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OHC Chapters 11-20

#11

“네. 맞아요. 시한부예요. 그러니까 퇴사시켜 주세요!

선우가 그렇게 외치듯 말하며 재빨리 들고 있던 사직서를 내밀었다.

“뭐야? 이건?

전무의 눈썹이 위로 치켜세워졌다. 선우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사직서요. 전무님, 그간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던 사과드립니다. 죄송했습니다.

고개를 들었더니 전무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이만 그만두겠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선우를 전무가 믿을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다니는 폐만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되죠. 그러니 역시 퇴사가 맞는 같습니다.

“그간에는 제대로 것처럼 말하는군.

전무가 곧바로 비웃음을 날렸다. 지난 3년간 옆에서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비서가 짓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니가 일이 뒤를 졸졸 따라다닌 말고 있어?

“뭐 그건 제가 기억이 나서 모르겠지만, 앞으로 성실히 살아보려고요.

선우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성실하게 살겠다고? 그런 거라면 옆에서 .

“아뇨. 그건 절대 돼요. 전무님께서 그렇게까지 신경 주실 필요도 없고요.

옆에서 하라니.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그냥 네가 없는 인생에서는 제일 편하다고!

차마 선우는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뭐라고?

전무의 얼굴이 굳었다. 부리부리한 눈이 선우를 무섭게 노려봤다.

“전무님은 그냥 저한테 신경을 끄시라고요. 제가 하든, 어떻게 지내든.

선우는 그렇게 말하고 누가 잡을세라 돌아서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뒤에 전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언제 돌아왔는지 비서실 입구에 있던 비서와 주임도 놀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이미 사직서 제출했으면 됐다. 이만하면 만큼은 했다고 생각한다. 선우는 비서실 직원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미리 준비해 짐을 집어 들었다.

“선, 선우 ? 뭐야? 무슨 일이야?

“전무님께 사직서 다시 드렸어요. 제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무래도 다닐 수는 없을 같아요.

“헉!

비서 옆에 있던 주임이 입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건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최선우가 죽을병에 걸렸다니……!

비서의 눈동자가 안타까워하는 빛으로 물들었다.

“아까 말씀하신 이번 영수증 거의 정리 마쳤어요. 나머지만 처리해 주세요. 끝까지 책임지고 마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선우는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비서실을 빠져나갔다.

“최선우!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전무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움찔 몸을 떨며 걸음을 멈췄다.

‘왜 갑자기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진짜 깜짝 놀랐네.

매번 비서, 비서 하더니. 최선우라니. 물론 전에도 불렀지만, 그런 생각도 하고 선우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임신 초기에는 뭐든 조심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선우는 납작한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놀랐을 아이를 진정시키고 몸을 돌렸다.

전무가 굳은 얼굴로 있었다.

“부르셨어요?

“너, 네가 감히…….

감히는 뭐야.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선우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기 직원도 아니니까 다시 말씀드리겠는데, 저한테 반말하지 마세요. 강진욱 .

이제 사직서도 제출했겠다, 더는 전무라고 필요도 없겠지.

선우는 그렇게 냅다 쏘아붙이고 몸을 돌려 버렸다. 무서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절대! 그냥 지체하고 있다가 붙잡힐 같아서였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선우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다행히 곧장 문이 열렸다. 안에 오르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굳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무와 비서실 직원들이 보였다.

다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우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대로 문이 닫혔다.

“휴…….

이게 뭐라고 잔뜩 긴장했는지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전무 눈을 보니 붙잡히면 무사히 끝날 같지 않았다.

다행히 벽에 기대어 서자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가 빠르게 변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선우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아침에처럼 대기 중인 택시는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려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택시가 기미가 없어 선우는 핸드폰으로 부르려고 앱을 실행했다.

“최선우!

그때 이름이 불리고 한쪽 팔이 붙잡혔다.

“아…….

어찌나 잡혔는지 몸이 뒤로 쏠렸다. 선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봤다. 전무가 씩씩거리며 선우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뭡니까? 아프니까 놓으세요.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전무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선우는 ‘악! 소리를 내며 팔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병원에서 들었다면서요! 그럼 무슨 얘기가 필요해요? 믿기 싫으면 마세요.

“야, 비서!

“왜, 강진욱!

선우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놀란 전무가 눈을 크게 뜨고 선우를 바라봤다.

“알아서 사라지겠다는데 이러세요. ! 싫다고. 인생에서 꺼지라고!

광공은 싫다. 광공 놈에게 임신한 걸려 죽는 싫다.

선우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전무의 손을 뿌리쳤다. 때마침 택시 1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보였다.

선우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택시 표시등에 예약이라고 쓰여 있는 보고 손을 내렸다.

“겁도 없이 이따위로 굴어?

뒤에서 얼음물을 뒤집어쓴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목에서부터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선우는 자신이 광공 스위치를 잘못 눌렀다는 알아차렸다.

선우의 목이 삐걱 소리가 나는 것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쳐다보는 전무의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헉!

그냥 얌전히 죄송하다 말하며 그만두겠다고 할걸. 싫다는 말이라도 하지 말걸!

선우는 후회하며 뒷수습이라도 볼까 입을 열었다.

“저기, 전무님…… 말은…….

“감히 퇴사를 하겠다고?

그때 전무가 선우의 말을 잘라 버리고 소리쳤다.

“헛소리 말고 옆에 있어. 절대 나가니까.

그리고 전무는 들고 있던 사직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 미친놈처럼 눈을 빛내는 전무가 당장 자신도 종이처럼 갈가리 찢어 버릴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선우의 눈에 다가오는 택시 1대가 보였다. 다행히 이번엔 택시였다.

선우는 팔을 마구 저으며 택시를 불렀다. 다행히 택시가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선우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최선우!

사직서를 갈가리 찢어 바닥에 내던진 전무가 뒤늦게 선우가 택시를 것을 알아차리고 잔뜩 화가 얼굴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사님. 얼른, 얼른 출발해 주세요!

드라이빙 미러 너머로 기사가 선우의 다급한 얼굴을 보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

택시에 오른 선우는 까맣게 내려앉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그만두게 하겠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전무를 떼어 놓고 오느라 아주 진이 빠졌다.

조금만 곁에 있었으면 다시 한번 기절해 버렸을지 모른다.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은 선우는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의사의 이름을 검색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신호가 가기도 전에 한수진이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저예요, 최선우.

- ! 최선우 .

한수진은 반색하며 선우를 불렀다.

“강진욱 씨가 병원에 찾아갔었다면서요. 저한테 말씀 주셨어요?

- 강진욱? , 설마 아침에 찾아온 사람이 강진욱이라는 남자인가…….

한수진이 혼잣말하듯 뱉은 소리에 선우가 움찔했다.

“강진욱 씨가 오늘 아침 병원에 갔었어요?

그냥 외부에 미팅이 있어서 사무실에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 남자가 갑자기 와서는 최선우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어요. 어찌나 무시무시하게 다그치던지…… 무서워서 혼났네요. 그래서 최선우 씨와 말한 대로만 전했어요.

2개월이라고요?

- 아…… 그건……!

한수진은 당황했는지 잠깐 말을 멈췄다. 선우는 한수진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절 시한부로 알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설명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 주셔서.

어쨌건 임신한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 선우는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한수진이 한숨과 함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 사람이죠? 최선우 상대?

그리고 꺼낸 말에 선우의 숨도 덜컥 멈췄다.

“어, , 그게…….

선우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최선우 씨가 원한다면 계속 침묵할 있어요. 근데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을 거예요.

한수진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 임신한 오메가는 호르몬의 변화로 항시 페로몬이 나오게 돼요. 다행인 다른 알파나 오메가는 아주 가까이에서 맡지 않은 이상 최선우 씨의 페로몬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거예요.

나한테서 오메가 페로몬이 나온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소리에 선우의 안색이 달라졌다.

- 최선우 . 만약 임신시킨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면, 상대와 진지하게 대화해 보세요. 앞으로 어떻게 하는 좋을지.

혼자 책임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수진이 조심스럽게 꺼냈다. 잠시 당황했던 선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여전히 상대는 몰라요. 앞으로도 기억나지 않을 거고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부분은 고민해 볼게요. 그리고 선생님, 그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 최선우 씨……?

한수진은 선우가 건네는 인사에 의문을 표하며 그를 불렀다. 마치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전화를 종료했다.

사실 선우는 한수진에게 괜찮은 병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찾아봐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수진이 지금 말을 듣고 보니 도움을 청하면 같았다.

전무는 선우의 담당의까지 만났다. 언제 다시 찾아갈지 없는 일이고, 다음에는 시한부가 아니라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래. 그냥 이대로 튀자.

선우는 빠르게 달리는 창밖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퇴사했다.

이제 평온한 일상을 위해 움직여야 때였다!

              

#12

* * *

최선우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겨진 강진욱의 표정엔 얼이 빠져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전무님!

회의를 마무리하고 오느라 뒤늦게 소식을 들은 비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전무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딱딱했다. 눈빛도 형형하게 빛났다.

당장에라도 일을 같은 전무의 분위기에 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전무는 오랜만이었다. 비서가 바짝 긴장했다.

그간에는 어떻게든 정상처럼 보이려고 절제해 왔는데 대체 왜……?

“곽 비서, 당장 최선우 잡아 .

전무가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명령했다.

“네? 비서를요? 비서가 어디 갔습니까?

회의를 끝내고, 임원들과 업무 조율을 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터라 비서는 최선우가 나갔다는 것까지만 들었다.

그사이 다른 일이 있었던가?

“감히 나한테서 도망을 ? 당장 이리로 끌고 .

하지만 비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가슴을 들썩이는 전무를 보고 의문을 삭이며 얼른 전화를 걸었다.

“당장 준비하고 가드 따라와.

* * *

전무의 명령으로 비서가 선우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피스텔로 달려갈 , 선우는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 있었다.

“집 내놓으려고요. 최대한 빨리해 주세요.

선우는 중개인이 손님 접대로 커피를 거절하고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없어 잔을 내민 중개인이 쯧쯧 혀를 찼다.

“급매로 하면 제값 받을 있는데…….

“그건 괜찮아요.

찬물을 여러 나눠 마시느라 선우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돈이 중요한 아니었다. 선우의 말에 중개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위아래로 끄덕였다. 세상엔 사정 많은 사람이야 있는 법이고, 앞에 있는 젊은 남자도 그런 부류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이나 급하게 돈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마 갑작스럽게 발령이라도 받아 외국에 가게 아닐까 짐작이 되었다.

대충 그렇게 상황을 이해한 중개인이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가능한 서둘러 보죠. 그럼 이사는 언제쯤 하실 예정이세요?

“이번 주…….

선우는 이번 안에 정리하겠다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아니, 내일요.

“내일요?

