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31-40

#31

조별 과제 지옥에도 구원의 빛줄기가 희미하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완벽하게 안도할 수는 없지만, 비협조의 끝판왕을 달리던 조원들의 참여를 이끌어 것만으로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일단은 과제 진행이 궤도에 올랐으니, 수요일에 이라윤과 함께 동영상 콘텐츠 촬영할 때까지는 내가 거들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좋았어, 정도면 이라윤 루트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야!

간신히 한숨을 돌렸지만, 게임 공략은 엄청난 멀티 태스킹을 요구했다. 며칠 무사히 화해하고 다음에는 한동안 강태양과의 교류가 뜸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강태양이 연락이 뜸하다며 메시지를 먼저 보냈던 적이 있었지.

혹시라도 강태양이 서운하게 생각해서는 되니,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연락해 보기로 했다.

<< 오늘 병원 오는 날이지? 모하구 있어?

햇빛이 포근하게 드리우는 나무 벤치에 앉아 핸드폰 메신저를 켰다. 의외로 프로필 사진이 비워져 있는 강태양과의 대화창에 들어가 메시지를 보냈다.

“음… 바쁜가?

하지만 지난번에 거의 실시간으로 티키타카가 오갔던 것과는 다르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메시지는 여전히 읽지 않음 상태였다. 강태양도 병원에 있다면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면 좋을 텐데….

차라리 전화라도 볼까? 내가 강태양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싶어서 잠시 머뭇거리게 됐다. 그래도 왠지 싫어하지는 않을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과 함께 강태양의 연락처를 눌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아니겠지?

- -. 귓가에 지루하게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통화 연결음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본데.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고 때였다.

- , 여보세요….

강태양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심해처럼 깊숙이 가라앉은 저음의 끝이 꺼끌꺼끌하게 갈라졌다.

“헉, 뭐야 어디 아파?

- 그런 아니고. 무슨 일인데?

“진짜 아픈 맞아? 그치만 목소리가….

- 괜찮다니까.

“아니…. 나는 병원에 있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했지.

살짝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강태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이어지지 않더니 이윽고 하아,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밥은 다음번에 먹자. 지금 집에 있어서.

“아, 으응…. 근데 , 진짜 아무 일도 없는 맞아?

- …….

“아니 밥이야 나중에 먹어도 되지만, 목소리가 평소랑 다른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나와의 만남을 피하려고 하는 것조차, 원래 그러던 사람이 이러니까 역시 이상했다.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아닌가 싶었다.

- …그럼 연우주 네가 우리 집으로 올래?

“어, 어어?

- 메시지로 주소 찍어 줄게. 택시 타고 .

무슨 이야기냐고 되물을 새도 없이 전화가 퉁명스럽게 끊겼다. 이런 전개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득달같이 도착한 메시지에는 별다른 없이 주소만 적혀 있었다.

그때 타면 여기서 금방이라고 했었지.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 어찌 됐든 간에 공략캐에 상태 이상(?) 생긴다면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플레이어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강태양의 집으로 향했다.

“으아….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절로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리게 됐다. 고급 빌라 단지를 빼곡하게 에워싼 찌를 듯이 높은 보안 탓에 왠지 모르게 기가 죽었다. 빌라 입구에서 다다라서도 삼엄한 경비를 뚫은 다음에야 건물 내부로 진입할 있었다.

- . 들어와.

딩동. 꼭대기 층에 다다라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 너머로 나를 확인한 강태양이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펜트하우스 내부에 들어서니 테라스 정원 너머로 강변이 보이는, 화이트 대리석으로 꾸며진 실내가 눈앞에 쫘르륵 펼쳐졌다.

강태양은 묵직한 왼발을 둔탁하게 이끌며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층고 자체도 높은데, 내부가 복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거야 , 혼자서만 살기에는 완전 궁궐 수준 아닌가?

“헉, 태양이 !

하지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오래 새도 없이, 어느새 가까워진 강태양의 얼굴이 퀭해서 깜짝 놀랐다.

“어. 연우주.

“형 진짜 괜찮아? 이렇게 얼굴이 좋아.

미간을 연하게 찌푸린 강태양이 칼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거, 다크서클이 거의 볼까지 내려와 있다. 아픈 아니라면서, 어제 잠을 거의 자기라도 했던 걸까?

“무슨 있는 맞지? 나한테 말이라도 , .

“…….”

“…….”

“하아… 그게, 내가 목걸이를 잃어버렸어.

?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고작 그것 때문에 저렇게까지 사람이 피폐해지다니….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해하는데, 때마침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아라”

공략 캐릭터 강태양이 어린 시절의 사연이 담긴 소중한 목걸이를 찾을 있도록 도와주세요!

(성공 보상: 호감도 10 상승, 목걸이와 연관된 공략 캐릭터의 과거 정보 수집에 추가로 성공하면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 대폭 상승)

 

으왓, 돌발 퀘스트였다니! 시스템은 계획이 있었구나. 이제 강태양 루트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실감이 났다.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 얘기까지 나오는 보니, 꽤나 중요한 분기점인 모양이었다.

“내, 내가 도와줄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태양한텐 엄청 중요한 목걸인가 보지. , 내가 감히 의문을 품을 만한 입장은 아니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강태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힐끔 쳐다봤다. 평소보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 기색이었다.

“어, 그니까… 우리 둘이 같이 찾으면 쉬울 수도 있잖아?

“글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 어떻게 생긴 목걸인데? 언제 마지막으로 봤고?

“…….”

“이런 은근히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이 찾는다, ?

고민이 되는지 강태양이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이내 강태양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테이블 위에 자리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투명한 물로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쓸어 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이 눈을 빛냈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아. 군번줄처럼 생긴 얇은 금속판에 숫자가 새겨져 있고, 은색 목걸이 줄이 달려 있어.

“응응, 듣고 있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 샤워실에 같이 갔을 때에도 강태양이 투박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일 텐데….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만, 어제 아침에 샤워하기 전에는 확실히 가지고 있었어.

“그렇구나…. , 어제는 병원에 왔었나?

“그렇지. 나야 요즘에는 병원이랑 집밖에 다니니까. 아마 어딘가에 있을 같긴 한데….

말을 멈춘 강태양이 무언가 북받치는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널찍한 펜트하우스는 군데군데가 들짐승이 들쑤시고 것처럼 파헤쳐진 후였다. 아마도 강태양은 목걸이를 찾기 위해서 한참 동안 집안 곳곳을 뒤지고 있었던 듯했다.

“어디까지 찾아봤어? 나도 같이 찾아볼게.

“이 층은 아까 올라갔다 오긴 했는데, 다리 다친 다음에는 거의 써서.

“그럼 ?

“어어…. 여기도 아침에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그러면 이번에는 꼼꼼히 한번 보자!

“…고맙다.

고개를 아래로 슬쩍 내리깐 강태양이 묵직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나에게도 돌발 퀘스트가 달려 있는 일이니, 엄청나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보니 강태양에겐 정말 소중한 물건 같아서,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강태양의 목걸이를 찾아 주고 싶어졌다.

강태양과 함께 구역을 나누어서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서 목걸이를 잃어버린 거라면, 아무래도 침대 밑이나 사이드테이블 혹은 화장실의 세면대나 선반 근처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쪽 위주로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흠… 목걸이가 어디로 빠졌을까?

넓게 트인 거실 쪽을 내다보니 티비 밑에 자리한 수납장의 서랍이란 서랍이 죄다 열어젖혀져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걸이는 행방불명인지 강태양이 씨근씨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대로 복도를 거닐면서 주변을 꼼꼼히 살피는데, 아무래도 운동선수 집어서인지 벽면에 주르륵 늘어선 트로피와 상패, 경기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어, !

“왜 그래, 찾았어?

“아 그건 아닌데…. 이건 뭐야?

부엌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큼직하게 걸린 포스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환한 조명이 내리쬐는 스타디움 , 진녹색 그라운드에서 치열한 경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어둡게 그늘진 벤치에 강태양이 앉아 있었다.

관중, 혹은 포스터 밖의 사람을 돌아보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강태양은 한쪽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끌어올렸다. 벌어진 어깨와 등근육이 발달한 뒤태가 도드라지고, 은색 바탕에 반짝이는 파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음료수를 들고 있는 팔뚝이 묵직했다.

“형 에너지 음료 모델도 했었어?

“아, 그거. 작년엔가 찍은 화보야.

“우와….

“연우주 같은 약골은 저런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 몸에 좋을 같지만 실은 다음날 체력 끌어다 갈아서 쓰는 거야.

“형한테 주는 회사에서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그럼 사진은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걸어 놨어?

“음, 사진 잘생기게 나오지 않았냐?

, 진짜 잘난 뭐야. 물론 유난히 매력적으로 나온 사진이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맞았지만, 본인이 사실을 너무 알고 있으니 나는 괜스레 맥이 빠졌다. 은근히 불퉁해진 속내가 티가 났는지,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강태양이 어깨를 크게 으쓱했다.

“짜식, 농담한 갖고 인상 쓰기는.

자의식 과잉마저 납득하게 만드는 구석이 드는 남자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삐죽삐죽 들썩거리던 입꼬리도 안으로 말려들었다. 오늘 하루 강태양이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같은데,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까지 살펴봤어?

“아, 베란다랑 거실은 거의 같아.

“그럼 혹시 모르니까 내가 부엌 볼게!

그대로 부엌을 지나치려다가, 복도 안쪽에 있는 문이 눈에 띄어서 열어 보았다. 인형부터 시작해서, 강태양을 닮은 플라스틱 피규어, 심지어는 종이학까지, 알파룸 안에는 뜻밖의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먼지가 연하게 내려앉은 물건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 여기는 팬들한테 받은 선물 모아 놓는 방이야?

“뭐, 그런 셈이지.

“태양이 , 은근히 호더 기질이 있었구나….

“야 그럼, 팬들이 건데 아무 데나 갖다 버리냐?

“아니 그런 아니지만…. 그래도 양이 워낙 많아 보여서 하는 말이지.

“가만 보면 연우주 나를 무슨 개차반으로 보는 같단 말이지.

“어, 근데 이건 뭐야? 와… 팬레터에 손수 답장도 ?

“그냥 시간 나면 가끔씩. 요즘에는 거의 하지만.

어느새 뒤에 바짝 맞붙어 있는 강태양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과거 정보 수집’이라는 말을 시스템에서 접해서일까? 물론 그걸 목적으로 여기저기를 뒤진 아니었지만, 조금씩 의식되는 어쩔 없었다. 결국 곳곳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도 목걸이를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동안 강태양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수는 있었다.

“그거 형한테 많이 중요한 거야?

“됐어, 이미 잃어버린 두고 말해 .

손을 펄럭펄럭 내저은 강태양은 미련 없이 쿨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얼굴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지금 시냐? 겁나 피곤하다.

털썩, 소리와 함께 강태양이 리클라이너 소파에 주저앉았다. 눈가랑 머리를 팔뚝으로 길게 덮고는 무기력하게 늘어진 모양새가 풀죽은 강아지 같았다. 이렇게 집도 넓고 커리어적으로도 잘나가는 사람한테 내가 그런 감정을 품어도 되나 싶지만, 강태양이 뭔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에휴, 어떡해….

그동안 사소한 스킨십이라도 강태양의 몸이 닿을라치면 기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강태양의 어깻죽지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강태양은 손길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후으….

토닥토닥, 강태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두툼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 사람이 원래 누가 달래 주면 서러운 법이지.

사실 목걸이 하나 가지고 이럴 일인가 싶기는 하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강태양은 진심으로 속상해 보였다. 강태양한테는 많이 소중한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부모님 유품을 잃어버렸다면 비슷한 반응이었을 테니.

