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21-30

#21

그동안은 호감도가 오르기만 했는데, 떨어지는 것도 가능하다니 충격적이었다. 게임 공략에 있어 고려해야 중요한 변수가 하나 늘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강태양의 낮은 장난에 목덜미에 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말을 그렇게까지 해야 ?

언성이 절로 높아지고,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시스템이 의도한 대로, 강태양의 호감을 얻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것은 맞았지만…. 그래도 모든 상황을 불순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강태양이 너무하다 생각되었다.

“내가 어쨌는데?

강태양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고, 강태양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었는데 그런 시도 자체가 가식이라고 취급당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 막말을 장본인인 강태양 역시 어딘가 단단히 받은 기색이었다.

“나는 그냥 없이,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형은 맨날 그런 식으로만 해석하고.

“…….”

“나쁜 마음먹고 접근한 아니라고 해도, 말은 믿어 주지도 않잖아.

그동안 강태양과 내내 장난처럼 아옹다옹하며 이따금 발끈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감정이 정말로 격해져 씩씩거렸다. 하지만 조금도 움찔하지 않는 강태양은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한 하나도 없고, 내가 화를 내건 말건 그건 아니라는 식이었다.

기왕 친밀해져야 하는 공략 캐릭터이니,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태양을 좋은 쪽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향이나 성격부터 시작해서 평소 생각하는 하나하나까지, 강태양은 나와는 180 다른 사람이었다.

“나 먹었으니까 이제 갈래.

“네 맘대로 .

보란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강태양은 내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딴청을 피웠다. 나도 내가 지금 엄청나게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알았다. 하지만 그런 강태양의 모습에 열받아 바닥에 괜히 발을 쿵쿵 굴렀다.

“이씨, 짜증 진짜….

그대로 강태양을 내버려 두고 돌아서 걷는데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는 맞춰 주는 편인데, 강태양 앞에서는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쉽게 동요하게 된다. 부아가 치밀어 강태양에게 먹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대화에 신경을 쓰느라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도 못했다. 알록달록한 음식이 이상 남은 식판을 얌전히 반납하고 식당을 빠져 나왔다.

***

“아이고, 근육 땅겨….

기숙사 방에 돌아온 다음에는 내내 침대에 처박혀 있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아까 강태양은 분명 자세만 제대로 잡으면 근육이 아프지 않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거짓말이었다. 시간 차로 찾아오는 근육통 저녁때쯤 되자 더욱 심해져서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마 게임에 체력 스탯이 있었더라면 강태양을 만날 때마다 시간당 마이너스 10 쭉쭉 빠지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주의를 분산시켜 보려 애썼지만, 그마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아, 앞으로 어떡하냐 진짜….

진해지는 근육통과 함께 시간 내가 저지른 일의 무게 역시 서서히 실감이 났다. 의기소침한 기분이 들고, 마음이 납덩이라도 얹힌 것처럼 묵직했다. 그래도 이대로 마냥 피할 수만은 없어서,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 게임 앱을 실행했다.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4/100]

 

강태양의 호감도는 처음에 5% 올라갔고, 그다음에는 3% 내려갔다. 그래도 플러스 마이너스 하면 결국은 2%라도 올라간 거잖아. 오늘의 만남에도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던 아닐까?

그렇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나아가던 루트에 플레이어인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게 적당히 강태양 하는 일에 장단이나 맞춰 주면 , 괜한 말을 해서.

“나 아무래도 간이 밖으로 나왔나 .

성격상 적극적으로 유혹은 못한다지만, 게임에 들어온 이상 적어도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 텐데. 친하게 지내지는 못할망정, 공략캐를 상대로 화를 냈다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이지 미친 짓이었다.

강태양과 이라윤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 모두, 막상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며 교감할 때에는 게임 인물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단순히 내가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으로 대하는 역시 불가능했다.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공략캐의 말에 흥분하는 아니라,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든 겉으로는 적당히 동의하고 기분을 맞춰 줘야 한다는 알면서도 그게 쉽지 않았다.

“다음에 강태양 얼굴 어떻게 보냐.

이대로 영영 봐도 아쉬울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잔뜩 성질을 내고 왔지만, 결국 나는 어쩔 없이 강태양을 다시 찾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설마, 이제 강태양이 나를 만나 주는 아니겠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푸드득 내저었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공략 캐릭터 현황을 점검했다.

공략 캐릭터: 1. 이라윤 2. 강태양 3. ??? 4. ???

* 플레이어의 매력 수치가 올라가면 현재 접근 불가 상태인 공략 캐릭터의 루트가 추가로 해금됩니다.

 

이라윤과 강태양, 그리고 매력 수치가 올라가면 만날 있는 나머지 명의 캐릭터. 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화면에 떠오른 되는 정보를 곱씹었다.

이라윤 루트를 진행할 때에는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호감이 가는 상대인데다, 가끔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다감하고 부드러웠지만, 은근히 곁을 내어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오히려 내가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졌다.

반면 강태양은 하룻밤 상대를 가볍게 갈아치우는 문란한 사생활로 유명한데다, 세상에 아쉬운 없어서인지 조금 거만해 보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은근히 사람 상처 주는 말도 잘하는 같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만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한번 바닥을 의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아, 맞다!

게임을 시간 내에 무사히 공략하고 나의 현실로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붙잡고 매달려 보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내게는 접신 능력은 없었지만, 다행히 붙잡아 만한 동아줄은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미술관에 봐야겠어.

캐릭터 정보 탭에는 나타나지 않는 주요 등장인물, 게임 나의 유일한 조력자인 NPC 천유현을 찾아가 봐야겠다.

***

심란한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은 무심하게만 흐르고, 어느덧 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커튼을 열자 화사한 햇살이 가득 들이부어져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프라이빗 모드 플레이 12 (남은 시간: 87 23시간 47)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서자 익숙한 안내창이 나를 반겼다. 어느덧 게임 속에 들어온 지도 12일이나 지나 있었다.

이라윤 (20)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

호감도 [24/100]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4/100]

 

맑은 정신으로 어제 보다 말았던 게임 앱을 다시 열고, 캐릭터 공략 진행 정도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게임 속에 떨어진 이후 나름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지만 욕심만큼 호감도를 빠르게 올리지는 못했다.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빠듯하게 느껴져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오전과 오후에 하나씩, 전공 수업 개가 있는 날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지만 게임의 플레이어인 나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임무가 있다. 그러니 하루쯤 수업은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이야말로 게임에 반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천유현이 나의 조커 카드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백팩을 단단히 , 비장한 기분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22

물먹은 솜처럼 웅웅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물안개처럼 부유하는 듯한 공기 사이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평온한 낯빛의 방문객들은 그림에 잠시 머물렀다 스쳐 지나기를 반복했다.

게임과 현실이 교차하는, 일상의 번잡함에서 완벽하게 동떨어진 공간. 미술관 한복판에 나는 무언가 손에 닿을 닿지 않는, 모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게임 속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 열흘 동안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감정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 발짝 늦게 그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

그림에서는 희미한 유화 물감 냄새가 났다. 그를 시작으로, 붓을 움켜쥘 때의 묵직한 그립감과 캔버스 표면의 꺼끌꺼끌한 촉감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일상의 걱정은 모두 잊어버린 , 학교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에 몰입하던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찰랑찰랑 차오르는 감정의 정체가 그리움이라는 깨달은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 지도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에는 하루하루 버티는 퍽퍽하기만 했는데….

한걸음 떨어져 돌이켜 보니 몽글몽글한 마음이 들다니 이상한 일이다. 물론 게임 속에서는 현실과는 다르게 적어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았지만… 그래도 역시 빨리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릴 있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혀끝에 번지는 달콤씁쓸함을 곱씹으며 만월 그림 앞으로 나아갔다. 일렁거리는 달빛이 나를 한가득 내리쬐었다.

“…….”

나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멎은 듯했다. 그렇게 고요한 보름달 아래에서 오롯이 보호받는 기분을 만끽했다.

“…….”

그렇게 계속해서, 참을성 있게 같은 자리에서 기다렸다. 다가올 만남을 기다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지그시 감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눈을 끔뻑거렸다.

“…음, 관장님이 나타나시지?

천유현은 이곳에 오면 언제든 자신을 만날 있다고 말했다. 천유현은 게임의 NPC이기도 하니까, 미술관 건물에 캐릭터가 귀속되어 있나 보다 추측했었다. 여기는 게임 속이니까, 플레이어인 내가 미술관에 방문하면 [미술관 NPC 천유현이 플레이어를 반깁니다] 이런 전개가 이어져야 하는 아닌가?

“관장님, 어디 계세요? 들리세요?

하지만 나의 질문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보름달 그림 앞에는 여전히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이런 순간에는 시스템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이제 생각해 보니, 미술관에 오면 만날 있다는 것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었다.

“이럴 알았으면 그때 관장님한테 자세히 물어볼걸….

마음이 다급해져 고이 간직하고 있던 천유현의 명함을 꺼내 보았다. 여기에다 바로 전화해도 되나? 물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이겠지만…. 언제든 찾아 달라는 친절한 말과는 대조적으로 천유현은 서슴없이 다가가기에는 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주 , 미술관에 계셨군요.

괜히 혼자서 소심하게 쭈뼛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긋하면서도 발음이 명확한 목소리가 미술관 복도에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천유현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외출하느라 인사가 늦어졌습니다.

천유현은 지난번과 같이 격식 있는 슈트 차림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길인지,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져 있고 옷깃에서 희미한 바람 냄새가 묻어났다.

이럴 수가, 천유현이 미술관 밖에도 나갈 있는 건가? 나에게는 게임 NPC이지만, ‘이곳의 현실’에서는 천유현 역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관장님!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던 탓인지, 천유현을 무사히 만나자 단전에서부터 격한 반가움이 솟았다. 왈칵 인사를 건네자 무감하던 천유현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아 주셨을까요?

천유현이 차분한 음성으로 내게 질문했다. 사려 깊은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조금의 동요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균질한 태도에서 안정감이 전해졌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

“혹시, 오늘 관장님께 조언을 구할 있을까 해서 미술관을 찾아왔는데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술관을 찾았지만, 꽁꽁 묶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앞으로 강태양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보다 하필 강태양 같은 사람을 만나게 건지, 아니 애초에 강태양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 건지….

“그게, 그러니까….

“…….”

“음,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 지금 내가 게임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었다. 나는 눈썹을 엉망으로 짜부라트렸다. 천유현은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이곳이 실은 게임 속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천유현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우주 씨가 곤란한 모양이군요.

“아, 관장님.

“아무래도 주변에 보는 눈이 많기도 하니까요.

“…….”

“간단히 차도 대접할 ,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좋겠습니다.

