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OHC Chapters 21-30

#21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해?

선우는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쏘아붙이는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강진욱은 어디 앉지도 않고 장승처럼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료실을 나온 후부터 내내 저러고 있었나 보다.

선우는 대답 대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래 봐야 고작 10. 오래 얘기했다고는 없는 시간이다.

“그냥 이것저것 챙겨 먹고, 체력 떨어지지 않게 꾸준히 움직이라고 하는 얘기요.

선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강진욱이 못마땅한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

“다른 거요?

뭐가 필요하냐는 눈으로 선우가 강진욱을 바라봤다. 물론 다른 있긴 하지.

“녹음은?

“했겠어요?

당연한 묻고 그래. 강진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썹을 씰룩였다.

선우는 그런 강진욱을 노려보고 옆으로 지나쳤다. 다행히 강진욱도 별말하지 않고 선우를 뒤따라왔다.

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선우는 한수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좋아요. 선우 , 그럼 이렇게 해요. 어차피 계속 속일 없을 거예요. 만약 알려진다면, 그땐 그냥 임신이었다고 밝히세요.

〈하지만……!

〈태아의 생물학적 다른 보호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면서요.

한수진은 그렇게 물으면서 역시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냐는 눈빛을 보냈다.

의사로서의 날카로운 관찰력인지 아니면 직감이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선우로서는 섣불리 대답할 없는 일이었다.

〈고민해 볼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우 . 만약 밝힐 생각이 없다면 최대한 빠르게 주변 정리를 하는 좋아요. 일단 검사를 봐야 알겠지만, 지금도 선우 씨의 호르몬 변화로 페로몬이 나오고 있을지 모르니까.

선우의 대답에 의사는 다시금 신중한 표정을 하고 충고했다.

“수술이나 약물 치료 같은 하라는 얘기는 없었어?

그때 불쑥 강진욱의 말이 끼어들었다. 선우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강진욱이 말을 떠올렸다.

“아, . 처방전이 나와서 원무과 들렀다가 약국에 거예요.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야간 수납 창구로 향했다. 수납 창구에 앉은 직원이 강진욱을 보고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처방전을 내밀었다. 무섭도록 잘생긴 남자가, 정말 무섭게 노려보고 있으니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반대로 강진욱을 등지고 선우는 태평한 얼굴로 처방전을 받았다. 강진욱이 혹여 어떤 약인지 따로 알아본다고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전부 영양제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진욱은 처방전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옆을 지나치는 선우의 뒤만 바짝 쫓았을 .

“어디 ?

병원으로 나온 선우가 잠시 더운 기운에 한숨을 쉬는 사이 강진욱이 옆에 서서 물었다.

“약 찾으러요.

선우는 이번에도 불퉁하게 짧은 대답을 내놓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앞에 나타난 손에 놀라 움찔 멈췄다.

“이리 .

. 선우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강진욱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처방전을 낚아채 버렸다.

“어?

그리고 어느새 나타나 계단 아래에 있는 비서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처방전을 던지듯 건넸다.

“받아 .

아니, 그걸 비서한테 ?

선우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상사의 명령을 들은 비서는 이미 성큼성큼 걸어서 병원 주차장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따라와.

선우가 따지며 물었지만, 강진욱은 대답 대신 눈짓을 보냈다.

어디 가자는 거야.

선우는 앞서 걸어가는 강진욱을 불퉁하게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강진욱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얼른 오라고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어차피 병원 입구라 버티고 있을 것도 아니고, 선우는 얌전히 강진욱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도착한 곳은 병원에 타고 왔던 앞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가 재빨리 내려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강진욱이 선우를 돌아보며 다시 눈짓했다. 먼저 타라고.

‘여기 거면 먼저 말을 하든가.

선우는 강진욱을 지나치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안은 내내 에어컨을 두었는지 시원했다. 그런데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 때문인지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강진욱은 팔짱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우도 굳이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어 뉴스를 성의 없이 훑었다. 그러다 끌리는 제목을 발견했다.

 

최고의 휴양지, 제주

 

제주라니. 거긴 빙의 선우가 휴가 가고 싶어 하던 최애 여행 장소였다. 물론 여러 사정상 군침만 삼키다가 갔지만.

선우는 홀린 듯이 뉴스를 클릭했다. 화면에 사진이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깨끗하고 새하얀 모래밭, 에메랄드빛으로 출렁이는 바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그림처럼 예쁜 호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제주의 풍경이 화면 가득 보였다.

“이야…….

선우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자, 옆에서 내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강진욱이 힐끗 그쪽을 봤다.

그리고 선우가 보고 있는 사진에 강진욱의 시선이 멈췄다.

“제주도?

놓고 사진을 보던 선우의 고개가 발딱 들렸다. 곧장 강진욱과 눈이 마주쳤다.

“가고 싶어?

“……네?

“당장은 힘들고, 다음 주쯤으로 잡아 볼게.

“뭘요?

“그거, 가려고 아냐?

“아…….

그제야 선우도 강진욱이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절로 시선이 핸드폰으로 내려갔다.

가고 싶어서 아니었다. 그냥 예뻐서 그런 거지. 근데 또다시 보니까 괜찮다면 여기에서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야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엄두도 냈지만, 지금은 얼마든 가능하지 않은가.

“네.

선우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그것도 좋겠다.

아예 비행기를 타고 멀리 제주도로 날아가 버리면 강진욱의 이해할 없는 관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선우가 힐끔 강진욱을 곁눈질했다. 강진욱은 그사이 무슨 생각에 빠진 시선을 다른 두고 있었다.

선우는 김에 아예 항공권도 알아볼까 하고 사이트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괜히 강진욱에게 관심이 있는 티를 필요는 없었다.

집에 가서 찾아보지 .

그렇게 생각하다가 보니 부동산 중개인에게 집을 비워 준다고 하고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생각났다.

‘일단 돌아가면 그것부터 처리해야겠다.

그때 비서가 선우의 봉투를 들고 보조석 문을 열었다.

“주세요.

비서는 옆으로 불쑥 나온 최선우의 팔을 보다가 그대로 시선을 강진욱에게 향했다. ‘어떻게 할까요? 묻는 눈빛에 강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비서가 봉투를 선우에게 전달했다. 약을 달라는데 그걸 강진욱한테 허가를 받아.

어이가 없는 얼굴로 비서의 옆통수를 쳐다본 선우는 입술을 삐쭉이고 봉투를 열었다. 1 치나 돼서 그런지 부피가 제법 되었다.

“전 집에서 내려 주세요.

봉투를 품에 안은 선우가 빠르게 달리는 밖을 보다가 말했다.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보던 강진욱이 선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

“제가 사는 집이요.

거기 말고 어디에 있어. 당연한 묻는 강진욱을 선우가 빤히 쳐다봤다.

강진욱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같았다.

“거긴 팔았다면서?

“아직 팔렸어요. 집에 가구랑 물건 정리도 됐고요.

강진욱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떠올린 선우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알아서 테니까 신경 .

“제가 거니까 두세요. 강진욱 씨야말로 일에 끼어들지 말고 신경 끄시고요.

선우가 마디를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자 강진욱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선우 역시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거냐는 도전적인 눈으로 강진욱을 바라봤다.

“집 앞에 내려 주세요.

한참의 눈싸움 끝에 선우가 말했다. 강진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번이나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결국 운전기사에게 선우를 오피스텔 앞에 내려 주라고 지시했다.

이틀 만에 돌아온 집으로 들어가던 선우가 거실 앞에서 멈칫했다.

분명 비어 있는데 뭐랄까…… 누군가가 다녀간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실을 둘러보던 선우는 소파에 쿠션이 제가 나갔을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나가기 전에는 중간에 2개를 나란히 겹쳐 놨는데, 지금은 그중 하나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것이다. 쿠션이 발이 달려서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고, 누군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단으로 침입한 거다.

“강진욱 짓이네.

선우가 단언하듯 말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진욱이 아니라면 누가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왔겠는가.

“아무리 광공이라지만 정도는 선을 넘은 아냐?

이제 상사도 아니겠다. 다음번에도 이러면 정강이를 주겠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다 멈칫했다.

“근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키패드는 멀쩡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선우가 “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비밀번호가 뭐로 되어 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강진욱 생일이었지…….

그걸 바꿀 생각을 했을까.

사실 그간에는 거기까지 신경도 쓰고 있었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선우는 누군가 그걸 알았다는 사실 자체에 부끄러워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강진욱이거나 혹은 그가 부리는 사람 하나에게 들켰다는 .

민망함에 볼을 긁적인 선우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편한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별로 것도 없는 같은데 피곤했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눈앞에 에메랄드로 반짝반짝 빛나던 바다가 생각났다.

“진짜 제주나 갈까…….

선우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핸드폰을 제주도 항공권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제주 가는 비행기 표는 엄청나게 많았다. 늦은 밤까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내일 당장 가자!

강진욱에게 안에 있는 물건을 처분한다고 했으니, 내일은 오지 않겠지. 전에 재빨리 도망가면 되지.

              

#22

선우는 결정을 내리고 인터넷 창을 닫았다. 그리고 이번엔 폐기물 업체를 검색했다. 가장 상단에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자 곧바로 통화가 연결되었다.

내일 이른 시간부터 가능하냐고 했더니 회사에서는 9 이후부터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 , 그러면 9시에 주세요. 시간 맞춰 주셔야 해요.

- 알겠습니다. 고객님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거지요?

“네. 확인 전화 따로 하고 오셔도 돼요. 곧장 올라오세요.

- ,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선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엔 지난번 찾아갔던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아이구, 고객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없어서 어쩌나 했어요. 매물 내놨더니 보러 오겠단 사람이 있거든요. 내일 괜찮을까요?

“네. 가능해요. 비밀번호 알려 드릴게요. 제가 없어도 되죠? 내일부터는 집에 없거든요.

어차피 귀중품은 전부 챙겨 가니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 주어도 괜찮을 같았다.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중개인의 흔쾌한 대답에 선우는 알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고민하던 끝에 제주도 매물을 검색해 보다가 마음에 드는 군데를 추렸다. 그리고 부동산 중개 사무소 연락처를 발견하고 내일 찾아가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항공권부터 집을 알아보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한 선우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 정도 거리면 강진욱도 쉽게 쫓아오겠지.'

아무렴.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선우의 의식이 까무룩 꺼졌다.

* * *

선우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간질간질하고, 무언가 기분 좋은 뭉클함이 느껴져서 한참 파도가 몰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지켜보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듯한 태양,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맑고 상쾌한 공기.

선우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너른 바다를 바라봤다.

