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OHC Chapters 31-40

#31

“얜 아무리 봐도 광공은 아닌 같아. 소설에서 보이던 모습이랑 완전 다르잖아.

지금까지 보여 모습은 말도 더럽게 듣는 떼쟁이에 가까웠다. 더불어 귀도 닫아 놓은 벽창호지.

어쩌다 저런 남자가 되었을까. 선우는 머릿속에 강진욱의 캐릭터를 떠올려 봤다.

안하무인까지는 아니어도 선우처럼 일반인은 동등하게 사람으로 취급도 하는 족속이었다.

누군가 말을 따르는 당연하고,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그만한 권력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서 그런 것도 있고, 극우성 알파라는 형질로 분위기를 압도하니 애초 누가 쉽게 덤빌 생각을 하기도 하고.

메인수도 그랬다. 우성 오메가임에도 극우성 알파의 압도적인 페로몬을 이겨 내지 못하고 강진욱이 미친놈처럼 집착하는 것에 휘둘린다.

워낙 착하고 바르고 얌전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런 사람이 강진욱 같은 남자를 만났으니 대항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근데 완전 반대잖아.

솔직히 강진욱이 좋아할 성격은 아니었다. 말을 해도 마디 지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이렇게 도망도 치고 말이지.

어떻게 보면 선우와 강진욱은 상극이라고 수도 있었다.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녁 먹지 말고 챙겨 먹어. 사진 찍는 잊지 말고.]

역시나 이번에도 선우의 식사를 신경 쓰는 내용이었다. 선우는 강진욱이 보낸 메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욕을 하기는 했는데 사실, 강진욱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구는 나쁘지 않았다.

[.]

선우는 이번엔 아까보다 짧게 답을 날리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쉬었으니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해야겠다!

보기에는 예쁘고 깔끔해 보였는데, 확실히 비어 있던 집이라 구석구석 쌓여 있는 먼지가 제법 되었다.

선우는 욕실 작은 수납장에서 빗자루를 꺼내 거실과 주방 바닥을 쓸고, 걸레를 찾아내어 가구와 집기를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하는 김에 선반에 올려놨던 그릇들도 꺼내어 물로 씻어 행주로 물기를 제거했다. 그렇게 번도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나니 어느 정도 집안 정리가 어느 정도 끝이 났다.

선우는 빨아 놓은 행주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운 보고 핸드폰 화면을 켰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아침을 먹은 이후로는 제대로 먹은 없었다.

“헉, 미안해!

이렇게까지 속을 비울 생각이 없었던 선우가 일단 속에 있는 아이에게 사과했다.

원래 챙겨 먹고 건너뛰기 일쑤인 자신이야 그렇다 치고, 먹고 쑥쑥 커야 하는 아이에겐 그래서는 됐다.

선유는 청소하느라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같았다.

느릿느릿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띄엄띄엄 주택가가 보이긴 했는데, 음식을 파는 곳은 없는 같았다.

아마 중개 사무소가 있는 곳까지는 가야 식당이나 마트가 있을 같았다. 그쪽이 해수욕장과 가까웠으니까.

도로 마당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주변을 검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해수욕장까지는 걸어가야 카페며 식당을 있을 같았다.

지도를 보던 선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차로 10 거리에 시장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입덧 때문에 어차피 식당에서 먹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차라리 시장에 가는 나을 같았다.

‘시장에서 먹을 사서 집에 와서 먹어야겠다!

결정을 내린 선우가 곧장 집을 나섰다. 어느덧 머리 위로 노을이 예쁘게 드리워져 있었다.

선우는 느릿느릿 걸어 동네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버스 안내 시스템을 보니 25 후에 도착한다는 표시가 보였다.

길면 길다고 있지만, 어차피 바쁜 일도 없으니 기다리다가 타고 가도 같았다.

선우는 다리를 공중에서 휘휘 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저녁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바람도 제법 시원해지니 점차 몸이 나른해졌다.

어느덧 선우는 버스 정류장의 벽에 머리를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졸았을까.

“저기요!

버스 정류장 앞에 1대가 멈추어 서며 창문을 내리고 젊은 남자가 선우를 부르며 손짓했다.

선우는 멍한 얼굴로 눈을 뜨고, 누가 자신을 부른 건가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차를 발견했다.

안에는 선우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혹시 근처에 시장이 있다던데. 어디인지 아세요?

“시장요?

신기하게도 남자가 묻는 것은 선우가 가려던 곳과 같았다. 선우가 인터넷을 열어 주소를 알려 주자 젊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혹시 시장 가시는 거면 같이 가실래요?

“아…….

“여기 버스도 자주 오는 같던데 타세요. 가는 길이니까 모셔다드릴게요.

생글생글 웃는 젊은 남자의 인상은 호감이 가득했다. 선우는 망설이다가 버스 안내 시스템 화면을 다시 봤다.

아직도 버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아까 25분이라더니 지금은 대기 중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지……?

혹시 졸고 있는 사이에 지나갔나. 정도로는 깊이 같지는 않은데.

선우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번엔 운전석 쪽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날도 더운데 타세요!

사람 성격이 좋아 보였다. 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벤치에서 일어났다.

선우가 뒷좌석 문을 열던 그때, 운전석과 보조석에 앉은 남자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이윽고 그런 없다는 앞을 봤다.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은 알아채지 못한 선우가 마침내 차에 올랐다.

“그럼 출발할게요.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선우는 안에 감도는 시원한 공기에 길게 숨을 뱉으며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망설이다가 타기는 했지만 더운데 꾸벅꾸벅 졸면서 버스를 기다렸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같았다.

그렇게 선우를 태운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 오셨어요?

얼마쯤 달렸을까. 보조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어색한 기분을 느끼던 선우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차를 얻어 것인데 먼저 말을 걸었어야 했는데, 하는 반성을 했다.

“두 분은…….

선우는 잠시 말을 끌며 운전석과 보조석을 번갈아 봤다. 편하고 가벼우면서도 활동성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보조석에 앉은 남자의 무릎 위에는 DSLR 카메라도 올라 있는 보였다.

“여행 오셨나 봐요?

빠르게 사람의 행색을 살핀 선우가 질문을 마무리했다.

“네. 저희는 취재를 겸해서 여행 중이에요.

“아, 취재요. 기자이신가 봐요?

“기자는 아니고 프리랜서예요. 기사도 쓰고 SNS 하고, 그런.

그렇구나. 선우는 그런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요즘은 전문 기자가 아니어도 SNS 그런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러려니 했다.

“저희는 마침 오늘이 전통 시장 구경 취재 가는 중이었어요.

“네에…….

이럴 때는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지 없어 선우가 애매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런 선우와 달리 보조석에 앉은 남자는 사교성 좋게도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그쪽은요?

“전 , 그냥. 쉬는 겸해서 여행 왔어요.

“그러시구나. 얼마나 계세요?

“일주일이요.

“아하! 혼자 오셨어요?

“네.

“요즘 홀가분하게 혼자 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취재차 오는 아니면 혼자 다니는 것도 좋아해요.

그렇게 한창 남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창밖으로 전통 시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노점처럼 널찍한 공터 같은 곳에 좌판이 펼쳐진 생각했던 선우는 시장 풍경에 절로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규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릴까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운전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 선우도 별말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저녁때가 되어 가는데도 시장은 아직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럼 여행 즐겁게 하세요.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살갑게 인사를 전해 왔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도 취재 잘하세요.

선우도 고마운 마음을 담아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아까 차를 얻어 타는 망설였던 미안할 정도로 동행자는 깍듯하게 작별을 고하고 먼저 사라졌다.

선우는 느릿하게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지각색의 잡화들과 옷이었다. 먹을 것을 사러 왔는데 의외로 풍부한 볼거리에 선우의 걸음은 절로 시장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실내에 차려진 시장은 생각보다 구획이 정리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옷과 잡화가 늘어진 코너를 지나 이불과 침구류가 널린 곳까지 통과하고 나니 드디어 먹을 것이 가득한 푸드 코너가 나왔다.

선우는 홀린 듯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먹을 것을 보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핫도그, 꽈배기, 떡볶이, 오뎅 등등 분식이 즐비한 좌판을 훑었지만 쉽게 선택할 없었다.

어차피 입덧 때문에 저런 도전도 없었으니까.

대신 선우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옥수수를 쳐다보았다. 저건 먹을 있지 않을까?

“옥수수 드릴까요?

아까부터 잘생긴 청년이 앞에 서성이는 지켜보고 있던 주인이 넌지시 물었다.

“네.

망설이던 선우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액을 지불하고 옥수수를 받아 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희미하게 났지만, 선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32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각의 집무실. 강진욱이 진지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다.

딩동. 딩동.

그때, 책상 한쪽에 두었던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려 댔다. 강진욱이 인상을 쓰며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강진욱은 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소리도, 알림도 기본 설정 그대로 두는 편이었다. 어차피 대부분 진동 모드로 두니 상관없었으니까.

그런데 가끔 이렇게 설정이 바뀔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기종으로 변경할 시기가 같았다.

강진욱이 미간을 좁힌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의 집중을 흐트러뜨리며 연달아 메시지는 전부 사진이었다.

강진욱은 엄지를 쓱쓱 움직여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는 최선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고작 되는 시간 동안 수십 .

화질 좋은 전문 카메라로 촬영하여 현장감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찍힌 사진은 시장으로 들어서는 최선우의 뒷모습.

강진욱은 별것 아닌 장면을 한참 쳐다보다가 자신이 전에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눈으로 훑었다.

[최선우가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대기 중입니다.]

[버스가 20분째 오지 않고, 최선우는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습니다.]

메시지 위에는 버스 정류장 투명한 벽에 머리를 대고 졸고 있는 최선우의 사진이 있었다. 어찌나 달게 자는지 입까지 살짝 벌리고 있었다.

강진욱은 피식 웃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가는지 물어보고, 태워서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곧바로 가드에게 답장이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드에게 최선우를 차에 태웠고 시장으로 가고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한 다음이 연달아 사진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강진욱이 아무 없다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검지로 좁혔던 미간을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최선우는 일주일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그냥 여행이겠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집을 보러 갔고, 자리에서 계약했다.

“왜?

그건 마치 자신과 있고 싶지 않다는 뜻처럼 보였다. 대체 ? 이유가 뭘까? 정말로 이대로 자신과 헤어지겠다는 의미인 걸까.

. .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강진욱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것은 비서였다.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에서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강진욱이 차갑게 묻자, 비서가 더욱 난처한 눈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강진태 부사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강진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까 전화해서 최선우의 행방을 묻더니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여어…… 전무. 바쁜 일은 끝났어?