조용한 곳이라고? 뜻밖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미술관에 그런 장소가 따로 있었나 의아해하기도 찰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천유현이 그대로 몸을 틀어 길을 안내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올라간 미술관 안쪽에는 직원들이 업무 중인 사무실이 들어서 있었다. 관람객에게 허용된 공간만 방문했던 나는 현실에서도 근처에는 적이 없었다. 저벅저벅, 복도 끝까지 천유현이 휘장처럼 드리워진 풍성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커튼 뒤에 있던 것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의아해하는 나와는 다르게 천유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대로 천유현이 표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벽이 스르륵 뒤로 밀렸다.

“세상에, 이건 무슨 비밀 통로 같은 건가요?

“하하. 계단이 가파르니까 조심히 따라서 내려오세요.

문고리가 달려 있지 않은 문이라니, 어릴 읽던 책에서나 보던 장치였다.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유현과 함께 밑으로 이어지는 목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이윽고 다다른 아래에는 천유현의 개인적인 공간이 숨어 있었다.

“우와아….

은은한 불빛을 드리우는 샹들리에와, 앤티크한 문양이 수놓아진 실크 벽지, 페르시안 러그, 오동나무 장식장에 빼곡하게 들어선 고서적과 수집품까지. 창백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현대적인 미술관과는 정반대로, 천유현의 공간은 중세 귀족의 응접실처럼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예의 없어 보일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계속해서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자칫 잘못하면 과하게 느껴질 있는 구성인데도, 모두가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주인의 고상한 취향에 감탄하게 됐다.

“미술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특별한 손님을 모시는 공간입니다.

홀린 듯이 중얼거리자, 눈을 부드럽게 휘어 보인 천유현이 매혹적으로 웃었다. 이유도 모르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우웅 들떠 올랐다. 미술관 관장이라더니, 역시 예술 감각도 뛰어나시구나…. 온화하면서도 신비로운 천유현의 존재 자체가 미술관 지하의 은밀한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이쪽으로 앉겠어요?

내가 가죽 소파에 앉도록 정중하게 권한 천유현이 아담한 테이블 위로 홍차와 마들렌을 내왔다. 따끈한 차를 들이켜자 긴장이 노곤노곤 나른하게 풀렸다.

비밀 공간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감각이 온통 흐무러졌다. 순간 눈앞이 흐릿하게 물들 정도로,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죄다 잊어버릴 뻔했다.

“아까 우주 씨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죠?

“아, 관장님….

“지난번 만났을 때에도, 해야 일이 많다고 들었던 기억합니다.

천유현의 질문이 몽롱하게 눈을 깜빡이는 나를 다시 현실로 잡아끌었다. 관장님은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주고 계셨구나….

“맞아요, 관장님! , 고민이라는 게…. 제가 주어진 시간 안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거든요.

“…….”

“사정이 복잡한데, 내기라고 하면 그렇지만, 저주에 걸린 거랑 비슷하기도 하고요.

“…….”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임무라고 해야 할까요?

벅찬 마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대화는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대신 자꾸 겉돌기만 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내가 말을 이어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천유현의 얼굴에 미심쩍은 기색이 짙어져 갔다.

“그러니까, 우주 씨가 원하는 아니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가요?

이해할 없다는 표정으로 천유현이 되물어 왔다. , 이래서는 도저히 되겠는데. 돌려 말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 내내 서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게 보듯 뻔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뭉뚱그려서는 제대로 소통이 불가능했다.

“하아….

결국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서는 어떤 도움도 받을 없다.

물론 아무나 붙잡고 이런저런 속사정을 늘어놓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된다. 하지만 천유현은 게임 공식 설정상으로도 나의 조력자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믿고 의지하고 싶어지는 든든한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관장님, 그래도 말을 들어 주실 있으실까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벌써부터 겁이 나는데요.

“휴우….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편하게 얘기해 봐요.

어차피 아니면 도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고, 마음을 결연하게 가다듬었다. 먹던 힘까지 용기를 끌어모아서, 감고 질러 보기로 했다.

“관장님,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난 , 평행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 혹시 기억하세요?

“음… 사랑만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낭만적인 공간 말씀이시죠?

가늘게 눈을 슬쩍 내리깐 천유현이 피식 웃었다. 천유현이 직접 다시 말하자, 내가 듣기에도 남사스러운 소리였다. 특히 천유현 같은 어른 남자 눈에는 더더욱이나 우습게 느껴지겠지.

“하아….

하지만 모든 순진한 몽상이 아닌 내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이곳이 바로 평행 우주예요.

“…….”

“저는 원래 세계의 사람이 아니거든요. 여기에서는, 음… 게임을 공략하는 중이에요.

끝끝내 마지막에는 자신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의 말을 기울여 듣던 천유현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어지는 적막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천유현은 나를 믿고(?)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초대해 주었는데,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니….

“그러니까, 우주 씨가 지금 게임 속으로 차원 이동을 했다고요?

큼큼, 얼마간의 침묵 끝에 천유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차분하게 이어진 질문과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NPC 천유현이 시스템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허용하시겠습니까? [/아니요]

              

#23

게임 캐릭터가 시스템 접속을 시도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얘기지?

처음 보는 시스템 창에 크게 당황했다. 분명 튜토리얼 영상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우주 , 갑자기 표정이 너무 좋은데 괜찮아요?

천유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심쩍은 기색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앗,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생글 웃어 보이며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천유현의 얼굴 옆에는 NPC 시스템 접속을 허용하겠냐는 시스템 창이 반짝이고 있었다. 차원 이동을 해서 세계로 것이냐는, 정곡을 찌르는 천유현의 질문 역시 유효했다.

지금 내가 시스템 창에서 수락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면 천유현이 지금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알게 된다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일 텐데, 왠지 천유현에게 못할 짓인 같아서 머뭇거리게 됐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만약에 천유현이 시스템에 접속해서 게임 세계관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이상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천유현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으음….

하지만 찝찝한 걱정이 묻어나는 마음과는 별개로, 게임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 천유현의 도움이 필요한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었다.

 

<SYSTEM> NPC 천유현이 시스템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허용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고민 끝에 [] 버튼을 눌렀다.

“앗…!

그러자 천유현과 나를 둘러싼 주변이 환하게 번쩍 빛나더니,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나만 그런 아니었는지, 천유현 역시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적인 진공 상태에서 천유현과 깊숙이 연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월 미술관 NPC라니, 대체 이게 무슨….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던 천유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항상 나른한 여유가 감돌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제 시스템 창을 천유현 역시 있는 같았다.

“…우주 씨가 말한 게임 속이라는 , 이런 뜻이었습니까?

“죄송해요, 관장님. 많이 놀라셨죠….

“…….”

“저도 이게 어떻게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갑자기 눈을 떴더니 낯선 세계였는데, 알고 보니 그게 게임 속인 같고…. 당황해서 다시 원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게임을 클리어해야 한다고 해서….

뜨끔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유현에게 설명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논리적으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말이 되기 때문에.

“음….

대답을 아끼는 천유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이 게임 캐릭터라는 , 그것도 NPC”라는 알게 되었으니 나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같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레 냉랭해진 천유현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잘못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죄책감으로 묵직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평행 우주 같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대고 있는데, 천유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천유현을 향해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네?

“우주 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곳이 게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

“다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우주 씨에게는, 지금 이곳이 시스템에 의해 지배되는 게임처럼 작용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

“우주 씨의 현실이, 다른 누군가에는 게임으로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요.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천유현이 내린 성숙한 결론에 감탄했다. 분명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일 텐데도, 천유현은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대신,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입장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NPC 취급하는 시스템 때문에 우주 씨를 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사람을 둘러싼 모든 일이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는 , 천유현이 슬쩍 웃는 천유현. 다시금 평소와 같은 여유를 되찾은 그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멍해지는 것은 나였다.

“어… 여전히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관장님?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감동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천유현에게 질문했다.

“솔직히 시스템이라는 ,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는 않습니다.

“…….”

“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이해할 있어야만, 누군가를 도와줄 있는 아니니까요.

시스템 근처로 팔을 들어 올린 천유현이 공기를 가볍게 움켜쥐어 보려 했다. 그러나 천유현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비어 있는 손바닥을 흘끔 확인한 천유현이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우주 씨의 목표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겠네요.

“…아, 맞아요, 관장님!

“약속한 것처럼 힘이 닿는 선에서 도와드리죠.

“그렇지만, 이제 아시겠지만, 저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서…. 그게 아니더라도, 관장님께 보답할 구석이 없을 텐데요.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내가 우주 씨에게 과연 도움이 있을지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고요.

정확히 바라던 대로였지만 나는 어쩐지 천유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걸 알아차리기라도 것처럼, 천유현은 담백한 태도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자신만 믿고 따라오면 모든 해결될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아서, 오히려 천유현이 더욱 든든하게 느껴졌다.

“혹시 압니까. 우주 씨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역시 무언가 새로운 배우게 될지.

마지막으로 덧붙인 천유현이 바람 새듯이 웃고는, 기다란 눈매를 살짝 이지러뜨렸다. 은은한 웃음기가 감도는 유려한 얼굴이 새삼스럽게도 매혹적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요, 관장님.

이미 필요한 모든 가지고 있어서, 어떤 문제이든 능숙하게 해결할 있을 같은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이렇게 올바른 인성을 가진 캐릭터가 나의 NPC라니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당장 그의 손이라도 덥석 부여잡고 눈물을 퐁퐁 흘리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이게 어…. 약간 연애 게임 같은 거라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건데요.

하지만 천유현은 허물없이 대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와락 달려드는 대신 나는 몸가짐을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NPC 조언을 구할 있게 되었다.

“관장님, 그런데 혹시 여기에 뭐라고 있는지 보이세요?

설명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라 주머니에서 현실에서 가져온 핸드폰을 꺼냈다. 지난번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공략캐들은 핸드폰에서 실행되는 게임 앱을 확인할 없었다. 하지만 천유현은 이제 게임 시스템과 연결이 되었으니, 화면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 문라이트?

“역시, 관장님은 보이시는구나.

“이게 우주 씨가 말하는 게임이라는 겁니까?

“네, 맞아요. 다른 캐릭터들에게는 보이는 같은데….

“내가 자세히 봐도 괜찮겠어요?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천유현이 그대로 손에 들린 핸드폰을 가져갔다. 색색깔의 하트가 용수철처럼 통통 튀어오르는 게임 로딩 화면은 여성향 게임답게 앙증맞았다.

“캐릭터 별로 일정 수준의 호감도를 달성하고, 특정 장소에서 사진을 찍으면 게임이 클리어되는 원리군요.

