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51-60

#51

수요일, 어느덧 게임 진행도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31 차를 맞이했다.

지난주 금요일 삼자대면 아닌 삼자대면 이후 매일이 차게 흘러갔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라윤 루트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공략 캐릭터까지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체감상으로는 아득하게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강태양을 많이 챙기지 못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오히려 다행이려나?

지금까지의 경험상 강태양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남자였다. 뻔뻔한 같으면서도 여리디 여린 구석이 있었고, 시베리아 벌판처럼 쿨한 같다가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혼자 꽁해지고는 했다.

축제 부스에서도 따지고 보면 좋게(?) 헤어진 아니었으니,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뜸하면 은근히 삐질지도 몰랐다. 때마침 수요일은 강태양이 재활 훈련을 받으러 병원에 오는 날이었다. 지난번 페이스페인팅 부스에서 강태양이 크게 한턱을 쐈으니, 오늘은 답례로 내가 맛있는 밥을 사야겠다.

그렇게 용기를 끌어모아 먼저 들이대 보기도 , 전혀 뜻밖의 계기로 강태양을 맞닥뜨렸다.

‘음부부와 한솥밥? …강태양, EPL 최강 FC 런더너스 러브콜 받아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강태양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양팔을 하늘 높이 뻗고 세리머니를 하는 강태양을 서둘러 클릭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강태양(25, 클럽서울) 해외 진출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영국 EPL 최고 명문 클럽인 FC 런더너스가 여름 이적 시장에서 강태양 영입을 본격적으로 노린다.

FC 런더너스는 윙포워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근 부상에서 복귀한 강태양에게 한화 2,000 상당의 이적료를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알려졌다. 지난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독일 분데스리가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았던 강태양은 당시 소속팀 클럽서울에 우승컵을 안기고 싶다는 이유로 해외 이적을 고사했다. 하지만 선수 본인이 오랜 기간 EPL 진출이 꿈이라고 밝혀온 만큼, FC 런더너스는 강태양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것으로 보인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FC 런더너스는 클럽서울과 물밑 협상을 시작했으며, 선수 의사만 긍정적이라면 계약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해외 진출과 동시에 강태양이 국내 축구선수 해외 진출 역사상 최고 이적료와 연봉을 갱신할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강태양 에이전트 측에서는 선수 이적과 관련해서는 아직 확정된 내용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2,000 원이라니, 어마어마한 단위의 이적료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그때 강태양이 해외 진출만 하면 월드클래스 축구선수처럼 몇백억씩 거라고 했던 허세가 아니었구나! , 이적료는 연봉이랑은 조금 다른가? 그래도 정말 대단하다.

EPL 진출이 오랜 꿈이었다니 강태양은 지금쯤 엄청 기뻐하고 있겠지? 이미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쏟아지고 있겠지만 역시 강태양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번의 통화 연결음이 울리자 강태양이 전화를 받았다.

“태양이 , 이적 축하해!

- …….

곧바로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강태양에게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깐의 공백 끝에 하아,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떨떠름한 기색에 당황해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 얘기 누구한테 들었냐?

“전국민이 알고 있는 소식 아냐?

- …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은… 아까 포털 사이트 뉴스에서 봤어.

- 아….

이렇다 설명도 없이 쏘아붙이더니, 이내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는 강태양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같았다. 왜지, 빅클럽 이적이라면 좋아할 아닌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뒤에서 협상이 틀어지기라도 했나?

“그런데 태양이 , 형한테는 엄청 잘된 아냐?

- 그치, . 잘된 일이지 여러모로.

“근데 목소리가 그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

“…….”

- 아냐, 다음번에 만나면 얘기해 줄게.

으음… 하지만 지금 강태양은 대강 상황을 덮으려는 같았다. 오락가락하는 반응에 덩달아 역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다, 뒤늦게 발등의 불을 알아차렸다. 강태양이 여름에 해외 진출을 앞두고 있는 거라면, 그전에 강태양 루트 진도를 둬야 하는 아냐?

“형, 오늘 병원 오는 맞지? , 그래도 형한테 먹자고 하려고 했었는데.

- …….

“지난번에 형이 한턱 내준 덕분에 친구들이 주말에 기부도 잘했대. 오늘은 내가 살게!

- 이제 병원 가는데?

“헉, 진짜?

- . 재활 치료 지난주에 끝났잖아.

그러나 이어진 대답은 묘하게 시큰둥했다. 순간 연우주 너는 나에게 관심이 너무 없다던 강태양의 볼멘소리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재활 끝났다고 따로 말도 줬잖아!

아니… 그러고 보니, 축제 부스에 찾아왔을 강태양은 완전히 깁스를 벗고 있었다. 그때 내가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질문했으면 좋았을걸.

“아, 그랬구나….

마치 그에게 밀당(?)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초조해졌다. 그동안에는 강태양 앞에서 안전거리를 유지하기에 급급했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강태양의 마음이 내게서 완전히 돌아설지 몰랐다. 전에 강태양을 붙들어야 했다.

“그럼 있는 쪽으로 내가 갈게! 그래도 형한테 되게 중요한 일인데, 직접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혹시라도 전화를 끊을세라 빛의 속도로 덧붙이자 핸드폰 너머로 ,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방금 너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나.

- 그러면 이쪽으로 , 간단하게 얼굴이나 보자.

***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 외곽에 위치한 클럽서울 트레이닝 파크로 향했다. 거대한 부지에 조성된 훈련장에는 천연 잔디로 그라운드가 널찍하게 펼쳐졌다.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하는 선수들은 슈팅을 시도하거나, 허리 밴드나 원뿔 같은 도구를 이용해서 유연성과 민첩성 연습을 이어 나갔다.

원래 오늘은 트레이닝 파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날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재활을 마치자마자 팀에 복귀했다는 강태양의 이름을 대고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있었다. 실내 벤치에 앉아 강태양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대로 삼십 남짓 지났을까. 머리가 젖은 선수들이 스포츠타월을 목덜미에 걸고, 더플백을 어깨에 걸친 샤워실에서 하나둘 걸어 나왔다. , 드디어 훈련이 마무리된 모양이네! 벤치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고개를 비쭉 내밀어 무리의 선수들 사이로 강태양을 찾아 헤맸다.

“어? 오늘은 훈련장 개방일이 아니라, 여기까지 들어오면 되는데.

클럽서울 선수들은 대체로 강태양 못지 않게 근육이 우락부락했다. 그중 가장 온화한 인상의 남자가 클럽하우스를 기웃거리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제가 클럽서울 팬이 아니라, 아니 맞기도 한데… , 강태양 선수와 미리 이야기하고 거여서요.

“어, 태양이 친척 동생이야? 하나도 닮았는데.

“야, 걔가 어떻게 친척 동생이 있겠냐, 아는 지인이겠지.

“아, 그런가? 하긴, 닳고 닳은 누구랑은 다르게 풋풋하고 상큼한데?

“하, 하핫….

강태양의 이름을 내뱉자마자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에워쌌다. 와르르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어색하게 웃으며 발짝 뒤로 물러났다. 키와 덩치가 축구선수 여럿을 맞닥뜨리자 손끝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그게 아니라, 강태양 이거 아니냐?

“헐, 설마~

“왜, 강태양 남자며 여자며 가린다잖아. 지금도 지경인데 해외 진출까지 하면 어우, 아주 볼만하겠어?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보란 듯이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빈정거렸다.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발언에 기분이 나빴지만, 이곳에는 손님으로 왔으니 함부로 지적하기도 애매해서 아랫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이 새끼들아. 프로는 원래 실력으로 말하는 거야.

“어, 강태양 왔냐? 호랑이도 하면 온다더니.

“남의 사생활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간에 연습이나 .

때마침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온 강태양이 남자의 등짝을 , 후려쳤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매서운 눈빛에 다른 선수들이 순간 움찔했다. 뿔뿔이 흩어지는 선수들 사이로 내게 다가온 강태양이 보호하듯 어깨를 감싸고 길을 이끌었다.

“오는 길에 헤맸냐?

“응! 버스 타고 와서 생각보다 빨리 왔어. 근데 , …저 사람들 저렇게 말을 세게 ?

“나 없는 사이에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 그보다… 혹시 , 팀에서 괴롭히는 아니지?

무사히 클럽하우스 밖으로 빠져나오자 하늘이 트인 맑은 오후 날씨가 우리를 반겼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로 심장은 여전히 콩닥거렸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강태양이 , 옅은 웃음을 흘리더니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에이, 운동하는 놈들이라 워낙 투박해서 그런 거고. 그보다 내가 어디 가서 따돌림당할 인간이냐?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뭐, 동료지만 결국은 경쟁자인데 잘되는 마냥 좋지는 않겠지. 내가 빠지면 전력에 차질도 테고 말야.

“…….”

“그래도 설마 새끼들 하나가 언론에 이적설 흘린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대수롭지 않다는 대꾸했지만 강태양은 평소보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강태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문제가 있는 아니라니 다행이기는 한데… 그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 다리 나았으면 말이라도 주지 그랬어. 재활 끝난 기념으로 민주랑 같이 파티라도 할걸!

“왜, 연우주 후배놈이랑 연애질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아니었어?

강태양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러자 강태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웃는 얼굴로 허를 찔렀다.

“아니, 그런 아니라니까 자꾸 사람한테 그래….

“가만 보면, 자각 없이 사람 홀리고 다닌단 말이야.

아니, 이제 보니 은근히 뒤끝 있네!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눈썹을 이지러뜨린 강태양이 검지를 뻗어 부풀어 오른 볼을 건드렸다.

“아, 혀엉….

“그리고 축하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응? 그건 무슨 말이야?

“이제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데, 컨디션이 돌아와. 아무래도 슬럼프가 길어지려나 .

<SYSTEM> [돌발 퀘스트] “스트레스 신호등”

이적설 루머로 인해 강태양 스트레스가 위험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강태양이 복귀전에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있도록,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슬럼프 탈출을 도와주세요.

(성공 보상: 강태양 스트레스 수준 “편안함” 도달 호감도 10 상승)

              

#52

그와 동시에 새로운 퀘스트와 함께 눈앞에 동그란 계기판이 나타났다. ’스트레스 신호등’이라는 퀘스트 이름처럼 빨강, 주황, 파랑, 초록의 알록달록한 색깔을 바탕으로 눈금이 촘촘하게 새겨진 계기판 위로 기다란 바늘이 진동했다.

