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LS Chapters 11-20

#11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선 병원 사무실 안은 정신 없이 분주했다. 다들 오늘 행사 준비로 바쁜 탓인지, 사람이 들어와도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큼큼, 작게 목을 가다듬고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미술 치료 봉사 활동 지원한 연우주라고 합니다.

“아, 연우주 . 갑작스럽게 드린 요청인데 이렇게 주셔서 고마워요. 어린이날 앞둔 행사라서 아이들이 기대를 많이 하고 있을 텐데, 일손이 모자라게 되어서요.

“아니에요, 제가 타이밍을 맞춰서 지원서를 넣어서 다행이네요!

“하하. 미대생인 보고 지원서 읽다가 느낌이 좋아서 연락드렸는데,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같네요.

“아… 감사합니다.

“원래는 정식으로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건데, 일정이 타이트한 만큼 간단한 주의 사항과 행사 절차 정도만 안내드릴게요.

미술치료의 대상은 소아암 병동의 환자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병동에서 보내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나이대는 비교적 다양하지만 대부분 유치원생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있도록 아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오늘 나의 역할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어색해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따뜻하게 대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역시 아이들이라서 사랑과 관심이 많이 필요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소독을 마치고 담당자를 따라서 소아암 병동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코끝에 독한 약품 냄새가 싸하게 풍기며 닿았다. 어린이 병동이어서인지 파스텔 톤의 벽지는 알록달록 화사했지만, 눅눅하게 가라앉은 병실 공기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제 다들 기대하고 있던 미술 치료 시간이네. 오늘은 어린이날을 맞아서, 특별히 도와주실 선생님도 오셨으니까, 얼른 스케치북 가져오고!

조그만 머리통에 털실 모자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다 처음 보는 얼굴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말소리가 멎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핏기가 거의 없는 창백한 얼굴에서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씩 묻어났다.

“얘들아 안녕? 선생님 이름은 연우주야. 오늘 나랑 같이 재밌게 그림 그려 보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아이들은 대답 대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둘 종종걸음으로 스케치북을 들고 테이블에 얌전하게 앉았다. 역시 키가 낮은 어린이용 테이블에 몸을 반쯤 구기다시피 쪼그려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연필과 크레용이 번잡하게 널려 있었다. 그림 색칠을 도와줘 볼까 싶어서 작달막한 크레용을 집어 들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쭈뼛거릴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흐음….

아무래도 아이들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가 너무 다가가도 놀랄 같아서, 일단은 기다려 봐야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소아암 병동 안쪽을 크게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어떻게 공략 캐릭터를 만날 있다는 거지…. 바쁘게 두리번거리다가, 쪽으로 은근슬쩍 스케치북을 내미는 옆자리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긴장으로 꼬물거리는 아이의 손이 말도 되게 쪼끄마했다. 그런데 하얗고 오동통한 팔에는 링거 줄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그걸 보니까 여기서 공략캐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내가 조금 나쁜 사람 같았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끄트머리로 갈수록 디딜 틈이 없어지는 좁은 길목 양옆에는 울창한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무성하게 뻗은 잎사귀가 길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짙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새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만은 눈부시게 밝았다.

물론 그림만 보고 모든 것을 수는 없었다. 어린 아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짐작해서도 됐다. 그럼에도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감정과 정서가 있었다. 역시 어릴적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말하기를 거부했을 그림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조그만 몸으로 오롯이 견뎌 내는 고통이 느껴져서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버텨 주는 것이 정말 기특했다.

“우와, 이거 그림 되게 그렸다.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서 반짝반짝하고 너무 예쁘네!

기대하는 듯한 눈치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폭풍 칭찬을 했다. 여전히 입술을 앙다문 아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는지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내 다른 아이들도 나에게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잘생긴 오빠, 그림은 어때요?

비교적 적극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에게 스케치북을 덥석 들이밀었다.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는 아이의 스케치북에는 널따란 바다가 담겨 있었다.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몹시 놀란 , 아이를 향해 눈을 휘둥그레 보였다.

“와, 커다란 고래를 그린 거야? 대단하다. 오빠는 이렇게 그릴 같은데.

“헤헤, 고래 그렸어요?

“응, 엄청! 그런데 고래는 눈이 동그라미가 아니라 세모야?

“아, 왜냐면요, 너무 오랫동안 수영을 해서 쪼끔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정유은이요!

“유은이 멋진 그림, 이제 오빠랑 같이 나머지 부분 색도 칠해 볼까?

그러자 유은이라는 아이가 비어 있던 왼쪽 자리에 냉큼 앉았다. 유은이에게 파란색 크레용을 쥐여 주자, 잔뜩 집중한 얼굴로 비어 있던 물살을 슥슥삭삭 색칠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하나둘 다가오더니, 어느새 빼곡하게 몰려든 아이들은 커다란 원처럼 나를 에워쌌다.

“그러면요, 이거 자동차는 무슨 색으로 칠해야 제일 예쁠 같아요?

“우주 형아! 그림도 어떤지 번만 봐주세요.

“선생님, 무지개 칠해야 하는데 보라색 색연필이 없어졌어요!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진 아이들을 상대하려니 금세 정신 없어졌다. 그래도 최대한 그림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애썼다. 병동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림 속에 펼쳐진 세계만큼은 생기 넘치고 자유로웠다.

게임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해 얼떨결에 참여한 봉사 활동이었지만, 역시도 덕분에 아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았다. 다만 그러다 보니 최초의 목적이었던 새로운 공략캐와의 만남은 슬금슬금 희미해지던 찰나였다.

“와아앙!

테이블 건너편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양쪽에 동그란 뭉치가 귀처럼 뾰족이 솟아난 분홍색 모자를 뒤집어쓴 여자아이가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당황해서 담당자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급한 대로 내가 먼저 아이에게 향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일부러 그런 아니라니까?

“흐어엉, 그러니까 내가 잡아당기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윙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

여섯 남짓해 보이는 여자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쏟아 냈다. 작달막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헝겊 인형에는 한쪽 눈에만 단추가 달려 있었다. 남자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다른 눈이 떨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어, 무슨 일이야?

“흐어엉, 선생님. 이것 보세요, 재호 때문에 윙키 눈이 뜯어져서 못생겨졌어요!

“에이 , 인형 원래부터 그렇게 이쁘지도 않았거든?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아이가 기다렸다는 품에 안겨 들었다. 보아하니 남자아이도 일부러 인형을 망가뜨린 아닌 듯한데, 당황해서 못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한층 서러워진 여자아이가 목놓아서 울었다.

“어디, 선생님이 볼까?

거칠게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며 물어보자, 코를 훌쩍인 여자아이가 인형을 내밀었다. 단춧구멍이 뜯어진 자리에 뭉텅이가 삐죽이 새어 나왔다. 바느질을 하면 어떻게 수습이야 되겠지만, 당장 그렇게 수는 없으니 아이를 달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를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를 무릎에 앉힌 나는 테이블에 널브러진 두꺼운 종이와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얼떨결에 울음을 멈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헉. , 봐봐! 형아 그림 어엄청 그린다!

동그랗게 자른 두꺼운 종이 위로, 손을 빠르게 움직여 색연필로 새로운 얼굴을 그려 주었다. 땡그란 눈을 뜨고 있는 얼굴 완성하고, 속눈썹까지 그린 테이프를 이용해 인형에 붙여 주었다.

“어때, 이제 윙키한테 새로운 얼굴 생겨서 다시 예뻐졌지?

“히끅….

“우와, 민주는 좋겠다. 우주 선생님이 인형 얼굴도 그려 주고.

“어디, 나도 나도 볼래!

임시 조치라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어설픈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몰려든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눈치여서인지, 새침하게 인형을 움켜쥔 민주의 입꼬리도 조금씩 들썩거렸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한참을 진땀 빼느라 온몸에 기가 빨렸다. 아이들 상대하는 ,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닌데? 민주가 간신히 울음을 그칠 즈음, 담당자가 병실로 돌아와 오늘 미술 치료 수업을 마무리했다.

그제야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있었다. 봉사 활동이 끝난 다음에야, 잠깐 잊고 있었던 공략캐 생각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봉사 활동을 마쳤는데, 좀처럼 공략 캐릭터를 만날 기미가 없어서 불안해졌다.

“우주 선생님, 저랑 같이 그림책 읽으러 갈래요?

“응? 무슨 그림책?

아이들과 인사를 마쳤지만 그대로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때, 가면을 쓰고 있는 인형을 품에 소중히 껴안은 민주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거 저만 아는 비밀인데, 휴게실에 가면 멋진 오빠가 그림책 읽어 주거든요.

“아, 휴게실에 멋진 오빠가 있어?

“네! 원래는 저만 있는 건데, 아까 윙키 얼굴 그려 주셨으니까 우주 선생님도 특별히 데려가는 거예요.

‘멋진 오빠’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이거다 싶어 절로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만난 이라윤과 천유현만 봐도, 게임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게 잘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와아, 정말? 고마워 민주야!

“히히, 빨리 같이 가요.

촉이 날카롭게 섰다. 민주가 말하는 멋진 오빠가 분명 새로운 공략캐일게 분명해! 순도 100%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하자, 헤벌쭉 웃은 민주가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봉사 활동이 끝나 어수선한 틈을 타고, 민주와 나란히 병동을 빠져나왔다.

타박타박, 잘게 쪼개진 발걸음으로 병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민주는 들뜬 목소리로 ‘잘생긴 오빠’가 얼마나 다정하고 친절한지 이야기했다. 복도 반대편 끄트머리에 위치한 휴게실의 문을 민주 대신 열어 주었다.

“태양 오빠!

조금의 미련도 없이 손을 놓은 민주가 휴게실 안쪽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남자에게 달음박질쳤다.

“오늘은 평소에 보던 뉴페이스가 있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민주를 번쩍 들어 올려 옆자리에 앉혔다. 이어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는 발짝 늦게 다가선 나를 삐딱한 눈으로 훑어 내렸다.

[️0]

남자의 뾰족뾰족하게 세운 새까만 머리칼 위로 호감도 수치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강태양이었다.

              

#12

운동선수답게 보기 좋게 그을은 강태양의 피부는 매끈매끈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우뚝한 , 다부진 턱까지 강렬하고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오른쪽 다리에 느슨하게 목발을 짚고 있는 것이 무색하게도, 쇠약해 보이기는 커녕 온몸에서 왕성한 활기가 넘쳤다.

“아, 저기 그게….

, 이런 사람은 현실이라면 진짜 길가다가도 나랑 마주칠 없겠다. 뭐라고 소개라도 해야 텐데, 유명한 운동선수를 만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어버버거렸다.

“태양 오빠, 잠깐만요!

바로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앙큼한 표정을 민주가 강태양에게 안겨 들었다. 귓가에 바짝 대고 바지런히 속닥거리는 민주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까맣고 반질반질한 강태양의 눈동자는 뚫어져라 나를 향했다.

“…….”

민주가 무어라 속삭일 때마다 표정이 풍부한 강태양의 얼굴이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그러다 번은, 나를 빤히 보다가 짙은 눈썹을 슬쩍 추켜올렸다. 민주가 물러날 즈음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얼굴에서 몸까지 주욱 훑어 내리기도 했다. 대체 민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없는 나로서는 불안해질 따름이었다.

“이야, 이런 식으로 접근해 줄은 전혀 몰랐네.

