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41-50

#41

옆을 돌아보자 강태양이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이글이글 끓는 듯한 눈동자에서 소유욕이 느껴지는 착각이겠지?! 주춤주춤 물러서려 했지만, 자그마한 간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어서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도 없었다.

“핫하…. , 나는 다음번에 할게!

한편 이라윤은 아무런 없이 의미심장한 기류가 흐르는 강태양과 사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처음에는 놀람과 당혹이 머무르던 말끔한 얼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과 옅은 배신감으로 물들어 갔다.

빠른 속도로 색을 달리하는 이라윤의 표정을 보며 절로 발을 동동 구르게 됐다. 라윤아,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든 그게 오해라는 하나만큼은 확실해!

“라, 라윤아! 너도 페이스페인팅 받고 갈래? 혹시 원하는 그림 있어? 내가 그려 줄게!

이라윤을 다급히 붙들어 보려 했지만, 말을 더듬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러면 되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도, 공략캐 누구 사람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마음만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라윤이 대답을 내뱉기도 강태양이 먼저 득달같이 움직였다. 강태양은 보란 듯이 쪽으로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여 왔다. 그러더니, 느끼한 눈빛을 마구 대면서 검지 끝으로 오른쪽 볼을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연우주. 다음번에 우리 집은 언제 거야?

“헉, 으응?

“저번에 왔을 때는 단둘이었는데도 정신없어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치?

누가 들으면 이상한 생각 하기 좋은 얘기잖아! 그러니까, 하나하나 따지면 없는 말이 아니긴 한데…. 실실 불길하게 웃으며 나에게 치대는 것이, 일부러 저러는 분명했다. 지금 상황이 운동선수인 강태양의 승부욕을 묘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

“아, 하하, 그치. 우리 친구니까! 다음번에 놀러 가면 좋지~

그럴수록 가운데 나만 난처해질 따름이었다. 스멀스멀 뻗어 오는 강태양의 손가락을 어떻게든 떼어 내고 이라윤 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는 나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라윤의 뽀얀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산뜻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던 것과 달리 뒤에서는 검은 오라가 뿜뿜 솟아나는 것처럼….

“…….”

이라윤이 희게 질린 아랫입술을 새침하게 깨물었다. 곧바로 제대로 인사도 없이 내게서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지는 냉랭한 뒷모습에, 자그마한 머리통 위의 [️42] 호감도 수치가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라, 라윤아!

발짝 늦게 손을 건네 보았지만 이라윤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이라윤이 조금의 미련도 없이 떠나간 자리, 부스에는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불과 전까지 능글거리며 내게 들이댔던 강태양이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저 새끼 대체 누구냐?

“새, 새끼라니, 말을 그렇게….

“누구냐고.

“경영학과 1학년 후배야. 나랑 같이 조별 과제 수업 들어.

얼굴을 굳힌 강태양이 도려내듯 날카롭게 질문했다. 물론 강태양 잘못은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분명 강태양이 지금 상황을 부추긴 면도 있잖아! 나름대로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자 강태양은 짙은 눈썹을 매섭게 치켜떴다.

“근데 그렇게 서로 의식하는데?

서슬 퍼런 기세에 깜짝 놀라 불퉁하게 부풀었던 볼을 다시금 얌전히 안으로 말아 넣었다. 이라윤에 대한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강태양은 강태양 나름대로 단단히 화가 있었다.

“쟤가 좋아하는 아냐?

“하, 그런 진짜 아니야… 태양이 .

진심을 담아서 호소했다. 물론 내가 빙의한 게임의 장르가 연애 시뮬레이션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질척이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담백한 우정으로만 공략을 진행하고 싶었다.

“하아….

맹렬하게 번뜩이던 강태양의 새까만 눈동자에 빛이 움푹 꺼졌다. 착잡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돌연 한숨을 길게 , 내쉬었다. 성질을 이기고, 오늘 역시 공들여 뾰족뾰족하게 세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너 지금 자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행동, 애먼 사람 헷갈리게 하기 좋아.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관조적이면서도 뜨거운 강태양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에 뜨끔뜨끔한 감각이 솟아났다.

“노선 똑바로 정해. 가끔씩 네가 대체 나랑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니까.

지친 듯한 얼굴로 뒤로 물러난 강태양은 더는 나를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기분이 상한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다,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강태양을 일부러 가지고 놀기라도 것처럼 들릴까 망설여졌다.

“태양이 형….

그러는 사이 강태양 역시 자리에서 훌쩍 일어서 버렸다. 살짝 씨근거리는 숨결이 공기 중에 묽게 번지더니, 방금 이라윤처럼 강태양 역시 나를 혼자 두고 돌아서 버렸다.

허둥지둥 일어선 나는 어설프게 강태양을 쫓아가려다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25] 불안한 와중에도 눈은 바쁘게 강태양의 머리 위에서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하트를 좇고 있었다.

“아….

와중에도 혹시 강태양의 호감도가 떨어지지는 않았나 본능적으로 확인하고, 그대로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는 스스로에 대한 옅은 자괴감이 들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가끔은 누구 하나 나쁜 의도를 가진 아니더라도 불편한 상황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금 역시, 일부러 그런 아니었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모두를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원래도 평화주의자인데, 공략 캐릭터들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나자 가슴이 갑갑하게 차올랐다.

그치만, 아무도 나한테 사람이 한꺼번에 등장할 거라고 알려 주지 않았잖아! 미리 예상했다면 대처할 있었을 텐데…. 그러나 다른 누군가를 탓할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쌓이고 쌓여 지금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차라리 공략 캐릭터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아무도 듣는 없는 허공에다 대고 괜히 읊조려 보았다. 하지만 시야에는 어떤 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얄미운 시스템, 이럴 때에는 모른 척이지!

“연우주, 거기서 ! 손님 오시잖아!

“으, ! 알았어, 지금 ~

도움의 손길은커녕, 다른 쪽으로 치이기 전에 다시금 행사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털레털레 간이 테이블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 수련이라도 해야 모양이었다.

***

토요일 아침, 일어나 보니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게임이기에 잠을 너무 많이 자면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해서는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개씩 맞춰 놓은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빠진 잠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다음에도 전체가 엄청나게 찌뿌드드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이고, 삭신이야….

중년 아재나 법한 탄식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삐걱삐걱 뻐근한 몸을 일으켜 간신히 거울 앞에 섰다. 봐도 봐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 시스템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27 (남은 시간: 77 21시간 22)

 

심장이 절로 쪼그라들어 다급하게 핸드폰의 게임 앱을 실행시켰다. 이라윤 [️42], 강태양 [️25].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 어제 이후로 호감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거 호감도 수치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맞긴 한가?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지만 여전히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만 가는데 공략캐들이랑은 까딱 잘못하면 요단강을 건너게 생겼으니…. 게다가 아직 나머지 캐릭터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 게임 제대로 클리어 수는 있는 걸까?

“하아….

만월 미술관의 달빛이 주는 평온함이 진심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관장님이라면 이런 상황에 대한 답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그렇지만 지난번처럼 불쑥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그런 , 매번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천유현을 찾는 같아서…. 여러모로 마음이 쓰였다.

이번에는 혼자서 해결해 보고 싶었지만 혼자서 곰곰이 고민해 봐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미술관을 방문했을 천유현이 외출 중이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무턱대고 미술관을 찾아가는 대신 메시지를 먼저 보내 보기로 했다.

<< 관장님 안녕하세요! 연우주입니다. 벌써 토요일 오후가 되었네요….

<< 다름이 아니라 혹시 주말에 관장님 시간 괜찮으실 미술관에 들러도 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 심호흡을 하고 고심 끝에 글자 글자 또박또박 작성했다. 그리고 나서도 오타와 띄어쓰기를 정도 검수한 후에 문자를 전송했다. 그렇게 분이 지났을까, 부르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 ㅎㅎ 우주 , 반가워요.

>> 마침 이번 주에 새로운 특별전을 오픈했습니다. 미술관에 도착하거든 내게 연락 주세요.

              

#42

“우와, 마카롱 맛있겠다….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길목에는 파스텔색 차양을 길게 카페가 있었다. 아래 앙증맞게 늘어선 알록달록한 꽃을 피운 화분들이 눈에 띄어 가까이 다가갔더니, 유리 진열장 너머로 색색깔의 마카롱이 있었다.

“관장님 드리면 좋아하시려나?

근데 저거 많이 비싸겠지? 그대로 카페 안으로 들어서려다 습관처럼 망설였다. 게임에서 매달 자동으로 채워지는 용돈은 넉넉했지만, 작은 물건 하나 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따져 보던 일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를 알아차리고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여기서 정도는 있지! 매번 신세 지는 것도 죄송한데, 그래도 가격에 대한 부담 없이 소소한 선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베이지색 마카롱 상자를 들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새로운 전시회가 개막해서인지, 미술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풍성한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휘둥그레 눈으로 오늘따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미술관을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특별 전시실 입구 쪽에 곧은 자세로 있는 천유현이 보였다.

“와아….

천유현은 평소에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고 있던 회갈색 앞머리를 포마드로 넘겨 올리고, 가장 단추 두어 개가 풀린 짙은 네이비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널찍한 어깨 위로 얇은 셔츠 장만을 걸치고 있는 상반신이 유난히 탄탄했다.

트렌치나 슈트 재킷을 입고 있던 평소보다는 캐주얼한 차림인데도 오히려 고고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먼발치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천유현이 반가운 기색으로 내게 눈을 길게 휘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은 제법 드라마틱했다.

“우주 , 생각보다 일찍 주었네요.

“관장님,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관장님, 오늘 셔츠가 정말 어울리세요.

앗… 속으로만 생각할 그랬나. 성큼성큼, 천유현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분위기에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별말 아닐 수도 있겠지만…. 능숙한 매너를 가진 천유현 앞에서는 역시 자꾸만 적절한 말을 하고 있는지 신경을 쓰게 됐다.