고오급 취향의 소유자인 천유현은 생전 이런 게임은 있는 줄도 모르면서 살았을 같다. 하지만 화면 위로 길쭉한 손가락을 슥슥 움직이는 천유현은 의외로 인터페이스를 손쉽게 조작하더니 금세 캐릭터 정보 화면에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여기에 나는 원래 없었나요?

화면을 골똘히 응시하던 천유현이 모를 듯한 얼굴로 질문했다.

              

#24

“어, 그게…. 아무래도 관장님은 공략캐가 아니시라 그런 같아요.

‘공략캐’라는 말을 육성으로 내뱉으려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게임에 금세 적응해서 그동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유현 앞에서 말하려니까 갑자기 이렇게 수치스러운 건지.

“흠.

끝을 가볍게 까닥인 천유현이 계속해서 화면을 면밀히 들여다봤다. 천유현은 아무런 말로도 거들지 않았지만 혼자서 괜히 심장이 뜨끔거렸다. , 그런데 저기에 내가 분석한 캐릭터 메모 있는데 그것도 보시면 어떡하지….

“미안한데, 혹시 성적 지향이…?

“앗, 아니에요, 아니에요.

천유현이 나에게 되돌려준 화면에는 화려한 스펙과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성별이 남자인’ 공략캐들이 가득 있었다. 천유현이 못내 궁금하다는 듯이 얼굴과 목덜미 부근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요즘에 유행하는 게임인데, 친구가 보라고 핸드폰에 깔아 거거든요.

으악,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기는 한데…. 당황한 나는 양손으로 살래살래 손사래를 치며,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부인했다.

“근데 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게임 플레이를 제대로 적도 없어요, 진짜예요!

사실 천유현이 오해를 한다고 해서 큰일인 것은 아닌데. 어쨌든 지금 나는 성적 지향과는 별개로 공략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왠지 잔뜩 억울해진 기분으로 올려다봤더니, 천유현이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아….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 가볍게 장난을 치려고 했던 같았다. 혼자서만 괜히 오버해 버린 나는 머쓱한 기분에 귓가를 슬그머니 매만졌다. 여전히 은근하게 열이 올라 있는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그러게요. 차라리 즐길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우주 씨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겠습니다.

“아니에요… , 기왕 이렇게 새로운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하. 연애적인 접근이라면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있어서라면. 분명히 조언해 있는 부분이 있을 같군요.

확신으로 가득 표정이 아니었더라도, 천유현의 말에 납득해 버릴 수밖에 없었을 같다. 정작 본인은 딱히 휘두르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같지 않은데도, 나는 이미 천유현의 표정 하나 하나하나에 쥐락펴락 당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천유현에게 배울 있다면 게임 공략이 한층 쉬워지지 않을까?

“그니까… 호감도라는 , 어떻게 보면 제가 인기가 많아져야 하는 거잖아요.

“네, 그렇다고 있죠.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공략캐들은 다들 엄청 잘났거든요. 외모도, 능력도. 아직 명은 공개가 되기는 건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같아요.

“…….”

“그 사람들에 비해서 그냥 대학생일 뿐인 저는 너무 평범한 같아요. 물론 현실에서도 차이는 없기는 했지만….

“글쎄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만큼 잘나야 필요는 없는 같습니다.

“헉,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짧은 숨을 들이켜고 천유현을 향해 눈을 반짝 빛냈다. 뭔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같아서 대화에 잔뜩 집중했다. 세상사에 통달한 무림 고수에게 인간관계 비급을 전수받는 심정이었다.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서서히 다가가는 ?

하지만 정작 이어진 말은 꽤나 실망스러웠다. 에계계… 겨우 그걸로 된다고? 그렇게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면, 세상에 인기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같다. 게임 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일단 잘난 사람들이 주목과 선망을 받기 마련인데, 천유현의 조언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정말 정도 가지고 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그치만, 혹시 다른 비결 같은 거라도 있으시면….

“그렇게만 하면 공략 캐릭터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우주 씨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까요.

끙…. 작게 앓는 듯한 소리를 내자,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린 천유현이 사르르 웃었다. 이내 확신을 주려는 것처럼, 단단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해 왔다.

, 단순한 격려 멘트라 하더라도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 감탄이 나는 공략캐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밋밋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주눅 들어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천유현이 말한 것처럼, 그런 나에게도 나만의 매력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말씀 감사합니다 관장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인데요, .

여전히 미심쩍은 기분이 약간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공략캐들 만큼 대단한 배경이 없는 소소한 존재인 나로서는 달리 택할 있는 방법이 없기도 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자는 생각으로 천유현의 조언을 곱씹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관장님이 알려 주신 것처럼, 그렇게 볼까요?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서서히 다가간다라. 일단 이라윤을 만나게 되면 충분히 그렇게 있을 같다. 실제로도 이라윤에게 호감이 갔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웠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해서, 이라윤의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어졌다. 이라윤 역시 나의 질문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아서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번째 공략캐인 강태양을 생각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태양을 상대로는 아무래도, 저런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을 같았다.

하나하나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강태양은 나랑은 취향이든 성향이든 가치관이든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 알게 되어서 비호감이나 적립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표정 관리도 못하는데, 그런 마음을 내지 않을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강태양은 사실은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던 나의 별것 아닌 질문에도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허벅지에 닿았던 딱딱한 무릎뼈의 감촉을 떠올리자 뒷목이 오싹해졌다.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참지 못하고 지난번과 똑같이 강태양의 앞에서 발을 쿵쿵 구르며 돌아서게 같다.

“…그런데요 관장님, 저랑 하나도 맞는 사람이어도 과연 방법이 통할까요?

못내 시무룩한 기분이 들고, 슬금슬금 걱정이 솟아나기도 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천유현에게 질문했다. 방금 천유현이 알려준 것이 기초 원리라면, 이제 나에게는 본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심화 응용 스킬이 필요했다.

“우주 씨랑 맞는 사람이 있었나 봐요?

“아니, 굳이 명을 짚어서 말하는 아니고요….

천유현의 예리한 시선을 맞닥뜨리자 퍼뜩 놀라 단박에 부정했다. 뭔가 강태양에 대해서 일러바치는 모양새 같아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좋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천유현에게 이러저러한 뒷담을 하는 싫었다.

“그냥, 누구를 상대로든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봤을 하는 말이에요, 하하.

“흠.

“음… 사람은 제가 했던 질문 때문에 화가 났던 같은데, 저는 갑자기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서 당황했거든요.

“…….”

“저는 나쁜 의도는 없었는데, 그쪽도 말을 심하게 해서 억울하기도 했고. 그치만 일단은 자리를 박차고 나온 거는 저이기도 해서요.

“그랬나요?

“네. 관장님, 아무래도 ,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내는 일이라는 거에 있어서 저는… 딱히 재능이 없는 같아요.

농담처럼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실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던 두려움이기도 했다. 현실에서도 친구랑 다투거나 경우 의기소침해졌지만, 이곳에서는 마음에 와닿는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상대가 나와 맞는 사람이건 아니건, 공략캐의 호감을 사는 것이 나에게는 생존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임의 공략 캐릭터들과 우주 씨는 그동안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까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없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아닐까요?

“그거야 물론 그렇죠.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데에도 사람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차라리 편하더군요. 자신을 바꾸려 한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가 본능적으로 방어적이 되기도 하니까요.

“아….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 나는 눈을 빛내며 천유현을 올려다보았다. 관장님은 방금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신 걸까? 강태양의 신상을 보호해 주기 위해 최대한 뭉뚱그려서 이야기했는데도, 천유현의 조언은 신기하리만큼 문제의 본질에 성큼 다가서 있었다.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강태양이 무작정 화를 냈다고 하기에는…. 애초에 나와는 다른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게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런 강태양을 어떻게든 다른 쪽으로 설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분명 했었으니까.

“그게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관심을 가지되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세요.

물론 정말 강태양이 그래서 화를 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천유현의 의견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닌 데다가, 간접적으로 얘기를 건너 들은 것만으로 누군가의 속내를 아는 것은 천유현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천유현이 알려 주는 대로만 하면 모든 일이 착착 풀릴 같은 기분이 드는 왜일까? 비밀 공간에 은밀하게 흐르는 긴장과 천유현 몽환적인 분위기에 홀려 버리기라도 모양이다.

“그럼… 앞으로는 질문 같은 웬만하면 하는 낫겠네요?

“글쎄요. 나라면 일단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같습니다.

“…….”

“적어도 그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있을 때까지는요.

천유현의 조언은 지극히 온건하고 합리적이었기에, 머리로는 금세 이해가 갔다. 하지만 거의 곧바로 묘한 반발 심리가 들었다. 그는 내가 다음에 강태양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저한테 갑자기 , 뽀뽀하려고 해도요?

군말 없이 천유현의 해결책을 따르려니 괜히 삐죽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강태양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다가는, 안위가 심각하게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

“…….”

한동안 아무 없이, 천유현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입술에 닿아 오는 까슬한 촉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커다란 손으로 뺨을 가볍게 거머쥔 천유현이 엄지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빠듯하게 쿵쿵 뛰어올랐다. 아랫입술에 문질러지는 미지근한 체온이 생경해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25

“우주 .

“네, 네넷?

“이럴 가만히 있는 아니라, 갑자기 만지시면 된다고 해야죠.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여린 살갗을 , 눌렀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여전히 입술 위에 닿아 있는 천유현의 손가락을 허겁지겁 떼어 냈다. 의자에 등을 바짝 기대며 최대한 뒤로 물러나 보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거리가 많이 확보되지는 않았다.

“관장니임!

설마, 처음부터 내가 어떻게 행동하나 보려고 일부러 입술을 만져 건가? NPC라기에 천유현은 너무 돌발 행동을 좋아하는 아닌지. 정말이지 나는 이대로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놀란 마음에 살짝 투정을 보고도 싶었지만 차분하기만 천유현의 얼굴을 보자 이상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긴,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데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여하튼, 우주 나름의 선을 지키는 한에서 자연스럽게 지내 보세요.

“…….”

“겉으로 보이는 외에도, 사람이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 가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천유현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은은하고 어두운 조명 아래로 수려한 이목구비가 요요하게 빛났다. 그대로 그에게 홀릴 뻔한 것을, 고개를 바쁘게 가로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래도 게임 캐릭터들은 다들 미인계를 너무 쓰는 같으니, 정신을 번쩍 차려야겠다.

“그나저나, 오늘 우주 씨에게 충분한 도움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이죠. 도움 완전 많이 됐어요!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완벽하게 이해가 같았다. 무공 비급이라기에는 다소 김새는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천유현의 이론 자체에는 조금도 틈이 없었다. 지금부터 이를 실전에 적용해 나가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얘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관장님.