풍성한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트린 강태양이 나를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만만한 얼굴에서는 자신의 매력을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넘쳐흘렀다. 잠깐, 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같은데…?

“제 생각에는, 이렇게 사람이 정말 어울리는 같아요.

“어, 어어?

“우주 선생님은 마음씨가 착하고, 그림도 그리고. 태양 오빠는 엄청 잘생기고 멋있으니까.

어느새 나에게 살랑살랑 다가온 민주가 무척 뿌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민주가 강태양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을지 짐작이 갔다. 또한 강태양이 하고 있는 오해의 종류가 어떤 것일지 역시도.

“으윽!

그와 동시에 얼굴이 익은 토마토처럼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민주에게 때아닌 배신감을 느꼈다.

“민주야, 분명 아까 때만 해도 나한테 이런 얘기….

민주의 계략으로 인해 한적한 휴게실 안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러브 라인이 흘렀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방향이 맞긴 한데,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아닌데. 낭패감으로 쩔쩔매는데, 민주의 빅픽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둘이 손잡은 다음에, 태양 오빠가 저한테 동화책 읽어 주세요.

그러니까, 아이 입장에서는 ‘좋은 +좋은 =최고 좋은 거’ 정도인 거겠지. 되게 순수하고 예쁜 마음이고, 그래…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고 편견 없고 좋긴 한데….

“빨리요, 둘이 손잡으세요!

민주가 제법 단호한 얼굴로 손목을 붙들고 강태양 쪽으로 잡아끌었다. 어린아이다 보니 손아귀 힘이 강한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허둥거리다 끝내 몸을 크게 휘청였다.

“앗, 으앗!

무게 중심이 흐트러져 다리가 순간적으로 풀리더니 그대로 상반신이 강태양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강태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차마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두고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이런 식으로 나를 유혹하는 거야?

다시금 눈을 떴을 나를 반쯤 끌어안은 강태양은 무척 흥미롭다는 눈을 반짝였다. 이거 아무래도 오해가 더욱 심해진 모양인데…. 엉거주춤 몸을 가다듬는데 강태양이 그대로 손을 , 잡아챘다. 딱딱하고 거친 강태양의 손바닥이 손에 문질러지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아하하, 민주야, 선생님은 괜찮은데….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닌데 !

민주야, 미안하지만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어설프게 웃으며 슬슬 손을 물리려 했지만 강태양은 그럴수록 손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크게 당황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강태양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맞잡은 손을 보란 듯이 흔들어 댔다.

“허….

진심이야?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인데? 동공에 자잘자잘 지진이 일었지만, 강태양은 조금의 거리낌 없이 능글맞게 웃기만 했다.

“태양 오빠, 오늘은 백조 왕자 이야기 읽어 주세요!

테이블에 턱을 민주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가져온 동화책을 내밀었다. 여기서 내가 정색하고 손을 뿌리친다면 아이의 동심을 깨는 일이 것이 보듯 뻔했다. 한숨을 몰아쉬고 현실과 빠르게 타협했다. 일단 손을 잡은 상태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전거리를 확보해 보자.

“이제 백조가 되어 버린 오빠들의 운명은 엘리자 사람! 손에만 달려 있는 거지. 엘리자는, 내가 직접 오빠들을 구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어.

“헉, 그래서요?

“동굴 밖으로 나간 엘리자는, 무성하게 자란 쐐기풀을 , , 뜯기 시작했어. 뾰쪽뾰족한 쐐기풀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아야, 불에 쓰라리고, 따끔거렸지.

“힝, 어떡해. 엘리자 너무너무 아프겠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지~ 엘리자는 쐐기풀에서 실을 뽑아 다음, 말없이 열한 명의 오빠들을 위한 사슬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어. 그래야만 오빠들이 인간으로 돌아올 있었거든.

“말도 절대 하는데, 열한 개씩이나요?

“응. 오빠들은 눈물을 , , 흘리면서 쐐기풀로 옷을 짓는 가여운 동생을 하염없이 지켜보고만 있었어.

축구선수라더니 여가 시간에 구연동화 자격증이라도 놓은 걸까? 강태양은 민주에게 박진감 넘치게 백조 왕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의 긴장을 능숙하게 조였다 푸는 강태양이 한마디를 때마다 민주는 거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는 민주와는 다르게 나는 동화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으으….

동화책 페이지가 여러 넘어갔지만 강태양은 좀처럼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맞닿은 손바닥에 땀이 조금씩 고여 드는 것만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싶어 슬슬 손을 빼내려고 하면, 딱딱하게 도드라진 손가락이 나를 단단히 옭아맸다.

“헉! 큰일 났다. 태양 오빠, 빨리 숨어야 돼요.

묵묵하게 오빠들을 위한 갑옷을 만들던 엘리자가 화형대로 끌려가고, 이야기는 어느덧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강태양이 읽어 주는 동화책에 빠져 있던 민주가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허둥지둥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문가의 간호사 선생님이 민주를 찾았다.

“민주야, 이제 치료받을 시간인가 보다. 저기 간호사 선생님 오셨잖아.

“그치만, 항암 치료 엄청 아프단 말이에요. 가기 싫은데….

“어허, 공주님은 떼쓰면 되는데? 벌떡 일어나야지.

“히잉….

“오빠도 매일 열심히 치료받고 있잖아. 받고 오면 그림책 읽어 줄게.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처럼 숨어드는 민주의 어깨를 강태양이 번쩍 끌어올렸다. 방금까지 떨어지는 눈을 하고 있던 무색하게, 제법 엄한 얼굴로 이제는 가야 시간이라 민주를 타일렀다. ,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다음에 백조 왕자 나머지 부분도 읽어 주세요!

“그래, 민주야 !

마지못해 간호사 선생님에게 나아가는 민주의 시무룩한 얼굴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강태양이 건장한 팔뚝을 펄럭펄럭 흔들며 인사했다.

간호사 선생님과 민주의 뒷모습이 점점이 사라지고, 이제 휴게실에는 나와 강태양 단둘만이 남았다. 조금 멋쩍은 기분에 얼마 전까지 강태양과 맞잡고 있던 손바닥을 면바지에 문질렀다. 강한 아귀힘에 제법 오래 붙들려 있던 손이 아직 저릿저릿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신선한 접근이었어.

“네, 뭐라고요?

“뭐, 정도면 노력 점수는 충분히 획득했다고 있지. 제법 인상적이었다고.

민주를 향하던 무한한 다정함이 사라지며, 강태양의 표정이 돌변했다. 다부진 끝을 슬쩍 들어 올린 강태양이 능글능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네 마음은 알겠어. 그렇지 않아도 재활 훈련받는 동안 심심하던 차였는데, 좋아.

마음은 알겠다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말을 하는 강태양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헉!

머릿속에 경보가 댕댕 울렸다. 본능적인 위기감으로 주춤주춤 물러나자, 그게 도리어 승부욕을 자극했는지 강태양이 나에게 바투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분명 사소한 오해였는데, 대체 어쩌다 지경까지 되었지? 난감해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강태양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무엇보다, 얼굴이 마음에 들어. 내가 상큼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니, 민주 말에도 틀린 없네.

강태양이 가까운 곳에서 얼굴 곳곳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짙은 눈썹과 보기 좋게 불거진 눈썹뼈 아래, 새카만 눈동자가 불온한 흥미로 반짝거렸다.

“아, 지금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같은데, 저는 그런 아니라….

, 눈을 두어 깜빡이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말을 듣는 마는 강태양이 어깨를 가까이 가져오자, 얼굴 부근에 달착지근한 향이 퍼졌다. 뭐야, 이러다 입술이라도 닿는 아니야?

“헉!

라고 생각했을 , 정말로 강태양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왔다.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였다. , 이건 아니잖아! 노골적인 스킨십 시도에 기겁한 내가 강태양의 어깨를 밀쳐 냈다.

“가, 갑자기 저한테 이러세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목덜미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났다. 운동선수라서 그런지 손바닥에 닿는 근육의 촉감이 엄청나게 딴딴하고 묵직했다. 뜻밖의 거절이었는지, 강태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애초에 이런 바라고 나한테 아니었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강태양은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인간은 무슨 드라마 대사 같은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

물론 매력이 헤플 정도로 넘쳐흐르는 강태양의 자뻑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민주의 활약 덕분에 오해를 만한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너무하잖아!

“아니면, 벌써부터 밀당이라도 시작하는 건가?

절대 그런 아니라는 나의 진심을 담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조금의 악의 없이 짓궂기만 했다.

              

#13

“그, 그런 아니라고요!

“그럼 뭔데?

양팔을 엑스자로 가로지르며 강태양의 오해를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강태양은 무슨 이유를 댈지 대단히 기대된다는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아니 어쩌다가 당연한 일을 두고 증명까지 해야 하게 건지 순간 진한 현타가 밀려들었다.

“저는 오늘 병원에 처음 왔어요! 아침에 소아암 병동 미술치료 봉사활동에 결원이 생겼다고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걸요?

“흠. 그래서?

“수업을 하다가 민주가 인형이 망가져서 울고 있길래 도와줬더니, , 잘생긴 오빠…가 그림책을 읽어 준다고 해서, 어쩌다 보니 따라가게 것뿐이에요.

“…….”

“휴게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저는 여기에 그쪽이 있는 줄도 , 전혀 몰랐다구요.

물론 마지막 말을 때는 완전히 떳떳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절대 강태양이 오해하고 있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결백을 주장했다.

강태양의 도톰한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을 , 당장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동안 내내 제한 시간 안에 게임을 깨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해서일까. ‘이대로 진도가 나가면 강태양의 호감도를 수월하게 얻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은근슬쩍 들었다.

[️0]

하지만 강태양의 머리 호감도는 여전히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지금 강태양이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지만, 모든 결코 호감에서 비롯한 행동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강태양은 아직 이름도 모르는 데다, 우리는 제대로 대화를 적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짜고짜 스킨십부터 이어 나간다 한들, 캐릭터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게임 공략에는 그다지 도움이 같지는 않았다.

“나랑 어떻게 한번 엮여 보려고 일부러 접근한 아니라고?

찌릿, 강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동공이 얕게 흔들렸다. 물론 시스템의 개입이 있어 100%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강태양과 엮여 보려고 애쓰고 있는 거긴 한데…. 그러나 나는 양심의 소리를 슬그머니 외면하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강태양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딘가 실망한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태양 때문에 긴장이 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

“뭐야. 아까 내가 손잡을 가만히 있어서 오해했잖아.

그러나 강태양은 생각 이상으로 쿨하게 상황을 납득했다. 김샜다는 ,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이는 강태양의 얼굴에 여전히 유들유들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당한 쪽은(?) 나인데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은근히 탓까지 하다니, 어이가 없다가도 역시 웃음이 터졌다. 이런 웃는 얼굴에 뱉는다는 건가.

“빼려고 해도 잡고 있었잖아요.

“그건 그랬지. 보는 앞에서 어떻게 손을 떼어 내겠어?

“하….

“알았어, 그럼 이만 .

강태양은 미련 없는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 까딱, 하며 나를 물렸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쿨한 것까진 좋았지만 시베리아 벌판 수준을 바라던 아니었는데?

, 물론 이런 식으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몸부터 친해지는 전혀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호감도를 차곡차곡 쌓아서 강태양 루트를 진전해야만 했다. 아직 루트 진입을 알리는 안내창이 뜨지 않은 역시 불안했다. 이대로 휴게실을 떠나면 강태양 캐릭터 공략에 실패할지 몰랐다.