“우주 씨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쑥스럽군요.

“아….

“전시회 오픈 주이다 보니 귀빈들이 많이 찾아서 신경을 썼습니다.

칭찬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천유현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정말로 쑥스럽다기 보다는 오히려 느긋하게 즐기는 기색이었다. 담담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이는 천유현의 태도에 역시 어른이구나 새삼 감탄하게 됐다.

“괜찮으시다면 우주 씨에게도 이번 전시를 선보이고 싶군요.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천유현이 몸을 특별 전시실 쪽으로 향하게 했다. 브로슈어를 사람들이 전시회를 활발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작품을 발굴해서 전시를 기획하고, 대중에게 널리 선보이는 미술계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앗, 저는 너무 좋아요…!

들뜬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은 학생이지만, 역시 언젠가 화가로 데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이게 날이 있겠지? 분야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아는 천유현과 함께 전시회를 있다니, 어디서 주고도 없는 경험이었다.

입구 근처에 걸린 감각적인 흑백 포스터에는 까만 배경에 Human connectedness’라는 전시명이 흰색 타이포그래피로 새겨져 있었다. 포스터 하단에 있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진의 이름과 함께 ‘총책임 천유현’ 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으로.

천유현을 따라 들어선 특별 전시실에는 써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희고 창백한 벽면을 배경으로 실물 크기의 새까만 인체 조각상이 늘어섰다. 은박지와 미색 종이가 널브러진 바닥 위로, 매끈한 광택이 흐르는 조각상들은 눈동자가 있어야 자리가 움푹 안으로 파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얼굴 근육은 실감 나게 묘사되어 표정이 생생했다. 조각상들은 넘어진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있거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위태로운 자세였다. 그러면서도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밖을 향해 팔을 길게 뻗고 있었다.

“…….”

“…….”

처음에는 관람을 하는 동안 천유현이 따로 작품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천유현은 눈앞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느껴야 한다는 식의 가이드가 되는 설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다만 같은 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작품을 보면서 오롯이 집중할 뿐이었다. 이따금 눈빛을 교환할 때면 아무 없이도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기도 했죠.

전시회의 마지막 작품에서는 반쯤 몸을 일으킨 인체 조각상들 뒤로 스크린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너울너울한 조명이 내리쬘 때마다, 그늘진 얼굴 위로 다양한 감정이 떠올랐다. 색색깔의 빛이 반짝일 때마다, 조각상들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다른 빛깔을 띠었다.

“어때요?

“음… 제가 작품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어요.

“…….”

“그런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요, 자꾸만 이입이 돼서. 다들 서로에게 닿으려고 하는데, 절대로 그럴 수가 없을 같아서….

절박한 손짓으로 서로에게 닿으려는 애처로운 시도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좌절, 절망, 소외감, 그리고 가냘픈 기대감. 마네킹처럼 개인의 특징을 알아볼 수는 없는 조각상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만은 나에게도 선연하게 전해져 왔다.

“인간에게는 다른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가 있죠.

“…….”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연결될 있다는,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천유현은 진중한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랄까… 너무 심오하고 어려운 이야기여서, 천유현의 말이 마음에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다만 연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천유현은 모든 발버둥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처럼 담담하고 관조적인 태도였다.

“으음….

우리가 연결될 있다는 것…. 말을 가만 되새기자 조금은 착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공략 캐릭터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들에게 닿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자세한 얘기는 아래로 내려가서 이어 할까요?

“아, ! 관장님. 같이 내려가요.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조각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천유현의 질문이 나를 일깨웠다.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지면서, 애초에 내가 미술관을 찾은 이유를 되새기게 됐다.

번째 방문이어서인지 지하에 있는 천유현의 집무실이 조금이나마 익숙했다.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전반적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실내에는 벽면과 바닥의 나뭇결이 살아 쉬는 것처럼 생생했다. 공간이 자아내는 아늑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에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관장님! 그… 이거 드실래요?

지난번에 앉았던 가죽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천유현이 홍차를 내왔다. 도자기 찻잔 위로 몽글몽글 솟아나는 김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내내 들고 있던 종이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오는 길에 마카롱을 천유현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나 주려고 거예요?

“아, 네에….

“이런걸 오고 그랬어요.

“그래도요… 그런데 관장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맛있게 먹을게요, 고마워요.

우아한 목조 테이블 위로 알록달록 뚱뚱한 마카롱이 펼쳐지자 조금 머쓱해졌다. 천유현이 워낙 고급스러운 취향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간단한 먹을거리를 건네는데도 괜히 위축되었다. 흔쾌히 마카롱을 집어든 천유현이 다행히 맛있게 먹어 주어서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네요? 우주 씨가 잘해 오고 있는 같은데요.

이윽고 어딘가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천유현이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시스템에 접속한 NPC 천유현이 공략 진행 상황을 투시했다. 실제로도 지난번에 천유현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게임 상황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단순히 호감도 수치로만 따지면 엄청난 상승이 있기도 했고….

“그게 실은… 겉보기랑은 다르게 그렇지만은 않아서요.

              

#43

“그래요? 어떤 일인지 편하게 이야기해 봐요.

“그게….

천유현이 다소 의아하다는 눈썹을 슬쩍 추켜올렸다. 차분한 표정을 천유현은 무슨 말이든 들어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그에게 사정을 얘기하려고 하니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이라윤과 강태양을 같은 장소에서 만나고,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물론 어제는 흠칫 놀라고 당황스럽게 느꼈지만, 사실 앞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그보다 더한 돌발 상황이 생겨날 분명했다. 그때마다 천유현이 막아 있는 것도 아니니, 힘으로 헤쳐 나가야겠지.

“관장님, 제가…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평소에 사람들한테 맞춰 주는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도요.

“…….”

“사소한 하나하나 남들한테 이기려 드는 것도 싫고, 어쨌든 주변 사람들이랑 지내는 저한테도 마음이 편하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막막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그보다 본질적인 있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상황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가끔은 , 노력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나빠지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저도… 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공략 캐릭터들한테 관심을 가지고 서서히 다가가 보려고 노력했어요.

“네.

“그래서 실제로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거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같아요. 사실 상대방이 좋아하는 뭔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맞춰 주려고 하는 것도, 저한테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거든요.

“…….”

“그런데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음… 가끔은 오히려 껄끄럽게 느끼는 같아요.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나의 최선조차 상대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어색해지고 만다. 애쓸수록 멀어지는 것만 같은 사이, 나에게는 이라윤과의 관계가 그랬다. 비슷하게 얽혀드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요새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자꾸만 고민이 들었다.

“꼭 게임 공략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는 라윤이랑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은데…. 저를 밀어내려고 때마다 서운한 마음도 들고요.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관계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까? 내가 아는 방법은 이것뿐인데…. 이라윤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을 상대로도 앞으로 게임 공략을 진행할 있을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천유현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찬찬히 기울여 주었다. 홍차를 짧게 들이켠 천유현이 시선을 지그시 마주쳐 왔다. 그가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하는 대신 평정심을 잃지 않아 안도가 됐다. 나를 내내 괴롭히던 문제가 사실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남들에게 맞춰 주는 일에 너무 구애받지는 말아요. 경험으로도, 너무 애쓰다 보면 관계가 오히려 틀어지기도 하더군요.

“…….”

“상대방이 일부러 내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이 되면, 사람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아닌지, 경계하게 되니까요.

, 그런 건가…?! 말을 듣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전구가 환하게 켜지는 같았다. 지난번에 같이 술을 마실 이라윤이 스치듯이 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이나 집안 같은 조건을 이유로 자신에게 접근하고,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같다는….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준다거나, 쇼핑하러 가자고 했을 이라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굳었던 역시 때문일까. 쪽에서는 나름대로 이라윤을 신경 써서 행동이었는데, 이라윤은 내가 저에게 보이려고 애쓴다고, 가식적이라고 느꼈다든가…. 진심을 다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면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읊조리던 이라윤의 쓸쓸한 눈빛이 눈에 선했다.

“물론 우주 씨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랬다는 아니라요.

, 그런 아니었는데…. 알쏭달쏭하게만 느껴졌던 이라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같아서 고민에 잠겨 있는데, 천유현은 그런 반응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다독이는 듯한 말투에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마음이 전해지지는 않아서… 그게 어려운 같아요, 관장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어쩌면 좋을 수도 있고요.

“…솔직한 마음이요?

“방금 저한테 말했던 것처럼요. 그렇게 당신이랑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다고, 그래서 가끔은 서운해진다고.

뭐랄까… 정말로 쉬우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조언이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그렇게 얘기했던 거야 당사자가 아닌 천유현 앞이어서고. 이라윤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하자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고… 기분이 간지러웠다.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주 씨를 내보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

“너무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있을 겁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사랑스러울 있다고 내게 말해 주는 천유현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했다. 관장님이 나를 알아서 이런 조언을 주지는 않을 테지만 되는대로 가볍게 던지는 조언이 아닌, 진중하게 들을 만한 이야기였다.

“아… 감사합니다.

물론 천유현이 나를 그렇게 주는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있으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할 같았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 천유현의 말을 되새기다 보니 안이 바싹 말랐다. 찻잔에 손을 뻗으니 천유현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차가 벌써 식었네요.

찻잔 안에 고여 말간 찻물을 내려다본 천유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릿한 걸음걸이로 움직인 그가 홍차를 다시 내왔다.

천유현이 주전자를 기울이자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탄탄한 팔뚝 근육이 움찔거렸다. 표면이 매끈한 도자기 주전자에서 조로록, 규칙적인 속도로 찻물이 흘러내리면 나긋한 향이 공기를 타고 은은하게 번졌다. 모든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나른하면서도 몽롱한 기분에 젖게 됐다.

“뭔가… 여기 오니까 되게 힐링되네요.