 

위험: 80-99%

긴장: 60-79%

보통: 30-69%

편안함: 1-29%

 

아슬아슬하게 간당거리는 색색깔의 바늘이 강태양의 스트레스 상태를 가리켰다. 바로 지금, 불퉁한 표정을 하는 강태양의 스트레스 신호등은 붉은색 위험 수준이었다.

“태양이 , 그러면 오늘 하루는 그럼 나랑 휴가 보낼래?

그렇다면야, 강태양이 답답한 마음을 날려 버릴 있도록 내가 도와줘야겠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등장한 퀘스트였지만, 그래도 강태양은 나랑 같이 있으면 (자꾸 어이없는 말을 듣다 보니) 웃게 된다고도 했으니까…. 의욕 넘치는 제안에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강태양이 짙은 눈썹을 치켜떴다.

“아니, 재활 끝나자마자 바로 훈련 복귀했으면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아냐.

“…그거야 , 그렇지.

“머리가 복잡할수록 아무 생각 하고 빈둥거리는 시간이 필요해. 믿어 , 정말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래도?

퀘스트 클리어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것만큼은 강태양에게 자신 있게 말해 있다. 조급한 마음에 계속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되려던 일도 된단 말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하자 열정이 지나쳤는지 강태양이 ,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 보면 뜬금없는 같으면서도 은근히 맞는 말을 한단 말이지.

“아니야, 이건 뜬금없는 말이 아니라 엄청나게 과학적인….

“그래서, 내가 휴가 내면 우리 오늘 하고 건데?

다행히 강태양은 선뜻 흥미를 보였다. 그와 동시에, 계기판의 바늘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스트레스 수치가 약간 줄어들었다. 여전히 바늘은 붉은색 ‘위험’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지금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나 !

“음… 형은 보통 쉬는 시간에 ?

“뭐, 경기 복기하거나, 웨이트 올리고. 주말에는 해외 리그 경기도 챙겨 보지.

“흠, 다른 없어?

“축구 게임도 가끔 하긴 하는데 캐릭터 능력치가 제대로 반영이 되어서 별로야.

말은 결국 축구를 제외하면 제대로 쉬는 거의 없다는 거잖아. 강태양의 스트레스 수치가 위험 수준까지 올라간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강태양이 무작정 쉬는 대신 최대한 효율적으로 스트레스를 있도록 도와야 했다.

“축구 말고는?

“음… 팬레터 답장 때도 있고, 그래도 갑갑하다 싶으면 하룻밤 상대라도 찾거나?

“형 생각보다 되게 건전한 사람이구나. 아니 물론 유흥을 즐기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 빼면 말야.

“야 클럽 죽돌이 그런 아냐, 진짜 가끔 . 내가 생긴 양아치처럼 생겨서 그런가? 이상하게 나만 맨날 걸린단 말야.

기왕 이렇게 강태양이 즐기는 일들로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자자한 소문에 비해 강태양의 일상은 소탈하고 소박했다. 하긴, 그때 재활 활동하면서도 관리 해야 한다고 꾸준히 웨이트 했었지….

“흐음….

그렇다고 취향대로만 오늘의 휴가를 계획하면 강태양이 좋아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강태양이 아직 모르고 있지만 일단 시작해 보면 분명 좋아할 만한 , 그런 대체 뭐가 있을까?

“태양이 , 그러면 우리 같이 한강 놀러 갈까?

곰곰 고민하다,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와 함께 질문했다.

***

한강공원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한창 볕이 뜨거울 시간은 조금 지나 있었다. 평일 오후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다들 치열하게 맞부딪치기 보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각자의 시간을 느긋하게 누렸다. 한적한 공원에는 2인용 자전거와 롱보드, 강가에서는 오리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며칠 , 학교에서 친구들이 주말에 한강공원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새 날씨도 좋은데, 트인 야외에서 다양한 액티비티를 있다나. 운동선수인 데다 성격도 활달한 강태양에게도 딱이겠다 싶었다.

“태양이 , 우리도 빨리 강물로 나가자!

그중에서도, 스탠드업 패들보드가 가장 재미있어 보였다. 한쪽 옆구리에는 패들보드를 끼우고, 다른 손으로는 강태양의 팔목을 잡아끌어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 자리한 서핑클럽에서 간단하게 강습을 마치고, 수영복과 구명조끼를 장착한 다음이었다.

“와아, 완전 시원하다!

각자 패들보드에 올라탄 다음 차근차근 강물로 나아갔다. 노를 한번 크게 저을 때마다 수면에서 서늘한 물기운이 , 치고 올라왔다. 물에 떠올라 있어서인지 가만히만 있어도 둥실둥실한 기분이 들었다.

옆의 강태양 역시 표정이 한층 편안해 보였다. 조금씩 하강하던 스트레스 수치가 어느새 ‘긴장’ 수준으로 내려와 있었다. 다행이다! 방긋 미소 짓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강태양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으아악… 일어나겠어.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강습에서 배운 대로 패들보드 위로 올라서보기로 했다. 패들보드 노를 가운데에 올려 두고,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대로 서서히 일어나려 했지만, 지면이 아닌 물결 위에 있는 패들보드가 자꾸만 출렁거려 불안했다.

“형, 수영 못하는데 괜찮겠지?

“구명조끼 입고 있는데 걱정이야?

“그래도 무섭잖아….

“으이구, 빨리도 물어본다.

무릎을 세우려 했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고 끝내 패들보드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반면 강태양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패들보드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탄탄한 몸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패들보드 위에 단단하게 버텨 섰다.

강태양도 패들보드는 오늘 처음 타는 거라고 했건만 똑같이 강습을 들었어도 축구선수의 운동신경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반쯤 포기하고 다시금 패들보드에 길게 몸을 늘어뜨린 양팔을 맥없이 퍼덕거렸다.

“빠지면 내가 건져 줄게. 천천히 일어나 .

시무룩해진 나를 알아챘는지, 강태양은 큼직하게 노를 저어 쪽으로 다가왔다. 패들보드 위에 강태양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있다는 ,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무릎에 너무 주지 말고, 몸에 균형 잃지 않으면서.

“으응, 알았어….

그래도 번만 볼까? 위에서 허우적거리던 팔을 거두고, , 숨을 들이켰다. 다시금 패들보드 위에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강태양이 바로 옆에서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이번에는 엉거주춤하게나마 일어서는 성공했다.

“우와, 됐다! , 방금 일어섰어!

“잘하네, 연우주.

물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비스듬히 뻗었다. 강태양처럼 노를 길게 저으면서 조금씩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기도 했다.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말갛게 하늘 아래 트인 강물이 길게 펼쳐지고, 선들선들한 바람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태양이 , 노을 완전 근사하다, 그치?

패들보드는 나긋한 바람을 타고 순항했다. 균형을 잡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는, 패들보드 위에 길게 드러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쉬기도 했다. 해가 조금씩 기울어 하늘이 오묘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드문드문 구름 사이로 불그스름한 석양이 고개를 내밀자 강물이 주홍빛으로 물결쳤다.

“그러게. 이렇게 보니까 강이 이쁘네.

찬란하게 쏟아지는 황금빛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강태양이 웃었다. 여전히 강태양은 패들보드 위에 늠름하게 버텨서 있었다.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던 강태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노을빛을 머금어 반질거렸다.

해가 저물어 무렵에는 앱으로 예약한 전동 킥보드를 탔다. 서로 헬멧을 단단히 씌워 다음 전동 킥보드를 이끌고 자전거도로로 나아갔다. 제한 속도에 맞춰서 느리게 움직여야 했지만, 쌩쌩 지나가는 풍경에 속이 왠지 후련해졌다. 나를 위해 속도를 맞춰주는 강태양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강공원을 바퀴 돌았다.

그렇게 빌딩 숲이 빼곡한 도시 한복판에서 벗어나 푸릇푸릇한 자연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밤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오늘 휴가의 마지막 코스인 ‘한강 야경 보며 치맥’을 즐길 만반의 준비가 셈이다.

강태양이 강변에 자리를 맡아 두고 있는 사이, 내가 배달존에서 양념치킨과 생맥주를 픽업해 왔다. 무릎을 세우고 돗자리 위에 걸터앉은 강태양이 나를 흘끔 돌아보았다.

“어, 연우주.

까맣게 내려앉은 밤하늘 아래로 어둡게 물든 강물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위로 드문드문 반짝이는 색색깔의 불빛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강태양은 조금 멍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다들 나한테 관심도 없네?

              

#53

“에이, 알아봐도 형도 쉬러 보이니까 다들 배려하는 거지.

“그래… 우리 오늘 여기 쉬러 거였지.

강태양이 허탈하게 중얼거리고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꼬박 한나절이라는 시간을 보낸 다음에도 유유자적한 공원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는 듯했다.

“짜잔! 한강 공원에서는 치맥이 빠질 없다구!

여전히 조금 울적해 보이는 강태양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넓게 펼쳐진 돗자리 위에 치킨과 생맥주를 가지런하게 세팅했다. 치킨 무와 소스까지 개봉을 마친 의기양양하게 나무젓가락을 건네자 강태양이 웃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념치킨을 크게 베어 물자 달착지근한 기운이 안에 퍼졌다. 매콤한 맛을 알싸하게 중화시키는 생맥주까지 마시니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옆자리의 강태양은 치킨을 앞에 두고도 동작이 굼떴다.

“형, 그러지 말고 얼른 치킨 먹어 , 진짜 맛있어.

“으음….

“하루쯤은 몸에 별로 좋은 음식 먹어 줘도 괜찮아. 너무 빡빡하게만 살면 틈이 없잖아!

말을 듣고야 강태양은 이긴 다리를 가져갔다. 너스레를 떨어 놓고도 괜스레 긴장이 되어서 치킨을 먹는 강태양을 숨죽인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입맛이 건강식에 길들여져서 MSG 팍팍 음식은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맛있네.

“정말? 맛있어?

“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나 .

“형, 이거 맥주랑 같이 먹어 , 스트레스 때는 치맥이 진리야!

치킨을 우물우물 먹는 강태양이 눈을 반짝 빛냈다. 기대 이상의 맛이었는지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대로 탄산이 보글보글 끓는 생맥주까지 시원하게 들이켜자, 스트레스 신호등의 바늘이 ‘보통’ 쪽으로 조금 이동했다. 역시, 살아 생전 치느님 싫어하는 사람을 적이 없다!