중개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급매해 달라고 오는 사람을 종종 상대해 봤지만, 이렇게 하루 만에 가겠다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네.

“저, 그럼 , 거긴, 빈집입니까?

“아뇨. 오늘,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전부 비울 거예요.

선우는 중개 사무소를 나서자마자 당장 폐기물 업체에 전화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장 빨리 일을 처리할 곳에 맡길 예정이니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

“그래요. 그럼 , 알겠습니다.

다시 호기심이 머리를 들고 올라왔지만, 중개인은 고개를 주억이며 궁금증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당장 집이 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일단 매물을 내놓기는 텐데…….

“네. 그렇게만 주셔도 상관없어요.

선우의 말에 중개인은 또다시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관심을 끊고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럼 일단 본다는 사람 있으면 연락할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하나를 처리한 선우가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나왔다. 아직도 바깥은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쉴까 생각하다가 선우는 마음을 바꿨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왕 이렇게 아예 생각해 두었던 소도시로 가서 집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같았다.

일단 그러자면 은행에 들러야 했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아야 했으니까.

선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은행을 무작정 찾아갔다. 밑져야 본전, 혹시 거래하는 곳인지 물어보고 아니면 다른 곳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행운이 따랐는지, 마침 주거래 은행이었다.

선우는 신원이 확인되자마자 VIP실로 안내되어 지점장을 사람을 통해 자신의 재산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됐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자산에 놀라 얼이 빠진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새로 발급한 통장에는 부담스러운 숫자가 찍혀 있었고, 신탁에 맡겨진 금액 또한 어마어마했다.

지점장의 권유로 존재도 몰랐던 대리인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보니 비서 앞으로 부동산과 빌딩도 채나 있는 같았다.

“진짜…… 부자였구나.

이런 재산이라면 진짜 평생 백수로 놀고먹어도 같았다. 아니, 작은 서점 하나 차려 놓고 적자를 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같았다.

선우는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해 현금을 뽑아둔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망설이지 않고 택시에 올랐다.

“허어……. 거긴 거리가 있어서 비용이 많이 나올 텐데?

“괜찮아요. 더블로 드릴게요.

이래 봬도 남아도는 돈인 백수 선우가 손가락 2개를 과감하게 펼쳐 들었다. 택시 기사가 눈을 끔뻑이며 잠깐 계산해 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갑시다! 까짓 , 드라이브 가는 치지 .

드라이브도 하고 돈도 더블로 받고. 택시 기사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하여 선우는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떨어진 소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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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선우의 오피스텔에는 비서가 양복 입은 가드 셋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오피스텔 앞을 지키던 경비원이 비서를 발견하고는 꾸벅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비서도 무표정하게 눈인사를 하고 위로 올라갔다. 최선우의 앞에 비서는 망설이지 않고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이미 예전에 최선우의 비밀번호를 알아 두었기에 잠금을 해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간 비서는 아직 선우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알아차렸다. 무단으로 침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을 함부로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던 비서는 가드 셋을 현관에 세워 두고 자신만 거실 소파에 앉아 선우가 오기를 기다렸다.

10분쯤 지나자 전무에게 연락이 왔다.

- 최선우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뒤로 20분마다 전무가 전화했다. 오늘 전무는 해외사업부와의 회의로 바쁜 거로 아는데 대체 틈을 어떻게 건지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왔다.

- 최선우는?

“아직…….

그렇게 하늘이 붉은 노을로 물들 때까지 최선우를 기다리던 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선우는 대체 어디로 거야!

* * *

비서가 행적을 궁금해하는 선우는 택시 기사에게 더블로 요금을 도착한 소도시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곳에 도착하고 보니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하지만 아주 시골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선우는 거리를 걷다가 번쩍번쩍 빛나는 핸드폰 매장을 발견하고 그리로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선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의 앞에는 투명한 진열대가 있었고, 다양한 색과 디자인으로 핸드폰들이 놓여 있었다.

“찾으시는 기종 있으세요?

“아뇨. 당장 사용할 있는 추천해 주세요.

“아, 그럼 이건 어떠세요?

직원은 재빨리 선우를 살펴봤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스마트폰을 올려놨다.

“이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에요. 사진도 찍히고, 속도도 빠르거든요. , 24개월 할부로 하시면 기기 지원금도 많이 나오고 사은품도 넉넉하게 챙겨 드려요!

물론 이건 매장에서 가장 값비싼 핸드폰이기도 했다.

“기기 변경만 하시기보다는 아예 통신사를 옮기시는 혜택이 많으세요. 이거 보시면 여기가 적용이 많이 되는 보이시죠?

직원이 패드를 앞으로 내밀어 화면을 보여 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주세요.

선우는 들어 것도 없다는 선뜻 결정을 내렸다.

“그럼 할부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현금으로 낼게요. 얼마죠?

직원은 현금 부자인 선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기에 할인된 가격을 찍었다. 최신 기종 스마트폰을 손에 선우가 덤덤한 얼굴로 매장을 나섰다.

직원이 사은품이라고 잔뜩 챙겨 줘서 다른 손에는 쇼핑백도 큼지막하게 들려 있었다. 조금 걷던 선우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다시 내려다봤다.

‘세상에……. 최신 기종을 현금으로 완납해서 사다니.

삶에 이런 일도 있을 있구나. 새삼스럽게 원작 최선우의 재산이 많다는 실감했다.

물론 그랬으니까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수도 있었고, 집도 급매로 내놓을 있었겠지.

‘이런 재산이 있으면서 엑스트라 이물질 1이라니. 인물도 돈도 아깝다, 아까워.

선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머리 위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우는 일단 오늘 곳부터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아담한 호텔이 있었다. 약간 낡은 거로 봐서는 지어진 제법 같았다.

거기다 이름만 호텔이지 시설은 모텔보다 약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것치고 정도면 나쁘지 않은 같았다.

선우는 가장 좋은 방을 달라고 하여 키를 받았다. 꼭대기 층이라는 말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더니 과연 객실은 아주 널찍했다.

털썩.

선우는 그대로 침대로 다가가 누워 버렸다.

“피곤해.

나름대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났더니 몸이 아주 노곤했다. 일단 누웠더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눈을 끔벅이다가 그대로 감았다. 피로에 잠긴 몸은 금세 잠이 몰려들었다.

선우가 그렇게 널찍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단잠에 빠져들던 시간, 전무는 해외사업부와 지루한 미팅을 끝내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선우는?

-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전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소재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시간 동안 최선우의 집에서 죽치고 있었으면서 아직 위치도 파악도 놨다니.

전무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최선우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에서 들려온 최선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3

전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시도해 봤지만, 계속 핸드폰에서는 무미건조하게 같은 안내만 반복했다.

그때마다 강진욱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변해 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최선우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믿기 싫으면 마세요. 알아서 사라지겠다는데 이러세요?

뒤이어 따위는 싫다고, 자기 인생에서 꺼지라며 소리쳤지만, 전무는 굳이 그런 말까지 기억하진 않았다.

강진욱의 기억 속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저를 필사적으로 떼어 내던 최선우의 얼굴만 남았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다시 핸드폰에서는 최선우가 사라졌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덜컹.

강진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묵직한 가죽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강진욱의 얼굴이 살벌했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비서실 직원들이 기세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강진욱은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 전무님!

그리고 강진욱은 목소리도 듣기 전에 상대가 은은하게 내비치는 페로몬을 느꼈다. 화사하고도 달콤한 장미 .

그것도 활짝 피어나 존재를 마음껏 뽐내는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강진욱이 멈칫하여 상대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장미 향을 온몸에 두른 오메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해외사업부 사원 임해원입니다. 회의 자료 정리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

강진욱은 임해원이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고 다시 한번 그가 내보이는 페로몬을 맡아 봤다.

“네 페로몬, 원래 이런 냄새야?

“……네?

생각지 못한 질문에 임해원이 멍하니 되물었다.

“원래 이런 냄새냐고. 페로몬.

“아……. 거슬리시나요? 그럼 갈무리하겠습니다.

임해원이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페로몬을 단속했다.

우성 오메가로 그간 페로몬을 향수처럼 자연스럽게 둘러 왔다. 그랬기에 누군가가 불쾌해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임해원은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어쩔 몰라 했다.

“전무님,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임해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청초한 미인이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로 사과하는 모습에 비서실 직원들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강진욱은 임해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우연히 맡았던 페로몬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였지? , 2 전이었군.

그때, 강진욱은 거리에서 자신의 발길을 사로잡는 페로몬을 느낀 적이 있었다.

본래 강진욱은 극우성 알파로 자신의 페로몬을 철저하게 조절할 있을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상대의 페로몬을 맡을 수도, 페로몬으로 덮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필 러트가 가까워져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몸살기가 있었고, 열도 차츰 올라가는데 정부 관계자와 중요한 회식이 있어 먼저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회식에 참여한 정부 관계자들은 늦게까지 마시는 어지간히도 좋아했다. 자정을 넘기는 일도 많았고, 심할 때는 아예 아침 해가 뜨는 보고 돌아가기도 했다.

강진욱은 그날도 독한 인내심으로 자정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손님들을 먼저 보내 놓고 약간 멍한 정신으로 도로에 있었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군.

강진욱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아무리 자기 조절이 뛰어난 극우성 알파여도, 1년에 오는 러트사이클은 피할 없었다.

상태도 좋지 않은데 술도 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니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다 사고 치기 전에 호텔에 박혀서 이틀은 꼬박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러트사이클이 알파는 고삐 풀린 짐승과 같았다. 아니, 나아가 러트사이클 상태의 극우성 알파는 통제 재앙에 가까웠다. 스스로 통제력이 뛰어나다 생각하는 강진욱도 그때만큼은 스스로 컨트롤하는 것을 자신할 없었다.

익숙한 차가 강진욱의 앞에 멈추어 섰다. 강진욱은 아무 생각 없이 차에 타려다가 낯선 향을 느끼고 멈칫했다.

마치 익은 사과처럼 풋풋하면서도 상큼한, 그러면서도 입맛을 돋우는 은은한 달콤함도 함께 묻어나는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강진욱은 페로몬에 식욕과 놀랍게도 색욕을 동시에 느꼈다.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과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보이던 운전기사가 아니라 최선우였다. 최선우는 베타였다. 당연히 페로몬을 내보낼 없었다.

3년간 강진욱이 최선우를 쫓아내지 않고 곁에 있는 것을 묵인한 이유는 때문이었다. 물론 외에 다른 이유도 없진 않았지만.

그거야 강진욱만이 품은 비밀이었고.

〈네가 여기에 있어?

강진욱이 싸늘하게 물었다.

〈기사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해서 제가 모시려고 기다렸어요.

최선우는 밖에 있는 강진욱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쥐고, 상체를 앞으로 바짝 붙이고 있었다.