상상하자니 아득한 기분이라 덩달아 역시 막막함에 젖어 들었다. 퀘스트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강태양에게 도움이 있다면 좋을 텐데…. 곰곰이 고민에 잠기는데, 문득 짚이는 곳이 있어 머릿속이 순간 반짝거렸다.

“아, 태양이 !

“…어, .

“나, 왠지 목걸이가 어디에 있는지 같아!

              

#32

“뭐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강태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단박에 말도 되는 이야기라고 느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러면서도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얼핏 스쳐 가는 기대감은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형, 우리 같이 병원에 같이 볼래?

“…그쪽에 있는 로커 같은 확인해 봤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민주를 찾아가면 답이 나올 같아서 그래.

“내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 민주가 안다고? 걔가 도둑질이라도 했다는 거야?

민주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태양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강태양은 내가 아이를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리고, 작게 심호흡했다.

“아니, 민주가 도둑질을 했다는 아니라.

“아니면 뭔데?

지난번 만났을 민주는 강태양이 몸처럼 차고 다니는 은빛 목걸이에 유난히 눈독을 들이며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때 민주의 얼굴에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친밀해져 버린 나와 강태양에 대한 서운함이 물씬 묻어 있었지.

“아 그게, …으! 말로 하기엔 복잡해. 일단 따라와 보면 알아.

하지만 이런 짐작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무작정 팔을 뻗어 강태양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아든 강태양은 여전히 나의 말을 미심쩍게 여겼다. 하지만 집안을 온통 들쑤셔 놓아도 목걸이가 나오지 않았으니, 그로서도 순순히 따라 나오는 외에는 별수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강태양의 레인지로버를 타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평소 강태양과 같이 있을 때에는 오디오가 비는 적이 없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입술을 고집스레 다문 강태양은 냉랭한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했다. 적막한 차량 내부에는 창밖으로 바람이 스쳐 가는 소리만 씽씽 울렸다.

조수석에 숨죽이고 앉은 나는 괜한 초조함으로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 목걸이가 민주한테 없으면 이거 내가 큰일 나겠는데…. 그치만 민주가 목걸이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소독약 특유의 얼얼한 냄새가 코끝을 맵싸하게 찔렀다. 반팔 셔츠 아래로 오싹하게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소아 병동으로 걸어갔다. 평일 오후라서인지 복도는 한산했다. 따박, 따박, 발짝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희고 매끄러운 바닥에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나마 봉사 활동을 위해 찾아왔을 때에는 외부인이 있어서 그런가 활발한 느낌이 있었는데….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쪽을 흘긋 쳐다보니 아이가 오랜 투병에 신물이 났는지 더는 항암 치료를 받기 싫다고 악을 쓰고 있었다. 지치고 피로한 기색의 엄마는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잖아, 형은 그렇게 아이들을 많이 좋아해?

마음이 아파져서 고개를 떨구듯이 느리게 돌렸다.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강태양의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시선의 초점이 곳을 향해 있는 강태양의 다부진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질문했다.

“그거야 당연한 아닌가? 이래 봬도 내가 유니세프 홍보 대사잖아.

“아, 뭐래 진짜.

“어, 이거 봐라. 믿네?

, 너털웃음이 터뜨려졌다. 당연히 실없는 농담인 줄로만 알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자 강태양이 제법 억울한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더니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을 쪽으로 건넸다.

“나 지난번에 한국 대표로 에콘 음부부랑 디에고랑 같이 사진 찍었다고.

화면에 떠오른 사진에는 강태양이 유니세프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연하늘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강태양만큼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근육질의 외국인 남자들이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강태양이 저렇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반응을 기다리는 보니, 유명한 축구선수들인 걸까?

나로서는 쟁쟁한 선수들이 초면에 불과했다. 지난번에 미술관에서 봤던 화가 프란츠 베르하르트도 그렇고, 공략 캐릭터들을 제외하면 게임 세계관은 현실과 유명 인사들을 공유하는 같았다. 그러나 현생에서도 축구에는 문외한인 나는 강태양이 원하는 만큼의 격렬하게 감탄할 없었다.

“오, 그렇구나. 완전 대단하다, !

“와, 그렇구나. 연우주 완전 영혼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 누군지 몰라서 그래.

“허, 월클 선수들인데 모른다고? 그보다 우주 나한테 너어무 관심이 없는 아니냐?

“아니, 지난번에는 흑심 품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제는 내가 형한테 관심이 너무 없다고?

“어허, 내가 나한테 흑심을 품지 말라고 적은 없지. 오해는 했지만, 우주 흑심이라면야 언제나 환영인데?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가 싶어 볼멘소리를 했더니, 능글맞게 맞받아친 강태양이 눈을 찡긋거렸다. , 말해 진짜. 도무지 강태양에게는 말로 당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에 있을때는 엄청 스트레스 받아 하더니, 밖에 나오니까 조금이나마 환기가 것처럼 보였다.

“어, 벌써 왔다. , 민주 지금 여기 있는 맞겠지?

“면회 가능 시간인지 확인해 보고 올게, 기다려.

소아암 병동에 도착하자 강태양은 익숙하게 데스크로 향했다. 간호사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는 같더니, 얘기가 끝났는지 면회실에서 민주를 기다리자고 했다.

면회실의 책상은 아이들을 배려해서 높이가 낮았다. 벽면에 있는 삐뚤빼뚤한 그림과 선반에 늘어선 헝겊 인형들 역시 이곳이 소아암 병동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녹색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양옆이 귀처럼 삐죽이 올라온 분홍색 털실 모자를 꼬마 아가씨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치, 태양 오빠가 우주 선생님이랑 같이 거예요?

살짝 상기된 얼굴의 민주가 강태양을 찾아 면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옆에 자리한 나를 발견하고는 금세 다시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품에 안긴 인형을 힘주어 끌어안고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서 같이 들어온 거야.

“…정말요?

“응. 선생님이 여기 대학교 학생이잖아, 민주 몰랐어?

그런 민주를 일부러 쪽으로 끌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는지, 민주가 돌리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다시 쪽으로 향했다. 나를 보며 마냥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못하는 , 어린 마음에 나름대로 착잡한 모양이었다.

“근데 오빠랑 선생님이랑 오늘은 갑자기 보러 왔어요?

“아, 그게 말이야 민주야. 민주가 태양이 형을 도와줄 일이 있어서 그래.

“제가 태양 오빠를 도와준다고요?

“응, 이건 우리 중에 민주만 있는 일인 같은데.

“…일단 얘기 봐요.

의견에 따라 병원까지 오기는 했지만 강태양은 정작 민주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소파 쿠션에 등을 기대어 앉은 강태양은 팔장을 뒤로 물러났다. 어디 한번 보라는 식이었다.

“민주야, 혹시 태양이 형이 맨날 하고 다니던 목걸이 있어?

“…….”

“크기는 정도? 은색 얇은 판으로 되어 있는 거고.

“아, 아니요? 민주는 그런 하나도 모르는데요?

입에서 목걸이 이야기가 나오자 화들짝 놀란 민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표정을 감추려 애썼지만 간신히 대답하는 목소리는 엉망으로 벌벌 떨렸다. 역시 아이라서인지 태연함을 능숙하게 가장할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어쩌면 좋지? 목걸이, 태양이 형한테 아주 소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인데….

“…아.

“어제저녁부터 계속 찾았는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태양이 형이 엄청나게 슬퍼하고 있었어.

말을 마친 나는 팔꿈치를 들어 옆자리에 있는 강태양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움찔한 강태양이 도톰한 입술을 작게 벌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민주는 우리 누구와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고 있지 못했다. 강태양 역시 그런 민주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 우주 말이 맞아. 오빠 어제오늘 엄청나게 속상했어.

“진짜로요?

“응. 목걸이, 소중한 사람이 오빠한테 거라서, 이제 다시는 새로 수도 없는 물건이거든.

강태양이 특유의 쇼맨십을 발휘해 섭섭함을 잔뜩 실은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민주의 동공에 강력한 지진이 일고, 입가가 빠르게 씰룩거렸다. 고요한 표면 아래 소녀의 마음속에는 대단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불안하면서도 서럽고, 두려워서 엄청나게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민주도 모르면 어쩔 없고.

“아… 히잉….

“태양이 , 그러면 우리는 이번에는 재활 훈련실로 볼까?

“그래 . 목걸이는 영영 잃어버렸나 보네.

, 그런 민주의 반응을 전혀 모른 능청스럽게 질문했다. , 그러자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 강태양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럴 때는 호흡이 맞아서 다행이란 말이지. 털썩,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양이 어깨에 팔을 길게 둘렀다.

“저기….

그대로 민주를 남겨 두고 돌아서려 , 뒤쪽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양 오빠 목걸이, 실은 민주한테 있어요.

              

#33

강태양의 얼굴이 당혹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나에게 장단을 맞추면서도 정말 민주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 강태양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민주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흑, 쪼끔만 있다가 원래 돌려놓으려고 했었는데….

민주는 울먹거리면서도 나름의 이유를 설명해 보려 했다. 그러다 목이 메는지 중간에 말을 멈추더니,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민주가 태양 오빠랑 병원에서 일등으로 친했었단 말이에요. 태양 오빠는 저를 가장 좋아했는데….

“…….”

“그런데 태양 오빠는 자꾸 우주 선생님만 보면 예쁘게 웃어 주고, 민주는 병원 밖에 나갈 수도 없는데 민주만 빼놓고 둘이서만 만나고….

아니나 다를까, 나와 강태양을 소개시켜 민주는 정작 우리 사람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친해지자 묘하게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굵직한 눈물 방울이 민주의 볼을 타고 , 흘러내렸다.

사실 민주는 강태양에게 나를 소개해 주고 싶었던 아니라, 자신이 빨리 자라서 태양 오빠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었던 아닐까.

“여기… 이거요.

민주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병원복 주머니 안을 뒤적거렸다. 이내 강태양에 대한 소유욕을 비뚤어진 방향으로 표출한 꼬마 숙녀가 주머니 깊은 곳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꼬물거리는 손이 강태양에게 슬그머니 목걸이를 건넸다.

“아!

그를 덥석 받아든 강태양이 은빛 플레이트를 허공에 들어 올려 이리저리 비췄다. 다행히 목걸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지, 강태양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민주는 초조한 기색으로 강태양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야, 오빠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인데 말도 하고 가져가면 어떡해.

강태양은 짧게 심호흡을 마치고 민주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게 도리어 애써 꾹꾹 눌러 오던 민주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소리 없이 줄줄 흘러넘치는 눈물을 손등으로 슥슥 닦아 민주가 , , 작게 딸꾹질했다.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요. 그리고, 말도 하고 가져가려고 했던 아니라….

민주는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발을 종종거렸다. 혹시라도 이번 일로 인해서 강태양이 자기를 미워하기라도 할까 겁이 나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민주야.

보다 못한 내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민주와 시선이 비슷해지도록 몸을 아래로 낮추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민주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눈가가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라 토끼눈을 민주가 옆을 돌아보았다. ‘얼른 미안하다고 , 강태양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민주에게 작게 속삭였다.

“오빠 미안해요… 민주가 잘못했어요.

민주는 고개를 아래로 중얼거리며 사과했다. 얼굴이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이었다. 그래, 민주도 목걸이가 강태양에게 그렇게까지 소중한 물건인 줄은 상상조차 했겠지.

“괜찮아. 용서해 줄게.

“헉, 진짜예요 오빠?

“대신 이번 번만이야. 다음번에는 절대 그러면 .

“네에….

“오빠 물건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 물건도 마찬가지야.

그런 민주의 작달막한 머리통 위로 강태양의 손등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다시금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린 민주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던 민주의 얼굴도 금세 맑게 갰다. 어느새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고 약속까지 하고 있었다.

“아후, 다행이다.