이번에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강태양이 날개 부위를 집어 들었다. 덕분에 역시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치킨을 바지런히 먹었다. 성인 남자 둘이 달려들자 치킨 박스는 생각보다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페트병에 담긴 생맥주도 1/3 남짓만이 남아 있었다.

“연우주.

“응?

,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찌푸린 강태양이 손으로 입꼬리를 가리켰다. 이어 눈매를 찡긋거리기도 했다. 표정과 손짓으로만 이야기하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칠칠맞게 흘리고 먹냐.

그러자 불쑥 팔을 뻗은 강태양이 입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정신없이 먹는 사이 입가에 치킨 양념이 묻어 있었나 보다. 그러느라 단단한 손가락 끝이 입술에 살짝 스치자 몸이 움찔 떨렸다.

“아….

그래도 그렇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막…. 거침없는 스킨십에 어깨를 움츠린 나를 강태양이 미묘하게 굳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나른하고 느슨하게 긴장이 풀려 있던 눈빛이 순간적으로 짙어졌다.

“아, 하하, 그러게. 근데 은근히 다정하다.

“…….”

“그래서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그렇게 많은가.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긴장감이 빼곡하게 둘러쌌다. 빡빡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어설픈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강태양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 원래 별로 다정해.

“어?

“다들 나보고 나쁜 남자라고 하던데?

[25]

불퉁한 대답과 함께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는 것처럼 강태양 머리 호감도가 반짝였다. 강태양은 원래 진지한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순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가슴이 간질간질하게 차올랐다.

“으음….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게임에 집중해야 . 흘끔, 호감도 옆에 있는 스트레스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강태양과 최선을 다해 열심히 놀았지만 신호등에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

위험 수준인 빨간색에서 주황색 ‘긴장’까지 내려오기는 했지만, 파란색 ‘보통’을 지나 초록색 ‘편안함’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이었다. 이러다 강태양이 다시 훈련에 복귀하면 스트레스가 올라가는 아닌가?

그제야 나의 접근 방식이 잘못된 아닌가 싶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연봉 상승과 커리어 도약을 보장하는 해외 진출이었지만 그럼에도 사실을 받아들이는 강태양은 내내 떨떠름했다.

“있잖아, 형은 영국에 가고 싶어?

그렇지만 나는 강태양의 긴장만 풀어 주려고 했지, 정작 이적설에 대한 강태양의 마음은 제대로 묻지 못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강태양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나에게 닿는 강태양의 새까만 눈동자에 자잘한 동요가 일었다.

“내가 축구 시작하면서 이루겠다고 다짐한 목표가 있어.

“오, 어떤 건데?

“국가대표, 프리미어리그 진출, 발롱도르 수상.

“와아….

“첫 번째는 이미 했고. 이제 번째도 기회가 생겼고, 운이 좋으면 언젠가 번째까지 이룰 있겠지.

강태양은 축구선수로서 남들은 하나 이루기도 어려운 최고의 성취를 이뤄 내고, 더욱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상황인데도 강태양은 평소의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면 형은 축구는 시작한 거야?

“나? 아홉 땐가, 땐가.

“오, 초등학생 때부터 거구나.

“어, 그때 너한테 시설에서 컸다고 했잖아.

“아, 응응!

“…부모님 없다고 무시당하는 죽기보다 싫었거든. 다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었는데 내가 공부에는 젬병이더라고.

“…….”

“그런데 남들보다 축구 하나만큼은 훨씬 잘하길래, 여기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겠다 싶었지.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는 강태양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태양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지금보다 사납고, 어쩌면 심술궂었을, 자존심이 건드려지는 절대 참지 못했을 꼬마 강태양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라도 잘하는 있으니까, 나부터도 당당한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하나.

“…아.

“처음에는 그냥 악바리처럼 달려들었지. 그런데, 경기장에서 뛰어다닐 때만큼은 다른 잊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서 그게 좋더라고.

분명히 나랑은 조금도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시절의 강태양이 어떤 마음으로 축구를 시작하고, 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지 왠지 조금은 같았다.

“나도 그랬는데.

“응?

“…….”

“부모님 돌아가시고 이제 세상에는 혼자만 남겨진 같아서 슬펐거든. 그래도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외로웠던 같아.

“…….”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역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기분에 괴로워했다.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송두리째 지워지는 같은 외로움과 고립감. 감정을 이겨 내기 위해 그림에 집요하게 매달렸고, 순간만큼은 살아 쉬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세상에 내가 있을 만한 자리가 하나쯤은 생긴 같은 느낌? 히히.

말하고 보니 너무 거창한가 싶어 농담처럼 말끝을 뭉뚱그렸다. 아직 화가 지망생일 뿐인 나는 그림을 공부하는 단계고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기만 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강태양과는 사뭇 다른 처지기는 했다.

“…….”

“…….”

강태양과 나란히 돗자리에 느슨하게 걸터앉은 까맣게 출렁이는 강물을 지켜봤다. 짙게 물든 수면 위로 일렁일렁 불빛이 번졌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가 뾰족뾰족하게 세운 강태양의 앞머리가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다.

“우주야.

“응, .

당당하고, 호전적이고, 주변을 쥐어 잡는 겉모습 뒤에 있는 연약한 강태양의 속내처럼. 그렇게 새롭게 알게 강태양의 모습이 실망스럽다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 인간으로 그를 이해할 있게 되어 좋았다.

“나는 그냥…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모든 사람에게 증명하고 싶었어. 탓하거나, 상황 때문에 어쩔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거든.

“…….”

“십 전에 내가 프리미어리그 선수가 거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겠지. 그때 나는 가난하고 가족도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으니까.

“…….”

“그런데 이상하지. 이제 정말 내가 평생 바라오던 꿈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는데, 발밑이 위태로운 기분이 들어. 지금까지 쌓아 모든 허상인 것처럼.

폭발적인 재능과 매력적인 성격을 타고나 원하면 뭐든 가질 있을 같은 사람. 처음에는 강태양을 애초부터 나와는 다르게 좋고 많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초의 오해와 편견의 장벽이 거두어진 자리, 이제야 나는 강태양이라는 사람 자체를 오롯이 응시하게 되었다. 눈부신 성취를 거두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만큼, 이제는 강태양이 행복을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그게 허상이야. 지금까지 노력해서 쌓아 형이 알고, 내가 알고, 세상 사람들이 아는데.

강태양이 씁쓸한 얼굴로 토로한 고민에 마음이 시큰시큰했다. 팔을 길게 뻗어 강태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태양은 맞은 강아지처럼 얌전히 손길을 받아 냈다. 밤의 강물처럼 새까맣게 내려앉은 강태양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형은 모든 일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어딜 가든 잘할 거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어느 쪽으로든 형이 가장 행복한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어.

“…….”

“…어디에 있든 형은 혼자가 아니니까.

그때, 강태양의 스트레스 신호등이 세차게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부웅, 계기판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바늘이 왼쪽으로 밀려갔다. 단박에 스트레스 수준이 주황색 ‘긴장’에서 초록색 ‘편안함’으로 내려앉았다.

<SYSTEM> [돌발 퀘스트] “스트레스 신호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강태양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35]

한꺼번에 10% 상승한 강태양 머리 위의 호감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켤 때였다. 상반신을 기울인 강태양이 볼에 짧게 뽀뽀했다.

“아….

놀란 마음에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리자 강태양이 언제 그랬냐는 뒤로 물러났다. 모른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강태양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42]

그러더니 강태양의 호감도가 7% 추가로 올랐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굴면 차라리 장난처럼 웃어넘길 텐데, 지금 강태양은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며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매사 뻔뻔하게 굴던 강태양이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자 감정이 전염되는 것처럼 역시 어쩔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SYSTEM> 공략캐릭터 [강태양]과의 강한 교감이 이루어져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래, 좋은 좋은 건데…. 간질간질한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올라서, 모른 눈앞에 흐드러지게 빛을 반사하는 강물만 물끄러미 건너다 봤다.

              

#54

<한국대학교 알림) 5 29 새롭게 게재된 [MK금융그룹] [대학생 하계 인턴] 정보를 확인해 보세요!>

 

월요일 아침 등굣길,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부지런히 캠퍼스를 향하는데 진동과 함께 핸드폰 푸시 알림이 왔다. , 이거 게임 진행에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 같은데? 자리에 멈춰서 바로 학사정보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MK금융 대학생 하계 인턴 모집 공고

지원자격: 한국대학교 재학생 (경제학, 컴퓨터공학 전공 우대)

근무기간: 여름 방학 (협의 조정 가능)

근무시간: -, 9-6

근무지: MK금융 여의도 본사

업무내용: MZ세대 타깃 AI 금융 상담 애플리케이션 출시 지원

모집인원: 1

* 원칙적으로는 여름 방학 단기 인턴 포지션이나 업무 평가가 우수할 경우 정규직 전환 가능

 

오늘은 프라이빗 플레이 36 , 게임에 빙의한 지도 어느덧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차태주가 학기 중에 여름 방학 인턴을 채용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인턴 공고가 올라올 때가 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나 본격적이잖아! 봉사활동 모집 때와는 다르게 다르게 반듯하게 잡힌 공고에 마음이 덜컥 졸아들었다. 명만 뽑는 포지션이라니, 지난번 강의에도 사람이 수두룩했는데 경쟁률이 엄청 치열한 같다. 게다가 경제학, 컴퓨터공학 전공 우대라면 나랑은 거리가 멀어도 심각하게 먼데?

“…지금이라도 취준 스터디에 들어가야 하나?

인턴십에 지원하려면 뭐라도 준비를 해야 텐데…. 유한나와 황병열을 비롯해 게임 얕은 인맥으로는 제대로 정보를 얻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마 친구들은 내가 기를 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인턴십 자리를 얻으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뻔했다.

중간에 한복판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혹시라도 지각을 할까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갔다. 무사히 제시간에 도착해 전공 수업을 듣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근심 걱정이 한가득했다. 교수님 눈을 피해 은근슬쩍 핸드폰을 만지면서 되는대로 학교 익명 커뮤니티 취준 게시판에 접속했다.

제목: MK금융 하계인턴 지원하는 사람들 드루와바~~

컴공인데 애플리케이션 출시 지원 업무면 개발 경력 도움 될까?

지금 졸유하고 취준 중인데 이번 공고는 확실하게 정규직 전환형 인턴은 아닌 같아서 고민되네

그래도 MK 하면 국내 최대 대기업이고 차태주 밑에서 직접 배울 있는 완전 메리트이긴 한데……

취준하는 사람들 이번 공고 어떻게 ??