“별말씀을요. 저에게도 신선한 환기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요?

“그럼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다른 세계에서 사람과 대화해 있겠어요?

천유현이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주는 화법 때문인지, 천유현이랑 대화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이런 점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번에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출구로 향하는 경사가 가파른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씩씩하게 인사까지 마쳤지만 막상 나가려니 왠지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혀끝에 맴도는 달착지근한 마들렌 향을 곱씹고, 괜히 뒤를 한번 돌아 보았다.

“앗, 잠시만요 관장님.

그때, 벽면에 걸린 유화 점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빛이 드는 선반에 올려진 바구니에 탐스러운 과일이 담긴 그림이었다. 물씬하게 익어 가는 과일 껍질을 묘사하는 색채가 다채로웠고,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은 양감의 표현 역시 탁월했다.

“와아….

발짝 그림에 가까이 다가섰다. 정면으로 단단히 마주 보자 소박한 경건함이 흐르면서도, 압도감 역시 전해져 왔다. 그런데 분명히 화풍 자체는 익숙한데도, 처음 보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관장님, 혹시 이거 프란츠 베르하르트의 작품인가요? 처음 보는 같은데….

“알아봐 주시니 기쁘군요.

“아, 역시 맞았나 봐요!

“개인 소장품입니다. 재작년에 좋게 비공개 경매에서 구할 있었죠.

천유현은 별것 아니라는 이야기했지만 개인 소장품과 비공개 경매라는 이야기에 나는 입이 벌어졌다. 물론 이번에는 천유현이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그의 어마어마한 재력과 네트워크에 대한 감탄이었다.

베르하르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명이지만, 작품은 도록이나 인터넷 아카이브에서는 적이 없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작품을 대부호들이 개인 소장품으로 은밀하게 보관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책에서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상 얘기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바로 앞에 있을 줄이야.

“어, 관장님은 비공개 경매… 같은 것도 다니세요?

“직업 취미라고 있겠네요. 미적인 것을 수집하는 일을 역시 가장 좋아합니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고상한 취향이 돋보인다고 생각했던 실내를 다시 한번 , 둘러보았다. 내가 알아볼 있었던 것은 베르하르트의 그림뿐이었지만,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오브제들도 분명 값어치와 희소성이 엄청난 것들이겠지?

“그러면, 만월미술관에 있는 작품들도 전부 관장님께서 수집하신 거예요?

“큐레이팅이나 전시 기획에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지만, , 최종 결정권자는 저입니다.

미술관 관장이자 예술재단의 대표라는 천유현의 직업이 새삼 실감이 났다.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만한 재능과 여유가 있는 부럽다 싶기도 하고. 관장님은 예술 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니까 안목이 각별하고, 그래서 사람 보는 눈도 있는 걸까?

“제가, 저도 원래는 그림을 그렸는데… 사정상 잠깐 쉬고 있지만, 다시 거거든요.

미술관의 비밀 공간에 오래 머무르게 되자 역시 당장이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갈증이 강렬하게 일었다. 취향을 가꾸어 나가며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천유현에게 영감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그랬군요.

“…물론, 아직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요.

“다음번에 그림을 그리게 되거든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

“우주 그림을 날이 역시 기대가 됩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천유현은 직업상 재능 충만한 화가 지망생들을 많이 만날 텐데. 묻지도 않은 말을 괜히 이야기했나 싶어 말끝을 흐렸지만, 뜻밖에도 천유현은 나의 꿈을 환대해 주었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금세 천유현을 향해 빙긋 웃었다.

“저도 관장님께 그림을 보여 드릴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게임 NPC 천유현은 현실의 만월미술관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내가 그린 그림을 천유현에게 보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을 등지고 거리로 걸어 나왔다. 코끝을 찌르는 매연 냄새와 귓전을 때리는 클랙슨 소리와 함께 현실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달콤한 꿈처럼 편안한 공간을 뒤로하고, 이제 다시 게임을 공략해 나갈 시간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묘해서, 천유현과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한층 자신감이 북돋워졌다. ‘특별한 손님’이라는 말처럼, 미술관에 머무르는 동안 천유현은 나를 각별하게 존중해 주었다.

그렇게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고, 우주 씨는 있을 거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치열하게 펼쳐지는 게임 속의 현실을 다시 마주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를 한결 버틸 있을 같았다.

***

“힝, 벌써 수업 시간 끝났어요? 여기 꽃잎 색칠 했는데.

“우주 선생님, 우주 선생님, 다음번에는 언제 오세요?

“선생님, 진짜 다음에 예쁜 반짝이 펜도 가져오실 거예요?

“저는요, 다음 시간에는 이따만큼 종이에다가 그림 그릴래요!

병원에서 미술 치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일요일이 돌아왔다. 고작 번째 보는 거였지만 아이들은 나를 향한 경계심을 금세 허물어뜨렸다. 뿌루퉁하게 쳐다보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너나 없이 ‘우주 선생님’에게 달려들고 치댔다.

“그럼, 당연히 그렇게 있지! 선생님은 다음 일요일에 거야~

“와아아!

덕분에 나는 미취학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 수업은 단순히 말과 손으로만 하는 아니라, 온몸을 써서 받아 내야 한다는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한창 뛰놀아야 나이에 좁은 병동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관계에 목말라 있구나 싶어 짠하기도 했다.

시간 남짓한 수업이 마무리되고, 스케치북을 품에 안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어질러진 책걸상 사이로 서로 그림을 교환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 무리와는 동떨어진 새침한 얼굴로 헝겊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민주에게 다가갔다.

“민주야, 우리 공주님은 오늘 수업 어땠어? 재밌었어?

“음… . 저번보다는 나았던 같아요.

고개를 슬그머니 옆으로 돌린 민주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정반대로, 민주는 일주일 만에 나에게 낯을 가리게 모양이었다. 품에 들고 있는 인형에는 임시 처치 용도였던 종이 가면을 떼어 내고 다시 단추를 눈으로 붙여 두었다.

“우리 민주는 오늘도 수업 끝나면 동화책 읽으러 거야?

“…….”

역시, 민주의 관심사는 미술 수업보다는 동화책이었던 모양이었다. 입을 앙다문 채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한층 반짝였다. 내심 으쓱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우와, 정말 부럽다. 선생님도 같이 데려가 주면 ?

천유현과 나눈 대화를 계기로 나는 강태양에게 먼저 사과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여전히 그때 강태양이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나에게 심한 말을 했던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흐음, 알겠어요.

하지만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은 관계를 잃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자존심을 세워서는 되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를 원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민주와 손을 잡고 강태양이 있는 병원 휴게실로 나란히 향했다.

              

#26

“선생님, 제가 엘리자라면요,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새로 왕비가 오빠들을 백조로 만드니까 너무너무 슬펐을 같아요.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새엄마인데 오빠들이랑 엘리자를 그렇게 미워하는 선생님이 봐도 못된 같아.

“근데요, 엘리자도 쐐기풀로 옷을 만드느라 말을 하지만, 오빠들도 백조가 되어 버려서 말을 하는 똑같아요!

“하하,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민주야, 민주는 동화 중에서 백조 왕자 이야기를 가장 좋아해?

“으음… 그건 아니에요. 저는 개구리 왕자랑, 인어 공주랑, 엄지 공주도 좋아해요. 태양 오빠가 공주님 나오는 얘기 저한테 많이많이 읽어 줬어요!

“와아, 그걸 태양이 형이 읽어 거야?

“네, 태양 오빠가 병원 다음에 저랑 제일 처음 만난 거예요! 선생님, 있잖아요, 태양 오빠는요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로 멋진 남자예요.

휴게실로 향하는 동안 민주는 내내 달뜬 얼굴로 재잘거렸다. 갑갑하고 답답한 입원 생활을 하는 동안 강태양과 보내는 시간이 민주에게는 드물게 즐거운 일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강태양은 민주에게 제법 오랫동안 신경을 주고 있었구나.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야기의 결이 너무 달라서, 대체 강태양이 어떤 사람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가능하다면 민주의 마음에 빙의해 강태양을 좋게 보는 편이 나에게는 나을 같았다.

“민주야, 그런데 오늘은 백조 왕자 말고 다른 동화책 읽어도 ?

“어떤 동화책이요? 동화 엄청엄청 많이 알아요. 선생님이 저한테 얘기해 봐요.

“아, 근데 이거는 민주가 모르는 동화일 수도 있어.

“진짜로요?

눈을 휘둥그레 민주가 촘촘한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자리에 멈춰선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민주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귓속말했다.

“허어어!

말을 듣고 나서 민주는 거의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뿍 묻어났다. 그런 민주에게 작게 윙크하자 이내 민주가 작달막한 손으로 입을 살포시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어쩐지 말썽을 꾸미는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민주와 둘이서 휴게실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태양 오빠! 왔어요!

휴게실 창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강태양은 무료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주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하자 강태양의 얼굴에 활기찬 생기가 번졌다. 강태양이 건장한 양팔을 활짝 양옆으로 벌려 민주를 반겼다.

“오, 우리 민주 왔어?

근육질의 팔을 뻗은 강태양이 손으로 번쩍 민주를 안아 올렸다. 그것이 신나는지 민주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쾌하게 웃던 강태양은 민주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나를 발견하고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뭐냐? 여기 왔어.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강태양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4] 한차례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한 호감도 수치도 그의 머리 위에서 바쁘게 깜빡거렸다.

“태양이 , , 안녕!

“…….”

지난번 내가 형이라고 불러 줬을 강태양이 은근히 좋아했던 생각해 냈다. 용기를 끌어모아 살갑게 인사했지만, 강태양은 그런 나를 무시하다시피 했다. 대답을 하기는커녕 시선조차 제대로 던지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뿔이 단단히 모양이었다.

“그게, 나도 동화책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가지고…. 헤헤.

되도 않는 변명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소맷자락이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덧붙였다. 심문당하는 범죄자처럼, 총이나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증명하듯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눈썹을 이지러뜨리고 웃어 보이며 강태양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라도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하기 위해서 오늘 자리에 거라는 나의 마음이 강태양에게 전해졌으면 했다. 형형하게 눈을 번뜩이는 강태양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적개심이 풍겨져 왔다. 사납고도 동물적인 기세가, 정말 운동장에서 강태양을 만났더라면 기싸움에서 곧바로 그에게 눌렸겠다 싶을 정도였다.

“태양 오빠, 오늘은요, 우주 선생님이 만든 동화 읽어 주세요!

“뭐라고? 쟤가 동화를 만들어?

“네! 우주 선생님 ~따만큼 그림 그리거든요. 저번에 윙키 얼굴도 그려 줬었어요.

겉으로는 어설프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고 있던 중이었다. 이대로 커트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민주가 나를 구해 주었다.

