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 81-90

#81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58 (남은 시간: 41 23시간 10)]

남은 플레이 시간을 고려하면 차태주 루트 공략에 있는 시간은 결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조급하게 생각하면 일도 어그러질 뿐이다.

나로서는 어쩔 없는 사정이 있었다지만, 출근 주에 연차를 내내 컨디션이 나빴던 모습이 팀원들에게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같다. 특히 회사 일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차태주는 나를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최근 3년차 소비자 동향 리서치 완료했고, 필요하실 같아서 관련 기사도 조금 같이 찾아봤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머, 그렇네. 여기 넣어주신 타사 사례는 확실히 도움이 같아요.

“앗, 정말요?

“센스 있게 챙겨줘서 고마워요, 우주 .

혹시나 생겨났을지 모를 편견을 극복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는 사수에게 밝게 웃으면서 먼저 인사하고, 선에서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챙기려고 노력했다.

공략에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세계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공략 대상과의 관계가 고백 시점 이상으로 진전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현실로 돌아가면 공략 대상들을 다시 만날 없다.

하지만 같은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온전히 의지로 선택할 있다.

어차피 나는 그들을 단순한 수단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천유현의 말처럼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 사실을 가지고 괴로워하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두려워 하면서 안으로 숨어드는 대신 지금 내가 있는 일에 집중해야 때였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일이 해결되지 않을까? 그동안은 내가 모르는 분야라는 생각에 막막한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팀에서 돌아가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보탬이 있는 부분을 찾으려 했다. 팀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위해서는 나부터도 내가 있는 노력을 다해야 같았다.

오늘은 정규 업무가 끝난 후에 따로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했다. 팀공유 폴더에 있는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다른 팀원들은 이미 알고 있을 내용을 캐치업 하기 위해 애썼다.

“음, 그러니까 STT 기술을 쓰면 그동안 전화 상담에서 쌓인 대화를 머신러닝으로 학습시킬 있다는 건가….

하지만 금융과 컴퓨터 공학 모두 나에게는 원체 생소한 분야다 보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는 용어는 중간중간 검색 엔진에 찾아가면서 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하암….

시간 동안 들여다본 문서 복사본은 이미 하이라이트로 너덜너덜했다. 이래서야 내일 윤혜영 대리에게 물어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때마침 하품이 삐죽 튀어나와 기지개를 켜고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10 반이 넘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사람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사무실에는 혼자서만 남아 있었다. 피곤으로 무거워진 눈두덩을 슥슥 손등으로 비비고 의자에 등을 길게 기댔다. 아직 궁금증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정리하고 볼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우주 .

멀찍이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며 차태주의 희고 서늘한 얼굴을 맞닥뜨린 나는 마치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깜짝 놀랐다.

“티, 팀장님!

[10]

물론 저승사자가 머리 위에 호감도를 달고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방금 사무실에 들어온 차태주가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에 분명히 개인 오피스 불이 꺼져 있었는데, 잠깐 밖에 다녀오신 건가?

“어, 그러니까… , 팀장님 아직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러는 연우주 씨는요. 뭐가 막혀서 아직까지 집에를 가고 있습니까?

“아뇨… 그런 아니고….

데스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차태주가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나만 앉아 있어서인지,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키가 훤칠하게 보였다. 당황한 마음에 어버버거리다, 말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러자 차태주가 희미한 웃음기를 매달고 있던 입꼬리를 얕게 들썩였다.

“연우주 , 묘하게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스타일인 알고 있습니까?

“…….

“가만히 내버려 둬도 실은 아무 지장 없을 텐데, 어떻게 보면 그것도 재주라고 있겠네요.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를 읊조리는 차태주의 표정이 무덤덤해서 경계가 한층 모호하게 느껴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여전히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던 차태주가 입술 끝을 미묘하게 휘었다.

“인턴 혼자 시간까지 남아 있으면 다른 팀에서 내가 악덕 상사인 압니다.

“앗, 아니에요! 절대 그런 아니라….

“그러면요.

“오늘 혜영 대리님께서 주신 업무는 끝냈는데, 제가 아직 모르는 너무 많아서…. 혼자서 공부라도 보려고, 보고 있었어요.

내가 말을 이어 나가던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차태주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이내 나를 떠난 그의 시선이 모니터 화면을 힐끗 훑어내리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문서에는 노랑색 하이라이트가 덕지덕지 칠해져 있는 걸로도 모자라, 중간중간 ?!?! 같은 메모도 적나라하게 달려 있었다.

“어디 한번 봐요.

부족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에 창피해져서 마우스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뒤로 바짝 붙은 차태주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공교로운 타이밍 탓에 손등이 그의 아래에 갇힌 채로 어설프게 겹쳐졌다.

“어… , 팀장님!

흠칫 놀라 옆을 쳐다보는데, 정작 무심한 얼굴로 화면 스크롤을 내리는 차태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도는 후배를 가르치다 보면 흔히 있을 있는 일인 건가? 괜히 나만 의식하는 같아서, 아래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던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흠…. 어딘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는지, 나지막한 침음을 흘린 차태주가 모니터 쪽으로 상반신을 깊숙이 기울였다. 그러느라 목덜미에서 체향과 섞인 서늘한 향수 냄새가 퍼져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직접 맞닿은 곳은 손등뿐이었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차태주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해졌다.

“아….

차태주는 문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공부한 흔적과 남긴 메모를 꼼꼼하게 훑어본 다음에야 뒤로 물러났다. , 스치듯이 미끄러지는 손바닥이 손등에서 떨어지는데 찰나의 시간 동안 심장이 오그라들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고객 타깃팅에서, 어떻게 전환율 향상까지 이어질 있는지 가운데 메커니즘이 이해가 간다는 거네요.

데스크에 몸을 느슨하게 기댄 차태주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스킨십 아닌 스킨십에 긴장한 것은 나뿐이었는지, 깔끔하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말에 눈이 동그랗게 덧붙였다. 정확히 차태주가 말한 부분이 이해가 가서 막히고 있던 차였다. 어떻게 번만 보고 그걸 바로 아셨지?

“맞아요, 팀장님! 그걸 모르겠으니까, 다음 로직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서….

“우주 씨는 금융 분야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모를 수도 있습니다.

평소의 차태주는 사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고 부하 직원을 닦달할 같은 이미지지만, 의외로 제법 친절하게 굴었다. 차근히 이어지는 명쾌한 설명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내도록 이해가 가지 않았던 개념이 차태주가 직접 가르쳐주자 직관적으로 닿았다.

“팀장님, 이제야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건지 이해가 되는 같아요!

역시, 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것도 하는구나! 마디 마디가 정확하고 일목요연해서 새삼스럽게 감탄이 나왔다. 나중에 잊어버리기 전에 미리 적어 두려고 포스트잇에다가 메모를 하는데, 바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에 차태주의 시선이 다소 집요하게 닿았다.

그를 의식하고는 움찔 동작을 멈췄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불안해져서 고개를 살그머니 들어올리자 낮게 침잠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만두 좋아해요?

그러자 차태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나에게 불쑥 질문했다. 갑자기…? 의아하다는 생각에 눈만 데룩데룩 굴리는데, 차태주의 왼손 끝에 검은 비닐봉지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간단히 먹고 가요. 저녁도 먹고 계속 일하는 같던데.

              

#82

뚜껑이 반으로 접혀 꺾인 종이 박스에서 하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안에 가지런히 늘어선 왕만두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탱탱한 만두피 위로 윤기가 반들거리는 큼직한 만두는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군침이 도는 광경이었지만 섣불리 음식에 손을 뻗지 못하고 멍하게 테이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늦은 시각에 차태주와 단둘이 회사 소회의실에 남아, 만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는 지금 상황이 지나치게 현실감 없어서였다.

“계속 그렇게 보고만 있을 겁니까?

“어, 그게… 팀장님 먼저 드시면 저도 먹으려고요.

가볍게 나를 타박한 차태주가 정갈한 손놀림으로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곧게 뻗은 단정한 손가락이 건넨 나무젓가락은 절단면이 매끄럽게 갈라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를 받아들었다.

“나는 됐어요. 연우주 먹으라고 사온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차태주를 바로 앞에 두고 혼자서 먹어야 한다니 더더욱 어색해서 쭈뼛거리게 됐다. 하지만 마지못해 만두를 크게 베어물자마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졌다. 김치가 버무려진 만두소에서 새큼한 맛이 퍼지면서 입맛이 돌았다.

“맛있다….

실은 되게 배고팠구나…. 업무에 치이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먹을 입에 들어가니 새삼스럽게 허기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게 느껴지는 만두를 우물우물 먹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 편에 앉은 차태주의 입매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곧이어 차태주가 테이블에 놓인 500ml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읊조리고 꾸벅 생수병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었다. 꼴깍꼴깍 물을 들이켜는 동안에도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돌연 눈썹을 살짝 이지러뜨렸지만, 지난번처럼 사납거나 매서운 기색은 아니었다. 항상 서늘한 냉기가 감돌던 얼굴이 누그러진 신기해서 차태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쯤 나를 안쓰럽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기요… 팀장님.

그래서일까. 어렵게만 느껴지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용기가 솟아났다. 손등을 들어 올려 입술을 닦아 내고 운을 뗐다.

“네.

몸을 뒤로 느슨하게 기댄 차태주가 듣고 있다는 끝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의 시선이 아직 물기가 남은 입술에서 목덜미 부근까지를 느긋이 훑어내렸다.

“저기, …죄송합니다.

“갑자기요?

“네. 제가 출근 주부터 너무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인 같아서요.

“…….

“그날 팀장님 말씀 듣고 많이 반성했어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앞으로는 진지하게 회사 생활 하면서, 제가 있는 일들을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사과를 가만히 곱씹는 차태주가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는 소회의실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

“…….

시선을 내리깐 차태주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한동안 이어지는 정적에 혹시나 실수라도 걸까, 손끝이 따끔거렸다. 곧이어 까슬한 목소리가 좁은 회의실 안을 울렸다.

“내가 우주 씨에게 너무 부담을 아닌가 싶습니다.

뜻밖의 격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사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남자에게서 들을 거라고 기대했던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대학생 인턴에게 업무적인 부분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우주 씨는 미대생이기도 하고요.

“…아.

“우주 씨에게 기대가 크다고 했던 업무 수행 능력보다는… 다양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

“아무래도 기존 팀원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사람이니까, 획일화된 사고가 아닌 새로운 시각을 보여 있겠죠.

역시, 그랬던 거구나….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 안도감으로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차태주가 테이블 너머로 팔을 길게 뻗었다. 곧이어 정수리 위로 안착한 손은 슥슥, 머리칼을 것인 거침없이 쓰다듬었다.

“내가 욕심이 나서 뽑은 사람인데, 생각해 보니 우주 입장에서는 버거웠을 같네요.

“…….