그때 어디선가 짙고 푸른 숲의 향이 몰려왔다.

‘숲?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바다인데? 그보다 이거 어디서 맡아 같은데, 착각인가?

선우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아니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 나는 같았다. 동시에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그리고 선우는 침대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기겁해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저, , 저저,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이 제대로 나온다고 했던가. 지금 선우의 상태가 그랬다.

“뭘 그렇게 놀라.

정작 선우를 기겁하게 만든 강진욱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대체 여긴 어떻게…….

선우는 설마 자기가 다른 곳에서 잤나 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분명 어제 잠들었던 자신의 침실이 맞았다. 그러자 어젯밤 거실에서 보았던 낯선 흔적이 떠올랐다.

그래, 광공이라면 가능하겠지.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따위야 뭐가 어렵겠어. 심지어 비밀번호도 아는데.

“아……!

맞다. 비밀번호도 하필 그딴 식이었지!

“왜?

선우가 식겁한 표정을 짓자 강진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선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어제 생각이 났을 바꿔야 했는데, 미뤘을까!

“아뇨. 그냥 , 여긴 어떻게 오셨나 해서요.

선우는 슬쩍 강진욱의 얼굴을 봤다. 비밀번호가 뭔지 텐데도 별로 신경 쓰는 같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당장 현관 비밀번호부터 바꾸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일어나.

그때 강진욱이 불쑥 팔을 뻗었다.

“예?

봐도 잡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보였다. 선우는 멍하니 강진욱을 올려다봤다.

“밥 먹어야 아냐. 일어나 .

“어?

강진욱이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선우의 팔을 붙들어 일으켰다.

아주 사람을 잡아끄는 습관이네, 습관이야!

졸지에 침대 밖으로 나온 선우가 어이없이 강진욱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러다 뒤늦게 주변에 감도는 묘한 향기를 느꼈다.

‘향기?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도 맡은 향기였다.

‘집에 향수 없는데?

선우는 코를 찡긋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벌써 몸은 거실 밖으로 반쯤 나온 상태였다. 침실 안에도 거실에도 역시 향기가 만한 없었다.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하게 꾸며진 집이었지만, 집은 식물이나 소품 같은 전혀 없었으니까.

“아……!

주변을 둘러보던 선우의 눈이 문득 크게 뜨였다.

“왜?

선우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강진욱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강진욱이 잠시 그런 선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는 저보다 반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강진욱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당연하지. 그동안에는 그저 활자로만 알아 왔던 것이니까.

선우가 피부로 직접 느낀 병원 진료실에서였다. 그나마도 마치 깊고 울창한 숲에 압도된 듯한 기분을 느꼈고,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니까 선우가 지금 느낀 향은, 향이 아니었다.

‘이게 페로몬이었구나.

그랬다. 진한 숲처럼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강진욱의 페로몬이었다.

‘근데 갑자기 페로몬이 느껴지지?

서브수는 열성 오메가로, 페로몬을 내보내지 못하고 맡지도 못한다고 했는데.

‘아……. 임신하면 점차 페로몬을 항상 흘린다고 했지. 그럼 맡는 것도 마찬가지인가?

그렇다면 말이 되는 소리였다.

“앉아.

선우가 페로몬에 관하여 고민하는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주방까지 들어온 강진욱이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식탁으로 눈짓을 보냈다.

선우는 뭔가 하고 앞을 봤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도 냄새는 거의 나지 않으면서 담백하고, 속에 부담이 되지 않는 것들로.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우는 페로몬에 관해서 생각하던 것도 홀랑 까먹었다.

“먹어.

강진욱이 다시 식탁을 눈짓했다. 일부러 집사에게 건강식으로 챙기라고 말했지만,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묵한 접시에는 연두부샐러드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포크로 찍어 입에 넣자 신선한 채소가 아삭 씹혔다. 뒤이어 부드럽고도 고소한 두부의 맛이 혀에 느껴졌다. 약간 단맛이 나는 봐서는 샐러드 소스도 첨가된 같은데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맛있네요…….

선우는 샐러드를 전부 씹어 넘기고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번엔 옆에 있는 음식으로 손을 옮겨 갔다.

어제 부담 없이 먹었던 흰죽이 김을 폴폴 풍기며 선우를 유혹하고 있었다. 음식을 앞에 두니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강진욱은 선우가 즐겁게 식사하는 감상했다.

강진욱은 최선우의 물음을 밤새 고민해 봤다. 최선우가 자꾸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가. 최선우를 걱정하는가.

회장의 강요, 강진태의 농간. 처음엔 그것 때문에 최선우가 거슬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강진욱은 최선우 자체에 자꾸 관심이 갔다.

그게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하기에는 어렵겠지만, 이유는 대충 같았다.

“넌 어머니를 닮았어.

강진욱이 던지듯 꺼내 놓은 말에 흰죽까지 깨끗하게 비워 내고 포만감에 배를 쓸던 선우가 손을 멈췄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엄마를 닮았다고? 내가?

선우가 그런 눈으로 강진욱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아픈 내지 않고 년을 독하게 꾹꾹 참다가 혼자 조용히 버렸거든.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이 다신 그런 꼴로 사라지게 두겠어.

“아……!

맞다! 그랬다. 선우는 그제야 강진욱이 자신을 자꾸 신경 쓰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강진욱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명을 달리했다. 강진욱이 사실을 알았을 , 이미 손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런 얘기를…… 메인수랑 했었지.

메인수가 광공인 강진욱을 이해하는 약간의 도움을 주는 대화였지만, 선우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엄마 생각나서 도와준다는데 강진욱한테 그게 어울리기나 하냐는 말이지.

어쨌든 이미 강진욱과 어머니의 일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면 되었다. 원작 최선우는 몰랐을 이야기일 테니까.

“어머니가 아프셨나 봐요?

선우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렇게 물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물을 수는 없으니 이게 가장 적당한 같았기 때문이었다.

“글쎄, 아마 그랬겠지.

그런데 돌아온 강진욱의 대답은 난감했다.

“그랬겠다는 건……?

뭐야, 남처럼 말해. 어머니와 각별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선우는 다시 원작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맞았다. 강진욱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고, 강진욱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로만 전해 들었거든.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면서 잠적해 버렸어.

‘아, 그래, 그랬지!

강진욱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조용하고 고립된 별장으로 들어갔고, 그곳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 인사를 했다.

어디에 있는지 행적도 알려 주지 않고 잠적한 바람에 강진욱은 뒤늦게야 바짝 마르고 몸이 상한 죽은 어머니와 재회를 했고.

‘에휴…… 쟤도 기구하긴 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하고 헤어지다니. 선우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슬쩍 강진욱의 안색을 살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무표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치고 눈빛이 평소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같았다.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지 선우도 같았다.

강진욱은 오래전에 이미 끝나 버린 과거의 일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스스로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진욱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평소에는 얄미울 정도로 제멋대로에 저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인데.

저런 풀이 죽은 모습을 보자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자신도 엄마를 그렇게 잃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선우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다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없으니까.

이해한다거나 어머니 일은 안타깝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고, 강진욱도 그런 말을 듣겠다고 화제로 올린 것은 아닐 거다. 자신은 시한부가 아니고, 위궤양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은 그저 아이를 가졌고 건강하게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뿐이다. 다만 강진욱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

선우는 그런 확신과 결심을 담아 강진욱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강진욱도 드물게 고요한 눈으로 선우를 응시했다.

‘뭐야, 저렇게 쳐다봐.

부담스럽게. 평소처럼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그런 아니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우는 강진욱과 오래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후회할 짓은 하지 않아. 그러니까 최선우 넌…….

하지만 강진욱은 하려던 말을 맺지 못했다.

딩동.

현관 벨이 울리며 막혔기 때문이었다.

              

#23

“뭐야?

강진욱이 말을 막은 벨에 불쾌한 눈을 찌푸리며 현관을 쳐다봤다.

“누가 오기로 했어?

? 누구…….

“아!

누구지 하고 같이 멍하니 생각하던 선우가 벌떡 일어났다. 시간에 사람이 있었다는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주방을 나선 선우는 인터폰 화면을 봤다. 아니나 다를까 모자를 젊은 남자가 서서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자에는 ‘현대자원’이라는 빛바랜 금실 글자가 보였다. 선우는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어제 선우가 전화했던 폐기물 처리 업체의 이름이었다. 누구인지 생각해 선우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현대자원에서 나왔습니다. 9시에 바로 오라고 하셔서 맞춰 왔습니다!

맞다. 어제 선우는 달리 확인 전화할 것도 없이 오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시간에는 일어나 있을 거고, 최대한 빨리 집을 정리해 버리고 싶었으니까.

“…….”

하지만 지금 집에는 선우만 있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가장 불편한 사람이 같이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뭐야, 누구야?

업체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강진욱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뭐야?

강진욱이 다시 한번 물으며 현관 앞에 있는 업체 직원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손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강진욱은 즉각 최선우의 팔을 붙잡아 뒤로 보냈다.

“어어.

엉겁결에 뒤로 밀려난 선우는 강진욱의 페로몬이 아까보다 강하고 위협적으로 변한 것을 알아챘다.

“전무님! 잠시만요.

업체 직원의 형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선우가 서둘러 강진욱의 옷깃을 붙들었다.

“제가 부른 거예요.

“불러?

강진욱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선우와 업체 직원을 번갈아 봤다. 선우는 강진욱에게 붙들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대꾸했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 정리하려고요.

그러게. 그러려고 했는데. 하필 강진욱이 나타난 걸까. 어제는 분명 일이 풀려 간다고 생각했던 같은데.

그러기 무섭게 강진욱 때문에 뭔가 꼬인 기분이었다. 이틀 사직서도 그렇고. 병원에 갑자기 들르게 것도 그렇고. 강진욱네 집에 가게 것도 그렇고.

“무슨 정리?

“아, 가구랑 쓰는 집기들 그런 거요.

“무슨 가구를, ?

이렇게 이해를 하지? 어제 얘기를 나눴는데. 심지어 본인이 먼저 알아채지 않았던가. 선우는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강진욱을 한심하게 보며 대답했다.

“왜긴요. 내놨으니까 그렇죠.

“아…….

그제야 선우의 말뜻을 이해한 강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뜻 몸을 옆으로 물리며, 업체 직원에게 명령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

그때까지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몰라서 선우와 강진욱의 눈치를 보던 업체 직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알파 오메가 커플이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알았는데 그건 아닌 같고. 아니면 결혼을 앞두고 사랑싸움을 하는 건가?