그렇다면야…. 이번 돌발 퀘스트도 무사히 클리어한 건가? 나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민주가 목걸이를 가져간 아니었다면, 강태양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을 것이다. 적어도 호감도가 5 정도는 떨어지지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듯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퀘스트 완료 창이 뜨는 거지? 흘긋 쳐다보니 강태양 머리 위에 있는 호감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오빠 근데요, 그러면요.

“응, 말해 민주야.

“있잖아요, 나중에 크면 민주랑 결혼해 주면 돼요?

옆에서 사람이 한참 오순도순 이야기하나 싶더니, 민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태양에게 대담하게 프러포즈했다. 처음에는 눈을 휘둥그레 뜨던 강태양은 이내 반사적으로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 냈다. 농담처럼 받아들이면 지금 순간 진지하다 못해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민주에게 커다란 상처가 분명했다.

“흠. 지금으로서는 답변하기가 곤란한데….

“힝, 왜요오…. 오빠는 민주가 마음에 들어요?

“음, 나중에 민주가 이만큼 크면 다시 생각해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하던 강태양이 자신의 가슴 부근에 손등을 하니 올렸다. 이야, 어른이 돼도 저만큼 키가 크려면 거의 모델 급은 되어야겠는데?

“으음…. 얼마큼 지나면 민주가 그만큼 있어요?

“글쎄, 적어도 정도는 자야 같은데?

“아….

“그동안 파프리카도 많이 먹고 편식 해야 빨리 있어.

그럼에도 파프리카는 어지간히 싫은지 민주가 히끅, 딸꾹질했다. 이어 양손을 활짝 펴고 ‘천 밤이면 얼마나 많은 거지’ 작게 중얼거렸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포기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강태양과 결혼하겠다는 다짐은 접지 않았는지, 민주는 저를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는 강태양에게 맹렬하게 눈을 빛냈다. 온동네 소문이 파다한 바람둥이가 꼬맹이 마음에까지 불을 질러 버린 모양이었다.

좋은 좋은 거라고, 어쨌든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서 한숨을 돌렸다. 아쉬워하는 민주에게 인사를 마저 건네고 강태양과 나란히 소아암 병동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목걸이 무사히 찾아서 다행이다.

“연우주 .

“어, ?

“민주가 목걸이 가져갔던 , 대체 어떻게 알았냐?

“마음만 먹으면 꼬시는 사람이 없다면서,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서 어떡해.

,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자 강태양의 얼굴이 바짝 가까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강태양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그대로 손을 뻗더니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탈래? 데려다줄게.

강태양만큼 공들인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정리한 앞머리인데! 흐트러진 머리칼을 슥슥 쓸어내리자,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강태양이 질문했다.

“아… 그럴까?

사실 기숙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아서…. 대학 병원에서는 충분히 걸어서 이동할 있는 거리였지만, 조금 고민하다가 강태양을 따르기로 했다. 가는 길에도 내내 주거니 받거니 투닥거리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 특유의 눅눅한 공기를 가로지르며 나아간 강태양이 청록색 레인지로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 잠금이 해제되었다. 먼저 운전석에 앉은 강태양을 뒤따라 역시 차에 올라탔다.

강태양은 그대로 시동을 켜는 대신 전면 유리를 묵묵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지하 주차장은 사방이 캄캄한 어둠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반짝일 때마다, 형광색으로 굴절하는 미약한 빛이 강태양의 잘빠진 옆선에 어룽어룽 스며들었다.

“…….”

“…….”

실내에는 머스크 향수의 서늘한 잔향이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차량 내부에는 밑바닥에 용수철이 달린 축구공 피규어가 이따금 스스로 튀겨지는 외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섣불리 말을 걸기 어려운 적막이 우리 사이를 가득 메우자, 공기의 밀도가 한층 빽빽해진 것만 같았다. 혀끝이 따끔따끔해지는 긴장감에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 양손을 괜히 한번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손바닥에 땀이 연하게 고여 있었다.

“아, 이거 목걸이 내가 걸어 줄까?

“네가 나한테 걸어 준다고?

그러고 보니 강태양의 목덜미가 아직 민둥민둥하게 비어 있었다. 그를 알아차리고 질문하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강태양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어둠 사이로 강태양의 눈빛이 유달리 형형하게 빛났다.

“왜… 싫어?

소중한 목걸이를 잃어버릴 뻔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오늘 강태양 나한테 너무 까칠한 같다. 소심하게 되묻자, 말에는 가만히 있기만 하는 싫은 아닌 듯했다. 불쑥, 콘솔 박스 너머로 뻗어온 강태양의 손바닥 위에 민주한테 돌려받은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

“…….”

목걸이를 받아 들고 강태양 쪽으로 몸을 길게 기울였다. 가느다란 은색 줄을 양손에 들고 걸어주려 하자 강태양은 단단한 목덜미를 협조적으로 내밀어 왔다. 이음매를 끼우려 낑낑대는 동안 뾰족뾰족하게 세운 강태양의 머리카락이 끝에 살짝살짝 스쳤다.

<SYSTEM> [돌발 퀘스트]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아라”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강태양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17]

공중에 떠오른 하트가 부르르 길게 진동했다. 아래 강태양은 새까맣게 색이 짙어진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되게 중요한 거였나 보다. 첫사랑이 거인 알았네.

목걸이가 제대로 걸린 것을 확인한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의 이유 모를 긴장감이 무색하게도, 퀘스트가 무사히 끝나자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 터지려는 웃음을 입꼬리 안으로 말아 삼키고 모른 강태양에게 농담을 걸었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건데.

, 나는 그때 읽었던 기사가 생각나서 장난치려고 말이었는데…. 강태양의 남자다운 얼굴에 삽시간에 어두운 그늘이 내렸다.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에 말실수라도 건가 싶어 심장이 뜨끔해졌다.

“아… 혹시 어머니가 어렸을 돌아가셨어?

“나 고아야. 어렸을 시설에서 컸어.

              

#34

순간 당황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강태양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내 기사도 찾아봤다면서, 그것까진 모르고 있었나 ?

강태양은 별일 아니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단단하고 매력적인 갑옷 아래 숨겨진 여린 구석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아….

그렇게 아이들에게 특히 마음을 쓰고 있는지, 황량할 정도로 넓은 집에 혼자서만 살고 있는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강태양의 행동들이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있잖아, 형….

섣불리 말을 얹어서는 되겠지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자 강태양이 나를 흘끔 돌아보았다. 사납게 몰아붙이는 태도와 대조적으로, 찰나의 동요가 스쳐 얼굴이 사실은 이해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착각인 걸까.

“나도 부모님이 계셔! 내가 열세 ,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

“그다음부터는 계속 친척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고, 그랬었거든.

강태양이 미간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아니 그러니까, 불행 대결 하려고 전혀 아니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같다?! 강태양의 아픔에 공감해 주고 싶은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정작 밖으로 빠져나온 말은 서툴게 삐거덕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연우주 말은 .

“그,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런 사정이 있으니까 마음도 안다, 그런 얘기가 절대 아니라!

“…….”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똑같은 경험을 적이 없는데. 그래도, 그런 걸로 편견 가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 형한테 말해 주고 싶었어.

얼떨떨 혹은 떨떠름, 어느 쪽일까. 다소 놀란 기색의 강태양이 자리에 얼어붙었다. 대답 대신 물끄러미 나를 향하는 동공이 느릿하게 팽창했다. 아무리 공략캐라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만난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인데…. 주제넘는 말인가 싶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22]

부르르-. 강태양 머리 위에서 진동하는 하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호감도가 5% 상승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강태양의 얼굴 표정 역시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너같이 대책 없이 밝은 애한테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느긋하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강태양이 , 내뱉었다. 강태양의 묘한 화법. 이번에는 칭찬이야 욕이야…? 방금 전에 하트가 올라간 보니 칭찬이라고 봐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불쑥 손을 뻗은 강태양이 볼을 잡아 늘였다.

“아, 아흐자나….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

“아냐 뭐…. 혼자만 고생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부루퉁해진 얼굴을 보고 한참을 킥킥대고 나서야 강태양은 뺨을 놓아주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강태양의 얼굴도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서늘한 향기와 맥박 소리가 감도는 차량 실내에 옅은 숨결이 번져 나갔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런 얘길 누구한테 보는 처음이네.

“아… 정말?

“뭐 알음알음 퍼졌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원해서 직접 하는 거는.

“…….”

“사람들이 우습게 알았거든.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인데,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되잖아.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올린 강태양이 웃어 보였다. , 나는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강태양이 대체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말을 듣고 나니까 이해할 없는 불가사의처럼 느껴졌던 강태양에게 마음이 열리고… 오히려 애틋하게 느껴지는 같은데.

나와는 전혀 다를 같았던 사람에게 뜻밖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자 인간 강태양에 대한 호기심이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뭐해. 주소 찍어.

“어, 어어?

“집에 데려다 준다고 놓고 정줄 놓고 있었네.

부르릉, 차량에 시동을 강태양이 내비게이션을 향해 끝을 까딱였다. 마찬가지로 정신을 팔고 있었던 나도 서둘러 화면에 주소를 입력했다.

강태양은 야성적인 생김새의 SUV 능숙하게 운전했다. 레인지로버가 지하 주차장을 매끄럽게 빠져나가자, 환하고 밝은 빛이 전면 유리를 타고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있잖아 , 아까 에콘 음부부…? 이름 특이한 사람, 유명한 축구선수야?

“당연하지. 나이지리아 선수인데 작년에 발롱도르도 받았어.

“아아… 그렇구나.

“연우주 이거 발롱도르도 뭔지 모르네. , 음부부 연봉이 년에 천억 원이 넘는다고.

“히익, 축구선수들 진짜 많이 버는구나.

“딱 기다려 . 나도 년만 있으면 해외 진출해서 그만큼 있어.

밝은 낮의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로 평소처럼 잘난 척하며 강태양이 호언장담했다. 하긴, 강태양의 넘치는 자신감에는 충분히 근거가 있어 보였다. 어찌 됐든 다급하고 초조하게 병원을 향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경쾌한 드라이브를 즐길 있게 되었다.

“여기서 세워 주면 ?

“어, 응응!

, 드라이브라기에는 코앞에 닿을 듯한 거리라서 너무 금방 기숙사에 도착해 버렸지만 말이다. 문을 열고 내리려던 때였다. 연우주, 나지막이 부르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연우주.

“응?

“우리 집에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뭐, 하룻밤 상대를 제외하면 말이지.

“헉… 그게 정말이야?

“다음번에 놀러 . 그땐 맛있는 거라도 같이 먹자.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 강태양은 여전히 단단하게 핸들을 쥐고 있었다. 문을 반쯤 열어젖힌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수요일 교양 수업을 마치고는 콘텐츠 촬영을 해치우기로 했다. 당장 조별 과제 발표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셋이서 나란히 도서관으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희연이에게 조별 과제의 핵심인 동영상 콘텐츠 기획을 전부 맡긴 과연 잘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대본 보면 알겠지만, 주된 촬영 장소는 도서관이야. 그런데 실내에서만 영상을 촬영하면 아무래도 칙칙할 있을 같아서, 엔딩 부분은 야외에서 촬영할 거야.

“…….”

“도서관에는 촬영 협조 미리 구해 뒀고. 야외 컷은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잔디밭에서 찍을 건데, 시쯤 나가면 빛이 제일 예쁘게 들지 않을까 싶어. 오는 길에 내가 캠코더 괜찮은 물건으로 하나 빌려 왔으니 이걸로 촬영하면 .

“…….”

“나도 마찬가지고, 다들 바쁘니까 촬영은 한나절 안으로 마무리하는 걸로 보자.

그러니까, 장희연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동영상 촬영을 맡겼지만 이런 것까지 기대했던 아닌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뿐이었다. 그러다 발짝 늦게 장희연이 건넨 시나리오를 읽어 내렸다.