“너무 무리하지 말고, 우주 씨가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데 단단한 손바닥이 목덜미를 스쳤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목선을 따라 어깨 아래로 내려왔다. 차태주는 살짝 흐트러져 있던 넥타이와 셔츠 깃을 반듯하게 가다듬었다.

“앞으로 나도 우주 씨에게 신경을 많이 쓰겠습니다.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린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반듯한 모양을 되찾은 넥타이 매듭을 느릿하게 매만지던 손길이 금세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

방금 차태주가 슥슥 쓸어내린 앞머리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럼에도 차마 머리 위로 손을 올리지는 못하고 흘긋 눈치를 살폈다. 나지막이 나를 훑는 시선이 묘하게 집요하다고 느껴질 찰나,

[15]

얼마 폭삭 주저앉았던 호감도가 급격하게 치솟았다. , 대체 왜지? 얼떨떨한 마음에 입술만 벙긋거렸다.

“팀장님, 저도 정말로 팀에 도움이 되는 그런 팀원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감사한 마음이 훨씬 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처럼 느껴지던 차태주 루트에 희미한 빛줄기가 드리웠다. 감격스럽기까지 기분에 벅찬 목소리로 다짐했다.

“…아!

차태주는 대답 대신 잘생긴 손을 내게 불쑥 뻗었다. 이마 위에 지그시 닿는 손길에 놀라서 질끈 눈을 감았다. 이번에 차태주는 조금 짓궂은 얼굴로 방금 손수 말끔하게 가다듬었던 앞머리를 헝클어 버렸다.

“그럼 내일 봐요.

곧이어 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차태주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이 날렵하게 뻗은 탄탄한 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

순식간에 소회의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금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식은 만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다들 능숙하고 유능해. 보여서, 출근 첫날부터 과연 앞으로 내가 회사 생활을 잘할 있을지 압도되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업무적으로 너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 놓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차태주가 말했던 것처럼, 팀에서도 대학생 인턴한테 출중한 업무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을 같았다. 누구도 나한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지레 긴장하고, 그러다 보니 주눅 들게 되었다.

“혜영 대리님, 회의실 예약해 놓고 빔프로젝터 세팅해 뒀습니다!

“고마워요, 우주 .

그렇다면 과연 이곳에서 내가 있는 일들을 뭘까? 일단 공략 대상인 차태주뿐만 아니라 팀원들과 지내는 것이 먼저일 같았다. 다들 바쁜 와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도록, 밝고 명랑한 태도로 먼저 다가가고 잔일들을 적극적으로 챙기려고 마음먹었다.

화요일 오전에는 전체 회의에 참석했다. 어제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했더니 아침에 출근한 다음에도 머릿속이 멍멍했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회의실에 들어오기 진하게 내린 캡슐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 회의 시작할까요?

“네, 팀장님!

하지만 나보다도 늦게 퇴근한 차태주는 다음날 아침에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이 마냥 쌩쌩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한 슈트 차림의 차태주가 카리스마 있게 회의를 주도했다.

“단순히 금융 상품을 판매한다는 접근보다는, 생애 주기를 고려했을 이른 나이에 자산 관리를 시작하는 것이 실제로 이용자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각해 주세요. 이용자 단에서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있도록 흥미 요소를 가미해 주면 좋겠습니다.

애플리케이션 출시가 임박하면서 차태주 선에서 최종 검토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이 많을수록 전투력이 불타오르는지, 날렵한 턱선을 치켜든 차태주의 눈동자가 흑연처럼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음….

가장 구석 자리에 앉은 나는 회의 내용을 노트북으로 바지런히 받아 적었다.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리는 말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어제 공부를 해서인지 조금은 알아들을 있는 내용도 있었다. 막내인 내가 회의록이라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케팅 전략 관련해서는 올려 주신 내용 검토했습니다.

상석에 앉은 차태주가 마케팅 전략에 대한 피드백을 시작했다. 소비자 동향과 SNS 마케팅 사례는 내가 윤혜영 대리를 도와서 리서치 하던 내용이기도 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애플리케이션의 AI 상담사 캐릭터를 활용해 SNS 마케팅 전개하는 방향은 좋습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야 노련하게 주실 걸로 압니다만, 구체적인 콘텐츠 예시가 거의 없어서 모호합니다.

“…….

“새로운 소비자층을 공략하는 차원에서는 기존과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어야 텐데요. 지금으로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실이라, 엣지를 살렸으면 합니다.

좋은 의견 없냐는 차태주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족할만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전에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같았다.

“요즘에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마케팅이 MZ세대 사이에서 인기인데, 서울 시내 주요 스팟에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콘텐츠를 준비하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몽이를 실제 현실에 있는 캐릭터처럼 느낄 있도록요.

“좋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본질적으로, 단순히 귀여운 외향만으로 사람들이 캐릭터에 호감을 가질 같지는 않아서요. 몰입하게 만한 요소는 없겠습니까?

그러잖아도 애플리케이션 출시를 앞두고 팀에 업무가 몰리고 있던 차였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마케팅 전략은 이대로 마무리했으면 하는 기색이 다들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차태주는 그를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한 태도로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그러면… 캐릭터에 세계관을 더해 보면 어떨까요?

이대로는 도무지 회의가 끝나지 않을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썹을 살짝 치켜뜬 차태주가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83

“세계관이라고요?

제법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차태주가 되물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회의로 까슬하게 일어난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어… 아무래도 캐릭터가 어떤 과거나 배경이 있는지를 알게 되면 애정이 같아서요.

이건 뭐랄까… 조별 과제 의견을 제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음 말을 간신히 이어 나갔다.

내가 미대생이어서인지, 윤혜영 대리의 리서치를 도우면서 SNS 살피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콘텐츠를 선보이는 사례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특히 제품이나 서비스와 연결된 설정이 상세할수록 캐릭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예를 들면, 시공간에 균열이 생기면서 몽이가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건너온다든가요. ‘절망편 미래’를 맞이하지 않도록, 이용자들을 구해 주러요!

팀에서 출시 예정인 AI 기반 금융 상담 애플리케이션은 직장에 들어간 사회 초년생들이 현명하게 자산을 관리할 있도록 신용등급 관리, 지출 조언, 투자 제안까지 종합적으로 제공한다고 했다. 그런 서비스의 특징을 캐릭터의 배경 설정에 녹여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이용자들에게도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 괜찮을 같은데요? 그러니까, 아직 젊은 20 30 이용자들이 앞날을 대비할 있도록 몽이가 어려운 금융 상품도 쉽게 설명해 주고, 도움을 준다는 거죠?

“네, 그런 느낌으로요, 지원 과장님!

“흠… 캐릭터에게 친근감을 느끼면, 애플리케이션 자체 서비스에서도 이용자들이 AI 상담사가 주는 조언을 수용하게 같고요.

“세계관이 촘촘하게 짜이면, 몽이 가지고 SNS 채널에 올릴 웹툰 같은 것도 가볍게 만들어 있겠는데요?

막힌 같았던 벽에 한번 물꼬가 터지자 아이디어가 술술 이어져 나왔다. 팀원들이 다들 유능해서인지 간단한 착안이 그럴 듯한 구색을 갖추는 것도 금방이었다.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차태주가 흡족한 얼굴을 하자,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회의실 분위기도 조금 풀어졌다.

“애플리케이션 출시 목표를 캐릭터 성격에 반영한다는 발상이 마음에 드네요.

“…….

“우주 아이디어 기반으로 정식으로 기획안 준비해 주세요. 이건 지원 과장이랑 혜영 대리가 같이 줬으면 좋겠는데요.

지지부진 걸려 있던 마케팅 전략에도 드디어 차태주의 컨펌이 떨어졌다. 그러자 지쳐 있던 팀원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다들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우주 씨는 현직 대학생이어서 그런지, 아이디어가 굉장히 신선하네요.

“어유, 나는 이제 어린 친구들 말랑말랑한 뇌는 따라가겠어.

팀원들 몇몇이 너스레를 떨자 회의실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한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이제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단순한 아이디어를 것에 비해 과한 칭찬을 받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아, 감사합니다!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차태주가 나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길고 날렵한 눈매가 애정이 깃든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자 내도록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리면서 심장이 빠듯해졌다. 설레는 것처럼 조여드는 심장이 지금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차태주 때문인지 없었다.

“선재 차장은 컴플라이언스 이슈 없게끔, 규제 관련 내용도 챙겨 주시고요.

“네, 팀장님.

“마지막으로, 최종 테스트 일정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죠?

회의는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분명히 회의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피곤했는데, 갑자기 온몸이 가뿐하게 느껴졌다. 남은 시간 동안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회의록을 작성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 마무리하죠. 각자 맡은 부분 챙겨 주시고, 금요일에 이어서 마저 얘기합시다.

“넵, 팀장님.

“회의록 정리한 것은 공유 폴더에 업로드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우주 .

회의가 끝나자 ‘고생 많으셨습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인사와 함께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현생에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구르던 짬이 있어서인지 회사에서도 막내가 해야 일을 눈치 있게 챙길 있었다. 회의실에서 흐트러진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우주 .

분명히 차태주 역시 회의실을 완전히 나선 줄로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테이블 쪽으로 반쯤 숙이고 있던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훤칠하게 키가 차태주가 문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팀장님.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의 차태주가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날렵한 실루엣이 깔끔한 걸음걸이로 내게 가까워졌다.

“…….

테이블 위를 쓱쓱 문지르던 물티슈를 가만히 내려 놓았다. 나도 모르게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흘긋, 얼굴에 시선을 던진 차태주가 입꼬리를 설핏 끌어올렸다.

“우주 , 오늘 회의에서 기특한 아이디어를 냈던데요.

차태주는 지금까지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격려했다. 입가에 웃음이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것이, 칭찬을 바라고 있던 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목덜미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가, 감사합니다 팀장님!

아마도 지금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민망한 와중에도 차태주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칭찬은 뛸듯이 기뻤다. 감사 인사를 건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18]

“어….

그와 동시에 포마드로 매끈하게 넘긴 차태주의 머리 위에서 새빨간 하트가 부르르 진동했다. 호감도가 3% 추가로 오르다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생기나 보다! 기쁜 마음에 이번에는 차태주를 향해 크게, 활짝 웃었다.

“그래도 제가 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으면 좋을텐데요….

“충분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주세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린 차태주가 고개를 까닥였다. 곧이어 차태주의 단단한 손바닥이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을 차태주가 알아봐 것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조금씩이나마 팀의 일부가 되어 가는 벅찬 기분이었다.

***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65 (남은 시간: 34 22시간 45)]

토요일 아침, 기숙사 방의 거울을 통해 눈이 퉁퉁 붓고 피부가 까슬하게 솟아오른 얼굴을 쳐다보았다.