“아….

자리에 그대로 박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강태양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 버린 오래였다. 이제는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남아 있지 않다는 , 테이블 위에 있는 스포츠 신문을 집어 들기까지 했다.

“저기….

도무지 강태양을 당해 자신이 없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내가 조심스럽게 강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렸다는 , 강태양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끌어 올렸다. 뺨에서 후끈후끈한 열기를 뿜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가라니까 앞에서 알짱거려?

“그게… , 우정을 쌓고 싶어서요?!

“뭐라고?

“아, 아까 민주한테도 스윗하게 대해 주셔서요. 음… 그쪽은 운동선수시죠? 제가 평소에 스포츠에 대한 로망도, 하하….

이라윤 루트에서 삐끗한 이후, 제대로 손써 보지도 못하고 흘려보낸 지난 5일을 되새기자 절로 절박한 마음이 우러나왔다. 아주 열심히, 아무 말로 호소했다. 강태양은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려면 오해를 하고 있대도 어떤가 싶기까지 했다.

“이봐, 그러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는 어때?

으쓱한 얼굴의 강태양은 내가 저를 흠모한다고 확신했다. 아니 단지 나뿐만이 아니라, 강태양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자신과 어떻게든 엮여 보려 애쓴다 믿는 것이 분명했다. 별거 없는 친구가 이런 식으로 자뻑하면 코웃음칠 텐데, 얼굴과 몸매가 근사한 데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기까지 해서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 봤다고 아까부터 저한테 계속 저한테 반말이세요?

강태양을 상대로 사심을 품고 있는 정말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한다 해도 믿어 없겠지. 결국 말이 없어진 나는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만 아까부터 계속 존댓말 하고 있었어.

“너도 나한테 놓고 싶으면 .

그게 무슨 대수냐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천하태평한 태도에 발끈한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이거 어째, 아까부터 내내 강태양에게 말리는 같은데….

“그래, 앞으로는 다짜고짜 입술부터 들이대기 전에 상대방 의사도 번쯤 물어보길 바라!

[️2]

이제는 정말 발끈해 버린 내가 강태양을 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러자 강태양 머리 위의 호감도 수치가 크게 진동했다. 뭐야, 갑자기 호감도가 올라가?

“근데 이름이 뭐냐?

흥밋거리를 찾아낸 강태양의 새까만 눈동자가 활기차게 반짝거렸다. 참나, 되게 빨리도 물어보네. 어느새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짚고,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너부터 먼저 알려 주면 말할게.

“뭐지? 이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컨셉이야?

“아, 그게 아니라….

“아니면 그렇게 생겨서 혹시 교포?

분명 나를 놀리려 하는 것도 있었지만, 이름을 모른다는 말에 강태양은 진심으로 놀랍다는 기색이었다. 시스템에서도 강태양이 국내 최고의 축구선수라고 했지. 역시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유명인사인가 보다.

“핸드폰 내놔 .

 

<SYSTEM> 공략캐릭터 [강태양] 루트에 진입하시겠습니까? - [/아니요]

 

기나긴 고생 , 드디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 버튼을 눌렀다. 끝내 원하는 얻어 냈지만 30 사이 30년은 늙어 버린 듯한 기분은 뭘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강태양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봐봐, . . . 앞으로는 이름 똑바로 기억해야 된다?

“…알았어.

또박 또박, 이름과 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한 강태양이 화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원래도 강렬한 눈빛이었는데, 아까보다 집요해진 같은 착각이겠지. 이어 강태양은 끝을 까딱이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연우주야.

“연우주….

연우주, 도톰한 입술로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강태양이 웃었다. 낯짝 하나만큼은 연애 시뮬레이션 공략 캐릭터답게 빤빤하게 잘생겼다.

“그래, 연우주. 미안하지만, 이제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손목에 걸린 스마트 워치를 확인한 강태양이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진 목발을 집어 들었다. 자세를 곧게 잡고 목발을 짚자, 깁스 하고 있는 왼발에 통증이 이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까 민주에게도 치료라고 보면, 병원에서 재활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우리 이제 . . 니까, 이따가 심심하면 연락해라?

“…어? 어어.

“물론, 친구 이상도 언제든지 환영이고.

목발을 짚고 나아가던 강태양이 불쑥, 뒤를 돌아보더니 능글맞은 얼굴로 나에게 윙크했다. 뭐야, 완전 끼가 줄줄 흘러내리잖아? 휴게실을 떠나는 늠름한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강태양은 결코 만만치 않은 공략 상대가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4

휴게실 공기는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마음속은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황량했다. 새로운 공략캐를 만나면 무엇이든 있을 것처럼 넘치던 자신감은 불과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삶은 양배추처럼 수그러졌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다리에 흐물흐물 힘까지 풀려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라윤이랑은 친해질 자신이라도 있었는데….

넘어 산이라더니, 강태양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질풍노도한 인물이었다. 그를 품는 것은 내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절대 정도 그릇이 된다고.

하긴, 강태양은 게임이 진행되면서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만날 있었던 캐릭터이니,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는 당연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다면, 아직 만나지도 못한 명의 캐릭터들은 대체 얼마나 난해하길래? 나는 강태양만으로도 과하게 버거운데….

“나 앞으로 어떡하냐 진짜.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내가 내뱉은 한숨 소리에 지레 놀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일단 무사히 강태양을 만났잖아? 그것만으로도 오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래, 연우주, 지금 엄청 잘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혼자서 불안해하기만 봤자 한도 끝도 없다. 잡생각이 뻗기 전에 당장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 전략! 지금이야말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순간이야! 나는 주머니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게임 전용 핸드폰을 꺼냈다.

 

강태양 (25) 클럽서울 소속 축구선수

호감도 [2/100]

루트 진입 조건: 봉사 활동 아이의 호감을 얻으면, 병원에서 재활 훈련 중인 강태양을 만나게

 

이라윤 때와 마찬가지로 캐릭터 정보가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는 같고. 새롭게 반영된 프로필 사진 , 여유롭게 웃고 있는 빤빤한 얼굴이 왠지 밉살맞아 보여 부근을 눌러 보았다. 물론 화면 강태양에겐 타격감이 0이었다.

와중에 호감도가 착실하게 2 올라 있는 웃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정줄 똑바로 잡아야 내가 게임 속에서 무사히 탈출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신 집중하며, 화면을 뚫어 버릴 기세로 플레이 기록을 내려갔다.

 

자뻑 왕자님. 손버릇 나쁨(?) 밀당고수. 봐도 바람둥이 .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주인공답게 강태양은 봐도 연애를 엄청 잘할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되새겨 봐도, 짧은 만남에도 사람 정신을 빼놓고 능숙하게 휘두르는 솜씨가 대단했다. 남자는커녕, 여자를 상대로도 제대로 연애 경험이 없는 내가 과연 강태양의 호감을 무사히 얻어 있을까?

“흠….

그대로 마무리할까 고민하다, 마지막 줄을 마저 덧붙였다.

 

심성이 나쁜 같지는 않음.

 

물론 나한테는 난폭한 야차처럼 달려들었지만, 민주 한정으로는 떨어지는 눈을 했었지. 원래 어린이와 동물에게 친절한 사람치고 못된 인간은 없다고 했다.

 

자뻑 왕자님. 손버릇 나쁨(?) 밀당고수. 봐도 바람둥이 .

심성이 나쁜 같지는 않음.

 

시점에서 강태양에 대해서 아는 탈탈 털다시피 해서 적어 넣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막막하기만 했다. , 앙다문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다. 강태양 완전 잘나가는 축구선수라고 했지?!

유명 인사, 공인이라면 인터넷에 검색하면 인물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내가 지금껏 생각을 했지! 이건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당장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강태양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는데도, 검색창에 강태양의 이름을 입력하는 동안 괜히 주변을 슬그머니 살피게 됐다. 그래도 방금 면대면으로 만난 사람에 대한 정보를 뒤에서 캐는 쪼끔은 스토킹스러운가 싶기도 하고….

“아, 근데 이건 비즈니스잖아 비즈니스~

내가 진짜로 강태양에게 사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사적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적인 게임 공략을 진행하기 위한 거니까 괜찮다. 연우주, 원래부터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할 아는 남자다.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 둥둥 떠오르는 연관 검색어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강태양 부상

 

득점왕 1위를 달리며 리그에서 활약하던 강태양은 과격한 보복성 태클로 부상을 입어 재활 중이라고 했다.

 

강태양 해외 진출

 

명실상부 국내 탑클래스 공격수인 것으로도 모자라, 최근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팀에서도 눈독 들이고 있다고….

 

강태양 허벅지

 

밖에도 연관 검색어로는 ‘강태양 복근’, ‘강태양 상탈’, ‘강태양 힙업’ 등등이 있었다. 남사스러워 차마 클릭은 못했지만,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숨을 삼키게 하던 강태양의 단단한 체격을 떠올리면 쉽게 납득이 되었다.

 

강태양 스캔들

 

……! 드디어 왔구나. 물론 비즈니스가 목적이긴 하지만 결국 나의 주된 관심사는 강태양의 연애사였으므로, 떨리는 손으로 검색어를 눌렀다. 강태양이 기본적으로 연애할 어떤 성향인지, 적어도 이상형 정도는 있지 않을까?

 

[INTERVIEW] “결혼은 첫사랑과 생각입니다” 최초 공개, 강태양의 은밀한 고백

 

, 화면부터 클릭을 부르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떴다. 설마 첫사랑을 아직 잊은 거야…? 이제 겨우 번째 공략 캐릭터인데, 강태양 난이도 대체 무엇? 곧바로 기사를 클릭, 제작진에 대한 불만을 움큼 품고 읽어 내리는데,

“아, 제목 어그로 뭐야.

다행히 제목이 낚시였다.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루머와 스캔들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강태양이 첫사랑과 결혼하겠다는 결국 아직까지 인생에서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태양이 만남이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아니고, 인생에서 즐거움은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BEST] lov*** - 자고로 강태양 같은 종자들한테는 눈길도 주는 아니랬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는 걸로도 모자라 알고 보면 순정파인 희망 고문까지… , 담배 말려. 남자, 왠지 너한테만은 다를 같죠? 사랑의 힘으로 새사람 만들 있을 같죠? 기억하세요 사람은 저얼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찬반대결] pyw*** - 자기포장도 수준급이네ㅋㅋㅋ 강태양 ㄹㅇ 사생활 드러운 걸로 유명한다던데 핵뻔뻔 국적 성별 가리고 거의 하룻밤마다 상대 갈아치운다고 인증썰 내가 것만 수두룩빽빽임 첫사랑ㅋㅋㅋㅋ지나가던 개가웃겠다

sun*** - 그게 우리 태양이가 거절하는 법을 몰라서, 마음이 여려서 그런 거야. 그리고 국적이나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우리 태양이 얼마나 순수해. 그런 우리 태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등주의자 아닐까? 댓쓴이도 우리 태양이의 충만한 인류애를 느껴보면 사람이 밝아지고 좋을텐데ㅠㅠ 그러지 말고 밖에 나가서 햇볕도 쐬고 !

 

어쩐지, 불길한 예감은 매번 틀리지가 않더라. 댓글 창의 논란과 이어지는 피의 쉴드를 보며 얼굴은 점차 흙빛이 되어 갔다. 강태양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녀석이었어.

