 낙하산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분명 서브수가 그렇게 만한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

첫날부터 마시다가 늦게 일어나 지각을 놓고 온갖 불평에, 불만에. 거기다가 고작 하루 만난 회사 사람들을 욕했다고?

‘하긴 악역 서브수인데 오죽했겠어.

그만한 인성이니까 악역도 하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선우는 김태열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목덜미와 귓가가 벌겋게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와…… 진짜.

다음에 혹시라도 비서실 직원 누군가를 만나면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렇게 진상처럼 굴어 놓고 아프다면서 피해자처럼 그만둔다고 했다니.

비서실 직원들에게 진상도 진상도 그런 상진상이 없었을 거다.

오히려 짜증 내고 화내고 네가 그딴 식으로 그만두면 어쩌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도 선우 입장에서는 말이 없었을 텐데.

“어, ?

선우가 기가 막혀 토해 내는 소리에 김태열이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냐. 그래서?

선우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는 . 그러고도 거의 매일 퇴근하고 와서 마시면서 불만, 주말 지나고는 출근하기 싫다고 불평. 그러면서 전무 욕은 빠지질 않았지.

“대체 무슨 욕을 했는데?

선우는 아까부터 김태열이 계속 강조한 강진욱의 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싫어한다면서 하는 욕에는 뭐가 들어 있었을까.

순수하게 호기심마저 들었다.

“너무 잘생겨서 싫다, 키가 커서 싫다, 눈매가 또렷해서 싫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서 싫다, 하는 사업마다 척척 성공해 내는 싫다.

그게 욕이야? 아무리 들어 봐도 콩깍지가 쓰인 같은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더니. 지금 들어 말이 그렇지 않은가.

선우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김태열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처음에는 싫어하는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하, 그러게. 근데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가끔 마시고 나면 전무 얘기를 했거든.

선우가 기억하기로 강진욱과 최선우는 중학교까지만 같이 다닌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강진욱이 중학교 졸업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다시 만난 강진태 부사장을 통해서라면 최소한 10 이상은 떨어져 있었다는 건데…….

“강진욱 얘기를? 내가?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나? 10년이나 떨어진 상대 얘기를 자주 했다고? 아니, 정말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면 그럴 있나?

누군가를 정도로 미워하거나 증오해 적이 없는 선우로선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상식적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 얘기를 마실 때마다 같지는 않았다.

“어. 어렸을 적에 네가 장난친 가지고 삐졌는지 아주 하니 무시했다고 짜증 난다고 그러더라고.

어째 장난이라는 그다지 어감이 좋지는 않은데. 이쯤 되니 선우도 궁금해졌다. 대체 둘이 무슨 관계야? 아무리 봐도 단순히 그냥 동창생은 아닌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초딩 그랬다던데? 전무가 자꾸 주변을 기웃거려서 짜증 났다고 했지. 첨부터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나 뭐라나.

“그거 뭐가 이상한 같은데.

“뭐가?

역시 이상했다. 듣고 들어도 뭔가 이상했다. 뭐라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어도 이상했다. 다년간 다양한 소설을 접해 선우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싫고 좋고를 의미하는 아니라 그보다 복잡한 무언가가 엮인 것이라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

선우가 듣기에 이건 서브수가 강진욱을 어릴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강진욱도 그랬을지 모르고.

설마, 설마 싶긴 하지만.

“하지만 그것보다 네가 강진욱을 싫어하게 일이 있다고 했지.

“그건 뭔데.

근데 지금까지 들었던 것보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뭔가 남의 연애사를 듣는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선우가 물었다.

솔직히 과거의 일은 남의 이야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풀어 나가기 위해 들어야 것이기도 했다.

“강진욱이 미국에 갔다고 했잖아.

그랬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넌 그것도 몰랐대. 아니, 정확하게는 나중에 알았다고 그랬지. 그것도 모르고 강진욱이 너한테 만나자고 하길래 그간 일을 사과하려고 그러는 알고 만나러 갔다고 했어.

어째 뒷얘기를 들어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마무리는 둘이 만나지 못했다거나 오해하고 헤어졌다거나 그런 아니던가.

“하필이면 겨울비도 내려서 춥고 짜증 나는 날이었는데 굳이 전화해서 중요하게 말이 있다고 하니까 나간 거라고 했어.

심지어 날씨도 좋았단다. 그런데도 강진욱이 불러서 나갔다니. 지금까지 들어온 서브수 성격을 생각하면, 역시 사이에 뭔가 있긴 있었다는 소리다.

선우는 손에 팝콘이라도 쥐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잠시 아쉬움을 삼켰다. 물론 냄새 때문에 팝콘은 먹지도 못했겠지만. 대신 선우는 김태열이 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입에 넣으니 초콜릿의 진한 단맛이 입에 퍼졌다. 그리고 먹었더니 자꾸만 케이크에 손이 갔다.

“근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전무가 나타났다더라.

“에휴.

그래, 그럴 알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쩐지 그럴 같더라니. 이래서 경력은 무시 하는 거다.

다년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보아 소설에 따르면 저런 경우 100 중에 99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다는데?

30? 정도?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네. 김태열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선우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비련의 주인공처럼 굴어서 하루 종일, 최소한 반나절은 기다렸다는 알았더니. 하긴 서브수 성격에 30분도 오래 기다린 거긴 하다.

“강진욱한테 연락을 봤대?