깜짝할 사이 주말이 돌아와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하루하루는 긴데 일주일은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번 주는 유난히 고되었으나 그만큼 뿌듯하기도 했다. 회사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게 것도 있었지만,

차태주(31) MK금융 혁신팀장

호감도 [23/100]

화요일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이후, 살뜰하게 막내 노릇을 하면서 차태주의 호감도를 야금야금 쌓아 두어서였다.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어느덧 20 넘어선 차태주 호감도를 보니까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는 도무지 게임을 이어 나갈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처음에는 차태주를 마냥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를 대하기도 약간은 편해졌다. 아직 정확히 어떤 포인트에서 호감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 차태주가 나에게 눈길을 조금씩 주는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도지훈만 남은 건가?

명은 공략을 완료하고, 명은 이제 루트가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 게임의 마지막 공략 대상인 도지훈만 만나면 됐다.

게임에 빙의하기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직업이 탑스타 연예인이라고 했던가? 현실에서 과금이 필요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캐릭터라면 게임 속에서 진행되는 루트도 만만치 않게 험난하겠지.

<SYSTEM> 현재 공략캐릭터 도지훈 루트 추가 진입이 가능합니다. 업데이트된 정보를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해 보세요!

기다렸다는 게임 애플리케이션에서 알림창이 재등장했다. ,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할 그랬나…. 강태양 루트를 클리어하자마자 떠올랐던 알림창인데, 일주일씩이나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 이제야 약간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 앞으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까지처럼만 해보자고 다짐하며, 도지훈 캐릭터 정보 탭을 클릭했다.

[도지훈 (29) 국내 최고의 배우]

물론 지금 확인할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얼굴 생김새가 베일에 감춰진 새까만 실루엣이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몸매를 드러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지를 살피자, 실내에 카메라와 조명이 보이는 것이 도지훈이 자리한 배경은 촬영 스튜디오 같았다.

[진입 퀘스트]

또한, 캐릭터 정보 하단에 있는 낯선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진입 퀘스트라니? 처음 보는 단어에 고개를 작게 갸우뚱했다. 이걸 통과하면 루트를 진행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공략 대상이었던 이라윤과 강태양, 차태주는 게임 스토리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날 있었다. 하지만 도지훈은 루트에 진입하기 위해서도 퀘스트를 뚫어야 한다니, 역시 최종 보스(?)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SYSTEM> 공략캐릭터 도지훈 [진입 퀘스트]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요]

*WARNING* 공략캐릭터의 도지훈 [진입 퀘스트] 원활한 진행을 위해 플레이어의 매력 수치를 100 이상 확보한 다음 시작하기를 권장합니다.

버튼을 누르자 시스템 창과 동시에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매력 수치라면… 그때 강태양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하면서 70 도달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매력 수치를 100까지 올리려면 차태주 루트까지 공략을 마쳐야 텐데…. 하지만 이제 제한 시간이 고작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난이도가 높다고 할지라도 일단 도지훈 루트도 빨리 개방하는 편이 게임 클리어에 유리할 같았다. 망설임 없이 ‘예’를 클릭했다.

<SYSTEM> [진입 퀘스트] X 찾아라”

서울 시내 곳곳에 흩뿌려진 단서를 통해 공략캐릭터 [도지훈]에게 접근할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성공 보상: 공략캐릭터 도지훈 루트 진입)

              

#84

단서라니? 도지훈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추리를 해야 한다는 건가?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게임 장르는 연애 시뮬레이션인데 퀘스트가 너무 빡센 같다. 덕분에 나는 현생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일들을 꼼짝없이 소화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래 불만을 품기도 ,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진입 퀘스트] X 찾아라”의 번째 단서가 플레이어에게 제공됩니다.

VANITAS, 생명과 죽음

젊음의 환희는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박제된 아름다움은 영원히 부식하지 않는다

2, 97, 3

그런데, 프레임 피사체는 과연 웃고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번째 단서는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모호했다. 일단 진입 퀘스트를 시작했으니 빨리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읽어 봤지만 여전히 아리송했다.

직업이 연예인이니까, 프레임 피사체는 도지훈을 의미할 텐데… 웃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건가?

추측할 있는 것은 그뿐, 나머지 말들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는 된다.

생명과 죽음, 젊음의 환희… 이런 추상적인 단어는 플레이어를 헷갈리게 하려는 트릭일 뻔했다. 언젠가 현생에서 친구들과 방탈출 카페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단서가 난해할수록 한눈에 들어오는 숫자에 답이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 혹시 맵에 숫자를 넣어 있지 않을까?

개의 숫자에서 얻어 있는 정보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번뜩 생각이 닿는 곳이 있었다. 처음 게임에 빙의했을 , 3D 기능을 따라 미술관에서 기숙사로 이동했던 기억이 났다. 서울 시내 곳곳에 단서가 퍼져 있다고 했으니 지금 역시 일단 어떤 식으로든 다음 장소로 움직여야 했다.

오랜만에 3D 기능에 접속하자 게임 세계가 미니어처처럼 늘어선 전경에 촘촘한 눈금이 빼곡했다. X, Y, Z축에 각각 (2, 97, 3) 입력하자 지도가 어느 장소를 가리켰다. 기숙사에서 걸어서 20 남짓 거리에 위치한 서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단서는 서점에서 찾을 있는 걸까?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도 맞아떨어지기도 실은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직감을 믿고 곧장 서점으로 달려갔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서점은 직장인들과 수험생들로 버글거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섰지만 매장 크기가 워낙 방대해 단서가 숨겨져 있다 한들 그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자기 계발 서적과 소설책, 에세이 섹션을 따라 걸었다. 주위를 바쁘게 두리번거렸지만 특이할 만한 점은 없었다. 서점이 퀘스트 장소가 맞긴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단서를 잘못 해석해 아예 잘못 짚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질 찰나,

“와….

매거진 섹션에 다다르자 절로 탄성을 터뜨리게 됐다. 패션 매거진의 표지 인물에게 홀린 듯이, 그와 눈이 마주쳐서였다.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배치된 매거진의 표지에서는 오만한 낯빛으로 끝을 치켜든 남자가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VANITAS]

게다가 표지 가장 위쪽에 있는 매거진 제목이 묘하게 낯익었다. 분명 번째 단서의 알쏭달쏭한 글귀에 포함되어 있던 영단어였다!

<SYSTEM> [진입 퀘스트] X 찾아라”의 번째 단서를 발견하였습니다.

때마침 떠오른 시스템 창에 듯이 기뻐졌다. 난이도가 높다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퀘스트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펄럭펄럭 매거진을 넘겨 표지 모델인 도지훈의 화보를 찾았다.

[도지훈, 닿을 없는 열망의 집합체]

실제로 만난 그는 유서 깊은 명화 속의 인물 같았다.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이 짐짓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음울하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의 미남자는 말수가 적지만 결코 수줍어하지는 않아서 더욱 신비로웠다.

미련 없는 태도가 보는 이의 음험한 욕망을 집요하게 이끌어 낸다. 끝머리가 살짝 올라간 눈매가 나긋하게 휘어질 때면, 그의 눈빛은 묘하게 색정적으로 변한다. 눈이 마주치는 바로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남자가 그를 내어줄 있을 거라는 달콤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것이야말로 연예인으로서 도지훈이 가진 독보적인 매력 아닐까. 보는 이가 어떠한 욕망을 투영하든 도지훈은 그를 능청스럽게 소화해 낸다. 모호성이 주는 신비감과 기꺼이 상대의 환상에 맞춰 주겠다는 냉소, 혹은 모두가 신기루라 할지라도 부단히 쫓고 싶어진다.

현재 촬영 중인 신작 <미스틱> 다가오는 8 MBS 방송국에서 절찬리 방영 예정이다. 타임 슬립으로 과거를 거슬러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자 분투하는 재벌가 자제로 분한 그의 색다른 면모를 기대해 본다.

타이틀부터 시작해서 기사 내용까지 다소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표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도지훈의 화보를 보자 모든 호들갑이 납득이 갔다.

도지훈은 하이 체어에 느슨하게 기대앉아 카메라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매끈한 이마에서 아슬아슬한 콧대로 이어지는 수려한 옆선 아래, 미세하게 말아 올린 입술이 드러났다. 짙은 음영을 그리는 내리깐 눈에서는 나른한 기색이 묻어났다.

, 정말 잘생기긴 잘생겼구나. 살짝 예민해 보이면서도 고압적인, 묘한 인상을 풍기는 중세시대 뱀파이어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무료하게 흐트러진 자세조차 우아한 예술품 같은 인상을 풍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지훈의 얼굴에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지훈의 화보 기사를 사선 읽기 했다. 번째 단서 역시 장소인 방송국을 가리키는 거겠지?

서울 시내를 바퀴 돌아 MBS 방송국으로 이동하자 시간 남짓이 흘러 있었다. 슬슬 오후가 느지막이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한시라도 빨리 방송국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정문에는 바리케이드가 단단히 쳐져 있었다. 보안이 삼엄해 보여서 저쪽으로 들어서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기왕 방송국까지 왔는데….

출입증이 없는 나는 방송국 출입이 어려울 같았다. 방송국 정문에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데… 아쉬운 마음에 괜히 방송국 건물 근처를 서성거렸다.

“아, 오늘 촬영은 제발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말도 , 부정 탈라. 옆에서 벼락이 쳐도 쥐죽은 듯이 있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야.

수런수런한 대화 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니 무리의 사람들이 밴에서 내리고 있었다. 밴에서 다양한 소품들을 내리고 있는 것이 방송국 촬영 스태프인 같았다.

사람도 많고 짐도 많아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은근슬쩍 그들 사이로 뒤섞였다. 촬영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소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스태프들을 따라 걸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바리케이드가 쳐진 정문이 아닌 관계자 전용 통로로 출입했다. 수십 명이 되는 무리 사이에 애매하게 끼인 채로 방송국에 후문에 가까워졌다. 드디어 방송국 내부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내디디려 ,

<SYSTEM> *WARNING* 현재 플레이어의 매력 수치로는 방송국 진입이 권장되지 않습니다.

삑삑, 효과음과 함께 시야가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 매력 수치가 모자라니 스토리 진행을 권장하지 않는다는 경고였다.

아니, 시스템이 경고까지 정도라고?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당장 도지훈 루트를 쭉쭉 진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그를 만나고 다음에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있을 거였다.

저벅, 저벅, 방송국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아직 나는 우수수 늘어선 촬영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살펴 그들과 갈라서 다음번 단서를 찾아보려고 생각하던 때였다.

드라마 <미스틱> 촬영 스튜디오

그러나 스태프들이 도착한 세트장의 안내판을 확인하자 더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미스틱>이라면 도지훈이 촬영한다는 드라마잖아? 엉겁결에 목적지에 도달한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정도로 운이 따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스튜디오 내부에는 카메라 여러 대와 하이라이트 조명, 마이크 볼이 어지러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설치된 세트장 한복판에서 수려한 미남자가 서슬 퍼런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우와….

투명 인간처럼 있어야 하는 알면서도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도지훈이었다.