잠시 앞의 사람 관계가 궁금했지만, 이런 일에는 괜한 관심을 보이는 아니라는 업체 직원은 알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요. 아래쪽 일행에게 연락 하겠습니다.

업체 직원이 재빨리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올라오라고 말했다. 강진욱은 거실 한복판에서 장승처럼 섰고, 선우는 그런 강진욱 옆에서 불안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선우의 계획은 정리를 끝내자마자 제주도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강진욱이 저렇게 버티고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강진욱은 도저히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걸 어떻게 쫓아내지?

선우가 강진욱을 내보낼 방도를 잠시 생각하는 사이, 사람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전부 현대자원이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제 말씀하시기로는 안에 있는 가구랑 집기 전부 폐기하신다고 하셨죠?

아까 벨을 눌렀던 업체 직원이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선우도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정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리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일에 방해되니 퇴장해 달라는 소리였다. 강진욱도 그걸 알아들었는지 옆에 선우의 팔을 붙잡았다.

“따라와.

“앗, 잠시만요! 저기, 잠시만요. 10분만 있다가 시작해 주세요!

강진욱이 팔을 붙들기 전에 선우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강진욱뿐만 아니라 폐기물 업체에서 직원들까지 기다리게 선우가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강진욱이 나타난 바람에 짐도 제대로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로 튀든 다른 어디로 가든 일단 짐은 싸야 하지 않겠는가.

선우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로 집는 같으면서도 필요한 것들을 착착 정리해서 캐리어에 정리했다. 수백 벌은 법한 옷과 가방, 신발, 액세서리가 눈에 보였지만 전부 가지고 수는 없었다.

폐기하기 곤란한 고가의 물건을 야무지게 챙긴 선우가 몸의 반쯤 되는 거대한 40인치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왔다. 그것도 오른손과 왼손 각각 하나씩.

“뭐야? 거대한 덩어리들은?

강진욱이 그런 선우를 잠시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건 폐기물 업체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뭐긴요. 앞으로 제가 물건들이죠. 나머지는 처분해 주셔도 돼요.

선우는 쌩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업체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강진욱을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미처 중문을 지나가기도 전에 도로 강진욱에게 붙들렸다.

“아……!

“이리 내놔.

가뿐하게 선우의 손에서 캐리어 2개를 낚아챈 강진욱이 먼저 집을 나섰다.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선우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강진욱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엘리베이터 안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선우 역시 엘리베이터를 올라 1층을 눌렀다. 하지만 강진욱이 곧장 B1층을 누른 선우가 누른 버튼을 취소했다.

“뭡니까?

선우는 얼굴을 찌푸리고 강진욱을 노려봤다.

“뭐가?

1 카페로 건데 자꾸 취소해요.

“내 집으로 .

“아니. 제가 집에는 가요?

당연하다는 듯이 집에 가자는 건데. 선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강진욱을 바라봤다.

“앞으로 수행비서 .

그런데 강진욱에게 엉뚱한 소리가 돌아왔다.

나보고 하라고?

“수행비서요?

강진욱의 뜬금없는 소리에 선우가 맹하게 되물었다. 그건 비서가 하는 아닌가? 근데 그걸 나한테?

최선우는 사무 비서다. 그대로 사무실에서 강진욱에게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찾고, 영수증이나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담당하는 내근직.

그와 달리 수행비서는 그야말로 강진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한다. 그걸 갑자기 자신한테 하라고 하는 건지 수가 없었다.

“곽 비서를 보조해서 따라다니라고.

“제가요? 왜요? 무슨 수로요?

이유고 뭐고 다른 떠나서 강진욱을 쫓아다니라니. 그건 정말 사양이었다.

“너한테 많은 바라. 그냥 눈앞에만 있어.

“아니, 그러니까 대체 제가 그래야 하냐고요.

그러긴. 어디 가서 토하고, 기절하는 보기 싫어서 그렇지. 그러려면 하루 종일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가장 좋은 아무래도 수행 비서인 같았다.

물론 안에 그냥 두고 쉬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곳에 최선우를 두는 어쩐지 불안했다.

강진욱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잔말 말고 그렇게 알아.

“알긴 알아요. 매사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요?

선우도 만만찮게 불쾌해하는 얼굴로 강진욱을 쳐다봤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진짜 보자기로 보나. 사람을 함부로 휘두르려고 하네.

그간에야 광공 스위치를 누를까 신중하게 굴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계속 강진욱에게 끌려다니기만 같았다. 그런 절대 사양이었다.

“그럼 병원에 가든가.

아니, 대화의 방향이 그쪽으로 튀는 건데?

“병원에는 왜요?

“못 믿겠으니까.

“못 믿겠다뇨? 뭘요?

“진짜 위궤양인지 아닌지.

“아, 답답하네! 위궤양이라니까요? 위궤양! !

선우는 위궤양을 강조하며 바락바락 소리치다 배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팔로 감쌌다.

“뭐야? 아파?

강진욱이 표정을 굳힌 물었다. 목소리도 단숨에 딱딱해졌다.

“네. 그러니까 스트레스받게 하지 마세요. 이게 전무님 때문이잖아요!

? 이게 무슨 헛소리야. 강진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때문이라니?

“위궤양의 원인! 스트레스! 과로! 모르세요?

“그러니까 그게 ?

“네가 그걸 모르면 누가 알아!

선우는 다시금 앞에 있는 강진욱라는 잊고 바락 소리 질렀다. 강진욱은 선우의 격한 반응에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했다. 그러다 선우가 내던진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네가 스트레스받은 탓이라고……?

새삼 몰랐다는 것처럼 저런 표정이야. 선우는 충격이라도 받은 입을 벌린 강진욱을 힐금 보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일부러 야근시키고! 주말에도 나오게 하고! 일은 제대로 주고! 그거 , 니가 시킨 거잖아! 근데 모른 척…….

제가 기억 상실을 연기 중이라는 것도 잊고 선우가 마주 따졌다. 사실을 말하는 본인도, 듣는 강진욱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때, 딩동 하는 경쾌한 소리가 엘리베이터에 울렸다.

- 지하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동시에 안내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닫혔던 문이 좌우로 갈라지는 보는 사이, 둘의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24

먼저 움직인 강진욱이었다. 강진욱은 선우의 옆에 놓인 거대한 캐리어 2개를 단번에 낚아채 주차장으로 나가 버렸다.

다리도 길어서는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선우에게서 멀찍이도 떨어져 나갔다.

“강진욱 !

선우가 서둘러 강진욱의 뒤를 쫓아갔다. 그때 이미 강진욱은 껑충한 신장을 이용해 대기 중이던 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강진욱이 지하 주차장에 나타났을 때부터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가 재빨리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강진욱에게 캐리어 2개를 건네받아 안에다가 넣었다.

“아니, 이게, , 헉…….

뒤늦게 선우가 차까지 달려왔을 , 이미 자신의 캐리어가 담긴 트렁크는 닫혀 버린 후였다.

“타.

강진욱이 들썩거리는 선우의 어깨를 붙들었다. 힘도 좋아서 어어 하는 사이 선우는 어느새 뒷좌석에 몸이 반쯤 밀려나 버렸다.

“잠……!

잠깐 기다리라고. 이건 아니라고. 그런 말을 새도 없었다. 선우를 안쪽으로 밀어 앉힌 강진욱이 보조석 뒷좌석에 앉아 출발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선우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여전히 문은 어떻게 여는지 몰랐고, 창문은 선팅까지 새까맣게 되어 꽉꽉 닫혀 있었다.

선우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차창에 손자국을 내는 사이 오피스텔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도로에 들어섰다.

“진짜 너무한 아니에요? 이거 엄연히 납치예요.

빠르게 사라지는 풍경을 보던 선우가 돌연 강진욱을 노려봤다.

“제가 당장 신고하면…….

“해 .

“…….”

강진욱이 너무도 당당하게 구니 말이 없었다. 하긴 그렇긴 하겠지. 대한민국의 재력과 공권력을 쥐고 흔드는 태성그룹의 후계자가 아닌가. 선우의 신고 따위는 그냥 조용히 묻어 버릴 있었다.

“신고는 해도 회장님한테 연락하면 되겠네요.

“뭐……!

선우가 쏘아붙이듯 내뱉은 이름에 강진욱의 얼굴이 굳었다. 선우를 놀려보는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선우도 만만찮게 강진욱을 노려보았다. 원작대로라면 선우를 강진욱에게 데려다 놓은 회장이었다.

그러니 회장에게 연락한다고 하면 강진욱이 자신을 함부로 없다는 선우도 알고 있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회장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형이라는 강진태 부사장도 있고.

강진태도 이번 일에 관여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너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함부로.

강진욱이 눈을 찌푸렸다.

“강진욱 씨가 마음대로 휘두르게 두는 것보단 그편이 낫죠.

“넌 진짜 아무리 겁이 없어서도.

강진욱이 못마땅하다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겁이 없어. 네가 미친 할까 얼마나 전전긍긍 눈치를 봤는데!

선우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덧 차는 한강을 건너 익숙한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높다란 담벼락 앞에 멈춰 섰다.

“아!

익숙한 풍경에 선우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진욱이 그런 선우를 보다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안에서 계속 버틸 없으니 선우도 결국 밖으로 나왔다.

선우는 이번에 고작 번째임에도 익숙해진 담을 고개를 꺾어 올려다봤다. 여전히 최소 억은 나갈 법한 적송이 가지를 요염하게 늘어뜨린 있었다.

‘여길 오게 줄이야…….

선우가 한숨과 함께 속으로 말했다.

“최선우.

강진욱이 선우를 불렀다. 어느새 대문 앞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선우는 버텨 볼까 하다가 짐이 아직 트렁크에 붙잡혀 있다는 떠올렸다.

“짐은요?

“제가 챙겨 가겠습니다.

대답은 사람을 따라 차에서 내려온 비서가 했다. 잠깐 캐리어 따위 버리고 도망칠까 생각하던 선우는 이내 포기했다.

임신 초기에 무리해서 달리기하기도 싫었고, 강진욱과 아무래도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강진욱이 얼른 따라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선우도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현관 앞에서 집사가 웃으며 사람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선우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집사가 더욱 반가워하는 얼굴을 했다.

“네, 선우 .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셔도 됐는데……. 하지만 저렇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고 있는 집사에게는 차마 매정하게 말할 없어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강진욱을 흘겨보다가 저를 오묘하게 쳐다보고 있는 눈과 마주치고 멈칫했다.

‘뭐야, 저렇게 쳐다봐?

뭔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아니었다. 선우는 여기서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담판을 짓고 집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당장 제주도로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강진욱 , 얘기 하죠.