모습에는 초보 티가 났다.

〈하.

강진욱이 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평소보다 이르게 러트가 같아 짜증이 났는데 하필 최선우라니.

강진욱은 와락 얼굴을 구기고 문을 닫으려 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고, 이번엔 아까보다 진하게 오메가의 페로몬이 풍겨 왔다. 비에라도 젖은 약간 축축하면서도 싱그럽고 달콤하면서도 새큼한 사과 . 깨물면 아삭 소리가 나며 식욕을 자극할.

인식한 순간 밑에 침이 고였다.

〈……?

강진욱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우산을 쓰고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강진욱은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해외사업부에 새로 들어왔다던 오메가 임해원이었다. 진한 페로몬을 풍긴 상대는 오메가였던 거다.

하필이면 같은 회사에 있는 오메가라니. 차라리 비서가 강진욱의 러트사이클을 위해서 데려온 오메가라면 강진욱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끌고 갔을 것이었다.

하다못해 아예 얼굴도 모르는 오메가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일하는 회사 직원은 함부로 손댈 없었다.

강진욱이 다소 남들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인성 교육을 통해서 하지 말아야 그래도 조금이나마 지키려고 노력할 줄은 알았다.

물론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괜히 회사 내에 있는 오메가를 건드렸다가 아버지 회장이나 강진태의 쓸데없는 관심이 쏠리는 싫은 것도 있었다.

둘의 농간 때문에 최선우 하나 곁에 들인 것만으로도 강진욱에겐 아주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이었다.

강진욱은 미간을 좁히며 대기 중이었던 차에 올랐다. 택시를 기다리겠다고 오메가와 같이 있는 위험했다.

그런데 이미 강진욱은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러트가 빨리 기미가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느낄 억제제를 미리 받아 뒀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하필 거리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할 줄이야.

만약 페로몬을 다시 맡으면 어머니의 인성 교육이고 뭐고 그대로 오메가를 낚아채 호텔로 갈지도 몰랐다.

G 호텔로 .

차에 올라탄 강진욱이 명령했다. 최선우는 출발시키려다 말고 드라이빙 미러로 강진욱을 건너봤다. 하지만 강진욱은 그때 비서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보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곽 비서, 내일부터 3일간 일정 전부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메가 하나 펜트하우스로 보내고.

말을 던진 강진욱이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아 버렸다. 러트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술기운이 올라오기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귀도 먹먹하게 잠겼고, 몸에도 뜨끈뜨끈하게 열이 느껴졌다.

〈김 기사, 창문 전부 열어!

강진욱이 눈도 뜨지 않은 명령했다. 아직도 코끝에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듯해 환기를 해야 같았다.

지이잉.

창문이 열리며 봄밤의 상쾌한 공기가 안을 가득 채웠다. 강진욱이 숨을 느리게 풀어내며 몸을 시트에 완전히 늘어뜨렸다. 강진욱은 운전을 하는 기사가 아니라 최선우라는 것도 잊어버린 약간 선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추었다. 그때쯤 강진욱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는 중이었다.

강진욱은 누가 자신을 부축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아직도 코끝에 풋풋한 사과 향이 나서 곤란하면서도 흥분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강진욱은 비서가 보내온 오메가와 격하고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다. 러트가 극우성 알파는 위험하고 위협적인 짐승이었다.

그의 아래에서 얼굴도 모르는 오메가는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그러면서도 쾌락에 잔뜩 젖어 들었다.

강진욱은 자신의 페로몬에 절어 마치 히트라도 것처럼 탐욕스럽게 저를 집어삼키는 오메가를 마음껏 탐했다. 그리고 이튿날 최선우가 심부름을 왔다면서 쇼핑백을 들고 호텔에 나타났다.

최선우는 마치 크게 몸살감기를 앓고 나은 같이 초췌하고 힘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눈에는 웬일인지 어울리지 않게 설움을 가득 담아 두고 있었다.

강진욱이 ‘최 비서’가 아닌 다시금 ‘최선우’로 인식했던 최초의 계기는 그것이었다.

              

#14

“전무님.

임해원이 다시 한번 강진욱을 불렀다. 강진욱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앞에 오메가를 바라봤다.

다시 맡아 봐도 2 페로몬이 아니었다. 그럼 그때 자신이 느낀 다른 오메가의 것이었던가.

하지만 자리에 있던 신입 하나뿐이었는데?

아니, 혹시 모르지.

2 전에는 러트가 임박했었으니 근처 보이지 않던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았던 것일지도.

잠깐 강진욱의 뇌리에 최선우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손가락 틈새 모래알처럼 금세 빠져나갔다.

“내 자리에 가져다 .

강진욱이 차갑게 말을 내던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임해원이 말이 있는 얼굴로 입을 뻐끔 열었지만, 문은 가차 없이 닫혔다.

그대로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온 강진욱은 가장 앞에 주차된 자신의 차에 올라타 곧바로 출발했다.

“곽 비서.

비싼 차를 함부로 몰아 지하를 빠져나온 전무가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전무님.

“당장 사람 풀어서 최선우 행적 찾아내. 필요한 인력 가져다 쓰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알겠어?

강진욱은 말만 내던지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도로는 퇴근 시간이라 가다 서다 하는 차량이 제법 많아 차량 정체가 심했다.

강진욱은 짜증스러워하는 얼굴로 앞을 막아선 차들을 노려봤다. 갓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도심 도로에는 그조차 없었다.

그냥 밀어 버릴까.

그때, 강진욱의 위험한 생각에 브레이크라도 전화가 울렸다. 강진욱의 시선이 거치대에 고정된 핸드폰으로 향했다. 곧이어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달갑지 않은 이름이 화면에 있었다.

 

[강진태]

 

강진욱의 배다른 형이었다.

“왜.

- 너는 전화를 받으면 인사를 해야지.

“용건.

강진욱은 상대가 무어라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얼른 말이나 하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핸드폰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 내가 너한테 바라겠어.

바라는 없으면 대체 전화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강진욱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저조한 기분으로 인간과 그다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 선우 , 집을 급매로 내놨던데. 무슨 일이야?

강진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진욱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

차가 급하게 멈추며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강진욱의 뒤를 따라오던 차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 화가 났는지 ‘빵빵. 경적을 울렸다.

“뭐?

- 뭐야. 몰랐어? 선우 군이 오늘 집을 내놨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 1시간 전에 자료 올라왔어. 확인해 .

강진욱이 드라이빙 미러 너머로 뒤차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녁이 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최선우. 그리고 핸드폰마저 없애 버린 최선우.

불길한 예감이 목뒤를 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선우 챙기라고 했잖아. 은인 집안의 유일한 핏줄이라고 아버지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데. 아버지한테 들어가기 전에…….

강진욱은 무어라 떠들어 대는 강진태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강진욱의 발이 옆으로 옮겨 액셀러레이터를 내리눌렀다.

부우웅.

격한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차량 사이를 강진욱은 무법자처럼 통과해 버렸다.

기겁한 차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요란한 경적과 비명, 욕설이 도로를 가득 채웠다. 물론 강진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과속하고, 신호를 위반하고 도로를 온통 마비시키며 강진욱이 달려간 곳은 최선우가 다니던 병원이었다.

끼기기긱.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차가 병원 주차장에 멈추어 섰다. 차는 주인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선도 지키고 삐딱하게 꽂히듯 주차되었다.

강진욱은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와 병원으로 들어갔다. 극우성 알파가 뿜어내는 흉흉한 분노의 페로몬은 주변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렁일렁하는 기운에 사람들이 흠칫흠칫 물러섰다.

“저 무슨 일……!

최선우의 담당의가 있는 진료실 앞에서 강진욱을 발견한 간호사가 다급하게 불렀다. 강진욱은 대꾸도 없이 그대로 진료실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안에는 이미 사람이 없었다. 강진욱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여기 의사, 어디로 갔어?

“누, 누구세요?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란 간호사가 다가오지도 못하고 떠듬떠듬 반문했다. 하지만 강진욱이 듯이 쏘아보자 저절로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퇴근을…… 집에, 집에 가셨어요!

간호사는 베타였다. 그래서 페로몬에 둔감했다. 그런데도 공기를 내리누르듯 나오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간호사가 바들바들 손을 떨며 책상 아래 긴급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보안팀에 연락해서 무시무시한 남자를 쫓아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간호사가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강진욱이 먼저 돌아서 버렸다.

간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뒤늦게 혹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설마……?

어차피 사는 곳도 모를 텐데. 괜한 생각이라고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도 모르는 있었다. 강진욱이 집요하고 소름이 끼치도록 능력이 좋은 남자라는 것을.

병원을 빠져나온 강진욱이 다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최선우 담당의 주소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중에 비서에게서 주소 하나가 날아왔다.

“먼저 가서 대기해.

- .

강진욱은 망설임 없이 전달된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속도를 높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강진욱의 차가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이미 무리 남자들이 빌라 앞을 막아선 채였다.

강진욱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3 현관 앞에도 남자 여럿과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

쾅쾅쾅.

강진욱에게 눈인사를 건넨 비서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 여세요.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비서가 대답했다. 누구냐는데 신분을 밝힐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문이 열릴 만무했다.

“……누구세요?

약간 긴장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문 열어.

비서가 다시 말하기 전에 강진욱이 고압적인 태도로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강진욱의 것임을 알아차린 집주인이 문을 열었다. 딱딱하게 안색을 굳힌 한수진이 있었다.

“최선우 소재, 알지?

강진욱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물었다. 한수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윽고 평소대로 돌아갔다.

본인 딴에는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거였지만, 강진욱은 금세 이상을 알아차렸다.

“어디에 있어?

“모릅니다.

“당장 말해.

강진욱의 페로몬이 위협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내리눌렸다. 한수진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러운 눈으로 강진욱을 봤다.

사실 한수진도 최선우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인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선우가 임신했음에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상대. 예상이 갔다.

히트사이클 부작용으로 최선우는 관계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앞에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는 알파가 상대인지 몰랐다.

저런 남자라면, 임신한 사실을 알게 아이만 빼앗아 가고 말지 몰랐다.

“최선우한테 연락해 . 당장! 지금 위험하다고.

그때 강진욱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한수진의 눈에 그건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선우는 느리게 눈을 뜨고 멍하니 천창을 바라봤다. 낯선 천장이었다.

‘뭐지?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선우는 긴장했다. 그리고 선우는 천천히 눈을 돌리다가 깨달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호텔이라는 것을.

“아, 맞다.

선우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일찍 문제였나 보다. 시간은 이제 새벽 5시를 지나고 있었다.

목이 마른 같아서 침대를 내려왔다.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생수통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선우는 잔을 따라 벌컥 넘겼다.

물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리고 뒤늦게 배고픔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먹고 그냥 잠을 잤구나.