 

[댓글 67]

- 컴공 우대라고 했으니까 한번 지원해봐 요새 금융그룹도 개발자들 없어서 난리래

ㄱㅅ… 금융쪽은 ㄹㅇ 모르긴 하는데 일단 원서라도 써볼까봐

- 근데 이거 붙기만 하면 차태주 라인 타고 쭉쭉 가는 아니냐?

깨라 ㅋㅋㅋ 꼴랑 6주짜리 인턴 공고 자기고 김칫국 오져버렸다

  은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아서 경쟁률 개빡셀수도ㅋㅋ

- 근데 평소에 MK그룹에 하계인턴 없던 걸로 아는데 갑자기 1명만 뽑으니까 뜬금없다

인턴 지원하는 사람들 다들 고학년이야? 2학년인데 서류 넣어도 될까??

  정규직 전환 옵션 붙어있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지원해서 잃을 없으니까 ㅇㅇ

- 니네 멘탈 개박살나고 싶지 않으면 포지션 절대 지원하지 마라. 우리 사촌 형의 친구의 사돈이 차태주 스타트업에서 일했는데, 갈갈 갈리다가 사람이 벼랑 끝까지 몰려서 정신과 약까지 먹음.

지인피셜 ~ 루머 퍼뜨려서 경쟁률 낮추고 자기 혼자 지원하려는 속셈 눈에 보이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했길래 부하 직원이 정신과 약까지 먹어? 루머라 치더라도 이건 찝찝한디

음… 작년에 학교에서 하는 차태주 멘토십 프로그램 들었는데 ㅋㅋㅋ 어떤 느낌인지는 같음. 기본적으로 차태주 자체가 너무 똑똑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ㄹㅇ 피마르자너

  ㅅㅂ 멘탈 탈곡당해도 좋으니 제발 뽑히기만 했으면 좋겠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차태주 발닦개질 열심히 자신 있음

 

“아… 미쳤다.

게시글과 댓글을 훑어 내리는 동안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다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읽어 봤자 괜히 마음만 착잡해질 같아 일단 앱을 종료했다.

물론 게임에 빙의된 이래 삶이 쉬웠던 적은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아냐?

하지만 극악의 난이도라고 해도 마냥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턴십에 붙지 않으면 차태주 루트를 진행할 수조차 없으니, 되면 어떻게든 되게 해야 했다. 어떻게든 내가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수업이 끝나고 학교 도서관 컴퓨터랩으로 향했다.

딸깍, 딸깍, 마우스를 바삐 움직이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다. MK금융그룹과 디지털 금융에 대한 최신 기사를 스크랩하고,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인턴십 후기를 읽었다. 그러다 스타트업 CEO 시절의 차태주 인터뷰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종 자료를 스크랩 한지 시간쯤 지났을까.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가지 사실만이 확실해졌다. 지금 이대로라면 내가 인턴 프로그램에 붙을 가능성은 1 없다는 .

1. MK금융 사업 관심 분야 해당 분야 근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본인의 역량은? (600)

비록 제가 아직 금융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성장…

 

까지 쓰다가 짙은 현타가 밀려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정말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 되겠는데? 어찌어찌 서류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면접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로 넘어 산이다.

물론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기에 기분이 처졌다.

“이 포지션 지원하는 사람 절박한 어디 나뿐이겠어.

게다가 어떻게 보면 나야 게임 공략에 필요한 거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번 인턴십이 ‘진짜’ 취업 준비기도 하고 말이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답답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오늘은 공부가 같다.

그래도 나는 게임 속에서만큼은 메인 플레이어이니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북돋기 위해 희망적인 상상을 보았다. 행복 회로 같긴 하지만 기댈 구석이 거기밖에는 없었다.

조급해지고, 불안해하고, 거라고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없으니 말이다. 기분 전환을 하고 나면 좋은 묘수가 떠오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을 만한 공간이 없을까 궁리하다, 때마침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생각이 미쳤다.

<< 관장님, 안녕하세요! 월요일 오후 보내고 계세요?

역시 이너피쓰에는 만월미술관이지! 지난번 휴관일에 미술관을 찾아 달라던 천유현의 말이 떠올라 메시지를 보냈다.

              

#55

“어, 여보세요?

- 우주 , 그동안 지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에 1 표시가 사라지더니, 곧바로 천유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빠르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더듬어 대며 다급하게 통화를 수락했다.

“아, 관장님 안녕하세요! , 저는 지내고 있어요!

- 하하, 다행이네요.

“휴관일에 미술관에 놀러 오라고 하신 기억나서…. 때마침 월요일이라 연락을 드려 봤어요.

- 그래도 우주 씨가 언제쯤 다시 오려나,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앗, 정말이세요?

- 우주 씨가 한국대학교에 다닌다 했었죠. 혹시 지금도 학교인가요?

“아, 맞아요. 이제 학교에서 나서려던 참이었어요.

- 근처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다 들어가는 길입니다. 정도 걸릴 같은데, 괜찮으면 나와 같이 미술관으로 갈래요?

“와, 그럼 저는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관장님!

고속도로가 뚫린 것처럼 시원시원한 전개에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의기소침해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유현은 흔쾌히 나에게 시간을 내어 주었다. 덕분에 환영받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약속한 대로 후문 앞에서 천유현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아하게 각이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길가에 멈춰 섰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사진으로나 접하던 으리으리한 차를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설마 저게 나를 데리러 차겠어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먼저 하차한 기사가 대신 문을 뒷좌석에서 천유현이 걸어나왔다. 관장님 차였다니! 놀란 마음에 등을 곧추세우고 재빠르게 롤스로이스를 향해 달려갔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우주 , 일단 차에 탈래요?

VVIP들이나 같은 롤스로이스 내부는 공간이 넉넉했고, 공기가 쾌적했다. 게임에 빙의하고 나니 이런 차를 보네. 푹신하고 안락한 가죽 좌석에 등을 느슨하게 기대려다, 지레 놀라 자세를 고쳤다. 반듯하게 정면을 응시한 채로 무릎에 얌전히 손을 올렸다.

“…….”

“…….”

여름에 가까워지는 날씨이지만 가벼운 슈트 재킷을 걸친 천유현은 격식 있는 옷차림이었다. 혹시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신 걸까? 언제나처럼 너그럽게 말을 걸어 오는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천유현을 흘끔 쳐다보았다. 표정에서 크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난 사이어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기류가 느껴졌다.

“관장님, 오늘은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휴관일인데, 혹시 지난번처럼 미술품 경매에 다녀오신 거예요?

“…….”

“…….”

“재단을 경영하다 보면 의외로 미술과 관련되지 않은 일을 해야 때도 많답니다.

“…….”

“행정 처리라고 해야 할까요. 다소 번거롭기는 합니다만 역시 내가 하는 일의 일부이지요.

안부 인사차 가볍게 질문을 건네자 천유현이 발짝 늦게 대답했다. 유려하게 이어지는 말이지만 내용은… 두루뭉술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정작 천유현이 무엇을 하다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초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일까, 천유현은 이따금 여러 가지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남자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미술관 경영은 그가 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쩌면 미술관 관장은 대외적인 직업일 , 천유현은 물밑에서는 프리메이슨처럼 거대한 사조직을 꾸리고 있는 아닐까? 창문 너머로 새들어오는 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회갈색 머리칼을 보며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차량이 미술관에 도착했다.

“조심해서 내려요.

“네, 관장님!

차에서 내려 천유현을 따라 불이 꺼진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고즈넉한 미술관에서 사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회백색 건물에 상아색 기둥은 보던 그대로인데도 주변에 사람이 둘러싸이지 않아 한층 새롭게 느껴졌다.

“우와….

정문 앞에 다다라 천유현이 지문으로 굳게 닫힌 잠금장치를 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실내에 서서히 불이 밝혀졌다. 천장에서 하얗게 내리쬐는 조명이 잠들어 있던 미술품에 빛을 내렸다. 작품의 윤곽이 빛의 흔적을 따라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조금 당연한 소리기는 하지만… , 휴관일에 미술관에 오는 처음이에요.

“하하, 소감이 어떤가요?

광활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술관 내부에 자리하는 사람은 천유현과 , 단둘뿐이었다. 천유현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적막한 공기 사이로 딸깍, 딸깍, 구두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신기한 눈으로 복도에 늘어선 조각상과 벽면에 걸린 그림을 둘러보았다.

“그림과 한층 가까워진 같아요. 단둘이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처럼요!

“관람객이 그림에 온전히 집중할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은데, 평소에는 한계가 있죠.

“아무래도,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오늘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구경하도록 해요, 우주 씨에게 내어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유현의 호의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오늘 하루 미술관의 유일한 관람객이 되어 전시실을 활보했다. 차분한 시선으로 자국 하나하나를 훑어내리며 작품과 같은 속도로 호흡했다. 감상을 방해하는 주변의 크고 작은 소란이 없어 작품 하나하나에 오롯이 집중할 있었다.

“어, 이건 보던 그림인데….

그러다 처음 보는 그림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현생에서도 즐겨 찾았던 만월미술관은 나에게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게임에 처음 도착했을 전시실 내부가 현실 그대로였던 것과 다르게, 오늘 보니 몇몇 그림은 배치가 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그림이 있는 한편 없어진 그림 역시 있었다.

“흐음….

만약 정말로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일종의 평행 우주라면, 현실과 게임을 하나로 잇는 만월미술관은 차원 이동 포털 정도가 것이다. 그럼 원래 세계에 있는 만월미술관에 변화가 생겨나면 게임 속에도 똑같이 반영되는 걸까? 문득 내가 없는 동안 현실에는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지, 진짜 육신은 없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천유현의 말처럼 작품을 찬찬히 감상할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그림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추리 장르 드라마 시리즈에 들어온 것처럼 전시실 곳곳을 관찰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내가 기억하는 현실의 미술관과 지금 현재 게임 미술관이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발짝, 발짝, 그렇게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의 끝에서 만나게 것은 만월이었다. 전시실 가장 안쪽에 있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다시피 커다란 보름달 그림을 올려다봤다. 호수 표면에 반사되는 요요한 달빛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우주 .

그러던 어깨에 사뿐하게 내려앉은 손길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휘둥그레 눈을 바쁘게 깜빡이자 시야에 천유현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어느새 천유현은 내게 성큼 가까이 다가와 바로 뒤에 붙어서 있었다.

“이러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겠는데요?

“아, 관장님!