심지어 비서와 대화하던 중이었는데, 강진태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집무실 안으로 불쑥 진입했다.

“여긴 나타났어.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구시나. 근처에 일이 있어 겸사겸사 들른 거지.

누가 들어도 대충인 같은 소리를 하면서 강진태가 집무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강진욱을 바라봤다.

“선우 군은? 비서실에도 보이던데. 정말로 그만둔 거야?

달갑지 않은 관심까지 보여 강진욱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그런 사람을 비서가 지켜봤다. 형제이기는 하지만 강진태와 강진욱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차피 어머니가 다른 형제였고, 태성그룹의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는 사이였기 때문에.

내내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꼽혔던 강진태는 성인이 되자마자 강진욱이 극우성으로 발현하며, 자리에서 밀려난 탓에 더더욱 강진욱을 증오했다.

그렇게 사이도 좋으면서 굳이 강진태가 여기까지 의도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최선우를 언급한 것은 더욱.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없어. 이래 봬도 내가 선우 신경 많이 쓰고 있다니까? 그래서 정말 집에 들여앉히기라도 했어?

아까 전화로도 그런 소리를 하더니. 강진욱이 못마땅해하는 눈으로 강진태를 노려봤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당장 찌를 것처럼 예리했다.

하지만 강진태는 여전히 느물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근데 선우 진짜 너희 집으로 거야? 집에 모셔 두고 있어? ?

강진태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물었다. 요즘 강진욱과 최선우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집에 데리고 정도로 사이가 급격히 좋아졌다는 것은 신기했다. 그간 최선우가 강진욱의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강진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최선우가 집을 것도 이상하고, 어제는 강진욱이 직접 본인 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말까지 들려왔던 것이었다.

“왜? 정말 내가 최선우와 결혼이라도 하기를 바라? , 하긴. 형은 그게 좋긴 하겠지. 아이도 낳지 못할 베타를 곁에 붙여 형이니까.

강진욱이 차갑게 대꾸하는 말에 강진태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뜻은 아니지. 아버지께서 은인의 손자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것뿐이잖아. 물론 약혼자 옆에서 일을 도우면서 서로 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뜻도 있었지만. 그래?

강진욱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보고 있던 서류를 서랍에 넣은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강진태를 지나쳐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비서실에 있던 직원들이 전부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후다닥 눈을 돌렸다. 그들도 강진태가 갑자기 나타난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진욱은 비서들을 무심하게 보다가 비어 있는 책상 하나에 잠시 시선을 멈췄다. 3 동안 최선우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파티션 위에는 아직 ‘사원 최선우’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눈살을 찌푸렸다가 강진욱이 비서실을 빠져나왔다. 뒤를 비서가 바짝 따라왔다.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할게. 둘이 요즘 제법 사이가 좋아진 같다고. ?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사이 강진태가 다가와 긁는 소리를 했다. 강진욱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진욱이 먼저 안으로 올라타고, 강진태가 뒤를 이었다.

임원 전용이었기에 중간에 멈추는 것도 없이 곧바로 지하까지 내려갔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내리는데 퇴근 중이었는지 직장인들 몇몇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해원아, 내일 늦지 않게 공항으로 .

“알겠어. 1시간 전에 도착하면 되지?

“그래.

임해원의 옆에 남자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제주도는 대학 다닐 한번 보고는 처음이라서 기대되네. 근데 누구누구 간다고 했지?

해원의 물음에 남자가 냉큼 말했다.

“나 빼고 총무팀이랑 영업팀 , 국내사업부에 3.

“우리랑 친한 동료들은 전부 가는 거네?

“그럼. 다들 얼마나 벼르고 있었다고. 해원이 너도 잔뜩 준비하고 .

“응. 알았어.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내일 지각하지 않으려면.

대화를 나누는 여럿 강진욱은 익숙한 얼굴 둘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해외사업부에 근무하는 오메가 임해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명 낯이 익은데 누군지 긴가민가했다.

“아, 전무님!

여럿이 모여 대화하던 그중 하나가 강진욱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뒤이어 같이 뭉쳐 있던 이들도 이쪽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강진욱은 그들을 훑어보고 눈인사만 전하고는 대기 중인 차로 향했다. 차에 타기 시선은 임해원 옆에 남자에게 잠깐 머물렀다.

분명 번쯤 얼굴인데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어디선가 적이 있나 보지.

강진욱은 끝내 생각나지 않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긴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오다가다 만났을 수도 있을 거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뭐야. 여기 있어?

강진욱은 저보다 먼저 차에 타서 기다리고 있던 강진태에게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가는 길에 내려 달라고.

강진태가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웃었다. 강진욱은 못마땅한 눈으로 강진태를 쳐다봤다.

“내려.

“뭘 야박하게 그래. 가는 길에 데려다주면 되지.

강진태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강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하여간 싸가지 없는 새끼.

보조석에 앉은 비서가 불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드라이빙 미러를 살펴봤다.

강진욱이나 강진태나 만만치 않게 성격이 좋지 않다는 문제였다. 예전에는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여 왔다. 정확히는 강진태가 덤비고, 강진욱이 미친개처럼 맞서는 것을.

설마 차에서 그러는 아니겠지?

“내려.

강진욱은 한마디만 하고 강진태를 쏘아보기만 했다. 강진태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운전기사가 먼저 내려서는 운전석 뒷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리면 억지로라도 끌어내겠다는 뜻이 보였다.

“흥.

강진태가 코웃음을 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부러 운전기사의 어깨를 소리 나게 쳤다.

강진태는 끝까지 강진욱의 신경을 긁고는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내내 그들을 따라오던 강진태의 차가 있었다.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강진욱의 옆을 지나쳐 갔다. 강진욱은 모습을 차갑게 바라봤다.

“강진태가 어디까지 아는 거야?

강진욱이 강진태를 태운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제주에 갔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같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나 회사를 그만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비서의 대답에 강진욱이 눈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그때, 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강진욱은 곧장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최선우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사진 1장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를 읽은 강진욱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33

집으로 돌아온 선우는 과일을 씻고, 채소를 정리해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온기가 남은 옥수수를 꺼내 우묵한 그릇에 담았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

접시도 기하학무늬가 그려져 예쁜데 채소와 과일까지 알록달록하니까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같았다.

선우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거실에 있는 좌식 테이블로 왔다. 식탁이 있기는 하지만, 밖을 보면서 먹고 싶었다.

접시와 그릇을 나란히 놓고 포크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아침, 점심, 저녁 먹을 때는 사진 찍어서 보내고.

강진욱이 그렇게 말했던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 , 별걸 .

선우는 투덜거리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기능을 실행했다. 그리고 초점이 맞기도 전에 대충 버튼을 눌렀다.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음식 사진이 액정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나왔는지 어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원래 선우는 사진 촬영에 관심도 소질도 없었다.

어디 놀러 가지도 않고, 본인 사진을 찍는 경우도 거의 없었으니까. 남들처럼 SNS라도 하면 그럴 마음이 들까.

“아! SNS.

선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메뉴를 눌렀다가 멈칫했다. 새로운 핸드폰으로 바꾸는 바람에 전에 서브수가 사용하던 SNS 앱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괜찮겠지……? 어차피 비공개니까. 누가 찾아서 보지는 않을 아니야.

근데 비공개가 맞나? 달리 이웃을 맺거나 게시 글을 누가 읽은 같지는 않은데.

잠깐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괜찮으려니 했다. 선우는 본래 사용하던 메신저 앱을 열고 강진욱의 이름을 클릭했다.

아까 찍은 사진을 첨부해서 보내고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놨다.

지잉.

포크를 들고 복숭아를 집는데 엎어 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뒤집어서 액정을 봤다. 아직 밝은 화면에 팝업이 하나 있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먹어.]

강진욱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런데 보내온 내용이 곱지 않았다.

“보내도 시비야…….

선우는 입술을 삐쭉이며 도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복숭아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과육이 입안에 퍼지자 절로 침이 고여 들었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선우의 시선이 밝아진 액정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강진욱이었다.

[대답.]

달랑 글자가 있었다.

“뭐래…….

자기가 무슨 부모도 아니면서 꼬박꼬박 간섭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선우는 불성실하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번엔 그릇에 넣어둔 옥수수를 들었다. 옥수수 알이 아주 탱글탱글하고 노랗게 익어서 아주 맛있어 보였다.

킁킁 냄새를 맡았는데 다행히 구역질이 올라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구수한 냄새에 입맛이 도는 같았다. 선우는 옥수수를 손에 쥐고 오물오물 야무지게 먹었다.

옥수수 개마저 뚝딱 비우고 났더니 배가 빵빵하게 차오른 기분이 들었다. 선우는 한쪽 팔을 엉덩이 뒤로 짚어 비스듬히 기대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느리게 문질렀다.

“아, 배부르다……. 어때. 너도 만족해?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배부르게 식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며칠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인지 약간 볼록해진 같았다.

살살 배를 쓰다듬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선우는 사진을 꺼내어 얼굴 높이까지 올려서 눈을 맞췄다.

“누굴 닮았으려나.

지금이야 이렇게 콩알처럼 생겼어도 언젠가는 손이 생기고 발이 생기고 입이 보이게 테지.

“너, 콩알이 할래?

콩알, 콩알 하다가 보니까 그게 어울리는 같았다.

“콩알아.

발음도 동글동글 귀여운 같네. 선우는 푸스스 웃으며 사진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접시를 설거지한 안방으로 들어왔다.

선우의 손에는 아직도 사진이 들려 있었다.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액자처럼 작게 창에 시선이 머물렀다.

마침 침대도 그쪽에 있었다.

“저기가 딱인 같지?

선우는 마치 콩알이가 듣기라고 하는 물었다. 그리고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걸어서 벽에다가 사진을 가져다 봤다.

“역시 여기네!

사진을 벽에다 채로 선우는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열린 문을 통해 쏴아 쏴아 밤바다의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소리였다. 한동안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다시 침대를 내려왔다.

침실에 있는 서랍을 열어 보니 다행히 투명 테이프가 있었다. 선우는 테이프를 뜯어 사진 모퉁이 4곳에 비스듬히 붙여서 다시 아래 벽으로 다가왔다.

거기다가 사진이 삐뚤어지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서 부착을 마쳤다. 아래 콩알이는 마치 밤바다를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

선우는 괜히 사진을 엄지로 문질러 보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엄마도 가졌을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선우에게 엄마는 사랑하지만, 항상 바쁘고 고단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질문하기보다는 알아서 잘하고, 엄마가 피곤하지 않게 신경 써야 했다.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공부도 척척 해내는 선우를 엄마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늦은 술을 마시고 나면 눈물에 젖은 손으로 뺨이며 머리칼을 쓸어 주고는 했다.