“흐음.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가방에 담긴 스케치북을 주섬주섬 꺼냈다. 어젯밤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급하게 만드느라고 조금 허술하기는 것이다. 그래도 진심을 담아 열심히 제작한 동화책이었다.

“민주, 백조 왕자 다음 이야기 궁금해?

“우응… 그것도 궁금하지만, 오늘은 우주 선생님이 만든 동화 읽고 싶어요.

“꼭 그래야만 하는 거지? 후회 자신 있어?

“네에. 태양 오빠아, 우주 선생님 동화책에 멋진 동물 친구들이 나온다고 했단 말이에요.

여전히 강태양은 내키지 않아 보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라운드의 지배자 역시도 꼬마 숙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당해 수는 없었다. , 짧게 혀끝을 강태양이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가져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와는 끝끝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하마와 종달새. 지은이, 연우주.

스케치북 장을 펼친 강태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평화로운 오후, 호숫가에서 서로 어울리는 하마와 종달새의 그림이, 따지자면 동화책의 표지에 해당했다. 입을 헤벌린 민주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종달새의 눈에 하마는 정말 멋져 보였어요. 하마는 바쁘게 종종거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언제나 느긋하고, 바위처럼 단단한 몸도 무척 튼튼했거든요. 종달새는 그래서 하마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

“하지만 막상 하마와 친해지고 나자, 자신과는 다른 하마의 모습에 은근한 불만이 생겨났어요. ‘먹을거리를 구하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지. 하루 종일 물에서만 있다니 이해가 . 사실은 아주 게으르구나. 그러자 화가 하마는 이상 종달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답니다.

민주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강태양은 백조 왕자 이야기를 읽어 때처럼 신들린 감정 이입으로 애를 들었나 놨다 하지는 않았다. 대신, 모를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동화책을 읽어 나갔다. 아마 동화 이야기가 우리 사람의 다툼을 빗댄 것을 알아차린 같았다.

“…종달새는 이대로 영영 하마와 멀어지게 될까 무서웠어요. 그래서 들숲에서 버찌 열매를 물어와 하마에게 선물했답니다. 그리고 하마에게 사과했어요. ‘나는 너처럼 힘이 세지도 않고, 물에서 발장구를 치는 법도 몰라. 말이 너를 기분 나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여전히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

“화가 풀린 하마는 더운 날씨에 땀을 식힐 있도록 종달새에게 물을 뿜어 주었어요. 종달새 역시 기뻐하며 하마를 위해 재잘재잘 듣기 좋은 노래를 불러 주었답니다. 다시 친구가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와아아, 완전 재밌다!

짤막한 동화가 끝나자 민주가 짝짝짝, 격하게 박수를 쳤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강태양은 다소 누그러진 듯한 표정이었다. 스케치북을 멀찍이 들어 올리더니 크레용으로 색칠한 그림을 요모조모 뜯어 보았다. 그러더니 민주의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있는 나에게 흥미 섞인 시선을 던졌다.

“너 이런 재주가 있었냐? 그림도 그리고, 이야기도 만들고.

“그, 그때 내가 병원에서 미술 치료 봉사 활동 하고 있다고 했었잖아! 이래 봬도 나름 미대생이거든?

“그래, 나름 깜찍하고 좋네.

어깨를 으쓱해 보인 강태양이 의자의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민주는 강태양이 내려놓은 스케치북을 팔랑팔랑 넘겨 보면서, 튼튼한 하마가 멋지다느니, 아침부터 일어나는 종달새가 부지런하다느니 쫑알거렸다. 그런 민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는 강태양의 손길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있잖아, , 혹시 이제 나한테 풀렸어?

“미안하다는 사람한테 화풀이할 만큼 막돼먹은 놈은 아니라서.

채로 주변을 서성이던 나도 그제야 강태양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다부지게 뻗은 얼굴선을 흘끔거리며 질문했더니, 다행히 사과가 마음에 닿은 모양이었다. 한시름 마음이 놓이고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아, 진짜 다행이다.

“뭐야. 그게 정도로 놀랄 일이야?

“나 실은 그동안 엄청 쫄아 있었어. 혹시 형이 다시 만나 준다고 할까 .

“뭘 그렇게까지 눈치를 보고 그러냐. 누가 보면 잡는 알겠다.

웃음을 흘린 강태양이 유들유들하게 맞받아쳤다. 혹시라도 뒤끝 있는 스타일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화가 풀리면 감정을 금세 훌훌 털어 버리는 듯했다. 지난 며칠 내내 마음 졸이던 긴장이 풀리자 나도 슬슬 강태양에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말했잖아. 사심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형이랑 ... 우정을 쌓아 가고 싶다고.

“그래서, 연우주 네가 정말 나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한 아니란 말이지?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로 결백하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선수 강태양 .

“전혀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긴 했네.

“태양이 , 그러면 우리 다시 친구 맞지?

들뜬 기분으로 강태양에게 질문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무르지 못하도록, 정확하게 확인을 받아 둬야겠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강태양이 묵직하게 주먹을 얼굴 근처에 내밀었다. , 설마 이걸로 나를 때리려는 아니겠지?

“뭐해. 하이파이브 해야지.

아니라는 알면서도 흠칫해 있는데, 강태양이 의아하다는 짙은 눈썹을 들썩였다. 운동선수들은 하이파이브를 이렇게 하는가 보군! 나도 웃으면서 주먹을 단단히 쥐고, 가볍게 그를 맞받아쳤다. 불거진 손가락 뼈끼리 부딪치면서 찌릿한 감각이 일었다.

“이제 이걸로 서로 담아 뒀던 것들 푸는 거야, 깔끔하고 심플하게.

“헤헤, 알았어.

강태양과 마찬가지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나른하게 기댔다. 입꼬리가 절로 들썩여졌다. 물론 아직 길이 멀었지만, 간만에 게임 공략에 찾아온 평온함이었다.

“태양 오빠가 그렇게 웃는 처음 봐요.

그때, 우리 사람이 얘기하는 잠자코 지켜보던 민주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27

“내가 그랬다고?

강태양이 놀란 기색으로 나를 흘긋 지켜보았다. 어리둥절한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 물론 강태양이 웃음이 아주 헤프다고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활기차고 명랑한 성격인데. 민주가 그렇게 얘기할 정도인가?

“원래는 맨날 병원 따분하고 지겹다고 인상 쓰고 있잖아요.

“야, 오민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되지. 오빠가 보고 얼마나 많이 웃어 줬는데, ?

“그래도요, 그거랑은 느낌이 다르단 말이에요! 오빠 바보!

금세 뾰로통해진 민주가 강태양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투정을 부렸다. 애지중지 품에 끌어안고 있던 인형의 귀를 쭉쭉 잡아당기기도 했다. 강태양은 ‘이 친구,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났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왠지 이유를 같았다.

“근데요, 태양 오빠랑 우주 선생님이랑 없는 사이에 둘이 병원 밖에서 만났어요?

“민주야, 우리 공주님.

“네?

둘이 어울릴 같다며 소개를 주선해 놓고도, 정작 강태양과 내가 너무 가까워진 같아 보이니 민주는 묘하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럼, 충분히 그럴 있지. 통통한 찹쌀떡 같은 볼이 귀여워 애써 웃음을 참으며 민주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런데, 태양이 형은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민주를 제일 좋아할걸? 그치, 태양이 ?

몸을 들썩여서 나란히 붙어 앉아 있던 강태양과 사이에 빈자리를 만들었다. 그곳에 민주를 내려놓자, 성인 남자 둘보다 앉은키가 한참은 작은 꼬마 아가씨가 새침한 표정으로 우리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민주의 뒤로 팔을 길게 뻗어 강태양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럼, 나한테는 역시 민주가 최고지.

그제야 아차 했는지 강태양이 동화구연 때처럼 과장된 말투로 민주를 띄워 주었다. 말을 듣고 나서야 은근한 질투를 내비치던 민주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그 말이 정말이죠?

“물론이지.

강태양의 확답을 받고 후에야 민주는 배시시 웃음을 되찾았다. 금세 강태양의 무릎 위로 올라탄 민주가 새침한 얼굴로 강태양의 목에 걸린 군번줄 모양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민주가 귀여워 털모자를 뒤집어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옆자리의 강태양은 민주의 자그맣고 통통한 손을 움켜쥐고 붕붕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치만, 다음번에 둘이 만나면 저도 끼워 줘야 돼요.

“하하, 알았어 민주야.

***

스케치북 동화를 선물로 안긴 강태양과 같이 민주를 다시 소아병동에 데려다줬다. 나란히 병원 건물을 나서자, 나른한 오후의 날씨가 유난히 좋아서 가볍게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근처의 정원에는 키가 나무가 호수를 오붓하게 둘러싸고, 아롱아롱한 나뭇잎이 서늘한 그늘을 드리웠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에 주름이 노인들이 있는 한편, 민주처럼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휠체어에 앉은 호숫가를 돌아다니는 이들도 종종 보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공원에는 거동이 편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병원에서 사람들은 평소보다 한참은 느린 속도로 삶을 살아갔다. 그에 반해 키가 훤칠하게 크고 근육질의 어깨가 벌어진 강태양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왼발에 반깁스를 감고 있었지만, 활발하고 역동적인 강태양은 정적인 병원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 같았다.

“아….

그런 생각을 하느라 강태양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눈이 마주치자 유난히 새까만 강태양의 눈동자가 보다 또렷하게 빛났다. 따갑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강태양은 이름과 같이 늠름한 태양처럼 우뚝 있었다.

“연우주 너랑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아서 그런가 보다.

자리에 멈춰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강태양이 , 나에게 말을 던졌다. 다소 맥락 없게 느껴지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내게로 강태양이 불쑥 손을 뻗은 강태양이 딱딱한 검지로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민주가 내가 보면 자꾸 웃는다고 하길래.

“아, 얘기 하는 거였어?

“다음번에는 대체 무슨 어이없는 소리로 나를 웃기게 할지, 대단한 기대가 된달까?

유들유들 장난기가 스며든 목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졌다. 이거야 ,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이었다. 아마도 강태양에게는 다일 확률이 높겠지만.

“어이없는 소리라니, 나는 하늘 아래 부끄럼 없는 100% 팩트만 말했을 뿐인데?

보란 듯이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이야기하자 강태양이 키들키들 웃었다. 그나저나 강태양이 아까 민주가 얘기를 은근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보네. 강태양은 어떤 면에서는 되게 쿨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보통 사람보다 섬세한 구석이 있는 같았다.

아니, 사실 나는 강태양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거의 없다.