선우는 저도 모르게 제삼자가 일을 묻듯이 질문했다. 물론 엄연히 인격이 다르기는 했지만.

김태열도 선우를 보더니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우습다는 웃고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해 봤는데 전화가 꺼져 있더래.

아아……. 이건 너무도 소설다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필 오지 않는 상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니.

“날도 좋고, 전화는 받고. 그러더니 어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연락을 받고. 확실히…… 그래. 싫어할 만하네.

성격도 좋지 않을 서브수였다면, 아마 강진욱 욕도 엄청나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간 몰랐던 사이의 과거는 듣게 되었으니 김태열을 만난 보람은 있는 같았다.

대체 그날 강진욱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과거 서브수와는 어떤 관계였는지는 당사자에게 물어봐야겠지만.

‘그 전에…… SNS부터 다시 찾아봐야겠다. 거기 뭐라도 단서가 만한 있는지 봐야겠는데.

선우는 포크를 입에 생각을 정리했다.

              

#47

“야, 배고팠냐?

“어?

선우는 어이없어하는 듯한 김태열의 눈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먹은 알았는데, 초콜릿 케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

“배고프면 카페가 아니라 식당을 가자고 하지. 쯧쯧.

“아니, .

분명 처음에 손도 포크로 찍은 기억만 있는데 이게 언제 사라졌지? 선우는 입에 물려 있는 포크를 꺼내 들여다봤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이미 속으로 사라진 케이크가 다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안에 단맛이 남아 있으니 어쩐지 먹고 싶어졌다.

“그냥 케이크나 하나 .

선우가 뻔뻔하게 김태열에게 주문했다. 김태열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쭉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보면 김태열은 친구라기보다는 뭔가…….

“쟤도 설마 좋아하나.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메인수도 아니고. 선우는 제가 잠깐 떠올린 생각에 어이없어하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주문하려 카운터로 걸어가는 김태열의 뒷모습을 보다가 핸드폰 액정을 터치했다.

벌써 김태열과 만난 20분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강진욱은 날아오는 중인지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오기 전에 김태열과의 자리를 정리하고 슬슬 집에 돌아가야 같았다. 선우는 남은 아이스티를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김태열이 카운터에 도착해서 진열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케이크 종류가 많아서 갈지 고민하고 있는 같았다.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

옆으로 걸어간 선우가 손가락으로 진열된 케이크를 콕콕 가리켰다. 김태열이 고개를 돌려 선우를 봤다.

“너 이걸 먹을 있어?

“응. 포장해 주세요.

당연히 먹으려고 사는 거지, 아니면 고르고 있겠는가.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내밀었다.

김태열이 황당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선우는 카페 주인에게 카드를 돌려 받아 다시 지갑에 넣고 케이크가 포장되기를 기다렸다.

“뭐야, 근데 포장이야?

“이제 슬슬 봐야지.

“뭐? 벌써? , 아직 얘기 끝났거든?

, 그랬던가? 선우가 그러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고 사장님이 웃으면서 내미는 케이크를 받았다.

“서비스로 하나 넣었어요.

사장님이 덧붙여 말에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감사합니다.

“항상 혼자 오셔서 아이스티만 드시던데, 저희 케이크도 맛있어요. 앞으로는 아이스티만 드시지 마시고 케이크도 같이 주문해 주세요.

복숭아 아이스티 때문에 들렀더니 주인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선우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카페를 나왔다.

“뭐야, 최선우. 카페 주인이 너한테 관심이 있나 보다? 오메가인 모르나? 하긴 겉으로 봐서는 베타 같긴 하지.

“그냥 단골이라서 그런 거야.

오메가니 베타니 아직 형질을 이야기할 때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뭣보다 김태열이 그렇게 말하면서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는 너도 그냥 봐도 베타 같거든?

“야! 내가 어딜 봐서! 봐도 알파지!

“뭐? 알파였어?

선우가 진심 놀란 표정으로 김태열을 쳐다봤다. 그러자 김태열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뭐야. 내가 알파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나야 모르지. 기억이 나니까.

“아…….

맞다. 그렇지. 김태열이 도로 구긴 얼굴을 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우는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뒤늦게 김태열이 말을 떠올렸다.

“너 알파라고?

“어. 너처럼 열성이긴 하지만 너보다는 낫지, 내가.

페로몬도 나오고. 그렇게 말하면서 김태열이 으쓱댔다. 아마 페로몬을 내보내면서 말한 같은데 안타깝게도 선우는 느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강진욱의 페로몬만 느꼈지만 또한 선우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근데 나랑 같이 산다 어쩐다 했냐?

“아! 맞다! 얘기 하려고 거였는데.

끈질기게 굴더니 목적은 역시 집이었나 보다.

“집 아예 내놨어? 아직 있는 거지? ? 그럼 잠시만이라도 좀…….

“없어. 아예 내놓고 나온 거야. 앞으로 제주에서 거야.

“뭐? 여기서 산다고? ? 진짜 전무랑 진짜 끝내려고? 계약은? , 그건 아직 모른다고 했나? 하여간 그래도 그게 ?

김태열이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선우는 잠깐 한쪽 귀를 막고 있다가 떼어 냈다. 귓속이 따갑게 느껴졌다.

“계약은 나도 확인해 봐야겠고. 사는 일단 1 정도 있으면서 생각해 거야. 강진욱은 차근히 정리해 거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 하지 .

“아아…….