반쯤 탄성 섞인 목소리로 멍하게 중얼거렸다. 차를 마저 따른 천유현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데, 평소에 표정 변화가 사람이 아니어서 변화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이어 천유현이 마카롱도 같이 먹으라며 쪽으로 접시를 밀어 주었다.

“항상 관장님께는 제가 도움만 너무 많이 받는 같아요.

바삭하게 부스러지는 마카롱을 베어 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천유현의 조언이 실마리가 되어 지금까지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공략 캐릭터들의 행동이 새롭게 보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늠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치만 저는 관장님께 보답해 드릴 없는데… 어떡하죠.

“그럴 리가요.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서 역시 기분이 좋아졌는걸요.

“그래도요….

하지만 천유현이 나에게 주는 것들에 비해서 내가 돌려줄 있는 일은 미약하기만 했다. 너무 감사한 한편으로 항상 당당하고 여유로우며, 모든 일에 모르는 없어 보이는 앞에서 내가 조금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미묘했다.

“게다가 저는 게임 속에서 NPC 맡고 있는데, 당연히 우주 씨를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앗, 관장님, 그치만….

“하하, 농담입니다. 게임에 대한 상담이 아니어도 되니, 가끔씩 오며 가며 미술관에 들르도록 해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월요일은 휴관일이어서 편하게 관람할 있을 겁니다.

“…….”

“나 역시 직업상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기도 해서요. 이걸 자극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부적절할까요, 우주 씨와 대화하는 나에게도 환기가 되고 좋습니다.

천유현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데다 경험이나 연륜, 커리어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사실 천유현과 나는 하늘과 땅처럼 격차가 같은데…. 그럼에도 천유현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역시 마음이 가벼워졌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다음번에는 월요일에 미술관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술관을 나서기 전에, 스탠드에 비치된 오늘 관람한 전시회 브로슈어를 집어 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쨍쨍한 햇빛이 화사하게 내리쬐었다. 처음 미술관에 마음이 묵직했던 것과는 다르게, 미술관을 나서는 길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기분이었다. 고민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층 홀가분했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없는 게임 속이지만, 그래도 천유현과 보내는 시간만큼은 언제나 편안했다. 천유현이 서슴없이 대하기 편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도 천유현과 대화할 때에는 호감도 등락에 신경 쓰지 않고 부담 없이 나의 이야기를 있기 때문인 같다.

천유현은 내가 원래는 이쪽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임 속에 빙의한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걱정 없이 솔직한 모습을 꺼내 보이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자유로운 해방감을 선사했다.

오늘은 게임에서 보낸 시간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하루가 같았다.

***

미술관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타박타박 주변 거리를 걸었다. 산책을 하면서 생각 정리도 하고, 기분 전환도 생각이었다.

최근 이라윤과의 사이는 묘하게 껄끄러웠지만, 호감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라윤이 내가 ‘싫어서’ 거리를 두려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보다 가까워지는 사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라윤은 사실은 진심을 두려워하고 있는 아닐까.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라윤 사람만은 아니었다. 역시도, 실은 그게 쉬운 길이어서 이라윤이 좋아할 만한 말들을 하고 그에게 ‘맞춰 주려고’ 했었다. 가까워지고, 친밀해지고 싶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의 진심을 내보였다가 거절당하면 더욱 상처받을 것이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나부터 솔직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이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실은 이기심에 가까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일부러 그런 아니었는데, 어느덧 그날 이라윤과 조별과제 뒷풀이를 끝내고 같이 거닐던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

라윤이가 근처에 산다고 했지…. 까맣게 내려앉은 아득한 밤이 시야에 가지런히 펼쳐졌다.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결국은 안의 두려움을 깨트리는 먼저라는 생각으로, 이라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아….

핸드폰에 뺨을 바짝 붙이자 귓가에 저릿한 긴장이 퍼졌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지 않았을 이라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우주 선배?

              

#44

“라윤아 안녕? 우주야.

이라윤이 생각보다 빨리 전화를 받은 탓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올랐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조금 당황한 이라윤의 목소리에 기울이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눅눅하게 가라앉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 …목소리가 그래요, 선배. 무슨 있어요?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

- …….

“잠깐 밖으로 나올 있어? 지금 우리 그때 뒤풀이 했던 걸어갔던, 그때 거기 골목이야.

용기 질문한 다음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금 눈을 뜨고는 시선을 부옇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 쪽으로 멀찍이 던졌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묻어나는 바람이 볼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

- …….

몫의 두려움을 안으로 삼키는 동안, 잠깐의 정적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졌다. 땀이 살짝 배어 나오기 시작한 손바닥으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나가요.

투박한 대답과 함께 뭐라고 이라윤에게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하아, 그동안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날은 더운데 계속되는 긴장으로 손끝은 차갑게 따끔거렸다.

이라윤을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날 밤에는 둥그렇게 부풀어 휘영청 드리웠던 보름달이 어느새 애매한 모양으로 쭈그러들어 있었다. 구름이 드문드문 흐린 하늘, 발자국처럼 점점이 이어지는 별빛의 희미한 자취를 더듬어 보다 눈을 깜빡거렸다.

“우주 선배!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였다. 뒤를 돌아보자, 베이지색 볼캡을 눌러쓰고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있는 이라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을 달려왔는지, 탄탄한 선을 타고 가볍게 흘러내리는 티셔츠 아래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라윤아….

조금의 소란스러움도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이었다. 녹지근한 어둠 속에서도 볼캡의 그늘 아래로 이라윤의 뺨이 살짝 상기된 것이 보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연갈색 눈동자가 이따금 얕게 찰랑거렸다. 희미한 경계심이 묻어 나는 얼굴은 혼란스럽게도, 조심스럽게도 느껴졌다.

“…….”

“…….”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은 우뚝 멈춰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렇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좁힐 없는 사람 사이의 거리.

“그래서, 얘기라는 게….

“그게, 있잖아!

마침내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고 말을 꺼낸 역시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밭은 숨이 끝까지 치고 올라와 목소리가 절박하게 터졌다.

“…먼저 이야기할래요, 선배?

공교로운 타이밍에 서로를 마주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모자를 반듯하게 고쳐 이라윤이 나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 작게 심호흡 하며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었다.

“라윤아, 나는 이대로 너랑 멀어지는 싫어.

“…….”

“요즘 네가 나에게 거리를 두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겠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어.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지… 그렇다면 알려 주면 될까?

“…….”

“혹시 무슨 오해가 있거나… 내가 실수한 있다면, 그것도 고칠게.

말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울컥하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앞으로도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래서, 네가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면 서운해.

진심은 둑이 허물어지듯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이라윤이 좋아할 법한 말들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없을 정도로 빠듯한 긴장이 몰려들었다. 패를 죄다 보이고 진실해진 만큼, 그렇게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용기의 무게만큼 나는 이라윤 앞에서 취약해졌다.

“어…!

때문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뜨끈뜨끈하게 열이 몰려드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금 같은 눈높이에서 이라윤을 마주하게 순간 격한 탄성을 터뜨렸다.

[️50]

이라윤의 호감도가 8% 올라 있었다. 번에 호감도가 이렇게 많이 오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떨떨해진 내가 굳어 있는 사이, 이라윤은 억눌린 숨을 길게 뱉었다. 커다란 손을 들어 올린 이라윤이 모자를 벗어젖히고,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단정한 손가락으로 쓸었다. 주홍색 가로등 불빛 아래로 이라윤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우주 선배.

이름을 읊조리는 이라윤은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단호한 얼굴이었다. 더는 피하지 않고 이라윤이 나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실은 저야말로… 이대로 끝나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나도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망설이는 사이에, 바보처럼 용기를 내지 못해서… 결국은 흐지부지되어 버린 같다고.

이라윤은 조금은 벅찬 듯한 기색으로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그동안 서로 고민만 하고 대화를 많이 해서인지, 그런 이라윤의 말이 전부 곧바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솔직해지자면 약간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싫다는 아니니까 나쁜 반응은 아닐 텐데…. 이대로 끝이라니?

“다른 사람이랑 같이 웃으면서, 행복해 보이는 선배 모습을 보는데… 그게 견디게 싫었어요.

“…….”

“우습지만 그래서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이대로 선배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는 .

, 강태양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그날 이라윤의 표정이 너무 좋아서 꼼짝없이 나에게 화가 줄로만 알았는데, 이라윤은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나 보다.

“일요일에 시간 있어요? 선배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어요.

“…….”

“저도 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예상에 없었던 강태양과의 만남이 이라윤에게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계기로 작용한 듯싶었다. 이라윤의 눈빛이 결연하게 반짝였다. 가고 싶은 ? 하고 싶은 ? 다소 뜬금없는 말들에 어리둥절하는데….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이라윤의 호감도를 50% 이상 달성하였으므로, 현재 메인 퀘스트 진입이 가능합니다.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이라윤 메인 퀘스트 <가면 아래의 진심> 발동 D-1

때마침 이라윤 루트의 중요한 분기점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친절하게 떠올랐다.

***

유난히 볕이 좋은 일요일 이른 오후, 같은 자리에서 이라윤을 만났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다시 보는 이라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어, 라윤아! 벌써 있었구나.

이라윤은 골목길의 콘크리트 벽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페일 핑크 레이어드 셔츠가 뽀얀 얼굴과 화사하게 어울리고, 일자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데님 진을 입어 길쭉하게 뻗은 다리가 돋보였다. 코튼향 같기도 하고 비누향 같기도 보송보송한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어… 이거 뭔가 대단히 작정한 느낌인데? 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이라윤을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의식한 이라윤이 싱긋 웃었다.

“있잖아, 라윤아, 그런데 우리 오늘 어디 가는 거야?

“놀이공원 예매해 뒀는데, 괜찮아요?

“노… 놀이공원?

놀이공원이라고? 기껏 봐야 영화관이나 쇼핑몰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안해요. 상의도 없이 너무 멋대로 결정했죠.