그럼 아까 몸부터 들이댔던 것도… 단순히 나를 당황시키려고 장난친 아니라, 높은 확률로 진심이겠네. 그를 자각하자 때아닌 위기감으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호감도 상승도 상승이지만, 입술 포함 주요 부위가 노려지지 않도록 몸부터 지켜 내야 텐데.

‘이성한테 보는 거요? 저는 하나밖에 없어요, 얼굴.

심란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지만, 인터뷰 구절이 저절로 음성 지원이 되어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유심히 얼굴을 들여다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적어도 외모는 강태양의 수비 범위 안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하느님 부처님 천지 신령님, 저에게 제발 힘을 주세요!

그럼에도 여전히 공략 여정이 험난하기만 같다는 생각에, 차라리 초월적 존재에라도 기대고 싶어졌다.

부르르, 진동 소리가 들려 테이블을 흘긋 내려다보니 강태양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앓는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만 쉬고, 저건 내일 봐야겠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는 못하더라도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알겠지만, 나약한 마음이 절로 솟아났다.

              

#15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아래로 따스한 볕이 내리쬐었다. 물씬한 봄기운이 감도는 한낮의 나른한 공기가 몽글몽글 부드러웠다. 진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가로수의 잎사귀처럼, 캠퍼스 곳곳을 감도는 색채가 햇볕 아래 한층 선명해졌다.

주의 새로운 시작, 동시에 <성과 사회> 교양 수업이 있는 월요일이었다. 오전에 전공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인문대 건물로 이동했다. 수업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라윤의 흔적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 있다!

태평양처럼 넓게 벌어진 직각 어깨에, 연예인처럼 조그마한 연갈색 머리통을 곧바로 포착했다. 오늘은 일찌감치 강의실에 도착한 이라윤은 나보다 앞에 앉아 있었다.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 위로 깨끗한 목덜미가 희게 드러났다.

“자,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적 일탈 행위에 대해 조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교수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강의 시작을 알렸다. 사회적 규범과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수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노트 위로 샤프심을 콕콕 찌르며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은 라윤이랑 얘기할 만한 기회를 만들어 봐야 텐데. 구질구질해 보이더라도, 저번처럼 바쁘다고 하면 다음 약속이라도 잡자고 해야겠다.

“이렇듯 과도한 상품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왜곡된 인식을 부추기고, 실제 관계 안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애정을 소외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있습니다.

“…….”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나머지 시간은 조별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해요.

아직 수업 시간이 이십 남짓 남아 있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끝내 주시나 싶었더니…. 교수님 입에서 ‘조별 과제’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시든 콩나물처럼 늘어져 있던 학생들이 등을 곧추세웠다.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열띤 관심을 내비쳤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수업은 중간고사를 보지 않는 대신, 조별 과제로 대체하고 있죠.

“…….”

“주제는 자유입니다. 지금까지 수업에서 다루었던 내용이어도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넓게는 우리 사회의 성문화, 좁게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넓힐 만한 화두라면 무엇이든 좋아요.

“…….”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PPT 자료와 함께 지금으로부터 후에 수업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영상 콘텐츠에 PPT 만들고 발표 자료까지 준비해야 하는데 기간이 2주라고? , 장난 아니게 빡센 일정이다. 옆자리에 앉은 황병열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같이 하자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조별 과제에서 A 받는 것보다는 게임 공략이 중요했기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랑 같이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같았다.

“성과 사회라는 수업은, 섹슈얼리티를 넘어서 인간의 토대를 이루는 관계 형성 욕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로써 타인과 원활한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수업의 핵심 역량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조원은 무작위로 선정하겠습니다.

“…….”

“팀워크도 중요한 평가 기준에 속하니까 새로 만난 조원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들 열심히 노력해 봐요! 성적에 80% 반영되는 중요한 과제인 만큼, 발표와 콘텐츠 모두 시간을 들인 흔적과 완성도가 나타나야 좋은 평가를 받을 있을 거랍니다, 호호.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를 전혀 들은 , 남은 시간에는 조원끼리 만나서 인사를 나누라며 교수님은 해맑은 얼굴로 편성을 빔프로젝터에 띄웠다. 웅성거리는 강의실 여기저기에서 불만 가득한 볼멘소리가 터졌다.

“랜덤이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비중도 80% 거의 조별 과제 점수가 최종 성적인데, 혼자 독박 쓰면 어쩌라고.

“사실 이것만 잘하면 중간이랑 기말 신경 거의 써도 되니까 꿀교양이 맞기는 한데….

“아니, 타인과의 성공적인 관계 좋은데 그걸 대학교 조별 과제에서 해야 하는 거냐고요. 그전에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짙은 회의감부터 배우게 되는 아니냐.

황병열과 유한나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현실에서도 조별 과제는 매번 순탄하게 흘러가는 적이 없었다. 끝내는 혼자서 도맡다시피 조별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던 기억은 아직도 끔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역시 빡세기로 이름난 조별 과제에 그렇게 많이 투자할 시간이 없을 같았다. 이러다 내가 무임승차자 되는 아니야, 생각하며 슬라이드를 살폈다.

 

5: 조현수 이라윤 연우주 장희연

 

“헐, 라윤이랑 같은 조잖아!

흥분 섞인 말을 내뱉은 내가 아니라 유한나였다. 유한나는 이라윤과 같은 조가 나를 부러움 역력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뭔가 뒷발로 잡은 격이긴 하지만 역시 때아닌 행운이 무척 반가웠다. 5조에게 배정된 책상 쪽으로 걸어가는데,

“우주 선배, 우리 같은 됐네요?

밀크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샐몬 체크무늬 셔츠에, 안에 검은색 무지티를 깔끔하게 받쳐 입은 화사한 미남이 나에게 인사했다.

“라윤아!

강태양 때문에 한참 마음이 심란해져서인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반듯한 얼굴로 나를 향하는 이라윤이 선녀 같았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반가움으로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라윤이 , 작게 웃었다.

“반응이 이렇게 격해요. 사람 민망하게.

“그러게… 중요한 과제인데 너랑 같은 너무 기뻐서 그런가?

“가만 보면 우주 선배는 은근 엉뚱한 구석이 있어요.

고개를 작게 내저은 이라윤이 그대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봄볕을 받아 내는 희고 단정한 얼굴이 평온했다. 지난번에 분명히 나를 은근슬쩍 피했던 같은데, 오늘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역시 내가 과민 반응했던 건가? 하긴 그날 컨디션이 별로 좋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어, 이라윤이다.

질끈 묶은 포니테일 머리에 진녹색 볼캡을 뒤집어쓴 여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사람도 우리 조원인가?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이 이라윤을 빤히 쳐다보는데,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무례함의 경계에 걸려 있어서 괜히 옆에 내가 왠지 모르게 불편해졌다.

“와, 실물이 정도면 SNS에서 유명해질 만하네.

“음….

잠깐의 텀을 두고 이라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자연스럽게 이라윤 얼평(?) 했다. 하지만 이라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찰나, 핸드폰에 트위터 알림이 떠오르자 여자는 화면을 맹렬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나와 이라윤 사람이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린 것처럼 빠르게 자신만의 세계로 몰입해 버렸다.

“이 조는 뭐냐. 얼굴 반반한 것들끼리 모여 가지고는.

마지막으로 땅딸막한 키에 살집이 제법 붙은 남자가 등장했다. 원숙한 겉모습으로 미루어 우리보다 살은 많아 보이는 선배였다. 이라윤과 나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던 남자가 노골적으로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조별 과제 타노스”

당신은 조별과제 지옥의 조에 배정되었습니다. 조별과제 빌런들의 협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공략 캐릭터 이라윤과 함께 과제에서 A 학점을 획득하세요!

(성공 보상: 이라윤 호감도 20 상승, 메인 퀘스트 진입 확률 대폭 상승)

 

때마침 등장한 시스템 창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게 시스템이 그리고 있었던 그림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조별 과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라윤과 친해질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던 나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현수 (26) 국군 병장 제대. 복학생. 조별 과제 빌런1]

[장희연 (21) 아이돌 탑시드 홈마. 조별 과제 빌런2]

 

눈을 끔뻑거리면서 우리의 조원들을 다시 살폈다. 퀘스트가 활성화되어서인지,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 창에 인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더해졌다. 다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은 데다, ‘빌런’이라는 말까지 붙은 보니…. 당연한 얘기지만, 제법 험난한 퀘스트가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이름은 조현수. 사회학과 4학년이고, 스물여섯이다.

“경영학과 2학년 장희연입니다.

간단히 단순히 소개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드는 건지…. 이들의 뒤로 검은 아우라가 뿜뿜 하는 같은 제발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 다들 꿀교양에 목숨이나 걸지 수업에서 배워 가겠다는 목적의식이 없어. 사회학도로서 이런 현상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

“아무튼, 됐고. 너희들보다 한참 선배인 내가 조장을 맡아 줄게. 나랑 같은 고맙게 생각해라.

이라윤과 나까지 소개를 마치자, 라떼를 거하게 한잔 들이켠 조현수가 본격적으로 거들먹거렸다. 자발적으로 조장을 맡아 책임을 지는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묘하게 서열을 세우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점차 어두워지는 이라윤과 장희연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느끼는 혼자만은 아닌 같았다.

“네, 선배님!

싸한 정적을 틈타고 혼자서만 소리 내어 대답했다. 뒤로 빠진 이라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장희연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트위터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얘들아, 다들 우리 조에 폭탄이 떨어져서 적극적으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대답은 같이 줘….

“일단 주제부터 정하자. 의견 있는 사람?

책상 위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비스듬히 팔짱을 조현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 셋의 얼굴을 훑었다. 사회학도라면 성과 사회 수업 과제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분명 우리보다 많을 같은데, 병장 출신답게 군기부터 단단히 잡으려는 듯했다.

“데이트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어때요?

팽팽한 긴장감이 불편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이라윤이 먼저 운을 띄웠다. 의아함 , 안도감 반으로 이라윤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관계 내에서 폭력이라는 단순히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학대나, 강압적인 요구 같은 것도 포함되는 거니까요.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

“교수님께서 성뿐만 아니라 관계 전반으로 넓혀서 주제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으니, 가장 친밀한 관계인 연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다양하게 살펴봐도 좋을 같아요. 평가 기준에 시의성도 있으니까, 그것도 충족될 같고요.

이라윤이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 엄친아라고 말만 들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었다. 물론 수업을 들으면서 성과 폭력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간 적은 있었지만, 저렇게 사고가 폭넓게 확장되는 새삼 신기했다.

“우와… 라윤이 되게 똑똑하다.

후배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순수하게 경탄했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조현수가 기다렸다는 이라윤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아, 근데 그거 별로인 같은데.

“…….”

“연애하는 사람들 전부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특히 남학우들이 많이 불쾌함을 느낄 텐데, 보면 여기 동료 평가도 기준에 있기 때문에 가점에 불리한 주제야.

              

#16

…잠재적 범죄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믿기지 않았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생각나는 왜일까.

“진화심리학적으로 성문화를 접근해 보는 훨씬 합리적이지 않겠어? 결국 모든 인간의 목표는 생존이고, 경쟁을 통해서 자원을 최대한 확보하는 우월 전략이니까.

“…….”

“생물학적으로 남녀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런 당연한 차이마저 무시하고 기계적 평등만을 주장하니까 자연스러운 본능이 억압당하고 심지어는 남자들이 역차별까지 당하게 되는 거잖아.

“…….”