5 남짓의 짧은 영상이어서 대본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넘버를 매긴 것부터 시작해서 특수 효과까지 구성이 너무 본격적이었다. 그보다 이라윤이 제안한 주제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거부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대본에 풀어 것은 더더욱 놀라웠다.

“와…. 진짜로 우리 도움이 하나도 필요한 거였네?

아니, 분명히 회의 하는 내내 우리 얘기를 듣는 마는 트위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같은데 대체 언제 이렇게…? 이래서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건가? 하긴, 지난주에 회의를 때에도 장희연은 나에게는 무임승차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대포여신이었겠지.

“희연 선배, 이걸 이틀 만에 혼자서 거예요?

“희연아 진짜 대단하다. 완전 능력자였구나!

“별걸 가지고 . 시간 없으니까, 빨리 읽어 보고 이해 되는 부분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

카리스마의 완성은 엄청난 업무량을 해내고도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 전혀 생색내는 기색 없이 마치 당연히 해야 일을 했을 뿐이라는 초연한 태도였다.

, 장희연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구나. 잠시나마 희연이를 의심했던 나를 반성하며 나머지 시나리오를 읽어 내렸다. 이대로라면 나는 희연이가 태워 주는 버스에 안전벨트 매고 탑승하는 아닌가?

“잠깐만. , 시나리오에 라윤이랑 나랑 뽀뽀하는 것도 있어?

“실제로 입술이 닿을 필요까진 없어. 각도랑 맞춰서 촬영하고, 편집을 교묘하게 하면 되니까.

이라윤, 연우주 키스라니? 대본의 마지막 줄을 확인하자 동공에 절로 지진이 일었다. 화들짝 놀라 캐묻자 장희연이 너무 태연하게 대답하는데… 순순히 납득해 버릴 뻔한 뇌에 힘을 주고 겨우 참았다. 지금 편집을 잘하면 되는 , 문제가 그게 아니잖아!

              

#35

“그치만, 너무 도발적인 아니야? 이거는 대학교 조별 과제인데.

“연우주, 평가 항목에 동료 평가 있는 몰라? 시선을 , 사로잡을 만한 엔딩이 있어야 절대 다수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 있다고.

대체 장희연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조별 과제에 진심이 되어 버린 걸까? , 물론 좋은 일이긴 하지만 슬슬 나조차도 감당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SNS 네임드인 장희연이 적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있어서는 게임 공략을 헤매고 있는 나보다는 위겠지….

“그래서 사람, 아이스크림은 같이 먹었어?

“으, 으응….

“그래, 그래 잘했어. 역작이 탄생하려면 무엇보다 연우주 이라윤의 케미스트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그렇지만 역시 키스는 좀…. 정작 유심히 대본을 숙지하는 이라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게임 공략 플레이어로서 비즈니스 모드가 완벽하게 장착되지 못한 나만 머뭇거렸다. 그를 알아차렸는지 장희연이 등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달랬다.

그래, 이게 조별 과제 A 받자고 하는 일이니까. 이를 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프집업 스웻셔츠를 가볍게 걸친 장희연이 대포 카메라를 들고 제대로 각을 잡았다. 영상의 번째 장면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라윤이었다.

“와, 라윤이 멋지다!

모델 활동도 적이 있는 이라윤은 카메라를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오버핏 사이즈의 7 라글란 티셔츠, 사실 정말 별다를 없는 기본 템인데 이라윤이 입어서인지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남달라 보이는 스타일에 절로 시선이 갔다.

“연우주, 이제 화면 안으로 들어오면 ~

그리고 다음 촬영 순서는 나였다. 한나절에 끝내겠다는 장희연의 자신만만함도 있었거니와, 아무리 공들인다고 봐야 결국은 대학교 조별 과제를 위한 영상이었다. 시작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스무스하게 넘어갈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우주야, 그렇게 하면 되지.

“앗, 아까 어색했어?

경영학 개론을 읽고 있던 이라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딸기 우유를 들고 책상에 가까워지는 장면이었다. 한데 모은 양손에 딸기 우유를 들고 쭈뼛거리는데, 캠코더에서 고개를 떼어 장희연이 자유로운 왼손을 휘휘 내저었다.

“대본상에서 너랑 라윤이는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니잖아. 수줍은 듯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지!

깐깐한 디렉팅에서는 본인의 역량으로 반드시 역작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장희연의 의지가 엿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결국 판에 장희연을 끌어들인건 나고, 장희연은 지금 조별 과제를 하드캐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남짓한 도서관 촬영만으로도 진이 빠졌는데, 잔디밭으로 나가서 야외 촬영에 돌입하자 더한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샤랄랄라한 영상을 찍겠다는 장희연의 말처럼, 파릇파릇한 잔디밭 위로는 싱그럽게 잎을 틔운 배꽃 나무가 나뭇등걸을 길게 드리웠다. 흐드러지는 나뭇가지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잎사귀가 하늘하늘 흩날렸다.

“우주 선배, 그럼 우리 지금부터 시작할까요?

카페 라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라윤이 속삭였다. 은은하게 풍기는 좋은 냄새와 함께 코끝이 닿을 것처럼 이라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찔끔 긴장이 되어 눈을 내리감았다.

“컷!

입술이 닿기 직전에 마지막 장면의 커트 사인이 내려왔다. 소리를 듣고 나서야 질끈 감았던 눈을 겨우 다시 떠올렸다. 그런데 느릿하게 뒤로 물러나는 이라윤의 얼굴에 희미한 아쉬움이 감도는 같은 건…. 설마, 지금 진심 아니지 라윤아?

“아이고, 이제 촬영 끝난 건가?

엔딩 장면은 그러니까 동영상 끝부분에 짤막하게 붙는 일종의 쿠키 영상이었다. 보다 자연스럽게 이라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게 연우주와, 그런 연우주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이라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

잔디밭에 길게 누워 있는 나를 향해 이라윤이 위에서 아래로 고개를 숙이면서, 볼을 가볍게 거머쥐고 키스하는 것처럼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는 장면이었다.

연애 시작을 이렇게 하는 커플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반발해 보았지만 장희연은 단호한 얼굴로 미장센을 위한 연출이라며 정리했다. 믿었던 이라윤마저 생각에도 엔딩은 정도 임팩트가 있어 줘야 같다며 장희연을 거들었다.

그래도 이제 전부 끝이야! 정도면 조별 과제에서 무난하게 A 받을 있겠지? 힘든 촬영에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하게 고여 들어 있었다. 그를 닦아 내면서 겨우 한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희연 선배, 번만 촬영하면 어때요?

“응? ? 정도면 괜찮은 같은데.

아니, 희연이도 오케이 사인을 내렸는데 대체 ? 잔디밭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방금은 옆선 위주로 찍었는데, 아무래도 우주 선배 얼굴이 드러나는 버전도 있으면 좋을 같아서요.

“아… 그런가? 하긴, 아무래도 시청 층이 눈으로 즐기고 싶은 라윤이 옆선이겠지만, 이입하고 싶은 우주의 감정 상태이긴 테니까 말야.

“어느 쪽이 나을지야 봐야 알겠지만, 희연 선배가 나중에 편집하면서 좋은 장면만 살려도 되고요.

정말 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필요는 없다는 마음을 담아서 간절하게 이라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열정도 전염이 되는 것인지 이라윤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 장희연처럼 동영상 촬영에 진심이 되어 있었다.

“뭐야, 이라윤. 이런 생각도 알고, 완전 기특하잖아?!

“하하.

“혼자서 고고하게 구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덮어쓴 볼캡 아래로 눈을 반짝 빛낸 장희연이 껄껄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 카메라 들고 있느라 힘들 텐데, 지친 기색 전혀 없이 다시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렇게 완벽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이 어떻게 조별 과제를 그렇게까지 대충대충 있었는지, 이제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해질 지경이었다.

“아오… 힘들어 죽겠다. 라윤아, 찍자구 그랬어. 그냥 넘어가도 충분히 괜찮을 같은데”

“하하, 우주 선배 잘하고 있는데 그래요.

“…라윤이 지금, 달래려고 마음에도 없는 하는 거지?

“아니에요. 진짜 설레게, …잘하고 있어서 그런데.

“…….”

“이제 거의 마지막이니까 끝까지 마무리해 봐요.

힘내라는 , 이라윤이 생수를 꼴깍꼴깍 마시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다시금 잔디밭에 길게 눕자, 옆에 앉은 이라윤이 섬세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카메라에 얼굴을 박은 장희연이 촬영 시작 사인을 보냈다.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도 일이지만, 어쩐지 선배라면 괜찮을 같아요.

나지막하면서도 강단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정선에 흠뻑 몰입한 이라윤의 표정이 진지했다. 정말로 감정에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처음 느껴 보는 설렘을 붙들어 보려고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우수 어린 얼굴이 사람에게만 오롯이 집중해 왔다. 그러자 역시 대본의 설정대로 이라윤을 짝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줍으면서도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이라윤이 팔을 들어 올렸다. 희고 곧은 손가락이 머리칼을 매만질 것처럼 가까워지더니, 대신 조금 아래로 내려와서 도톰한 귓불 부근을 스쳤다.

“흣….

잠깐만, 이건 대본에 없던 내용인데? 당황으로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뺨에 발긋하게 열이 오른 이라윤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 배우로서 캐릭터 해석을 덧댄 건가? 물론 흐름 적절하기는 한데…. 이라윤한테 원래 이런 면이 있었는지, 전에 없이 저돌적인 이라윤의 태도가 낯설게 다가왔다.

“라윤아….

달싹이는 목소리를 내뱉자, 귓가에 있던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볼을 사르륵 감싸 쥐었다. 그대로 이라윤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흉곽에 빠듯한 느낌이 차올랐다. 뻐근하게 부풀어 오른 심장이 , , 뛰어올랐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장희연은 내가 처음부터 눈을 감고 있으면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라윤을 숨죽이고 응시하면서 눈꺼풀만 파르르 떨고 있다가, 입술이 닿기 직전에 마치 받아들이듯이(?) 눈을 감아야 한다나.

그래서 바투 다가오는 이라윤의 얼굴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우리 라윤이 속눈썹이, 길고 촘촘하기도 하지. 일부러 딴생각을 하면서 주의를 분산해 보려고 했지만, 코끝이 닿을 같다는 생각에 자동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흡….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라는 알고는 당황해서, 입술을 다물고 안으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컷!

[️32]

소리에 눈을 다시 떠올리자 이라윤의 호감도가 3% 올라 있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추스르느라 호감도에 신경을 겨를도 없었다. 어휴, 이라윤이랑 영상 찍었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어떻게 나왔어?

“아, 이렇게 봐서는 모를 텐데. 그래도 느낌만 .

이제 정말 촬영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궁금한 마음에 짐을 챙기고 있는 장희연에게 빼꼼 고개를 들이밀자 장희연이 흔쾌히 카메라를 내게 건네주었다.

“와아….

카메라에서 이라윤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장면이 재생되었다. 작은 화면이지만 영상 퀄리티가 놀라운 수준이라는 것만은 있어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피사체가 워낙 출중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이렇게 찍을 있는 아닐 텐데….

“어때요, 우주 선배. 나왔어요?

이라윤이 영상을 보고 있는 알아차리고는 뒤로 살랑살랑 다가왔다. 저보다 키가 약간 작은 어깨 위에 끝을 슬그머니 올리더니 손바닥 절반만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 완전 나왔어. 우리 라윤이 세계 최고 미남이야.

“선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빨간 하트를 머리 위에 매단 이라윤이 사르르 웃어 보이자 , 절로 숨을 삼키게 됐다. …라윤이가 묘하게 적극적이 확실히 맞지? 게임 공략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지만, 심장 건강에는 그다지 이롭지 않았다.

“렌더링이랑 영상 편집은 내가 알아서 테니까 너희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있어.

“아, 고마워 희연아!