자기 전에는 뭐에 홀린 듯이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피곤해서 잤다. 이제야 허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편의점이라도 가야겠다.

선우는 내던져 두었던 지갑을 들고, 핸드폰을 챙기다가 멈칫했다. 어제 한수진에게 괜한 말을 떠올랐다. 혹시 전화를 걸었다가 없는 번호라는 소리를 들으면 놀랄지도 몰랐다.

“일단 선생님께는 그래도 걱정하실 테니까 연락은 두자.

지갑에서 한수진에게 받았던 명함을 꺼낸 선우는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최선우입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혹시 연락이 돼서 걱정하실까 문자라도 보내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전화 드릴게요.]

 

선우는 번호가 자신의 연락처라고 밝힐까 말까 고민했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전무가 한수진을 협박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선우의 다짐은 5초도 되지 않아서 깨어졌다.

핸드폰이 열렬하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저장하지 않은 번호는 당연히 조금 선우가 문자를 보낸 한수진의 연락처였다. 선우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선우 ? 최선우 씨예요? 세상에! 선우 !

한수진이 빠른 말투로 선우를 불렀다. 꼬박꼬박 성을 붙여서 부르더니 반가움과 걱정이 담긴 말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선생님…….

- 선우 ! 대체 어떻게 거예요? 지금 어디예요?

“저, 그게…….

- 나한테 갑자기 다신 전화 것처럼 그래 놓고 진짜로 연락이 되니까 얼마나 놀란 알아요?

정말 많이 걱정했는지 한수진이 횡설수설 말했다.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술을 눌렀다가 놓았다. 누군가를 걱정시켰다고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제가 선생님을 걱정하게 했네요.

- 어디예요? 무슨 생긴 아니죠?

“네. 그냥…… 정리하려고 내려왔어요.

-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어디예요?

선우는 망설이다가 도시의 이름을 댔다. 그때, 핸드폰 너머에서 요란하게 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 아…… 미안해요. 의자가 넘어져서. , 괜찮은 맞죠?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선우가 안으로 들어가느라 대답이 늦어졌다.

- 선우 ! 괜한 생각 하는 아니죠?

한수진이 오해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자 전파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여긴 신호가 약한 같았다.

“그럼요. 선생님, 죄송한데 이만 끊을게요.

선우는 통화가 끊어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수진에게 마지막으로 들린 ‘그럼…….’까지였단 미처 알지 못했다.

                             

#15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대로 호텔을 나서려던 선우는 마음을 바꿔 프런트로 다가갔다.

“필요한 있으신가요. 고객님?

선우가 걸어올 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던 호텔 직원이 친절하게 물어 왔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근처에 마트나 편의점이 있을까요?

“편의점은 호텔 바로 왼쪽에 있고요, 마트는 24시간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곳이 길로 걸어서 10 거리에 있어요.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필요한 있으세요?

“아뇨. 없어요. 수고하세요.

선우는 꾸벅 인사하고 곧장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이른 시간이기는 해도 여름이라 벌써 주변이 밝은 편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고 직원이 알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중간에 편의점이 있어서 잠시 들렀지만, 과자류 외에는 마땅히 먹을 없어서 다시 나왔다.

2끼나 굶으니 속에 있는 태아가 어지간히도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어서 과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같았다.

사실 아까부터 시고 과일이 자꾸 생각이 나서 더욱 마트가 간절했다. 직원이 알려 대로 10분쯤 걷자 건너에 불이 켜진 마트가 보였다.

“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커서 원하던 과일이 있을 같았다.

선우는 설레는 마음으로 도로를 건너 불이 환하게 켜진 마트로 들어갔다. 겉에서 봤을 때보다도 안은 더욱 널찍했고, 물건도 많아 보였다.

안을 휘둘러본 선우의 눈에 원하는 곳이 보였다. 먹음직스럽게 과일을 쌓아 놓은 청과 코너였다.

청과 코너까지 단숨에 걸어간 선우는 한눈에 자신이 원했던 과일을 찾아냈다. 매끄러운 표면과 빨간 색감을 자랑하는 천도복숭아였다.

천도복숭아 하나를 들어 코에 가져갔다. 달콤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금세 혀에 침이 고였다.

선우는 투명한 비닐 팩에 주먹보다 약간 작은 천도복숭아 3개를 담았다. 고민하다가 천도복숭아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풋풋한 아오리 사과도 2 챙겼다. 묵직한 비닐 안의 과일을 보고 있으려니 더더욱 허기가 느껴졌다.

선우는 얼른 먹고 싶은 생각에 다른 생각도 하고 곧장 계산대로 갔다. 마트를 나오자마자 천도복숭아 하나를 꺼내어 약간 구깃구깃해진 와이셔츠에 쓱쓱 문질렀다.

아삭.

앞니로 매끄러운 표면을 씹자 약간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과일즙과 향이 혀에 닿고 코에 스며들어 왔다. 선우는 걸어가면서 금세 천도복숭아 3개를 해치웠다.

호텔 가까이 갔을 아오리 사과 2개도 전부 먹어 치운 후였다.

“헉! 언제 이걸 먹었지?

선우는 놀란 눈으로 비어 버린 봉투를 탈탈 털었다.

어쩐지 배가 부른 같더라니.

아무 생각 없이 하나씩 꺼내어 먹다가 보니까 전부 사라져 버린 같았다. 선우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힐끔 올려다봤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는지 하늘 색깔이 연한 남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은 충분히 같고, 배도 부르고…….

어제저녁부터 잤으니 소화도 시킬 산책을 주는 것도 괜찮을 같았다. 선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호텔 뒤편으로 강이 흐르는 발견했다.

“강변에 산책로가 있겠지?

선우는 혼잣말하면서 비닐 팩을 구깃구깃 집어 주머니에 넣고 호텔을 돌아 강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도 보면서 배를 꺼뜨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면 좋을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강변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쪽이 아니라 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이었다.

“으으음…….

선우는 볼을 긁적이며 낮은 소리를 냈다.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으니 다리가 아픈 중이라 잠시 고민이 됐다.

근데 맞은편 산책로에 벤치가 있으니 저기까지 가서 앉아 쉬면 좋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건너갈까?

잠시 고민하던 선우가 결정을 내리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중간쯤 걸어가던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동쪽에서 서서히 아침 해가 발갛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날은 서늘한 편인데, 약간 습해서 그런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선우는 몸을 돌리고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체력 무엇…….

예전에는 며칠 밤새우고, 야근도 하고 해도 거뜬했는데.

“아 , 임신했지.

새삼 자신이 빙의했고, 아이까지 가졌다는 떠올린 선우가 난간에 몸을 기울였다. 생각보다 맑고 투명한 물이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후…….

물이라도 올걸. 선우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강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선우는 희붐하니 밝아 오는 해를 온몸으로 맞았다. 뭔가 아침에 뜨는 해를 보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있을 같았다.

그러다 이상하게도 의식의 흐름이 전무로 흘렀다. 사직서를 찢으며 절대 그만두게 한다던 얼굴.

분명 화가 같은데 속에는 약간 당황한 같은 느낌도 들어 있었다.

“대체 그만두게 하는 거야? 얼씨구나 하면서 받아야 하는 아냐? 설마 아프다고 책임감을 느끼는 거야? 전무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화를 내는 같은데 이상하게 걱정하는 것처럼 굴던 행동들 때문에 헷갈렸다.

‘대체 그러는데.

그러기는!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원래 미친놈 행동에 이유가 어디에 있어. 걔라서 이상한 거지.

‘그래, 이제 볼일도 없는데 신경 끄자! 지내라, 광공! 더는 보지 말자!

선우는 손을 붙잡고 파이팅을 외쳤다. 전무 따위 잊고 여기서 지낼 방법을 찾는 유익했다.

끼기기긱.

그때, 뒤에서 도로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놀란 선우가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덜컹, 하고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차에서 뛰다시피 내린 것은…….

“강 전무?

놀랍게도 다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무였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대체 남자가 여긴 어떻게!

전무가 성큼성큼 다가와 선우의 손목을 붙들어 앞으로 잡아당겼다.

“미쳤어, 최선우?

잔뜩 화가 얼굴로 전무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함부로 죽으려고 들어?

강한 악력으로 쥐어진 손목이 아파 눈을 찌푸리던 선우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지금 얘가 뭐라고 했지? 죽으려 했냐고 소리 지른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선우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전무의 안색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래서 선우는 당연히 전무가 화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전무는 뭔가 충격을 받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저기. 전무님……?

선우가 얼떨떨하단 얼굴로 전무를 불렀다.

“최선우,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따라와.

전무가 차갑게 일갈하더니 쌩하니 몸을 돌렸다.

“어, 어어?

선우는 어어 하는 사이에 전무에게 붙들린 새까만 앞까지 끌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손도 대지 않았는데 알아서 보조석 문이 열렸다.

“아!

선우는 뒤에서 밀치는 힘에 그대로 시트에 주저앉게 되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을 , 이미 문이 닫혀 버린 뒤였다.

선우가 다급한 얼굴로 문을 살펴봤다. 근데 문고리도 없고 눌러야 문을 있는지 수가 없었다.

“벨트 .

어느새 운전석에 앉은 전무가 차갑게 일갈했다.

“이봐요, 전…… 아니, 강진욱 .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선우는 전무님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려던 이름으로 가까스로 고치고 따졌다.

“벨트.

하지만 돌아온 황당한 명령이었다.

“벨트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고. 잡아다가 차에 태웠냐고. 그보다 대체 여기에 내가 있다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온갖 질문이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선우는 따지지도 못하고 얌전히 안전벨트를 당겼다.

전무의 눈동자가 아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반들반들했다. 분노도 분노인데 약간 광기가 느껴지는 잘못했다가는 광공 스위치를 같았다.

지금은 어디로 도망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럴 때는 일단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는 나았다.

절대 전무가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아니었다.

, 그렇고말고.

끼기긱.

거친 소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상체가 뒤로 갔다가 앞으로 쏠리는 느낌에 선우는 바짝 굳어서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움켜쥐었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도로를 새까만 외제 차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도로에 없는 차의 운전자들이 흡사 포악한 짐승처럼 미친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여 양옆으로 후다닥 갈라섰다.

선우는 홍해처럼 갈라서는 차들 사이를 그야말로 거칠 없이 달리는 모습에 질려 입만 벌렸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중에도 전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헉! 허억!

‘으악! 으아악!

부딪칠 가까워졌다가 사라지는 차를 때마다 선우에게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 무서우면 비명도 나온다더니 지금 선우가 그랬다.

선우는 입을 벌린 안전벨트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발발 떨었다. 그러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것을 택했다.

보고 있다가는 그대로 졸도해 버릴 같았기 때문이었다. 속에 있는 태아에게도 보여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강진욱, 미친 XX.