선우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같은 강진욱을 불러 세우며 팔짱을 꼈다. 모습에 정중하게 있던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진욱 ?

집사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강진욱을 저렇게 부르는 사람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란 최선우의 태도였다. 집사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 종종 회사 때문이라며 집에 찾아오곤 했던 비서였으니까. 그때 최선우는 강진욱과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강진욱이 최선우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고, 최선우는 강진욱의 눈치를 보며 전무님을 찾았다.

그런데 지금 강진욱은 최선우를 신경 쓰고 있었으며, 둘의 호칭 역시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전무님도 아니고 무려 ‘강진욱 씨’라니.

그래서 더더욱 집사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물론 집사는 자신의 호기심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프로답게 차분한 얼굴로 선우와 강진욱을 관찰했다.

강진욱은 이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냐는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따라와.

그리고 강진욱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아니, 저게 마음대로 저러네!

잠깐 울컥한 표정을 지은 선우도 씩씩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헤어질 제멋대로 구는 남자에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바가지 주리라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 *

강진욱을 따라 한참 복도를 걸어간 끝에 도착한 곳은 근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재였다.

“와…….

짙은 원목 책장에 수백 권은 법한 책이 빼곡하게 꽂힌 발견한 선우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항상 상상만 하던 풍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커다란 창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서재는 3면이 전부 책으로 둘러싸인 구조였다. 앞에는 원목 책상에 놓여 있는데, 정오의 빛이 스며들어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것마저 아주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런 데가 있었구나…….

강진욱의 서재는 그야말로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쯤 되어야 있을 법한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정도면 그냥 개인 도서관 아닌가?

“책 좋아해?

놀랍고 신기하다는 얼굴로 연신 서재를 둘러보는 선우를 구경하던 강진욱이 물었다. 그러고 보면 최선우를 여기까지 데려온 처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네. 좋아하죠. , 이거……! !

홀린 듯이 책장으로 걸어간 선우가 하나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이 작가 책도 , 아…….

책을 들고 즐거운 얼굴로 돌아서던 선우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렸다.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있는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최선우, 바보냐……!

아무리 책이 반가웠어도 그렇지.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드는 책은 차마 다시 꽂지 못하고 품에 껴안고 있었다. 모습을 가만 보던 강진욱이 모른 시선을 들며 말했다.

“의외네. 기억을 잃었다더니. 그런 생각나나 ?

“이건…… 기억이랑은 상관없죠. 취향이니까……. 그리고 자꾸 의심하시는데, 기억 상실 맞아요.

선우는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제가 기억 상실 환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무것도 생각 난다니까요?

일단 예전 비서가 어땠는지 모르는 맞았으니까 거짓도 아니라 당당하게 강진욱을 마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웃음을 날릴 알았던 강진욱이 웬일로 조용했다.

“조 비서한테 들어 보니까 처리는 곧잘 했다고 하던데?

“그거야 뭐……. 원래 제가 유능하니까요.

선우는 잠시 뻘쭘한 표정을 했지만 젠체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사실 다른 몰라도 자료를 찾고, 일정을 체계적으로 조절하고, 문서이나 서류를 정리하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선우가 하던 일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작가의 스케줄을 체크하고, 출간 날짜를 조율하고, 플랫폼별로 천차만별 다른 프로모션이나 이벤트 찾아서 정리하는 등등.

혼자서 여러 작가를 관리하며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스케줄을 빠뜨리지 않는 얼마나 빡센 일인데!

“그래, . 그럼 내일부터 비서를 보조하는 것도 힘들지 않겠네.

“그건 아니죠.

강진욱이 밀어붙이는 일을 선우가 잘라 거절했다.

“뭐?

“일단 사직서 제출하고, 퇴사 의사를 밝습니다. 그러니까 더는 일할 생각이 없어요.

“그건 내가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

강진욱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말했다.

“제가 사직서를 제출했을 , 이미 법률상 근로 계약 해지 의사를 표시했다고 보는데요. 그럼 전무님께서 강제적으로 붙잡아 두실 없습니다.

선우도 지지 않고 법률로 받아쳤다. 사직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했을 , 이를 받은 대상이 거절하는 것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본 후였다.

“네 사직서 내가 찢었는데?

강진욱이 그때 일이 기억이 나느냐며 손으로 종이를 찢는 시늉을 했다.

              

#25

강진욱의 눈빛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아마 선우가 사직하겠다고 했어도 그걸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당당하게 없다는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선우는 잠시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길에서 저를 붙들고 소리치고 급기야 사직서까지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리던 강진욱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못된 버릇을 어떻게 고쳐 주지?

생각하던 선우의 머릿속에 순간 비서에게 줬던 사직서가 떠올랐다.

‘근데…… 사직서 아직 강진욱한테 전달하지 않은 거겠지?

그러니까 강진욱이 저런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을 터이다.

부디 비서가 계속 존재를 잊고 있기를!

“그래도 제가 거절하면 그만 아닌가요. 어차피 월급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자르든가 말든가 하세요.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간 비서가 일도 다른 누가 투입돼도 당장 시작할 있을 그런 허드렛일이 아니었나.

선우는 전투적인 얼굴로 팔짱을 꼈다. 강진욱이 다른 사직서의 존재를 모른다면 유리한 선우 쪽이었다. 사직 의사를 표시한 후에 1달이 지나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물론 선우도 1달이나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오늘, 자리에서 강진욱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나가서 비행기를 거다!

강진욱이 “흠……. 하고 못마땅하다는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선우는 어쩔 거냐는 얼굴로 강진욱을 노려봤다.

“좋아. 달만 참아.

“……? 무슨 1달요?

이건 무슨 헛소리야.

1 동안 곁에 있어. 후에는 원하는 대로 하게 주겠다고.

“아니, 내가 왜요?

대체 소리를 오늘 번이나 하는 거야. 선우가 한숨을 쉬며 강진욱을 바라봤다. 뭣보다 1달이나 강진욱 곁에 붙어 있으라고? 그런 끔찍한 소리를!

지금까지도 강진욱 때문에 놀라고 스트레스 받았던 생각하면 절대, 절대 원하지 않았다.

“싫어요. 아프다니까요? 위궤양이라고 우습게 보시나 본데…….

선우가 다시 한번 위궤양을 강조하며 거부 의사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말은 마치기도 전에 강진욱에게 싹뚝 잘려 나갔다.

“우습게 . 그러니까 편하게 일하도록 주겠다고.

“아니, 진짜 벽하고 얘기하니?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뭐?

“너요. 진짜 무슨 같다고. 철벽! 내가 싫다는데 자꾸 우겨 . , 진짜. 성격이 그러니? 아무리 광…… !

광공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고 말할 뻔한 선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막았다. 본인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강진욱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선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선우가 제게 던진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벽? 내가 벽창호라는 소리야?

선우는 전혀 몰랐다는 묻는 강진욱을 어이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강진욱이라면 그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쟤가 그간 누구 눈치를 보면서 살았겠어. 재벌 4세에, 태성그룹 후계자에, 극우성 알파. 전부 눈치 보고, 떠받들고, 왕자처럼 살았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제멋대로에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겠지!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덮었던 손을 뗐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 그러니까 사람 들어요. !

“무슨 ? 어차피 네가 한다는 말은 나간다, 내가 보이는 데로 사라진다, 이것밖에 있어?

그렇긴 하지. 너무 맞는 말이라 저도 모르게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던 선우가 가까스로 아래로 떨어지던 목에 힘을 줬다.

“당연하죠. 그게 제가 가장 원하는 일인데.

내가 미쳤다고 너랑 같이 있겠어? 목숨도 소중하고, 속에 있는 아이도 소중하거든?

“그러니까 들을 것도 없다는 거야. 너도 어차피 고집 꺾을 거잖아.

그거랑 그거랑 같냐! 그냥 밀어붙이는 거고, 생존이 달린 일인데!

그렇게 말할 없으니 선우는 답답한 가슴만 퍽퍽 두드리지는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1. 1달만이야. 후에는 원하는 대로 하게 줄게.

마치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계속 강압적으로 굴던 강진욱이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덕분에 선우도 쏘아붙이려 열던 입을 다물었다.

“네가 일은 비서한테 얘기해 놨어. 정시 출근하고, 정시 퇴근하는 조건으로 어때.

강진욱은 여전히 눈을 뾰족하게 세운 선우를 보더니 서재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서재로 .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강진욱이 다짜고짜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서재에 나타났다.

“곽 비서.

“네, 전무님.

“내가 아침에 최선우에 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얘기해 .

? 이건 무슨 상황이야.

비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강진욱과 최선우를 번갈아 봤다. 강진욱은 뭔가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최선우는 이게 대체 하자는 짓이냐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상황이 정말 이상했다…….

비서는 오늘 아침, 전무가 자신을 불러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늘부터 최선우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

일이라니, 무슨 일이요? 비서는 그런 표정으로 전무를 봤다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전무는 자신이 내린 명령에 의문을 가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이미 결정을 것에 관해서는 더더욱.

〈절대 무리하게 시키지 말고. 식사도 건강식으로 꼬박꼬박 챙기고. , 약도 제때 먹는지 체크해.

말을 들으니 비서의 얼굴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아무리 들어 봐도 이건 일을 시키겠다는 아니라 그냥 곁에서 돌봐 주겠다는 같지 않은가.

비서는 눈치껏 전무의 안색을 확인했다. 원래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도 세상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무는 가끔 비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다. 극우성 알파라서 특출한 알았는데, 아니다. 전무가 남들보다 또라이…… 아니, 별종이었다.

〈야근 금지. 주말 출근 금지. 스트레스 주는 것도 금지!

계속 이상한 강조하는 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서는 이번에도 알았다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수없이 지나갔다.

대체 전무가 최선우에게 저러는 것인지. 그걸 알아봐야겠다고.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같다고.

“곽 비서.

비서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 야근 금지, 주말 출근 금지, 스트레스 금지. 그리고…….

비서는 강진욱에게 들은 대로 먹을 것도 신경 쓰고, 약도 먹는지 체크도 하라고 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됐어.

그러나 그보다 강진욱이 먼저 말을 잘라 버렸다.

“이만하면 됐어?

강진욱은 비서에 손짓으로 보라며 명령을 내리고, 선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선우에게 얼른 대답해 보라며 눈으로 재촉했다.

“아뇨.

하지만 선우는 이번에도 잘라 거절했다.

“대체 ? 뭐가 문제인데?

강진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으면,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같았다.

하지만 선우의 생각은 달랐다. 문제야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자신의 속에 강진욱의 아이가 크고 있다는 . 하지만 이건 절대 밝힐 없는 이유고.