“평면적인 페미니즘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는 선에서 본연의 성역할을 고민해 시점이다, 이런 결론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시각으로 성과 관계를 고찰하는 거지.

사회학도 조현수가 그럴듯한 개소리를 거창하게 늘어놓았다. 아… 이건 진짜 아닌 같은데. 나야 진화심리학에 대해선 1 모르지만, 성적의 최종 결정권자인 교수님이 질색할 만한 주제라는 본능적으로 있었다.

“그치만….

방금 라윤이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솔직히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걸 조현수 역시 모르지는 않을 같아서였다. 오히려 누가 봐도 이라윤의 아이디어가 근사하니까 어깃장을 부리는 텐데 괜히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의견대로 가는 걸로 모두 동의하는 거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사이, 조현수는 혼자서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그를 무작정 들이밀었다. 이런 말도 되는 급전개가….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대로 조별 과제가 산으로 가면 A 받을 없고, 그러면 퀘스트 보상인 추가 호감도 10% 획득할 없다. 절대 ! 반드시 우리 조를 구해 내겠다는 마음으로 결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선배님, 아까 데이트 폭력 주제도 남학우…들이 싫어하니까 동료 평가에 불리하다고 하셨잖아요.

“어, 그랬지.

“이 수업 듣는 학생 중에 나머지 절반은 여자인데, 선배님이 말씀하신 주제는 아무래도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있지 않을까요?

“그래? 별로라고?

조현수가 느끼는 못마땅함의 화살은 이제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의견에 반대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조현수는 조장 선배로서 거머쥔 권력을 알뜰살뜰하게 휘두르는 중이었다.

“아, 하하, 별로라기보다는, 저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만한 주제를….

2학년 연우주라고 했냐? 서양화과? 그래서 너는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어?

이라윤처럼 좋은 의견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말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긴 했다. 코앞에서 조현수가 얼마나 좋은 의견을 내는지 두고 보자며 눈을 잔뜩 부라리자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대로 조별 과제가 침몰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되는데….

“으음….

혼자서는 조현수를 당해 수가 없었다. 재빨리 트위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장희연 쪽을 돌아보았다. 장희연이 핸드폰 화면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까딱 들어 올렸다. 지금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눈빛으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희연아, 생각은 어때?

“저는 좋은 같아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장희연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어깨를 으쓱할 뿐인 장희연은 이러든 저러든 좋다는 식이었다. 협조적이라기보다는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보니 지금껏 장희연이 회의를 듣고 있긴 했나 의문이 들었다. 아니, 지금 당장 회의가 문제가 아니라 조별 과제 자체에 참여할 의사는 있는 건지….

“좋네. 그럼 주제는 내가 말한 걸로 하고, 앞으로 어떻게 소화하면 좋을지, 각자 일상에서 관련 사례랑 콘텐츠 기획안 . 다음번에 이어서 논의하자.

“그럼 이제 저희 회의 끝난 맞죠?

어영부영하는 사이 조현수는 마음대로 자기 아이디어를 주제로 정해 버렸다. 회의가 파할 즈음이 되자, 장희연이 기다렸다는 벌떡 일어섰다. 이어 오늘 회의 처음으로 자발적인 의사 표현을 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럼 다음번 회의 뵙겠습니다.

애써 웃는 얼굴로 회의를 마무리했지만, 귓가에는 공포 영화 특유의 음산한 배경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벌써부터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솟아났다. 이런 조원들과 함께 과제에서 A학점을 받는 가능하기나 할까?

다들 슬슬 해산하는 분위기인지 강의실이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도 많고 다른 조는 대체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보였다. 지옥의 조라고 하더니, 역시 그냥 붙은 이름이 아니었나 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슬쩍 쪽을 돌아보는 이라윤 역시 마찬가지로 표정이 상당히 어두웠다. 이심전심이라고, 아무 해도 서로 어떤 심정인지 정확히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와 이라윤은 거의 동시에 허탈함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라윤아, 우리 조별 과제 무사히 해낼 있겠지?

“저 벌써 수업 다음 학기 재수강해야 하나 생각 중이에요.

“안 ,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너무 이르다구!

아무렇지 않은 웃고 있지만 이라윤도 속이 말이 아니겠지.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고초를 겪었더니 동지애가 퐁퐁 샘솟았다. 그래도 일단 우리 조에는 이라윤도 있으니까, 혼자가 아닌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싶었다.

“라윤아, 이따 바쁘면 나랑 민초라떼 먹으러 갈래?

“민초라떼요?

“그때 네가 경영대 카페에서 보고 궁금하다고 했던 같아서. 아니면 거는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줄게!

지난번 경영대 건물에 숨어들었을 , 이라윤이 민초라떼를 보고 흥미를 보였던 생각이 났다. 확실히 조장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라윤과 미리 입을 맞춰 필요가 있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우리 둘이서라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해낼 있지 않을까?

***

오후가 되자 쨍쨍 내리쬐는 햇빛은 보다 뜨거워졌지만, 다행히 바람이 선선하게 밀려들어 공기가 쾌적했다. 이라윤과 둘이서 이십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경영대 건물로 걸어갔다. 카페에 도착해 내가 민초라떼와 아메리카노를 시키자, 이라윤이 센스 있게 허니 브레드를 따로 주문했다.

“잘 먹겠습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허니브레드 위로 달착지근한 향이 퐁퐁 올라왔다. 디저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층 너그러워졌다. 기분 전환에는 역시 최고지!

“우리 조별 과제 말야. 나는 라윤이 네가 말한 주제가 좋았는데.

“아, 그랬어요?

“데이트 폭력을 다루자는 ,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냥 조금 조심하면서, 서로 배려하자는 거잖아. 괜히 조장 선배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서….

건너편에 앉은 이라윤은 얌전한 얼굴로 말을 가만 듣기만 했다. 이라윤 역시 못지않게 조현수에게 화가 났을 테지만, 이따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기만 딱히 거들지는 않았다.

“있잖아, 지금이라도 주제 바꾸는 낫지 않을까?

“…….”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교수님께서 조장이 말한 주제 별로 좋아하실 같아.

“…아마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라서, 쉽지는 않을 거예요.

, 아주 작게 앓는 듯한 소리를 이라윤이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라윤이도 알고 있었구나. 조현수가 이라윤에게 괜한 시비를 건다고 느낀 생각만은 아니었나 보다.

“괜찮아요, 선배. 되면 다음 학기에 같이 재수강하자니까.

이라윤이 있는 농담을 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금세 다시 웃는 얼굴에서 묘한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동안 비슷한 일로 마음고생한 한두 번이 아닌 같았다.

“흠….

너무 잘난 것도 피곤하겠다. 이라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희연부터 조현수까지, 들쑤시는 조모임 잠깐 동안 옆에서만 봐도 내가 피곤했는데 이라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거니까. 물론 어딜 가나 인기와 관심을 독차지하는 부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억울해. 라윤이 네가 틀린 말한 것도 없는데, 괜히 질투 나서 그러는 거잖아.

“그런 하나하나 신경 쓰면 어떻게 학교를 다녀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만큼 알게 모르게 시달릴 일도 많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오른 보이는 이라윤은 딱히 화를 마음도 없어 보였다. 애가 저렇게 착해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어디 하나 빠지는 없는 이라윤이지만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라윤아, 허니버터브레드 많이 먹어.

내가 아니긴 했지만, 허니버터브레드를 슥슥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이라윤 쪽으로 내밀었다. 하나라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하, 고마워요.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애가 잘생기고 성격도 반듯하니까, 음식만 먹어도 주변이 환해지네. 이라윤의 존재만으로도 번잡스러운 교내 카페가 힙한 SNS 스팟처럼 느껴졌다.

“근데 라윤아, 나한테 인스타 계정 알려줄 있어?

              

#17

“아… 별로 없을 텐데.

이라윤은 선뜻 대답을 하고 머뭇거렸다.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었지만 여전히 궁금하긴 했다. 차마 조르지는 못하고 이라윤을 빤히 쳐다만 봤다. 머리칼을 살짝 헝클어트린 이라윤이 이기겠다는 ,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에이, 이라윤! 없긴 뭐가 없어.

떠오른 화면을 확인한 나는 이라윤을 타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겸손도 정도껏이지! 본체가 워낙 잘났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관리된 계정을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일단 첫눈에 피드 느낌부터가 너무 좋았다. 계정에 올라온 사진은 데일리 룩이나 담백한 일상, 풍경 위주였는데 차분한 색감과 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옷도 입는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감각이 있는 같다. 쭉쭉 스크롤을 아래로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는 계정이었다.

“라윤아, 근데 팔로워도 되게 많다!

한참을 스크롤 하다 다시 위로 올라와 보니, 계정 팔로워 수가 5.2K였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일반인이 정도 팔로워 쌓기 쉽지 않은데. 게다가 이라윤은 포스팅 태그도 달고, 캡션도 이모지 외에는 거의 없다는 생각하면 더욱 대단했다.

그럼 결국 얼굴 하나만으로 이만큼 뚫었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되나 싶다가도, 코앞에 있는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을 보면 순순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패션 좋아해서 OOTD 가볍게 올리려고 시작한 건데, 생각보다 너무 팔로워가 많아져서 부담스럽긴 해요.

“아, 그랬어?

“근데 사람들 시선 신경 쓰느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할 수는 없으니까.

그거야 하드웨어도 끝장인 데다 감각까지 뛰어나니, 이라윤이 하든 돋보이지 않는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남들은 마음먹고 제대로 해도 저만큼 팔로워 쌓기 힘들 텐데…. 부담스러울 있나 싶다가도, 애초에 이라윤의 성향 자체가 주목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 관심에 치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인스타 시작해 볼까?

“어, 선배 인스타 계정 없어요?

“응, 아직 만들었어. 딱히 올릴 만한 사진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안쓰러움도 잠시, 계정을 관리하는 데다 좋은 피드백까지 받고 있는 이라윤이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괜히 좋아 보여서, 역시 SNS 계정을 만들어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현생에서는 간단하게 작업 일지를 올리는 용도로 SNS 쓰기는 했지만, 그때에도 사진을 많이 찍고 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우주 선배, 내가 사진 찍어 줄까요?

“어? 진짜?

“네. 여기 빛도 들어오고 괜찮네. 핸드폰 저한테 줘요.

“앗, 고마워, 여기 이걸로….

“어, 선배 핸드폰 배터리 나간 아니에요?

뭐라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 이럴 수가. 실수로 이라윤에게 현실 세계에서 가져온 원래 핸드폰을 건네 버린 모양이었다. 지금도 핸드폰에는 ‘러브 문라이트’ 앱이 실행되고 있을 텐데…. 이라윤이 게임 인터페이스를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가슴이 섬찟해졌다.

“이거 화면이 까맣게 보이는 데요? 버튼도 전혀 먹고.

“아, 그거 고장난 공기계 폰인데 잘못 줬다. 원래 핸드폰은 이거야!

“그랬구나. 카메라 이렇게 켜면 되는 거죠?

황급히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에서는 파스텔톤 하트가 뿅뿅 튀어오르는 게임이 실행되고 있었지만, 이라윤에게는 화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늘해지는 간담을 쓸어내리며 애써 웃었다.

앞으로는 공략캐들 앞에서 핸드폰 헷갈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이라윤은 이상 의아해하지는 않고 게임 속에서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몸을 뒤로 젖힌 이라윤이 핸드폰을 가로로 길게 들어 각도를 조절했다. 미간을 좁히면서 다시금 핸드폰을 세로로 들어 보기도 하며 본격적으로 구도를 잡았다. 역시 뻣뻣하게나마 이라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으음….