“조현수인가 조현태인가 선배 발표 자료에 참고할 있도록, 최종본은 토요일 저녁까지는공유할게.

이라윤의 손에서 카메라를 거두어 장희연이 위풍당당하게 오늘의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럼요, 희다르크님 말만 따르겠습니다! 뜻밖에도 조별 과제가 술술 풀려 나가다니 마음이 가뿐해졌다.

좋았어, 이건 진짜 없다! A 받을 수밖에 없다구! 결과 얻어 추가 호감도 10 생각하자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답답하고 막막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이불에 발차기를 팡팡 하게 같았다.

              

#36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대망의 조별 과제 발표일이기도 했다.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22 (남은 시간: 77 22시간 58)

 

학교에 가기 거울을 확인하자 익숙한 안내창이 나란히 떠올랐다. 아니, 벌써 플레이 22일차나 됐어?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나 싶었다. 새삼 놀라게 되는 기분에 핸드폰을 열어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이라윤 (20)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

호감도 [32/100]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22/100]

 

다행히 지난 며칠 간은 호감도 수치를 차곡차곡 쌓았다. 정도면 아주 여유롭다고는 없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게임 공략 진행 상황을 확인하자 더더욱이나 조별 과제 퀘스트를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라윤 루트 공략에도 탄력이 붙지 않을까?

***

“사랑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그로써 여성 역시 남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표현을 덧붙이더라도 본질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이렇듯, 독점이라는 사랑의 속성에 의문을 던지는 폴리아모리는 가부장제와 이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억압에 대한 통쾌한 방이 있습니다. 저희 조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조가 발표를 마무리하고,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으며 영혼 없이 박수를 쳤다. 바로 다음 순서가 우리 조라서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발표를 내가 하는 아닌데도 슬슬 긴장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음은 5조인가요? 조현수 연우주 이라윤 장희연, 발표 시작해 주세요.

조현수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발표 자료가 띄워진 스크린 앞으로 나섰다. 발표자를 맡게 되어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지 평소와 다르게 멀끔한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5 조장인 사회학과 4학년 조현수입니다. 저희 조는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한 연애 꿀팁’이라는 주제로 내용을 준비해 봤습니다. 발표에 앞서 동영상 콘텐츠를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긴말 없이, 조현수가 곧바로 동영상 콘텐츠를 재생했다. 영상이 시작하자마자 주변에서 와아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봄날 캠퍼스의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색감이 차오른 대형 스크린이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이라윤을 한가득 담아 냈다. 카메라 앵글은 살짝 아래로 내리깐 눈부터 도드라진 턱선, 길게 뻗은 목덜미와 단정한 손가락까지 이라윤의 생김새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탐미적인 카메라의 시선 때문인지 화면 이라윤 역시 닿을 닿지 않을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미친… 이라윤 대존잘이잖아!

옆자리에 앉은 유한나가 흥분 섞인 목소리로 감탄했다. 반응에 괜히 나까지 뿌듯해지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에 내가 등장했다. 화면 연우주가 도서관 너머로 상기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이라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딸기 우유를 들고 소심하게 그가 앉아 있던 책상에 가까워졌다.

“헉, 뭐야 뭐야. 연우주 이라윤이랑 같이 영상 찍었어? 나한테 말도 하고!

“으웩, 니네 무슨 게이 컨셉 그런 거냐?

“아하하….

득달같이 쏟아지는 유한나와 황병열의 질문에 대답 대신 멋쩍게 웃었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장희연이 바로 전날까지 밤샘 편집을 했던 탓에, 나도 완성본은 이제야 처음 보게 됐다.

미술관의 조각상처럼 기품 넘치는 이라윤에 비해서 나는 꺼벙하고 어리숙하게 나온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커다란 영상으로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고….

“헐, 딸기 우유 주려고 아까부터 숨어 있었던 거야?

“이라윤 짝사랑남 그런 건가? 근데 누구야? 너무 귀엽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보니, 다행히 관중의 반응이 나쁘지만은 않은 같았다. 이어지는 동영상에서는 내가 지인을 통해 이라윤의 번호를 뒤에서 따로 알아내서, 딸기 우유는 맛있게 먹었냐고 이라윤에게 연락한다. 그에 당황한 이라윤이 나의 접근을 불쾌하게 여긴 탓에, 썸은 시작할 새도 없이 깨지고 만다.

그때, 되감기 표시가 화면에 떠오르면서 영상은 처음 내가 딸기 우유를 이라윤의 책상에 놓는 시점으로 되돌아 간다. 다시 주어진 기회에서, 이번에 나는 부끄럽고 초조하지만 용기를 내어 이라윤에게 직접 다가가 정식으로 나를 소개한다. 정면으로 직진해 나에게 이라윤 역시 호감을 보이고, 우리 사람은 시작하는 연인이 된다.

그리고 파격적인 엔딩 장면에 이르러서는,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눈으로 보겠어…. 그렇지만 내심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은 손가락의 벌어진 사이로 슬그머니 눈을 떠봤다. 잔디밭 위에 누운 나와 위로 상반신을 숙이는 이라윤이 보였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고!

“꺄악, 미쳤나 ! 방금 입술 닿은 맞지?

“동영상 퀄리티 대체 뭐야? 이거 우리끼리만 보기 너무 아까운데?

느릿하게 아웃 하는 카메라가 그런 우리 사람의 옆선을 아슬아슬하게 비췄다. 희연이가 정말 편집을… 교묘하게 잘했구나! 영상 내용을 이미 알고 있던 나까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술렁거리는 주변에서도 괴성에 가까운 격한 반응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연우주, 당장 해명해. 이라윤이랑 뽀뽀한 거야?

“아니야, 편집만 그렇게 보이게끔 거야!

“그래도 어쨌든 키스신이잖아? 부럽다, 나도 이라윤이랑 같은 조였으면….

눈썹을 이지러뜨린 유한나가 양손으로 어깨를 붙들고 짤짤 흔들어 댔다. 반면 황병열은 봤다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행히 강의실 뒤쪽에 비스듬히 있는 교수님은 입가를 빙긋이 끌어올리고 있는 듯했다.

열화와 같은 성원이 차차 가라앉자 큼큼, 목을 가다듬은 조현수가 발표를 이어 나갔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좋은 남자 친구가 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있는지, 방법을 모를 뿐이죠.

“…….”

“관계에 미숙하고, 가까워지고 싶지만 자꾸만 서툴게 행동하는 모습에 자괴감이 든다면… 나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번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면서 다가간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있게 거라고 믿습니다.

걱정과 달리 조현수의 발표 역시 무난하고 매끄러웠다. 아니, 단순히 무난하다고 하기보다는 말을 이어 나가다가 감정이 실리는 같은 게…. 묘하게 눈망울이 축축해진 조현수의 발표는 진정성 어린 한편으로 이유 모를 애잔함마저 묻어났다. 동영상 콘텐츠에 포악하게 환호하던 때와는 다르게 주변도 어딘가 숙연해져 있었다.

자료조사 발표: 조현수

기획 콘텐츠 출연: 연우주, 이라윤

콘텐츠 촬영 편집: 장희연

 

그리고 발표 PPT 마지막 슬라이드에 역할 분담이 떠올랐다! 동영상과 발표도 그렇지만, 간단한 텍스트 줄을 보는데 나는 괜히 뿌듯하면서도 울컥해졌다. 처음 조별 과제 회의를 했을 때의 아득함을 되새겨 보면, 정말이지 기적적인 성과가 아닐 없었다. 나에게만은 지금 순간이 오늘 조별 과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잠깐만요.

“네, 송재현 학생?

“그런데 5 발표는 주제랑 어긋나지 않나요? 지금까지 수업에서 다루었던 내용이라면, 서로 다른 성을 이해하는 거잖아요?

앞에서 번째 줄에 앉은 학생이 우리 조의 발표 주제에 의의를 제기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어떡하지….

역시 말에는 뜨끔했다. 바로 그게 걱정되어서 내가 장희연 대신 내가 카메라 촬영을 맡으려 했는데…. 때를 놓치지 않고, ‘맞아, 솔직히 이라윤 얼굴만으로도 치트키잖아. 이건 불공평한 .’이라는 결이 조금 다른(?) 불만까지 들려왔다.

              

#37

“교수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가 해도 될까요?

그때, 강의실 뒤편에 앉아 있던 이라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희 조에서는 다른 성별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맺는 하나의 관계까지가 이번 과제의 주제라고 봤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처음에 인간의 관계 형성 욕구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고요.

“…….”

“호감을 전제로 각자의 벽을 깨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성애도 이성애와 다르지 않습니다. , 최근에는 사회적으로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성문화 현상 하나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발표를 준비했는 줄은 몰랐는데, 좋은 포인트인데요?

“…….”

“확실히 최근에는 동성애를 단순한 성적 일탈 행위가 아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로 보는 추세이지요. ,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충분히 과제 주제에 맞아떨어지는 같습니다. 그럼, 이제 다음 발표로 넘어가 볼까요?

다행히 구원 투수처럼 등장한 이라윤이 교수님을 설득하는 성공했다. 평소에도 생각이 깊은 알았지만 이렇게 야무지게 대답을 잘할 줄이야! 내가 듣기에도 라윤이 말이 맞는 이야기였다. 불만스러운 낯빛을 하면서도 다른 학생들 역시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다들 바쁜 와중에 영상과 발표, 알차게 준비하느라고 고생 많았어요. 수업을 완성시키는 결국 학생인 여러분의 몫이기 때문에, 덕분에 같은 수업을 가르치면서도 매해 다른 경험을 있게 되네요.

“…….”

“특히 올해에는 신선한 시각과 독특한 해석이 많아서 좋았어요, 호호. 그럼, 점수는 채점 결과를 취합한 후에 개별적으로 전달할게요. 다만 전에, 특별히 인상 깊었던 조가 있어서, 공개적으로 칭찬하려고 합니다.

모든 조가 발표를 마치자 수업 시간인 시간이 채워졌다. 연단으로 걸어 나온 교수가 발표를 지켜보면서 메모하고 있던 채점지를 살펴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조현수 연우주 이라윤 장희연 소속의 5조입니다.

설마 우리 얘기일까 싶어서 적당히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뒷줄에 앉아 있는 이라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물론 주제 선정이나 동영상 콘텐츠, 발표 내용도 재미있게 구성했지만요. 조원 별로 역할 분담이 고르게 되었던 점이 특히 좋았어요. 각자가 있는 부분을 맡아서 명도 빠짐없이 몫을 다했더군요.

“…….”

“조원 간의 관계가 가장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조별 과제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있겠네요. 교수 재량으로, 5조에는 A+ 주려고 합니다. 이건 일종의 보너스 점수라서, 다른 과제의 채점에는 영향이 전혀 없을 거예요.

조별 과제 하는 동안 몸도 마음도 고생했으니 내심 A 받았으면 하는 기대야 있었지만, A+라고? 어쨌든 지난 2주간 조원들과 미운 고운 들었는데 팀워크를 높게 평가했다는 것도 신기했다. 물론 조별 과제 자체에 목숨을 걸려고 했던 아니었지만, 교수님의 인정까지 받으니까 뿌듯했다.

<SYSTEM> [돌발 퀘스트] “조별 과제 타노스”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 캐릭터 이라윤의 호감도가 10% 상승하고,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SYSTEM> [퀘스트 알림] 공략 캐릭터 이라윤의 호감도를 50% 이상 달성하면 연관 이벤트 발생 메인 퀘스트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퀘스트 완수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목표를 무사히 달성했다는 생각에 그제야 활짝 웃을 있게 되었다. [️42] 머리 위의 호감도가 반짝거림과 동시에, 뒤쪽에서 나를 쳐다보는 이라윤의 시선이 묘하게 짙어졌다.