“아니야, 미안해할 없는데… 그냥 나는 놀라서.

“선배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요.

물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느닷없이 놀이공원이라니 의외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SYSTEM> [메인 퀘스트] “가면 아래의 진심”

공략캐릭터 이라윤 루트 클리어를 위한 메인 퀘스트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제한 시간 06:00) [/아니요]

              

#45

“나 놀이공원 진짜 오랜만인데, 엄청 기대되는걸?

어쩐지, 이게 메인 퀘스트 진입을 위한 그림이었나 보다. 이제 정말 이라윤 루트 클리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대체 어떤 퀘스트가 펼쳐질지 궁금해하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SYSTEM> [메인 퀘스트] “가면 아래의 진심”

공략캐릭터 [이라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 [놀이공원]에서 한나절의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 캐릭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보세요!

제한 시간 내에 클리어에 필요한 최소 호감도 70 달성한 , 메인 스팟인 [관람차]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퀘스트 수행이 완료됩니다.

(성공 보상: 이라윤 루트 1 클리어, 플레이어 매력 수치 20 상승)

TIP: 퀘스트 배경인 [놀이공원] 진입하면 특수 장소 유대감 버프가 작용해 호감도가 x2 상승합니다.

TIP: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 공략캐와 교감할 있다면, 퀘스트 성공 확률도 올라갑니다. 그럼 행운을 빌어요!

 

데이트라니, 그래서 라윤이가 옷도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구나. 특정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으면 앨범을 채울 있고, 그로써 게임 클리어에 발짝 가까워진다는 튜토리얼 영상을 통해서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라윤 호감도는 50인데 한나절 만에 호감도를 20이나 올려야 한다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메인 퀘스트답게 평소보다 조금 복잡한 시스템 설명을 찬찬히 읽었다. 그래도 호감도가 평소의 배로 증가한다고 하니까 사실상 10 올리면 되는 거니 불가능까지는 아닐 테고….

[□□□□□□]

이라윤의 머리 위에도 호감도 수치 외에 배터리 모양의 바가 떠올랐다. 저게 바로 오늘 하루 동안 올려야 하는 호감도 20인가 보군.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도전 과제에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것이 현실과는 다르게 낯선 게임 속에서도 메인 퀘스트는 처음이라 특히 생경했다. 그렇듯이 일단 부딪혀 봐야 감이 잡힐 같았다.

“저도 실은 놀이공원 오랜만에 가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랑 같이 보고 싶더라고요.

, 이라윤에게 놀이공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윤 역시 게임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걸까?

“그럼 출발할까요?

깊은 생각에 빠지기 , 이어지는 이라윤의 질문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놀이공원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환상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하철 연결 통로를 따라 놀이공원에 들어서자마자 황홀한 멘트가 이라윤과 나를 반겼다. 주말이라 그런지 디딜 없이 사람으로 가득한 놀이공원은 왁자지껄 부산스러웠다. 연인, 어린이, 여고생들, 가지각색의 무리가 들뜬 기색으로 놀이공원 특유의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즐겼다.

“와, 놀이공원 사람 엄청 많다!

“서로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붙들고 있어야겠는데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이라윤이 은근슬쩍 나에게 어깨동무했다. 반대쪽 손으로는 무인 발권기에서 끊어 자유이용권을 가볍게 펄럭이며 나를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아….

예고 없이 바짝 좁혀든 거리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얼굴을 이라윤이 흘끔 바라보더니,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손이 금세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러더니 먼저 놀이공원 입구 안으로 들어간 이라윤이 쪽을 돌아보며 잘난 얼굴로 싱긋 웃었다. 무수한 인파 속에서도 절대 잃어버릴 일이 없을 만큼, 독보적으로 빛나는 존재감이었다. 어유, 이게 사람을 완전 들었다 놨다 하네! 짧게 손부채질을 하고 이라윤에게 따라붙었다.

“흐음….

놀이공원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자, 길가에 들어선 스탠드에서는 형형색색 화려한 동물 머리띠들을 팔고 있었다. 두어 발짝 가까이 다가간 이라윤이 가지런히 정렬된 머리띠들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라윤아, 이거 쓰고 싶어? 형이 줄까?

“음, 아뇨.

당연히 머리띠를 사고 싶어서 그런 줄로 알았건만, 이라윤은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웃음을 흘린 이라윤이 보송보송한 토끼 머리띠를 들어 올렸다.

“앗, 나는 괜찮은데….

길쭉한 팔이 성큼 가까워지더니 깜짝할 사이 토끼 머리띠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어설프게 머리띠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내게 덮어씌운 장본인을 올려다보자, 이라윤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생각보다도 어울리는데요?

, 자기가 고민하는 아니라 나한테 씌우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도 역시 스물한 살이나 먹고 이런 좀…. 민망한 기분에 손을 더듬거리며 머리띠를 벗어 내자 이라윤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치만 여기 사람들 쓰고 있는데요?

“그런가…?

“정말 선배랑 어울린대도요. 그리고 어차피 놀이공원인데 어때요?

말을 듣고 주변을 돌아보자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정말 괜찮다는 , 이라윤 역시 보란 듯이 여우 머리띠를 덮어 썼다. 훤칠하게 키가 커서는 새침한 여우 귀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어울리는 어울려서 쿡쿡 웃음이 터졌다.

“라윤아, 너도 머리띠를 쓰니까 이제야 용기가 나는 같아!

“우주 선배, 우리 셀카 같이 찍을래요?

“음, 그럴까?

계산을 마친 이라윤이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토끼 귀를 매달고 있는 나와 여우 귀가 달린 이라윤이 화면 가득해졌다. 눈이 땡그래지고 동물 코에서 수염이 솟아나는 필터까지 함께였다. 과하게 깜찍하고 색감이 도드라지는 화면에 흥이 나서 표정을 마구 찌그러트리기도 했다.

“하하, 우주 선배 사진은 절대 다른 사람 보여 주면 되겠다.

“뭐야, 그렇게 이상하게 나왔단 말야?

핸드폰에 같이 고개를 들이밀고 연거푸 찍은 사진을 나란히 확인했다. 이라윤이 생동감 넘치는 사진 가장 나온 장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 오늘 날짜와 장소가 표시된 사진을 확인하는 이라윤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54] 동시에 호감도가 4 상승했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라윤과 함께 놀이공원을 활보했다. 달콤한 디저트를 가득 삼켰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놀이기구를 타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고, 공중에 매달린 놀이기구에서는 잠시를 쉬지 않고 ! 꺄악! 환호성을 질렀다.

“라윤아, 라윤아! 우리 롤러코스터 타자!

“아… 그럴까요?

듣고 있기만 뿐인 역시 덩달아 신이 났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지! 머뭇거리는 이라윤을 끌고 롤러코스터로 향했다.

다행히 익스프레스 줄이라 오래 기다리지는 않아도 같았다. 줄을 서는 동안 위를 올려다보자 화려한 색감의 롤러코스터가 어지럽게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엄청 무서울까? 무섭겠지?

앞으로 다가올 스릴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반반이었다. 그러나 호들갑 떠는 나와는 달리 옆자리의 이라윤에게서는 딱히 이렇다 반응이 없었다.

, 역시. 아찔한 공중 곡예를 보면서도 무덤덤한 이라윤에게서 놀이기구 고수의 냄새가 풍겼다. 하긴 그러니까 평소에도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거겠지!

“라윤아, 안전 조심히 잡아야 ?

“하, 알았어요, 선배.

마침내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롤러코스터 좌석 위에 앉자 허공 위에 아슬아슬하게 뻗은 철제 레일이 눈앞에 길게 펼쳐졌다. 덜컥, 안전 바가 내려와 몸을 단단히 둘렀다.

롤러코스터가 출발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절로 초조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이라윤 역시 이제 슬슬 긴장 되는지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으와아앗!

, 뜨는 부유감과 함께 롤러코스터가 레일 위를 주르륵 미끄러졌다. 열차가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 가까이 치솟아 오르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서는 아래로 까마득하게 보이는 미니어처 같은 풍경에 금방이라도 아찔하게 추락할 것만 같았다. 잠시 늦춰진 속도에 긴장감이 최고로 팽배했을 , 예고도 없이 단박에 급하강했다.

“와, 라윤아 완전 재밌다 그치?

오래도록 줄을 기다렸던 것에 비해, 움푹 꺼지듯이 곤두박질치는 하강감은 한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짜릿짜릿하게 당기는 스릴이 여운처럼 몸에 남았다. 어질어질한 시야가 빙글뱅글 도는 감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롤러코스터가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옆자리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뭐지, 겨우 정도 자극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라윤아?

“…아, 선배. 진짜 괜찮아요.

의아해하며 옆자리를 돌아보자,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이라윤의 얼굴이 여우 머리띠 아래로 새파랗게 질렸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는 안전바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히 붙들었다. 뭐야, 아까 전부터 묘하게 조용하다 싶었더니 무서워서 그런 거였어?

              

#46

때마침 롤러코스터가 원위치로 돌아오고 안전바가 위로 올라갔다. 분간의 롤러코스터 탑승 끝에 이라윤은 영혼이 반쯤은 탈출해 버린 같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안전바를 말아 쥐고 있던 손바닥이 새하얬다.

아니, 이렇게 무서워할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하지! 뭐든지 완벽해 보이는 이라윤에게 이런 뜻밖의 약점(?) 있을 줄이야. 롤러코스터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오는 이라윤이 크게 휘청거렸다. 왠지 모르게 으쓱해진 마음으로 다가가 이라윤의 어깨를 부축했다.

“이라윤, 놀이기구 엄청 타는 알았는데!

“아….

느릿하게 눈을 끔뻑인 이라윤이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부스스 웃었다. 멋쩍어하면서도 조금은 부루퉁한 얼굴이 심통 꼬마처럼 귀여웠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크게 터뜨리자, 이라윤이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이제 어른이니까, 어릴 때랑은 달라졌을 알았죠.