번째는…….

“그냥 네가 싫어서요.

              

#26

사이에 아주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 강진욱은 뭔가 충격을 받은 눈이었고, 선우도 뒤늦게 자신이 너무 막말한 아닌가 후회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강진욱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초딩이야? 네가 싫어서라니. 무슨 그런 유치한 소리를. 뭐에 씌었나 내가 요즘 이러지?

선우는 잠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상대가 막무가내로 군다고 자신도 같이 아무 말이나 필요는 없는데, 그런.

“내가…… 싫다고?

한참 끝에 강진욱이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 아뇨, 아뇨. 강진욱 씨가 싫다는 아니라. 그러니까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소리인데. 아니, , 부담스럽고, 이유도 모르겠고. 하여간!

선우는 제가 말을 뱉어 놓고도 정리를 하고 횡설수설했다. 그러면서도 강진욱의 눈치를 봤다.

혹시 제가 광공 버튼이라도 누른 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진욱이 조용했다.

도리어 강진욱은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진 같았다. 선우의 짐작이 맞았다. 강진욱은 그간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따지듯 말하다 돌연 기절하던 최선우, 병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최선우,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던 최선우, 사직서를 내던지고 도망치던 최선우. 그리고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우수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최선우까지.

그래, 과연 싫어한다는 말은 진심인 같았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책임질게. 네가 원하는 대로.

어딘지 모르게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하지만 강진욱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생각하느라 선우는 이번에도 그의 상태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 강진욱에게 나온 말이 너무도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광공이 사과라니! 무슨 어울리는 소리가 있담!

“뭘. , 사사, 사과까지 해요. 아니 그보다 책임요? 제가 언제요?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선우는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네가 쓰러지기 전에 그랬잖아. 아프니까 책임지라고. 그러니 책임질게. 1 동안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건강하게 먹으면 나아지겠지. 후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 원하는 대로 테니까.

그래,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자신이 아니라 서브수가. 빌어먹을!

선우는 기억이 난다고 말하려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강진욱이 평소와 달리 고요하고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에.

“직장 상사로서 하는 명령 아냐. 명분뿐이긴 하지만, 너와 결혼 약속을 상대로 부탁하는 거지.

뭐지. 강진욱이 강진욱답지 않게 저러지? 선우는 새삼스럽게 강진욱을 다시 쳐다봤다. 너무 태도가 다르니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어머니 때문이겠지?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강진욱, 아니 강진욱을 사랑으로 키웠다던 그의 어머니. 불행한 결혼 생활에 믿고 의지할 거라고는 강진욱 하나뿐이었던 여자는 아들에게 병도 숨기고 있다가 사망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어머니를 자신과 같이 보고 있다면 그럴 있을지 모른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냐.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가장 선우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가족, 그것도 어머니를 들먹여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더더군다나 어머니라니. 그건 선우에게도 항상 마음에 남는 존재.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선우에겐 엄마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하……. 일주일. 일주일 시간 주세요. 고민해 테니까.

선우는 결국 강진욱에게 여지를 남겼다. 선우의 말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던 강진욱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생각해 보겠다며 한발 물러선 것에 만족해야 때라는 것을 강진욱도 알았다.

“좋아. 천천히 생각해 .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찾지도 쫓아오지도 마세요.

“쫓아가긴 누가?

그때까지도 침착한 굴던 강진욱이 울컥한 얼굴을 했다.

누구긴 너지요. 서울도 아니고 지방까지 쫓아온 어디 누구 씨는 기억이 나나.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선우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강진욱도 본인이 짓을 떠올렸는지 먼저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인제 보니 강진욱도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가끔 감당이 되는 떼쟁이에, 벽창호처럼 굴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뭐…….

‘뭐래?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거야. 누가 어쩐다고?

스스로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선우는 “하. 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대신 짐은 여기 맡겨 두고 갈게요.

선우가 짐을 두고 간다는 말에 강진욱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좋아.

선우는 어울리지 않게 얌전하게 구는 강진욱을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고 그대로 서재를 나와 집사에게 작은 캐리어를 부탁한 게스트룸으로 돌아왔다. 강진욱이 강탈해 선우의 캐리어 2개는 드레스룸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선우는 캐리어 하나를 바닥에 놓고 열었다. 보이는 족족 닥치는 대로 넣긴 했어도,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어 필요한 것만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우는 대충 정리해 놓고 집사가 캐리어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메시지 앱을 켰다.

전화를 걸고 싶지만, 자신의 집이 아니니 조심해서 나쁠 없었다.

 

[선생님, 오늘 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언제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30 후쯤에는 도착할 같아요.]

[그래요. 이따 만나요.]

 

똑똑.

메시지 앱을 끄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잠시만요.

당연히 집사라고 생각했던 선우는 앞에 있는 강진욱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뭐예요?

절로 목소리도 뾰족하게 나왔다. 눈살을 찌푸렸던 강진욱이 다시 얼굴을 펴고 차분히 말했다.

“자, 캐리어.

강진욱이 선우의 앞에 24인치 캐리어를 끌어다 놨다.

“아…….

“어디 가는지 묻진 않을게. 대신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에는 연락 잊지 말고 . 아침, 점심, 저녁 먹을 때는 사진 찍어서 보내고.

선우는 황당해하는 눈으로 강진욱을 올려다봤다. 이게 무슨 어린 자식을 여행 보내는 부모의 멘트 같은 소리인가. 뭣보다 대체 남의 식사는 이렇게 진심으로 챙기고 있어.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강진욱이 하는 우습고 이상하고 약간은 무서웠다.

“넌 거짓말쟁이잖아.

강진욱이 담담한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선우가 빡쳐 소리를 꺼냈다.

“내가 무슨……!

선우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따졌다. 하지만 말하기도 전에 강진욱에게 싹둑 잘렸다.

“시한부라고 했다가 위궤양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하다 하다 기억 상실이라니. 뭐가 정말인지 수가 없으니 자살이 아니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건 정말 오해라니까요?

그냥 아침 해가 떠오르는 보면서 새로운 다짐을 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선우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모난 눈으로 강진욱을 노려봤다. 그러다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서재에서도 그러더니, 지금도. 강진욱 표정이 이상했다. 진짜 걱정하는 것처럼 강진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해. 정말 이상해. 너무너무 이상하다고!

강진욱이 대체 저러는지 누군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결혼을 약속한 상대라서 이런다고? 설마! 강진욱이 그런 신경 사람인가. 오히려 그래서 어떻게든 옆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전부 잊어버린 , 점점 진짜 걱정하는 것처럼 구는 강진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최선우, 대답.

“……알겠어요.

선우는 결국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말했다. 만약 싫다고 한다면 강진욱은 자신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이었다. 말한 대로 하면 당장 쫓아올 같기도 했다. 강진욱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강진욱이 지갑을 열더니 카드 장을 빼서 내밀었다. 매끄러운 빛깔을 자랑하는 블랙 카드였다.

“뭐예요?

“가서 . 금액 신경 쓰지 말고.

“…….”

아니, 그러니까 ? 선우는 앞에 있는 부담스러운 카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강진욱이 그런 선우의 손에 기어이 카드를 들려 줬다.

“그럼 . 운전기사한테 말해 놨으니까 가고 싶은 있으면 데려다달라고 .

“네…….

선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욱은 그런 선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30 , 서재 창가에 있는 강진욱의 뒤로 비서가 다가왔다.

“최선우가 방금 출발했습니다.

강진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서는 그가 원하는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따로 가드 둘을 붙였습니다.

“눈에 뜨이지 않게 조심하고.

비서는 믿어 달라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붙인 가드는 사람을 경호하는 목적뿐 아니라 추적하는 일에도 뛰어났으며 빠른 보고로 정평이 인물들이었다.

“네.

비서가 물러가고도 강진욱은 한동안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미 최선우를 태운 차는 언덕을 내려가 완전히 사라진 오래였다. 강진욱의 머리를 가득 채운 제게 바락바락 대들던 최선우였다.

‘겁도 없이.

예전의 최선우라면 상상도 일이었다. 차라리 비웃거나 무시해 버리면 모를까.

‘진짜 기억 상실인가?

강진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최선우의 행동을 이해할 없었다. 그렇게 자꾸 최선우답지 않게 구니 점점 눈이 가는 아닌가.

“아니지. 어머니 때문이지. 최선우가 뭘…….

강진욱은 스스로 생각한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것 때문이었다. 애초 최선우에게 관심이 가서 그런 아니라고. 혼자 병을 삭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이라고.

순간 과거에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치고 올라와 심장을 찔렀다. 강진욱은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외면하듯 몸을 돌렸다.

              

#27

“선우 , 어서 오세요.

선우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수진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맞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우도 꾸벅 인사하며 한수진이 앉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어제는 쉬었어요?

“네.

“식사는요?

“아……. 그건 아직요.

선우는 그제야 시간이 벌써 12시가 지나 있다는 알아차렸다. 아침 일찍부터 집에 쳐들어온 강진욱한테 휘둘리다 보니 이만큼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다.

“그럼 얼른 진료 보고 식사해야겠네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때문인가요, 선우 ?

한수진이 웃으며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선우는 병원에 오며 내내 고민하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 선생님. 혹시 임신하면 알파의 페로몬에 민감해지나요?

“음……. 그런 현상이 있을 수도 있죠. 최근에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네.

“누구의 페로몬에요?

“그게…….

선우는 저도 모르게 강진욱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어쩐지 그래서는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요.

선우의 대답에 한수진은 이해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랬구나. 알았어요. 근데 선우 씨도 알다시피 가정의학이지 산부인과 전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간 선우 진료하면서 페로몬에 관련된 것이나 식당 등과 관련해서는 친한 담당의에게 종종 도움을 받았어요. , 하여튼 그래서 말인데……. 선우 씨가 괜찮다면 산부인과 전문의와 상담하면 좋을 같은데, 어때요?

“다른 선생님이요?

선우가 망설이는 묻자 한수진이 이해한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좋은 지금이라도 진료과를 바꾸는 거예요. 아무래도 앞으로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선우 입장이 있으니 그건 어렵잖아요. 대신 친한 산부인과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부탁할 있거든요.

“으음…….

“선우 개인 정보는 철저히 함구할게요. 선생님도 마침 오늘 오프라 달리 진료를 보지도 않으니 괜찮을 거예요.

한수진의 거듭된 설득에 선우는 고민을 걷어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한수진은 좋은 선생님이지만, 가정의학과였다.

어쩌다 보니 선우를 진료하지만, 전공이 아니니 말마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화사한 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선생, 찾았다면서요?