보아하니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김태열에게 있는 같았다. 하지만 선우는 굳이 그게 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관심 있는 티를 내면 김태열이 해결해 달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선우가 기본적으로 선량한 편이기는 해도 아무에게나 무한정 착하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다.

“간다.

선우는 아직도 말이 있어 보이는 김태열을 두고 먼저 걸음을 뗐다.

“야! 최선우.

기어이 김태열이 선우를 불렀지만, 선우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휘휘 내저었다. 얼마 걷지 않았을 , 손안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하니 강진욱이었다. 이제야 공항에 내려선 같았다.

“여보세요.

-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강진욱이 곧장 도착 시간부터 알렸다. 선우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어쨌든 그전에는 집에 도착하고 있을 테니까 상관없겠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다시 강진욱이 말했다.

- 밥은?

“안 먹고 기다리라며?

- 아무것도 먹었어?

선우는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힐끔 내려다봤다.

“어, 그냥 .

케이크는 먹었지만, 밥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얼버무렸다. 이제 통화를 끝내려나 생각했지만, 강진욱에겐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아무 하지 않으니 핸드폰 너머로 희미하게 소음이 들려왔다. 안내 방송, 사람의 말소리, 차가 빵빵 경적을 울리는 소리.

선우도 어쩐지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대로 집으로 걸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저녁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바람이 한결 시원해진 같았다.

“있잖아.

잠시 강진욱이 이동하는 가만히 듣던 선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 , 말해.

강진욱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내가 우연히 알게 됐는데, 중학교 졸업할 나랑 만나기로 했었다면서.

- ……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우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을 쳐다봤다. 통화가 끊어진 아니었다.

“왜 만나자고 했어?

먼저 강진욱이 말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러지 않으니 선우가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많은데, 어쩐지 지금, 순간에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강진욱이 최선우에게 먼저 연락해서 전하고자 했던 중요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 가서 얘기할게.

아주 조금의 정적 강진욱에게 대꾸가 돌아왔다.

“뭐 그래.

선우도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들어야 아니었으니까.

후로도 선우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통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강진욱이 차에 오르고 선우가 있는 곳까지 오는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가 연결된 모르는 사람들처럼 굴었고 통화는 강진욱이 선우의 앞마당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끝났다.

“그건 뭐야?

강진욱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우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보자기를 보고 물었다.

어째 도시락 같기는 한데 혹시나 했기 때문이었다.

“백 집사한테 도시락 준비해 두라고 했어.

“아…….

가지고 온다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예상보다 본격적인 도시락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그래. 고맙다. 멀리까지.

하지만 선우는 하러 가지고 왔냐는 대신 감사 인사를 했다. 강진욱이 그런 선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점심때 앉았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어, 아냐. 들어가자.

선우가 서둘러 강진욱을 불렀다. 그러자 테이블에 보자기를 내려놓던 강진욱이 미간을 좁혔다.

아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선우에게서 낯선 알파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풍겨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선우가 놀라 동그랗게 떴다. 깊은 숲에서 불어온 듯한 짙고 청량한 향이 느껴졌다. 의심할 것도 없이 강진욱의 페로몬이었다.

지금? 타이밍에? 갑자기?

“불쾌하네.

강진욱의 목소리에 선우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응? 뭐가?

“아니.

모른 되묻자 강진욱도 별것 아니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덮어씌운 페로몬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다른 알파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서 묻혀 왔는지 몰라도 어차피 베타인 최선우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 강진욱은 입으로 굳이 알려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먹자. 해도 져서 시원하니 괜찮네.

강진욱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우는 그렇다면,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사이 강진욱은 보자기를 풀어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펼쳤다.

“아니, 이렇게 많이.

알록달록한 예쁜 음식이 종류별로 먹음직스럽게 찬합에 담겨 있었다. 전부 선우가 강진욱의 집에서 이상 맛있게 먹은 있는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

선우는 저도 모르게 홀린 테이블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흠칫하고 얼굴을 들어서 강진욱을 봤다.

“그, 고마워, 먹을게.

이걸 준비한 집사겠지만, 준비하도록 강진욱일 것이다. 그러니 인사는 해야 같았다.

강진욱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건 음식을 구경하던 선우도, 강진욱 본인도 모를 정도로 한순간에 흘러갔다.

선우는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식사했다. 그간 자신이 차렸던 것보다 양도, 질도 좋은 음식을 보니 절로 식욕이 돋았다.

강진욱은 그런 선우를 보다가 선우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살짝 앞으로 밀어 주거나 가까이 가져다주면서 선우가 먹는 것을 구경했다.

하늘은 어느덧 보랏빛으로 예쁘게 물들었고, 서쪽으로는 저녁 별이 반짝반짝 빛났다.

              

#48

모처럼 만족스럽고 푸짐한 식사를 마친 선우는 복숭아 아이스티 2잔과 카페에서 케이크를 들고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강진욱은 여전히 바른 자세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늦여름에 접어들어 낮보다는 더위가 한결 수그러들긴 했어도 정장 겉옷도 벗고 있는 보면서 강진욱이 있는 곳만 시원한가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마저 했다.

“자.

선우는 강진욱의 앞에 유리잔을 놓아 주고, 맞은편 의자를 당겨서 앉으며 곧장 아이스티를 마셨다.

카페에서도 마셨지만,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강진욱도 선우를 따라 유리잔을 입에 가져갔다.

“달군.

그리고 마신 같지 않게 모금 꼴깍거리더니 도로 잔을 내려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달아서 별로라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표정을 봐서는 수가 없지만, 선우는 어떤가 싶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있었다.