“오구오구, 우리 라윤이 어른 돼쪄요?

하긴, 평소에 워낙 차분한 분위기여서 그렇지 올해 미자 탈출한 거였지. 의외로 허술한 모습을 보이자 평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같던 이라윤이 한층 친밀하게 느껴졌다. 전에 없이 침울한 낯을 하는 이라윤의 부푼 볼을 잡아당겼다.

[️60]

[■■■□□□]

이라윤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아지더니, 곧바로 호감도가 6 상승했다. , 이렇게 많이 올라! 좋은 일이었지만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가, 지금 호감도 상승에 x2 부스터가 붙어 있다는 알아차렸다.

…그래, 그날 우리 술에 취했을 때도 스킨십을 하면 호감도가 쭉쭉 올랐지. 이제는 직격으로 먹히는 방법이라는 알지만… 그럼에도 시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때마다 묘하게 짙어지는 이라윤의 눈빛 때문에, 이쪽에 너무 의존해서는 같달까? 애매하게 웃으며 옆으로 주춤 물러섰다.

“라윤아, 그럼 지금부터는 우리 살살 달릴까?

“저는 찬성이에요.

이라윤은 기다렸다는 냉큼 대답했다. 미련 없이 극한 놀이기구에 대한 포기 선언을 이라윤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여전히 고공에서 위험하게 회전하는 각종 놀이기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넌더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라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거니까, 역시 그렇게까지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놀이기구들이 가득한 야외 테마파크를 떠나 비교적 아기자기하게 꾸려진 실내 놀이공원으로 들어섰다.

자극과 희열이 넘쳐흐르는 바깥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대다수인 놀이공원 안쪽은 분위기부터가 한층 평화롭고 소박했다. 덩치가 절반만 아이들을 따라 회전 바구니, 범퍼카, 회전목마 따위를 지나치는 이라윤의 표정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라윤아, 기다려 . 내가 오늘 인생샷 건져 줄게!

실내 놀이공원 정중앙의 회전목마에는 중세 시대 왕실을 연상시키는 아롱다롱한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가지각색의 조명이 갈기를 거칠게 휘날리는 백마와 화려한 모양새의 마차를 내리쬐었다. 옆에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있는 번듯한 미남을 보자 번뜩 영감이 떠올랐다.

“이라윤, 이쪽 보고 웃어 !

이라윤의 등을 떠밀다시피 혼자서만 먼저 회전목마에 태웠다.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하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일곱 남짓해 보이는 어린이들 사이로 연한 핑크색 셔츠를 입은 이라윤이 다소곳하게 회오리 봉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 이라윤이 쪽을 돌아보는 타이밍에 맞춰, 무릎까지 꿇고 각도를 맞춰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조명발도 아주 받아서, 유난히 늠름해 보이는 이라윤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던 이라윤 역시 막상 사진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다음번에는 순서를 바꿔 내가 회전목마에 타고, 이라윤이 나의 사진을 찍었다. 차례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에어드롭으로 사진을 교환하며 어느 컷이 베스트인지 서로 골라 주었다.

“선배 사진은 약간 피터팬 같은데요?

“피터팬이라니, 그게 뭐야. 그것보다, 피터팬이 말을 탔던가?

“피터팬 초록색 입고, 네버랜드에서 날아다니지 않아요? 무슨 양탄자 같은 타고.

“에이, 그건 알라딘이고!

회전목마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놀이공원 내부의 간이 식당에서 로제 떡볶이와 바질 우동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실내 조명이 은은하고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놀이기구를 타면서 흘리고, 정신없이 웃고 떠드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SYSTEM> [퀘스트 알림] 잔여 시간 02:00. 메인 퀘스트에 실패할 경우 스토리 분기점에 도달이 불가, 이후 진입 가능한 엔딩에도 제한이 생깁니다.

 

때마침 한동안 잊고 있던 시스템 창이 시야에 가득해졌다. , 이건 알림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같은데….

이라윤 루트에서 가장 중요한 메인 퀘스트였지만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돌아다니다 보니 정작 게임 공략에는 좀처럼 신경을 쓰지 못했다. 누구나 일상의 걱정을 모두 잊고 즐기는 놀이공원이라지만, 나는 그럴 때가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솟아났다.

[️60]

[■■■□□□]

흘긋, 쳐다보자 목표치의 절반 정도 달성한 호감도가 보였다. 무사히 사진을 찍고 앨범을 채우려면 남은 시간 동안에는 호감도를 올리는 집중해야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아까 낮에 봤던 메인 퀘스트 창을 되새겨 보았다. 진솔한 대화가 도움이 거라고 했지….

“어, 저기 퍼레이드 한다. 우리도 빨리 보러 가요.

어젯밤에 이라윤도 나에게 말이 있다고 했으니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봐야 하나? 혼자서 엄청난 고민에 빠져 있는데, 슬그머니 팔을 내게 뻗은 이라윤이 모른 손을 잡아끌었다. 짐짓 태연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발갛게 상기된 볼이 보였다.

“지금 바로 순간, 환상의 나라에서 여러분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드릴게요!

엉겁결에 이라윤의 손을 잡은 채로 야간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길목으로 향했다. 현란한 조명이 하늘하늘한 천으로 옷가지를 나풀나풀 움직이며 차례차례 등장하는 배우들 위로 내리쬐었다. 스팽글이 반짝이는 옷을 입은 배우들이 팔을 크게 움직이며 깃발과 요술봉을 휘두르면 여기저기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각양각색의 인형 탈을 뒤집어쓰거나, 혹은 얼굴을 새하얗게 칠한 짙은 분장에 뒤덮인 배우들은 모두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윙크를 하거나, 적극적인 캐릭터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관중 쪽으로 다가와 발재간을 부리기도 했다.

“와아….

화려하게 휘몰아치는 광경에 벅찬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라윤이랑 나란히 있어서일까, 어릴 이후로 이렇게 퍼레이드에 집중해 것은 처음이었다.

옆자리의 이라윤은 짙어진 눈매로 퍼레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업에 한창 집중할 때처럼 우수 어린 옆모습은 차분한 한편으로 쓸쓸하게도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화려한 퍼레이드보다는 수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라윤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

“…….”

[️64]

[■■■■□□]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호감도가 올라갔다. 아무런 없이 서로를 가만 지켜보기만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롯하게 충분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이라윤의 갈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파문이 일었다. 이라윤 역시 지금 순간 눈동자 안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을까?

“아….

그러다 보니 대체 놀이공원이 이라윤에게 특별한 장소인지가 궁금해졌다. 캐릭터 공략 루트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니, 이라윤이 오늘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지만 방금 롤러코스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던 보면 이라윤은 딱히 놀이기구를 타는 같지도 않았다.

“근데 있잖아, 라윤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음악 사이로 폭죽 터지는 소리와 나팔 부는 소리, 공기를 떠도는 각종 소음이 섞여 들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려면 평소보다 훨씬 서로에게 집중해야 했다. 내가 입술을 열자 미간을 얕게 찌푸린 이라윤이 내쪽으로 상반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말을 듣고 있다는 ,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여 보였다.

“너는 원래부터 놀이공원을 좋아했던 거야?

“…….”

“아까 보니까 놀이기구 체질은 딱히 아닌 같아서….

              

#47

“그러게요. 어렸을 때부터 놀이기구 타는 질색하면서도, 놀이공원에 오는 유난히 좋아했어요.

“…….”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퍼레이드를 구경할 때에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거든요.

“…….”

“…….”

“그래? 하긴, 없이 뭐가 계속 등장하니까, 때리고 있기에 딱이지?

, 하고 웃은 이라윤이 팔을 뻗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단단한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어올랐다. 이라윤에게 신경이 바짝 곤두선 채로,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곧바로 오므렸다.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도 , 어딜 가나 눈에 띄는 힘들었던 같아요.

“…….”

“내가 바란 적도 없는 관심이 너무 많이 쏟아지는데, 다들 웃는 얼굴로 다가오다가도 부담스럽다는 티를 내면 돌아서자마자 화를 내고.

“…….”

“솔직히 겉이랑 속이 다르다고밖에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전부, 본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나한테 다가오는 것처럼.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서는 퍼레이드가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곳에 있는 배우들은 모두가 가면을 뒤집어쓴 채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고 있는 얼굴 아래로 안에 있는 진짜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경쾌하고 흥이 넘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라윤의 말을 듣고 보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이 조금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적당히 가면을 쓰고 사람들한테 거리를 두고 살았어요.

“…라윤아.

“그런데 안에 계속 있다 보니까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벽이 너무 단단해졌는데, 깨고 나오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말을 하면서 이라윤이 나를 돌아보자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진심을 느끼지 못했던 이라윤은 끝내는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알아 가는 시도를 아예 멈췄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자신 역시 두꺼운 가면 안으로 홀로 숨어 버렸다.

“…….”

그렇게 사람들을 경계하는 이라윤이 너무 예민하다거나,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고 느껴지지는 았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봤기 때문에 오히려 이라윤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있겠다 싶었다.

입장에서야 우월한 조건을 타고나서 무슨 일을 하든 남들보다 돋보이고 관심을 독차지하는 이라윤이 부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라윤이 겪고 있는 힘듦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라윤아, 나도 잘생기고, 똑똑하고… 옷도 입고 그런 당연히 좋아. 같이 있을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면 괜히 내가 으쓱해지고.

“…….”

“하지만 그것 때문만이 아니야. 너랑은 별것 아닌 대화도 말이 통하고, 네가 가끔씩 쏘는 농담 하는 것도 신선하고… 나는 그냥, 너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

그렇지만 역시 이라윤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라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자꾸만 가면 뒤에 숨기만 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이라윤을 좋아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다가올 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알아요. 그래서 저도 선배가 좋았어요.