“유현아 선생님! 어서 오세요.

성큼성큼 들어온 의사의 시선이 한수진을 거쳐 선우에게 머물렀다. 그러더니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오메가예요.

공기 중에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싱그럽고 달콤한 봄꽃 같은 향이었다.

“느껴져요?

“아, 네…….

선우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현아가 다시 웃었다.

마치 봄꽃처럼 풋풋하고 예쁜 미소였다. 어쩐지 그녀가 내보내는 페로몬과 어울리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느꼈나 보다. 맞죠?

“네, 열성이라서요.

선우는 줄도 모른다고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것도 예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열탱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알게 정보였다.

3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서브수. 하지만 서브수는 페로몬을 분출하지도, 존재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덕분에 3년이나 서브수는 비서실에서 베타라고 속이고 지낼 있었겠지.

‘그런데 강진욱과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을 했다고?

불쑥 치솟은 생각에 선우가 멈칫했다. 알파의 러트가 그렇게 강력한가? 열성 오메가를 방에 임신시킬 정도로?

확실히 이상했다.

‘그래서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과거의 일이야 어쨌든 지금 자신은 서브수가 아니었다. 그러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래 따져 필요 없는 .

“열성도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페로몬을 느끼기도 하고 맡기도 해요. 아마 최선우 씨는 페로몬 감각 기관이 그간 기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페로몬은 언제부터 느꼈어요?

어느덧 선우와 가까운 곳에 있는 진료용 침대에 걸터앉은 유현아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며 필요한 정보를 물어 왔다.

“얼마 됐어요. 음……. 2, 3일쯤?

정확히는 강진욱과 함께 한수진 의사를 찾아왔던 어제였다. 하지만 선우는 사실 또한 말하지 않았다.

“아하, 역시. 태아가 영향을 줘서 페로몬 감각 기관을 활성화한 같네요. 최선우 씨처럼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던 열성 오메가가 임신하면 그러는 경우가 종종 생기거든요. 그래도 빠른 편이긴 하네요. 보통은 그런 증상은 임신 10 차쯤 나타나거든요. 알고 있죠?

유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한수진 선생님께 듣기는 했어요. 정확하게 주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임신하면 페로몬을 내보낼 있다고요.

선우가 한수진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지금처럼 느낄 수도 있죠. 근데 알파나 오메가 페로몬을 전부 맡을 있는 아니에요.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임신한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느끼지 못해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최선우 씨도 알다시피 알파와 오메가가 페로몬에 노출되면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서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아…….

“오메가의 경우는 정도에 따라 다르긴 텐데 아마 이제 알아차릴 있을 거예요.

선우는 저도 모르게 코를 찡긋거려 봤다. 맡아지는 없었다. 모습을 유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일단 검사를 볼까요?

“검사요?

굳이 그런 필요한가. 선우가 그런 표정으로 유현아를 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초음파랑 검사 볼게요. 정확하게 어떤 증상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처방도 달라지니까요. 그리고 아기 보고 싶지 않아요?

유현아가 은근하게 건네는 말에 선우가 움찔했다. 태아를 있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진료실로 옮기죠.

침대에서 일어선 유현아가 엄지로 진료실 밖을 가리켰다. 선우는 그녀를 따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수진이 안심시켰던 대로 유현아의 진료실 앞은 환자도 간호사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과목 다른 담당의들과도 약간 떨어져 있어서 달리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초음파부터 볼게요.

유현아가 책상 의료 침대를 손으로 가리켰다. 선우는 주춤주춤 위로 올라가 얌전히 누웠다.

“상의 올려 보세요.

옷자락을 끌어 올리자 유현아가 위에 미끈거리는 젤을 발랐다. 그리고 잘록한 막대로 위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음파 화면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 여기, 보이시죠? 이게 아기집이고, 안에 태아가 있어요.

선우의 시선도 작은 화면에 고정됐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적은 있었다. 속에 마치 콩알처럼 자리한 작은 생명체를.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줄이야…….

‘그것도 속에서.

뭔가 믿기지 않고, 신기하고 이상해서 선우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신기하죠?

“네…….

신기하기는 했다. 조그마한 것이 자라고 변화하여 하나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 아니, 자신의 안에 생명체가 크고 있다는 것이.

구역질이나 어지럼증, 식욕 부진, 체력 저하 여러 증상을 겪으면서 임신을 했다는 체감했다. 납작한 배를 문지르는 것도 습관이 정도로.

하지만…… 선우는 이렇게 눈으로 속에 있는 존재를 보고서야 ‘내가 정말 임신했구나. 실감했다.

“지난번에는 혈액 검사했을 HCG 수치가 14,000 정도라서 6주쯤 됐겠구나 예상했거든요? 이렇게 보니 확실하네요.

유현아가 초음파 기기를 배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아! , 그럼 그때……!

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유현아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깨어났을 , 임신했다는 알려 한수진이었다.

하지만 한수진은 가정의학과. 그러니 진단한 의사가 따로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현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선생이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다고 해서 내가 봐줬거든요. 그러고 나서 별다른 얘기가 없기에 다른 병원에 알았죠.

“아…….

“여하간. 보다시피 아직 아이라고 하기는 그렇죠? 아직은 커야 심장이 들릴 같네요. 1, 2 후에 질식 초음파 보죠.

선우는 이번에도 그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시선은 다시 초음파 화면을 향해 있었다. 다시 봐도 신기했다.

노이즈가 것처럼 검고 줄이 화면에 작은 씨앗처럼 자리한 태아라니.

“일단 태아 상태를 봐서는 크게 문제없어 보여요. 발육도 크게 차이가 없고. 자세한 피검사까지 진행해 봐야 같네요.

초음파 검사를 마친 의사가 그렇게 말하며 직접 선우의 피를 채혈해 갔다.

“그럼 페로몬은…….

선우가 주삿바늘이 뽑히는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오메가의 호르몬 기관이 민감해져서 그랬을 가능성이 커요. 태아도 건강하고 크고 있으니 크게 문제 없을 거예요.

유현아가 피가 담긴 통을 다른 곳으로 치우고 주변을 정리하며 무심히 설명했다.

“그렇군요.

선우도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 호르몬이 어쩌고 하지만 그것 역시 아직 적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건 이상이 있는 아니라니 다행이지 .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유현아가 설명하기를, 알파의 페로몬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강진욱의 페로몬을 느꼈던 ?

“참 아까 말을 하다 말았는데. 알파의 페로몬을 최선우 씨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마치 선우의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유현아가 말했다.

“태아의 다른 보호자일 경우.

              

#28

“그럼 제가 따로 주의해야 있을까요?

선우의 질문을 들은 유현아가 돌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선우의 몸이 굳어 버렸다.

“음. 확실히 약하긴 하지만 페로몬이 나오긴 하네요.

유현아가 몸을 바로 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 저요?

“네. 기존에는 몰랐는데 최근에 느꼈다고 하니 확인해 거예요. 지금처럼 바짝 코를 가져다 대는 아니면 맡을 없을 만큼 희미하긴 하지만.

선우는 얼떨떨하게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리고 손을 코에 살짝 가져가 숨을 들이켰다. 희미하게 사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같기도 했다.

“선우 씨한테 어울리네요. 풋풋하고 청량한 느낌이랄까.

“아, 네…….

아직도 오메가니 페로몬이니 적응이 되는 선우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모습이 부끄러워하느라 그런 오해한 유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조심하고, 증상이 생기거나 하면 현장에서 벗어나면 되니까. 어차피 임신 중에 히트가 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부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선우는 이번에도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네…….

“그래요. 그럼 선우 . 무엇보다 중요한 , 본인 건강을 챙기는 거예요. 그래야 아이도 무럭무럭 크고, 건강하니까. 알겠죠?

“네. 그럴게요.

“태명은 지었어요?

유현아의 물음에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명요?

“아직 지었구나? 예쁜 이름으로 지어 주세요. 이름도 불러 주고 그래야 아이랑 친해지죠.

“아……. , 그럴게요.

생각지 못한 소리에 선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태명, 태명이라…….

아직은 별로 떠오르는 없었다.

“앞으로 필요한 있으면 부르세요. 오프로 진료 봐줄 테니까. 웬만한 선생 통해서 전달하면 되고요.

유현아가 선우의 걱정을 다시 한번 덜어 줬다.

“감사합니다.

생각지 못한 배려에 선우가 조금 감격한 얼굴을 했다.

“감사는요.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결과 나오면 다시 연락할게요.

“네.

“그럼 이만 볼까요?

유현아와 함께 산부인과를 나와 한수진을 만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곧바로 병원을 나왔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니 발걸음도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온 선우는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강진욱의 운전기사는 병원에 오기 전철역에 내려서 보내 버렸다. 강진욱에게 병원에 가는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자신의 건강에 자꾸 신경 쓰는데, 병원에 간다고 하면 무슨 오해를 할지 모르니까 어쩔 없었다.

“강진욱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선우는 혼잣말하다가 피식 웃었다. 기절에, 기억 상실에, 시한부에, 그러다가 위궤양이라고 했으니. 그에게 선우는 정말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었다.

1시간을 달린 택시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어 서자 밖으로 나온 선우는 게이트를 통과해 들어오자마자 잠시 때렸다.

“그러고 보니 공항도 처음이구나.

맨날 소설 속에서나 영상으로나 봤지 실제로 자신이 오게 그랬다. 선우는 사람은 많고, 널찍한 내부를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둘러보다가 안내 센터를 발견했다.

친절한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항공사 카운터를 찾아간 선우는 우여곡절 끝에 제주행 티켓을 사는 것에 성공했다. 30 출발하는 비행기의 좌석이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선우는 멍하니 작은 창밖을 봤다. 높다란 시야에 굴곡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검고 끝이 둥글둥글한 산과 굽이치는 산맥, 고불고불한 은색 물길, 크고 작은 건물, 핏줄처럼 얽힌 도로들.

‘신기하네.

선우는 놓고 아래를 구경했다. 아니 그런 척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선우가 일주일간 생각해 보겠다고 단순히 강진욱의 곁에서 1달을 같이 보내느냐 마느냐 결정하는 그런 때문이 아니었다.

선우는 그간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강진욱한테는 어디로 간다고 말을 수가 없지. 그걸 알면 강진욱이 얌전히 보내 주겠나.

선우는 어디쯤 집을 구할지 미리 장소도 점찍어 두었고, 집도 부동산 중개 사이트에서 찾아서 마음에 드는 곳을 뽑아 놨으며, 중개인에게도 연락해 터였다.