“현수 선배, 희연아, 라윤아. 다들 덕분에 이번 과제 A+ 받았어. 우리 조가 1등인가 !

그래도 인사라도 하면 좋을 같아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이라윤을 포함한 나머지 조원들을 찾았다. 역시 처음에는 사람들이 빌런이라고 생각했지만, 악마라도 편이면 그만인 아닌가!

“우리 그럼 뒤풀이라도 할까?

끝이 좋으면 좋은 거라고, 마음이 둥둥 들떴다. 결과적으로는 다들 몫을 해내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고 회포를 풀면 좋을 같았다. 하지만 팀워크로 플러스 점수를 받은 무색하게도 넷이 모인 자리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과제 끝났는데 굳이 뒤풀이까지?

“아… 그런가?

“나는 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 진화심리학 학회 모임에 참석해야 하거든.

“음, 미안.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밀린 덕질이 너무 많아서. 나도 오늘은 공방 뛰어야 같은데?

찰나의 협력이 무색하게도 빌런들은 다시금 매몰차져 있었다.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이었구나…. 어떻게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조별 과제가 끝나자 모두 각자의 용건에 충실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어느새 옆에는 이라윤만이 남아 있었다.

“우주 선배, 우리 둘이서라도 뒤풀이 할까요?

“앗, 정말? 나는 너무 좋지!

조금 시무룩해진 기분을 알아챘는지, 이라윤이 살갑게 질문해 왔다. 역시, 믿을 라윤이 너밖에 없다!

***

그물망으로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고기를 구웠다. 향이 제대로 스며들어 노릇노릇 익은 고기가 좋은 냄새를 풍겼다. 학교 근처에 자리한 드럼통 고깃집의 번잡스럽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마저 운치 있게 느껴졌다.

“라윤아, 그동안 조별 과제 하느라 너무 고생 많았어. 고기 많이 먹어!

“아, 우주 선배도요. A+라니, 정말 상상도 하던 결과예요.

사람뿐인 조촐한 뒤풀이 자리였지만 그래도 선배인 내가 이라윤을 위해 고기를 구웠다. 마지막으로 뒤집어 보다가, 정도면 먹어도 같아서 고기 점을 이라윤 쪽으로 건넸다. 그를 내려다보며 슬쩍 웃은 이라윤이 젓가락을 들었다.

상추 두어 위로 갈매기살을 올린 이라윤이 깻잎, 마늘이랑 쌈무까지 더해서 큼직한 쌈을 만들었다. 내가 구운 고기를 오물오물 먹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와서 자꾸만 이라윤을 쳐다보게 됐다. 쌈을 꼭꼭 씹어 삼킨 이라윤이 매캐한 공기 사이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라윤아, 고기가 그렇게 맛있어?

“어, 완전요. 선배도 얼른 먹어요.

“응, 나도 먹고 있어!

철판 아래에서 연기가 너무 올라오는 같아서 은박으로 둘둘 감싸인 배기구를 끌어내려 환기를 시켰다. 말끔해진 시야에 여전히 야무지게 고기를 먹고 있는 이라윤의 모습이 새삼 신기했다.

이라윤은 SNS 핫플레이스인 호텔 레스토랑에서 셰프가 손수 플레이팅한 고급 음식만 좋아할 알았다. 의외로 취향이 소탈한 면도 있네? 뭐든 가리니 좋다고 생각하며 나도 뒤늦게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음… 역시 이대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윤아, 있잖아, 사이다만 먹으려니까 서운하다 그치?

“하하. 우주 선배 마시려고요?

“응. 라윤이 맥주 좋아해?

“아, 저는 술은 원래 마시기는 하는데.

이라윤이 고민하는 기색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유리잔에 반쯤 남아 있는 사이다에서는 기포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이라윤은 그것을 와인을 마시는 것처럼 멋들어지게 들이켰다.

“아… 그렇구나.

알코올이 당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 앞에 두고 혼자서 마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도 아쉬운 대로 사이다를 모금 머금었다.

“조금만 같이 마실까요?

“어, 정말…? , 그래도 뒤풀이인데 술이 없으면 역시 서운하지?

“맥주 병만 시켜서 같이 먹어요.

너무 기다렸다는 냉큼 대답했나. 사실 멋진 선배라면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는 후배의 마음을 헤아려서 의젓하게 거절해야겠지만, 여름이 가까워지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뜨끈하게 익은 고기를 먹고 있자니 맥주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라윤의 취한 모습이 어떨지 궁금한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항상 차분하고 나른해 보이는 이라윤에게도 술버릇이 있으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가져온 맥주를 건네받은 이라윤이 능숙하게 병뚜껑을 따고 잔을 채웠다.

“우주 선배 마셔요?

“헤헤 아니, 완전 알쓰야. 그래도 오늘은 기분만 내려고. 라윤이 너는 원래 별로 좋아해?

“저는 그냥… 괜히 마시고 다른 사람 앞에서 흐트러지고 그러는 싫어서요.

뭐랄까…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은 이라윤이 입술을 슬쩍 깨물고 대답했다. 정확히 흐트러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후배님에게 술을 먹이려고 했던 나는 뜨끔했다.

하긴 어디로 봐도 단정하고 완벽해 보이는 이라윤은 너저분한 술자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해서 별로 마시고 싶지도 않은 애를 곤란하게 했나 싶은데,

“그래도, 선배랑 같이 마시는 거는 어쩐지 괜찮을 같아요.

이라윤이 어디서 많이 들어 대사를 자연스럽게 읊었다. 촬영 이라윤과 잔디밭에서 가벼운 스킨십을 하던 때가 떠올라 눈을 깜빡였다. 비현실적인 이라윤의 생김새 때문인지, 학교 근처의 흔해 빠진 고깃집도 영화 근사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우리 할까요?

놀란 마음에 조금 허둥거리며 맥주잔을 들어 올려 이라윤과 건배했다. 꿀꺽, 소리와 함께 이라윤이 맥주를 빠르게 들이켰다. 미간이 살짝 좁아지면서, 목울대가 얕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어, 이라윤 얼굴 금방 빨개진다.

“아, 뭔가 부끄럽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라윤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기를 1인분 추가하면서, 처음 얘기와는 다르게 맥주도 시켰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었다. 알코올 때문에 곤두선 긴장이 느슨해지고, 지금만큼은 공략캐인 이라윤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의식적인 생각조차 실은 없었다. 힘을 모아 좋은 결과를 이뤄낸 유대감과 크나큰 과제를 해치웠다는 데서 오는 해방감을 나누며 즐길 뿐이었다.

“라윤아, 솔직히 그거 경험담이지?

“네? 어떤 거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누가 딸기 우유 주다가 몰래 연락한 !

“아, 그렇다고는 없지만….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보니, 본인 경험담인 맞네 맞아! , 이상했다. 분명 예전에는 이리저리 치이는 라윤이가 짠해 보였는데, 얼굴을 빤히 보고 있으니 뭐… 그게 당연한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 심장 설레게 했으면 정도는 감당해야지, 이라윤 유죄 땅땅!

“라윤이 네가 예쁘고 잘나서 고생이 많다.

“뭐예요, 그게.

그렇지만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라윤이는 안됐어, 그러니까 다시 면죄부. 나도 이제 슬슬 술기운이 오르는 건지 생각이 자꾸 오락가락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느낀 바를 읊조리자, 이라윤이 입을 살짝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어지간하면 피할 없으면 즐기라고 텐데 스트레스받는 눈에 보여서 그러지도 못하겠어.

“…….”

“그래도 어차피 인생 사는 , 너처럼 예쁘고 잘나게 태어난 역시 좋다고 생각해.

너무 시무룩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얘기였는데, 그를 틈타 이라윤이 쪽으로 고개를 슬며시 기울여 왔다.

“우주 선배 눈에는 내가 예쁘고 잘생겼어요?

              

#38

그러면서 눈매를 사르르 휘어 보이는데, 어유, 이게 사람 홀리려고 작정을 했나!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처럼 불쑥 튀어나온 이라윤의 저돌적인 태도에 당황한 나는 재빨리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허허… 글쎄 모두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그래도 정도면 무난한 대답이겠지?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태연한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리는데,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라윤이 얼굴을 거두어 가더니 , 웃어 버렸다. 이라윤이 느슨하게 풀릴수록 어쩐지 내가 더욱 긴장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우주 선배는 이런 너무 익숙해 보여요.

“이런 거라니?

“그냥… 순간 사람 마음 철렁해지게 하는 ?

“…….”

“다들 우주 선배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이라윤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니, 대체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교양 수업을 같이 듣는 황병열이나 유한나? 그렇다 해도 내가 친구들이랑 지내는 맞춰 주는 성격이어서 그런거고. 장희연 말마따나 혼자서 고고하게 있어도 다들 다가가고 싶어서 안달나 하는 이라윤이 얘기는 아니었다.

“에이, 무슨 말도 되는 소리를.

“…….”

“나랑은 다들 친구로서 지내고 싶어 하는 거고. 사귀고 싶은 라윤이 너일걸?

오늘 유한나만 봐도, 어떻게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이라윤과 키스신을 찍을 있냐며 도끼눈을 뜨지 않았던가. 내가 지상계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거라면, 이라윤은 천상계에 가깝다고 있지.

“음. 생각에는 반대인 같은데.

“진짜야, 아직 제대로 연애해 적도 없어!

이라윤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억울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까지 하려는 아니었는데, 주장에 근거를 뒷받침하려다 보니 빈곤한 연애 이력을 털어 버리고 말았다. 이라윤이 놀란 듯이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렇게까지 반응하자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같은 처지였네요.

얼마간 머뭇거리더니 이라윤이 털어놓은 이야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라윤이 모쏠이라고? 아무래도 아까 주었던 면죄부를 다시 거두어들여야 같다. 얼굴에 몸매를 가지고 연애 하는 직무 유기 아닌가?

“근데 라윤이 너처럼 빠지는 구석 하나 없는 애가… 지금까지 연애를 번도 했어?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엄친아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현실에서 연애를 생각하기엔 여러모로 여유가 없었던 나와는 다르게 이라윤은 어디로든 쪼들려 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딸기 우유만 받았겠어, 예쁘고 잘난 사람들한테 고백도 수두룩하게 받았을 텐데….

“진심을 다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면 아예 시작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진심을 다할 만한 상대라면…?

“나한테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얼굴이나 우리 집안 같은 조건만 보고 다가오는 거잖아요.

“…….”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지한 만남을 이어 나갈 있을까요? 마음만 다치고 이용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처음에는 이게 나만 모르는 농담 같은 건가 했는데, 눈가가 살짝 붉게 물들어 있는 이라윤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다. 가끔씩 냉소적인 농담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라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물론 이라윤이 어딜 가나 선망의 시선을 받고 돋보이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이 라윤이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만으로 다가오는 아닐 텐데.

“제가 취했나 봐요. 선배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헉, 아니야, 괜찮아 라윤아….

이라윤의 촘촘한 속눈썹이 얕게 팔랑거리는데, 수려한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황급히 갈무리하며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확실하고 단호하게, 그런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게임 공략을 위해 호감도를 얻으려고 이라윤에게 접근한 거니, 의미로는 이용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그와는 별개로 이라윤을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심인데….

***

고깃집에서 빠져나왔을 때에는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사람들이 점점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번화가를 지나쳐 상대적으로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후끈한 공기를 흐트러트리는 여름밤이었다. 낮에도 날씨가 유난히 맑더니, 해가 지고 후에도 하늘에는 구름 없이 별빛이 아득하게 드리웠다. 반짝이는 별을 보기 위해 고개를 위로 젖히자 나른하면서도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42]

문득 옆을 돌아보자, 이라윤의 머리 위에서도 불그스름한 하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42이라는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모양이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다 발을 헛디뎌서 휘청거렸다.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기 전에 이라윤이 나의 몸을 붙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자 시야가 빙글 도는 것을 보니 확실히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먼저 마시자고 했으면서, 우주 선배가 많이 취해 버렸네요?