“이제 말해 .

선우는 차가운 물이 맺힌 잔을 만지면서 강진욱을 건너봤다. 굳이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만나자고 했었느냐는 질문을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

강진욱도 무엇을 묻는지 알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음.

강진욱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질문이 마음에 든다는 거야? 선우가 그런 생각을 .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데.

“거짓말.

선우가 즉각 반박했다. 아까 강진욱이 집에서 얘기한다고 했을 때는 분명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말투였다.

물론 표정을 아니라서 확신은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 한다는 소리가 기억이 난다고?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지.

강진욱은 슬며시 올라간 선우의 눈꼬리를 봤다. 뾰로통해진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귀엽게 보였다.

최선우와 귀여움이라니. 어울릴 같은데 의외로…….

생각하던 강진욱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당에는 조명이 없었다. 빛이라고는 골목에 가로등과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강진욱이 선우의 얼굴을 제대로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런데도 보인다고 생각한 그만큼 그의 신경을 선우에게 온통 쏟고 있다는 뜻이었다.

“벌써 한참 일이잖아. 그런 기억할 없지.

강진욱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사실 선우의 말대로 그는 그때 하려고 했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 *

그날도 비가 내렸다. 겨울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는 차가웠고 그래서 우울하게 느껴졌다. 강진욱은 그래서 오는 날을, 특히나 겨울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알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하루뿐이었으니까.

사실 그답지 않게 용기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정한 일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번이라도 말은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강진욱은 오래도록 숨기고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려고 했다.

“중요하게 말이 있어. 너희 근처 공원에서 만나자.

- 알았어.

불퉁한 목소리에는 귀찮게 만나자는 거야. 그런 불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와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이런 것만 봐도 상대가 예전이랑 얼마나 달라졌는지 있었다. 그래서 이런 용기를 있었지.

강진욱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우산을 쓰고 걸음을 뗐을 때였다.

“어디 가냐?

시비조가 섞인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자 강진태가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삐딱하게 있었다.

4 위인 강진태는 성인이 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얼마 돌아왔다. 본가로 들어와도 되지만, 회장은 아예 집을 따로 내주어 그곳에서 지내게 했다.

강진욱과 강진태가 같이 있어 봐야 집안이 시끄러워지니 성인이 그를 회장이 내보낸 것이었다.

강진태의 어머니가 불만을 표했지만, 이번만큼은 회장의 뜻을 꺾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진태가 귀국한 이유가 감당 되는 사고를 쳐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강진태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의도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진욱은 강진태를 무시하고 그대로 다시 걸어가려고 했다. 어차피 대거리를 봐야 별로 득도 없을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발짝 떼자마자 강진태가 어깨를 붙들어 버리는 바람에 몸이 휘청했다.

“아!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거칠게 몸이 돌아간 동시에 얼굴이 화끈해 졌다. 강진욱은 뒤늦게 강진태가 주먹으로 뺨을 쳤다는 알아차렸다.

중학생인 강진욱은 그다지 덩치도 키도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보다 머리 하나는 강진태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어른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순간 강진욱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강진태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지만, 강진욱 역시 만만찮아 둘이 붙으면 반드시 싸움으로 번졌다. 벌떡 일어난 강진욱이 그대로 강진태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강진태는 순간 제게 향한 살기에 움찔하면서도 그런 티를 냈다는 마음에 들지 않아 일부러 몸에 바짝 힘을 주며 말했다.

“네 엄마 지금 병원에 있단다. 마당에 쓰러져 있는 정원사가 발견해서 구급차 태워 보냈다는데 너도 봐야 하는 아니냐?

강진태를 노려보던 강진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진욱은 그대로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집사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물으니 집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 병원 이름을 알려 주었다.

강진욱은 곧바로 집을 나왔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가 이미 검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보니 해가 저물었다.

어머니가 병실로 옮겨지고 나서야 강진욱은 창밖이 새까매졌다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선우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당황해서 핸드폰을 찾았지만 없었다. 아까 강진태 때문에 넘어졌을 떨어뜨린 같았다. 강진욱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병원을 뛰쳐나왔다.

정신없이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안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은 풍경만 강진욱을 맞이했을 뿐이다.

강진욱은 어둑한 눈으로 공원을 헤매고, 헤맸다. 하지만 여전히 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정이 때까지 헤매던 강진욱이 포기하고 병원으로 돌아가 의사에게서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귀가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강진욱은 찝찝하고 우울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미련도 아쉬움도, 무엇 하나 꺼내 놓지도 못한 .

* * *

최선우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진욱은 가로로 길쭉한 선우의 눈매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최선우의 시선도 강진욱을 따라 올라왔다. 의심이 섞인 눈동자에는 갑자기 일어나느냐는 궁금증이 들어 있었다.

“내일 올게.

“아…….

강진욱의 말을 듣고서야 선우는 밤이 늦었다는 알아차렸다. 어차피 같이 것도 아니고, 강진욱은 내일도 출근해야 했다.

“조심히 .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선우는 일부러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강진욱은 그런 선우를 가만 보다가 돌아섰다.

선우는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는 강진욱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장 너머로 커다란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집은 조용해졌다.

* * *

다음 날도 선우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산책하러 갔다가,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고 전통 시장 구경을 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선우의 시야에 먹음직스러운 진노랑 과일이 들어왔다. 울퉁불퉁한 겉모습에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한라봉이었다.