“그런데 형은 병원에는 얼마나 자주 ?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찾아본 피상적인 정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번에는 나의 시각이나 편견을 덜어 내고 걍태양에게 소소한 질문을 던졌다. 게임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를 알아가는 것이 내게는 필요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공식적으로는 일주일에 ? 근데 별일 없으면 자주 오려고 하지.

“우와, 되게 부지런하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하고 있어 봐야 나아질 없으니까?

“아하…. 집은 여기서 많이 멀어?

“차 타면 여기서 금방이야. 다리가 꼴이라 운전이 번거로워서 그렇지.

“그렇구나. 그러면 형은 집에서는 혼자 사는 거야?

술술 대답을 내어주던 강태양이 고개를 쪽으로 돌리더니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 혹시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것처럼 느껴졌나? 유달리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에 괜히 혼자서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연우주 너는? 혼자서 살아?

“어, 그렇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

“가족은?

“어, ? 아아….

뒤이어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천유현이야 내가 게임 속으로 차원 이동을 왔다는 알고 있지만, 그걸 강태양을 포함한 다른 캐릭터가 알아서는 텐데…. 섣불리 대답하기에는, 혹시나 게임 ‘메인 플레이어’로서의 설정과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음, 가족은 계시지. 근데 집이 멀어서 기숙사 들어오기로 했어.

침을 꿀꺽 삼키고 강태양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였다. 표정을 최대한 차분하게 유지하는 역시 잊지 않았다.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집은 (원래 현생에 있어서) 머니까. 정보가 일부 생략되었을 딱히 거짓말이라고 수는 없기도 했다.

“이상하게 나한테 숨기는 많은 같단 말이야.

“아닌데? 앞에서 없는 번도 없는데?

“알았어, 알았어. 속는 치고 믿어 줄게.

강태양이 지금 이상으로 집요해지면 어쩌지, 주춤거리는데 때마침 덩치가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프리스비를 물고 강태양에게 뛰어들었다.

“멍, 멍멍!

강태양은 팔을 아래로 내려 털이 북슬북슬한 골든 리트리버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강아지를 위해 팔을 길게 돌려 프리스비를 멀찌감치 던져 주었다. 멍멍! 골든 리트리버는 좋아서 어쩔 몰라 헥헥대며 호수 반대편으로 뜀박질했다.

“요즘 이렇게 삶이 재미가 없냐.

잔뜩 신이 났는지, 프리스비를 향해 달려가는 골든 리트리버는 뭉툭하고 길쭉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덩치 강아지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강태양이 불쑥 중얼거렸다.

“…….”

섣불리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강태양처럼 성공한 축구선수라면 인생이 재미있는 일들로만 가득할 텐데. 커리어도 최정점을 달리고 있고,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연애 라이프도 다이나믹할 거고 말이다.

“됐다, 내가 두고 얘기를 하겠다고.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강태양은 금세 말을 거두어 갔다. 이유를 모르게 움찔한 순간, 상대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라는 천유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이해가 간다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면 절대 친밀해질 수가 없지.

“태양이 , 근데 형은 재활한 얼마나 거야?

“이제 한두 정도”

“꽤 오래 걸리는구나, 부상에서 회복하는 것도.

“원래는 저번 정도면 마무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회복 속도가 더디네.

“하긴, 그동안 내내 병원에 있었으면 확실히 좀이 쑤시겠다.

원하는 뭐든 가질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병원에 발이 묶이면, 확실히 인생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같다.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강태양은 딱히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타박타박 걸어갔다.

“연우주.

“으, ?

“지금까지 오해했던 미안하다.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말을 같아서.

“…….”

“그때는 내가 말을 심하게 하기도 했고. 여하튼 앞으로는 지내 보자.

번듯하게 잘난 얼굴에 아주 잠깐 쓸쓸한 느낌이 스쳐 나만의 착각일까? 다시금 평소의 매력적인 태도를 되찾은 강태양이 내게 당당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다시 공식적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이제 더는 강태양이 돌발적인 스킨십이라도 올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아, 으응….

그런데 나는 강태양 앞에서 이렇게 뻣뻣하게 굴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처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처럼 뻔뻔하게 구는 대신, 강태양은 진솔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해 왔다. 예전처럼 무턱대고 발끈하는 아니라도 묘하게 동요하게 되었다.

“흡.

그때, 강태양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키가 강태양이 어깨를 깊숙이 숙였다. 코끝이 가까워지고 숨결이 간지럽게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이제 더는 강태양이 몸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알면서도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앞머리에 묻어서 떼어 주려는 건데.

“헉, 그랬어? 말을 주지 , 나도 있는데…. 하하.

그게 정말이었는지, 어느새 다시 뒤로 빠진 강태양이 손끝에 닿아 있는 먼지 덩어리를 털어 냈다. 머쓱해진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강태양 앞에서 아예 경계를 내려놓기란 아무래도 어려울 같다.

“친구로만 지내고 싶으면 앞으로는 앞에서 그런 표정은 하지 말고.

“아….

“그러다 내가 제대로 오해하니까.

그대로 완전히 물러나는 대신, 강태양은 오른손 손가락 두어 개로 부근을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불순한 의도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가벼운 스킨십이었지만 얼굴이 금세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7]

그와 동시에 강태양 머리 위의 하트가 부르르, 진동하며 호감도가 3% 올라갔다. 그래도 하락했던 호감도가 원상 복귀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아 할까? 어쨌든 처음 서로에게 가졌던 오해와 편견이 덜어지게 지금에야말로 강태양 루트를 제대로 시작하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8

일요일은 몰아치는 물살처럼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오후에 병원 봉사 활동을 마치고 강태양과 산책을 다음, 스팸 주먹밥으로 끼니를 간단하게 때웠다. 이따 저녁 시간에는 조별 과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장희연이 평일 저녁에는 한사코 시간이 된다고 우겨서 일요일 저녁에 간신히 잡은 일정이었다. 조별 과제 일정도 빠듯한데, 웬만하면 오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주중에는 주워야 떡밥이 많아서 절대로 된다고, 일요일 저녁도 겨우 시간을 거라고 했다. 듣자 하니 홈마라는 웬만한 알바보다 책임이 같았다.

“얘들아, 미안하다 . 내가 날짜를 깜빡 헷갈린 모양이야.

주의 끝이 되어서야 우여곡절 끝에 모인 조별 과제였지만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조장인 조현수가 회의를 위해 도서관 컨퍼런스 룸을 미리 예약해 뒀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도서관에 갔더니, 조현수는 이번 일요일이 아닌 다음 일요일로 회의실을 잘못 잡아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죠? 오늘 회의하는 것도 이미 늦은 감이 있는데….

“아니…. 선배님, 조장도 원해서 하신 거면서, 컨퍼런스 예약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걸 헷갈리시면 어떡해요.

“근처에 제가 아는 카페 있어요. 좌석이 넓어서 괜찮을 같은데, 그쪽으로 가요.

회의에서 허세 부리며 큰소리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조현수는 무척 계면쩍은 표정이었다. 다행히 가벼운 티격태격이 진지한 갈등으로 번지기 전에 이라윤이 상황을 수습했다. 후배지만 이럴 때면 든든하단 말이야. 조원들 같이 길을 아는 이라윤을 따라 카페로 이동했다.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카페 안에는 기적적으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나 남아 있는 4인용 좌석에 가방을 두고 음료를 주문하러 나섰다.

“음, 뭐를 시켜야 하지….

“우주 선배, 여기 코코넛 스무디 맛있어요. 먹어 봐요.

“진짜? 떫은맛? 나는 거는 별로 좋아하는데.

“여기 달콤하게 만들더라고요. 괜찮을 거예요.

평소 즐겨 마시는 메뉴는 아니었지만 나는 이라윤의 추천을 믿고 코코넛 스무디를 먹기로 했다. 이라윤은 언제나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한편 억지로 카페에 끌려온 장희연은 메뉴판 앞에 있으면서도 그를 본체만체하고 전부터 핸드폰 화면만 맹렬하게 두들겼다.

계산대 , 배기핏 청바지를 입고 안짱다리로 조현수가 뒷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을 활짝 열었다. 얄팍한 카드를 장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더니, 조장님답게 과감하게 긁는 대신 뒤에 주르르 늘어선 조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그냥 더치할까?

“아, 하하하, 그래요….

계산대에 앞까지 가시길래 회의실 예약 잘못한 미안하다고 음료 주시는 알았는데…. 물론 학교 카페라서 가격이 엄청 비싼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기분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라윤이 바람 새듯이 헛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음료 나왔나 보네요.

진동벨이 울리자 얇은 카디건을 벗은 이라윤이 선뜻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이라윤은 뒷면에만 심플한 패턴이 들어간 검은색 무지티를 입고 있었는데, 오버핏 티셔츠 아래로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매가 보기 좋게 드러났다. 걸음 걸음 옮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이라윤을 흘긋흘긋 쳐다보는 느껴져서 괜히 내가 뿌듯해졌다.

“헉, 젠장!

“뭐야, 희연아 갑자기 그래?

“이런 고오급 정보를 이제야 입수하다니!

이라윤이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올 즈음 장희연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발갛게 상기된 장희연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조별 과제 참여에 내내 무기력하고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전혀 찾아볼 없었다. 희번득거리는 눈을 맹렬하게 빛내는 것이… 그러니까 저건, 단순히 열정이라기보다는 광기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공항으로 봐야겠어. 우리 애들 삼십 안에 입국장 찍을 거래.

“뭐라고? 희연아, 그치만 우리 지금 조별 과제 회의 중이잖아.

“그치, 하지만 새끼들이 오늘 한국에 입국할 줄은 몰랐잖아?

“희연 선배, 선배 일정 배려해서 일요일 저녁으로 잡은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미안, 미안, 라윤. 나중에 피피티를 내가 만들든지 하면 되잖아? 회의 내용 정리해서 보내주면 펑크난 메꿀게, 근데 일단 지금은 사진 찍으러 봐야 .

“야, , 장희연! 당장 이리 앉아?

장희연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해외 투어를 마치고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다. 나머지 조원들 모두 어떻게든 장희연을 말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눈막귀막 상태인 그녀의 앞길을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몸처럼 들고 다니는 큼지막한 DSLR 카메라를 옆구리에 단단히 장착한 장희연이 빛의 속도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카톡 바로바로 확인할게~ 이번 번만 이해해 , 진짜 미안해!

깜빡할 사이에 장희연이 증발하고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것은 장희연이 주문한 자몽에이드뿐이었다. 조별 과제를 위해 만난 삼십 분이나 되었을까, 폭풍이라도 휩쓸고 것처럼 분위기가 황량해졌다. 대놓고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각자가 불만을 안으로 꾹꾹 누르는 동안 냉랭한 기운이 테이블 위를 흘렀다.