성큼, 이라윤이 내게 가까워졌다. 현란한 퍼레이드 조명을 받아 내는 얼굴에 색색깔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찬가지로 불빛이 일렁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흐릿해졌다가, 다시 초점이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

“…….”

“그리고 이건 분명,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거야.

촘촘한 시선을 가만히 받아 내자니 이유를 모르게 심장이 갑갑하게 차올랐다. 고민 끝에, 방금 했던 말을 개인이 아닌 다른 사람 모두에 대한 이야기로 돌렸다. 말에 이라윤은 맥없이 웃기만 했다.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하게 줄은 몰랐어요.

“…….”

“여전히 괜한 소리를 했나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선배에게만큼은 오해받고 싶지 않았어요.

오해와 이해 사이, 우리가 가까워지려고 때마다 내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멀어지던 이라윤. 처음에는 혼란스럽게만 느껴졌던 행동 뒤에 숨겨져 있던 망설임과 두려움이 이제야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아마 어젯밤 내가 용기를 내어 이라윤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이런 대화를 수도 없었겠지. 이라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서로간의 이해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 것이 고마웠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 라윤아.

미움 받을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했던 역시 두려워하고 있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라윤 덕분에 이제는 있었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 주는 아니라는 . 용기를 내서 마음의 진솔한 조각을 내어 때에야 상대방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있었다.

[️70]

[■■■■■■]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갑자기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공간에 나와 이라윤 단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불완전하지만 최선을 다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짧게나마 서로에게 이어질 있었다. 주고받은 마음의 무게만큼 외로워지고, 연결되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클리어에 필요한 호감도 수치를 달성했습니다. 주요 스팟인 [놀이공원 관람차]에서 공략 캐릭터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때마침 퍼레이드가 끝나자 이라윤은 이번엔 은근슬쩍이 아니라 덥석 손을 잡았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손을 붙든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맞닿은 손에서는 미지근한 온도와 두근두근한 맥박이 함께 전해져 왔다.

“와, 예쁘다.

이라윤이 나를 데려간 곳은 놀이공원 관람차 앞이었다. 일렁일렁한 조명이 반짝이는 관람차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느릿하게 회전했다. 까맣게 내려앉은 밤하늘 아래로 촘촘하게 쏟아지는 불빛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 오늘 놀러 기념으로 여기서 사진 찍을래?

방금 나타났던 시스템 창은, 그러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일종의 예고였던 건가? 덕분에 놓치지 않고 이라윤에게 사진 찍기를 제안할 있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관람차를 배경으로 이라윤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가면 아래의 진심”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플레이어 매력 수치가 20 상승합니다.

“우주 선배, 좋아해요.

“라윤아….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와 동시에 이라윤이 나에게 고백했다. 결연한 표정에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놀란 나는 시스템 창과 이라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저는, 좋은 선후배가 아닌 연애 감정으로 하는 이야기에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었다. 오늘 하루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우리 사람 사이를 흐르던 미묘한 기류, 나를 바라보던 이라윤의 짙어진 눈빛과 상기된 , 서로를 의식하는 만큼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달콤한 머뭇거림까지. 처음부터 이라윤이 고백을 염두에 두고 오늘 자리에 나왔다는 있었다.

<SYSTEM> 공략캐릭터 [이라윤] 1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스토리 진행을 위해 선택 가능한 단독 엔딩 루트와 다중 공략 루트가 자동으로 생성됩니다.

<SYSTEM> 단독 엔딩 루트에 진입하면 독점 관계를 기반으로 공략캐릭터 [이라윤] 호감도를 100%까지 올릴 있습니다. 다중 공략 루트를 선택할 경우 상승한 매력 수치를 이용해 다른 캐릭터에 대한 공략을 이어 나갈 있습니다.

<SYSTEM>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 5 안에 진입 희망 루트를 선택해 주세요. [단독 엔딩 / 다중 공략]

“어…!

뭐라고 대답하기도 , 시스템 창이 주르륵 없이 떠올랐다. 팡파르를 터뜨리듯이 시야에 가득해지는 시스템 창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나도 이라윤을 많이 아끼지만 그런 마음이 연애 감정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게임을 전체 클리어하고 현실로 돌아가는 목표인 나로서는 이라윤의 마음을 받아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이 나에게 재빠른 선택을 종용했다.

“그게, 대답은….

그러니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라윤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간절한 얼굴의 이라윤을 보고 있으려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이라윤은 아직 다른 사람을 사귀어 적이 없다고 했었지. 어렵사리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고, 나에게 고백한 것이 이라윤에게는 얼마나 용기를 행동인지 느껴져서였다.

5, 4, 3, 2, 1. 빨리 선택을 하라고 보채는 것처럼 깜빡, 깜빡, 시스템 창이 반짝였다. 숫자가 하나하나 줄어들 때마다 묵직한 돌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같았다.

“나를 그렇게 좋게 줘서 고마워, 라윤아.

“…….”

“나도 너를 후배로서 많이 아끼고 좋아하지만, 연애 감정은 아닌 같아.

이라윤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선연히 드러났다. 그를 빨리 지워 내려 했지만 표정 관리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했다. 화를 내거나 실망을 표출하는 대신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추스르는 이라윤 앞에서 내가 어쩔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그때 사람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응?

“내가 망설이는 사이에 너무 늦어 버린 건가 싶어서요.

              

#48

불안정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이라윤이 말했다. 그런 이라윤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책에 가까워 보였다. 순간 무슨 말이지, 멍해졌다가 축제 강태양과 나란히 있는 나를 보며 눈을 맹렬하게 빛내던 이라윤을 떠올렸다.

“아, 그런 아냐 라윤아. 사람이랑… 사귀거나 하는 전혀 아니어서.

아이고, 이걸 어떡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라윤으로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말을 늘어놓자 이라윤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다는 듯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거절하는 것인지, 이유가 정말 궁금하기라도 것처럼.

“하아….

결국에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것조차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윤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고백에 대한 답변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네가 잘못한 하나도 없어… 이건 전부 문제야.

“…….”

“내가 아직 연애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

어떻게든 이라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든 원인을 차라리 나에게로 돌렸다. 이라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것만은 반드시 이라윤에게도 전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실은 이렇게 , 조금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같아요.

“…….”

“선배가 나를 아끼는 알고 있었지만, 같은 온도는 아니라는 이따금 느꼈거든요.

“…….”

“그래도, 마음 전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같아서 오늘 보자고 거예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라윤이 얼굴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입술이 희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든 나를 향해 웃어 보이려 했지만 이라윤은 결국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SYSTEM> 캐릭터 동시 공략이 가능한 다중 엔딩 루트로 자동 진입했습니다.

 

<SYSTEM> 현재 플레이어 매력 수치가 30 달성하였으므로, 새로운 공략 캐릭터 루트 진입이 가능합니다.

 

시스템의 기계적인 가이드라인과 지금 눈앞에서 상처받고 있는 이라윤 사이의 괴리감이 선명했다. 바라던 대로 게임의 진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이라윤을 이용한 것처럼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절대 그를 그냥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로 취급할 없었다.

“라윤아….

이라윤의 눈동자에는 빛이 움푹 꺼트려져 있었다. 고백과 거절. 일련의 과정을 거치자 여전히 눈앞에 또렷이 존재하는데도 이라윤은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흐려져 갔다.

“지금 내가… 너한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기다릴게요, 우주 선배가 준비가 때까지.

“…….”

“저는 인내심 하나만큼은 끈질긴 사람이니까.

이라윤은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눈썹이 시무룩하게 처져 있었지만, 고집스레 닫힌 입매에서 여전한 결연함이 전해졌다. 여실하게 전해지는 진심의 무게가 공기를 빼곡하게 메웠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우리도 이만 출발할까요?

“…그래, 라윤아.

가볍게 바지에 손을 털고 쪽을 향한 이라윤의 시선이 스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마음의 거리는 다시금 흐릿하고 부옇게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70]

그와 대조적으로 여전히 이라윤의 머리 위에서 내게 인사하는 호감도는 선명하기만 해서 상황의 아이러니를 더했다.

***

바라던 것처럼 게임 캐릭터 공략을 처음으로 완료했다. 그로써 게임 클리어에도 발짝 가까워졌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거나 성공에 대해 뿌듯하고 의기양양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오, 심란해 죽겠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했던 행동이 최선이었을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다. 어젯밤에는 그동안 이라윤과 보냈던 시간들을 되짚어 보며 뒤척이느라 늦게 잠들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내가 맞닥뜨린 것은 플레이 시간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었다.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29 (남은 시간: 70 22시간 46)

 

1, 2, 3.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순간에도 제한 시간은 째깍째깍 줄어들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 쓸데없는 감정 소모할 때가 아니라고 시간은 너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한시바삐 게임 공략을 이어 나가라고 나를 채근하는 같았다.

“그래, 내가 게임을 하면 아무도 대신해 사람이 없지….

눅눅한 마음을 털어 내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지금까지 일들보다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기에,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앨범을 열어 보자 원래는 비어 있던 페이지가 이라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관람차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나와, 조금은 새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이라윤. 단순히 우리 사람의 표정뿐만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만져질 것처럼 순간의 기억과 감정이 박제된 사진이었다.

일렁일렁 올라오는 감정에 잠시 넋을 놓고 있기도 찰나, 캐릭터 정보 탭에 NEW 글자가 깜빡였다. 클릭해 보자, 처음 이라윤을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상세 내용이 업데이트된 정보창이 떠올랐다.

이라윤 (20)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

호감도 [70/100] : 1 공략 완료, 다중 루트 선택으로 공략 진행 일시 중단

루트 진입 조건: 교양 수업에서의 만남

엔딩 장소: 놀이공원 관람차

공략법: ‘계산 없는 직진’. 냉소적인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이라윤은 플레이어와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소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밀당 단계에서 뒤로 물러나려 경우 불도저처럼 직진하는 필요하다.