게임에 빙의하기 전에 봤던 일러스트도, 패션 매거진의 화보도 도지훈의 실물이 풍기는 독보적인 분위기를 담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한눈에 사로잡을 만한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정작 스스로는 모든 것에 관심 없는 냉담한 표정이었다.

[️0]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 위로 반짝이는 호감도 수치가 주의를 끌었다. 그제야 지금 사람을 공략해야 한다는 나의 처지가 덜컥 실감이 났다.

“이봐, 당신 누구야?

도지훈에게 넋을 빼고 있는 사이 누군가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촬영장 스태프 하나가 나를 향해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아, ? , 하하… 그게.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려 노력했지만 그래 봤자 나는 신원 불명의 침입자였다. 약속이라도 것처럼 촬영장 모든 시선이 나에게 내리꽂혔다.

“뭐야,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 촬영장에 숨어들었어?

도지훈 역시, 세트장 구석에서 벌어진 때아닌 소란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85

“…….

“…….

싸늘한 시선. 어차피 그는 게임 캐릭터일 뿐이라는 알면서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헉….

[-1]

이어 미간을 살짝 좁힌 도지훈이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머리 호감도가 -1% 떨어졌다. 이럴 수가! 호감도를 올려도 모자랄 판인데 마이너스로 추락하는 실제로 보자 멘탈에 타격이 컸다.

“저 자식 촬영장에서 당장 끌어내!

당혹스러운 와중에 총책임자의 불길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출입을 권장하지 않는다지만, 이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여기서 붙잡히면 앞으로는 수습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손아귀에서 잽싸게 빠져나왔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고 무작정 달음박질을 쳤다.

세트장을 빠져나간 다음에도 한참을 쉬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분쯤 지났을까, 다행히 나를 쫓아오거나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헉, 허억….

무사히 세트장을 빠져나왔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에 손을 짚고 시큰하게 울리는 코끝을 쓱쓱 닦아냈다. 심장이 엉망으로 펄떡거리는 가슴팍이 크게 들썩거렸다.

“으… 진짜 큰일 뻔했잖아.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방송국 복도에서는 나의 존재감이 희미해서 안심이 됐다. 때마침 TV 촬영이 끝났는지 홀에서 방청객 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분주한 분위기 인파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방송국에 도착했고 심지어 드라마 세트장에서 도지훈을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단서를 발견하기는 퀘스트와 관련한 시스템 창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해 보니 진입 퀘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만 확인할 있었다. 어째서지, 올바른 접근 경로가 아니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이곳이 번째 장소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미련이 남아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면서 주변을 조금씩 돌아다녔다. 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바쁘게 헤매서인지 이제는 슬슬 지치려 했다.

이럴 거면 나한테 힌트라도 주면 되나? 지금 게임 클리어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았는데, 시스템 자체가 부당한 같다!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나답지 않게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려던 때였다. 거짓말처럼 복도 한쪽 끝에서 빛무리가 반짝였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그쪽으로 다가가자 공고판이 보였다.

<SYSTEM> [진입 퀘스트] X 찾아라”의 마지막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급구] 드라마 <미스틱>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 (초보 가능)

드라마 <미스틱> 지방 촬영 스태프를 구인합니다.

촬영 일자: 7 2(), 7 5(), 7 6()

촬영 장소: 경기도 양평

스태프: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 1

- 촬영 장비 세팅, 현장, 배우, 소품 관리 촬영 보조 역으로 초보도 지원 가능합니다.

- 연락처를 기재한 간단한 자기소개를 메일로 보내주세요.

, 이거였구나! 도지훈이 촬영하는 드라마 <미스틱> 구인 공고를 발견하자 마침내 떠오른 시스템 창에 안도감이 들었다.

왠지 지금 단계에서 내가 해야 했던 일은 방송국에서 공고를 발견하고 정식으로 촬영 스태프에 지원하는 일이었던 같다. 우연찮게 드라마 스태프들과 섞여서 스튜디오에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일이 꼬여 버린 아닐까?

어쨌든, 이게 마지막 단서라면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 기회를 계기로 도지훈 루트가 열리겠지. 공고에 나와 있는 날짜 7 2 일요일은 바로 내일인데 생각보다 일정이 빠듯해 보였다.

촬영 보조라니, 현생에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나이지만 이쪽으로는 전혀 경험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걸 대체 어떻게 해내지 싶겠지만 이제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 루트 진입과 관련된 사건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는 느낌이랄까? 지난번 소아병동 봉사활동 지원도 그렇고, 금융 대기업 인턴까지 붙었는데 초보도 지원 가능한 촬영 스태프 알바라면야 거뜬하지 않을까 시었다.

다만 나는 평일에는 회사에 가야 해서 지방 촬영은 어려울 텐데, 정도만이 걱정되었다. 어쨌든 더는 시간을 지체해서는 같아 자리에서 바로 공고의 메일 주소로 간단한 프로필과 연락처를 보냈다.

***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풀썩 드러눕자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주말이라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서점에서 방송국까지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피로감이 진했다.

“그래도 빨리 도지훈 루트 진입이 되어야 텐데….

같은 게임이지만 어떤 공략 대상과 교류하느냐에 따라 루트를 진행하는 동안 발생하는 사건이나 분위기도 달라졌다. 세부 장르가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차태주 루트에서 회사에서 서바이벌을 찍는 듯한 짜릿함을 맛보고 있다면, 도지훈 루트에서는 몸으로 고생하는 아닌지 벌써부터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를 두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인 보니, 드라마 제작진에서 전화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드라마 <미스틱> 제작진입니다. 연우주 핸드폰 맞으실까요?

“네,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 자리에 지원한 연우주라고 합니다.

-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기존 저희 스태프가 잘리는 바람에… 급하게 인력을 구하게 됐는데, 혹시 내일 시간 가능하신가요?

당장 내일 촬영이라고? 평일보다야 주말이 낫겠다 싶기는 했지만 그건 사정 때문이었다. 방송국 드라마라면 촬영과 제작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텐데, 당장 내일 촬영할 스태프를 오늘 구하는 것이 의아했다.

“아, 네네! 그런데 혹시 기존 스태프가 잘렸다는 게….

- , 심각한 아니고요. 그러니까… 개인 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희 제작진에 문제가 있는 전혀 아니랍니다.

“아, 그렇군요.

-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까 면접은 지금 전화로 간단하게 진행했으면 해요. 연우주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가지 있는데요.

“네, 듣고 있습니다!

드라마 스태프는 다소 조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작진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둘러대는 것을 보니 오히려 불안해졌다. 촬영장에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 연우주 씨는 평소에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나요?

“아 그게… , 사실 요즘에는 너무 바빠서 드라마나 영화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촬영장에서 센스 있게 챙기는 일들은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 역시… 그럴 알았어요. 잘됐네요. 여러 지원자들 중에 연우주 씨한테 연락 드린 건… 자기 소개를 읽었을 도지훈 배우에게 가장 관심이 없을 같은 사람이어서였거든요.

“도지훈 배우에게요?

- , 저희가 촬영 보조 아르바이트에게 가장 요청드리고 싶은 점은 주연인 도지훈 배우에게 사적인 관심을 내비치지 것입니다. 배우 컨디션 관리를 위해 몹시 중요한 부분이에요.

“아하….

- 또한, 따로 보안 각서를 쓰시겠지만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밖에서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그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연예인을 모르기도 하고… 주변에는 도지훈 배우나 촬영장에 대해서 궁금해 만한 사람이 없어요.

- , 정말 다행이네요. 저희 배우님이 신경이 예민하시기도 하고, 여러모로 케어해 드려야 하는 부분들이 있답니다.

초보도 가능한 아르바이트라고는 했지만, 전화 면접을 하는 동안에도 드라마 스태프는 업무 수행을 위한 경력이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도지훈의 비위를 맞출 있는 사람을 찾는 느낌?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한 뉘앙스였다.

- 그럼 내일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인사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는 , 드라마 스태프는 곧바로 내게 촬영 장소와 일정을 안내해 주었다. 면접이라고 하지만 명목상의 얘기일 , 사람을 걸러낸다기 보다는 촬영장에서 주의해야 사항들을 전달하려고 하는 같았다.

<SYSTEM> [진입 퀘스트] X 찾아라”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공략캐릭터 [도지훈] 루트에 진입하였습니다.

“와, 무사히 성공했어!

전화를 끊자마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시작을 권장하지 않는다는 경고 때문에 긴장했는데, 하루만에 무사히 도지훈 루트에 진입하게 보면 생각 이상으로 무난한 스타트였다!

하지만 도지훈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전화를 하는 스태프들이 불면 날아갈세라 도지훈을 애지중지하면서도 극도로 눈치를 보는 같아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강태양 때처럼 인터넷 검색이라도 볼까, 싶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어떻게 보면 셀럽이라는 점에서는 강태양과 도지훈이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강태양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내가 미리 알아봤던 정보나 루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출처가 흐릿한 루머에 괜스레 겁을 먹고 강태양과 티격태격하느라 더욱 고생했다면 모를까. 상대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파악한다는 좋지만은 않은 일인 같다. 나도 모르게 편견이 생겨나면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티가 수밖에 없으니까.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편견 없이 그냥 맨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일단 내일은 이른 새벽부터 촬영장에 나가야 하니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86

양평 로케이션 촬영은 이른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새벽녘에 문자로 안내받은 장소에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걸음 밖에서부터 주변에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카메라가 즐비한 별장이 촬영 장소라는 것을 알아볼 있었다.

호수가에 있는 별장 주변에는 물안개가 어스름하게 피어올랐다. 짙은 녹음이 빼곡하게 에워싼 별장은 아늑한 은신처를 닮아 있었다. 호젓한 공간이었지만 한적한 이상으로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흐릿해지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며 볼캡을 눌러 썼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혹시 어제 방송국에 숨어 들어갔던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스태프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인원 변동이 자주 있어서인지 일일 알바생인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딱히 없어 보였다.

“우주 안녕하세요~ 어머, 귀여운 얼굴을 모자로 가리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피부에 알레르기가 생겼는데… 혹시 벗고 있어야 하나요?

“그럴 것까진 없고요. 그나저나 급하게 구인했는데 일정 조율해 줘서 고마워요. 오늘 우주 씨가 도와줄 일은….

전화로 나를 고용한 사람은 드라마의 조연출이라고 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슬레이트를 받아들고 설명에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은 일을 잘하는 것보다는 현장 분위기를 파악하는 우선이었다.

메인 PD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촬영장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사심이 없어 보여서 나를 고용했다는 조연출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물론 도지훈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후에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도지훈은 컨테이너에 틀어박힌 좀처럼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사인이 정식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다른 배우가 먼저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장에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신기한 마음으로 연기를 이어 나가는 배우들을 구경했다.

“컷!

물론 지시에 따라 때마다 열심히 슬레이트를 치는 역시 잊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내가 있는 최선은 일단 촬영장의 스태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었다.

“잠깐, 촬영 당장 중단해 주세요!