“이거 택배도 되나요?

선우는 과일을 정리하고 있는 주인을 불러 한라봉을 가리켰다.

“그럼요. 가능하죠.

“네. 그럼 1박스…… 아니 2박스 보낼게요.

“알겠습니다. , 그럼. 여기다가 주소 적어 주세요.

선우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자, 과일 가게 주인이 활짝 웃으면서 얼른 송장과 볼펜을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선우는 볼펜을 쥐고 주소를 적어 갔다.

 

태성건설 전무 비서실 직원들께 드림.

 

받는 사람까지 적은 선우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어제 김태열에게 과거의 서브수가 짓을 들었을 선우는 뭔가 그들에게 사과라도 해야 했나 잠깐 생각했다. 자신이 짓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브수가 벌인 있으니까 그간 고생이 많았다면서 말이라도 하고 올걸 하고.

그러다 한라봉을 발견했고, 사과의 의미로 과일을 보내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것이었다.

“휴가 나왔다고 회사 동료들 챙겨 주는 건가 봐요?

과일 가게 사장이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선우에게 물었다.

“아, .

휴가도 아니었고, 이제 더는 직장 동료도 아니었으며 챙겨 준다기보다는 사과의 의미가 담긴 선물이었지만, 선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도착할까요?

“낼모레면 거예요.

“네, 부탁드립니다.

낼모레면 주말 앞이라서 괜찮을 같았다. 부디 버리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선우는 본인이 먹을 복숭아와 천도복숭아, 아오리 사과도 추가로 샀다.

주인이 많이 팔아 줘서 고맙다면서 서비스로 자두도 챙겨 줬다. 가득 과일을 선우는 돌아가는 길에 옥수수와 양상추를 사고는 고민하던 끝에 소고기도 샀다.

본인이야 먹는다지만 강진욱은 그거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선우는 두둑하게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택시에 올랐다.

택시를 타기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강진욱이 시켜서 주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나 잠깐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강진욱에게도 따로 연락이 없었다.

“뭐야, 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선우는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강진욱과의 대화는 점심 이후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나눈 메시지엔 강진욱이 점심으로 먹는다는 한정식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선우가 점심밥 사진을 보냈더니 답장이라고 보내온 것이었다.

“누가 이게 궁금하다고 했나.

아까도 선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답장을 했다. 이번에도 사진만 보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손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선우는 서둘러 액정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였다. 하지만 상대는 강진욱이 아니라 김태열이었다.

선우는 제가 실망한 눈을 것도 모르고 퉁명스러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49

“왜?

- .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냐?

김태열도 불퉁하게 대꾸했다.

“왜 전화했어?

선우도 만만찮게 귀찮은 말투로 물었다. 사실 성가신 맞았다. 동료들이랑 여행을 왔다는 김태열은 오늘 온종일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체 여행하는 중에 그런 정신이 어디서 나는 건지. 어디로 이동하면 여기 멋지다 예쁘다, 먹으면 뭐가 맛있다 분위기가 좋다. 하물며 사진까지 줄줄이 보내온 탓에 선우는 오늘 벌써 번이나 핸드폰을 충전해야 했다.

- 내일이면 돌아간다?

“아, 벌써 그렇게 됐어? 아쉽겠네.

선우는 성의 없이 대꾸하면서 택시 기사에게 여기서 내려 달라고 말했다. 전화도 끊어 버리려고 했는데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챈 김태열이 다급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너도 나와.

이건 무슨 소리야.

“어디로?

택시에서 내려와 마당에 가로질러 놓은 정낭을 넘어서며 선우가 귀찮다는 감추지 않은 투로 물었다.

- 오늘 동료들이랑 마지막 밤을 즐겁게 보내기로 했어. 그러니까 너도 와서 같이 놀자.

“네 동료들끼리 노는 데를 내가 . 됐어.

입덧 때문에 먹거나 수도 없었고, 분명 술도 마시고 텐데 임신한 몸으로 그런 자리에 가는 내키지 않았다.

가장 걸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강진욱이었고. 하지만 이거야 김태열에게 말은 아니었다.

- , ! 내가 물어봤더니 다들 오면 좋겠다고 했단 말이야. ? 와서 체면 세워 . 당분간 제주에 있을 거라면서. 그럼 언제 볼지 모르잖아.

이게 대체 무슨 말도 되는 억지야. 체면을 세워 주는데 자신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쉬우면 네가 오라고 말하려던 선우는 그냥 싫다고 잘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들어와 것들을 정리하는데 계속 끈질기게 전화가 걸려왔다. 선우는 무시하면서 욕실로 들어가 가볍게 씻고 나왔다.

테이블에 올려 핸드폰 액정이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와, 끈질긴 .

투덜거리면서 걸어간 선우의 눈에 팝업 창이 보였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가 것이었다. 그리고 보낸 사람은 김태열이 아닌 강진욱이었다.

점심 이후로 내내 연락이 없더니 이제야 보낸 같았다. 이제 온다는 소리인가? 시간을 확인하니 6시였다.

“너무 늦을 거면 오질 말지.

중얼거리면서 내용을 읽었다.

 

[선우야, 미안한데 오늘은 같아. 회의가 끝나지를 않네. 기다릴까 연락했다. 내일 점심 먹으러 갈게.]

 

친절도 하지. 온다는 연락을 저녁때 돼서 하고.

“그래, . 수도 있지.

이상하게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온다고 소고기까지 샀는데 말이야.