속으로 전무의 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미친 속도로 달리던 외제 차가 서울 도심 도로에 진입했다. 한창 출근길이라 강변 도로는 어느 차선 없이 전부 차량으로 꽉꽉 막혔다.

전무는 짜증이 잔뜩 얼굴로 차창을 노려보다가 그제야 자신의 옆자리가 아주 조용하다는 알아차렸다.

전무가 보조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선우가 고개를 한쪽으로 꺾은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왜 저러고 자고 있어?

전무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검지로 운전대를 툭툭 쳤다. 그러다가 도어 트림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보조석 시트가 뒤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자세가 안정되자 선우도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새액. . 새애액. .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전무는 힐끔 잠든 선우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여전히 답답하게 막힌 도로였지만, 어째선지 아까보다는 짜증이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16

선우는 약간의 진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얼굴이 간질간질한 데다 약간 더운 바람도 불어오는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아직 흐릿한 정신으로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가 자신이 차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차? 아……!

내가 차에 있지? 생각하던 선우는 뒤늦게 자신이 여기에 이러고 있는지 떠올렸다.

전무에 의해 차에 억지로 태워졌는데, 차가 미친 듯이 달려서 현실을 외면하고자 눈을 감았다는 .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의식이 꼬르륵 가라앉아 잠이 들었다는 것까지.

선우는 황급히 옆자리를 돌아봤다. 그런데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뭐야?

선우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다가 약간 거리를 두고 등을 보이고 있는 전무를 발견했다. 그리고 보조석 문이 아까부터 열려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약간 덥게 느껴지던 것은 여기로 오는 사이에 시간이 한참 흘러 기온이 부쩍 올랐기 때문이었다.

“일어났으면, 내려.

선우가 깨어난 알아차렸는지 전무가 돌아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선우는 엉겁결에 밖으로 나와 다시 눈을 굴려 보았다.

눈앞에 낯선 건물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낯선 담벼락이. 자신이 살고 있던 오피스텔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일단 붉은 벽돌로 담장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위로 뾰족뾰족한 침엽수가 까꿍 하고 나뭇가지를 드리웠는데 억대가 나간다는 적송이었다.

뒤쪽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모습일지는 대략 상상이 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을 때처럼 관리한 정원과 2층이나 3층쯤 되는 커다란 저택이 있겠지.

“따라와.

선우가 멍하니 위를 바라보는 사이 전무가 먼저 걸음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전무가 선우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잔뜩 굳은 얼굴로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 턱짓했다.

“치워.

“네!

차를 다른 데다가 주차하라는 명령에 남자가 서둘러 전무와 선우의 옆을 지나쳐 갔다. 전무가 반쯤 열려 있던 은회색 철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자연히 선우도 뒤를 따라 문을 넘게 되었다.

대리석으로 계단 대여섯 개를 올라가자 예상했던 것처럼 널찍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가지를 자랑하는 값비싼 적송 서너 그루,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예뻐 보이는 여름 꽃들, 파릇파릇한 잔디.

아담한 연못 위로는 가로지르는 아치형으로 목조 다리도 하나 놓여 있었다.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우는 정원을 느긋하게 감상할 새가 없었다. 전무가 자신의 팔을 함부로 잡아당겨 걸어가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2 단독주택이었다. 아니, 주택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까웠다. 건물 크기나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했으니까.

보기에도 부티가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선우는 심상치 않은 건물 외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선우가 걸음을 주춤하는 사이에 전무는 이번에도 거침없이 열린 현관문을 지나쳐 갔다. 당연히 전무에게 붙잡힌 선우도 뒤를 따라서 수밖에 없었다.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전실과 이어지고, 투명한 문을 통과해 복도를 지나치자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앗!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선우가 펼쳐진 풍경에 탄성을 흘렸다.

“와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때까지도 전무에게 팔이 붙들린 채여서 선우는 스스로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널찍한 복도를 걸어가자 운동장만 너비의 거실이 나왔다. 높고 커다란 창문에는 방금 지나쳐 왔던 정원 풍경이 보였다.

전무는 20명은 너끈히 앉을 있을 같은 상아색 가죽 소파에 선우를 내동댕이치듯 앉혔다.

“아!

비틀거리며 넘어간 선우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제법 푹신할 알았는데 의외로 단단했다.

선우는 엉덩이를 문지르다가 전무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마나 억센 악력에 쥐였던지 손목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뭐예요?

선우가 눈꼬리를 바짝 치켜들고 전무를 쏘아봤다. 아무리 임신한 모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맨날 붙잡고, 밀고, 질질 끌고 가고.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전무도 만만찮게 싸늘해진 눈초리로 선우를 노려봤다. 그러자 먼저 눈을 피한 선우였다. 선우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쟤는 광공이다. 답도 없는 광공이다. 건드리면 물고 끝나는 아니라 죽일 수도 있는 광공이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앞으로 집에서 지내.

이게 무슨 가다 떨어지는 화분에 머리 맞을 소리야!

선우가 기겁한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네? 소리예요, 그게? 제가 여기서 ?

그냥 옆에만 있어도 위협이 되는 광공이다. 한데 광공의 집에서 살라니!

“내가 감시하겠다고.

“아니, 그러니까 니가 ?

당황한 나머지 선우가 반말로 물었다. 순간 전무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선우의 어깨도 같이 움찔 떨렸다. 뒤늦게 말실수했다는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은. 대체 제가 여기에 있어야 하냐고요.

전무는 쭈뼛쭈뼛 제게 질문하는 선우를 사나운 눈으로 봤다.

“너 내놨다며?

! 그건 어떻게 알았지? 선우가 움찔하는 사이에 전무가 다시 사납게 말했다.

“갈 데도 없으니 여기서 지내.

“내가 데가 없는 거랑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아직 나간 아니거든요?

선우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따지듯 물었다.

“말했을 텐데? 허튼 생각 하게 거라고.

“그러니까 무슨 허튼 생각…… , 설마……?

그제야 선우는 전무가 저를 윽박지르던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했다.

강이 흐르는 다리 . 마치 공기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던 . 잔뜩 화가 얼굴로 달려오던 전무의 모습.

“설마 자살 시도한 거라고 생각하는 아니죠?

선우가 진짜 그렇냐는 눈으로 전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러자 전무의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눈썹이 움찔했다. 답은 듣지 않아도 같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구나.

선우는 조금 전까지 제게 폭풍처럼 몰아쳤던 상황이 벌어졌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도 전무가 이러는 이유는 도통 없었다.

“아무리 견디겠어도, 그러는 아냐. 사람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함부로 ?

전무가 어울리지 않게 훈계하듯 말했다.

역시 그렇게 오해했구나.

“아닌데요?

“아니긴. 그럼 거기에서 그러고 있었는데.

전무가 비웃듯이 물었다.

“산책하러 거예요!

선우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왜 시간에?

“일찍 자서 잠이 와서 그랬다고요!

“근데 다리 위였냐고!

“산책로가 건너편에 있었으니까요? 근데 가다가 힘들어서 쉬는 중이었다고!

. .

전무에게 지지 않으려 바락바락 소리치며 대답했더니 호흡이 달렸다. 선우는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화가 아닌데 말하다가 보니까 흥분해서 얼굴에도 잔뜩 열이 올라 버렸다. 선우 못지않게 싸울 듯이 상체를 기울였던 전무도 허리에 손을 얹은 씩씩거렸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껏 들뜬 각자의 호흡을 다스렸다.

“사실이야?

먼저 말을 것은 전무 쪽이었다.

“네.

“그럼 대체 도망갔는데?

“도망 아니거든요?

“아니면 거기까지는 갔는데?

“그냥, 뭐…….

거기에 살러 갔다고 하면 되겠지?

순간 생각에 선우가 말을 돌렸다.

“생각 정리하려고요.

“생각? 무슨 생각?

말꼬리를 잡듯이 묻는 전무의 말에는 그게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아니었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 글쎄! 그거 아니라니까요!

사실대로 말할 없고, 오해는 아니라고 해야 같고.

답답한 마음에 선우가 가슴을 쿵쿵 쳤다. 그러다가 아차해서 얼른 배를 살살 문질렀다.

‘너한테 화낸 아냐. 알지?

아직 듣지도 못할 태아에게 사과도 했다.

“됐고! 앞으로 여기서 지내.

? 그러고 보니 아까도 말을 들은 같은데?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

선우는 너무 고급스러워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실내를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전무가 사는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니가 진짜 허튼 생각을 하는지 하는지 지켜볼 있을 테니까. 일단 그렇게 알아.

“자살 한다니까요?

아까도 했던 문답을 둘이 반복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에는 상대가 지긋지긋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대체 저한테 이러세요?

선우는 전무에게 끌려오면서 묻고 싶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소설 어디를 떠올려 봐도 전무와 비서의 사이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사이에 이야기가 나온 고작 3. 그나마도 합해서 1페이지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에피소드 하나를 떼어 놓고도 넘칠 만큼 전무와의 스토리가 진행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우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뭐?

그런데 선우의 질문을 들은 전무는 도리어 그런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으시냐고요. 전무님, 원래 이런 아니지 않아요?

“기억 상실이라며?

전무가 선우의 물음을 질문으로 되돌렸다.

“아…….

선우의 얼굴이 아주 잠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 ! 맞다. 기억 상실 연기 중이었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기억이 없는 맞아요. 그래도 전무님이 걱정하고 쫓아와서 신경 만한 분이 아닌 같은데요.

선우는 표정을 바꾸고 뻔뻔하게 굴었다. 전무가 그런 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강진욱은 그제야 본인도 스스로 행동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게. 대체 최선우를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거야?

              

#17

강진욱은 최선우 비서를 자꾸 신경 쓰는가.

 

1. 그냥 자꾸 눈에 거슬렸다.

2. 그러다 보니 ‘최선우가 저러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3. 그게 하나둘 쌓이다 보니 자꾸 관심이 갔다.

 

고민하던 강진욱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더라?

‘뭐? 관심?

아니, 그럴 없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그런 감정 따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녀석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걸 알아보려고 신경 쓰는 거라면 모를까.

‘그래, 그게 맞지.

애초에 강진욱은 최선우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비서라고 하며 나타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단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최선우도 그것에 동의해서 왔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리고 솔직히 저랑 그쪽이랑 이러고 있을 필요 없는 사이 아니에요?

최선우가 던진 말에 강진욱의 생각이 끊어졌다.

“그쪽?

말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네. 강진욱 그쪽이랑 나랑.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사이라고.

최선우가 까칠하게 말했다. 아까는 눈치를 보면서 조심하는 같더니 그런 모습은 어디다 치워 버린 같았다.

“아무 사이가 아닌 아니지.

“무슨 사이인데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요?