“아, 아하하… 그러게?

기분 좋을 만큼 술에 취해서 노곤노곤하게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인지 별것 아닌 이라윤의 말에도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많이 취해 버리다니 너무 웃기잖아!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무의식적으로 이라윤의 팔뚝 위쪽 부분을 슬쩍 매만졌다.

[️43]

“어… 이게 뭐지?

그러자 새빨간 하트가 부르르 떨리더니 호감도가 43% 상승했다. 이럴 수가, 이라윤 몸을 터치하면 호감도가 올라가는 건가? 이건 너무 말도 되잖아. 놀라기도 잠깐, 사실을 깨닫자 다시금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방금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이라윤의 어깨를 다시 만져 보았다.

[️44]

, 호감도가 1% 올라갔다. 세상에, 진짜 맞는 거였나 ! 놀란 마음에 방금 이라윤의 몸에 닿았던 손바닥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거 사실 굉장히 쉬운 방법이고, 어깨 살짝 만지는 정도면 라윤이한테 딱히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닐 텐데….

“우와….

이렇게 김에 호감도를 깨알같이 올려 둘까? 생각하면서 이라윤의 다시금 손을 가져갈 때였다. 이번에는 몸에 닿기 전에 이라윤이 손을 잡아챘다.

“왜 자꾸 만지고 그래요, 선배.

“…….”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큰일이라니 무슨, 하고 당당하게 받아치려고 했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이라윤이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색이 조금 짙어진 갈색 눈동자에 습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갑작스레 몰려드는 긴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게 나는….

어우, 이거 술이 깨는 기분인데….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이라윤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장희연의 지시에 따라 비디오 찍을 때와 비슷한 구도였지만, 지금은 실제 상황이었다. 약하게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우주 선배.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또렷하게 도드라진 이라윤의 콧날과 턱선에 어스름한 그늘이 졌다. 망설이듯 턱과 부근을 살짝 매만지던 이라윤이 이내 손을 뒤로 거두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에 순간의 일렁임이 스쳤다.

“우주 선배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나를 온전히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

“아, 정말? 나도 라윤이 너랑 있으면 편하고 좋아….

“그런데 이상하죠. 그래서 가끔은 오히려 , 불편하게 느껴지는 .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라윤이 다시금 내게서 뒤로 물러났다. 혼란과 망설임, 약간의 흥분이 말끔하게 사라진 얼굴이 평소의 무심하고 관조적인 빛을 되찾았다. 나한테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서 발짝 뒤로 물러난 것처럼.

“라윤아….

그동안 무의식적으로만 느껴 왔던 라윤이와 사이의 . 벽의 밀도가 빽빽해지고, 조금만 압력을 가하면 금이 가고 와르르 허물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졌다.

***

‘우주 선배, 그럼 우리 지금부터 시작할까요?

은은하게 드리우는 달빛 아래에서 이라윤이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보이며 나를 향해 손을 길게 내밀었다.

‘다음번에 놀러 . 그땐 맛있는 거라도 같이 먹자.

손을 냉큼 잡아도 되는 건가 갈등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 높이 밝은 해가 떠오르더니. 강태양이 등장했다. 지지 않겠다는 , 강태양 역시 내게 손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우리 누구야? 빨리 선택해.

앞으로 내민 개의 손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는데, 어느새 바짝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빨리 결정을 내리라며 압박해 왔다. 다들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나는 하나를 선택할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그러지 말고 우리 공평하게 우정을….

“헉!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몸을 버둥거리는데, 그대로 잠에서 깨어났다. , 꿈이었구나…. 놀란 마음을 간신히 쓸어내렸다. 꿈에서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는지 손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무슨 이런 해괴망측한 꿈을 다….

이라윤과 강태양 사람 모두 최근에는 호감도가 쭉쭉 올랐다. 게임 빙의 초기에 좌충우돌이었던 것에 비하면 정도면 무난한 전개였다. 가뿐하고 거뜬하게 공략을 해치울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부대끼고 있었는지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하기야,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 등락을 신경 쓰며 상대방의 감정과 상태를 파악하는 생각보다 심력 소모가 컸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사람을 동시에 마주칠 일이 없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으, 찌부드드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꿉꿉한 기분을 훌훌 털어 보냈다. 오늘은 플레이 23 . 문득 생각이 호감도 수치를 확인해 봤다.

이라윤 (20)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

호감도 [44/100]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22/100]

 

, 역시 퀘스트 성공의 임팩트가 크구나.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이라윤의 호감도가 훌쩍 늘어나 있었다. 시스템 안내창에서 호감도를 50% 이상 달성하면 이제 메인 퀘스트에 진입할 있다고 했지. 그런데 메인 퀘스트라는 대체 뭘까?

그동안 게임 속에서 거쳤던 퀘스트들을 떠올렸다. 농구 게임처럼 단순한 거에서, 목걸이 찾기나 조별 과제까지. 메인 퀘스트가 정확히 어떤 형식으로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라윤 루트 클리어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것만은 분명했다.

“라윤이는 어젯밤에 잤으려나?

적어도 나의 경우는 뒤척거리는 꿈으로도 이어질 만큼 어젯밤의 기억이 강렬했다. 거리가 좁혀졌지만 이라윤의 표현처럼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그날 밤의 공기. 친밀함과 긴장감이 모호하게 뒤섞인 상태가 여운처럼 몸에 남아 있었다.

혀끝이 딱딱하게 굳는 것만 같은 감각을 떠올리자 망설임이 일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퍼덕퍼덕 저어 냈다. 아니야, 불필요한 감상에 젖어서는 안돼. 내가 중심을 잡고 균형감 있게 헤쳐 나가야 게임 공략에 성공하고 현실로 무사히 돌아갈 있다!

&lt;&lt; 라윤아, 어제 집에 들어갔어?

용기를 끌어모아 이라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별 과제 때문에 메시지를 주고받던 것을 제외하면, 이라윤에게 사적인 연락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으음.

하지만 그대로 30분이 지나도 답장은커녕, 메시지 읽음 표시마저 뜨지 않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39

>> 늦게 봤네요~ , 들어갔죠!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한 답장은 뭐랄까… 굉장히 형식적이었다. , 예의상으로라도 나는 어떻게 들어갔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고 하니까 나도 그다음 말을 하기가 애매했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면서 입술만 물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엔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이라윤을 보게 것은 수요일 오전 &lt;성과 사회&gt; 교양 수업에서였다.

“라윤아, 안녕!

“우주 선배, 안녕하세요.

“어제 인스타 스토리 올린 봤어! 그때 우리 같이 갔던 카페 맞지?

“아, 뭐… , 그랬어요.

살갑게 인사했지만 정작 돌아오는 대답에는 온도 차가 있었다. 대놓고 나를 밀어내는 아니었지만, 표면적인 친절 아래로 묘하게 냉담한 태도가 느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라윤이 나에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만은 있었다.

[️44]

혹시나 해서 이라윤의 머리 위를 쳐다봤더니 호감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44% 그래도 나름 높은 수치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라윤의 반응이 더욱 의아했다.

“아, 그게….

당황으로 말을 더듬는 나를 이라윤이 무덤덤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나마 게임 속이라 호감도를 바로 확인할 있어서 망정이지, 현실이었더라면 갑자기 내가 싫어진 건가, 혹시 내가 그날 밤에 무슨 말실수라도 했던 걸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땅굴 파고 들어갔을 같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지? 부족한 경험이나마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를 떠올려 봤다. 음… 일단 라윤이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하면 좋지 않을까? 뭐라도 얼른 생각해 내야 , 연우주!

“그 ! 라윤아, 내가 근처에 예쁜 카페 뒀는데 인스타에 올릴 사진 찍으러 갈래?

“…….”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줄게!

커피값이란 쌓이다 보면 만만치가 않아서 사실 현실에서도 카페를 자주 가지 않는 편이었다. 하물며 게임 속에서야, 학교 근처에 어떤 예쁜 카페가 있는지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게서 거리를 두려는 이라윤을 붙잡아 보기 위해 일단 지르고 봤다.

“음….

이라윤이 좋다고 하면 가는 길에 빨리 핸드폰으로 카페 검색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여전히 이라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농구 해도 괜찮은데! 저번에 너랑 같이 하니까 재미있더라.

“…….”

“…아니면 좋아하니까 우리 쇼핑이라도 하러 갈까 주말에?

조급한 마음에 이라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계속해서 주워섬겼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라윤은 더욱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풀어 보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난잡하게 얽혀 드는 것만 같은 실타래처럼, 내가 다가가려고 노력할수록 도리어 이라윤에게서 멀어지고만 있었다.

“저는 이번 주말에는 기말고사 공부를 미리 시작해 둘까 해서요.

“아, 그렇구나….

“우주 선배도 이따 저녁 챙겨 먹고요.

그렇지만 라윤아…. 중간고사 끝난 얼마나 됐다고 기말고사 공부를 벌써 시작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붙잡을 수도 없었다. 억울함과 서러움 뒤섞인 눈으로 이라윤을 올려다봤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이라윤이 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진녹색 체크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훤칠한 뒷모습이 미련 없이 말끔했다.

“뭐지…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이라윤이 떠나간 자리에는 말로 짚어 말할 수는 없는 묘한 껄끄러움과 불편함만이 감돌았다. 그대로 녹아 내리려는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이유를 고민했다. 이라윤이 갑자기 그러는 거지? …그러다 보니, 라윤과 만난 얼마 돼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이가 친밀해졌다고 생각했을 이라윤이 나를 피했다. 지난번에는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였나 보다, 넘어갔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있었다. 그러니까 , 이라윤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나와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그럼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짐작 간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자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23 차’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빨리 메인 퀘스트에 진입해야 이라윤 루트를 제때 클리어할 텐데….

***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라윤 루트를 빠르게 클리어하고 남은 시간은 다른 캐릭터 공략에 집중하면 순조롭게 게임 엔딩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라윤이 계속 나를 피하기만 하면 불가능이지! 뜻밖의 난관을 맞닥뜨린 와중,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의 압박으로 초조함이 더욱 짙어졌다.

“아… 근데 이거 해야 하는 거지?

중간고사가 끝나자 캠퍼스에는 축제 시즌이 찾아왔다. 우리 과에서도 부스를 예정이라 나에게 차출 요청이 떨어졌다. 게임 돌아가는 사정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심란해 죽겠는데, 공략캐와 1 상관없는 활동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불만이 삐죽이 솟아났다.

“‘꼭’ 해야 하냐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이지 연우주?

“아, 하하, 음… 내가 무작정 빠지겠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어… 이번 주에 여러 가지 일이 많기도 하고.

“우리 전부 참여하는 거라서 예외란 없다. 그리고 수익금은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할 거라고, 좋은 하는데 너만 빠질 거야?

“그래, 다들 바쁜데 시간 쪼개서 하는 거잖아. 그리고 너같이 상큼한 페이스가 , 앞에 있어 줘야 영업에도 도움이 된단 말야!

유한나와 황병열이 주거니 받거니 압박의 수위를 높여 왔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쉽지 않을 듯했다.

“하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거야 사실 사정이고. 빼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한다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하고, 어차피 게임에 있는 동안에는 이들과 지내야 하니 끝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길가에 들어선 은행나무가 잎사귀를 싱그럽게 흩날리고, 하늘에서는 옹기종기 늘어선 만국기가 팔랑팔랑 휘날렸다. 스피커에서 유행가가 빵빵하게 울려 퍼지며 경쾌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멀리서는 무슨 행사를 진행하는지 나팔 소리 같은 것도 이따금 들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모두 약속이라도 것처럼 일상의 걱정거리는 잊어버리고 흔쾌히 축제의 즐거움을 누렸다. 예대 건물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서는 헤나, 원석 액세서리, 퍼스널 컬러 테스트, 향초 만들기 체험까지 별로 다양한 테마를 정해 부스를 운영했다.