요즘 입덧 때문에 자신은 먹지 못하더라도 강진욱에게는 줄까 생각해서 준비한 것이었는데.

그때 핸드폰이 띠링띠링 울렸다. 기본 소리를 들으니 지난번 광공에 어울리지 않던 강진욱의 소리가 생각났다.

“진짜 걔는 광공이라는 애가 소리부터 깨긴 했어. 대체 뭐야, 그게. 이거 원작가 실수 아냐?

투덜투덜하는 선우의 입술에는 미소도 걸려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몰랐다. 이번에 연락한 상대는 아쉽게도 강진욱이 아니라 김태열이었다.

계속 메시지를 씹으니 참고 걸어온 같았다. , 진짜 끈질긴 같으니라고. 선우는 어쩔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얼른 ! 다들 기다리고 있어!

김태열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부터 했다. 분명 간다고 했는데 말은 잊은 듯했다.

선우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간다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어차피 강진욱도 오지 않는다는데…….

그래, . 얼굴이라도 비치는 거야 괜찮겠지. 그러면 어쩐지 자기 전까지 계속 전화로 괴롭힐 같으니 그게 나을 같았다.

“알았어. 어디로 가면 ?

- 오오! 오는 거야? 내가 주소 보낼게!

제가 독촉해 놓고 김태열은 의외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메시지가 왔다. 선우는 옷만 다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저녁때라서 주택가에는 택시가 없었다.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 호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간다고 했으니까 김태열도 더는 독촉하지 않겠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김태열이 알려 호텔까지 대략 30 거리를 걸어간 선우가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어느덧 하늘 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선우는 호텔로 들어서며 김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최선우. 왔냐?

“응. 지금 로비야. 어디로 가야 ?

- 그럼 라운지로 . 우리 거기에 있어.

“알았어.

선우는 전화를 끊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때마침 대기 중이었던 터라 바로 타고 올라갔다.

* * *

선우가 라운지로 올라가던 그때, 강진욱은 불쾌해하는 얼굴로 비서가 내민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서류에는 강진태 부사장의 최근 동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태성그룹에는 수많은 계열사가 있었다.

그중 가장 메인은 단연 건설이었고, 에너지와 엘리베이터 등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엔터테인먼트와 광고 사업이 포진해 있었다.

태성그룹의 주력 산업인 태성건설의 전무이사로 있는 강진욱과 달리 강진태는 그룹의 수많은 사업 중에서도 다소 파워가 떨어지는 태성엘리베이터의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 강진태가 이번 정기 주주 총회를 이용하여 태성의 핵심 사업 하나인 에너지로까지 발을 넓히려는 같다는 내용이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군.

강진태의 보고서를 읽은 강진욱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강진태 부사장도 당장 태성에너지를 가로챌 있다 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주주 총회를 통해서 조금은 가능성을 열어 두겠다고 생각하는 같습니다.

태성에너지는 이번 투르크메니스탄 신항만 건설과 떼어놓을 없었다. 이번 항만 구축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은 천연가스와 석유의 수출을 유럽으로 확대할 계획을 하고 있기에 태성에너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신항만 건설 역시 그런 의미로 진행되는 사업이니 강진태가 태성에너지를 노린다는 강진욱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강 회장은?

강진욱이 아버지를 타인처럼 불렀다. 하지만 비서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듯 지켜보실 생각인 같습니다.

“그렇겠지.

원래 회장은 그런 인물이다. 사업가로서는 유능할지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비정하고 냉혈한 인물.

아들이 후계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도 회장은 방관하고 있었다.

물론 극우성 알파인 강진욱은 이미 경쟁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회장은 장자인 강진태가 강진욱을 견제할 있는 견제마로서 역할 하기를 바랐기에 계속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가끔 강진태를 도발해서 일을 벌이도록 부추겼다. 그에게 회장 자리를 것도 아니면서.

“하여간 잔인한 양반이야. 그래?

비서는 그저 고개만 숙였다. 강진욱이 소리 나게 서류를 덮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창밖은 아예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원래라면 시간에 그는 제주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강진태가 걸어온 전화 때문이었다.

대체 최선우가 제주에 내려간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강진태는 최선우가 거기에 있느냐고 물어 왔다.

살살 캐보듯이 묻는 말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강진욱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이럴 최선우를 보러 수는 없어서 오늘은 간다고 연락했다.

강진태는 원래 강진욱을 경멸했지만, 그에 맞지 않게 또한 견제했다. 애초 그런 목적으로 회장이 미국에 있던 강진욱을 한국으로 불러들였으니까 어찌 보면 강진태의 그런 태도는 당연했다.

처음부터 강진욱이 회장의 눈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니었으니까.

아들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회장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씨가 어디서 함부로 헛짓하지 못하도록 감시만 했다.

그랬던 강진욱이 11 여름, 알파로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장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망나니 같은 첫째 아들을 강하게 키울 대전 상대로 강진욱을 이용해야겠다고.

강진욱은 강진태를 위한 경쟁자로 크기 위해 강제로 어머니와 떨어져야 했고, 후에도 회장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려야 했다. 급기야 중학교 16살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지.

언젠가는 회장도 강진태도 정리해야 했다. 전에는 최선우의 존재가 강진욱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에게 알려 필요는 없었다. 강진욱은 다시 창에서 시선을 비서를 바라봤다.

“일단 강진태가 놀라워할 만한 하나만 터뜨려 .