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원작에서 비서야 스토킹을 정도로 좋아했던 상대였다고는 하더라도. 선우에게 전무는 그저 직장 상사에 불과했다.

보태자면 자신을 언제 쓱싹 해치울지 모를 위험한 인물일 뿐이었다.

“그거 제가 사직서 내면서 끝난 아니에요?

“그거 말고도 있지.

? 뭐가 있는데? 선우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강진욱이 선우를 쏘아보았다.

“너랑 ,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는 사이잖아? 약혼자. 몰라?

강진욱이 약혼자라는 단어의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하며 물었다.

“뭐?

선우가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심지어 의도치 않게 강진욱한테 반말까지 버리고 말았다.

“아아, 기억을 잃어서 이것도 모르나?

강진욱이 팔짱을 끼며 비웃듯이 말했다.

“네가 지겹게 했던 말이잖아? 내가 약혼자라고.

“아니, 무슨 그런 말도 되는…….

선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건 전혀 원작 소설에 없는 내용이었다.

선우는 다시 한번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봤다. 2주간 작가와 거의 혼연일체로 진행했던 작품이라 모든 내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러나 어디에도 원작 최선우가 전무의 약혼자라는 정보는 없었다.

‘있었으면, 그게 무슨 엑스트라 이물질이야!

정도 배경 서사면 엑스트라 이물질이 아니라 악역을 담당하는 서브수가 돼야 했었다.

스토리 비중도 그만큼 컸겠지.

최소한 되는 설명과 짤막짤막한 등장으로 사라질 캐릭터는 아니었을 것이었다.

“어?

잠깐.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지?

‘악역 서브수!

단어가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선우는 몽둥이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문득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거 설마…… 빙의한 수정 내용이었던 거야?

선우는 자신을 2주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소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정확하게는 작가가 대대적인 수정을 거치기 전의 소설을.

그리고 마침내 선우는 소설을 수정하기 엑스트라 이물질이었던 원작 최선우의 설정이 달랐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 그러면 말이 되지……. 소설을 전면 수정 전에 최선우는, 강진욱의 약혼자였으니까.

그랬다. 작가가 처음 설정했던 비서의 설정은 강진욱의 약혼자. 정확히는 강진욱은 생각도 없는데 어른들끼리 마음대로 정한 결혼 상대.

강진욱의 아버지 회장은 어른들 간의 약속을 들먹이며 비서를 비서실 낙하산으로 보내 버린 것이었다.

일도 배우고 강진욱이랑 사이도 공고해지라는 뜻으로.

하지만 작가는 비서의 비중이 너무 커질 것이라고 우려를 했다. 그래서 론칭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비서의 캐릭터 서사를 줄이고 설정도 대대적으로 손을 보았던 .

그렇게 원작 최선우는 악역 서브수가 아니라 엑스트라 이물질 1 되었던 것이었다.

‘잠깐,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바꾸기 전에 원작의 내용이 뭐였지? 애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이었으니 소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처음부터 다시 짚어 봐야 했다.

“으으…….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몰려온 탓인가. 불쑥 배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

“최선우!

선우가 배를 움켜쥐고 몸을 숙이자, 대체 저게 지금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그러냐는 얼굴로 지켜보던 강진욱이 놀라 달려왔다.

찌푸려진 선우의 얼굴은 색이 온통 빠진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너 이래?

강진욱이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선우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무언가에 쥐어짜이듯 배에서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배, 배가…….

선우가 다시금 배를 감싸자 강진욱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강진욱이 선우를 안아 들었다. 손으로는 허벅지를, 다른 손으로는 등을 받쳤다.

맨정신이었으면 부끄러워 죽었을 공주님 안기 자세였지만, 선우는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강진욱은 선우를 가뿐하게 안은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도 거의 끝에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게스트룸 개가 있었다.

강진욱의 걸음은 그중에서 가장 방으로 들어갔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의사 불러올게. 잠시만 참고 있어.

선우를 침대에 내려놓은 강진욱이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아뇨! 괜찮아요. 괜찮아졌어요.

강진욱이 물러가기 선우가 서둘러 그를 불러 세웠다.

의사라니. 그런 큰일 소리를!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직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배를 움켜쥔 선우를 강진욱이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잠깐 배가 아파서 그랬어요. 쉬면 나아요.

“너 대체……. 아니다. 됐어, 그럼. 쉬고 있어.

강진욱이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아픈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는 아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선우대로 윽박지르고 우기기만 하던 전무가 순순히 쉬라고 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쉬게 주겠다는데 냉큼 그래야지. 혼자서 정리할 것도 있으니까.

선우는 잽싸게 눈을 감았다. 강진욱의 시선이 이마며 뺨에 따갑게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얼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도 잠시 잠든 척하고 있던 선우는 슬며시 눈을 떴다. 다행히 강진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아까는 정말 뭔가 비틀어 꼬집듯이 배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

“정리해 보자…….

선우는 배를 살살 문지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정되기 원작에서 서브수가 어떤 설정이었더라.

 

1. 수정 후엔 첫눈에 반해서 강진욱에게 접근한 설정인 반해 수정 원작의 비서. , 서브수는 강진욱과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동창이다.

2. 서브수와 강진욱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3. 서브수의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 강진욱의 조부를 구해 주었고, 그래서 강진욱네 안에서는 서브수의 가족들을 은인으로 생각한다. 그런 인연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마음대로 손자들의 결혼을 약속했다.

4. 서브수를 전무 비서실에 낙하산으로 꽂은 강진욱의 아버지 회장.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농간을 부린 장남 강진태.

 

“왜 그랬더라?

선우는 원작을 곰곰이 떠올리며 다시 살살 배를 쓸었다. 무언가가 생각이 한데 나질 않았다.

“아……!

생각났다!

“강 전무의 힘을 약화하려고 거였지.

장남 강진태는 극우성 알파인 강진욱에게 밀려서 그룹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다. 강진태도 알파였다. 하지만 그보다 배는 강한 강진욱의 우월한 인자를 이길 없었다.

그래서 강진태는 아버지에게 베타인 서브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강진욱에게 보내 버린 것이었다.

임신 베타를 짝으로 갖게 해서 조롱하고, 강진욱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보여 주려는 의도로.

“강진태도 치졸하네.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그러고 싶을까. 어쨌든 이제야 지금까지 강진욱과 비서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강진욱은 아버지와 형의 농간으로 서브수를 들였으니 더더욱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음에 들기만 했을까. 치워 버리고 싶었겠지.

그러지 못한 아무리 대단한 강진욱이라도 태성그룹을 쥐고 있는 회장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성도 높기로 유명한 비서실 직원들이 서브수를 배척하고 괴롭힌 것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럼 내가 그만둔다고 했더니 끈질기게 붙어 있으라고 것도 그래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던 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만으로는 역시 설명이 되는 같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같은데.

“물어봐도 알려 주겠지?

선우는 버릇처럼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도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간만에 김이 나도록 머리를 굴려서 그런지 이제는 이마에서 열까지 나는 같았다.

‘무리하지 말자. 무리하면 .

아까 너무 신경 쓰다 보니까 배도 아프지 않았던가.

이제는 정말 괜찮아진 같으니 안심이 되었다.

“미안. 아빠가 조심할게.

선우는 속에 아이에게 사과하고 눈을 감았다.

일단 대체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이유를 알았으니 나머지는 쉬고 나서 차근히 생각을 정리해 봐도 같았다.

일찍 일어나 산책하고, 놀라고, 끌려오고, 화를 내고, 싸우다가…… 다사다난한 반나절을 보냈기 때문이었을까. 잠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18

선우가 다시 깨어났을 창밖으로 울긋불긋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배고파…….

속에 다른 생명이 있어서 그런 걸까. 눈만 뜨면 허기가 몰려오는 같았다. 선우는 꾸르륵거리며 배고픔을 호소하는 자신의 배를 슬슬 문지르며 침실을 나왔다.

뭐라도 먹어야 같았기 때문이었다.

“최선우 , 일어나셨습니까.

“으악!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가 비명을 질렀다.

정장을 입은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문가에 있었다. 나이는 30 후반, 40 초반쯤 될까.

“어머, 제가 놀라게 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여성이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선우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뇨. 저기, , 누구세요?

“아! 집안의 일을 총괄하여 책임지고 있는 백순희 집사라고 합니다. 집사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여성이 스스로 집사라고 칭하면서 다소곳이 인사하며 본인을 소개했다. 집사라니. 그건 정말 저택에서나 있을 법한 직종인데.

물론 강진욱이 사는 곳이니 그런 있을 법하기도 하긴 하지만.

“아, 네……. . 그러니까, 최선우라고 합니다.

선우도 꾸벅 인사하면서 소개를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러는 맞나 잠깐 의문을 가졌다.

“네, 최선우 . 전무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방에서 지내실 분이시라고요. 앞으로 필요하거나 부탁할 있으시면 찾으시면 됩니다.

집사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 여기 계셨어요?

설마 자신이 자고 있는 동안 앞을 지켰느냐고 선우가 간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들어 만약의 상황을 위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집사는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강진욱의 지시로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아닌가 의심했던 선우가 겸연쩍게 웃었다.

“편히 쉬셨나요? 아프신 곳은 없으시고요? 혹시 필요한 있으셔서 나오셨습니까?

“어, . 괜찮아졌어요. , 배가 고파서…….

집사의 정중한 물음에 이끌려 선우가 대답했다. 괜히 민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냥 주방에 가서 먹으면 알았지 누가 기다리고 있을 알았을까.

그러자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식사를 준비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준비되는 대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게 더더욱 선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그냥 제가 주방에 가서 기다릴게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선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리자, 집사가 생긋 웃으며 앞장섰다.

선우는 집사의 바로 뒤를 졸졸 따라갔다. 마치 호텔 복도처럼 양옆으로 문이 여러 있었다.

살짝 열린 틈으로 보니 침대며 수납장들이 보였다. 전부 손님들이 잠시 머물다 있게 준비된 룸이 아닌가 했다.

그렇게 한참 복도를 걷다가 도착한 곳은 처음 집에서 만났던 거실만큼 넓은 다이닝룸이었다.

12명은 앉을 있을 것처럼 식탁과 프랑스 레스토랑처럼 꾸며진 인테리어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쪽에 앉으세요.

집사는 선우에게 석양이 보이는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선우는 다이닝룸을 둘러보고 식탁 끝자리에 엉덩이를 내렸다.

의자도 크고 푹신해서 도리어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주방 한쪽에 4인용 식탁만 있어도 감지덕지한 기분인데 이건 너무 본격적으로 손님 접대용 공간 같지 않은가.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아……. 괜찮다면, 과일과 샐러드로 부탁드릴게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선우는 집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을 꺼냈다.

“혹시 전무님은 계세요?

“네. 오늘 전무님께서는 늦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식사하셔도 괜찮습니다.