〈사랑해, 아들. 엄마가 정말 사랑해.

물기 어린 목소리. 속에 담긴 애정을 알아서 선우는 잠이 깨고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묻지 않아도 같았다.

엄마는 갖고 번도 후회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니 나도 뜻하지 않게 생긴 콩알이 엄마가 사랑한 것처럼 예쁘게 키울게.

선우는 침대를 내려와 아까 눈여겨봐 두었던 책장으로 다가갔다. 강진욱의 집에서 봤던 그런 서재는 아니어도 4단으로 책장에는 제법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주인 부부는 여행을 아주 좋아하던 사람이었는지 대부분 여행과 관련된 책이 주를 이루었다.

세계 각국, 전국 각지 가이드북도 있었고 여행을 다녀온 누군가가 남긴 여행기나 에세이도 있었다. 심지어는 여행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설책도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그중에서도 푸른 바다가 그려진 에세이를 꺼내 들었다. 겉표지에서도 짐작하기는 했는데 내용은 신기하게도 제주를 여행하면서 글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눈이 무거워졌다. 분명 낮에 잠을 같은데 금세 피로감이 몰려왔다.

책을 내려놓고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침실을 조용하게 채웠다.

지잉.

머리맡에 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밝아진 화면에 강진욱이 보낸 메시지가 팝업으로 떴다.

[자기 전에도 연락해.]

글자에도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이미 꿈나라로 버린 선우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우가 메시지를 다시 확인한 훤하게 아침이 밝고 해가 얼굴을 간질간질하는 느낀 시간이었다.

멍하니 눈을 뜨고, 눈꺼풀을 깜빡이면서 잠을 쫓아낸 선우는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강진욱이 보낸 메시지를 봤다.

[최선우, 벌써 ?]

심지어 자는 사이에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근데 어쩐지 뭐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 보내온 것과 달리 말투가…… 말투가.

“왜 이렇게 다정하게 느껴져.

강진욱한테 어울리게. 그간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우기거나 하는 모습만 보였으면서

사근사근하게까지 보이는 메시지를 보니 기분이 오묘했다.

이게 강진욱이 말하던 싫어하지 않게 하겠다는 소리인가. 그래도 적응이 됐다.

선우는 가느다랗게 숨을 뱉으면서 키패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뭐라 써서 보내야 하기는 하는데 괜히 써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제 일어났…….]

아냐. 이거 뭐가 이상한 같다. . . . 삭제 버튼을 빠르게 눌러서 내용을 지웠다.

[어제 그냥 잠들어 버려서 메시지 확인을 이제야…….]

이것도 아냐. 굳이 변명하려고 그래. 그럴 필요는 없잖아?

어제 먹는 가지고도 간섭한다고 투덜댔으면서 자는 것까지 꼬박꼬박 보고해야 하는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 선우가 입술을 내밀었다.

[. 잤어요.]

망설이던 끝에 선우는 결국 그렇게만 찍어서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다가 벽에 붙어 있는 초음파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콩알이 안녕. 잤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인사가 나왔다. 속에 있는 태아랑은 이렇게 말을 나누지는 않았는데 사진으로 봐서 그런가. 어째 인사를 해야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이름을 붙여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선우는 그래 놓고는 스스로가 웃겨서 푸스스 웃었다.

침대를 내려왔다가 어제 그대로 잠들어 버린 바람에 나비처럼 활짝 날개를 펼친 방치되어 있던 책을 발견했다.

“아!

선우는 얼른 책을 주워 들었다. 새하얀 모래밭과 푸르게 물결치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음…… 먹고 산책하러 갈까?

선우의 일정이 덕분에 쉽게 결정이 되었다. 선우는 그대로 침실을 나와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양치도 후에 주방으로 와서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열심히 시장을 누비고 다닌 덕분에 냉장고 안이 아주 풍성했다.

선우는 말랑말랑한 연두부와 샐러드, 주스를 꺼내고 과일도 정리했다. 그렇게 두둑하고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 쏴아아.

어젯밤에 들었던 파도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그러자 더더욱 얼른 밖으로 나가서 걸어 보고 싶었다.

선우는 캐리어에서 간편한 옷을 꺼내 입고 그대로 밖을 나섰다. 상쾌한 제주의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제법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34

제주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선우는 매일 아침 느긋이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바다로 산책하러 가고, 돌아와 한숨 후에 점심을 먹고, 책을 읽으며 오후를 보내며 쉬다가 느긋이 저녁을 먹고 소일거리를 하다가 자는…… 그런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귀찮은 일도 있었다. 때마다 연락을 하느냐고 메시지를 보내오는 강진욱 때문에.

대체 자신이 일어나고 먹고 자는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꼬박꼬박 참견해 대는 건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본인이 오는 게……. 아니,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리야.

선우는 키패드를 두드리다가 말고 인상을 썼다. 자신이 방금 생각한 너무도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누구보고 여기에 오라고 . 말도 되는 소리지!

투덜거리면서도 선우는 착실하게 메신저 대화창에 사진을 첨부했다. 오늘 아침은 찹쌀죽이었다.

 

[맛있어 보이네. 근데 양이 적은 아냐? 든든하게 먹어]

 

강진욱에게 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쓸데없는 참견만 하더니 웬일로 이렇게 정상적인 대꾸를 할까. 나름대로 크나큰 발전이었다. 물론 뒤에 붙는 말은 여전히 잔소리 같았지만.

선우는 메신저 옆에 대화명을 물끄러미 보다가 친구 목록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그의 대화명은 강진욱이 아니라 ‘강 전무’라고 되어 있었다. 이름 변경을 누르고 망설이다가 ‘강진욱 씨’로 변경했다.

“뭐, 이제 직장 상사도 아니니까.

강진욱이 수행 비서네 뭐네 헛소리를 했지만, 선우는 절대 그런 마음이 없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굳이 골치 아프게 강진욱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선우는 그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작은 서점이라도 차리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아……. 서점! 그러게. 오늘은 서점 투어나 볼까?

선우는 천도복숭아를 오물거리면서 인터넷 창을 열었다. 예전에 직장 동료 하나가 제주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독립 서점을 둘러볼 생각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제주에 예쁘고 독특한 독립 서점이 많다나 뭐라나.

검색창에 ‘제주 독립 서점’ 키워드를 넣고 확인을 누르자 많은 검색 결과가 떴다. 독립 서점이 가장 많은 곳은 역시 제주시.

서점 위치들도 고만고만한 거리에 있어서 돌아다닐 도보로 이동해도 충분할 같았다. 문제는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었다.

“으음……. 버스는 갈아타야 하네. 택시를 타는 편하겠는걸.

홑몸이었으면 모를까. 아직은 조심해야 하는 시기. 선우는 버스보다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후다닥 끝낸 후에 작은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먹을거리를 생각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서는데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만났다.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 마주친 있는 동네 이웃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선우가 꾸벅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자, 할머니도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펜안했수꽈? 아척부터 산도록흔 좋수다.

“하하, .

할머니가 편히 잤느냐, 아침부터 시원해서 좋다고 인사했지만 제주 방언을 모르는 선우가 알아들을 있을 만무했다.

“어디 감수까?

선우의 어색한 웃음을 알아챈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다행히 아예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가냐는 정도야 .

선우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시내 다녀오려고요.

“조심히 댕겨옵서!

“네, 다녀오겠습니다.

선우는 조심히 다녀오라는 인사에 웃으며 고개를 꾸뻑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주택가와 해수욕장은 도보로 10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선우는 오른쪽으로 해변을 끼고 걸어갔다. 아침 해가 내리비치는 바다는 은빛으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약간 덥기는 하지만, 바람이 시원해서 발걸음은 가벼웠다. 선우는 한참 걷다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를 발견했다. 전면 유리에 복숭아가 그려진 포스터가 보였다. 복숭아 아이스티 광고였다.

요즘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적이 없었다. 그런데 포스터를 보니 밑으로 침이 고였다.

“한잔 마실까?

선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로 들어갔다. 폴딩 도어를 활짝 열어 놓은 실내는 상쾌한 바람이 들어차 제법 시원했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네. 저기 포스터에 있는 복숭아 아이스티요.

“복숭아 아이스티, 주문받았습니다!

카드를 내밀고 잠시 기다리니 픽업 테이블에 연한 주홍색의 액체가 담긴 일회용 컵이 놓였다. 얼음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니 시원하고 같았다.

선우는 망설임 없이 빨대로 입을 가져갔다. 달콤하고 시원한 주스가 혀와 안을 맴돌다가 그대로 넘어갔다.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간에는 콩알이를 생각해서 음료를 마셔 왔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주스가 눈에 뜨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선우는 주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왔다. 얼음이 담긴 컵을 손에 쥐고 있으니 시원해서 좋았다.

선우는 걸어가면서 주스를 쪼옥쪼옥 마시며 택시를 타러 갔다.

택시 기사에게 미리 외운 주소를 알려 주었다. 한창 이동 중에 컵은 전부 비워졌다. 아직도 안에는 단맛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같았다.

택시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찾아 두었던 서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그런데 가게 문에 CLOSED 팻말이 걸려 있었다. 허무한 기분에 선우는 길게 숨을 뱉었다.

“쉬는 날이었나.

영업시간을 확인했을 별도로 쉬는 날이 적혀 있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더니. 선우는 아쉬운 마음에 닫힌 문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투명한 너머로 작은 평수에 아기자기 진열된 책이며 소품들이 보였다. 하지만 문이 열려 있지 않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 같았다.

다행히 번째 서점은 영업 중이었다. 선우가 살고 있는 집처럼 오래된 가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한쪽에서는 서점을, 다른 한쪽에서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책 가져다가 보셔도 되세요. 대신 지저분해지거나 파손되면 사셔야 하니까 조심해 주세요!

주인인지 직원인지 수는 없지만 젊은 여자분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선우는 눈으로만 꾸벅 인사하고 책이 놓인 진열대를 훑었다.

사진집들이 가장 많은데 그중에서도 여행 사진집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여행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서 그런 같았다.

이런저런 책을 살펴보고 읽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흘렀다. 선우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시간이고 앉아 있으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다.

주로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내용이 담긴 동화집이었다. 딱히 태교를 생각해서 고른 아니고, 파스텔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물론 내용도 좋았고.

그렇게 서점 군데를 돌아다니고 나니 금세 늦은 오후가 되어 버렸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 선우의 손에는 제법 묵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마트도 가야 하는데…….