내가 소속된 서양화과에서는 페이스페인팅 부스를 준비했다. 친구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고 부스를 시작했더니 이제 겨우 남짓이었다. 아마도 오늘 하루 동안은 꼼짝없이 여기서 있어야겠지. 알록달록한 물감을 팔레트에 세밀한 붓을 느릿느릿 문질렀다.

“오빠, 우리 이거 받고 갈까?

오랫동안 정신 팔고 있을 새도 없이, 파릇파릇한 커플이 부스에 들어왔다. ‘얼마예요? 묻는 질문에 빠릿하게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오늘 내가 맞게 손님이었다.

“음… 어떤 하면 좋지?

“오빠 볼에는 LO, 볼에는 VE할까? 합치면 LOVE 되게?

“완전 좋지! 오구구, 우리 애기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

봐도 사귄 얼마 같아 보이는 커플이 닭살 돋는 대화를 나누면서 사랑에 빠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래, 한창 좋을 때지. 나의 그림(이라기엔 많이 단순하지만…) 그들의 애정전선에 기여할 있다면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요청받은 대로 남자의 볼에는 LO, 여자의 볼에는 VE 새겨 주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만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거지 싶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해탈해 받아들이는 단계였다. 글자만 있으려니 아무래도 밋밋해서, 붓을 움직여 열심히 음영과 반짝이 효과도 넣어 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 커플에게 가라며 손을 흔들어 때였다.

“연우주. 불금인데 알바 열심히 잘하고 있어?

거침없는 인사와 함께 강태양이 부스에 들이닥쳤다. 오늘 강태양은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가 큼직하게 프린팅된 몸에 검은색 반팔과 워싱이 사납게 들어간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새 깁스를 완전히 건지 왼발이 자유로웠고, 탄탄한 목덜미에서는 지난번 함께 찾은 목걸이가 반짝 빛났다.

“어, 태양이 ?

그렇지 않아도 점심 즈음에 만나서 놀자고 하던 오늘은 학교 축제 참여해야 한다고 거절했었다. 정작 나야말로 부스 참여 대신 강태양과 친밀감을 쌓고 싶은데, 만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냐고 집요하게 굴길래 부스 사진만 찍어서 보냈다. 그렇지만, 진짜 여기까지 줄이야.

[️25]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호감도 수치를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상하다, 분명히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22%였는데…. 보는 사이 강태양의 호감도가 3% 상승해 있었다. 이게 어떻게 일이지?

“왜,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니까 새삼 감동이야?

쪽으로 다가와 천막의 폴대에 기대선 강태양이 빙글빙글 웃었다. 하긴 현실에서도 같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혼자서 다른 사람과 보냈던 시간이나 대화를 곱씹어 보다가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니까…. 알아서 납득하려는데, 갑자기 우리 둘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헉 꺄아! 강태양 선수 맞으시죠?

“어떡해, 실물 처음 ! 허벅지 대ㅂ… , 아니 죄송합니다.

“우주야, 강태양 선수랑 원래 아는 사이였어?

              

#40

아닌 척하지만 말을 듣는 강태양은 내심 으쓱해했다. 급기야는 팬이라고 주장하는 동기들과 넉살 좋게 인사하며 사인까지 주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강태양을 가만 지켜보았다.

나랑 같이 허물없이 웃고 떠들 때는 개구쟁이만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국내 최고의 축구선수라는 강태양의 위상이 실감이 난달까. 나를 찾아온 강태양을 보면서 다들 우와 우와 탄성을 내뱉자 옆에 있는 역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근데 오늘 알바 하는 아니고, 행사 참여인데.

“그게 그거지 . 나도 얼굴에 그림이나 하나 그려 , 연우주.

“페이스페인팅 요금은 5000원이고, 전액 동물보호단체를 위해 기부됩니다~

강태양이 얼굴에 그림을 언급하자, 그새를 놓치지 않고 영업 담당 유한나가 끼어들었다. 웃어 보인 강태양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다음, 안에 있는 지폐를 전부 뽑아 냈다. 움큼이나 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곧바로 유한나에게 건넸다.

“연우주 앞으로 전부 올려주세요.

“꺄, 세상에! 감사합니다 선수님~ 우주야 고마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유한나가 강태양의 손에서 지폐를 덥석 받아들었다. 오늘 행사 총무 쪽으로 달려가는 같더니, 그쪽에서도 와와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부스 매출 목표는 차고 넘치게 채우지 않았을까?

멀찍이 모습을 지켜보는 강태양도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엣헴, 흠흠, 목을 작게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 생색을 내보려는 듯했다. 고마운 것도 고마운데 그런 강태양이 귀여워 보였다. 강태양한테 이런 마음이 줄이야, 게임을 하다 보니 별일이 있다.

“형 혹시… 오늘 세워 주려고 여기까지 거야?

“뭐, 그런 것도 있고. 나도 페이스페인팅이나 받아 볼까 했지.

“히히, 고마워 .

“이런 가지고 .

“내가 그림 엄청 그려 줄게, 빨리 이쪽으로 와서 앉아 .

사람들 명도 빠짐없이 전부 참여한다는 단순한 과장은 아니었는지 부스 내부는 정신없이 북적거렸다. 손에는 , 다른 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신기한지 강태양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야, 네가 학년이라고 했냐?

“나 2학년.

“미술이면 , 너도 고물 자전거 같은 천장에다 걸어 놓고 작품 하고 그래?

“아니거든? 물론 현대미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평범하게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 그려.

“흠, 그렇구나.

강태양은 말에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고물 자전거라는 말에 순간 발끈했는데, 기색을 보아하니 악의는 없었던 같다. 내가 축구에 문외한인 만큼 강태양 역시 미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이 없을 테니까.

“태양이 , 볼에다가 그림 그리고 싶어?

“음… 뭐가 좋으려나.

“말만 , 뭐든지 그려 줄게.

“그럼 하마.

냉큼 대답한 강태양이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렸다. 나도 그런 강태양을 바라보면서 마주 웃었다. 그래도 그날 강태양 집에 다녀 오고, 서로 얘기를 조금씩 하면서 한층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다.

“볼 이렇게 .

“옙, 알겠습니다, 연우주 화백님.

강태양은 과장스럽게 기합을 넣고 나에게 오른쪽 뺨을 내밀었다. 목덜미에서 풍기는 희미한 머스크 향과 함께 강태양이 내게 밀려들었다.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릿빛 피부는 가까이에서 봐도 잡티 하나 없이 매끈매끈하기만 했다.

“흐음….

도화지 퀄리티가 좋으니 그림 역시 못지 않게 근사해야겠다는 압박이 들었다. 그때 동화책에서 하마를 어떻게 그렸더라, 생각하면서 가느다란 붓에 회색 물감을 묻혔다. , 숨을 작게 안으로 삼키면서 부드러운 끝을 강태양의 볼에다가 문질렀다. 그러자 강태양이 인상을 쓰더니, 입꼬리를 미친 듯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형, 자꾸 움직이면 그림 이상하게 그려진다?

“아니, 느낌이 너무 간지럽잖아.

볼에 물감을 어설프게 묻힌 강태양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널찍한 어깨를 으쓱했다. 후으, 숨을 길게 내뱉은 강태양이 다시금 볼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그래도 그다음부터는 의식적으로라도 가만히 있으려고 해서 작업을 수월하게 이어 나갈 있었다. 그대로 남짓이나 지났을까, 강태양의 오른쪽 뺨에 자리한 튼튼한 하마를 꼼꼼히 살펴보다 마무리로 까만 점을 눈동자로 찍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이게 대체 뭐라고 긴장이 되지. 떨리는 마음으로 강태양에게 손거울을 내밀었다. 거울 얼굴을 살피던 강태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를 V자로 만들어서 끝에 가져다 댔다. , 설마 맘에 드는 건가….

“야, 근데.

“…어?

“연우주, 이리 가까이 .

물로 씻으면 바로 지워진다고 말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강태양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강태양이 새까만 눈동자를 반질반질하게 빛내며 딱딱한 검지로 코끝을 튕겼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 애초에 장난을 치려던 모양이었다.

“너는 여기 옆에 볼에다가 그리냐? 귀여울 같은데.

“아 뭐야, 놀랐잖아 .

사람 놀라게! 벌어진 강태양의 근육질 어깨를 , 치면서 다시금 뒤로 물러났다. 물론 아프게 때리지 않기도 했지만 강태양은 얻어맞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 선배….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왠지 익숙한 목소리인데…. 설마, 아닐 거야. 뻣뻣해진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자 아옹다옹하는 나와 강태양을 빤히 지켜보는 이라윤이 보였다.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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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라윤의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진동하는 호감도가 인사하듯 깜빡거렸다. 어휴, 불안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는 적이 없는 걸까.

그나저나,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경영학과 동기들과 같이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는지 부스 안에는 키가 훤칠하게 멀끔한 남자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라윤은 포켓에 배색 디테일이 들어간 깔끔하고 단정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라윤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 아니 말은… 친구들이랑 축제 구경하고 있었어?

꿈속에 나올 정도로 내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현실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이라윤에게 무심코 질문했다가, 말이 여기 왔냐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같아서 황급히 수습했다.

“흐음….

그러자 불만족스럽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라윤에게 내내 꽂혀 있던 시선을 옆쪽으로 돌리자, 동물적인 촉으로 이라윤을 경계하는 강태양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우주 선배, 옆에 사람은 누구예요?

표정을 가다듬은 이라윤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눈동자가 경계심으로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라윤도 한국인인데 강태양이 누군지 모르는 아닐 테고, 이건 그보다는 나와 강태양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는 있었다.

“아, 그게…. 이분은 축구선수시고, 병원에서 봉사 활동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

“음, 뒤로 서로 친구 하기로 해서, 지내고 있어!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위험하게 반짝이는 호감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더할 것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담백한 사실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을 듣는 이라윤과 ‘옆에 사람’이 되어 버린 강태양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사이에 끼인 나만 난처해질 뿐이었다.

“꺅 뭐야, 전설의 라윤우주 투샷을 이렇게 보네? 둘이 커플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 !

“그러지 말고 페이스페인팅이라도 같이 하고 찍으면 어때? 딸기 우유 같은 볼에다 그리면 되겠다.

“오, 완전 좋은데? 그거 인스타에다 올려서 홍보하면 우리 부스 요번 축제에서 최고로 흥할 !

발짝 늦게 이라윤이 부스를 찾은 것을 알아챈 3학년 선배들이 다가와 호들갑 떨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별 과제만으로 끝나기는 아깝다는 반응 탓에, 장희연이 만든 영상이 학생회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라갔었다. 고작 며칠 사이였지만 캠퍼스 유명 인사인 이라윤 덕분에 영상이 빠른 속도로 퍼져서, 조회수가 높이 치솟았다.

정작 영상을 찍은 뒤로 이라윤은 나에게 거리를 두는데, 캠퍼스를 걷다 보면 나를 알아보면서 짝꿍은 어디에다가 두고 혼자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뜻밖의 유명세를 타게 탓에, 처음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싫지만은 않았지만… , 지금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럽다는 라윤이 심정이 이해가 된달까?

“어쩌지? 우주는 여기다 종달새 페인팅하기로 이미 나랑 약속했는데.

그러자 한동안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강태양이 보란 듯이 턱을 감싸 쥐고는 선언했다. 내… 내가 언제? 처음 듣는 소리여서 곧바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매섭게 치켜뜬 강태양의 눈을 보고는 이상의 말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 하하하….

강태양은 유들유들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지만 목소리에서는 화가 숨겨지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아랫 부근을 거머쥔 손에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서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던 이라윤 역시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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