사진 촬영에 집중하는 이라윤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하지만 정작 안에 포착된 것이 나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서 목덜미와 등줄기에 자꾸만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그래도 웃어야 사진이 나오겠지? 화면을 향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자, 볼이 아프게 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하하.

“왜 그래. 그렇게 어색했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솔직히는 , 그랬어요.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하게 쌍꺼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볼우물이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그래, 나야 민망했지만 라윤이라도 웃었으니 그거면 됐다.

“너무 이쪽 쳐다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으응….

“사진 찍는다고 의식하지 말고, 그냥 나랑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해 봐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이라윤이 무척 진지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이미는데 당장 긴장을 수는 없었다.

“우주 선배.

“응, 으응?

“선배는 빵은 어떤 제일 좋아해요? 음료는 민트초코라떼라고 했고.

“아, ? 근데 빵은 원래 별로 좋아하기는 . , 근데 허니버터브레드는 달아서 맛있어!

“그러면 대체로 좋아하는 ?

“응응! 아니면 아몬드 초콜릿이나, 캐러멜 차갑게 식힌 것도 완전 진리지~

찰칵! 달콤한 디저트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절로 신이 나서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데, 셔터 소리가 들렸다. 이럴 수가, 이게 작전이었어. 같은 자세로 휘둥그레진 눈을 두어 깜빡거리자, 셔터 소리가 반복되었다.

”우와.

이어 이라윤이 방금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 주었다. 환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을 포착한 사진의 분위기가 포근하고 몽글몽글했다. 지난 21년의 세월 동안 무척 익숙한 얼굴인데도, 사진 찍는 사람의 감수성이 덧입혀져서 그런지 어딘가 새롭게 느껴졌다.

“마음에 들어요?

“응, !

“그럼 다행이고.

먹는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이겠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세상 행복해 보이는 역시 마음에 들었다. 마냥 신기해서 핸드폰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는 나에게 이라윤이 물어 왔다. 이미 스스로 사진을 찍었다는 알고 있는지, 뿌듯해하는 목소리였다.

“라윤이 너는 진짜 못하는 없는 같다.

“그런 아니고, 그냥 사진 찍는 좋아해서 그래요.

“나 그러면 이거 인스타에 올려도 ?

“그럼요, 당연하죠.

내친김에 자리에서 SNS 계정을 만들었다. 이라윤처럼 꾸밀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게임 기록도 심심할 때마다 장씩 올리면 되겠지. 포스트로 방금 찍은 사진을 올리고, 이라윤의 계정을 팔로우했다.

“선배 계정이 oo0oojo0 이거 맞죠?

“응, 그거 맞아. , 근데 지금 팔로잉 0이잖아. 맞팔 줘도 되는데….

“상관없어요.

맞팔을 바라고 이라윤의 계정을 팔로우한 아니었는데…. 일부러 팔로잉 0으로 유지하던 방해했나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이라윤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뒤이어 내가 올린 사진에 자타공인 SNS 셀럽의 라이크까지 받으니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 공기와 함께 기분이 녹진녹진 녹아내렸다. 분명 아까 조별 과제 회의를 때만 해도 이걸 어째야 하나 싶어 마음이 갑갑했는데, 이라윤과 웃으며 얘기하다 보니 금세 기분 전환이 되었다.

“다행이다 진짜.

사실상 내가 공략 캐릭터를 직접 선택할 수는 없었다. 이라윤이 어떤 사람이냐와 상관없이, 그의 호감도를 얻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친해져야 하는 처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라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편안해서, 공략 과정이 힘들지만은 않고 나름의 즐거움을 찾을 있었다.

“네, 뭐라고요?

“앗, 아니야. 라윤아 근데 우리 되게 맞는 같다 그치?

당연한 일은 아니니, 그런 의미에서 이라윤에게 고맙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자, 이라윤의 뺨이 약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이라윤이 귓가를 슬그머니 매만졌다. 수줍어 하는 모습마저 그림처럼 근사했다.

“저도 우주 선배랑 같은 돼서 좋아요.

[️24]

동시에, 이라윤 머리 위의 하트가 부르르 떨리더니 한동안 정체기이던 호감도가 5% 대폭 상승했다. 기쁜 마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올랐다. 하트 근방에 링이 보이면서 광휘가 번쩍였던 같은 착각일까? 이제 보니 라윤이는 선녀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대천사인가 보다.

“라윤아 우리 같이 열심히 해서 조별 과제 에이 받자!

“그래요.

나는 감격에 가득 얼굴로 이라윤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내가 무슨 이유로 감동했는지 전혀 모르는 이라윤은 조금 어리둥절해했지만,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막막하기만 했던 게임 공략, 기나긴 터널이지만 이제야 끄트머리에 줄기 빛이 보이는 같아서 의욕이 솟아났다.

***

게임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이번 주는 나름 바쁘게 흘러갔다. 수요일에 교양 수업에서는 무려 이라윤의 옆자리에 앉는 데까지 성공했다. 초반의 걱정이 무색하게, 이라윤과는 순조롭게 친해지고 있었다.

이제 조별 과제만 무사히 해치우면 . 다음 주에 회의를 하기로 했으니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미리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있어야 조현수가 말도 되는 소리를 하면 반박할 있을 같았다.

>> 요즘에는 봉사 활동 ?

노트북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더니 하암, 하품이 절로 나왔다. 기숙사 창밖으로 해가 너울너울 저물어 무렵, 메시지 알림이 핸드폰 화면에 반짝였다. 범상치 않은 내용에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를 보낸 장본인은 강태양이었다.

“헉, 강태양이 무슨 일로 나한테 연락을 거야?

다소 조급한 손길로 대화창을 열자마자 , 숨을 들이쉬었다. 강태양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방금 받은 위로 이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시지가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 번호 똑바로 저장했지?

보낸 날짜가 4 전인 보면, 병원 봉사 활동 갔던 날이라는 건데…. 기억을 살금살금 더듬어 오르자, 휴게실을 나서기 직전 강태양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던 떠올랐다.

탈탈 털린 멘탈부터 일단 수습하고 하루만 지나서 확인한다는 , 이후로는 이라윤 루트를 진행하느라 강태양에게 전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지?

              

#18

<< 저번에는 빈자리가 생겼다고 연락받아서 급하게 나가 거라서….

<< 저는 원래 주말에만 봉사하기로 지원한 거여서, 일요일에 같아요!

대체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고작 메시지 하나일 뿐이지만 , , 글자 글자 신중하게 찍어 보냈다. 전송 직후 숫자 1 바로 사라져 몸이 움찔 떨렸다.

>> 갑자기 존댓말해?ㅋㅋ

>> 친구 하자며

답장은 거의 실시간이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와 똑같이 서슴없는 말투로 강태양이 훅훅 치고 들어왔다. , . 이러다 얼떨결에 강태양의 페이스에 휘말려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야, 연우주. 마인드 컨트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져야 . 강태양은 내가 마음을 얻어야 하는 공략캐다. 상황의 주도권을 나에게 가져와야 !

<< 그래!

<< 너는 지금 ? 저녁은 먹었어?

공격수답게 조금의 빈틈도 놓치는 법이 없는 강태양에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노출해서는 됐다. 전혀 당황하지 않은 태연한 말투로 답장했다.

>> [사진]

>> 재활 . 지겨워 죽겠다

이어 도착한 사진에는 선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운동 기구가 보였다. 다리와 기구를 고정하는 밴드가 종아리에 칭칭 감겨 있었고, 끄트머리에는 강태양의 운동화 코가 보였다. 화면 상단을 흘끗 보자 이제 여섯 반이 넘어선 시각이었다. 강태양은 오후 내내 재활 운동 하고 있었던 걸까?

<< 늦게까지 힘들겠다ㅠㅠ

이번에는 숫자 1 사라진 다음에 약간의 텀이 있었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전혀 그럴 없는 평이한 메시지를 가만히 곱씹어 보는데,

>> 요새 심심한데 밥이나 사줘 친구

불쑥 도착한 답장의 내용이 다소 뜻밖이었다. 그래, , 먹어야지, 먹으면 좋은데…. 비교적 편안한 이라윤과는 다르게 강태양은 여러 가지로 내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는 했다. 아니야, 이럴수록 미루지 말고 빨리 해치워야지.

<< 메뉴 어떤 제일 좋아해??

그대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강태양의 반응은 대체로 흔쾌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 내일 함께 점심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어, 그래도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괜찮은데?

메신저를 종료시키고 뿌듯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강태양이 의외로 모든 질문에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니겠지?

***

>> 체육관으로 올래?

오전 수업을 마치고 병원 쪽으로 미리 걸어가려는데, 강태양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운동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이쪽에서 같이 출발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보니까 체육관 위치가 원래 만나기로 했던 식당과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 ㅇㅇ

순순히 그러겠다 답장하고 병원 대신 체육관 쪽으로 걸어갔다. 산을 등지고 캠퍼스 외곽에 가까워질수록 키가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나뭇잎을 타고 청량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묵직한 철문을 밀고 조심스럽게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평일 시간대여서 비교적 한산했지만, 습한 열기가 번져 있는 실내 공기는 후끈후끈했다. , , 운동 기구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음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강태양이 있다는 퍼스널 트레이닝 룸을 찾아 복도를 따라 걸었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라 주변을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데, 뾰족뾰족하게 머리를 세운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앗, 저기 있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유리문을 냉큼 열어젖혔다. 양어깨로 묵직한 쇳덩이를 들어 올리던 강태양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동작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강태양이 느릿하게 상반신을 일으키자 도톰한 이마에서 땀이 , , 흘러내렸다.

“어, 연우주 왔냐?

내가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강태양이 살갑게 인사했다. 놀란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대로 강태양이 길쭉한 팔을 펄럭펄럭 흔들어 보이자, 새까만 반팔티 아래로 묵직한 근육 덩어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아, 어어, , 안녕.

나도 어디 가서 사회성 떨어진단 얘기 들어 적은 없는데…. 강태양의 폭풍 친화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라 다소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강태양이 눈초리를 장난스럽게 치켜올렸다. 무릎 살짝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 아래, 강태양의 왼발에는 지난번보다 가벼운 반깁스가 둘러져 있었다.

“한 이십 ? 기다려 주라. 금방 끝나.

“으응. , 지금도 재활하는 거야?

“다친 다리고. 상체는 멀쩡하니까 웨이트 계속해 줘야지.

“아… 그렇구나.

지난번에는 뭔가 없다는 생각으로 따박따박 쏘아붙였지만, 역시 강태양과 반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다. 만남에서 한량처럼 유들유들하게 굴던 것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남은 운동량을 가늠해 보는 모습이 조금 낯설어서이기도 했다.

“다섯 세트만 하면 . 거기서 편하게 있어.

“응 알았어!

벤치 프레스 위에 다시금 곧게 누운 강태양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지만 아무래도 운동하는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마냥 그럴 수는 없어서…. 체스트 프레스의 쿠션 위에 엉거주춤 앉으려다 대신 각종 운동 기구로 가득한 트레이닝 내부를 둘러보았다. 다음으로는, 시선이 자연히 웨이트 트레이닝 중인 강태양을 향했다.