“인기척도 눈치채지 못하고, 상당히 집중해서 감상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게요…. 지금 시간이 많이 흘렀나요?

그림 앞에서 너무 오래 정신줄을 놓고 있었나…. 머쓱한 기분에 귓가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 천유현이 그림 쪽으로 발짝, 발을 디뎠다. 이제 천유현과 나는 그림 앞에 나란히 있었다.

“지난번에도 우주 씨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었죠.

여전히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천유현이 정면의 그림을 응시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가 달그림자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마찬가지로 그림 쪽으로 시선을 향하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웃는 천유현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는 처음이에요.

“볼 때마다 감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그런 그림이죠?

“맞아요… 관장님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네요.

천유현을 바로 옆에 두고 그림에 너무 빠져서는 같다. 빠르게 상념을 지워 내고 천유현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렇게 관람을 마무리하고 만월 그림에서 돌아서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남아 뒤를 흘긋거렸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천유현이 , 웃었다.

“바쁘지 않다면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들고 가겠어요?

“앗, 여기 미술관에서요?

“네, 음료와 함께 간단한 브런치를 선보이는 카페가 있습니다. 우주 씨를 위해 저녁을 준비해 두었어요.

말을 마친 천유현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미술관의 카페로 안내했다.

 

#56

<Blue Moon Cafe>. 레트로한 디자인의 입간판에 시선을 던지며 카페 내부로 들어섰다.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 벽지와, 시리도록 테이블이 자아내는 색채 대비가 선명했다. 위로 흐르는 물결처럼 일렁일렁한 조명이 은은하게 드리웠다. 명확한 컨셉을 가지고 분위기를 섬세하게 연출한 공간이었다.

“이쪽으로 앉겠어요?

천유현과 내가 카페에 다다랐을 때에는 음식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매끈매끈한 표면의 흰색 테이블을 가득 채운 소담한 접시들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문어 세비체와 화이트 라구 파스타, 멜론 프로슈토까지,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은 아닌 적당히 가벼운 음식이었지만, 한데 어우러져 자아내는 알록달록한 색감에 식욕이 당겼다.

“우와, 관장님, 이거 문어 세비체 엄청 맛있어요!

“하하, 그래요?

“네! 뭔가 달콤짭짜름한 느낌이 입안에 도는 게….

“와인도 같이 마셔 봐요.

사실 와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천유현은 와인 역시도 음식과의 곁들이면 가장 좋을 만한 것으로 신경 준비했을 같았다. 천유현의 안목을 믿고 문어 세비체에 이어 레드 와인을 입가로 가져갔다. 달콤짭짜름함에 상큼함까지 더해지자 그야말로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흡족한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휴관일에도 미술관 카페는 운영을 하나 봐요?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감탄하다 문득 의문이 생겨나 천유현에게 물었다. 그렇다기에는… 지금 미술관 카페 안에 있는 사람은 천유현과 단둘뿐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면서 창밖에 어둠이 드리우는 탓에 음악도 흐르지 않는 실내가 유난히 적막했다.

“이곳까지 주었는데, 우주 씨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 따로 연락을 두었습니다.

“와, 그랬던 거군요….

역시, 카페도 오늘은 영업일이 아니었다. 휴관일에 미술관을 관람할 있게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 사람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니….

“우주 , 요새 게임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요?

이런 호사를 마구 누려도 되나 싶어 잠시 머뭇거리는데 천유현이 내게 넌지시 질문했다.

“아, 오늘은 딱히 그것 때문에 찾아온 아닌데….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제한 시간을 확인하고, 공략 대상들과 소통하는 순간 호감도 등락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시도 게임 진행에 신경을 수가 없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알아요. 그래도 내가 마음이 쓰여서 묻는 말이에요.

그나마 미술관에 와서는 게임 생각을 덜하고 있었지만 천유현의 말이 내가 처한 상황을 다시금 일깨웠다. 슬며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게임 다른 장소와 유리된 것처럼 몽환적인 미술관에 있어서일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금까지의 일을 되짚어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음…. 요새는 게임은 그럭저럭 하고 있는 같은데, 정작 저는 마음이 되게 이상해요.

“흠. 마음이 이상하다는 ,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일까요?

“그러니까, 말이 웃기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게임을 하다 보니, 공략캐들이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같거든요.

“…….”

“저는 그런 마음을 되돌려줄 수가 없는 처지인데, 게임 공략 때문에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자꾸만 노력해야 한다는 게…. 마음이 심란해져요.

이라윤 공략을 완료하면서 깨달은 하나의 사실은, 더는 게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게임 캐릭터’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게임에 빙의되었을 때는 공략 자체는 막막했지만 밖의 고민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공략캐를 명의 사람으로서 알아가게 다음부터는 역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공략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원하는 얻어 거죠. 그런데도 때문에 상처받은 얼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더라고요.

“……. “의도한 아니지만 제가 사람 마음을 이용한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게임 공략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이래저래 고민이에요.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생각에 잠긴 천유현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위압감이 짙어졌다. 천유현은 이런 속사정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을 수도 있는데, 너무 생각을 고스란히 얘기해 버린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진 말에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희미하게 웃는 천유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표정이 한층 온화해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천유현의 눈빛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각자의 한계를 넘어설 있으니까요.

“……. “결과적으로는 되었지만, 그분들도 분명히 우주 씨를 좋아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경계를 깨트리고, 자신의 세계를 넓혔을 겁니다.

“……. “먼 훗날에 우주 씨가 이곳을 떠나간다고 해서, 세계가 다시 수축하지는 않겠죠. 그렇게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미 틀어진 관계이고, 이제는 되돌리려는 노력조차 일방적인 욕심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이라윤이 나누었던 마음이 무의미하진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라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알게 것에 대해서 곱씹고 있었다.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겠죠. 아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니에요.

“…….”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훗날 되돌아보면 우주 씨와의 관계를 통해서 얻게 역시 분명 있을 겁니다.

요즘 매달리고 있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자 부드러운 안도감이 마음에 번졌다.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간절히 필요로 했던 말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려 하는지 알아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전지대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맞아요. 저도 라윤이를, 그러니까 게임의 공략캐를 만나면서 배우게 많은 같아요.

“…….”

“그래서 정말 고맙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들고요.

안으로 한없이 파고들던 뜨끔뜨끔한 생각을 꺼내 놓자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천유현이 싱긋 웃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시선과 함께였다.

“관장님….

그를 마주 보자니, 나에게 이런 말을 주는 천유현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인생 2회차처럼 인간관계와 사람 심리에 통달한 천유현은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필요로 하는 조언을 내어 준다. 그런 그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을지 천유현을 알고 싶어졌다.

공략 대상들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들이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단편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없는 것은 그들 뿐만 아니라 NPC 천유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탈의 경지에 이른 같은 천유현이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욕구와 심리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요, 관장님은 언제부터 관장님이셨어요?

“네? 불쑥 질문을 내뱉자 천유현의 얼굴에 다소 당황한 기색이 스쳐 갔다. , 내가 말을 너무 투박하게 뱉었나.

“그러니까, 말이 조금 이상하게 나왔는데…. 관장님은 모든 일에 능숙해 보이셔서, 저처럼 서투른 시절이 있었다는 상상이 전혀 돼서요.

“……. “관장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재단 경영에 관심이 많으셨던 거예요?

내가 천유현에게 받는 도움에 비해 그를 위해 내가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럴지라도 만날 때마다 얘기만 늘어놓는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싫었다. 천유현은 게임 클리어를 위해 호감도를 쌓아야 하는 공략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순전한 나의 의지로 천유현을 사람의 인간으로 알아가고 싶었다.

“아…. 관장님, 만약 대답이 곤란하신 거라면 따로 말씀 주셔도 돼요.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테이블 위로 흐르는 기류는 여전히 껄끄럽기만 했다. 혹시 천유현은 내게 본인의 정체를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닙니다. 다만 우주 씨가 나에 대한 질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서요.

거리끼는 기색을 금세 지워 천유현이 초연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순간적인 위화감만은 선명했다. 습관처럼 천유현 머리 위를 흘긋 바라보았지만 공략 대상이 아니기에 호감도는 없었다. 처음에는 분명 안도감을 느꼈는데, 그의 감정을 없는 것이 지금은 조금 답답했다.

“저 같은 경우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로와, 앞으로의 인생이 대략적으로는 정해져 있었다 봐야겠죠.

“그렇다면….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업을 물려받았거든요. 제가 외동이다 보니 애초에 다른 길은 생각해 적이 없었습니다.

MK예술재단은 천유현의 아버지 대부터 경영해 오던 가업이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기업 후계자였다는 천유현을 새삼 신기한 눈으로 훑어내렸다. 하긴 어디로 봐도 아등바등한 느낌 없이 여유와 느긋함이 넘쳐흐르는 , 천유현은 자수성가 타입은 아닐 같았다.

“우주 씨나, 우주 씨가 만나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다소 시시한 삶이지요?

“헉, 그럴 리가요…. 예술재단도 경영하시고, 미술관 전시도 기획하시고 저는 관장님이 너무 대단하신 같은데요.

“하하, 앞으로 우주 씨에게는 지금보다 근사한 모습만 보여야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충분히….

“그나저나 새롭게 만나게 캐릭터는 어때요? 시스템 창을 보니까 새로운 루트가 열린 같은데.

그의 배경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천유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다.

“아, 새로운 캐릭터 말이에요…!

관심사를 너무 정확하게 겨냥한 질문에 본능적으로 움찔 반응했다. 오늘은 분명 너무 얘기만 하는 대신 천유현한테 집중해 보려고 했는데….

“으음….

그래도 기왕 물어봐 주셨으니까 조금쯤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천유현만큼 말에 귀기울여 주고, 상황에 알맞은 조언을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57

“표정을 보니까 새롭게 만난 인물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인데요.

“네에….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해 봐요.

천유현이 차분하게 눈을 마주쳐 오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애써 꾹꾹 눌러 놓았던 갑갑함이 다시금 목끝까지 차올랐다. 실은 나에게는 천유현과의 상담이 정말 간절하긴 했다.

“그게, 그분 직업이 대기업 팀장님이신데요….

천유현을 흘긋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관장님이 괜찮다고도 하시니까…. 망설임 끝에 슬쩍 눈을 띄웠다.

“그것도, 팀장님이기만 아니라 대학교에 다니면서 스타트업을 창업했는데, 그게 어마어마하게 성공했대요. 지금 MK금융에서도 거의 임원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고요, 저랑은 나이 차이가 살이나 나세요.