선우가 강진욱을 기다리느라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집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물론 선우가 강진욱의 행방을 물은 그런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여기에다가 던져두고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지.

“아뇨. , 속이 더부룩해서요. 과일이랑 샐러드 정도면 괜찮을 같아요.

임신이라고 말할 없어서 선우가 애매하게 대꾸했다.

“왜 속이 더부룩해?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집사에게 늦는다고 전해 들었던 강진욱이 다이닝룸 입구에 버젓이 있었다.

가뜩이나 키도 사람이 검은 정장을 입고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머리칼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선우가 눈을 찌푸렸다.

“전무님, 오셨습니까.

집사가 얼른 강진욱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강진욱은 그런 집사를 지나쳐서 선우가 앉아 있는 식탁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냥요. 이제 깨어나서.

꼬르륵. 꼬르르륵.

선우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진짜!

선우는 눈치도 없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배를 내려다봤다. 눈빛에는 민망함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순간 강진욱의 입꼬리 한쪽이 비쭉 올라갔다.

“네 배는 그런 같은데?

심술궂은 한마디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

선우가 강진욱을 샐쭉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젠 상사도 뭣도 아니니까 꿀릴 것도 없었다!

“그럼 추가로 자극적이지 않고, 냄새나지 않는 음식으로 부탁드릴게요.

하지만 눈을 아래로 내린 선우가 얌전히 메뉴를 추가 주문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부디 음식을 앞에 두고 울렁거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가뜩이나 아프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구역질까지 하면 무슨 생각을 할지 수가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집사가 공손하게 대답한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늦게 오신다면서요? 일이 없으신가 봐요?

둘만 남게 되자 선우가 앞에 강진욱을 올려다보며 삐딱하게 물었다.

“이제 상사도 아니다 이거지?

“네.

선우의 즉답에 돌연 강진욱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불온한 미소가 입술에 걸렸다.

“아직 사표 수리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강진욱에게 전혀 달갑지 않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 그걸 아직도 ?

“그거 처리하기도 전에 네가 도망갔잖아?

선우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속으로만 생각한 알아들은 강진욱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거랑 사직서 수리해 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강진욱이 황당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선우에게 다시 얄미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따 식사 후에 곧장 병원에 거야.

“병원에는 왜요?

“네가 어디가 아픈 건지 알아봐야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사해 보고. 그래야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건지도 정리할 있을 아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선우의 귀에 내리꽂혔다.

“돼, 됐거든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선우는 말도 더듬었다.

“됐기는 뭐가 . 알아야겠어.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병원으로 .

강진욱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선우를 쏘아붙였다.

“필요 없어요! 검사받을 생각도 없고요! 전무님은 신경 끄세요.

하지만 선우도 물러설 없었다. 병원이라니. 검사라니!

그럼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은 정말 사양이었으니 선우도 물러설 없었다.

아니, 대체 이래. 그냥 메인수한테나 신경 것이지 자꾸 쓸데없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야.

하지만 선우가 초조해하거나 말거나.

“최선우.

강진욱이 씹어 삼킬 듯이 살벌하게 선우를 노려봤다. 무시무시한 눈빛이었지만, 이번에는 선우도 꿋꿋하게 마주 바라봤다.

선우의 머리가 김이 나도록 빠르게 돌아갔다. 강진욱이랑 병원에 가지 않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대체 뭐라고 해야 쟤가 포기를 하지?

“그럼 네가 직접 말해 . 대체 무슨 병이야?

지금 가장 문제는 강진욱이 자신을 시한부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전하게 퇴사하기 위해서 선우는 일부러 강진욱이 잘못 알고 있는 고쳐 주지 않았다.

당장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람을 설마 붙잡진 않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도리어 강진욱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자꾸 자신을 곁에 붙여 두려고 했다.

‘하필 다리 난간에 있을 만나서는…….

그냥 잠도 오고, 과일도 먹었고 해서 산책하려고 갔을 뿐이었는데. 대체 무슨 타이밍인지 강진욱이 그때 나타나 버렸다.

탓에 괜한 오해를 사지 않았는가.

이래서야 차라리 시한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나을 같았다. 선우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오심이나 구역질을 호소하면서 식욕도 없고. 기절도 있을 만한 뭐가 있지?

비슷한 증상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선우의 뇌리에 그런 소설 설정이 있었던 가까스로 떠올랐다.

정확하게 어떤 소설에 나왔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그것이 아니었다!

“위궤양이에요!

실마리를 찾은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선우의 말투는 발랄하기까지 했다.

              

#19

“……위궤양?

강진욱은 마치 풀리던 수학 문제를 해결한 학생이 짓는 후련한 얼굴을 최선우를 어이없다는 마주 봤다.

“거짓말하지 . 시한부라며? 근데 갑자기 무슨 위궤양이야?

이윽고 강진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있는데 어디서 그런 말도 되는 병명을 꺼내 놓는지.

“거짓말 아니에요.

“그럼 2개월이라는 뭐야?

“아, 그건…….

강진욱이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선우는 슬쩍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사실 선우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면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뺨에 붉게 변해서 금세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강진욱이랑 눈도 마주치지 말고 얼굴도 보이는 나았다.

“그건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요양을 정도는 해야 괜찮아진다고요. 그대로 두면 위궤양도 악성 종양으로 발전할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다니던 병원에서 진료받으면 돼요. 어차피 뭐…… 특별히 것도 없는데…….

이만하면 믿으려나?

선우는 강진욱의 반응이 궁금해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강진욱과 눈이 마주쳤다.

선우는 말도 하고 입을 다물었다. 강진욱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강진욱은 쏘아보는 아니라 사실 최선우가 무얼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려 집중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거짓말이라는 훤히 보이는데 사실대로 말하지도 않고, 거기다 굳이 다시 검사는 받지 않겠다면서 특별히 것도 없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최선우의 상태는 단순한 위궤양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다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강진욱의 눈빛이 더욱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선우는 선우대로 거짓말이 탄로 날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사이의 오해는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사실을 선우도, 강진욱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같이 의사를 만나.

뭔가 고민하는 듯하던 강진욱이 물러설 없다는 강한 투로 말했다.

? 만나긴 누굴 만나. 선우가 기겁해서 얼른 대답했다.

“괜찮다니까요?

“강제로 끌고 갈까?

강진욱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절하면 병원에 바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이거야말로 도망갈 데도 없는 진퇴양난.

“알았어요.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이상, 의사에게 미리 연락해서 도움을 청해야 같았다.

양보도 없던 대화가 나름대로 완만한 결론을 내며 끝나자 분위기를 살피며 있는 없는 있던 집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선우는 뒤늦게 자리에 자신들만 있는 아니라는 깨달았다.

당황한 선우가 서둘러 식탁에 앉는 지켜보던 강진욱도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와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을 여성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선우가 먹고 싶다고 했던 샐러드, 과일과 함께 흰죽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 심심하게 간을 했습니다. 입맛에 맞는지 드셔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선우와 눈이 마주친 고용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냥 하얗기만 죽인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이상하게 입맛이 돌았다.

선우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흰죽이라 그런지 거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

죽을 입에 넣은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왔는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선우는 다시 한번 죽을 입에 넣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강진욱은 아무 말도 없이 열심히 그릇을 비우는 선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선우의 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용인에게 눈짓했다.

지시를 받은 고용인이 조용히 사라졌다가 다시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탄수화물을 먹는 것이라 그런지 그릇만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선우가 웃으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입맛이 있을 많이 먹어 두고 싶었다.

다시 열심히 먹는 선우를 이번에도 강진욱은 말없이 지켜봤다.

그런 강진욱을 집사와 고용인이 놀란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것도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강진욱의 저런 다정한 얼굴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먹었습니다.

그릇과 샐러드까지 깨끗이 비워 선우가 다이닝룸 한쪽에 서서 대기 중인 고용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잘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혹시 필요한 있으세요? 차나 커피를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과일이나 케이크는 어떠세요?

“아뇨. 괜찮아요. 배가 빵빵해져서 뭐가 들어갈 같아요.

선우가 빙긋 웃으며 사양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강진욱을 발견하고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먹는 일에 집중하다가 보니까 강진욱이 같이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무님은 드세요?

그러고 보니 강진욱 앞에는 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강진욱은 눈썹만 까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왜요?

“병원.

짧은 물음에 단답이 돌아왔다.

“병원요? 시간에요?

선우는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여름이어서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다고는 해도 저녁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이미 진료는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하여간 제멋대로네. 이렇게 급하게 가자고 그래.

하지만 선우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알았는지 강진욱이 빤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선우는 싸늘한 눈빛에 얌전히 강진욱을 따라 다이닝룸을 나왔다. 거실에는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서는 강진욱 뒤를 따라오는 선우를 보고 잠깐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감정을 숨겼다.

“연락해 두었습니다.

비서의 말에 강진욱이 고개만 까딱이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셋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선우는 둘보다 살짝 뒤로 가서 벽에 기대어 섰다. 강진욱과 비서 몰래 해야 일이 있었다.

선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메시지 앱을 열었다.

가장 상단에서 의사의 프로필을 찾아내 대화창을 열어 메시지를 입력했다.

 

[선생님, 최선우입니다!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동행이 있어서요. 부탁드릴게요.]

 

강진욱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키패드를 누르고 있는 선우에게 향했다.

눈을 찌푸린 강진욱이 하느냐고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

“전무님.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비서가 강진욱을 부르며 먼저 내리라며 바깥을 바라봤다.

강진욱은 혀를 차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 주차장에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앞에 있던 운전기사가 그들이 다가오자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타.

강진욱이 반보 뒤에서 따라오는 선우에게 명령했다.

선우는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로 차에 올랐다. 뒤를 따라서 강진욱이 앉았다. 자연히 선우는 운전석 뒤까지 밀려났다.

차가 출발했다. 지하를 빠져나오자 슬슬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는 동안 잠을 자고 있어서 몰랐는데 부자 동네였구나.

강진욱이 사는 빌라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집들이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심지어는 야트막한 언덕에 지어져서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는 보였다.

차는 한강을 끼고 달리다가 다리를 건넜다. 선우가 멍하니 밖을 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슬쩍 꺼내서 액정을 봤다. 한수진에게 답장이 있었다.

 

[선우 ! 걱정하지 말고 오세요.]

 

누구와는 다르게 친절하신 분이었다. 선우는 유리창에 비친 강진욱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한강을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원 주차장에 차가 멈추어 섰다.

“내려.

강진욱이 먼저 밖으로 나오면서 쌀쌀맞게 명령했다.

선우는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병원은 진료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강진욱은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지나쳐서 그대로 진료실까지 걸어갔다.

강진욱이 닫힌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무례한 출현에도 한수진은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입가에는 잔잔하게 미소도 지었다.