“큼큼, 그러면 각자 조사해 거라도 얘기해 볼까? 일단 나부터 할게.

무단이탈이라니, 역시 조별 과제 빌런이라는 이름값이 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연이가 그렇게 버렸다고 해서 남은 사람들이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별 과제 빌런 나머지 명은 다행히 조사라도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러니까, 진화심리학적으로 사회를 접근한다는 것의 가장 기본이 되는 대전제는 우리 사람도 어떤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거야.

“아, 그렇군요….

“그리고 동물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본능이 생식 욕구 아니겠어? 본질적으로는 사바나 정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 번식에 성공하고 자손을 남기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이고. 이러한 경향은 특히 배우자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수컷, 남성에게 더욱 도드라지는데….

어쩐지 혼자서 격앙되어 버린 조현수가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까, 현수 선배가 사회학 이론에 단단히 꽂혀 있는 알겠는데…. 빼곡하게 채워진 구글 닥스 문서를 보니까 나름대로 조사를 열심히 같기는 한데 내가 듣기에는 내용이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지어냈는지 모를) 이런저런 사례를 설명하더니, 조현수는 다윈의 선택부터 우생학의 태동, 세계 2 대전 이후 사회진화론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계보를 줄줄 읊어 대기 시작했다.

“흠흠, 다들 어떻게 생각해?

처음에는 그래도 주제에 충실한 척이라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조현수의 조사 내용은 우리 사회의 성문화와 사람간의 관계를 되짚어 본다는 조별 과제의 주제와 심각하게 동떨어져 있었다. 주제 그대로 나간다면, 아무리 콘텐츠랑 피피티를 만들어도 절대 에이를 받을 없을 텐데….

“어, 그게 그러니까요….

하지만 우쭐한 얼굴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조현수에게 차마 내가 느낀 모두를 솔직하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마우스를 딸깍딸깍 움직여 내가 조사해 자료를 열어 봤다. 조현수의 자료에 비하면 사실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수는 없긴 한데… 이걸로라도 싸워 있을까?

“하아….

큼지막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옆을 슬쩍 쳐다보니 이라윤은 눈이 흐릿한 것이 영혼이 자리에서 탈출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 포기하고 해탈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그렇다면 이대로 우리 조는 침몰하는 타이타닉이 것인가….

역시 원래 갈등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히 여러 명이 모여서 같이 하는 일에 있어서는 의견을 밀어붙이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결과물이 얼마나 나아지는지도 모르겠을뿐더러, 서로 마음 상하는 에너지 소비가 크기만 했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대로는 아닌 같아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말은 해야겠다. 조별 과제의 향방에 앞으로의 운명이 달린 내가 총대를 맸다. 그와 동시에 조현수의 좁다란 이마에 빠직, 억센 힘줄이 돋아났다.

              

#29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로 내리꽂히는 질문에 뒷목이 쭈뼛하도록 긴장이 되었다. 한마디 잘못해서는 되는 상황이니, 외줄 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그치만 이건 결국 나밖에 없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아, 물론 선배님 의견이 나쁘다는 당연히 아니고요. 저는 처음에 도입부는 정말 좋았던 같은데, 뒷부분이 조금 그랬어요.

“…….”

“예를 들어서, 그러니까 서로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관계를 맺은 다음에 결실로 아이를 낳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처음에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조현수가 했던 말에서 도드라지는 단어 개를 따온 다음, 방향을 완전히 뒤틀어서 이야기했다.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조현수에게 되묻자, 일단은 들어 보겠다는 조현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의견이 전혀 아닌 아니었기에.

“그런데 , 뒤에 말씀하신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 같은 거는…. 제가 사회학과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번에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

“교수님께서는 현대 사회의 문화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던 같은데, 그러지 말고 선배가 처음에 말씀하셨던 원래 주제로 돌아가 볼까요?

어떻게든 조현수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이어 나가면서도, 머리랑 입이 따로 노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장희연이 떠나갔으니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명뿐인데, 과반수인 나랑 이라윤은 확실하게 같은 편이다.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조현수의 페이스에 말려서는 됐다.

“저도 우주 선배 말에 동의해요. 주제는 넓은 것보다는 좁고 정확한 편이 좋으니까요.

최대한 유하게 얘기했지만, 그래도 의견을 바로 들어주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조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라윤도 입을 열었다. 잘생기고 반듯한 애가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가 중요한 한마디를 하니까 확실히 포스란 느껴졌다.

“흠… 그래, 일리가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네.

“…….”

“그래서, 뒷부분을 어떻게 바꾸면 좋겠는데? 연우주 너는 무슨 아이디어 있어?

아무리 조장이고 선배라지만 다수의 의견이라는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라윤까지 거들기 시작하자 조현수는 의견을 아예 , 걷어차지는 못했다. 여전히 삐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조현수가 질문했다.

“그러면, 선배님의 도입부에서 시작해서, 어… 그러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관계를 잘하는 방법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음… 계속해 .

“교수님도 이번 조별 과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있을지 생각해 보면 좋을 거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하하.

바로 정확히 이유 때문에 지금 내가 조현수와 장희연 사이에서 속이 답답해지면서도, 어떻게든 과제를 성공으로 이끌어 보려고 발버둥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약간, 관계의 고수? 이런 느낌으로 기억해야 것들이나, 연애 잘하는 ? 그런 쪽으로 틀어봐도 저는 좋을 같거든요.

“썸 기억해야 것이라면?

“네, 특히 같은 경우에는…. 나는 호감을 표현하려고 행동인데 상대방이 그걸 무례하다고 생각하거나,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잖아요. 별다른 악의 없이 무심코 일이 상대방의 선을 넘는다거나 때요.

“…….”

“저번에 선배님이 폭력이라는 단어가 별로라고 하셨던 같은데…. 그러면 선배님이 했던 말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할 , 조금 조심해야 점으로 이끌어 가면 어때요?

나도 주중에 열심히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짜내 보려고 애썼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역시 처음에 이라윤이 제안했던 아이디어가 신선하기도 하고, 교수님 취향에도 가장 맞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설명하는 내용 자체는 전부 이라윤이 했던 말이었지만, 일부러 조현수가 그걸 자신의 아이디어로 생각하게끔 열심히 포장했다.

“아, 좋네요. 선배님이 표현하려는 핵심 주제가 녹아 있으면서도, 교수님이 중요하게 보는 기준과도 맞아떨어지는 같아요.

“그치, 라윤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흐음….

“앗, 물론 제가 거는 선배님이 이미 전부 구상해 두신 조금만 틀어 것뿐이지만요…. 선배님은 혹시 어떻게 생각하세요?

때마침 이라윤도 말에 힘을 실어 주길래, 조현수가 보지 않는 사이를 틈타 이라윤에게 작게 윙크를 했다. ‘사실은 생각이 전혀 이렇지 않은 라윤이 너도 알지? 이건 전부 아이디어야!’라는 눈빛을 쐈달까.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이라윤도 입매를 단단히 굳히고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거렸다. 척하면 , 이라윤도 눈치가 빨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면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도, 본인이 잠재적 범죄자라고 느끼는 대신 방법만 따라하면 나도 연애를 있겠다고 용기를 얻어 가겠네요.

이어진 말에는 화들짝 놀라서 옆자리의 이라윤을 돌아보았다. 산뜻한 얼굴로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저거, 지금 조현수 얘기하는 맞지? 이라윤이 아무렇지 않을 얼굴로 이렇게 먹일 줄은 전혀 몰랐다.

“큼큼, 알았어. 그럼 그쪽으로 한번 보든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조현수가 크게 선심 쓴다는 ,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일단 조현수도 핀트를 맞춰서 그렇지 조별 과제에서 A 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비행기까지 띄워 주었으니, 조현수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처음에 불길하게 휘몰아치던 징조에 비해서 오늘의 조별 과제 미팅은 비교적 마무리되었다. 대강 결론이 다음에는 조현수가 먼저 카페를 떴고, 이라윤과 나는 자리를 정돈한 다음 늦게 일어섰다.

“라윤아, 근데 이거 코코넛 스무디 되게 맛있다.

“아, 괜찮았어요?

“응. 원래 코코넛은 떫고 밍밍해서 별로 좋아하는 알았는데 요건 괜찮네?

“왠지 우주 선배 입맛에 맞을 같았어요.

“아, 먹기 전에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올려 깜빡했다.

코코넛 스무디 위쪽에 매달린 민트 잎사귀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오늘의 메뉴 선정에 몹시 흡족했다. 조현수 때문에 빨리는 와중에도 달콤한 음료가 있어서 정신줄을 붙잡을 있었달까. 역시 라윤이 말을 듣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우주 선배.

가방에 노트북을 챙기고 이라윤을 앞서서 걸어가던 때였다.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이라윤이 조금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나,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우수 어린 표정도 아닌… 오히려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 으응?

“고마워요. 실은 저… 꼼짝없이 이상한 주제 하게 되는 알았어요.

“…….”

“절대 통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설득이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이라윤이 부스스 웃는 동시에 [️27] 머리 위의 호감도가 3% 상승했다. 그치만, 라윤이도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나에게는 단순히 A 학점이 아니라 현실로의 무사 귀환이 달린 문제였으니,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서 해결책을 찾은 당연했다.

“나도 고마워, 라윤아!

생각지 않게 호감도가 오른 것도 기분이 좋은데, 이라윤이 그렇게까지 말해 주자 뿌듯함으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제 와서 보니까, 아닌 척하면서 이라윤도 조별 과제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팔을 뻗어서 이라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치만 나도 네가 편이라는 아니까 그렇게 있었는걸?

“…….”

“네가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무리 그래도 학번 선배인데 밀어붙이기 어려웠을 거야. 라윤이 아이디어가 워낙 좋았기도 했고~.

말에는 이라윤이 빙긋 웃었다. 천유현이 말한 것처럼, 이곳은 단지 게임 속이 아닌,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현실이다. 퀘스트를 깨야 하는 나도 나이지만, 실제 학점이 달린 이라윤에게도 중요한 일일 텐데 조금이나마 도와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근데 라윤아 아까 그거… 조장 선배 들으라고 얘기 맞지?

“네? 어떤 거요?

“그… 이렇게만 하면 나도 연애할 있을까 하고 용기 얻는다고… 그런 ?

“아. 그게 티가 났어요?

살짝 민망해하는 이라윤의 뺨에 붉은 기가 퍼졌다. 길쭉한 손을 들어 올린 이라윤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역시 의도하고 말이 맞았구나. 보들보들한 얼굴로 돌려 까기도 알다니, 그런 모습도 반전 매력처럼 색다르게 느껴졌다.