그대로 삼십 남짓이나 지났을까. 유리창에 내리꽂히는 야구공 같은 갑작스러운 외침에 촬영장이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촬영 중단을 요구하는 사람은 도지훈의 매니저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의 비호를 받으며 도지훈이 컨테이너에서 빠져나왔다.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살짝 비틀거리는 그를 험상궂은 인상의 경호원이 단단히 부축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도지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지훈 배우 컨테이너에서 정체불명의 박스가 발견되었습니다.

“정체불명의 박스라니? 대체 뭐가 들어 있었길래?

“그게, 배우님께서 직접 열어 보고 충격을 받으셨는데… 일단 누가 들여놓은 물건인지부터 확인해 봐야 같습니다.

이어지는 자초지종을 듣는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질렸다.

도지훈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에 얼핏 평범해 보이는 선물 상자가 도착해 있었다. 팬들이 보낸 선물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 컨테이너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찜찜했다고 한다.

그렇게 직접 열여 상자 속에는 곰인형이 들어 있었다. 잘게 쪼갠 면도칼이 몸통과 팔다리 곳곳에 꽂힌 섬뜩한 상태로.

‘사...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라는 집요한 메시지를 담은, 혈흔으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와 함께였다.

“대체 누구 소행인데, 요새 촬영장 보안을 어떻게 체크하는 거야?

촬영장에는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사방에 노란색 테이프가 둘려 있었다. 게다가 서울도 아니고 지방, 그것도 대중교통이 오가지 않는 외진 곳에 자리한 별장이었다. 범인이 누가 되었든, 이곳까지 찾아와 몰래 상자를 컨테이너에 밀어 넣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다.

“아무래도… 스토커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그동안은 짓궂은 장난 수준으로 넘길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하네요.

도지훈 정도의 톱스타에게 집요한 스토커가 붙는 것이야 어떻게 보면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정당화될 없는 병적인 집착을 담아 팬레터를 보내던 스토커는 도지훈이 무시로 일관하자 최근에는 번호를 알아내서 문자를 보내고 전화로 연락까지 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번호를 바꿔 봤자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나. 정도까지는 당혹스럽지만 극성스러운 팬심이라고 넘길 있었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순간부터는 이상 그렇지 않았다.

적나라한 악의를 맞닥뜨린 도지훈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가 가만히 한숨만 내쉬어도 스태프들은 혼비백산해 어쩔 몰라했다.

“아, 세상에….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하필 이런 사고가 발생한 날에 촬영장에 오게 되다니…. 아니면 역시 게임 스토리 진행의 일부일까? 하지만 이런 배경 설정이 있다면, 도지훈은 낯선 사람이 자기한테 접근하기만 해도 의심부터 텐데….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루트 시작부터 난이도가 극악이었다.

촬영이 중단되고 도지훈이 고용한 경호 인력이 촬영장에 있는 전체 인원에 대한 몸수색을 진행했다. 불만스러운 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지만 촬영장의 안전이 최우선이니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역시 스태프들 틈바구니에서 쫄래쫄래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다음, 가까이 오세요.

경호원이 스태프의 몸을 샅샅이 훑어내리는 동안 의자에 앉은 도지훈은 머리가 아프다는 이마를 짚고 있었다. 까칠하게 신경이 곤두선 끝을 오만하게 들어 올렸다.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집요한 눈으로 스태프의 면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뜯어 보았다.

“거기 .

나른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자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나를 부르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범인이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바짝 쳐들자 도지훈은 우아하기 짝이 없는 손동작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1]

때마침 존재감을 알리는 머리 위의 호감도를 확인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간결한 동작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도지훈이 저벅저벅, 나에게 다가왔다. 형형한 눈빛이 나에게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허공에 가볍게 손가락을 휘저은 그가 끝을 까딱거렸다.

“모자 벗어 .

“모, 모자를요? 그건 갑자기 ?

“두 말하게 하지 말고.

제발,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은 촬영장, 적막을 틈타 모든 사람이 나와 도지훈의 대치를 눈여겨봤다. 이거 아무래도 손으로 벗지 않으면 강제로 벗겨질 기세였다.

“하아….

그렇다면 나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으로 벌벌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벗어 내렸다.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아래로 늘어지려는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대로 도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그럴 알았어. , 어제 방송국 무단 침입한 새끼 맞지?

아니 어떻게, 잠깐 동안 스쳐 기억할 있지? 이제 보니 도지훈은 예민한 것뿐만 아니라 예리하기까지 사람이었다.

“맞네 맞아, 머리 스타일이 그때 그놈이랑 똑같아요.

“피부에 알레르기는 무슨, 보들보들하기만 하잖아….

“아니, 요새 촬영장 스태프 채용을 대체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 거야!

도지훈의 폭탄 발언을 기점으로 시작으로 촬영장이 마구잡이로 술렁거렸다. 하나둘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를 직접 뽑은 조연출은 엄청난 배신감을 표출했다.

아씨, 방송국 함부로 진입하지 말라고 시스템 들을걸. 역시 하지 말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짙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아니 대체, 지금 얼마나 엄중한 시기인 알면서! 도지훈 배우 컨디션 관리가 최우선인데, 어제는 촬영장 무단 침입에 오늘은 이런 사고가 터져?

촬영장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이대로 도지훈 루트가 끝장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지훈 루트에 실패하면 단순히 공략 대상 명을 포기하는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그것만은 막아야 !

“어, 어제 방송국에 무단 침입한 맞지만 박스를 촬영장에 가져온 제가 아니에요!

이대로 도지훈의 스토커로 몰릴 수는 없었다. 용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어디로 봐도 수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내가 봐도 앞뒤가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실제로 오늘 사건에 대해서는 떳떳하기도 했고 말이다.

“제가 정말 범인이라면, 어제 방송국에도 허술하게 무단 침입하고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이렇게 눈에 띄는 경로로 촬영장을 찾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들킬 보듯 뻔한데!

              

#87

결백을 호소하기 위해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처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략을 위해 주어진 시간 안에 도지훈한테 접근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대책 없는 짓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식으로 의심을 만한 행동을 리가.

“도지훈 번호까지 알아낼 정도로 치밀한 지능범이 이런 짓을 한다는 이상하긴 한데….

지금 나는 어떤 식으로든 수상해 보일 테니 차라리 역발상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다행히 나를 둘러싼 스태프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몸수색 결과 무기나 위험 물질을 가지고 있는 같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채용 전에 친구 범죄 경력 조회도 했는데 아주 깨끗했답니다.

또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정황 역시 하나둘 드러났다. 실제로도 결백하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과 함께 주위가 술렁거렸다. 하긴, 어디로 봐도 얼굴이 범죄자 상은 아니라는 속닥거림이 번졌다.

“그래도 말이야, 사람을 뽑기 전에는 제대로 알아봐야 아니야. 어떻게 당장 어제 촬영장에 숨어든 놈을 걸러내?

“하지만 배우님께서 갑자기 눈에 거슬린다고 지난번 스태프를 자르는 바람에 급하게 사람을 구하려다 보니까 저희로서도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요. …아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배우님 잘못이라는 아니고, 배우님으로서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요.

“…….”

“게다가 연우주 씨는 지원자 중에서 유일한 머글, 그러니까 대중문화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다고요.

메인 PD 조연출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심장이 아프게 콩닥거렸다. 잘하면 이번만큼은 해프닝으로 매듭짓고 넘어갈 있을 같았다.

하지만 순간에도 도지훈만큼은 나에게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찝찝한 구석이 있는 거야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는 같은데. 오늘 촬영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사람은 그냥 돌려보내면 어떻겠습니까?

, 가볍게 혀끝을 메인 PD 도지훈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신호로 나를 흘긋 돌아본 도지훈이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수려한 얼굴이 불만족스럽게 일그러지자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쪽, 이름이 뭐라고 했죠?

“네, 네넷?

“…….”

질문이 득달같이 내리꽂히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지훈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눈썹을 느릿하게 치켜떴다. 맞다,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지…. 당장이라도 성큼 내게 다가와 목을 졸라도 이상하지 않을 서슬 퍼런 분위기에 몸이 움찔 떨렸다.

“저, 저는 연우주라고 합니다.

“그래요. 연우주 , 잠깐 볼까요?

나긋한 눈웃음을 흘리며 도지훈이 사근사근 속삭였다. 지극히 상냥하고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싸늘한 눈빛 때문인지 나를 오만하게 깔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뿐만 아니라 PD 조연출을 포함한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물론 단순한 심증만으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서도 되고요.

“…….”

“최근 스토킹이 이어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버린 같네요. 촬영장에 계시는 여러분들께 폐를 끼칠까 송구한 마음입니다.

“…….”

“다만…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가지 있어서, 연우주 씨와 둘이서 얘기를 하면서 확인했으면 하는데요. 조심해서 나쁠 없으니까요.

그러자 능숙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도지훈이 풀죽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말간 눈동자를 힘없이 깜빡이는 도지훈의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처연한 도지훈은 떨기 백합 같았다. 당장 그의 표적이 나마저도 자연스럽게 애처로운 마음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 그렇지만 배우님, 사람이랑 단둘이서 이야기를 한다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방금 몸수색은 마쳤다고 했었나요? 그렇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컨테이너 앞에 경호 인력만 대기시켜 주세요.

, 아슬아슬하게 한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도지훈은 순식간에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있었다. 그렇지만, 도지훈이 괜찮아도 나는 괜찮지 않은데! 하지만 이제 그럴듯한 명분까지 생겨난 이상 지금 상황에서 쉽게 빠져나갈 만한 여지는 없어 보였다.

“배우님, 힘내세요!

벅찬 감정이 고조된 누군가의 응원 소리에 도지훈이 피식 웃었다. 아찔한 외모를 이용해 사람들을 완벽하게 매료시킨 도지훈이 나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휘적휘적, 우아한 걸음걸이로 도지훈은 컨테이너를 향했다. 어쩔 모르겠는 기분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그래서, 누구 사주를 받고 여기까지 걸까?

아니나 다를까 컨테이너의 문이 닫히자마자 도지훈의 얼굴색이 변했다. 역시, 방금 전은 전부 연기였어! 연약하면서도 우수 어린 듯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증발하고 도지훈은 나를 향해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같잖은 말장난이랑 반반한 낯짝으로 다른 사람은 속일 있을지 몰라도, 그따위 개수작이 나한테까지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야.

“…….”

“말해. 대체 정체가 뭐야?

대외적인 멘트와는 다르게 도지훈은 내가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결백을 증명해야 했지만 도지훈을 코앞에서 마주하자 기가 눌렸다. 상대를 압도하는 독보적인 카리스마에 그와 오래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웠다.

[-1]

도지훈의 머리 위에서는 탁한 붉은색의 하트가 위태롭게 번뜩였다. 여기서 호감도가 떨어지면 텐데…. 호감을 사도 모자란 상황에 나는 이미 그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같았다.

“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대학생이고,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이곳에 거예요.