“알겠습니다.

“에너지 쪽은 적당한 이사 하나 물려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비서가 두말할 없다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강진욱은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를 일별하고 핸드폰 액정을 봤다.

붙여 놓은 가드에게 연락이 것이었다.

 

[최선우가 집을 나섰습니다.]

 

벌써 저녁인데 어디를 간다는 건가. 무엇보다 시간상으로 봤을 선우는 식사도 하지 않았을 같았다. 시장 갔다가 집으로 들어갔다는 문자를 받은 것이 고작 1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강진욱은 눈을 찌푸리고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산책하러 가는 같습니다.]

 

식사도 하고 산책이라고? 강진욱은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선우가 했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지금 전화를 했다가는 자신이 감시하고 있다는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일단 조금 시간이 지난 연락해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가드에게 문자가 왔다.

 

[최선우가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더는 기다리고 말고 것도 없는 내용에 강진욱의 얼굴이 굳었다.

              

#50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선우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바빠서 온다면서 전화할 시간은 있나 보네.

잠시 받지 말고 애를 태워 볼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강진욱이 어찌 나올지 모르니 얌전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하고 있어?

곧장 들린 질문에 선우는 멈칫했다. 뭔가 아는 것처럼 묻고 있으니 괜히 찔렸기 때문이었다.

“뭐 하고 있긴. 그냥 있지. 그러는 웬일로 전화를 했어?

- 그냥. 간다고 하고 것도 미안하고.

강진욱과 사과라니 하여간 생각할수록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너랑 어울려.

- 걱정되기도 하고.

선우의 뜬금없는 소리에도 강진욱은 다른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말투도 다정하게 들려서 더더욱 적응이 됐다.

“걱정은 무슨. 하는 일이라고는 빈둥빈둥 노는 것뿐인데.

그래서 선우는 괜히 불퉁하게 말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서며 문이 열렸다. 차분하고 조용한 라운지가 선우를 반겼다. 그에 어울리게 잔잔한 클래식이 흘렀다.

- 밖인가 보네?

선우에게도 나직하게 들리는 음악을 강진욱은 핸드폰 너머에서 들었나 보다. 극우성 알파라 그런지 귀도 밝았다.

뜨끔한 버린 선우가 괜히 옆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 잠깐 나왔어.

- 산책하러 나간 아닌 같고.

일부러 어디라고 말은 했는데, 강진욱이 끈질기게 목적지를 캐물었다. 가드를 붙이지 않았으니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솔직히 알려 줘도 같았다.

“응. 누굴 만나려고.

- 김태열?

강진욱에게 바로 김태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선우는 순간 흠칫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하니 강진욱이 어딘가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아니면 감시하는 사람이 있거나. 하지만 선우와 눈이 마주친 이쪽을 보고 있던 임해원이었다.

“아…….

전혀 의외의 인물과 마주친 선우가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를 흘렸다.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 중에 임해원이라니.

물론 김태열이 체면을 세워 주니 뭐니 하면서 끈질기게 부를 생각하지 않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상황이 되니 당황스러웠다.

- 김태열이 제주에 있다면서. 그래서 만나러 아니야?

선우가 내뱉은 소리를 오해했는지 강진욱이 질문해 왔다. 그제야 선우도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잠시 눈이 마주친 임해원도 때마침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 맞아. 하도 보자고 졸라서. 잠깐 얼굴만 비치려고.

선우도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자리에 김태열만 있는 아니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미 김태열과는 네가 제주에 오기 전에 잠시 만나기도 했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 일찍 들어가.

“알았어. ,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이게 뭐라고 괜히 기분이 오묘해졌다. 선우는 손까지 꼼지락거리면서 알쏭달쏭 어색한 느낌을 떨치려 했다.

“여! 최선우! 왔어?

그때 마침 김태열이 선우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그리로 다가갔다.

선우와 눈이 마주친 임해원이 눈인사를 건넸다. 선우도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 김태열을 봤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쪽에 앉아.

김태열이 옆을 툭툭 치면서 자리를 권했다. 선우는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 누구에게라고 것도 없이 눈으로 인사를 하면서 테이블을 훑었다.

벌써 술자리가 시작된 제법 접시도 보이고 술도 거의 마신 상태였다. 이제 고작 8시인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느낌이었다.

“선우 씨죠? 지난번에 마트에서 잠깐 뵈었는데. 만나네요? 기억하시죠?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마따나 마트에서 잠시 만났던 영업팀이라던 사람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뵙네요.

“제 이름 벌써 잊으셨구나? 박성수예요.

“아, .

선우는 살갑게 말을 붙이는 박성수가 부담 돼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박성수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웃었다.

“그때 그렇게 가셔서 아쉬웠어요. 드시죠? , 제가 한잔 따를게요.

박성수가 선우의 앞에 잔을 가져다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권했다. 친화력이 좋은 아니라 막무가내 스타일 같기도 했다.

“아뇨. 제가 요즘 먹는 약이 있어서 술은.

선우는 잔을 채우려는 박성수를 말리며 잘라 말했다.

“아, 약이요. 어디가 아프신가 봐요?

설마하니 선우가 아픈 핑계 삼을 몰랐는지 박성수가 주춤하며 물었다. 쳐다보는 눈초리에는 그런 핑계가 너한테 어울리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같았다.

뭐야. 너랑 나랑 언제 만나 봤다고 그렇게 쳐다봐.