선우는 빙의 전에도 다른 별로 욕심내지 않았지만 유독 책에 한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예전부터 선우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좋아했다.

특히 학생 때는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물론 더운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겨울에는 따듯한 곳으로 가려고 그런 것도 있었지만, 책을 돈이 없어서 1권이라도 많이 읽으려고 한다는 이유가 컸다. 그래서 문을 닫을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나올 때도 많았다.

“마트도 가야 하는데 너무 많이 샀나?

선우는 손목에 쇼핑백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는 돈도 있으니 사고 싶을 조금씩 두면 미련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마트를 수도 없고.

선우는 묵직한 쇼핑백을 손목에 끼고 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에 시내를 나오니 구경할 거리는 많아서 좋았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머리 위로 발갛게 노을이 졌다. 선우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주가 정말 좋은 서울과 달리 공기가 맑아서 하늘의 색감도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제주에 있는 것도 모르고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씩씩거리며 화를 강진욱을 생각하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여기에서는 쉽게 없는 대형 마트가 보였다.

마트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저녁 시간이 가까우니 아마 다들 먹을거리를 사려고 같았다.

선우는 카트에다가 쇼핑백을 넣고 느릿느릿 마트 안을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입덧이 심해 있는 것이 한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쇼핑을 하는 즐거웠다.

요즘 한창 맛을 들인 복숭아와 천도복숭아를 넣고, 아오리 사과도 넣고, 고민하다가 옥수수도 담았다.

감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넣어 보고, 식빵도 집어넣고 나니 카트가 어느새 정도 찼다.

“이 정도면 며칠은 먹을 있겠는데.

선우는 만족한 얼굴로 카트 안을 들여다보고 이번에는 음료수 코너로 갔다. 아까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셨는데도 입덧이 없는 것을 보니 괜찮을 같아서 과일 주스 종류를 생각에서였다. 탄산이 없는 복숭아 음료를 하나 집어서 카트에다가 넣었다.

“생수도 필요할 같지?

생수는 어디에 있더라……. 선우는 냉장 진열대를 살펴봤다. 하지만 각종 음료수나 유제품은 눈에 보여도 정작 물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나 보다 생각한 선우가 몸을 돌렸다.

“어? 최선우?

그때, 불쑥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며 선우를 불렀다.

              

#35

“어…….

선우 앞에 있는 다름 아닌 열탱이였다.

“야, 네가 여기 웬일이냐? 놀러 왔어?

열탱이가 놀란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놀란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얘가 여기서 나오지? 선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열탱이를 쳐다봤다.

“그러는 ?

선우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열탱이에게 되물었다. 다행히 열탱이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대답했다.

“나? 직장 동료들이랑 여행 왔지.

동료? 그제야 선우는 열탱이 뒤에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2명이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선우도 아는 얼굴이었다.

‘임해원?

상대를 확인한 선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열탱이를 만난 것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은데, 거기에 임해원이라니.

선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살짝 움직였다. 혹시 임해원의 페로몬을 맡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김태열, 누구야?

임해원 옆에 있던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우를 보면서 물었다.

“아, 얘는 최선우. 전무 비서실에서 일하고 있어.

“아아, 전무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인상만큼이나 큼지막한 목소리로 선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 안녕하세요.

손까지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선우는 시선만 주었다가 말았다. 남자는 민망하지도 않은지 웃으면서 손을 물리고 말했다.

“전무님과 일하시는구나. 저는 영업2팀에서 일하는 박성수라고 해요.

“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 선우는 이번에도 어색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열탱이라는 별명이 김태열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같다는 . 김태열과 단순히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인 것만이 아니라 아무래도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같다는 사실. 그리고 하필이면 메인수와도 친구인 듯하다는 것까지.

‘하필이면…….

원작에서도 그랬던가. 그런 생각은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도 지금 내가 빙의한 소설은 수정 전의 원작이었다. 소설의 내용이 바뀐 이후에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작가가 아닌 이상에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직장 동료든 친구든 알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으로 골머리 앓느니 난감한 만남을 이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행 잘하세요. 이만…….

“아? 급한 일이라도 있어? 그래, . 알았어. 다음에 연락해!

선우가 그만 헤어지자는 뜻을 보이자, 열탱이가 손을 흔들었다. 저쪽도 일행이 여럿이니 붙잡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선우는 열탱이와 같이 있는 임해원과 박성수라는 남자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카트를 끌었다. 뒷모습을 열탱이의 직장 동료들이 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야, 최선우면 그거 아냐? 비서실 낙하산.

선우가 사라지고 나자, 임해원 옆에 있던 박성수가 말했다.

“어. 맞아.

김태열이 불성실하게 대답했다.

“너랑 아는 사이였어? 진작 알려 주지.

“알았으면?

김태열이 째려보면서 묻자 박성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냥. 서로 말도 섞어 보고 그러는 거지. 누구 백으로 들어온 건지 궁금하잖아. 아…… 미안. 친구인데 이런 말은 아닌가.

김태열은 은근슬쩍 최선우를 돌려 까는 박성수를 다시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자. 애들 기다리겠어.

그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임해원이 상황을 정리했다. 박성수가 먼저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김태열은 그런 사람을 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나 잠깐만! 쟤랑 얘기가 있었는데 잊고 있었어. 둘이서 마저 보고 있어.

“어이, 김태열!

박성수가 짜증스럽게 김태열을 불렀지만, 그는 이미 몸을 돌려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뒤늦게 생각난 있었다.

김태열은 높다란 진열대와 진열대 사이를 휙휙 지나며 선우를 찾았다. 잠깐 사이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계산대까지 가고서야 계산할 물건을 올리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야, 최선우!

자신의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열탱이, 김태열이 손을 번쩍 들어서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우는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행들은 어쩌고?

선우는 계산대 앞으로 오는 김태열의 뒤쪽을 살피며 질문했다.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김태열이 동료들을 두고 혼자만 나타난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깐 빼고 보라고 했어. 그보다, 핸드폰 어떻게 거야?

“아…….

선우는 난처하게 입을 벌렸다.

“핸드폰 바꿨어.

“그럼 나한테 번호를 알려 줬어야지!

으음……. 선우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할 없었다. 애초에 서브수와 아는 사람들을 정리하려고 핸드폰을 바꾼 것이었다. 그러니 김태열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번호 뭐야. 여기다 찍어.

계속 머뭇거리는 선우가 답답했는지 김태열이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며 재촉했다. 선우는 어쩔 없이 번호를 김태열의 핸드폰에 남겼다.

우우웅.

가방에 넣어 핸드폰이 진동했다. 선우는 곧장 액정을 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11자리가 있었다.

“내 번호 다시 저장해 . 근데 누구랑 여행 왔어? 전무?

설마 진짜 전무는 아니지? 김태열이 그런 질문이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혼자 왔어.

“혼자? 휴가 냈어? 그럼 나한테 말을 하지. 직장 동료들끼리 여행 같이 껴서 오면 좋았잖아. 아니면 나랑 둘이 오든가.

김태열이 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김태열 동료들과 같이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그와 둘이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손님, 계산이요.

그때, 계산원이 선우를 불렀다.

“아, . 나중에 보자.

좋은 핑계가 생긴 선우가 김태열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김태열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지만, 순순히 물러섰다.

“그래. , 연락할 테니까 전화받아!

“어, 알았어.

선우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내저었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가방에 들어가지 않을 같아서 종량제 봉투를 따로 받았다.

손에는 책이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장을 물건들이 담긴 봉투를 들었더니 양손이 무거웠다. 선우는 끙끙거리며 마트를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택시 정류장이 어디에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따라 이렇게 알은척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선우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말을 걸어온 며칠 시장까지 차를 태워 주었던 남자 보조석에 있던 사진작가였다.

“여기서 뵙네요.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였다. 손에 아무것도 들린 없는 봐서는 마트에 장이라도 보러 같았다.

“네, 그러게요. 마트에 오셨나 봐요.

선우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돌아가려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짐이 많으시네요?

“네. 이것저것 사다가 보니까.

“어디 가세요?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 드릴게요.

선우가 괜찮다고 하기도 전에 남자가 책이 가득 들어 있는 쇼핑백을 뺏어서 들었다.

“어휴. 보기보다 무겁네요. 전부 책이라 그렇구나.

남자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소리에 정신을 차린 선우는 얼른 팔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아녀요. 이왕 만난 김에 도와드리는 거죠. 어디로 가세요?

“어, , 저…….

선우는 어쩔 몰라 하는 얼굴로 남자와 그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번갈아 봤다. 만나기는 했어도 이렇게 도움을 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의 손에 짐이 들려 있으니 어쩔 없었다.

“집에 가려던 중이었어요.

“아, 그럼 택시 타시려고요?

“네.

선우의 대답에 남자가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뗐다. 방향은 당연하게도 택시 정류장이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도움 덕분에 장을 봉투만 들고 뒤를 따르던 선우가 택시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럼 여행 잘하세요.

남자가 별일 아니라면서 손을 휘휘 젓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 . 잠시만요!

선우는 선뜻 자신을 도와주고는 마치 임무를 끝냈다는 듯이 사라지려는 남자를 붙들었다. 남자가 의아하게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는 그사이에 물건이 잔뜩 봉투를 뒤적여서 음료수 하나를 꺼냈다.

“이거 드세요.

“아니에요. 주셔도 되는데…….

“도움도 주셨는데, 정도는 드려야죠.

남자는 난감해하는 얼굴로 선우의 손에 들린 캔을 봤다. 이러지? 혹시 좋아하는 음료수인가?

선우가 감사의 선물로 내민 복숭아 음료였다. 하긴 단맛이 나니까 좋아하지 않을 있겠구나.

선우가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음료수 대신에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럼 마실게요.

망설이던 남자가 웃으면서 캔을 받아 들었다.

“그럼 여행 즐겁게 하세요.

그리고 인사를 하고는 선우가 음료를 들고 휘적휘적 사라졌다. 선우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뭐지. 도와주려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같네. 뭔가 이상한데…….

“타실 거예요?

지나가던 택시가 멈추어 서며 기사가 선우를 불렀다. 덕분에 선우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잠시 미심쩍게 생각했던 것을 털어 냈다.

“아, !

선우는 재빨리 대답하고 일어섰다. 트렁크에 물건을 싣고 뒷좌석에 앉자 곧장 차가 출발했다. 마트를 끼고 사거리에서 방향을 트는 동안 선우는 별생각 없이 밖을 쳐다보다가 “어? 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까 자신을 도와준 남자가 차에 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난번 봤던 것이었다.

“엄청 친절한 사람이네.