이래 봬도 선우는 나름대로 꼼꼼하게 준비를 마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행기 아래 풍경을 보던 선우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들려 나온 병원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선우는 사진을 들어 올려 눈과 위치를 맞췄다. 다시 봐도 신기했다.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한 콩알만 아이가 안에 있다는 것이.

그러다 선우는 태명을 지으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으으음…….

아직도 떠오르는 없었다. 선우가 태명을 고민하는 사이 비행기가 마침내 제주 공항에 내려섰다.

선우는 태명 짓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비행기를 나섰다. 공항 건물을 나오니 택시가 줄줄이 있는 보여서 곧장 올라탔다.

“여기로 주세요.

선우는 중개인이 보내온 주소를 보여 주었다. 택시 기사가 그걸 확인하더니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복잡한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1시간여를 달려 해변 근처에 있는 건물에 멈추어 섰다. 선우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넣은 캐리어를 꺼냈다. 택시가 출발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앞에 에메랄드빛으로 찰랑거리는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진으로 것보다 더욱 맑고 깨끗했다.

“와……. 진짜 좋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얗게 반짝이는 모래밭과 울퉁불퉁 구멍 못생긴 돌이 가득한 해변.

바닷가는 오후 볕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자아낼 만했다.

선우는 잠시 바다를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선우가 가려고 했던 부동산 중개 사무소가 보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선우가 캐리어를 끌고 중개 사무소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중개인이 안경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어제 찾아뵙겠다고 연락드렸던 최선우라고 합니다.

“아……! 최선우 고객님! 반가워요! 정신 ! 메모해 놓고도 잊어버렸네요.

그제야 중개인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파로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선우는 소파로 다가가 캐리어를 먼저 세우고 앉았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뒤따라 맞은편에 앉은 중개인이 살가운 말투로 물었다.

“아뇨. 괜찮았어요.

“다행이에요. 시원한 커피 드릴까요?

“물로 주세요.

“네. 잠시만요. 얼음 팍팍 타서 가져올게요.

“아, 아뇨! 그냥 적당히 미지근한 거로 주세요. 찬물은 마셔서요.

선우가 돌아서는 중개인을 붙잡아 말했다. 중개인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사라졌다.

선우는 다시 바깥을 봤다.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정말 좋을 같았다. 매일 바닷가를 산책하고, 맑은 공기와 바람을 맞고. 해가 지는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자, 여기요.

어느새 돌아온 중개인이 선우 앞에 잔을 내려놨다. 그제야 갈증이 올라왔다. 선우가 단숨에 물을 비우자 중개인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요즘 많이들 내려와요. 1 살기, 1 살기 하다가 제주가 마음에 들어서 아예 눌러앉기도 하고.

중개인이 먼저 말문을 텄다.

“아, 네…….

선우는 1달이나 1년이 아니라 아예 오래 집을 산다고 말할까 말까 하다가 일단 부분은 답을 미뤘다.

“금액대는 상관없고, 바닷가가 보이고, 산책하기 좋고, 단층이면 된다고 했죠?

“네, 맞아요. 인터넷에 올려 군데 마음에 드는 곳이 있더라고요.

선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터치하는 손길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덩달아 중개인도 의욕적으로 선우가 선택한 집들을 살폈다. 돈에 크게 구애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생각보다는 소박하고 아담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 그럼 가장 가까운 곳부터 볼까요?

선우가 미리 뽑아 리스트를 훑어본 중개인이 의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생각해 곳을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좋아요.

“아, . 전에 어디서 묵으세요?

중개인이 선우의 캐리어를 보며 물었다. 보니 바로 돌아갈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우가 머뭇거리자 중개인이 다시 친절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정해진 없으면 제가 좋은 호텔로 안내할게요. 바로 옆에 바다가 보이는 좋은 곳이 있어요.

잠시 고민하던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숙소 생각을 아니지만, 일단 집을 고른 후에 결정하는 좋을 같았다.

“아뇨. 괜찮아요. 대신 짐을 잠시만 여기에 맡길 있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가능하죠.

중개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 두세요. 어차피 사무소는 잠글 거니까 벽에만 세워 놔도 괜찮아요.

선우는 잠자코 중개인이 손짓한 자리에 캐리어를 세웠다.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캐리어 안에는 신경 써서 챙겨야 물건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보러 갈까요?

선우는 상냥하게 웃는 중개인과 함께 사무소를 나섰다.

              

#29

중개인을 따라간 곳은 주택가가 형성된 조용한 마을이었다. 중개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까지 선우를 안내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 낮은 돌담 뒤로 파랗게 찰랑이는 바다였다. 선우의 걸음이 절로 그리로 향했다.

“와…….

너머로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고, 벽으로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보였다. 설마하니 바다가 이렇게 바다가 가까워질 몰랐기에 선우가 환호했다.

중개인은 한참 바다 구경을 하는 선우를 지켜보다가 슬쩍 설명을 시작했다.

70 옛집이에요. 그래도 안에 리모델링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선우의 시선이 집으로 향했다. 단층으로 지어진 주택은 외관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가을 하늘처럼 진한 파랑으로 칠해진 지붕,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외벽. 한쪽 벽면에는 제주 바다를 그려 놓은 그림이 있었다.

“예쁘네요…….

선우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마당도 살펴봤다. 바닥은 전체적으로 회색 시멘트로 되어 있는데, 현무암으로 토닥토닥 쌓은 돌담 아래에 작은 텃밭이 있었다.

텃밭은 관리가 되지 않아 여름에는 꽃과 풀이 무성했는데 오히려 그게 보기에 좋았다. 텃밭 옆에는 수돗가가, 옆에는 흰색 테이블과 의자 2, 파라솔도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안에 들어가 볼까요?

“아, .

선우는 중개인을 따라 안에 발을 들였다. 확실히 오래된 집이라서 그런지 높이가 낮았다.

“오!

하지만 안은 전혀 달랐다. 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안을 둘러봤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근사하네요.

“그렇죠? 집이 사진발이 받더라고요.

“아니에요. 사진도 좋았어요. 정말 멋진 집이네요.

하지만 아늑하고 따듯한 느낌은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같긴 했다. 선우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었다. 거실 주방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이, 오른쪽에 욕실이 있는 일자형 구조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혼자 지내기 좋을 같았다.

“보시다시피 이미 가구나 기기 같은 갖춰져 있어요. 원래 살던 부부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대로 두고 갔거든요.

“그럼 이대로 사용할 있나요?

“네. 고객님이 원하면 얼마든지요. 가구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전부 가능해요. 비용도 추가로 필요 없고.

그거야말로 선우가 가장 원하는 대답이었다.

“좋네요. 이대로 이용하고 싶어요.

선우가 집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알아차린 중개인이 눈을 반짝였다.

“금액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다른 집들보다도 저렴한 편이에요. 사실 일대에 이만한 금액으로 구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보증금 1,000 연세가 1,500이거든요. , 연세는 알아요? 제주는 보통 1 단위로 계약을 해요. 그래서 달마다 내는 월세랑 달리 1 치를 번에 내죠.

선우는 중개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집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주인 부부는 아주 센스가 있는 사람인 같았다. 아담한 집을 좁은 느낌이 들지 않게 꾸몄을 아니라 소품 하나하나도 허투루 배치한 없었다.

침대 위에 덮인 이불이나 장식용으로 깔아 듯한 천까지 알록달록하고 예쁜 문양으로 되어 있는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것처럼 같아서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다.

“아뇨. 그거 말고.

선우가 불현듯 꺼낸 말에 열심히 떠들던 중개인이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결정할 것처럼 보였는데 아닌가?

중개인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할 , 선우는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침실을 둘러봤다. 액자처럼 작은 창으로 환한 빛으로 물든 바다가 보였다. 그것도 마치 폭의 그림 같아서 선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다른 집을 보러 가실까요?

중개인은 선우가 대답을 미루자 집으로 결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곳을 권했다.

“여기서 차로 5 정도 떨어진 곳이에요.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도 좋을 거예요. 갈까요?

“아뇨. 여기로 할게요. 근데 1 계약 말고 아예 집을 사고 싶어요.

중개인의 제안에 그제야 창에서 시선을 선우가 돌아보며 말했다. 선우의 입술에 빙긋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단정하고 곱게 생기긴 해도 표정이 없던 얼굴이 미소 하나로 바뀌었다. 중개인이 그런 선우를 보며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휴, 우리 고객님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그보다 아예 집을 사겠다고요?

“네. 정말 마음에 들어서요. 혹시 그건 어려울까요?

“어렵지 않아요. 전혀! 사실, 딸네 부부가 살던 집이라서……. 매매한다면 나야 좋죠. 호호, 잘생긴 고객님이 아주 성격도 화끈해서 마음에 드네!

중개인이 주인 부부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털어놓으며 선우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우연도 그런 우연이 있네. 하필 가장 처음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게 중개인의 딸이 살던 곳이라니.

어쨌든 덕분에 바로 집을 있으니 선우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선우는 친근한 태도로 팔을 두드리는 중개인을 바라봤다. 순간에 저를 묘한 눈으로 보던 강진욱이 떠올랐는지 이유를 수가 없었다.

선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려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집을 둘러봤다.

‘어때? 너도 맘에 들어?

선우는 납작한 배를 쓱쓱 문지르며 물었다. 아직 청각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들을 없는데, 아이도 좋아하는 같았다.

‘그래, 여기로 하자.

* * *

집을 나온 선우와 중개인은 다시 중개 사무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진행했다.

“잘 결정했어요. 사실 집이 정말 좋은 곳인데, 매매한다는 분이 없어서 나도 아쉽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군요.

아마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선우는 그러느냐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은 다들 새집을 좋아하잖아요. 그런 구옥은 아무래도 인기도 없고. 천장도 높지 않고 구조도 일자형이라…….

중개인이 한참 말을 쏟아 냈다. 단번에 계약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우는 묵묵히 들어 주었다.

평소에는 나름대로 부러지는 선우인데 유독 중년의 여성들을 상대할 마음이 약해졌다. 덕분에 중개인의 얘기를 한참이나 들었다.

“여하간 우리 집도 근처니까 혹시 필요한 있으면 언제든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선우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캐리어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친절한 중개인은 자신의 차로 선우를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선우는 캐리어를 끌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시 봐도 집이 인상적이었다.

“너도 좋지?

선우가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음파 사진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고작 콩알 같은 아이에게 집을 보여 주겠다는 행동이었다.

“푸흐…….

그런 모습이 뒤늦게 웃겨서 웃음을 흘리던 선우의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엄마도 이랬을까?