“그냥 대학생이라. 어제 촬영장에 무단 침입한 것도 단순한 우연이었다는 얘기인가?

“그건, 방송국 안을 걷는데 저도 모르게 <미스틱>이라는 제목이 시선을 잡아끌어서…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있다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마음먹고 스토킹을 하려고 했다면, 누구라도 저처럼 허술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가 놓았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도지훈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그가 나를 본격적으로 취조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에는 관심이 없지만, <미스틱>이라는 드라마에는 집착해서 촬영 스태프에까지 지원했다?

“아, 하하…. 주제가 흥미롭잖아요, 타임 슬립을 해서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이라니.

“…….”

“그리고 요즘 같은 시국에, 이렇게 일당을 후하게 주는 아르바이트가 그렇게 많지 않답니다?

궁지에 몰리자 결국 아무 말이나 늘어놓게 됐다. 눈썹이 아래로 늘어뜨려지고, 한숨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게임 공략이라는 목적을 털어놓지 않고 도지훈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했다.

“까고 있네.

그런 내가 우습다는 도지훈이 빈정거렸다. 허둥지둥 말을 주워섬기면 어설퍼도 넘어가 주던 다른 공략 대상들과는 전혀 달랐다. 상대방의 내면을 남김없이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선뜩해졌다.

“뭐, 네가 이따위 나쁜 장난질을 새끼가 아니라는 알겠어. 남을 직접 해칠 만큼의 배짱마저도 없어 보여서 말야.

냉소적인 웃음을 입가에 비뚜름하게 매단 채로 도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발짝, 발짝 나에게 가까워졌다. 키는 컸지만 몸이 마르고 탄탄한 도지훈의 걸음걸이는 몸이 살랑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가뿐했다.

“그런데 지껄이는 말마다 아귀가 맞는 구석이 어디 둘이어야지.

도지훈은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만들어 끝을 잡아들었다. 그대로 상반신을 깊숙이 숙이고는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 살폈다. 빼곡히 차오르는 긴장에 , 짧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러자 도지훈은 속눈썹에다 대고 , 바람을 불었다.

“으….

간신히 눈을 떠올리자 퇴폐적인 색으로 물든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짐짓 유혹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시선에 심장이 발끝까지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 똑바로 떠야지.

“…….”

“겨우 정도 각오로 나를 찾아온 아닐 아냐.

설마 이래서 매력 수치를 끌어올리고 루트에 진입해야 했다고 건가…. 이대로 그에게 압도당할 것만 같아, 단둘이서는 도지훈을 상대해 자신이 없었다.

“난 네가 견디게 거슬리거든. 분명히 배후에 어떤 목적을 숨기고 있는 같아서.

…도지훈의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도지훈의 안위에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연애 시뮬레이션 공략의 일환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게임 클리어에 필요한 만큼만 호감도를 올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하지만 차마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의심 많은 성격인 도지훈이 믿지 않을 눈에 훤할뿐더러, 도지훈은 사심 아닌 사심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다고 하면 오히려 범죄가 목적인 것보다도 한층 질색할 같았다.

“뭐, 쉽게 본심을 털어놓을 마음은 없는 모양인데.

“배, 배우님….

내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도지훈의 얼굴에 역시 그럴 알았다는 식의 냉소가 번졌다.

“그럴수록 수상해 보인다는 알고 있을 테고. 나는 대체 네가 무슨 의도로 나한테 접근했는지는 알아내야겠어.

“…….”

“앞으로 당분간은 관찰이 필요하겠네. 적어도 제대로 물증을 잡아낼 때까지는 말야.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도지훈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도지훈의 정서 안정이 1 목표라는 제작진의 걱정과는 다르게 직접 마주한 그는 오히려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처럼 느껴졌다. 그걸로도 모자라 묘한 위화감까지 풍기는 것이,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를 내버려 먼저 컨테이너를 빠져나간 도지훈은 메인 PD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방금 전까지 나를 몰아붙이던 거짓말처럼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파리해 보였다.

“아… 이제 어쩌면 좋지.

모든 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의 눈에는 그런 도지훈이 가증스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촬영장을 나서면 앞으로 도지훈 루트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 거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상황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연우주 씨를 당분간 저희 촬영장의 특별 스태프로 고용했으면 하는데요.

도지훈과의 대화를 마친 메인 PD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심각한 표정으로 도지훈의 토로에 기울이더니, 대체 어쩌다가 저런 결론이 나온 거야?

“네? 저를요?

“요즘 도지훈 배우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미심쩍기도 하고, 당분간은 연우주 씨가 촬영장에 있어 줬으면 하세요.

“…….”

“물론 연우주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아닙니다. 그래서 강제로 묶어 두는 아니라, 스태프로 채용하겠다는 거고요.

“그, 그치만 저는 평일에는 회사에서 인턴십을 해서요. 그보다 특별 스태프라니 대체 어떤 일을….

“뭐 일이라고 한다면야… 촬영장에서 도지훈 배우의 시야가 닿는 곳에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

“너무 불쾌하게만 생각하지는 마시고, 일단 저희도 촬영은 이어 나가야 아닙니까? 금전적인 보상이라면 충분히 주겠습니다.

촬영장에 머무르면서 도지훈의 곁을 지켜야 한다니 당혹스러운 요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그를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기도 했다. 진짜 촬영 스태프보다야 몸도 훨씬 편하겠지만… 그보다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도지훈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면, 말씀 주신 특별 스태프라는 걸… 주말 동안에만 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망설임 끝에 되물었다. 고개를 갸우뚱한 메인 PD 다시금 도지훈에게 돌아가 한참을 속닥거렸다. 얼마간의 논의 끝에 결국은 내가 주말 동안에만 도지훈을 전담하는 특별 스태프로 근무하는 것으로 극적 타결되었다.

손을 더럽히는 일은 다른 사람을 시킨 도지훈이 멀찍이서 나를 지켜보며 비뚜름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도지훈을 있게 되어서 다행인 걸까? 물론 그대로 범죄자로 찍혀서 촬영장에서 강제로 끌려 나가고 접근이 차단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지훈과의 접점이 생겨난다 해도 호감도를 올리는 일과는 점점 멀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88

월요일 아침, 조금 일찍 출근한 사무실은 평화로웠다. 전쟁터 같은 평소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아직 사람들이 드문드문한 사무실을 가볍게 둘러보고 기지개를 켰다. 팀에서 공유하는 업무 로그를 업데이트 다음, 오늘 일을 미리 훑어보고 있었다.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저벅저벅, 큼직하게 바닥을 스치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귀에 꽂혔다. 그다음으로는 깨끗하면서도 서늘한 향이 공기 중에 희미하게 퍼졌다.

“아!

뒤를 돌아보니 차태주가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매사 깔끔한 그의 성격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훤칠한 키와 널찍한 어깨가 돋보이는 슈트 재킷을 걸친 차태주는 무심한 표정으로 오피스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새삼스럽게도 오늘따라 차태주가 잘나 보였다. 물론 팀원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만큼 때때로 원망도 산다지만, 한눈에도 유능하고 근사해 보이는 차태주가 팀장님이어서 막내 팀원인 나도 조금쯤 으쓱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차태주의 손에 커피가 들려 있지 않았다. 평소 아침이면 차태주가 1 프랜차이즈 커피샵의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오던 것을 떠올렸다. 행동까지 고민은 짧았다. 곧바로 사이렌 오더를 넣고 건물 아래층으로 커피를 픽업하러 갔다.

홀더를 타고 내린 아메리카노의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일회용 커피잔을 다시 단단히 고쳐 쥐고 차태주의 오피스 앞에서 똑똑, 유리문을 두드렸다. 어느새 슈트 재킷을 벗고, 드레스 셔츠의 팔뚝을 걷어붙인 차태주가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주말 보내셨어요?

“우주 , 좋은 아침.

쪽에 있는 나에게 흘긋 시선을 던진 그가 빙긋 웃었다. 매끈하게 정돈된 머리 위로는 [23] 지난주에 부지런히 올려 호감도가 반짝거렸다.

“저기, 팀장님… 혹시 커피 드실래요?

“나 주려고 거예요?

의외라는 눈을 살짝 크게 차태주가 끝을 까딱거렸다. 그를 신호 삼아 차태주의 오피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널찍한 원목 데스크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커피에서 하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팀장님 평소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좋아하시는 같아서요.

“그러잖아도 내려갔다 올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눈썹을 살짝 치켜뜬 커피를 내려다보는 차태주는 다행히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갈한 손가락이 커피잔을 감싸더니 차태주가 커피를 느긋하게 들이켰다. 향긋한 원두 향이 오피스 안에 부드럽게 퍼지면서 차태주의 눈매도 조금쯤 누그러졌다.

“저번 주에 여러 가지로 챙겨 주셔서 감사했어요, 팀장님. 신경 주신 덕분에 회사에 조금이라도 적응할 있었던 같아요.

그러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확실히 냉랭한 기류만 흐르던 예전보다는 조금이나마 친해진 같기도 했다. 차태주는 대답 대신 흥미롭다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는 안에 담긴 것이 적의가 아니라 호의라는 알기에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팀장님, 이번 주도 화이팅하세요!

“고마워요, 우주 . 우주 씨도 이번 힘내고요.

[25]

주의 시작, 씩씩한 인사와 함께 차태주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던 차태주 루트도 이제는 안정적으로 순항하고 있었다.

***

MK금융에 입사하고 나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사람이 너무 바쁘면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을 전혀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회사 안에서도 악명이 높은 차태주 팀장의 팀이어서인지, 인턴이라지만 업무 자체를 만만하게 수는 없었다. 물론 내게 주어진 일은 비교적 중요도가 낮고, 절대적인 양도 적었지만 펑크가 나지 않으려면 없이 일해야 하는 것은 다른 팀원들과 똑같았다.

그렇게 쏟아지는 일을 정신없이 내다 보니 벌써 수요일이 되어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에는 이곳이 게임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탈출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의식이 확고했는데, 아무래도 게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경계가 흐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몸은 고생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안하기도 했다. 게임 공략을 혼자서 헤쳐 나갈 생각을 하면 아무래도 당장 앞을 내다볼 없다는 생각에 금세 머리가 아파졌다. 하지만 회사 일을 하는 동안에는 생각은 하고, 눈앞에 닥친 일만 내면 하루가 지나갔다.

“와, 과장님 고양이 진짜 귀여워요!

그리고 하나의 팀으로 고생하는 만큼 그동안 다른 팀원들과도 조금 친해질 있었고 말이다. 오전의 급한 일을 내고 팀원들과 함께 조금 늦게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의 대화 주제는 김지원 과장이 기르는 고양이였다.

“얘들 눈이 엄청 땡글떙글해요. 사진 봐도 괜찮아요?

“하하, 그럼요. 여기 갤러리에서 장씩 넘기면 돼요.

“하얀 애가 이름이 코코고, 치즈냥이가 모모인 거죠?