일행까지 있는데 자신을 발견하고, 도와주러 오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선우는 남자가 강진욱이 붙인 가드라는 것은 이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남자가 차에 타자마자 강진욱에게 임무를 마쳤다는 문자를 보낸 또한 몰랐다.

              

#36

[최선우를 택시 정류장까지 데려다줬습니다]

[최선우가 탑승하여 택시가 출발했습니다]

 

강진욱의 시선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에 잠깐 머물렀다. 밝아진 화면에는 최선우에게 붙여 가드에게 메시지가 순차적으로 쌓여 있었다.

강진욱은 굳이 액정을 터치해서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옷을 탈의해 파우더룸에 던져두고 그대로 욕실로 걸어갔다.

샤워 헤드 아래에 서서 찬물을 틀었다.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는 물을 맞으며 강진욱이 고개를 들었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수업이 끝나기 그치기를 바랐지만,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거세어졌다. 종례가 끝나고도 한참 창밖을 보던 강진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학교 본관의 현관에서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보통 이런 날씨에는 하굣길에 미리 차가 대기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강진태가 중간에 농간을 부린 같았다. 있어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사실은 교실에 앉아 창밖을 봤을 때부터 짐작하던 일이었다.

한숨을 쉬며 우악스럽게 내리치는 빗속으로 들어가려 순간.

〈아직 갔네?

앳된 목소리 하나가 뒤에서 들려왔다. 강진욱은 불쾌감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평소대로 표정을 풀었다.

마르고 키가 작은 소년이 상반신만 우산을 들고 있었다. 하얀 피부, 곱상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진 동급생.

〈최선우.

최선우는 평소와 달리 강진욱을 딱히 까칠하게 대하지도 않고, 무시하는 기색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산 없냐?

최선우의 시선이 비어 있는 강진욱의 양손으로 향했다. 강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최선우도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커다란 우산이 활짝 펼쳐졌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최선우는 관심 없다는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을 걸어갔다.

후드득. . .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강진욱은 잠시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우산을 쓰고 있어서인지 최선우는 평소보다 왜소해 보였다.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붙인 함께 우산을 쓰고 가면 좋을 텐데. 무겁고 커다란 우산도 내가 기꺼이 들어 주었을 텐데. 하지만 최선우에게 그런 기회는 없겠지.

저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이라도 걸어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초등학생 최선우의 눈빛에는 오로지 경멸과 혐오뿐이었으니까.

그런 최선우가 변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아마 저도 이제 유치한 짓은 그만둬야 때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내내 최선우는 아예 강진욱을 없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외면했다. 하지만 그게 강진욱의 기분을 바닥으로 가라앉게 했다.

차라리 예전처럼 저를 멸시 가득한 눈으로 보며 괴롭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어둡게 최선우를 바라보던 강진욱의 눈이 조금 커졌다. 최선우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강진욱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리 .

마치 개라도 부르는 같은 목소리. 하지만 강진욱은 망설이지 않고 최선우에게로 달려갔다.

〈으으…….

우산으로 들어간 강진욱과 최선우의 어깨가 맞닿았다. 차고 축축한 느낌에 최선우가 질색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차갑잖아!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도 최선우는 강진욱에게 꺼지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강진욱과 조금 거리를 벌리고 걸어갈 뿐이었다.

. 툭툭. 툭툭툭.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강진욱은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 같다고 생각했다.

우산 손잡이를 사이에 두고 최선우가 있었다. 감각이 온통 최선우에게만 집중돼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조차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최선우의 옅은 체향만 후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강진욱은 강렬한 식욕과도 비슷한 욕구를 느꼈다. 가지런하고 반듯한 목덜미에 코를 박고 최선우의 체향을 맡고 싶었다. 이로 깨물고 혀로 핥으며 피부를 맛보고 싶었다.

최선우는 베타였다. 앞으로 성인이 때까지 발현할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알파를 유혹할 있는 페로몬을 있는 오메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강진욱은 최선우를 원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제가 최선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네가 웬일이야. 나한테 우산을 씌워 주고.

강진욱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 질문을 내뱉었다. 하지만 온통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투가 평소보다 낮고 거칠게 나왔다.

최선우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강진욱을 노려보았다.

〈뭐야. 시비야? 기껏 무시 하고 씌워 줬더니.

〈그러니까. 내내 없는 사람 취급 하더니 웬일이냐고.

〈하, 강진욱. 이젠 잘해 줘도 시비네. , 전에처럼 밀어 버리게?

말을 끝으로 최선우가 걸음을 멈추고 이제는 아예 강진욱을 향해 몸을 돌려 버렸다. 바짝 올라간 눈꼬리가 오늘따라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걸 인식함과 동시에 억눌러 왔던 욕구가 또다시 울컥 밀려 올라왔다.

〈내가, 언제?

애써 내면의 욕망을 참으며 질문했다. 최선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라? 기억 ?>

그에 강진욱은 머릿속을 뒤져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기억나는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 계단참에서 넘어질 뻔했던 최선우를 붙들어 주었던 불쑥 생각났다.

〈예전에 계단에서의 말하는 거야? 그건 이유를 말했잖아. 네가 떨어질까 잡아 거라고. 그러다 나도 균형을 잡아서 같이 넘어진 거였어.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밀치려던 최선우가 계단에서 삐끗해 굴러떨어지려는 강진욱이 도와준 것이었다.

어차피 그때 최선우에게 강진욱은 괴롭힘의 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맞네. 너도 나랑 같이 넘어졌었지. 근데 그거 분명 네가 거잖아!

〈아니라니까. 그냥 네가 위험하니까 잡아 주려다 실수한 것뿐이야.

최선우가 강진욱을 찌릿 노려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매가 더욱 갸름하게 변했다. 그걸 강진욱의 눈빛도 변했다.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갈증이 아니었다. 그보다 질척하고 끈적한 무언가를 갈구하는 욕망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정말 사고를 같았다. 머리도, 몸도 식혀야 했다.

〈우산 씌워 줘서 고마웠다. 먼저 간다.

강진욱은 그렇게 말을 뱉고 그대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속으로 달려 나갔다. 아까는 기분 나쁘게 느껴졌던 비가 지금은 그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야! 강진욱!

뒤에서 최선우가 바락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때마침 교문 앞에 익숙한 차가 서는 보였다. 집에서 보내온 차량이었다.

강진태 때문에 아예 알았더니, 그냥 늦어진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강진욱에겐 도망갈 곳이 생겼다는 중요했다.

강진욱은 냉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밖으로 최선우가 보였다.

어지간히 황당했는지 최선우가 우산마저 삐뚜름했다. 모습에서조차 쉬이 눈을 없어서, 강진욱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꾹꾹 눌러 담아 감추었던 감정을 최선우에게 말해 버리겠다고.

쏴아아.

차가운 물줄기를 맞던 강진욱이 그대로 눈을 떴다. 뒤로 물러서며 물을 잠그고 왼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강진욱은 물기를 대충 닦아 내고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그사이에 최선우에게 붙여 가드에게 2개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하나는 최선우가 택시에 내렸다는 내용, 다른 하나는 집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는 대문을 넘어서는 최선우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손에는 큼지막한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묵직한 봉투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련하기는.

팔도 가늘고 힘도 없어서 비실거리는 주제에 저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는지. 우산도 저랑 어울리지도 않게 크고 무거운 들고 다니더니.

저렇게 짐이 많다는 진작 알았으면 아까처럼 가드를 시켜서 들어 주게 할걸.

그렇게 생각하던 강진욱이 혀를 찼다. 마트 앞에서야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도와줄 있었겠지만, 동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는 주택가. 그런 곳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도와준다는 말이 됐다.

더더군다나 길을 가다 한번 만났던 가드가 마트 앞에 다시 나타나서 물건을 들어 준다는 그런 우연은 번은 써먹을 있지만, 이상은 위험했다.

물론 동네 사람 아무나에게 연락할 수는 있었다. 이미 강진욱은 중개인을 포함해 동네 사람 몇몇을 매수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알았으면 미리 그들 하나에게 연락을 둬서 같이 짐을 들고 가라고 것을.

강진욱은 눈을 찌푸리며 아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최선우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서 액정을 쓱쓱 올렸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2개를 들고 낑낑거리고 있는 최선우였다.

사진만 보고 가드에게 짐을 들어 주라고 지시를 두었다. 후로는 일을 처리하느라 확인을 미루어 두었던 탓에 앞에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사진을 올려다보던 강진욱의 손이 멈췄다. 계산대에 최선우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었다. 강진욱은 최선우와 말하는 남자를 금세 기억해 냈다. 이틀 지하 주차장에서 있었다.

그때도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최선우의 친구라던 놈이군.

지난번 최선우의 오피스텔에서 봤던 남자가 사진 속에 있었다.

              

#37

최선우와 대화하던 상대가 누군지 떠올린 강진욱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 , 전무님.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는 비서였다.

“최선우가 마트에서 만난 남자 누구인지 알아봐. 우리 회사에 다니는 같은데.

- 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강진욱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물기를 마저 털고 가운을 걸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셔츠와 편한 바지를 찾은 강진욱이 가운을 벗어 내렸다. 꾸준한 운동과 관리로 만들진 몸이 순식간에 드러났다.

군더더기 없이 짜인 근육은 둔중한 느낌 없이 단단하고 탄력적인 매력만 내보였다. 강진욱이 상의까지 걸쳐 입었을 , 핸드폰의 기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야.

강진욱의 질문에 비서가 바로 보고했다.

- 김태열이라고 합니다. 영업1팀에 근무하고 있으며, 최선우와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동창?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친한 척했던가.

친한 굴던 김태열을 생각하자 불쾌감이 들었다.

- . 3 내내 같은 반이었고, 대학교도 같은 곳을 나왔습니다. 과는 달랐지만, 자주 만났던 같습니다. 태성건설에는 김태열이 먼저 입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진욱의 눈썹이 들썩였다. 최선우와 강진욱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같은 곳을 나왔다. 하지만 고등학교부터는 달라졌다. 강진욱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사귀게 것이 김태열이라는 인물이었던 같았다. 사실 이전에 봤을 때는 그다지 관심 있게 상대가 아니었기에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리고 최선우와 동거를 했던 같습니다.

“동거?

- , 태성건설에 입사하기 전까지.

강진욱의 뇌리에 최선우와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최선우와 대화하려고 때면 사사건건 끼어들던 김태열.

그래, 그냥 단순한 친구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자 평가가 바뀌었다.

물론 강진욱은 자신의 그런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마…… 최선우가 제주도를 것도 김태열 때문에?