“…….”

“게다가 그분이랑 만날 기회라도 만들려면 인턴 프로그램에 붙어야 텐데…. 갑자기 플레이 난이도가 올라간 같아요. ,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저는 미대생인데, 제가 금융에 대해서 아는 뭐가 있다고요.

막상 입을 열자 그동안 꾹꾹 눌러 두었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왔다. 차태주의 엄청난 스펙과 경쟁이 무척이나 치열할 인턴십 프로그램을 떠올리자 , 커다란 한숨이 터졌다. 하긴, 지금 눈앞에 닥친 과제부터가 어마어마한데 공략캐들한테 못할 하는 아닌가 고민할 때가 아니지….

“흠, 그렇군요.

얘기에 집중하는 천유현의 인상이 조금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내 그가 나를 향해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

“나에게 채용 공고를 보여 있겠어요?

“엇, MK금융 인턴 채용 공고를요?

“꽤나 규모가 있는 재단을 책임지고 경영하다 보니, 사람 뽑는 일은 자주 하는 편입니다. 우주 씨에게 도움이 부분이 있을 같군요.

“…….”

“물론 금융업에 종사하는 아니지만, 내가 직접 면접관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우와… 이게 이렇게 엮이는 건가? 당연히 면접 준비는 혼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경험과 연륜을 갖춘 천유현이야말로 게임 치트키 자체였다.

“앗, .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하긴 이렇게 말도 되는(?) 과제를 거면 정도 조력자는 나에게 붙여 줘야겠지. 알고 보니 시스템도 계획이 있었구나, 납득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게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려 했지만, 천유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인 것이 먼저였다.

“흐음….

얼떨결에 천유현과 나란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깨가 닿을 것처럼 가까워지고, 셔츠 너머로 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천유현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자 반듯한 이마와 날카로운 콧대가 도드라졌다. 바로 옆에서 숨죽인 채로 화면 위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네요. 일단은 경제학과와 컴퓨터공학과 우대인 데다가, 정규직 전환 가능성도 열려는 있으니 고학년을 선호할 확률이 높고요.

“하, 관장님! 말이 바로 말이에요, 이거 역시 너무하죠?

“하지만 금융 전문가들은 이미 회사에 차고 넘칠 테니, 모르긴 몰라도 관련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끝나고 출시를 앞두고 있는 상태라면, 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각일 겁니다. 점에 있어서는 우주 씨가 충분히 가치를 증명할 있지 않을까요?

“헉, 정말 그럴 있을까요?

분명히 같은 정보를 두고도 천유현은 그를 꿰뚫어 보는 시야 자체가 나보다 훨씬 넓었다. 전문 지식이 합격을 판가름하는 요소라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인턴십에 붙을 없다. 하지만 애초에 6주짜리 대학생 인턴에게 그런 기대하지는 않았을 테고, 이용자 피드백에 대해서라면 분명 나도 기여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모든 면접이라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주 씨가 팀에 녹아들 있다는 보여 주는 중요하겠죠.

나를 안심시키듯 천유현이 유려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보였다. 그래도 처음 공고를 보고 막막하기만 했던 때보다야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였다. 천유현의 논리가 파고들 구석 없이 탄탄하기도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지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자신이었다.

덕분에 용기가 꾸물꾸물 솟아났다. 그렇지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건 너무 주관적인 아닌가? 기준이 모호했다.

“그러면 관장님은 면접하실 어떤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하자 천유현이 나를 유심히 훑어내렸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린 그는 조금은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우주 , 말이 나온 김에 나랑 같이 트레이닝을 보면 어때요?

“헉, 저랑 관장님이랑 같이요?

“준비 없이 들어가면 현장에서 떨려서 실력 발휘를 수도 있으니까요. 면접 예행 연습 .

***

분명히 처음에 미술관에 왔을 때만 해도 휴관일에 넉넉하게 작품을 관람할 생각이었는데, 얼떨결에 천유현을 따라 꼭대기 층의 대회의실로 올라온 나는 이제 면접 예행 연습을 앞두고 있었다.

천유현과의 친분 아닌 친분 덕분에 관람객에게 개방된 전시실 외에도 미술관 곳곳에 있는 숨어 있는 공간을 알게 되었다. 고풍스러운 예술품으로 가득한 지하 집무실이 아늑하면서도 몽환적인 공간이었다면, 불필요한 장식이 엄격하게 배제된 회의실은 철저하게 사무적이고 냉담한 분위기를 풍겼다.

에어컨이 틀어진 회의실 안으로 써늘한 공기가 뭉텅하게 흘렀다. 희고 푸르스름한 조명이 커다란 회의실을 장악하듯이 넓게 펼쳐진 진회색 L자형 테이블 위로 내리쬐었다. 테이블 건너편의 천유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원자 연우주 .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기를 묵직하게 가로질렀다. 그것만으로도 등을 바짝 곧추세우게 됐다. 인쇄한 채용 공고와 필기 지원서 양식을 면밀하게 훑어내린 천유현이 맞은편의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짤막한 지시에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비즈니스 모드를 장착한 천유현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평소의 나긋하면서도 초연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오만하면서도 격식 있는 태도로 나를 내려다봤다. 위계질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조직 수장의 모습이었다.

“하아….

아직 예행 연습일 뿐이니 벌써부터 주눅 들어서는 되는데….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만 꼼질거리자, 아무런 말이 없냐는 천유현이 짙은 눈썹을 치켜떴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연우주입니다. 한국대학교 서양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

“어… 그러니까, 비대면 금융 애플리케이션에 관심이 있어서 이번 MK금융 대학생 하계 인턴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나 고개를 느슨하게 젖힌 천유현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음 질문이 쏘아붙이듯이 곧바로 이어졌다.

“미술 전공인데 금융 기업 인턴에 지원했군요. 전공도 다르고 관련 경험도 전혀 없는데 곧바로 업무 투입이 가능하겠습니까?

“…….”

“…….”

“그… 제가 남들보다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생 때부터 진로를 미술로 생각해 와서, 금융이나 컴퓨터공학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그만.

미간을 살짝 찌푸린 천유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나를 내려다보자 묵직한 위압감에 기가 질렸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천유현은 테이블을 바퀴 돌아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약점을 노출하지는 말아야죠.

“아….

발걸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뜨끔거렸다. 차마 그를 쳐다보겠어서, 무릎에 양손을 가지런히 얹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은 손길에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간관계에서는 솔직함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면접 장소에서는 아니에요. 내가 가진 불리한 패를 먼저 보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잔뜩 긴장했던 것과 달리 천유현은 나에게 짜증이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눈썹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린 얼굴은 오히려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제야 그가 지금 나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시 생각해 보고, 우주 생각대로 답변해 봐요.

“…….”

“이번에는 말끝을 흐리지 말고, 침착하게 끝까지 .

테이블 건너편으로 돌아가는 대신 천유현은 자리에서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괜찮다는 , 끝을 느릿하게 까딱였다. 목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58

“현재 MK금융에서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거의 마치고, 출시 단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비전공자인 제가 기존과 다른 새로운 관점, 신선한 시각을 더할 있습니다. 또한 오히려 일반적으로 애플리케이션 이용하는 이용층을 대변할 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방금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천유현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 그를 나름대로 방식대로 풀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말에 집중하는 천유현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그런데.

눈을 가늘게 천유현이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훑어 내리더니,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좋은 느낌’이 결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기에 이미지가 중요하지만, 생각보다는 쉽고 간단하게 상대에게 주는 인상에 변화를 있죠.

가까이 다가온 천유현이 양손으로 어깨를 쥐었다. 내가 앉은 의자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인 채였다. 천유현은 그대로 각도를 조금씩 조절하며 자세를 교정했다. 천유현의 손길에 따라 어깨를 펴고, 등을 곧게 세우고, 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불안해하지 말고, 표정 관리 잘하면서. , 그렇게.

“…….”

“내 똑바로 보세요, 우주 .

아프지 않게 끝을 살짝 거머쥔 천유현이 지그시 눈을 마주쳐 왔다. 가깝게 맞닿은 시선을 타고 감정이 전해졌다. 절대 당신을 해치거나, 선을 넘지 않겠다는 단단한 눈빛. 차분하면서도 침착한 눈동자가 나에게 확신을 불어넣었다.

“여기서 입꼬리는 살짝만 끌어올리고요.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답변하는 겁니다”

“네, 네넷!

천유현의 면접 가이드 라인은 명확하면서도 친절했다. 다만 좋은데,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손바닥에 저절로 땀이 고였다. 또렷한 시선이 그대로 나를 꿰뚫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아 심장이 빠듯하게 뛰었다.

처음에 스스로 생각하는 약점이나, 삶에서 겪었던 가장 어려웠던 일에 대해서 물을 때에는 간신히 태연한 척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거나, 회사의 방침이 본인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는 당황해 어버버거렸다. 금융이나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이 없었는데도 천유현과의 면접 연습은 충분히 긴장되었다.

“관장님, 아까 먹은 저녁이 벌써 소화가 되어 버린 같아요.

“하하. 우주 답변은 대체로 잘했는데,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에요.

체감상으로는 십오 남짓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자 어느새 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꼴깍꼴깍,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를 들이켜고 입가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차가운 물줄기가 뱃속에서 크게 회오리쳤지만 간질거리는 긴장감만은 여전했다.

“팔다리에 힘이 풀려서 완전 흐물흐물해요. 그래도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느낌?!

물을 완전히 삼켜 내며 고개를 퍼덕퍼덕 젓자 천유현이 가벼이 웃었다. 테이블에 몸을 느슨하게 기댄 천유현은 어느새 평소처럼 온화한 얼굴이었다. 불과 전까지 나를 빈틈없이 날카롭게 몰아붙이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압박 면접은 지원자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답변의 내용보다는 답하는 태도겠죠.

“아, 네에….

“그러니 무슨 질문을 받든 질문 자체보다 너머에 있는 상대방의 의도에 집중해 봐요. 그러면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리는 대신, 차분한 태도로 훨씬 수월하게 응할 있을 겁니다.

실제로 천유현이 오늘 나에게 조언 대부분도 말의 내용보다는, 말을 하는 방식과 나의 태도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긴, 역시도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천유현을 보면서 부드러운 호감을 느꼈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금융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천유현이 말한 것처럼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면접 예행 연습을 마무리하고 미술관 밖으로 나가자 날이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후덥지근하게 가라앉은 여름밤의 공기를 타고 선선한 바람이 흘렀다. 뭉글뭉글 덩어리진 진회색 구름 틈새로 가녀린 초승달이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면접 연습까지, 우주 오늘 하루 수고 많았습니다.