TIP: 전략적으로 라이벌을 노출해 질투심을 자극하는 역시 공략 캐릭터의 마음 자각에 도움이 있다.

이상형: 외부적인 요소보다는 내면에 더욱 집중해서 진솔한 애정을 쏟는 사람. 나라는 사람이 타고난 조건이나 이뤄낸 성취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상징: 벚꽃 [꽃말: 내면의 아름다움]

 

엄청나게 집중해 이라윤 공략법과 이상형을 읽어 내리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 뭐야… 완전 좋았잖아? 이런 초심자의 행운인 건가. 직진이나 라이벌을 통한 질투심 자극 같은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행동에 옮기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라윤은 비교적 수월하게 공략할 있었던 거구나. 아니 그보다, 시스템은 모든 진작 알고 있었다면 미리 알려 주지 이제야 내놓는다니 너무했다. 그를 포함해 나머지는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이라윤의 상징이 벚꽃이라는 특이했다. 꽃말이 내면의 아름다움이라… 그런데 이건 캐릭터 정보에 들어가 있는 거지?

“어, 꽃다발에 벚꽃이 생겨났잖아?

그렇게 사진첩을 덮으려고 하는데, 플레이어인 ‘나’의 프로필 사진이 있는 번째 페이지를 무심코 넘기려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예전에는 비어 있던 꽃다발 안에 벚꽃이 피어나 있었다.

화면 안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을 보자니 단독 엔딩 루트로 이어지지는 않았어도, 이라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공허했던 꽃다발 안에 새롭게 돋아난 꽃처럼, 이라윤을 통해서 내가 느낀 감정 역시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나의 새로운 일부가 되었음을 느꼈다.

혼자서만 우정으로 다가갔다 해도, 그동안 이라윤은 나를 향한 연애 감정을 키워 오고 있었다. 공략을 이어 나가려면 나로서도 어쩔 없었다고 정당화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이라윤이 깊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꼈다.

나에게는 게임 속이지만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힘을 다해서 살아가는 현실이기도 하다. 게임을 클리어하고 나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캐릭터를 계속해서 공략해 나가야겠지만, 과정에서 순간 사람들과 교류하는 동안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고 싶어졌다.

이라윤 루트 공략이 마무리되면서 앞으로 게임을 어떤 식으로 헤쳐 나갈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개념이랄까, 원칙이 생겨났다. 최대한 다른 사람을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목표를 이루겠다는 다짐을 굳히는데,

<SYSTEM> 현재 공략캐릭터 차태주 루트 추가 진입이 가능합니다. 업데이트된 정보를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해 보세요!

              

#49

반짝반짝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지난번 강태양 루트 개방 때와 마찬가지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매력 수치가 올라가 새로운 캐릭터가 해금되었나 보다.

차태주 (31) MK금융 경영혁신팀장

 

서둘러 확인해 보니 새로운 캐릭터의 정보가 일부 공개되어 있었다. MK금융이라면… 만월미술관을 운영하는 MK그룹의 계열사인가? 현실과 게임 속이 느슨하게 교차하는 듯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나랑은 나이 차이가 거의 살이나 나고….

대기업 팀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하지 않게,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실루엣 뒤로 깔끔하고 모노톤한 사무실이 길게 펼쳐졌다. , 큰일이다. 그래도 조금은 익숙하거나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라윤과는 다르게, 배경부터 나에게는 너무 낯선 공간이어서 절로 긴장이 됐다.

번째로 등장한 캐릭터니까, 그만큼 공략 난이도도 높겠지? 그나저나, 금융 대기업이라면 게임 일상과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대체 차태주라는 공략캐는 어떻게 만날 있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자칫하면 학교에 지각하게 같았다. 아니, 이렇게 챙겨야 많은 거야! 삐죽하게 뻗친 머리를 슥슥 쓸어 넘기고, 가방을 챙긴 다음 후다닥 기숙사 방을 나섰다.

***

이라윤 루트 공략이 완료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게임의 판도가 뒤바뀌지는 않았다. 하루하루는 기존과 똑같은 일상대로 흘러갔다.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오전 전공 수업을 듣고 다음, <성과 사회> 강의가 열리는 인문대 건물로 이동했다.

“어, 라윤아!

그리고 오늘 수업에서도 이라윤을 맞닥뜨렸다.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내심 신경이 쓰여서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뒷줄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 길에 단박에 이라윤이라는 알아볼 있는 널찍한 어깨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

인기척을 알아차린 이라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살구색 볼캡을 뒤집어쓴 얼굴이 해쓱했다. 나지막한 탄성만을 터뜨릴 이라윤에게서는 별다른 인사가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평소처럼 나를 반기는 기색 역시 전혀 없었다.

[️70]

그대로 시선이 마주치는 동안 떨떠름한 공기가 감돌았다. 서로를 향해서 어설프게 웃고는 있지만, 좋다고도 없고 나쁘다고도 없는 조심스러운 거리감만은 여전했다. 사이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심정이 들었다.

고백 다음 날은 원래 이런 식인 건가.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주고 주는 기분이려나. 오던 이라윤이지만 오늘만큼은 대하기가 어려워 쩔쩔매게 됐다.

“그… 나랑 먹을래?

“네?

게다가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기도 전에 말부터 불쑥 튀어 나갔다. 귀로 듣기에도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서 얼굴이 곧바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라윤 역시 제안이 다소 당혹스러웠는지, 볼캡 아래 도톰한 뺨에 붉은 기운이 옅게 번졌다.

“아니… 다른 아니고, 그냥 점심 때고 배고프니까….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

“우주 선배.

“…….”

“저 마음 추스를 시간 조금만 줄래요?

이내 스스로를 차분하게 가다듬은 이라윤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성격이 워낙 착해서 온건하게 대답했지만, 이라윤은 지금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하게 나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때문에 방금 내가 했던 말에 배려가 부족했다는 있었다.

“…….”

거절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기에, 선택을 내린 다음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니 고백은 거절했지만 이라윤과 예전처럼 다정다감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역시 결국은 욕심일 뿐이었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삼키는 동안 이라윤이 비척비척 힘없는 걸음걸이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

머리로는 지금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라윤과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연애 감정은 아닐지라도 이라윤을 많이 아끼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우주, 그렇게 시무룩해.

“아닌데? 1 시무룩한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표정 하나도 숨기는 .

그러느라 처진 기분이 표정에까지 드러났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함께 학식으로 제육볶음을 먹고 식당을 나서는 , 조금 뒤처져 걷는 나를 돌아본 유한나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아파….

“그러지 말고 무슨 있으면 말을 . 괜히 신경 쓰이잖아.

“맞아. 혼자서만 참으면서 끙끙 앓으면 난다.

고개를 갸우뚱한 유한나가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평소에는 투닥거리기만 하던 황병열 역시 투박하게나마 걱정을 건넸다. 처음에는 비중 없는 조연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이제는 정말 친구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떻게 살면서 마냥 행복한 일만 있겠어. 울적한 일도 있는 거지.

“어쭈, 그러셔요?

“히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진짜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 그나저나, 한나야, 저번에 동물보호단체 기부는 잘했어?

그러나 게임을 공략하는 동안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대신 축제 페이스페인팅 부스에서 모금한 돈을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했다는 것이 기억나, 그에 대해 질문했다. 유한나는 금세 주말에 유기견 구조 활동 단체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무슨 있나? 저렇게 사람이 많지?

그렇게 학생회관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1 복도에 인파가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너나 없이 들뜬 목소리로 없이 재잘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덩달아 역시 궁금해져 고개를 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 오늘 차태주 초청 강연하는 날이라 그럴걸?

“차태주?

“왜, 작년에 동문 멘토링 프로그램했던 스타트업 CEO 있잖아!

은근히 학교 소식에 빠삭한 황병열이 대신 답해 주었다. 잠깐만, 차태주라면…. 오늘 아침에 들여다본 시스템 창을 떠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벽면의 초청 강연 포스터에는 새하얀 얼굴에 날렵하게 뻗은 눈매가 도드라지는 냉미남이 떡하니 있었다.

<SYSTEM> 스토리 진행 분기점 알림! [동문 초청 특별 강연] 에피소드 진행 , 공략 캐릭터 차태주 루트 진입 가능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새로운 캐릭터 공략 루트가 열릴 줄이야! 아직 이라윤 루트를 클리어하면서 후유증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하지만 한편에서 시큰거리는 마음과는 다르게,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결국은 마음을 다잡고 게임 공략을 이어 나가는 역시 나에게 주어진 일이였다.

“아, 그럼 나도 오늘 사람 강연 한번 들어 볼까?

“다음 수업은 어쩌고? 그보다 우주 금융에 원래 관심 있었어?

“그런 아니지만… 배워서 나쁠 없다는 생각도 들고 말야.

“잉, 이렇게 갑자기? 우주야, 우리 미대생인 까먹은 아니지?

내내 시무룩하던 내가 갑자기 동문 강연에 관심을 보이자 유한나와 황병열은 조금은 어이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다시 집중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대강당 앞에 모여든 인파에 자연스레 섞여들었다. 강연 시작은 30 후인 오후 , 다행히 현장 등록이 가능해서 역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강의 시작 직전에 들어간 대강당의 아득하게 펼쳐진 객석에는 기가 질릴 정도로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뒤에서 번째 줄에 앉은 나는 조금이라도 무대를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 소리와 함께 무대 조명이 켜지더니, 이윽고 탄탄한 몸에 피트되는 슈트를 걸친 남자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MK금융 경영혁신팀장 차태주입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곧게 남자가 사람들로 가득 객석을 돌아보았다.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린 남자가 여유만만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수런거리던 객석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남자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꽤나 능숙한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0]

, 저분이 새로운 공략 상대구나. 거리였지만,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호감도 수치를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차태주를 응시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이 예리한 인상을 자아내고, 콧대와 턱선이 날렵하게 뻗은 얼굴에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오늘 자리를 찾아 주신 분들은 금융권 커리어에 뜻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의 내용도 모르면서 일단 무작정 안으로 들어온 나는 뜨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분위기 역시 여유롭고 발랄하던 교양 수업과는 사뭇 달랐다. 객석을 채운 학생들은 대부분 고학년 위주였고, 강연을 들으러 왔을 뿐인데도 격식 있는 슈트 차림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역량 있는 인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시장에 뛰어들기 앞서 스스로 일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셔야 합니다.