번뜩 떠올린 생각에 강진욱의 눈이 매섭게 번쩍거렸다. 제주를 내려가고 나서 3 동안 최선우는 해수욕장 인근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근처 해변을 걷거나 동네를 산책하거나 그도 아니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작은 봉우리만 살살 다녀왔을 뿐이었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달리 어딘가를 구경하러 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최선우가 갑자기 시내를 갔다. 그리고 종일 장사는 되는지조차 모를 의심스러운 영세한 서점 군데를 떠돌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어 찾아간 것이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였고, 그곳에 하필 김태열이 나타난 것이다.

“기다렸던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불쾌감이 치밀었다.

- ?

강진욱이 혼잣말한 것을 들은 비서가 의아하다는 물었다.

“그래서?

강진욱은 대답 대신 까칠하게 다음 얘기를 보라며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최선우를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일주일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장 제주도로 날아가서는 집을 사버렸다. 그런데 후에 3 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김태열을 만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둘의 행적이 너무도 수상쩍었다.

물론 여기에는 오류가 하나 있었다. 최선우는 혼자 제주에 갔지만, 김태열은 회사 동료들과 함께였다는 .

강진욱은 거기까지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최선우와 김태열이 미리 입을 맞춰 두고 움직였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비서의 말에 강진욱의 생각이 덜컥 멈췄다.

- , . 하지만 최근에는 따로 연락한 적은 없는 같습니다.

“연락한 없다고?

- . 최선우 통화 기록에 김태열의 번호가 없습니다. 메신저 앱을 통해서는 했을 있겠지만, 일단 문자나 통화는 하지 않은 같습니다.

최선우가 김태열과 몰래 연락해서 제주도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위로 올라갔던 강진욱의 눈썹이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도 않은 건가?

- 거기까지는 확인해 없지만, 일단 별도로 연락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선우는 사직서를 내던지고 서울 작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바꾸어 버렸다. 그때 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고 별달리 연락하지 않았다면, 둘이 서로 제주도에 왔다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김태열 형질은?

- , 열성 알파입니다. 발현은 16살에 했다고 합니다.

김태열의 형질이 열성 알파라는 말에 다시금 강진욱의 눈썹이 들썩였다. 최선우의 곁에 알파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최선우가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형질이 아니라고는 해도.

강진욱은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녁 사진]

최선우에게서 것이었다. 오늘도 역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 봐도 귀찮아서 대충 찍은 티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거슬리는 것은 단백질이 한참 부족해 보이는 식단이라는 사실이었다.

강진욱은 사진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키패드를 두드리는 손길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맛있게 먹어]

하지만 정작 내용은 그것뿐이었다. 며칠 전에 최선우에게서 잔소리 그만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는 강진욱은 내내 핀잔을 두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최선우가 토라져서 이마저도 보내지 않으면 되니까 어쩔 없었다.

* * *

그렇게 강진욱이 귀찮은 배려를 하게 만드는 선우는 메시지를 대충 읽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울린 알림에 도로 액정을 봤다. 당연히 강진욱인 알았는데, 아니었다.

[최선우! 어디에서 묵고 있어?]

선우는 저장이 번호로 발신된 메시지를 보며 미간 사이를 좁혔다. 김태열이 보내온 메시지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건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래도 서브수의 친구라는 생각에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곧장 김태열에게서 답장이 왔다.

[? 너도 여기 근처였어? 호텔? 리조트? 펜션? 아니면 게스트하우스에 있냐?]

실제로 만난 고작 번뿐인데 텍스트에서도 촐싹거리는 말투가 그대로 묻어났다.

[아니. 집이야]

선우가 답을 보내자마자 바로 김태열에게도 메시지가 돌아왔다.

[? 민박이야? , 궁상맞게 그런 데서 묵고 있어. 돈도 많은 애가 쓰고 살아라.]

돈이 많건 적건. 그걸 어디에 어떻게 쓰건. 그건 제가 알아서 일이었다. 선우는 민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주고 자신의 집에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굳이 그런 말은 필요가 없었다.

[남이야.]

선우는 성의 없게 글자를 찍어 보냈다.

[어허! 속상하게 이러실까! , 혼자 내려온 거지?]

김태열의 대꾸에 선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리로 올래?]

그러자 기다렸다는 돌아온 김태열의 답변.

[가긴 어딜 . 거기에 누가 있는 알고]

선우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거절의 뜻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김태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까 마트에서 만났잖아. 너랑 나이대 비슷한 직장 동료들이야. 어차피 같은 회사 식구들이고 하니까 같이 놀자. 혼자서 하냐. 궁상맞게]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궁상맞다는 소리를 번이나 들은 선우가 미간을 좁혔다. 제주도에 내려와서 내내 여유롭고 평화로운 하루를 지내는 사람에게 궁상이라니.

[됐어. 너나 같이 동료들이랑 놀아]

선우는 까칠하게 키패드를 눌러 메시지를 전송했다. 같은 회사였다고는 해도 어차피 자신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선우는 아까 우연히 만났던 임해원을 떠올렸다. 그쪽이야 자신을 모르니까 관심이 없었겠지만, 이쪽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원작과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가 흘러가서 골치가 아픈 와중에 메인수랑 마주치다니.

뭔가 일이 일어날 같지 않은가. 원래 소설에선 주인공들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그만한 사건 사고가 벌어지기 마련.

다년간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보아 경험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그랬다.

선우는 부디 그들과의 사건에 자신이랑 엮인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려면 최대한 가까이 있지 않는 좋았다.

“잠깐……. 이러다가 강진욱까지 제주도로 날아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선우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처럼 몸에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얌전히 집에서 지내고, 산책이나 고작 하는 것이니만큼 그다지 엮일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 최선우!

선우는 저를 발견하자마자 반갑다는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김태열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소화를 시킬 바닷가 산책로를 걷던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보면 동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나왔다.

그곳에 올라가면 트인 바다 전경과 시원한 바람을 맞을 있어서 선우가 가장 선호하는 산책 코스기도 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어제 우연히 들렀다가 맛을 들린 복숭아 아이스티도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택가를 벗어나 해변을 걸은 얼마 되지 않아서 반대쪽에서 오는 김태열과 마주치게 것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선우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고 여전히 손을 내저으며 다가오는 김태열을 봤다. 옆에는 더더욱 반갑지 않은 존재가 있었다.

임해원이었다.

              

#38

물론 김태열과 임해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떨어진 곳에 마트에서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그들은 김태열이 알은척하자 궁금해하는 표정을 했지만, 선우를 지나쳐 갔다. 김태열과 임해원은 일행과 약간 거리를 뒤를 따르고 있었다.

김태열과 함께 선우와 가까워진 임해원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선우도 외면할 없어서 목만 까닥하여 마주 인사했다.

“야, 메시지 씹어?

김태열이 선우의 팔을 치면서 말했다. 씹기는. 주고받은 메시지가 개인데. 선우는 친한 척하면서 저를 툭툭 치는 김태열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너 나랑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 ? 봐라, 그래 봐야 이렇게 마주치는 .

“그러게. 이럴 알았으면 이쪽으로 오는 건데.

선우가 까칠하게 대답하자 김태열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러더니 옆에 임해원을 돌아봤다.

“나 잠깐 얘랑 얘기 할게.

“응, 그럼 먼저 갈게.

임해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선우에게 눈인사를 후에 먼저 사라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일행들이 임해원을 보고는 무어라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그들 어제 마트에서 잠깐 만났던 영업2 누구라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보였다. 눈이 마주칠 같아서 선우는 김태열에게로 시선을 이동했다.

“쟤 예쁘지? 임해원이라고 해외사업부에 근무하는 오메가야.

김태열도 일행을 보면서 말했다.

“우성 오메가라서 그런지 페로몬도 향긋해. 봄꽃처럼 약간 청초하고 달콤한 향이 나거든. , 느껴지나?

이건 지금 자신이 페로몬을 느끼는 비꼬려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임해원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 동료들 중엔 오메가가 쟤랑 총무팀에 하나랑 해서 둘인데. 아무래도 우성이 다르긴 다른 같아. 총무팀 애도 꽃향기가 나기는 하는데 약간 저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거든.

남의 페로몬을 두고 저급이라니. 다른 모르겠지만 남을 함부로 평가하는 김태열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르겠네. 너도 알다시피 페로몬을 모르니까. 근데 김태열.

“어?

“그런 얘기를 굳이 나한테 필요는 없을 같은데. 거면 이만 가고. 관심 없으니까.

선우가 불쾌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자 김태열이 얼른 손으로 막았다. 그러면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에이,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그냥 하는 얘기잖아? 그보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냐?

선우는 눈썹을 꿈틀했다. 김태열의 웃음이 기분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난을 치는 같은데 그조차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

“왜긴.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같이 놀자는 거지. 어차피 혼자 왔다면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김태열이 먼저 선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자. 마침 점심 먹으러 가려고 했거든. 맛있는 횟집으로 거니까 너도 같이 .

“아, 됐어.

선우가 김태열에게 붙잡힌 손목을 탈탈 털며 말했다.

“되기는. 인마, 먹어서 빼빼 말랐잖아. 날도 더운데 챙겨 먹어야지.

선우가 거듭 거절해도 김태열은 막무가내로 끌어가려고 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렇게 말들을 듣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만만한 건가. 아무래도 강하게 나가야 같았다.

“김태열, 됐다고.

선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제야 김태열도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선우를 돌아봤다. 그리고 선우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알았는지 입바람을 불면서 투덜거렸다.

“네 생각 해서 가자는 건데 이렇게 차갑게 거절해.

“나 먹어.

정확히는 먹는다, 임신부라서. 생식을 먹으면 된다는 최근 서핑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어? 좋아하지 않았어?

“이젠 별로야.

선우는 잡혀 있던 팔을 빼내려고 다시 휙휙 흔들었다. 손은 손쉽게 떨어져 나갔지만, 모습은 안타깝게도 멀찍이 떨어져서 사진을 찍는 가드의 카메라에는 찍히지 않았다.

바로 김태열이 선우의 손목을 잡고 마구잡이로 끌어당기는 모습만 찍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진은 1분도 되지 않아 곧바로 강진욱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 * *

 

“이게 뭐야?

비서의 보고를 받으며 무심하게 액정을 보던 강진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탓에 비서만 움찔하고 강진욱의 눈치를 봤다.

“그…… 강진태 부사장이 최근 만난 재계 인물 리스트입니다. 아마 연말 정기 주총 때를 노려서 미리 만나려는 같은데…….

강진욱의 앞에는 비서가 보고하려고 서류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건 요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강진태의 행적을 담은 것들이었고, 비서가 강진욱에게 보여 주는 중이었다. 때문에 비서는 강진욱의 짜증 섞인 물음이 자신을 향하는 알았다.