“콘텐츠는 역시 우리 둘이 만드는 낫겠죠? 나머지 명이 미덥지가 않아서요.

“흠… 맞아. 아무래도 발표보다는 콘텐츠가 비중이 같은데.

확실히 그게 맞는 말이기는 했다. 우리가 어떻게 바꾼 주제인데! 조현수를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주제를 멀쩡하게 세팅하게 바꿔 놨는데, 나머지 빌런들을 믿고 콘텐츠 제작을 맡겼다가 조별 과제가 다시 가루처럼 흩날려서는 됐다.

그렇지만, 동영상 제작도 제대로 하려면 장난 아니게 일이 많을 텐데, 그걸 둘이서 하려고? ‘조별 과제 타노스’라는 이번 돌발 퀘스트의 이름처럼, PPT 화면에서 조현수와 장희연의 이름이 하나하나 증발해 가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아니야, !

그런 식으로 파괴의 신이 수는 없다. 그건 너무 억울해. 절대로 라윤이랑 둘이서만 독박 쓰지는 않겠어!

“네? 뭐라고요?

“아, 그게…. 있잖아, 라윤아 그런데 혹시 영상에 주인공으로 나와도 괜찮아?

“저는 상관없어요. 우주 선배를 제가 찍어도 좋고요.

그렇다면야….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나는 자리에 멈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절대 거부할 없는 제안을 주겠어.

지금쯤 공항에 있을 장희연에게 힘주어 작성한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에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 희연아, 혹시 이라윤 영상 찍어 생각 있어?

              

#30

예상했던 대로 장희연은 득달같이 떡밥을 낚아챘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탄탄대로였다. 사실상 무임승차자였던 장희연의 협조를 성공적으로 끌어냈다는 이유로, 콘텐츠는 나머지 사람이 맡고 조현수가 PPT 제작과 발표를 담당하기로 했다.

조현수도 방향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사회심리학인가 진화사회론인가의 계보를 줄줄 읊어 보면 은근히 자료 조사는 꼼꼼하게 잘하는 스타일 같았다. 그리고 발표 자료는 거들 , 어차피 과제에서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좋았어, 모든 계획대로야! 월요일 저녁, 경영대 건물의 소회의실에서 장희연을 기다렸다. 그동안 이라윤과 동영상 기획안에 대한 논의를 먼저 시작했다.

“동영상 콘텐츠는 남짓한 분량으로, 형식은 자유입니다. 흠….

“차라리 포맷이 정해져 있으면 좋을 텐데, 자유라고 하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음, 그러게요…. 봤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일단 재미있어야 같은데.

교수님의 가이드 라인을 여러 읽어 보면서도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현생에 있을 때도 가지각색의 조별 과제를 해치워 봤지만, 직접 동영상을 제작하는 처음이었다. 동영상의 퀄리티도 퀄리티이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주제를 표현할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미 사귀고 있는 사이보다는, 때가 흥미진진하겠지?

“아, 우주 선배, 그러면 생각나는 하나 있는데.

“정말? 어떤 거야?

“그, 번호 알아내서 연락하는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니기도 하지만, 사실 자기 쪽에서는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서 연락하는 거니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도 해서요.

“오, 확실히 그렇겠네.

“뭐 도서관에서 보고 좋아하게 돼서 번호를 알아내 연락했더니, 호감을 표현했지만 상대가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동영상 만들 있지 않을까요? 타는 단계에서 생길 있는 일이니까요.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어쩐지 이라윤 본인의 경험담처럼 느껴지는 왜일까. 나는 도서관에서 번호를 따여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충분히 그럴 있는 같다. 무심코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선을 넘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 있다는, 그래서 관계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우리 조의 주제와도 맞고 말이다.

“어, 그거 완전 좋은 같아. 약간 도서관 짝사랑러의 속사정? 이런 컨셉이네!

“아, 괜찮은 같아요.

“응응, 배경이 도서관이면 학교에서 찍을 있으니까 편하기도 하겠다. 그리고 일단 라윤이 비주얼이면 뭔들!

하지만 넘어 산이라고, 동영상 콘텐츠의 컨셉을 정한 다음에도 진도가 쉽게 쭉쭉 나가지는 않았다. 연출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고, 대본도 쓰기는 해야 같은데 눈앞이 까마득했다. 평소에 사진 찍는 좋아하는 이라윤도 동영상에 대해서는 아는 많이 없는 듯했다.

아니, 동영상 하나 찍으려면 챙겨야 한두 개가 아닌데 다른 조에서는 대체 이걸 어떻게 해내는 거지? 모든 2 안에 해내야 한다니, 정말이지 극한 과제가 아닐 없다. 게임 속이나 현실이나, 교수가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아는 매한가지인가 보다.

“아, 얘들아. 먼저 있었네, 늦어서 미안.

캡모자를 눌러 쓰고, 셔츠 재킷을 걸친 장희연이 뒤늦게 등장했다. 언제나처럼 DSLR 카메라와 렌즈가 묵직하게 담긴 가방을 어깨에 번듯하게 메고 있는 채였다. 시각을 확인하니 오늘은 정도 늦었다. 공방이라는 있다고 절대로 온다는 억지로 끌어낸 것치고는 나름대로 선방이었다.

“그래서, 라윤이를 주인공으로 영상을 찍는 맞지? 배경은 학교? 아니면 캠퍼스 밖으로 나가도 ?

역시, 장희연도 영상 촬영에는 관심을 보일 알았다. 처음에는 이라윤이랑 둘이서 어떻게든 해치워 버릴까 생각했지만, 동영상 과제에 드는 노동력의 양을 생각해 보면 절대 가능할 같지가 않았다. 장희연이 부디 우리 조의 구원 투수가 되어 주기를 바라며 간단하게나마 끄적끄적 정리해 시놉시스를 전달했다.

&lt;이라윤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역할. 누군가 라윤이를 짝사랑해서 그런 라윤이를 몰래 훔쳐보면서 매일 같은 시간 딸기 우유를 책상에 놓는다. 하지만 라윤이가 너무 잘생겨서 도무지 직접 말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뒤로 몰래 번호를 알아내서 연락해 보기?!&gt;

 

“뭐야, 둘이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단 말야?

조별 과제가 진행되는 내내 좀비처럼 핸드폰에 고개만 박고 있었던 장희연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촬영을 책임질 장희연이 의욕을 느끼는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 그런데 우리 조에는 여자가 희연이 명밖에 없잖아. 그럼 어떡하지?

“그러게요. 희연 선배가 짝사랑녀 역할을 해야 같은데….

“음…. 희연아, 내가 적은 없긴 한데, 카메라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찍는지 가르쳐 주면 동영상을 찍어 볼게!

장희연이 선뜻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다고 다음에야 이라윤과 나는 우리가 생각한 시놉시스에 엄청난 허점이 있다는 깨달았다. 장희연은 이를테면 이번 동영상 콘텐츠의 총감독을 맡게 되는 셈인데, 그러면 이라윤을 짝사랑하는 여자 역할을 사람이 우리 조에 남아 있지 않았다.

“뭘 그렇게들 고민해? 이렇게 둘이서 하면 되잖아?

눈을 동그랗게 장희연이 나와 이라윤을 짚었다. 그리고 마치 짝짓기를 하는 것처럼 허공에 손가락을 그어 우리 사람을 연결했다.

“우주 네가 짝사랑남 . 도서관 딸기우유남, 그런 괜찮겠네.

“나랑 라윤이랑 둘이서? 그치만 우린 남자인데….

“너 알고 보니 굉장히 편협한 사고의 소유자구나.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남자가 남자 짝사랑하고 그러다 보면 스토킹 비슷한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해?

그렇지만, 지금까지 수업에서 다루었던 관계는 거의 대부분 연애를 하고 가정을 이루는 남녀에 대해서였는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정색을 하며 얼굴을 굳힌 장희연이 나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 댔다. 이게 , 홀린 듯이 듣다 보니까 묘하게 설득당하는 같기도 했다.

“라윤아, 생각은 어때?

그렇지만 확신이 들지는 않아서 이라윤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 없는 나와는 달리 이라윤의 덤덤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도 우주 선배랑 같이 찍는 좋아요.

그래, . 라윤이가 좋다면야. 물론 주제가 중요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번 영상의 킬링 포인트는 얼굴 하나만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팔로워를 확보한 이라윤의 비주얼과, 아름다운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일이라면 목숨을 거는 장희연의 장인 정신이었다.

“내가… 지금 영감이 오는 같아!

이라윤과 내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사이, 우리 사람을 빤히 쳐다보던 장희연이 갑자기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미친 듯이 휘갈기기 시작했다. 첫날의 태만하고 무기력한 무임승차자는 온데간데없이, 지금 자리에는 의욕 넘치는 열정맨만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내가 준비해 볼게. 너희 둘은 촬영 당일에 몸만 오면 .

“그치만, 시나리오도 쓰고. 장소 섭외나 연출 같은 것까지 하려면 엄청 많을 텐데….

“희연 선배, 진짜 우리가 도와줘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너희 둘은 이제 나만 믿고 따라와.

입꼬리를 끌어올린 장희연이 눌러쓴 짙은 파란색 볼캡 아래로 눈을 번뜩 빛냈다. 지난번 아이돌 입국 때문에 공항에 당장 달려간다고 때처럼 누구라도 그녀를 말릴 없을 같은,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장희연이 조별 과제를 하드 캐리하겠다고 선언해서일까, 지금 순간만큼은 광기보다는 카리스마가 더욱 느껴졌다. 장희연이 힘을 있도록 어깨라도 주물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희가 친해지는 나를 가장 도와주는 일이야. 가서 둘이 아이스크림 같은 거라도 사먹어.

도움을 단호하게 거절한 장희연이 손을 허공에 휘적휘적 내저었다. 왠지 방해해서는 같은 분위기에 이라윤과 자리에서 얌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장희연이 이야기한 대로, 경영대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이라윤과 같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초콜릿 바닐라 맛이 반반 섞여 있는 회오리 모양 아이스크림은 달착지근해서 한입 베어 물자 기분이 절로 폭신해졌다.

“그런데 라윤아, 이렇게 희연이 믿고 맡겨도 되는 걸까? 시간도 많지 않은데 그러다가 혹시 펑크 나면 어떡해.

“흠…. 느낌이 이번에는 왠지 괜찮을 같아요. 우리 기다려 봐요.

아이스크림은 맛있었지만, 일을 모두 장희연에게 던지고 나오려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라윤이는 이해할 없겠지만 나에게는 조별 과제에서 A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러나 선박의 키는 이미 새로운 선장인 장희연에게 넘어갔고, 더는 걱정해 봤자 해결되는 일도 없으니 일단은 이라윤이 말한 것처럼 기다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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