소등을 마치고 완벽하게 어두워진 미술관을 등진 채로 천유현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빛이 꺼지자 미술관 주변을 둘러싼 공간이 움푹 가라앉는 같았다. 불과 전까지 안에 천유현과 단둘이서만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관장님은 오늘 쉬는 날이신데,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었나요?

“여러 얘기 했지만. 우주 씨를 돕는 제게도 기쁜 일입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에 천유현이 기다렸다는 대꾸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기댈 없는 상황에 뜻하지 않았던 배려가 고마워 천유현의 말이 감동적이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태연한 대답에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NPC여서일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천유현이 나에게 돌려주는 말은 설정값으로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만날 때마다 천유현에게 얘기를 속속들이 털어놓았다. 반면 내가 천유현에 대해서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요, 관장님….

“…….”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예요?

,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은 답답함. 달빛이 부드럽게 일렁이는 섬세한 얼굴을 바라보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어 나온 것은 끝이 조금은 날카롭게 뻗친 질문이었다.

“우주 .

차분하게 나를 직시하던 천유현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항상 매끄럽고 빈틈없게만 느껴지던 천유현의 표면에 작은 균열이 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천유현 역시 내가 단순한 인사치레 이상의 설명을 원한다는 알아차린 듯했다.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천유현의 가라앉은 표정을 응시했다. 그러나 금세 동요를 지워 천유현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직업상 수많은 예술 지망생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대개는 간절히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깊이 이야기해 보면 그에 따른 노력이나 희생,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

“간절함이라는 생각보다 희소한 자질이라는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주 씨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닐까요?

수려한 얼굴에는 감정이 말끔하게 거두어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더없이 진중했다. 그대로 천유현과 시선이 맞닿자 심장이 움찔 떨렸다.

“아….

완벽하게 논리적인 대답이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기분이었다. 천유현은 대체로 진심을 다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뿌연 안개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대로 없었다.

“그치만, 저처럼 하루아침에 게임 속에 떨어졌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있는 우주 씨만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면접에서도 그런 진정성이 전해질 있도록, 신경 써서 준비해 보세요.

그렇지만, 아무리 쪽에서 절박하다 한들 그런 마음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그러니 천유현이 지금 내게 베푸는 호의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고, 감사히 여겨야 했다.

이상으로, 천유현을 개인적으로 알아가고 싶다는 역시 철없는 생각이겠지. 게다가 게임 공략 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럴 처지가 아니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앞으로도 열심히 볼게요!

“네, 부디 만월의 가호가 당신에게 머무르기를요.

재빠르게 마음을 다잡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달빛 아래에서 천유현이 내게 행운을 빌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하면서도 관조적인 표정으로.

“…….”

이윽고 천유현이 올라탄 리무진이 어둠 속으로 먼저 사라져 갔다. 어디로 봐도 묘한 남자란 말이야…. 도로를 가로지르며 점점이 줄어드는 실루엣을 자리에서 가만 지켜보다, 역시 꺼진 미술관에서 돌아섰다.

***

[MK금융] 귀하께서는 하계 인턴 서류전형에 합격하였습니다. 아래 면접 일정 안내드리니 준비에 차질 없으시기 바랍니다.

면접 일시: 06/03() 14:00 MK금융 여의도본사 27

* 면접은 순번에 따라 일대다 형태로 진행되오니, 원활한 진행을 위해 면접 시간 15 이전까지 도착 부탁드립니다.

 

“헉, 서류 붙었나 !

목요일 오후, 불시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고라도 싶은 기분이었다.

              

#59

천유현과 예행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처음 생각은 모든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자극도 받고, 마냥 놓고 있으면서 ‘온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모이길 기대해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없겠구나 싶었다. 진지하게 강점을 살리기 위해 고심하고, 꼬박 밤을 새워 작성한 지원서를 제출했다.

처음에는 인턴십에 떨어지면 절대 된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음에는 오히려 초연해졌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이상으로 준비할 수는 없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기대를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면접 안내 문자를 보자 얼떨떨하기도 하면서 정말 기뻤다!

“그보다, 금요일이라면 당장 내일이 면접이라는 얘기잖아?

애초에 서류 접수를 3일만 받기는 했지만, 학교 익명 커뮤니티만 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을 텐데…. 생각보다 빨리 문자가 도착해서 내심 놀랐다. 진짜 일처리 하나는 끝장나게 빠르구나. 입사한 뒤에도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업무가 흘러가면 어떡하지, 스멀스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거야 붙고 나서 걱정할 일이었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면접을 적이 없는데, 대체 입고 가야 하지. 내내 고민하다, 면접 아침에 학교 근처에 있는 면접 의상 대여점을 찾았다. 추천받은 슈트를 착용한 넥타이를 어설프게 매만지자 그렇게 매는 아니라며 사장님이 대신 매듭을 지어 주었다. 거울 , 새까만 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못내 어색하고 꺼벙하게 느껴져서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여의도에 있는 MK금융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27층으로 올라가 면접 등록을 마쳤다. 안내에서는 15 이전까지 오라고 했지만, 일부러 넉넉하게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사인을 마친 명단을 보니 앞서 들어간 다른 후보자들은 이미 면접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4 연우주’라고 적혀 있는 네임 택을 덜렁덜렁 목에 걸고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 짧게 숨을 삼키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두어 남짓한 지원자들이 면접을 기다리는 중인 대기실의 공기가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나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은 빡센 슈트 착장이 아니었다. 물론 적당히 격식 있는 옷차림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너무 떨어지는 옷차림의 내가 가장 튀었다.

금융 기업이어서 보수적일 알았는데 나만 세련되지 못해 보이는 아닌가…. 쭈뼛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뜻밖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뭐냐, 연우주? …네가 여기 있어?

지난번 &lt;성과 사회&gt; 교양 수업에서 알게 조현수였다. 목에 걸고 있는 3 조현수’라는 네임택을 흘긋 쳐다보았다. 선배도 오늘 면접을 보는 건가? 조별 과제가 끝난 뒤로는 따로 얘기를 적이 없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줄은 몰랐다.

“저 오늘 인턴 면접 보러 왔어요! 선배님도 포지션 지원하신 줄은 몰랐는데….

“너 2학년 아니었냐? 그리고 미대 다니잖아?

“하하, 어쩌다 보니 관심이 생겨서 지원했는데 좋게 붙었네요.

조현수가 수상쩍다는 눈으로 슈트를 입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네가 어떻게 여길 왔냐는 기색이라 조금 주눅이 들었다. 물론 생각에도 서류라도 통과한 기적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런데 현수 선배님은 사회학 대학원 가는 아니었어요?

“뭐라고? 그런 대학생 때나 심취해 있는 거지.

“그치만….

“연우주 이거 진짜 순진하네. 진로 선택은 원래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조현수 역시 조현수 역시 외골수처럼 사회학 계보를 줄줄 읊던 떠올라 받아쳐 봤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이 의외로 너무 논리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역시 거들먹거리는 조현수의 태도는 재수가 없어서, 볼만 불퉁하게 부풀렸다.

“그리고 나는 4 내내 과탑이었거든. 과외 활동으로는 전국 사회학과 대학생 협회장도 했고. 그동안 스펙 만드느라 개고생 것도 취업 잘하려고 그런 아니겠어?

“아… 정말요?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 앞에 들어간 애들은 고스펙이야. 개발 천재에 해외파에 난리 났더라.

선배가 4 내내 과탑이었다고? 묘한 배신감마저 느껴지려는데, 너스레를 떨며 다른 지원자들의 스펙을 줄줄 읊어 대면서도 조현수는 은근히 뻐기는 투였다. 그러다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 대체 어떻게 서류 전형을 통과했냐는 시선이었다.

“하아….

그러게요, 실은 저도 바로 그게 궁금하지 말입니다…. 괜히 소심해지는 기분에 비닐로 네임택 귀퉁이만 만지작거렸다. 경쟁이 치열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최종 합격하는 가능이나 할까?

나머지 후보들은 다들 프린트물에 고개를 들이박다시피 하며 입으로는 중얼중얼 면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동안 스크랩해 놓았던 MK금융과 차태주의 기사를 다시 읽어 보려고 했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3 조현수 후보자, 회의실로 들어오세요.

인쇄물의 텍스트와 배경이 따로 노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몰려드는 피로감에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는데 직원 하나가 조현수를 불렀다.

“선배님, 오늘 면접 파이팅입니다!

“내 걱정 것까지야.

그래도 예의상 같이 잘해 보자는 인사를 건넸건만, 어깨를 크게 으쓱하는 조현수는 여전히 나를 우습게 보는 표정이었다. 조현수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면접실에 들어갔다.

“잘난 한번 되게 하네….

어느덧 대기실에는 마지막 후보인 혼자만 남아 있었다. 툴툴거리면서도 조현수가 어떻게 면접을 볼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내용을 엿듣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면접실 문틈으로는 웅웅대는 소리만이 새어 나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수가 없었다. 다만 나지막한 음성이 울리는 사이사이에 웃음기 하나 없는 , 모르긴 몰라도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

남짓이 흐르고 조현수가 면접실에서 빠져나왔다. 완전히 죽상을 조현수가 크게 한숨을 몰아쉬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같은 얼굴이, 면접실에 들어가기 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찾아볼 수도조차 없었다.

헉… 선배도 면접을 많이 망쳤나? 대체 얼마나 어렵기에?

4 연우주 후보자, 회의실로 들어오세요.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것처럼 기가 죽은 조현수를 보며 불안해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직원이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깜짝 놀라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네, ! 알겠습니다!

아니야, 아직 시작도 했는데 벌써 주눅 들어서는 . 이럴수록 굴해서는 된다고 다짐하며, 뻣뻣해진 몸의 긴장을 풀었다. 최대한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직원의 안내를 따랐다.

천장이 유난히 높은 대회의실에 환한 조명이 내리쬐었다. 팀장인 차태주가 일자형 테이블 정중앙에 자리했고, 같은 실무진으로 보이는 여자 직원과 남자 직원이 명씩 양옆에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테이블 전면 유리로는 푸릇푸릇한 공원과 고층 빌딩의 전경이 까마득하게 펼쳐졌다.