선우의 엄마는 싱글맘이었다. 가족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고, 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그냥 선우를 임신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고 말했었다. 햇볕보다 그늘이 깊었던 반지하 단칸방.

엄마는 바빴고, 그래서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 선우가 크면서 가장 익숙해진 엄마의 모습은 피곤해 보이는 잠든 얼굴.

그래도 선우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제가 잠을 , 엄마가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으니까.

선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이 환했다. 거실에 커다란 창을 달아 놓은 덕분에 채광이 제법 좋았다.

“아, 진짜 좋다.

선우는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 두고 거실을 둘러봤다. 다시 봐도 정말 좋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이런 것일까. 집이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이렇게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선우의 지금 기분이 그랬다.

“좋았어. 일단 그럼 치우자! 새집에 왔으니 청소를 해야지.

선우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을 전부 열었다. 주방에 있는 작은 , 거실의 , 침실에 있는 , 욕실에 있는 창까지. 방향에서 바람이 몰려들어 오니 금세 공기가 달라졌다.

청소하기로 놓고 선우는 저도 모르게 가장 바람이 부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고 바람만 맞고 있어도 괜찮을 같았다.

때리고 앉아 마당을 보다가 문득 강진욱에게 아직 연락하지 않았다는 떠올렸다. 점심때도 했으니 이제는 슬슬 정도 하기는 해야 텐데.

“귀찮네…….

그간 누구한테 안부 인사라는 적이 없던 선우에게 매일, 그것도 때때마다 연락해야 하는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 아닐 없었다.

물론 업무적으로 연락하는 작가나 거래하는 인터넷 서점, 플랫폼 담당과 통화하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적으로야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니까.

솔직히 강진욱이랑은 친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연락이 되면 서로 좋은 관계이지.

그런데 부득불 그렇게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는지 도통 수가 없었다.

그때,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지잉, 지잉. 울려 댔다. 선우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봤다.

발신자는 강진욱의 전화였다.

“아.

뭐야. 어디서 도청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감시하나?

타이밍 좋게 울리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선우는 한숨과 함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도착했어?

나직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약간 다정하게도 들렸다.

만날 때마다 싸우기만 해서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나. 아냐, 그럴 리가. 착각한 거겠지.

“네…….

도착은 이미 시간 전에 하고 집까지 계약해서 청소도 마친 선우가 많은 의미를 담아 짧게 대답했다.

              

#30

- , 미안해요. 이동하느라 연락한다는 깜빡하고 잊었어요.

핸드폰 너머에서 최선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도 미안해하는 같지도 않은데 사과는 잘했다.

“괜찮아. 이번에도 전화 받으면 바로 찾으러 가려고 했어.

강진욱은 역시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진지한 얼굴로 했다.

- 아…….

낮게 흘러나오는 소리에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강진욱이 말한 대로 있는 남자라는 알고 있기에 나오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저녁은?

- 아직이요. 시간도 이른데.

강진욱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탁상시계로 향했다. 확실히 이른 시간이긴 했다. 이제 4시였다.

물론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선우가 점심을 먹는다는 연락이 없었으니 걸렀을 거다.

하긴 그럴 정신도 없었겠지.

“그렇군. 그럼 하고 있어?

- 그냥 뭐…… 쉬고 있죠.

강진욱은 선우의 대답을 들으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에는 아까부터 시간대별로 차곡차곡 도착했던 사진 장이 열려 있었다. 사진은 전부 최선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병원에 들어가는 모습, 나오는 모습, 택시를 타는 장면과 공항에서 직원에게 무언가를 묻는 장면. 항공사 카운터에서 티켓을 사는 옆모습과 게이트에 앉아 있는 뒷모습, 비행기를 타는 모습까지.

운항 최선우의 사진이 없었다. 좁은 공간인 만큼 발각될 있어서 동행한 가드가 조심한 같았다.

하지만 최선우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가는 장면과 해수욕장에 도착해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찾는 모습까지.

선후의 모습이 시간의 차이를 거의 두지 않은 수십 장으로 나뉘어 강진욱의 메시지 앱으로 전달되었다.

“그래. 식사도 든든하게 챙겨 먹어. 여행할 먹는 제일 중요해.

- ……네.

대답이 템포 늦었다. 아마 최선우는 강진욱이 자신이 먹는 것까지 신경 쓰는지 몰라서 고민할 거다.

옛날부터 최선우와 강진욱의 관계는 그랬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다른 한쪽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도리어 다른 쪽은 내내 오해하고 있는 같기도 했지만, 굳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그런 기회는 그때 지나갔다고 생각하니까.

그보다 강진욱은 지나간 과거를 신경 쓰기보단 앞으로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엄두도 냈을 생각이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니까.

“잠도 일찍 자고, 많이 . 많이 돌아다니지 말고.

강진욱은 병원에서 잠시 마주했던 최선우를 떠올렸다.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마주한 같이. 그때는 그냥 최선우가 일부러 그런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최선우는 과거를 잊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이후 최선우의 태도도 예전과 달라서 강진욱은 자신이 포기한 알았던 감정을 도로 끌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밀어내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을.

- 강진욱 .

꼬박꼬박 대꾸하던 최선우가 비로소 그만하라는 의미처럼 강진욱을 불렀다. 이제는 전무님이 아니라 강진욱 씨가 아예 입에 붙어 버린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강진욱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강진욱은 중개인과 단층짜리 집에 들어서는 최선우의 모습을 봤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점심도 챙겨 먹지 않고 가장 처음에 들른 곳이 저런 집이라니.

과연 저곳은 갔는지 이유도 알고 싶었다. 물론 그건 최선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네 말대로 책임지려고 하는 거잖아. 금액 생각하지 말고 챙겨 먹어. 내가 카드 팍팍 쓰면서.

- ……

최선우는 이번엔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뜨끔해서 잠시 대답을 망설였으려나.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선우는 지금까지 강진욱이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니까. 제주에 가서 집을 보러 간다는 소리를 수는 없었겠지.

원래 최선우는 이렇게 철저한 성격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그런 것까지 생각할 알게 되었나 보다.

- 끊을게요.

잠시 침묵했던 최선우가 통화를 종료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강진욱도 기꺼이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래. 쉬고. 저녁 먹을 메시지 보내는 잊지 말고.

강진욱이 말했다. 선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이나 눈빛은 부드럽기 이를 없었다.

- 알겠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마침내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강진욱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놨다. 그리고 몸을 반듯이 세우고 말했다.

마치 조금 다정한 모습은 거짓이었다는 분위기는 차갑게 바뀌었다.

“마저 보고해.

강진욱이 통화하는 내내 대기 중이던 비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최선우가 해수욕장 인근 주택을 구매했습니다.

강진욱의 눈썹이 올라갔다. 시선은 방금 보았던 단층집이 찍힌 사진으로 향했다. 제주에 가자마자 중개인과 곳이 여기였다.

때문에 그랬나 했더니. 집을 보러 거였나 보다.

“주택?

“네. 70 정도 집을 리모델링한 것인데 집주인이 가재도구까지 전부 두고 가서 당장 살아도 좋다고…….

“그걸 오늘 바로 샀다고?

집이 어떤 상태인지는 관심이 전혀 없는 강진욱이 싹둑 말을 잘랐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개인을 만나 얘기를 보니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며 곧바로 사겠다는 의사를 밝혔답니다. 본래 그런 집은 1달이나 1 정도 빌리는 형태로 주로 운영이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비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투자 목적도 아니고?

강진욱의 질문에 비서는 그건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중개인 말로는 투자보다는 실거주를 위해서 매매한 같다고 했습니다.

“흐음…….

최선우가 일주일간 휴가를 가겠다기에 무엇 때문에 그러나 궁금했더니.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날아간 것도 의외였지만, 난데없이 집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거주하려고 집이란 말이지.

일단 최선우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진욱은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최선우의 집을 정리하다가 나온 물건 중에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따로 모았는데, 이건 전무님께서 보셔야 같아 가지고 왔습니다.

비서가 책상 위에 내려놓은 것은 서류 봉투였다. 강진욱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보라며 눈짓했다.

비서가 물러간 강진욱은 곧장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A4 용지 1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빼내어 내용을 확인한 강진욱의 한쪽 눈썹 끝이 삐쭉 올라갔다.

서류 가장 상단에는 ‘계약서’ 글자가 진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 .

책상을 두드리는 검지의 속도가 일정했다. 마치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강진욱의 표정과 같았다.

그때, 한쪽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의 소리가 울렸다. 강진욱은 곧바로 낚아채 액정 화면을 바라봤다. 최선우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더더욱 반갑지 않은 강진태였다.

“왜?

-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냐.

그러는 저는 뭐가 다르다고. 속으로만 그렇게 말한 강진욱이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무슨 일이야.

- 선우 , 오늘 아예 팔렸다더라? 너도 아나 해서.

“알아.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 무슨 상관은! 약혼자의 집이 사라졌잖아. 뭐야, 설마 둘이 살림이라도 차리기로 했어?

강진태의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농담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떠보는 듯한 투였다. 그래서 강진욱은 더더욱 짜증이 났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최선우랑 살림을 차리든 결혼을 하든.

- 상관이 없어. 우리 집에 들일 사람의 일인데.

강진욱의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글쎄.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아무리 은인의 집안이라고 해도 베타잖아? 열성만 해도 핏줄 흐려진다고 반대하실 분이.

그러면서도 굳이 곁에 최선우를 붙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진욱의 시선이 다시 한번 비서가 두고 서류로 향했다.

강진욱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걸렸다.

- 정식으로 혼인할 사이일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자격도 없으니까. 그래?

강진태의 질문에 강진욱의 입술에 걸려 있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강진태가 말하는 최선우를 대상으로 하는 아니었다. 강진욱의 어머니에게 하는 소리였다.

제대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아들인 강진욱 때문에 평생 외롭게 살다가 죽음마저도 혼자 견디다가 버린 어머니.

- 그래도 다행이네. 네가 선우 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같으니.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은인의 아들이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거든. 잘해 .

강진태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 혹시 알아? 뒤늦게라도 오메가로 발현할지. 원래 집안에 오메가가 많이 나왔다는데. 선우 군도 가능성이 있을 있지. 물론 우성이 아니라면 소용없겠지만.

귀에 썩은 물을 들이부은 같다. 강진욱이 기어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는 들어 필요가 없을 같았다.

“끊어.

- , 잠깐! 그래서 선우 군은 어디…….

강진태가 최선우의 행방을 묻는 같았지만, 강진욱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불쾌하게 눈을 찌푸린 있던 강진욱의 시선이 다시 한번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 최선우는 뭐가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강진욱은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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