“맞아요. 코코가 첫째고, 모모는 올해 초에 입양했어요.

“둘 완전 미묘네요…. 저도 고양이 키우고 싶었는데 방이 좁기도 하고, 아무래도 어렵더라고요.

보들보들해 보이는 털에, 도도하면서도 시크한 표정과 손바닥의 말랑말랑한 젤리까지, 보면 볼수록 사람 홀리도록 매력적인 고양이들이었다. 사진을 넘기다, 깃털 장난감을 잡기 위해서 카메라 쪽으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치즈색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터졌다.

“팀장님이 우주 예뻐하는지 같네요. 확실히 밝고 긍정적인 친구가 들어오니까 분위기가 사는 같아.

갤러리를 바퀴 순회한 다음 김지원 과장에게 핸드폰을 다시 내밀었다. 내게서 핸드폰을 받아든 김지원 과장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덧붙였다. 좋게 봐주신다니 나로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의아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예뻐한다니?

“…칭찬 감사합니다, 과장님!

차태주와 나의 관계를 묘사하기에는 다소 동떨어진 단어였다. 그를 곱씹느라 발짝 늦게 대답하자 김지원 과장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쿡쿡 터뜨렸다. 내가 어떤 의문을 품었는지가 표정으로 훤히 들여다보인 듯했다.

“원래 얼음장같이 냉정한 사람인데, 그만하면 우주 씨한테는 정말 유하게 대하는 거예요.

“…아, 정말로요?

“예전에는 분위기 지금보다 훨씬 막혔다고요. 이제야 나도 조금 숨통이 트일 같네.

김지원 과장이 손등을 팔랑팔랑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곧이어 점심 테이블의 주제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유튜브 개그 채널로 흐르듯 옮겨 갔다. 별다르게 특이할 만한 점이 없는, 가볍고 일상적인 점심시간의 대화였다.

하지만 오후에 일을 하는 동안에도 별것 아닌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지만 지금까지도 차태주는 나에게 보여야 하는 상사로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못하다가, 차태주가 나를 예외적으로 대한다는 말을 듣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정말로 차태주 팀장님이 나한테만큼은 유하게 대하시나?

여덟 시가 지나자 팀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오후에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역시 너무 늦지 않게 일을 마무리할 있었다. 그러니 충분히 가방을 챙기고 회사를 나서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자리를 뜨는 대신 괜히 차태주의 개인 오피스 쪽을 기웃기웃거렸다. 오전에는 팀이 워낙 바빴고, 오후에는 차태주가 임원 회의에 참석하느라 오늘 하루는 차태주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일만 하려고 회사에 아니니, 팀장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면 좋을 같았다. 어쨌든 게임 플레이어로서도 나는 차태주와 보다 친밀해져야 했으니 말이다.

아직 차태주의 짐은 오피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같은데, 아무래도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30분만 차태주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몽이는 약간 겉바속촉 같은 성격이면 귀엽겠다. 말투는 틱틱거리고 까칠한데, 사실 속내는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는 거니까….

터치펜으로 핸드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애플리케이션의 AI 상담사인 몽이 캐릭터에 이런저런 설정을 더하며 끄적거렸다.

지난번 회의 이후, 다른 팀원들은 몽이를 중심으로 캐릭터 마케팅 기획안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내가 아이디어가 실제로 팀의 업무에서 차근차근 구현되니 나름대로 몽이에 대한 애정도 생겼다. 그래서 시간이 때마다 틈틈이 캐릭터를 정교하게 잡아보고 있었다.

“하….

그러던 와중 신경질적인 한숨 소리가 공기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파티션 쪽으로 들어서는 차태주가 보였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차태주는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당장 무엇 하나 부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슬 퍼런 기운에 흠칫하게 되었다.

“어, 팀장님!

“아직 집에 갔네요?

왠지 타이밍이 너무 좋은 같은데… 자리에서 어설프게 일어섰다. 차태주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는 나를 보고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내 당황을 지워 내고 평온한 표정을 꾸며낸 그가 쪽으로 다가왔다.

“네… 이제 슬슬 가려고요. 그보다 팀장님, 혹시 무슨 있으셨어요?

그와 동시에 서늘한 향수 향에 섞여든 쌉싸래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차태주는 평소 연이은 야근에도 끄떡없는 강철 체력을 자랑했지만, 머리칼과 셔츠 깃이 흐트러진 지금의 그는 다소 지쳐 보였다.

              

#89

“팀원들까지 신경 쓰게 일은 아닙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차태주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피로감이 스며든 까슬한 얼굴에는 그가 받는 스트레스가 역력히 드러났다.

애플리케이션 출시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조율해야 일들이 많아졌다고 했나. 평소 팀원들에 대한 요구 사항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그만큼 차태주 본인이 팀을 위해 감당하는 책임도 막중했다. 평소에는 슈퍼맨처럼 모든 일을 감당해 내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팀장님….

매사 완벽한 사람이 드러낸 흐트러진 면모를 고스란히 마주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팀을 위해 고생하는 차태주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다지 팀원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엿보게 같아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누가 우주 씨한테 일을 떠맡긴 겁니까?

“아….

“내가 있어요? 벌써 시가 되어 갑니다.

“아뇨 그런 아니고… 막상 집에 가려니 시간이 애매해서, 팀장님한테 인사드리고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집에 가려니 시간이 애매해서 팀장님께 인사를 드린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데스크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댄 차태주는 적나라한 모순을 웃어넘겼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차태주가 팔을 길게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네. 우주 씨가 나를 신경 주고.

차태주가 높낮이 없이 나지막한 어조로 읊조렸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진심으로 고마운 건지, 아니면 빈정거리는 건지 모를 했다. 단정한 얼굴은 평소보다 까칠하게 곤두서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은 아슬아슬하게도 느껴졌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에는 하고 있었어요?

책상 위로 손을 짚은 차태주가 친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평소의 철벽이 꺼풀 벗겨진 그가 나에게 관심을 내비치자 어쩐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게….

머뭇거린 끝에 몽이 그림을 여러 그려둔 핸드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많이 어설플 테지만… 그래도 차태주가 어이없다는 웃어 주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좋을 같았다.

“이거, 몽이인가요?

미간을 가늘게 찌푸린 그가 물었다. 가지런한 입술 사이로 튀어 나온 귀여운 어감의 단어가 어색했다. 자세히 봐도 되겠냐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차태주는 핸드폰을 가까이 가져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그려 캐릭터 스케치와 4 만화를 살폈다.

“아, ! 그때 시공간에 균열이 생겨서 몽이가 현대 한국에 갑자기 떨어지게 거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조금 촘촘하게 생각해 봤어요.

“…….”

“몽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이용자들이 미리미리 자산 관리를 시작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미션이 있어도 좋을 같고… 그때 팀장님께서 애플리케이션 출시 목표를 세계관에 녹인 좋다고 하셨어서요.

“그래서 지금 몽이가, 그러게 다들 말을 미리미리 듣질 그랬냐고 답답해하고 있는 겁니까?

“네… 몽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캐릭터 세계관을 정교하게 짜다 보니까 저절로 몽이의 처지에 이입이 되었다. 내가 몽이라도 것처럼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자, 차태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눈치를 살피자 차태주의 표정이 방금 전보다 한층 밝아져 있었다.

“우주 덕분에 오늘 하루 처음으로 웃은 같네요.

정갈한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렇게 한바탕 시원스럽게 웃어젖힌 차태주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아….

“같이 나가죠. 집까지 태워다 주겠습니다.

차태주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내뱉은 말에, 뜻을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싸늘한 공기가 고여 지하주차장에 발자국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차태주의 얼굴 윤곽선이 어스름하게 드러났다. 빈약한 빛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나도 모르게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다.

- 소리와 함께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진회색 아우디의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자동차가 뿜어 내는 빛이 앞서 걸어가는 차태주를 기다랗게 덮쳤다. 정신을 다잡고 그를 뒤쫓아 조수석에 올라탔다.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난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차태주의 아우디가 뻗은 도로 위를 막힘 없이 미끄러졌다. 눈을 살짝 가늘게 차태주는 전혀 힘들이는 기색 없이 손목만 살짝씩 꺾으면서 능숙하게 운전했다. 성격처럼 깔끔한 그의 운전 솜씨 덕에 승차감이 매끈하고 편안했다.

차는 신속하게 여의도를 빠져 나갔다. 창문 밖으로는 까마득하게 가라앉은 밤하늘 아래로 길게 펼쳐진 강물이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깊이 출렁이는 물결은 강변의 고층 빌딩이 뿜어 내는 현란한 빛을 아득하게 머금고 있었다.

“와아….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자 차태주가 흘긋 쪽을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어둠 사이로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얼굴이 유난히 희게 빛났다. 다음번 우회전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낭랑한 알림과 함께 차태주의 길쭉한 입꼬리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드라이브라도 나온 기분인가 봅니다.

“아…. 제가 너무 놓고 있었나요?

“우주 씨가 편안해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긴장이 풀리네요.

그래도 상사와 함께 차를 건데, 너무 없이 늘어져 있었나…. 하지만 막상 돌아본 차태주는 조금은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최근 호감도가 급격하게 오른 탓인지, 차량 내부를 감싸는 분위기도 몽글몽글했다. 차태주와 함께 있을 때에는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받을까 항상 긴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회사를 빠져나온 지금은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사적인 시간을 보낼 있었다.

“그런데요, 팀장님.

“네.

“아까 그림 칭찬해 주셔서 좋았어요. , 팀장님은 애플리케이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셨잖아요.

“…….”

“그런 분이 좋다고 주시니까, 정식 인증이라도 받은 기분이랄까요? 히히.

얘기로 물꼬를 텄지만 사실 일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아니었다. 우리 사람을 잇는 공통 주제가 일이었을 , 나는 그에게 나름대로 친근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같다.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주 씨가 우리 애플리케이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던 같던데요. 어쩌면 회사 임원진들보다 .

“…….”

하지만 말이 그의 어딘가를 건드렸던 걸까. 짧은 사이에 놀랍도록 무표정해진 차태주가 말투로 받아쳤다. 이제는 익숙한 무덤덤한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씁쓸해 보였다.

“아, 물론 우주 씨가 그린 몽이가 귀엽기도 해서 좋았습니다.

“…….”

“…….”

뒤늦게 덧붙였지만 안에는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면 위로는 각양각색의 불빛이 여전히 위태롭게 일렁거리고, , , 차가 빠르게 지나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번졌다. 대교를 건너서 시내로 접어들자 빼곡히 들어선 빌딩 숲이 차태주와 내가 차를 위에서 아래로 짓눌렀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창업하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텐데, 스타트업 판이 돈만 보고는 버틸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

“어쨌든 삶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거룩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 정도라도 신념이 있어야 하죠.

표면이 거칠게 일어선 것처럼 까끌까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본능적으로 오늘 그의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닌 같아서 그와 눈을 마주치기만 했다.