하지만 비서의 생각과 다르게 정작 보고를 받아야 강진욱은 방금 제주도에서 날아온 사진만 찢어발길 것처럼 노려보는 중이었다.

“김태열과 최선우, 단순히 친구 사이인 맞아?

“예?

강진욱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비서는 즉각 액정을 확인했다. 화면 속에는 최선우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가는 김태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 이건.

“오늘 일정 전부 비워.

“네?

비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강진욱을 바라본 그때, 강진욱은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 두었던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장 제주도로 날아갈 같은 분위기였다.

“전무님! 4시에 이사 회의가 있습니다. 그건 미룰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이야 괜찮아도 이사 회의는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강진욱이라도 미뤘다가는 큰일을 치르게 된다.

깐깐하고 고집으로 똘똘 뭉친 나이 이사들이 당장 회장에게 강진욱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연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연말에 있을 주주총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다.

“주총이 당장 열리는 것도 아니잖아. 날짜 미뤄.

그걸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면 이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니까요!

비서가 얼굴로 그런 말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강진욱은 집무실을 빠져나가느라 보지 못했다.

“곽 비서. 아래에 대기시켜.

강진욱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비서에게 명령했다. 비서는 많은 얼굴을 했지만, 자신이 막아설 없다는 알아차려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대로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강진욱이 지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운전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와서 섰다.

강진욱은 비서나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갑게 명령했다.

“공항으로.

운전기사가 잠시 당황해서 비서를 봤다. 아침에 전무의 일정을 체크했을 지방이나 해외 일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전기사와 비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비서가 씁쓸해하는 눈으로 말했다. 공항으로 갑시다.

* * *

강진욱을 태운 차가 김포 공항을 향해 달려갈 , 선우는 김태열에게 붙들린 카페까지 끌려와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지 않겠다고 했더니 김태열이 그러면 커피라도 마셔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너 휴가야? 그만둔 거야?

김태열이 데려온 카페는 선우가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음에 들어 했던 그곳이었다. 당연히 선우의 앞에는 달콤하고 시원한 복숭아 아이스티가 놓여 있었다.

“그만뒀어.

선우가 아이스티를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김태열이 놀란 동그래진 눈을 했다.

“헉? 그래? 어쩐지……. 요즘 보이더라니! ! 그럼 나한테 하지. 그래서 핸드폰도 바꿨어?

“응. , 겸사겸사.

“역시! 그런 거였구만! 그럼 전무랑도 끝난 거야?

뭐가 이렇게 궁금한 많은지 김태열이 꼬치꼬치 물어 왔다. 강진욱과의 사이를 알고 있는 상대라 그런지 피곤했다.

선우는 잠깐 답을 미루고 김태열을 바라봤다. 서로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훑어봤을 때도 그렇고, 태도나 말투도 그렇고 확실히 서브수와 제법 친한 사이 같았다.

그렇다 보니 김태열은 자신이 전에 말을 잊어버린 같았다.

“김태열.

“어?

“전에도 말했지만. 기억 상실이야.

일단 선우는 김태열에게 너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으로 기억 상실에 대해 상기시켜 줬다.

“아. 그랬지, . 근데?

김태열이 그러느냐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넉살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긴 그랬으니까 까칠하고 무시무시한 강진욱 앞에서도 툭툭 끼어들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친한 접근하는 사양이었다.

“김태열 씨가 자꾸 친한 척하고 그러는 솔직히 부담됩니다.

그래서 선우는 일부러 말을 높였다. 그러자 김태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약간 놀란 같았다.

“앞으로는 자제해 주세요.

선우는 김태열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하고 싶은 말을 끝냈다.

“이야……. 최선우, 기억을 잃었다더니 성격도 많이 변한 같네.

약간 장난기가 섞인 태도를 보이던 김태열이 그제야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하긴 친한 친구 사이 같은데 선을 그으니 그럴 있겠지. 하지만 선우는 막무가내로 구는 김태열에게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어쩔 없지.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

“그래, . 근데 전무랑은 어떻게 거야.

일부러 선까지 긋고 조심해 달라고 했는데도 잠깐 주춤한 알았던 김태열이 강진욱과의 일을 입에 올렸다.

아무래도 천성이 넉살로 무장한 같았다. 이런 상대에게는 날을 세워 봐야 소용없었다.

“어떻게 되긴. 끝났지.

선우는 결국 김태열이 원하는 대답을 순순히 꺼내 놓았다. 동시에 김태열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39

“끝났어? 전무랑 완전히 헤어진 거야? 그쪽 집에서도 그렇게 하겠대?

김태열의 촐싹대는 질문에 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집안은 아직 몰라. 하지만 알게 되겠지.

“허……. 순순히 그렇게 하겠대? 그럴 없을 텐데.

“그럴 없다니?

오히려 그쪽 집에서는 자신과 강진욱이 깨지는 바라야 하는 아닌가.

선우는 남들에게 베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태성그룹 같은 굴지의 재벌가에서 아이도 낳는 베타를 강진욱의 진정한 결혼 상대자로 생각할 턱이 없었다. 강진욱은 태성그룹을 이끌 후계자가 아닌가.

‘원작에서도 회장은 집안이 빈약한 메인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

그래서 강진욱과의 만남을 대놓고 방해했고, 서브수가 메인수를 납치하는 일을 뒤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베타인 최선우도 같이 치워 버릴 생각을 했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불쑥 선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그게…… 제주도였던 같은데.

회장이 메인수의 존재를 알게 것이 제주도에서였다. 그때 무슨 사건이 발생했던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선우는 미간을 좁히며 수정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려 애썼다.

“제주도 ? 전무랑 제주도에서 있었어?

“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 앉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태열을 발견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김태열과 함께 있었다는 잊어버리다니.

“아니, 그보다 그럴 없다는 뭐야.

선우의 질문에 김태열이 “아아. 맞다. 기억 상실이지. 하고 혼자 납득하더니 입을 열었다.

“태성건설 본사가 사용하는 부지, 그거 거잖아. 그래서 부지 소유권을 너한테서 받아 내려고 결혼 약속 어쩌고 같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이것도 기억 나겠구나?

이건…… 무슨 소리야. 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성건설 본사가 세워진 땅의 주인이 나라고?

“그래.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너희 부모님께 물려주셨던 네가 유산으로 받은 거지.

선우는 얼음으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컵을 붙들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차가운 손이 식었지만,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대리인에게 듣기론 서브수가 제법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재산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했던 것이라 정확하게 뭐가 얼마나 어떻게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엮여 있을 줄이야. 정도면…… 진짜 단순히 악역 서브수가 아닌데?

“나 엄청 부자구나……?

선우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리고 그냥 부자도 아니었다.

무려 국내에서 번째로 꼽히는 그룹, 태성의 주요 사업인 건설 본사 빌딩이 지어진 땅의 소유주였다.

원래 건물주가 가장 최고라고 하는데, 건물이 지어진 땅의 주인이면 좋은 아닌가?

“근데 이상하네. 태성그룹 정도 되는 재벌 집안에서 굳이 주인이 있는 땅에다가?

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그런 경우는 건물을 지을 사람이 사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아닌가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너도 몰랐잖아. 근데 전에 네가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가 태성그룹 선대 회장의 은인이었다니까 그런 일로 엮인 아니었을까?

“아…….

김태열의 말이 맞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강진욱과 서브수가 엮인 아마도 집안을 하나로 묶어 은혜 때문인 같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강진욱과의 인연이 제법 깊게 고리를 맺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소설의 수정 시놉에서 서브와 강진욱은 동창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함께했었다고.

“잠깐, 그럼 내가 강진욱한테 갑이네?

그래? 선우의 물음에 김태열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뭔가 이상한 같기도 하다는 .

“그렇게…… 되겠지?

무엇보다 김태열은 선우가 그걸 저렇게 즐거워하면서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틀리지는 않기에 김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분명 평소랑 똑같은데 무언가 다른 같기도 하고.

최선우가 원래 저런 애였나? 17 이후로 내내 함께 지내 왔기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의 최선우는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같네.

예전에는 자기중심적이고 싸가지도 없는 데다 눈치도 없더니.

눈앞에 있는 최선우에겐 전혀 그런 모습이 없어서 신기하고 이상했다.

“흠…….

그랬단 말이지. 김태열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없는 선우는 머릿속으로 강진욱과의 관계를 다시 정리했다.

전에는 그냥 전무와 비서라는 상하 관계인 알았다. 거기에 서브수는 강진욱을 짝사랑했기에 감정적 관계에서도 을이었다.

그런데 을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은 퇴사했고, 강진욱을 사랑하지 않으며, 심지어 강진욱이 일하는 회사 건물의 주인이었다.

‘더는 강진욱한테 꿀릴 없단 말이지.

선우는 다시 한번 유리컵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기운마저 찌릿하게 느껴졌다.

그래, 역시 강진욱한테 질질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 김에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해 필요가 있을 같았다.

“그럼 이제 집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한창 생각하던 선우가 김태열의 말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전에 전무 때문에 쫓아냈잖아. 오해할 있으니까 나가라고. 그럼 이제 그쪽 해결됐으니까…….

“너랑 내가 같이 살았다고?

“어.

김태열이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같이 살았다기보다는 김태열이 반쯤 우겨서 집에 들어간 것이었다.

집에서 대학까지 멀다는 핑계로 선우에게 근처 집을 구하라고 꼬드긴 것도 김태열이었다.

그래 놓고는 은근슬쩍 자신의 짐을 풀었다. 당시 최선우는 부모를 잃은 얼마 되지 않아 위태로운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얘기는 , 최선우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까 김태열은 사실을 교묘하게 숨겼다.

선우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김태열의 표정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눈을 했다.

“너 내가 기억이 없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지?

이래 봬도 선우는 눈썰미가 좋고,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거기다 출판사에서 오래 일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난 덕분에 표정이나 눈빛, 약간의 행동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재주도 생겼다.

보니 김태열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전부 거짓은 아니어도 아마 진실보다는 거짓이 많을 것이다.

“어? , 아닌데?

생각지 못한 물음에 김태열이 말을 더듬었다. 아니긴. 봐도 그런 같은데. 선우가 팔짱을 끼고 김태열을 바라봤다. 김태열은 김태열대로 놀라서 선우의 눈치를 봤다.

예전의 최선우라면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어, 그런가? 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지금의 최선우는 만만치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아니라 사람이 바뀐 같네.