정도면 대체 키로나 나가는 거지? 강태양은 거의 흉기 수준으로 두툼하고 묵직해 보이는 바벨을 익숙하게 들어 올렸다 내렸다 했다.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몸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얇은 티셔츠가 금세 땀에 젖어 들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는 나도 기가 질릴 지경인데, 정작 강태양 본인은 자세에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움직임이 규칙적이고 리듬감 있어서일까, 강태양이 운동을 이어 나가는 모습은 ASMR처럼 묘하게 중독성 있었다. 숨죽이고 그를 지켜보기를 남짓, 고요한 정적을 타고 , 거친 숨소리가 길게 퍼졌다. 단련을 마친 강태양이 묵직한 바벨을 느릿하게 내려놓았다.

“후으, 후으.

다부진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강태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도 높은 단련이 힘에 부치긴 했는지 미간이 살짝 좁혀져 있었다.

“이제 끝났어. 가자.

강태양이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격한 운동으로 근육이 펌프업 되어 그래도 건장하게 벌어진 체격이 평소의 1.2배는 보였다. 살짝 붉게 상기된 구릿빛 피부 곳곳은 땀으로 매끈하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어어… 근데 힘들어?

“하루에 세네 시간은 트레이닝 하는 거에 몸이 적응해서, 건너뛰면 찌뿌드드해.

“헐, 그렇구나….

“근육량 꾸준히 관리해 줘야 하기도 하고.

“우와….

강태양이 일어나는 사이 슬금슬금 벤치 프레스 쪽을 쳐다봤다가, 웨이트 무게를 확인하고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야 워낙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일학년 여름 방학에는 몸을 만들겠다고 헬스장을 잠깐 다녔었다. 지금 이거의 반의 반도 되는 들면서도 힘들어서 죽는 알았는데….

“엣헴, 흠흠.

당연한 소리지만 역시 프로 운동선수는 다르구나, 감탄하는데 목을 길게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강태양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잠깐만, 뭔가 하나 제대로 오해를 하는 같은데?

“어때? 나한테 반한 같아?

아니나 다를까였다. 잘난 척도 정도면 수준급이다. ‘또 번’과 ‘반한 것’ 어느 쪽을 먼저 정정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이 되었다.

“너 운동에 대한 로망 있다며.

그러나 강태양은 충분히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무심한 말을 덧붙였다. 아무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조금 뜻밖이어서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날 그렇게 들이대 놓고서는 연락 하나 없었잖아. 내가 멋지게 운동하는 모습 보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했지.

끝을 들어 올리고 뻔뻔한 얼굴을 하면서도, 강태양은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설마설마했는데, 오늘 일부러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나를 체육관으로 부른 맞나 보다. 게다가, 메시지에 답을 것도 마음에 쌓아 두고 있었던 거야?

“누가 언제 운동하는 사람에 로망 있대? 운동에 로망 있댔지.

“뭐라고? 둘이 달라?

“그럼, 다르지. 나도 작년에 복근 만들고 싶었는데…. 남들은 작심삼일이라는데, 하루 가고 뻗었어.

눈매를 묘하게 일그러뜨린 강태양이 몸을 슬쩍 훑어내렸다. 끈끈한 시선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목덜미와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 설마 지금 노려지고 있는 아니겠지? 본능적인 위기감으로 슬금슬금 상반신을 가리려 드는데, 강태양은 내게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비웃었지.

“아니야, 절대 아니지. 어떻게 내가 우주 너한테 그러겠어.

“그런 얼굴로 얘기해 봤자 하나도 믿겨.

“야, 억울하다. 그까짓 걸로 사람 우습게 보는 사람 아니거든?

친한 척하다 보니 정말 친해지기라도 것처럼 강태양과 투닥거렸다. 그러다 보니 어색했던 기분도 금세 누그러졌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첫인상과, 그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루머에서 발짝 떨어져 강태양의 노력에 순수하게 감탄할 있었다.

“어쨌든 대단하다. 하루도 빼놓고 매일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이만큼 무거운 것도 있을 아냐.

[️5]

그러자 강태양 머리 위의 하트가 부르르, 떨리더니 호감도가 3 상승했다.

“아….

정말이야, 이렇게 쉽게? 이렇게 수월하게 호감도가 올라갈 줄은 전혀 몰라서, 멀뚱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강태양, 그렇게 생겨서는 은근히 칭찬에 약한 타입인 건가.

“그럼… 내가 도와줄까?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강태양이 슬쩍 가까워졌다. , 끼쳐오는 더운 열기에 바로 뒤에 붙어선 강태양을 돌아보았다.

“어? 뭐를?

“너도 복근 만들고 싶다며. 운동 가르쳐 줄게.

남자의 로망은 복근이니까 물론 그렇긴 하다. 근데 지금 당장 여기서?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게임 속이고,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고…. 이런저런 이유를 속으로 주워섬겼지만, 실은 말만 로망일 운동이 딱히 내키지 않아서였다.

“야, 국가 대표 선수한테 웨이트 코칭 받는 기회가 그렇게 흔한 알아?

강태양의 널찍한 어깨가 드리우는 그늘에서 슬그머니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그를 금세 알아챈 강태양이 팔뚝 부근을 잡아챘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이 자신만만하게 반짝였다.

“그거야 그렇지만….

다소 뻐기는 투가 불만이었지만 틀린 구석은 없는 말이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 다음날 일어나도 별로 아프게 땅기는 걸로 가르쳐 .

“하하. 알았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빨리 이리 .

              

#19

체육관에서 제공되는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근육이 놀라지 않도록 강태양을 따라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초보자한테는 이게 제일 무난하니까. 체스트 프레스부터 거야.

“아… 이건 어디에 좋아?

“대흉근. 상완삼두근. 전면삼각근.

외계어처럼 들리는 근육 이름을 줄줄 읊으며 강태양은 나를 운동 기구 쪽으로 이끌었다. 쭈뼛거리는 나를 흘긋 쳐다보더니 기구 아래쪽을 멀쩡한 오른발로 툭툭 두드렸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체스트 프레스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어디 보자.

강태양이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앞을 버텨 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까 새삼 체격이 건장하네. 벌어진 상반신이 허리를 굽혀 몸을 깊숙이 낮추더니, 옆쪽에 있는 무게추를 옮겨 중량을 조절했다.

“이 정도는 있지?

절반이 훌쩍 넘는 무게추가 밖으로 빠졌다. 남은 양이 적당한지 가늠하며 강태양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강태양에 비하면야 지극히 미미한 양이었지만, 긴장이 되는 어쩔 없었다.

“아… 아마 그럴걸?

“아래에 대고, 그대로 밀면 바가 앞으로 나오니까 가볍게 잡아 .

강태양의 지도에 따라 받침대에 발을 고정하고 팔을 뻗어 바를 잡았다. 강태양은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도 괜히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높이가 맞네. 이대로 하면 어깨에 부담 .

다시금 바짝 가까이 다가온 강태양이 팔을 길게 뻗어, 내가 앉은 채인 의자를 그대로 위로 올렸다. 기구의 높이가 조정되는 동안, 널찍한 품에 감싸이다시피 나는 호흡을 잠깐잠깐 멈추게 됐다. 슬쩍 눈을 치켜떠 보았지만 정작 강태양은 무심한 얼굴로 기구를 움직일 뿐이었다.

“자세를 잘못 잡고 운동하니까 다음 근육이 아픈 거야.

“아….

“그래서 처음 배울 제대로 배워야 . 등은 쿠션에 맞닿게 붙이고, 허리 똑바로 세워 .

“이렇게?

“어. 이제 됐어. 그대로 밀어 .

“으, 으읏.

“쭉 . 다시 뒤로 당길 때는 천천히, 직각으로 만들면서.

무게를 많이 덜어 탓인지 생각보다 프레스를 움직이는 자체는 만했다. 다만 국가 대표 선수의 트레이닝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강태양은 자세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꼼꼼히 살폈다. 그대로 한다고 하는데도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아 자꾸만 동작이 어색해졌다.

“우주야. 어깨는 따라 나가지 말고 팔만 움직여야지.

고작 밀었다 당기기를 했다고. 처음에는 어설프게나마 따라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에 급격하게 힘이 빠졌다. 시작할 때에는 기구에 얌전히 붙어 있던 등과 허리가 바를 때마다 같이 딸려 나왔다.

“아….

친절한 코치님이 들떠 있는 허리를 손수 매만져 자세를 교정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흠칫 놀라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얼굴을 보니 신경 쓰고 있는 하나뿐인가.

“다시.

자세를 마저 잡아 강태양이 딱딱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러니까 지금 순간만큼은, 강태양은 문란한 바람둥이 설정의 공략 캐릭터가 아니라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엄격한 스승님인 거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며, 역시 잡생각을 지워 내고 운동에 집중했다.

“으으… 벌써 힘들어.

“그래도 개는 채워 보자?

적당히 하는 시늉만 줄로만 알았는데, 강태양은 웨이트 트레이닝에 진심이었다. 은근슬쩍 엄살을 부리려는 것도 전혀 봐주지 않았다. 흐트러지는 자세를 놓치지 않고, 정갈하게 떨어지는 ‘다시’라는 마디로 반복 동작을 이끌어 냈다.

“후, 흐으….

세트를 간신히 끝마친 즈음에는 호흡이 엉망으로 거칠어져 있었다. 이마를 흥건하게 적시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한층 무거워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바를 다시 잡으려 하는데, 좀처럼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이 어떻게 이렇게 매끈하기만 하냐?

눈에 띄게 후들거리는 팔뚝을 골똘하게 쳐다보던 강태양이 , 질문했다.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웃음기와 호기심이 절반씩 배어 있었다. 발달한 근육이 올록볼록한 굴곡을 그리는 강태양의 구릿빛 상완에 비하면야, 어깨부터 팔목까지 밋밋하게 이어지는 희멀건 팔뚝은 소박했다.

“이런 걸로 사람 우습게 본다며….

그래도 나도 키는 편인데. 어디 가서 왜소하다는 소리도 절대 듣고. 운동선수와 일반인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강태양 앞에서 갑자기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가 뭐래?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얘기한 거야.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근육이 붙는 체질이라서 그래.

“꾸준히 운동하면 늘게 있어, 다시 .

변명 따위 허용하지 않겠다는 , 돌덩이 같은 손바닥이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요령이 통하지 않는 코치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금 이를 악물고 , 바를 밀었다.

“허리 들뜬다. 똑바로 붙여서 자세 다시 잡고.

하지만 영혼을 끌어모은 근력도 이미 소진해 버린 이후였다. 마음과는 다르게, 어깨와 팔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상반신 전체가 딸려 나갔다. 지쳐 버린 나에게 바투 다가온 강태양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어깻죽지부터 등줄기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후으….

등을 길게 쓸어내리는 손이 기구와 몸이 반듯하게 닿도록 붙여 주었다. , 숨을 들이쉬며 다시금 척추를 곧추세웠다. 지금쯤이면 기구에 제대로 닿은 같은데…?

그러나 계속해서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반복된 운동으로 굳은살이 박인 강태양의 손바닥은 단단하고 두툼했다. 얇은 장을 타고 전해지는 꺼슬꺼슬한 촉감이 생소해서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 허리 다시 붙였는데 당신 손은 계속 거기에 있는 거야?

“들켰어? 되게 빡빡하게 구네.

강태양은 부러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결백을 증명하는 것처럼 나를 향해 양손을 허공에 번쩍 들어 보였다. 모습이 얄미워서 찌릿 째려보자, 강태양이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며 웃었다.

“후, 후으….