선우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에이, . 여기까지 와서 빼고 그래. 그리고 약은 무슨 . 핑계를 대라.

옆에 앉아 있던 김태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자마자 선우가 까칠하게 거절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그런 것이었다.

선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태열을 봤다. 그냥 얼굴만 비치면 된다고 하더니 이게 이래?

“그냥 인사만 하자는 거잖아. ?

“나 먹고 있는 맞고. 너한테 인사만 하려고 거야. 내가 여기 껴서 하냐.

“보기만큼 까칠하시네. 아니면 별로 어울릴 만한 급은 아니라 생각하시나?

말을 받은 맞은편에 앉은 박성수였다. 들어 봐도 시비조였다. 선우의 시선이 김태열에게서 박성수로 옮겨 갔다.

“그러는 그쪽은 아까부터 자꾸 무례하게 굴고 있는 알죠?

“네? 무례요? 아니 그냥 한잔하자는 부득불 싫다고 그쪽…….

박성수가 눈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두 사람 그만하시고. 박성수, 네가 사과해. 무례한 맞아. 친한 사이도 아니고 초면이잖아. 당연히 불쾌해할 만하지.

하지만 박성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해원이 중재에 나섰다.

‘그나저나 임해원이라. 이렇게 만나네.

선우는 김태열 건너에 앉은 임해원을 곁눈질했다. 마침 그쪽도 선우를 보고 있었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합니다. 친구들이 들떴는지 실수를 했어요.

임해원이 다시 한번 사과를 왔다.

“네, 그러게요. 당황스럽긴 하네요. 근데 사과는 그쪽이 아닌 같네요. 어쨌든 제가 있을 자리는 아닌 같으니 이만 일어날게요.

선우는 괜찮다는 대신 너희가 잘못했다는 의미를 담아 대꾸하고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애초 김태열의 투정을 받아 주는 아니었다. 자기 체면을 살려 달라느니, 얘기가 되었다느니 하는 소리에 문제였다.

와서도 인사만 하고 갔어야 했다.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여기에 앉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 그래도 그렇게 가시면 저희가 죄송한데. 뭐라도 드시고 가세요.

임해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최선우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 에이, 알았어. 장난 테니까 앉아. 야야, 그렇게 가면 내가 미안하잖아.

김태열도 곤란한 눈으로 선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작 선우를 일어나게 박성수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트에서 만났을 때부터 저런 태도였다. 아마 비서실 주임과 친분이 있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은 대상이 저쪽인 같았다. 선우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김태열에게 들어 보니 서브수가 어지간히 진상 짓을 같은데, 어쨌든 자신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선우는 여러 눈동자를 둘러보다가 결국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거 드세요.

임해원이 웃으면서 선우의 앞에 유리컵을 내주었다.

“오렌지 주스예요.

선우가 컵을 보자 임해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메인수라서 그런지 배려심이 남달리 좋았다. 웃는 얼굴은 묘하게 발그레했고, 뒤늦게 알았는데 은근하게 몸에서 꽃향기가 났다.

이게 임해원의 페로몬이었구나…….

알파의 페로몬은 느끼지 못하는데 아마 같은 형질이라서 오메가 페로몬은 맡을 있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마실게요.

선우가 잔은 쪽으로 당기면서 인사했다. 오렌지 주스는 마실 있지 않을까? 아직 도전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따가 모금 정도 마셔 봐야지.

“아니에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임해원이라고 해요. 지난번에는 인사를 제대로 같네요. 태열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면서요?

그런 얘기를 했어? 선우가 김태열을 쳐다보자, 김태열은 뭐가 좋다고 눈까지 찡긋하면서 윙크해 보였다.

“네, .

“여행지 다니는 내내 태열이가 얘기 계속했었어요. 혼자 같은데 같이 다니면 좋았겠다고.

심지어 혼자 여행 왔다는 소리도 했단다. 대체 그런 말을 하러 하고 다니는 건지. 선우가 어이없이 보는 모르고 김태열은 임해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이, 해원아. 그런 얘기는 하면 되지. 내가 민망하잖아.

“그런가?

김태열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임해원이 대꾸했다.

“여하간 그래서 저희도 마지막 날이니까 같이 시간이라도 보내자고 초대한 것이었어요.

임해원은 메인수여서 그런지 말도 예쁘게 잘했다.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선우를 여기로 불렀는지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랬다.

이래서야 선우도 계속 퉁명스럽게 수가 없었다.

“초대 감사합니다.

“저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건배할까요?

임해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두루 둘러보면서 같이 건배를 하자고 말했다.

다소 듯해 보였던 분위기는 그것으로 한결 부드러워졌다. 후로도 내내 대화의 주체가 김태열과 임해원, 박성수를 위주로 돌아갔기에 선우도 적당하게 맞추었다.

종종 보면 김태열이나 박성수가 임해원에게 계속 술을 따르고 말을 걸고 있었다. 모습을 보니 둘이 임해원을 좋아하는 같았다. 이런 자리라면 굳이 내가 끼지 않아도 됐을 같은데.

선우는 그림의 떡처럼 놓인 음식을 보며 주스를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물만 마셨더니 속이 출렁거리고 있어 줘야 같았다.

때마침 김태열의 옆자리도 어느새 비어 있었다. 임해원도 화장실에 같았다.

“어디 ?

박성수와 한창 대화하던 김태열이 선우가 일어나는 기척에 곧장 물어 왔다. 선우는 작게 화장실, 하고 속삭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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