“연우주 , 맞으시죠?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조심스럽게 정면을 응시하자 그대로 차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음성으로 차태주가 질문했다.

“네, 안녕하세요 팀장님!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시간 내어 면접 자리를 찾아 주어서 고맙습니다."

지원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차태주가 고개를 느슨하게 들어 올렸다. 얼굴에 남자다운 눈매가 예리하면서도 명료한 분위기를 풍겼다. 원서 내용과 나를 매치시키려는지, 진지한 얼굴을 차태주가 면밀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내렸다.

바로 순간, 눈앞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PICK ME UP!"

 

치열한 경쟁을 뚫고 면접에 합격해 공략캐릭터 [차태주] 함께 일하는 인턴십 포지션을 획득해 보세요!

 

(성공 보상: 공략캐릭터 [차태주]와의 접점 확대 호감도 10% 상승)

 

, 이게 아직 나오나 했다. 공략을 위해서 당연히 인턴에 붙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시스템 창까지 확인하자 내가 처한 상황이 실감이 났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의 차태주에게 호감도를 10% 얻어 있는 퀘스트라니,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

              

#60

“연우주 씨와는 지난번 동문 강연 적이 있죠. 그때 말했던 것처럼 인턴십 포지션에 지원해 주었네요.

차태주가 유려한 말투로 면접의 시작을 알렸다. , 그때 일을 기억해 주고 계셨구나. 나에게야 새로운 공략 대상과의 만남이니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차태주는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날 텐데, 의외이기도 하고 감동이기도 했다.

“…….”

밝은 조명 아래로 도드라지는 서늘하고 정갈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담백한 태도의 차태주는 유능한 것은 물론이고 매사가 가뿐할 것처럼 보였다. 빠릿빠릿하게 말을 이어 나가도 모자랄 판에 분위기에 압도당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린 차태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니요, 그게… 팀장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셨을 줄은 몰랐어서요.

“흠.

“그리고… 제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도 신기해요. 실은 원서 넣으면서도, 면접에 붙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우주 씨도 그걸 알긴 아나 봅니다.

더듬더듬 설명을 늘어놓자 , 엷게 웃은 차태주가 나른한 얼굴로 가늠하듯 나를 훑어 내렸다. 평온한 말투였지만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칼같이 냉정했다. 긴장되는 마음에 고개를 슬쩍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주 씨의 지원서를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가지 생겼거든요.

“아, 정말로요?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불렀습니다.

“네, 저에게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차태주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몸을 느슨하게 뒤로 젖힌 차태주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면접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동의를 구할 사항이 있는데요. 연우주 답변은 내부 참고용으로 타이핑을 예정인데, 괜찮겠습니까?

, 대체 얼마나 꼼꼼하게 보려고 타이핑까지? 내심 뜨끔했는데, 질문을 던진 차태주를 포함해 옆자리에 있는 팀원들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나만 빼고 다들 익숙한 면접 방식인 건가….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자기소개 먼저 간단히 주시죠.

따각따각, 팀원들이 타이핑을 시작하고 규칙적인 키보드 소리가 적막한 회의실을 타고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때문에 긴장했는지, 차태주와 시선이 맞닿자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히 어젯밤에 1 자기소개를 달달 외웠는데….

“안녕하세요. 한국대학교 서양화과 2학년 연우주입니다. 어… 저는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진심으로 다가간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MK금융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누구보다 빨리, 눈치 있게 알아차릴 자신이 있습니다.

“…….”

“그리고 또… 실은 제가 긴장해서, 준비했던 말들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면접에서도 최대한 진솔한 모습을 많이 보여 드릴 있도록 하겠습니다!

엄청나게 떨렸지만 너무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오히려 얼어 버린 뇌와 무관하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자기소개를 끝맺은 다음에는 천유현의 조언을 되새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면접관인 차태주를 향해 밝게 웃었다.

“흠….

무표정한 얼굴을 차태주의 눈동자에 엷은 흥미가 돌았다. 차태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며 원서를 확인했다. 날카로운 끝이 도드라지고, 단정한 입술이 슬그머니 비틀렸다.

“…….”

“…….”

차태주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올랐다. 천유현의 빡센 트레이닝을 겪은 터라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확실히 실전은 느낌이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눈치 있게 맞춘다고 했죠. 연우주 씨는 사회성을 본인의 핵심 역량으로 생각하는 같은데, 맞습니까?

“아, , 그렇습니다! 저는 호불호가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평소에도 누구와든 두루두루 어울리는 편입니다.

“본인 얘기만 들어서는 그걸 없죠. 단순히 감인지, 아니면 구체적인 스킬이나 역량이 있는지가 궁금한데요. 협업을 연우주 씨에 대한 동료나 친구들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에 뒷목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하긴, 세상에는 자기가 엄청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도 많으니까 말이다. 큼큼, 목을 짧게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는… 대체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화주의자라는 말을 많이 듣는 같습니다.

“평화주의자, 라고요?

말꼬리를 득달같이 잡아챈 차태주가 얼굴을 구겼다.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음… 사실 어떤 식으로든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서 협업을 하면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는 같습니다. 각자 자기 얘기만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은 아무런 일도 수가 없기 때문에, 저는 중간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만족할 있는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반응에 심장이 뜨끔했지만 마음속 동요를 겉으로는 내지 않으려 애썼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진정성 있게! 속으로 수십 되뇌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방금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차태주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다만 우리 팀에서는 무색무취한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고, 이상으로 대부분의 경우 옳은 사람을 원하죠.

“아, 네….

“연우주 씨는 갈등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어 보이는데, 심도 있게 회의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의견을 제대로 개진할 있을지 의심됩니다. 우리 팀과는 맞지 않을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이 다르고 다르다고, 평화주의자라는 나의 표현을 차태주가 갈등 회피라며 아프게 꼬집었다. 평소 좋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갈등을 불편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와는 별개로, 화합을 추구하는 나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그, 그렇지만… 아무리 옳은 의견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가치를 잃게 되니까요.

“…….”

“학교에서건, 회사에서건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작정 힘으로 찍어 누르는 데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조금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설득하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인턴 면접이었지만, 이상으로 가치관을 증명해야 같은 기분에 최선을 다해 항변했다. 하지만 차태주에게는 딱히 먹히는 같지 않았다. 정작 눈앞의 차태주도 설득하지 못하다니, 상대의 마음을 여는 중요하다는 나의 논리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신이시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바닥 밑으로 꺼지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면접은 이제 시작이었다.

계속해서 밀도 있는 질문이 이어졌다. 차태주는 복잡한 전문 지식보다는, 원서에 작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평소 가치관이나 돌발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대해서 주로 물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차태주는 그다지 흡족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방금 전처럼 조금만 헛소리를 하는 같으면 바로 심드렁한 얼굴을 하거나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묘하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끝을 받아치기도 했다.

“하아….

면접장에 꼼짝없이 붙들린 칼날 같은 차태주의 질문에 살뜰하게 도려지는 기분이었다. ,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면접도 이럴진대, 실제로 같이 일하면 대체 얼마나 많이 힘들까.

여에 걸친 면접이 끝났을 즈음, 모르긴 몰라도 나는 엄청나게 해쓱한 얼굴일 같았다. 반면 정작 오후 내내 앞선 면접자들을 상대한 차태주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우주 씨는 평소 압박을 받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스트레스 관리 방안을 설명해 주세요.

“아, !

목덜미를 느슨하게 젖힌 차태주가 무덤덤한 얼굴로 마무리 질문을 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은 나도 자신 있다고 해야 할까?

어린 나이에 이런저런 일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한때는 불운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좌절하고 싶은 순간에도 다시금 앞을 향해 나아가려면 스스로를 추슬러야 했다. 그런 경험이 많이 쌓인 만큼, 슬픔을 탈탈 털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는 있어서는 나만의 노하우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멘탈적인 부분에서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압도당하지 않는다는 , 정확히 무슨 얘기죠?

“항상, 과연 내가 있을지 능력에 대해서 불안해하거나, 결과를 걱정하는 대신 지금 당장 있는 일에 더욱 집중하려고 합니다.

“…….”

“또, 어떻게 하면 그걸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차근차근 나갈 있을지에 대해서도요. 그렇게 저부터가 자신을 믿기 위해서 노력하는 같습니다.

더할 것도 것도 없이, 차태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평소에 생각하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차태주 역시 나의 대답을 들으며 처음으로 흡족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안색과 표정을 꼼꼼히 훑어내리는 시선이 조금 오래 나에게 머물렀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면접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

“고생 많으셨고, 합격 여부는 다음 중으로 연락드리죠.

메모가 휘갈겨진 이력서를 파일에 단정하게 갈무리한 차태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흘긋 시선을 던지며 가벼이 웃는 얼굴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손끝 발끝을 저릿하게 달구던 긴장이 풀리면서 전신에 탈력감이 감돌았다.

“네, 감사합니다!

 

<SYSTEM> [돌발 퀘스트] PICK ME UP!

퀘스트 최종 성공 여부를 확인할 있도록 면접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감사 인사를 전하는 순간 시야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차라리 오늘 하루에 퀘스트가 전부 마무리되면 좋을 텐데, 야속하게도 면접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였다.

하지만 그다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인데, 지금 이상으로 기다리는 과연 의미나 있을까?

회의실에서 나선 다음, 같은 화장실에 들러 가볍게 세수를 했다. 찬물을 연거푸 끼얹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대면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아니야, 괜찮아, 있어.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 맥주부터 까고, 인턴십에 떨어지더라도 차태주 루트를 진행할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그렇게 다시 낯선 복도를 걷는 동안 빌려 입은 슈트가 kg 무게가 나가는 갑옷처럼 묵직하게 온몸을 내리눌렀다.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린 , 주섬주섬 백팩을 고쳐 메고 엘리베이터를 향하려던 때였다.

“연우주 .

“앗, 네넵!

예리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이름을 부른 것은 차태주였다. 왼손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는 차태주는 면접실을 정리하고 나서는 길인 같았다.

“잠시만 보고 갈래요.

끝을 까닥인 차태주가 태연한 얼굴로 지시했다. 그렇지만, 면접은 이미 끝났는데? 영문을 모르겠는 기분에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저… 저를요?

그제야 [1] 차태주의 머리 위에 있는 작고 귀여운 호감도가 눈에 들어왔다. 맞아, 이분 공략 캐릭터셨지. 실은 처음 면접실에 들어설 때부터 내내 그곳에 있었겠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그동안은 호감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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