“…….”

“그렇다면 금융업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혁신 기술을 융합하는 디지털 금융이 화두로 떠오르는 가운데 새롭게 요구되는 인재상은요?

대강당을 채운 수많은 사람이 무대 중앙에서 조명을 훤히 받아 내는 차태주에게 주목했다. , 카리스마 대박. 그렇게 느끼는 것이 나뿐만은 아닌지, 차태주가 발표를 시작한 순간부터 다들 숨죽인 채로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발표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람이 내뿜는 아우라 자체가 워낙 강렬해서 시선을 온통 빼앗기게 됐다.

AI, 머신러닝, 빅데이터, 듣기 좋은 얘기입니다만 고객이 경험하는 서비스에 적용되지 않으면 기술 자체로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고객 입장에서 서비스 안정성과 편의성이 얼마나 개선되는가가 핵심이죠.

“…….”

“그렇다면 결국 혁신 기술을 적용해서 어떻게 데이터를 활용해 나가느냐에 주목해야 합니다. 데이터 기반으로 고객의 니즈를 정교하게 충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기업 측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익 창출을 도모할 있을 테고요.

, 정확히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듣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훌륭한 내용이기는 텐데…. 차태주 본인은 전혀 힘들이는 기색 없이 설명했지만 미대생인 나에게는 그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부터가 생소했다. 그래도 이따 뭐라도 말을 붙여 봐야 같아서 노트에 메모를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차태주를 멍하게 바라만 봤다.

“질문 있습니까?

강연을 마친 차태주가 도전적으로 객석을 응시했다. 젊은 나이에 대단히 성공해서일까, 자기 확신과 자신감으로 넘쳐 흐르는 차태주는 빈말로도 겸손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태도가 거만해 보이기보다는, 능력이 뒷받침돼서인지 당당하게 느껴졌다.

              

#50

“제가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강의가 끝나자 차태주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유려하고 매끄럽게 흘러가는 강의에는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압도당해 자리에 못박힌 있는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어느새 무대를 향해 줄을 길게 늘어서고 있었다.

정식 Q/A 세션은 끝났지만 차태주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건네며 얼굴 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 이럴 수가. 나만 뒤처져서는 된다는 생각에 빨리 가방을 챙겨 들고 무대 앞쪽으로 향했다. 물론 다들 중요한 용건이 있겠지만, 차태주에게 존재를 알리지 못하면 나는 게임 진행을 아예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정신 줄을 놓고 있느라 너무 늦게 움직인 탓에 나는 가장 끝에 서게 되었다. 좀처럼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초조한 마음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쳤다. 무대에서 떨어져서인지 차태주에 대해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차태주가 창업한 핀테크 스타트업 이번에 MK 매각하면서 물밑으로 수십억은 당겼다는데 진짜야?

“그 이상일 수도 있을걸? 그것도 원래 절대 판다고 하던 차태주를 MK 영입하는 조건으로 딜한 거래.

“맞아, 지금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 직책만 팀장이고 사실상 임원 대우받는 거라던데….

“와씨 대박, 하루만 팀장님처럼 살아 보고 싶다. 저분 눈에는 우리 다들 무능력자처럼 보이는 아니냐.

“그래도 저번에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주셨잖아. 대학생 창업해서 우리 학교에 나름대로 애착 있으신 같던데.

스타트업 창업, 수십억 매각, 사실상 임원 대우…. 오늘 아침에 게임 앱을 확인할 때만 해도 대기업 팀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차태주는 생각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어쩐지 눈빛이랑 카리스마부터가 범상치가 않더라니.

“아휴, 어떡하지….

게다가 본인 능력만 좋은 아니라, 후배들을 키워 주려고 대학교에 직접 강연까지 왔다니 객관적으로는 정말 모범적인 기업인이었다. 하지만 차태주에게 다가가야 하는 나로서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눅이 들게 되었다.

아니, 어떻게 게임은 등장하는 공략 캐릭터마다 하나같이 이렇게 소리 나게 대단한 사람들인 건데! 플레이어인 나는 평범한 대학생인데, 게임은 설정부터가 너무 밸런스 붕괴다. 역시 현실로 돌아가면 제작사에 정식으로 클레임을 걸기라도 해야겠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삼십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제야 간신히 차태주에게 가까이 다가설 있었다. 내가 가장 마지막에 있었던 탓에, 차태주는 이제 모든 질문이 끝난 알았던 모양이었다.

“…아.

브리프케이스에 노트북을 챙기던 차태주가 쪽을 돌아보았다. 얼음장 같은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차태주 팀장님!

발짝 늦게 차태주를 향해 상반신을 숙였다. 그래도 만남이니 좋은 인상을 남겨야 같아서 최대한 싹싹하게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차태주의 날렵한 눈매가 나를 느릿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

서늘한 무표정에 금방이라도 위압적으로 찍어 눌릴 것만 같았다. 제법 오래 질문에 시달렸는데도 차태주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깔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같은 이상적인 사회인의 모습이었다.

“저는 2학년 연우주라고 합니다. 오늘 강연 정말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몸을 느슨하게 젖힌 차태주가 끝을 가볍게 까딱였다. 용건 있는 쪽이 먼저 말해 보라는 식이었다. 또렷한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손끝에 절로 저릿한 긴장이 퍼졌다. 그런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트, 특히 개방형 금융 생태계에 대한 내용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어…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는 혁신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있으니까요. 요새는 비대면 경제가 대세이기도 하고….

일단은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강연에서 들은 내용을 되는대로 주절거렸다. 그런데 말하면 말할수록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만 같은 왜지? 이럴 알았으면 강연 열심히 들을걸. 아니, 애초에 디지털 금융에 대해서 내가 안다고….

“아, 하하….

끝내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차태주를 향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차태주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에 머무르자 속내를 간파당하는 것만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더니 차태주가 무심하게 질문했다. , 딸꾹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안으로 삼켜 냈다. 덕분에 눈가에 시큰한 기운이 핑글 맺혀 들었다. 이제 진짜 어떡해….

“그러니까… 음… 대학생이 핀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하려면 가장 필요한 무엇인가요?

그때, 차태주가 대학교에 다닐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는 말이 번뜩 생각나 질문했다. 하지만 앞에 늘어놓았던 말과는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하….

이럴 알았으면 미리미리 공부 오고 올걸…. 그렇지만 당장 오늘부터 차태주를 만나게 줄이나 알았겠어. 밑천이 드러난 듯해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일단 창업 아이템 선정이 가장 중요하겠죠. 온라인 결제 생태계가 어느 정도 편성된 상황이고, 이제는 대기업도 끼어들었으니까요.

“네….

“어떻게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있는지, 또한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아이디어를 철저하게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습니다.

차태주는 지금 내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쁜 사람이니 지금 상황이 짜증스러울 법도 한데, 다행히 그런 나에게 면박을 던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나름 성의껏 질문에 대해 답변해 주었다.

“연우주 .

“네, !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창피한 마음이 든달까? 어쩔줄 모르겠는 기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 이름을 기억해 주셨구나…. 어쩐지 황송한 기분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지난번 멘토링 프로그램에도 등록했었나요? 처음 보는 얼굴인 같아서.

“아, 아니요….

사실 차태주는 별다른 의도 없이 질문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금 내가 얘기 것처럼 디지털 금융에 열정 넘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차태주의 멘토링 프로그램에도 등록해야 했을 테니….

“아, 하아.

차마 그대로 얼굴을 감싸쥐지는 못하고,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가 핀테크나 디지털 금융, 이런 모르기는 하거든요. 미대생이기도 하고…. 그런데 오늘 팀장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니까 되게 멋있어, 아니, 대단해 보여서… 저도 열심히 배워 보고 싶어졌어요.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다가는 씨알도 먹히겠다 싶어서 차라리 솔직히 얘기하기로 했다. 어느샌가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차태주를 슬쩍 올려다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뜻밖에도 차태주는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혼날까 무서워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표정이 묘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1]

게다가 어떻게 영문인지, 차태주의 호감도가 1% 올라가 있었다. 휘둥그레 눈으로 차태주를 바라보았다.

“시작이 나쁘지 않네요. 어쨌든 우주 씨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거니까요.

“저, 정말요? , 감사합니다!

“조만간 우리 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하계 인턴 프로그램을 오픈할 계획입니다.

“인턴 프로그램이라면….

“인턴십 자체는 방학 동안에 진행될 테니 학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진로를 모색하기에 좋은 기회일 겁니다.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면 지원해 봐요.

 

<SYSTEM> [공략 캐릭터 [차태주] 루트에 진입하시겠습니까? - /아니요]

 

때맞춰 떠오른 시스템 창에 고개를 바쁘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차태주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팀장님, 인턴 프로그램 지원할게요!

“그럼 수고해요.

의욕 넘치게 선언하자 차태주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나를 ,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쉬며 차태주의 군더더기 없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목덜미부터 후끈후끈한 열기가 솟아났다.

차태주 앞에서는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는데, 혼자 남게 되니까 뒤늦게 내가 처한 상황이 실감이 났다.

그러니까, 캐릭터 정보에서도 대기업 사무실이 배경이었으니 차태주 루트는 여름 인턴을 하면서 진행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내가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한다고 해서 붙을 수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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