“기왕 하는 , 스케일을 키우고 싶어서 대기업에 들어왔지만 막상 조직 안에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뜻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내가 타협하고, 포기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조직 입장에서는 단기적인 성과나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만….

“…….”

“이제 애플리케이션은 거의 완성 단계인데, 정작 결과물은 처음에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는 다소 멀어진 같습니다.

금융권에 종사하는 비즈니스 맨이라면 내게는 냉혹하고, 금전적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할 있을 같은 이미지였다. 그래서 처음 차태주를 만났을 그가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게서 이런 고민을 듣게 되다니 뜻밖이었다.

“그런데 우주 그림을 보니까, 처음에 내가 일을 시작하려고 했는지가 생각나더라고요.

“…….”

“그래서 위로가 되었던 같습니다.

나를 향한 말이었지만, 차태주는 내가 아닌 창밖 어딘가를 멀찍이 쳐다보고 있었다. 불빛이 어룽지는 차태주의 날렵한 옆얼굴을 바라보자 손끝이 괜스레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차태주는 일에 자신을 모조리 갈아 넣는 타입이어서,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을 느끼는 좌절감 역시 그만큼 같았다.

“어쩌면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사용자 단에서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니까.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서비스나 미술 작품이라는 매개만 다를 , 편리함이든, 행복함이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경험할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를 이해할 있을 같아졌다.

“그렇지만…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느냐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요. 그걸 가장 체감하는 , 서비스를 사용하게 되는 사람이라고도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반드시 전해진다고 믿었다.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차태주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은 이용자에게 분명히 느껴질 거라고.

“저는… 그동안은 전혀 몰랐거든요. 평소에 팀장님이 이런 고민을 하시는 줄요.

“…….”

“팀장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그려 나가는지 알게 되니까, 오히려 열심히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그럴 거예요.

“하….

말을 잠자코 듣던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안의 공기가 빼곡하게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따각, 따각, 핸들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뚜렷하게 울렸다.

“…….”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차태주가 나를 불쑥 쳐다보았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지럽게 들끓고 있었다. 왜인지 이대로 그가 나를 만져도 이상하지 않을 같다고 생각했다.

“가만 보면 우주 씨는,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골라서 주는 같단 말이죠.

“…….”

“신기할 정도예요. 일부러 노린다고 해도 정도는 텐데.

짓이기듯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차태주가 상반신을 조수석 쪽으로 기울였다.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팔을 곧게 뻗은 어깨를 어루만지는 대신 바로 위에 있는 안전벨트의 버클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기숙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동안 딸깍, 다물려 있던 버클이 완전히 풀렸다.

“오늘 같은 하루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

“그 끝에 우주 씨가 있어서일까요. 돌이켜 보면 나쁘지만은 않은 하루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32]

스르륵 풀리는 안전벨트와 함께 그가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발짝 늦게 올려다본 얼굴 위로는 7% 상승한 호감도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잠금장치가 열렸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는 대신 차태주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그만 내리라거나, 가라거나 하는 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되돌려 주기만 하는 것은 차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히든 퀘스트] ONE BAD DAY”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진솔한 대화를 통해 유난히 고된 하루를 보낸 차태주의 마음을 움직였군요!

<SYSTEM>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특별 아이템 뽑기]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다음 돌발 퀘스트에서 아이템을 사용해 플레이어 버프를 극대화할 있습니다.

 

#90

도시의 밤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어스름한 어둠 사이로 일렁이는 불빛과, 닿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던 손길. 상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차태주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있던 내밀한 시간이었다.

“다들 회의 시작할 준비 됐습니까?

그래서 다음날 환한 대낮에 보게 되는 차태주가 오히려 생경하게 다가왔다. 임원 회의 바로 다음 날인 목요일에는 아침부터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보드 앞을 장악한 차태주는 언제 흐트러진 모습을 내비쳤냐는 다시금 유능한 직장인의 외피를 빈틈없이 두르고 있었다.

“이제 애플리케이션 출시가 코앞인데, 막바지라고 긴장 늦추지들 마시고요.

여유만만하게 미소 짓는 차태주의 뒤로 트인 통창에 맑은 하늘이 가득했다. 유난히 새까맣고 단단한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어젯밤 생각을 정리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도, 차태주는 저돌적으로 회의를 주도했다.

“타깃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있어서는 인스타그램 스폰서 광고를 태우는 방향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봅니다. 다이렉트 채널 운영 없이도, 건별로 간편하게 도달할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없고요. 몽이 캐릭터를 기반으로 기획해 인스타 광고 콘셉트 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애플리케이션 출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안건들을 논의하고 다음, 회의 막바지에는 마케팅 전략을 논의했다. 팀원들이 발표하는 캐릭터 광고 시안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난주 회의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난 같지도 않은데, 그동안 이렇게 아이디어가 완성도 있게 구현된 신기했다.

“흐음….

그러나 정작 최종 결정권자인 차태주는 보고를 받는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눈에는 충분히 기발하고 매력적인 콘텐츠인 같은데…. 확실히 차태주는 어지간해서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사였다.

“다 좋은데, 각각의 콘텐츠가 따로 노는 느낌이어서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못내 고민이 된다는 , 차태주가 입을 다물자 회의실 안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까칠하게 곤두선 눈매를 가볍게 , , 내리누르던 차태주가 문득 생각난 듯이 쪽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닿자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우주 , 그때 그린 캐릭터 스케치 화면에 띄워 주세요.

“아, 제가 직접 그린 말씀이실까요?

“네, 어제 저한테 보여 줬던 것들 위주로요.

느닷없는 발언과 동시에 팀원들이 모두 나에게 주목했다. 바라지 않았던 관심에 손끝이 달달 떨리는 같았다. 다행히 차태주야 귀엽게 봐줬다지만, 여러 사람 앞에 내놓을 결과물은 아닌 같은데….

“여기 우주 씨가 그린 만화처럼, 세계관에 대한 설정 요소를 보충하면 좋겠습니다.

“…….”

“광고라기보다는 이용자가 충분히 몰입하고, 재미있게 캐릭터 콘텐츠를 소비할 있는 하나의 놀이터가 되도록요. 품이 들더라도, SNS 채널을 직접 운영하는 방안이 낫겠는데요.

차태주가 이끄는 팀은 기획, 개발, 마케팅까지 애플리케이션 출시 과정 전체를 프로젝트 격으로 수행했다. 따라서 각자의 역할 분담이 자르듯 나누어져 있지 않고 사람이 맡는 일이 기본적으로 많은 데다, 애플리케이션 출시를 앞두고 업무가 더욱 몰렸다.

“…….”

“…….”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중요한 마케팅 전략은 이대로 마무리했으면 하는 기색이 다들 간절해 보였다. 차태주 역시 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만 일에 있어서는 양보와 타협, 물러섬이 없는 성격일 .

적당한 담당자를 고민하는 , 차태주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나에게 다다른 시선이 우뚝 멈췄다. 차태주가 나를 향해 흑연 같은 눈동자를 반들반들하게 빛냈다.

SNS 운영안은 우주 씨가 맡아서 작업해 보겠어요?

그는 망설임 없이 나를 지목했다. 날벼락 같은 요청에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차태주는 묘하게 즐거워하는 기색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제, 제가요?

지금까지 업무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실수를 하지 않았던 , 내가 책임을 맡기보다는 다른 팀원들의 서포트 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안을 짜야 한다니, 솔직히 해낼 자신 없었다.

“적어도 몽이 캐릭터에 대해서는 회의실에서 우주 씨가 가장 이해하고 있는 같은데요.

“…….”

“지난번에 보니까 신선한 아이디어도 내던데, SNS 소비층 감수성에 대해서도 감이 있겠고요.

좋게 주시는 너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엄청난 과대평가 같은데. 하지만 차태주는 팀원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고른 이유를 덧붙이며 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다음 월요일 회의까지 우주 씨가 기획안을 준비해 주면 좋겠습니다.

“아….

차태주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머뭇거렸다. 아무리 호감도를 올려준다고 해도 이것만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SYSTEM> [돌발 퀘스트] “아이디어 뱅크”

애플리케이션 출시를 준비 중인 공략캐릭터 [차태주] 신선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플레이어가 준비한 기획안이 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고 채택될 경우 퀘스트에 성공합니다.

(성공 보상: 공략캐릭터 차태주 호감도 10% 상승, 차태주 메인 퀘스트 루트 진입 확률 대폭 상승)

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스템 창이 불시에 떠올랐다. 아… 역시, 퀘스트였구나. 면접에 이어서 기획안 작성이라니, 워커 홀릭의 호감을 사는 일이란 정말이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불만이 삐죽이 솟아올랐지만 게임에 빙의된 이후 나에게 제대로 선택권이 번이라도 있었던가. 불과 호감도를 아무리 올려준다고 해도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무색하게도,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려야만 했다.

“제가 잘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 차태주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회의가 다음 안건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획안이 팀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고 통과해야 한다니, 이건 너무 본격적이었다. 대학교 조별과제도 아닌데 아이디어를 기업에서 요구되는 수준으로 발전시킬 있을까?

“아휴….

생각할수록 막막한 기분이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아무래도 같은데…. 그동안 좋게 위기 상황을 모면해 왔다지만, 플레이어 버프를 감안한다고 해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아닐까 싶었다.

<SYSTEM> [특별 아이템 뽑기] 돌발 퀘스트 진행 과정에서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활성화된 해당 기능을 사용하실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맞아, 그러고 보니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특별 아이템 뽑기 기능을 있게 되었다고 했었지!

<SYSTEM> [특별 아이템 뽑기] 룰렛을 돌려 선택한 아이템을 통해 플레이어의 업무 능력치 버프를 극대화할 있습니다.

정작 처음 기능을 획득한 어젯밤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에는 그대로 입이 벌어질 뻔했다. 업무 능력치 버프라니, 룰렛만 돌리면 나도 차태주를 만족시킬 있는 일잘러로 거듭날 있는 건가?

- 회의 도중 교섭 가능성 50% 상승

- 타자 작성 속도 1.5 상승

- 60 PT 능력 3 향상

- 일주일 동안 메일, 보고서, 기획안 문서 작성 능력 3 향상

- 오타, 오류 업무에 치명적인 실수 포착 가능성 50% 상승

시야에 가득 차오른 동그란 룰렛을 눈을 부릅뜨고 살펴봤다. 알록달록한 배경 위에 새겨진 업무 능력 향상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회사 생활에서 유용하게 있는 스킬들이었다. 물론, 타자 작성 속도 1.5 상승이라는 함정카드도 있었지만 말이다.

“…….”

그중에서도 ‘문서 작성 능력 3 향상’이 특히 욕심이 나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템만 얻을 있다면, 이번 돌발 퀘스트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같은데!

<SYSTEM>  [특별 아이템 뽑기] 아이템 선택을 위해 지금 바로 버튼을 눌러 룰렛을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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