김태열이 투덜투덜 꺼낸 말에 선우가 움찔했다. 뒷걸음치다 잡는다더니. 물론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괜히 찔린 선우는 거의 남지도 않은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는 유리컵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아니, . 네가 괜찮다고 했던 거였지. 대학생 때부터 같이 살았잖아. 그런 좋은 집에서 살다가 혼자 지내려니까 얼마나 불편한지 아냐? 너도 전에 보고는 질색했잖아.

하긴 선우가 살던 오피스텔은 평수도 넓고 방도 3개나 되었다. 그러다가 고작 되는 원룸으로 가게 되었다면 불편하긴 했겠지.

하지만 그거야 김태열 사정이고 선우는 다시 그를 집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도 없어.

“뭐?

김태열이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그 팔아 버렸다고.

“헉! ?

“왜긴. 강진욱이랑 끝내느라고 그랬지.

정확하게는 강진욱을 피해서 서울을 벗어나 살려고 그런 것이지만. 굳이 그런 말까지는 김태열에게 필요는 없을 같았다.

지잉.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선우는 꺼내 보지 않아도 상대를 같았다.

어차피 핸드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담당의인 한수진을 제외하고 사람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눈앞에 있는 김태열도 추가되었지만.

그중 이런 타이밍에 연락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최선우. 점심은?]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를 보내온 강진욱이었다. 아직 12시도 됐는데 벌써 점심 타령이었다.

선우는 성의 없이 키패드를 두드렸다.

[먹을 사진 보낼 테니까 재촉하지 말죠?]

[ 먹을 건데?]

내가 먹든, 그렇게 궁금해하는데.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툭툭 손가락을 움직였다.

[글쎄요. 아직 생각해 없는데요?]

어차피 자신이 먹을 있는 거야 없었다. 그래도 제주에 와서는 가짓수가 늘어서 건강하고 영양가 있게 챙겨 먹을 있게 되었을 뿐이지.

바로 답장이 알았더니 강진욱은 조용했다. 근데 그새를 참고 김태열이 선우를 재촉했다.

“야, 집을 팔았냐니까?

선우는 메신저 앱을 가만 보다가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진 진동에 절로 선우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생각해 . 같이 먹게.]

              

#40

잠깐, 무슨 소리야? 같이 먹어? 선우는 재빨리 핸드폰을 낚아채 내용을 다시 한번 읽었다.

잘못 아니었다. 생각해 놓으라고. 메시지에는 같이 먹자는 글자가 분명 액정에 있었다.

덜컹.

선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 어디 ?

김태열이 당황해서 불렀지만,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린 선우는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한참 가는데도 강진욱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기어이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 멘트까지 들려왔다.

다시 걸어 보니 이번에는 아예 꺼져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하! 뭐야?

선우는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폭탄을 던져 놓고 정작 당사자는 잠수를 버린 같았다.

 

[같이 먹겠다는 무슨 소리예요?]

[이봐요. 강진욱 . 씹지 말고 대답 하죠?]

 

연달아 메시지를 날려도 강진욱은 선우가 보낸 것을 읽지 않았다.

“야, 최선우. 그래? 무슨 있어?

뒤늦게 선우를 따라온 김태열이 호기심과 약간의 걱정을 담은 표정으로 선우의 안색을 살폈다.

선우는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강진욱의 메시지를 보고 불쑥 생각이 있었다.

내내 찜찜했지만 설마 했던 그것을 확인해 봐야 같았다. 그래서 선우는 김태열을 이용하기로 했다.

“너 어디서 먹는다고?

“어?

“네 회사 동료들이랑 점심 먹는다면서. 어디서 먹냐고.

지금 선우의 머릿속에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을 한다는 걱정도 없었다. 강진욱의 제멋대로 행동에 짜증과 화가 동시에 밀려와 그럴 겨를이 없다는 정확했다.

“아, 아아! 그거? 앞에 횟집에서. ! 뭐야, 최선우. 같이 가려고? 그래. 가자! 여행 와서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냐? 그래?

김태열이 금세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선우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제게 바짝 끌어당겼다. 선우가 팔을 풀어 버리자 삐죽거린 김태열이 팔목을 잡아 왔다. 이번엔 선우도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김태열에게 끌려갔다.

식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해변 바로 앞에 3 건물이 전부 횟집이었다.

선우는 안으로 들어가기 주변을 둘러봤다. 해수욕장 도로는 전부 노상 주차가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차가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세워진 보였다. 그중에서 선우의 시선을 것은 멀찍이 떨어진 검은 차였다. 선우는 차를 유심히 바라봤다.

“들어가자.

김태열이 선우의 팔을 쳤다. 선우는 차를 다시 한번 보다가 걸음을 뗐다.

점심시간에 가까워서인지 식당 안은 벌써 손님들로 북적북적했다. 사람을 맞이하러 직원에게 김태열이 예약자의 이름을 댔다.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사람을 안내했다. 식당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큼지막한 개인실이 주르륵 놓여 있는데 직원은 그중에서 10 정도가 넉넉하게 앉을 있는 좌식 테이블이 놓인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직 예약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문은 이따가 일행들 오면 할게요.

김태열이 직원을 먼저 보내 놓고 선우를 가장 안쪽 자리에 앉혔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끝자리였다.

“뭐 먹고 싶은 있어? 골라 .

“됐어. 내가 그걸 골라. 일행들이 해야지.

선우는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같은 먹어서도 됐고. 단지 이곳에 것은 자신의 의심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선우의 시선이 식당 아래를 느리게 훑었다. 노상 주차된 차량 수는 비슷했다. 다만 아까 눈을 끌었던 차량은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선우는 해변을 봤다가 다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딱히 의심이 만한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골라 . 내가 데리고 왔는데 정도는 해야지.

김태열이 선우의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선우가 보는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도 진짜 오랜만이지?

선우는 그제야 창문에서 눈을 떼고 김태열을 봤다. 오랜만이라는 우리가 여기를 왔었다는 소리 같은데?

선우의 시선을 눈치챈 김태열이 “아, 맞다. 하더니 곧바로 이어 말했다.

“수학여행. 일본으로 간다고 했다가 갑자기 제주도로 바뀌어서 다들 엄청나게 싫어했었어. 근데 막상 오니까 바다도 예쁘고, 사실 어디든 공부 하고 놀기만 하면 좋았던 거지 .

김태열이 혼자 추억 팔이를 했다. 선우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도로 눈을 돌렸다. 서브수는 봤을지 몰라도 선우는 처음이었다.

중학생 수학여행지는 경주였고, 고등학생 때는 엄마가 한창 아플 때라 어디 엄두도 없었다.

선우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오의 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파스텔 색감의 물결이 확실히 예쁘기는 했다.

* * *

선우가 찰랑찰랑 물결치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을 , 강진욱은 비행기 안에서 점차 가까워져 오는 제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는 비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강진욱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모든 일정을 빼고, 공항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설마 진짜로 제주를 줄이야!

아직은 이사들이 사태를 모르니 조용하지만, 강진욱이 제주에 놀러 왔다는 사실을 알면 핸드폰을 불이 나도록 울려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만든 강진욱은 태연하게 창밖만 보고 있으니, 비서는 평소에도 좋지 못했던 위가 싸하게 아픈 기분이 들었다.

‘최선우가 위궤양이라고 했지. 그래, 일리 있는 말이야. 없을 수가 없지. 아무렴.

비서는 최선우의 병명에 깊이 공감했다. 강진욱을 년째 상대하고 있는 자신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최선우는 오죽했겠는가.

원흉이 지금 제주로 날아가고 있다는 최선우가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은 그것대로 걱정이었다. 요즘 최선우는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았다. 그리고 고무공을 자꾸 튀어 오르게 만드는 강진욱이었다.

‘부디 아무 없기를!

비서가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사이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덜컹 기체를 흔들며 활주로에 내려선 비행기는 한참 달린 끝에 멈추어 섰다.

강진욱이 벌떡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대기 중이던 스튜어디스가 안내하겠다며 친절하게 다가왔지만 무시했다. 당황한 스튜어디스를 뒤에 달고 강진욱이 성큼성큼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별도로 마련된 출구를 통과하는 강진욱을 따라 달리듯이 걸으며 비서는 미리 대기 중이던 제주 현지 운전기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강진욱은 그대로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차가 멈추어 섰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운전기사가 얼른 앞으로 달려 나와 깍듯이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강진욱은 굳은 얼굴로 그대로 차를 쳐다보더니 타지도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고 부팅이 끝나자마자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여러 개가 있었지만, 강진욱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최선우가 보낸 것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보내온 메시지를 강진욱의 입가에 삐죽 웃음이 솟았다. 최선우가 전무가 아닌 강진욱 씨라고 부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진욱은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핸드폰에서 최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을 생각해 놨어?

- 글쎄요. 그다지 생각나는 없어서요. 그보다 강진욱 , 같이 먹겠다는 무슨 소리예요? , 설마 화상 통화라도 하자는 아니죠?

강진욱은 이래 봬도 신문물과는 그다지 친분이 없었다. 성능 좋은 최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쓰는 기능이라고는 봐야 메시지와 전화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사실 키패드를 두드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메신저 앱으로 최선우가 연락을 종종 왔기에 그것만 간신히 쓰는 정도였다.

심지어 최선우의 사진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지만, 그걸 저장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화상 통화라는 생각이나 했을까.

“좋은데?

- 좋긴 뭐가 좋아.

최선우가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강진욱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요즘은 최선우와 이러고 있는 제법 재미있었다. 곁에 두고 있지는 않아도 자주 연락을 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자신을 대하는 것도 편해진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 것도 괜찮지만 지금은 아니야.

- 그렇겠죠. 하긴, 강진욱 씨한테 어려운 일이 있겠어요? 언제부터예요?

“뭐가?

- 나한테 감시 붙인 . 아니,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인가. 처음부터겠지.

강진욱은 공항 주차 단속 직원과 대화 중인 비서를 힐끗 보다가 최선우가 말을 다시금 생각했다.

“아아.

- 하…….

최선우가 다시 황당하다는 한숨을 흘렸다. 강진욱은 최선우가 무슨 말을 할지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비서가 난처해하는 얼굴로 강진욱에게 걸어왔다.

“전무님, 일단 이동해야 같습니다.

강진욱은 최선우가 말하기를 기다리면서 차에 올랐다. 그사이 비서는 최선우에게 붙여 가드에게 미리 받아 주소를 운전기사에게 전달했다.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횟집이었다.

강진욱도 내비게이션에 이름을 봤다. 생각이 없다는 것치고는 제법 금액대가 있는 곳이었다.

- , 강진욱.

최선우가 저를 부른 소리에 강진욱의 눈이 커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 너머 최선우가 마디 덧붙였다.

- 내가 쫓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심지어 반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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