“선우 씨도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강진욱을 따라 진료실을 들어오는 선우에게도 말을 걸었다.

“네. 선생님 죄송해요. 퇴근하셔야 하는데, 늦게 찾아왔죠.

진료 시간도 지났는데 강진욱 때문에 신경 쓰여 선우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전혀요. 오늘은 저도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가려고 했어요. 이쪽에 앉아요.

한수진의 말에 선우가 앞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강진욱은 마치 감시자처럼 팔짱을 끼고 문을 지키고 섰다.

한수진이 강진욱을 힐끗 봤다가 다시 선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선우 , 컨디션은 어때요?

“괜찮아요.

갑자기 강진욱한테 끌려와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잠도 자고 먹기도 먹어서 그런지 어제보다 컨디션은 좋아진 같았다.

“빈혈이 있거나 구역질이 일거나 하지는 않고요?

“네. 어지러운 괜찮고요, 음식 냄새 때문에 과일이랑 채소만 먹었는데 오늘은 흰죽도 먹었어요.

선우는 오늘 거부감 없이 먹었던 죽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다행이에요. 무엇보다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해요. 그리고 자고 쉬고, 스트레스도 받지 말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일부러 그런 것인지 한수진은 대화에 일절 임신을 암시할 만한 말은 넣지 않았다. 그저 아픈 환자에게 하는 당부만 이어졌다.

“위궤양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해?

그때까지 조용히 사람을 지켜보던 강진욱이 끼어들었다.

동시에 선우와 한수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위궤양이라고 했어요?

‘네.

둘은 눈빛으로 짧게 대화를 나눴다.

한수진과 선우의 얼굴에는 공모자들만 지을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20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한수진이 사무적인 얼굴로 강진욱에게 물었다.

“아무 상관 없는 관계요.

하지만 대답은 강진욱이 아니라 선우가 했다.

강진욱을 쳐다보는 선우의 눈빛은 우리가 특별한 사이는 아니지 않으냐는 뜻이 가득했다.

선우의 눈빛을 알아챈 강진욱이 눈살을 일그러뜨렸고, 그런 강진욱을 한수진의 눈빛은 이채로 반짝였다.

알파와 최선우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는 몰라도, 한수진은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하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에 거의 없을 거다.

대한민국 1 재벌인 태성그룹 가장 잘나간다는 태성건설 전무이사 강진욱.

첫째인 강진태 부사장을 제치고 그룹 후계자 자리를 꿰찬 극우성 알파. 어렸을 적부터 외국에서 생활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엘리트 중의 엘리트.

그래서 강진욱은 예전부터 태성그룹의 얼굴로 자주 매스컴에도 출현했다.

그런 남자가 갑자기 병원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 한수진은 정말 깜짝 놀랐다.

〈최선우의 병명이 뭐야. 말해.

다짜고짜 반말을 하며 무섭게 쳐다보던 얼굴. 한수진은 전형적인 베타로, 알파·오메가 페로몬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진욱의 표정이나 분위기만으로도 그가 어마어마한 페로몬을 뿜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고, 몸이 긴장으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니까.

한수진은 내심 남자가 최선우의 아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런 짐작을 있었던 것은 최선우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을 , 자신을 찾아와 알고 있는 대로 말하라면서 윽박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때 강진욱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눈에는 약간 선우를 걱정하는 빛을 채였다. 그래서 대체 무슨 사이인가 궁금했는데…….

‘그런데 둘이 같이 왔네?

한수진은 살짝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최선우와 강진욱을 관찰했다.

“아무 상관 없다니?

강진욱이 발끈해서 물었다.

“상관없죠. 이제 상사도 아니고. 저랑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상관없지 않으면 ? 집에 정말 감금이라도 하게?

선우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듯이 대꾸했다. 틀린 하나 없는 반격에 강진욱이 못마땅하다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실 자신과 최선우는 특별히 무어라 연결된 없는 사이이기는 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지!

번뜩 떠오른 생각에 강진욱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왜 아무 사이가 아냐? 너랑 나랑 무슨 사이인지 분명 얘기했잖아?

“아니, 그건…….

소리에 이번엔 꼬박꼬박 얄밉게 받아치던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했던 말이 하필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강진욱은 입만 벙긋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최선우를 보다가 웃었다.

뭔가 이긴 같고, 기분도 유쾌하고, 상황도 즐겁다 느꼈다.

“일단, 거기 최선우 환자랑 동행하신 ?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동행분.

분명 최선우와 어떤 사이가 있다고 암시를 했는데도, 의사는 그렇게 선을 긋고 있었다.

강진욱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의사를 노려봤다. 동시에 그에게서 위협적인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윽!

선우가 짧게 신음하며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온몸을 압박하는 기운이 몰려와 심장이 옥죄는 답답해지고,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이었다.

콧속으로 아주 진하고 독한 향이 풍겨 왔다. 마치 깊이를 없을 만큼 깊고 어둑한 숲에 들어왔을 느낄 있는 그런 향기.

‘뭐야, 이건?

선우는 당황하여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진료실 어디에 화분이라도 있나. 아니면 창문이 열려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건가.

하지만 어디에도 이런 냄새를 풍길 만한 없었다.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정도로 진하게 존재감을 끼칠 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의 화를 페로몬으로 표출하던 강진욱은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는 선우를 보고 아차 표정을 지었다.

최선우가 베타라 괜찮을 알았는데, 아무래도 몸이 좋지 못하니 정도로도 압박이 가해지는 같았다.

‘가뜩이나 몸도 좋다는데 괜히 무리하게 하면 되지.

강진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내보낸 페로몬을 서둘러 회수했다.

“휴우…….

압박감이 일시에 사라지자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적으로 납작한 배를 슬슬 문지르기도 했다.

강진욱이 모습을 보고 다시 눈을 찌푸렸다.

“배 아파?

별생각 없이 손바닥으로 느리게 배를 쓸던 선우가 퍼뜩 손을 멈췄다. 강진욱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아무래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그럴 없지.

선우는 말도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아, , 뭐…….

강진욱이 못마땅하다는 눈을 찌푸렸다. 환자가 있으니 성질대로 없어서 불편해하는 얼굴이었다.

“동행분.

선우와 마찬가지로 잠시 페로몬에 몸을 굳혔던 한수진이 금세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얼굴로 강진욱을 불렀다.

눈으로 문을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사라더니 깡이 보통은 아니었다.

강진욱이 한수진을 노려봤다.

기분 같아서는 다시 페로몬을 뿌리며 위협하고 싶지만, 자리에는 선우도 같이 있으니 그럴 없었다.

“최선우, 핸드폰에 녹음해 . 무슨 얘기 했는지 확인할 테니까.

“그거 불법이거든요?

선우는 아주 당당하게 자신에게 불법적인 일을 하라고 말하는 강진욱을 어이없이 쳐다봤다. 하지만 강진욱도 더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네가 녹음하는 불법 아니거든? , 녹음하기 싫으면 같이 듣고.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선우가 항복했다는 손을 번쩍 들었다. 모습을 강진욱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럼 나가 주세요.

그때까지도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한수진이 상황을 정리했다.

강진욱은 사사건건 끼어드는 한수진을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진료실을 나갔다.

그냥 있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뽐내는 극우성 알파가 사라지자 한수진이 “휴. 한숨을 쉬었다.

“태연한 척하기는 했지만, 역시 극우성이 다르기는 다르네요. 베타인 제가 정도이니 선우 씨는 힘들겠어요.

한수진이 웃으며 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저도 열성이라서 괜찮아요. 그보다 선생님,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선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러지 않아도 선우 걱정 많이 했어요.

“아…….

선우는 한수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 사라져서 핸드폰도 없애 버리시고. 일단 그건 그거고요.

한수진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짝소리가 나게 쳤다.

“크게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아까 과일이랑 채소만 먹었다고 했죠. 입덧이 심해요?

“음, 아뇨. 심한 편은 아니고요. 그냥 냄새를 맡으면 거부감이 드는 정도?

“그럼 일단 뭐라도 먹는 좋겠어요. 드셔야 체력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속이 비면 위액 때문에 정말 위가 상할 수도 있어요.

“네. 그래도 오늘은 흰죽이 들어가더라고요.

“아, 그랬죠. 죽은 괜찮은 같아요?

“흰죽이면요. 다른 아직 먹어 봤어요. 냄새나 맛이 자극적이지 않으면 괜찮은 같아요.

선우의 말에 한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럼 먹을 있는 있을 같으니까. 두부도 괜찮은지 테스트해 보세요. 그냥 모두부 말고 연두부 같은 냄새도 강하지 않으니까.

“연두부……. , 먹어 볼게요.

선우도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일이나 채소류만 생각해 봤는데, 단백질 보충을 하려면 두부도 괜찮을 같았다.

“닭가슴살도 가능할 같은데…… 샐러드랑 섞어서 먹어 보고요.

한수진과 이야기하는 도중 선우가 갑자기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선우 . 왜요?

“죄송해요. 그냥 웃겨서요.

선우가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사과했다. 한수진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했다.

자신이 얘기한 중에 웃을 만한 있나 고민도 봤다.

“꼭 다이어트 식단 같아요.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긴 하지만. 선우가 작게 속삭이자 한수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무래도 위에 부담이 되지 않고 건강도 챙길 있는 것들 위주로 먹어야 하니까요.

“네.

“앞으로 속에 아이는 계속 자랄 거고. 그러면 선우 씨가 먹는 음식으로 양분을 흡수할 거예요.

한수진이 얕게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아이의 형질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형질에 따라서는 평소 먹는 것보다 많은 음식을 섭취해야 있어요.

“아…….

아직 형질에 관해서는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던 선우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전에 전화로 했던 질문 다시 할게요.

한수진이 아까보다 신중해진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선우 , 아까 들어왔던 동행한 남자분, 태아의 생물학적 보호자 하나죠?

“……아뇨.

한수진은 선우가 대답하기 정도 망설인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그럼 아직도 그때 일이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네.

나는 아니었다. 선우에게는 그날 기억이 아예 없었다.

어차피 그건 최선우가 아니라 서브수가 저지른 짓이었으니까. 그리고 태아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알고 있지만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저쪽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선우는 아이를 혼자 낳아서 혼자 키울 것이라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는 같단 말이지.

선우는 속살을 깨물었다. 정말로 전혀 원치 않는 일인데 말이다.

“그럼 아까 그분과는?

“말씀드렸다시피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런 것치고는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최선우도 아닌 척하지만, 그쪽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고.

하지만 한수진은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원래 넝쿨처럼 얽히고설켜 있지 않은가.

제삼자가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끊어져 버릴 있었다. 그러니 그건 함부로 나서면 .

대신 한수진은 손깍지를 끼고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선우 , 그럼 이렇게 해요.

한수진이 꺼낸 말을 들은 선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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