우여곡절 끝에 처음 약속대로 세트를 마친 다음에야 강태양이 운동을 끝내 주었다. 분명 움직인 팔과 어깨뿐이었지만 다리에도 스르르 힘이 풀려 있었다. 그대로 운동 기구에 몸을 늘어뜨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연우주.

어느새 강태양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운동을 얼마나 했다고 그새 등줄기까지 축축하게 젖은 거야…. 눈가를 작게 찡그리고, 강태양 흘끔 올려다봤다. 팔을 아래로 길게 내린 강태양이 포슬포슬한 머리칼을 와르르 흐트러뜨렸다.

“고생했네. 처음치고는 잘했어.

“알았어. …고마워.

뜻밖의 격려에 꿀꺽, 침을 크게 삼켰다. 물론 ‘처음치고는’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그래도 빼면서 힘쓴 마냥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이리 . 씻으러 가자.

“알았어, 조금만 천천히 .

여전히 엉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강태양과 함께 탈의실로 향했다. 로커 문을 열어젖힌 다음에는 버퍼링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이 멈췄다. 메시 소재의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들어 찝찝했지만, 옷자락 아래만 애매하게 붙들고 있을 쉽게 벗어 내지 못했다.

“으음….

뒤에 강태양이 의식되어서였다. 그러니까, 이대로 벗고 같이 샤워해야 하는 거야?

원래는 아무 상관 없는 맞았다. 평소 불만 없이 사우나나 실내 수영장, 목욕탕 가리지 않고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이고, 강태양은 공략캐라는 사실 때문인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뭐 , 들어가?

, 강태양이 로커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성거리는 나의 어깨를 강태양이 건드렸다. 웃통을 훌러덩 벗어젖힌 강태양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투박한 디자인의 목걸이 하나만 맨몸에 걸치고 있었다.

              

#20

“머, 먼저 씻고 .

근육 짜임이 탄탄한 상반신을 차마 오래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강태양에게 등을 내보인 ,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짜식, 지금 내외하냐?

강태양이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밖에 딱히 토를 달지는 않고, 강태양은 쿨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탈의실 가운데 있는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르륵 조르륵, 규칙적으로 들리는 물소리가 나른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딱딱한 무릎뼈에 뺨을 느릿하게 비볐다.

“그새 졸고 있었어?

, 물방울이 평상에 떨어지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깐 깜빡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샤워를 마친 강태양이 코앞까지 다가와 순한 강아지처럼 웃고 있었다. 물에 젖은 앞머리가 도톰한 이마를 덮은 채였다.

“…그쪽이 나한테 운동을 너무 빡세게 시켜서 그렇잖아.

“뭘 얼마나 했다고. 얼른 씻고 , 먹으러 가자.

퉁퉁해진 눈을 슥슥 비볐다. 여전히 반쯤 헐벗은 강태양의 몸에는 시선을 던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주춤주춤 걸었다. 차끈한 물이 피부 위로 쏟아져 내리자 뭉쳤던 피로가 잠시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다음에는 보송보송한 가운을 위에 꼼꼼하게 두르고, 허리끈까지 단단하게 맸다. 샤워실 밖으로 나오자 몸에 들어맞는 화려한 프린트 티셔츠를 걸친 강태양이 쪽을 돌아보았다.

“꽁꽁 싸매기는. , 쳐다봐.

앞머리를 다시 뾰족뾰족하게 세운 강태양은 평소의 날카롭고 강렬한 인상을 되찾았다. 당연히 강태양이 직접 하는 맞겠지만, 왠지 멋있어 보이려고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왁스로 밀어 올리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절로 웃음이 샜다. 그대로 눈이 마주치자 강태양이 내가 웃는 이유도 모르면서 빙글 따라 웃었다.

“힘썼더니 배고프다. 가자.

“저리 치워, 근육 무거워.

옷을 마저 갈아입자, 강태양이 당연하다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묵직하기 그지없는 팔뚝을 붙들고 밀어내니, 강태양이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장난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아직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 세게 튕겼다.

나도 수는 없어서 빈틈을 노리다가 강태양의 옆구리를 찔렀다. 강태양은 잔뜩 엄살을 피우며 허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렇게 장난에 장난을 더하며 나란히 체육관을 나섰다.

***

체육관에서 제법 오래 머무르느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격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배가 무척 고팠는데, 병원에 있는 뷔페에서 점심을 먹기로 역시 좋은 선택 같았다. 이것저것 맛있어 보여서, 음식을 차곡차곡 접시에 담고 자리로 돌아왔다.

게임 빙의에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네. 오렌지 주스까지 야무지게 받아서 돌아오는데,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강태양의 접시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와 같은 뷔페에서 골랐다기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점심이었다. 접시 개를 수북하게 덮은 양도 양이었지만, 살코기와 계란, 샐러드, 치즈까지 대체로 ‘건강한’ 음식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으유, 그렇게 먹으니까 체력이 바닥이지.

반면 접시에는 바나나튀김과 미트볼 스파게티, 크림 와플에 연어 초밥이 드문드문 담겨 있었다.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강태양이 나를 타박했다. 들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그러는 그쪽은 그렇게 많이 먹으면 엄청 살찌겠다!

“난 살쪄도 핫한 섹시근돼일걸?

듣고만 있으려니 억울해서 한마디 거들어 보았지만, 이어진 역시 반박이 불가능했다. 맞는 말을 하니까 오히려 얄밉게 느껴진달까. 괜히 접시를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포크로 바나나튀김을 쿡쿡 찔렀다. 그래도 바나나튀김이 맛있는 어떡하라고….

“야.

테이블 위로 턱을 삐딱하게 강태양이 , 나를 불렀다. 눈매가 예리하게 좁혀져 있었다.

“너 아까부터 이름 부르는 피하고 있는 같은데, 착각인가?

“아, 아니?

헉… 들켰다. 고개를 내리깔면서 은근슬쩍 눈을 피했지만 이미 동공에는 지진이 일고 있었다.

“거짓말 진짜 못하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애초에 저쪽에서 나한테 먼저 반말을 대는데, 아무리 공략캐라지만 혼자서만 공손하기도 싫었다. 서로 반말을 하다 보니, 강태양이 정말 내가 친구인 것처럼 동등하게 대해 줘서 편하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

그래도 강태양은 나보다 살이나 많은데…. 역시 어쩔 없는 유교 국가 국민이어서일까. 아무리 강태양이 격의 없이 군다고 한들, 입에서는 선뜻 태양아!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말을 망설이는 사이, 얼굴에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비쳤던 걸까. 강태양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들어가고, 웃음을 애써 참느라 볼이 씰룩거렸다.

“에휴….

, 그래. 소리가 무슨 대수라고. 게다가 강태양은 나보다 나이만 많은 아니라 돈도 훨씬 많을 텐데, 어디로 보나 형님이 맞다 맞아.

“태양이 형…?

입술을 잘근 깨물고 강태양을 올려다봤다. ‘형’ 호칭을 때에는 자신감이 약간 떨어져서 말끝이 모호하게 흐려졌다.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강태양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대로 눈가가 살짝 불그스레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7]

호감도가 추가로 2 상승했다. 종잡을 없는 성격답게 강태양의 호감도는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올랐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놀라는 대신 충분히 기뻐하며,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괜한 자존심이 무슨 대수냐, 호감도만 오른다면야 그깟 소리 번이고 번이고 있다!

인터넷으로 문제의 기사를 접했을 때만 해도, 강태양 루트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건가,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지만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강태양을 만나서는 호감도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쭉쭉 올라서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내가 겪어 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강태양과 직접 얘기를 많이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 말만 듣고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지. 막상 지내다 보면 강태양도 생각보다 나와 맞을지도 몰랐다!

“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

열심히 먹는 중인 강태양이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거렸다. 수북이 쌓여 있던 고기와 야채를 제법 많이 해치웠다. 나랑 노닥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먹어 치우고 있었나 보다.

“형은 진짜로… 아직 첫사랑이 없어?

질문에 강태양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들썩이는 입꼬리는 바르르 떨리는데, 잘생긴 이마에는 주름이 생겨났다. 웃겨 하는 건지 기분이 상한 건지 없었다. 역시 본인한테 직접 얘기하기에는 너무 예민한 주제였나….

“뭐야. 관심 없는 척하더니 , 기사까지 찾아봤냐?

“아니 나는 그런 아니라… , 사실 맞아.

“안 좋아하는 척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쯤 되면 귀엽다 ?

목소리가 높아진 강태양은 잔뜩 신이 기색이었다. 나는 다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쯤 되면 오해를 정정하는 포기해야겠고, 다른 목적인 강태양의 연애 가치관에 대한 정보나 얻어 내야겠다.

“가끔 기자들이 제목 자극적으로 쓰기도 한다며. 없는 말도 지어내서. 그것만 보고 내가 잘못된 정보를 믿으면 되잖아, 하하. 그래서 형한테 물어보는 거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댔다. 사실 아까 전부터 머릿속을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는 , 국적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회성 상대를 갈아치운다는 악명 높은 바람둥이에 대한 소문이었다. 이거야말로 강태양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떠도는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되지.

“응, 맞는데.

강태양은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입가에 묻은 타르타르소스를 티슈로 닦아 내는 얼굴이 진중했다.

“헉, 진짜?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하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형이 사랑을 봤다니까 의외여서.

“세상에 사랑 없이도 사는 사람 많아.

말에는 묘하게 수긍하게 됐다. 나도 딱히 첫사랑이라고 한다면 누구를 꼽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릴 소꿉장난처럼 만나던 풋내 나는 연애 감정을 사랑이라고 칭하기는 역시 그랬다. 그치만 나야 상황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거고. 세상에 아쉬울 하나 없어 보이는 강태양은 그만큼 사랑도 충분히 누리면서 사는 당연해 보였다.

“그치만, 형은 인기도 되게 많잖아. 원한다면 누구든 만날 있을 거고….

“글쎄, 깊은 감정이 있어야만 사람을 만나는 아니지.

“아, 그런가…?

“나도 가끔 마음에 들면 있으면 직진도 . 같이 화끈하게 불태우면 재밌잖아.

강태양이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희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묘하게 비릿한 감정이 매력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물론,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머리 위로 ‘호감도 0’을 매달고 나에게 입술부터 들이대던 강태양을 떠올렸다. 다행히 내가 밀어내서 망정이지.

“흐음….

물론 강태양은 내가 먼저 음흉한 마음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강태양 또한 나를 짧고 굵게 놀아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이성애자인 나도 순간 심장이 철렁했는데, 저런 남자랑 일단 몸부터 친해진 다음 마음이 마냥 초연할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싶었다.

“근데 형은… 되게 얼굴도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어… 축구도 잘하고, 성격도 재밌잖아.

“…전부 팩트이긴 한데, 그래도 입으로 들으니까 기분이 새롭다?

“그래 가지고 상대방이 형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 진짜 사랑하면?

틀린 아니라고 하면서도 으쓱해진 얼굴로 말을 듣고 있던 강태양의 얼굴이 조금씩 뻣뻣해졌다. 이내 날카롭게 치켜뜬 눈썹 아래로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거야 사람 사정이고.

이내 딱딱하게 굳어지는 입매. 강태양은 놀랍도록 서늘한 무표정이었다.

“감정이 생기면 알아서 처리해야지. 내가 그것까지 책임질 없잖아?

“아….

“나야 깔끔하게 대했을 거고, 그쪽도 모르고 시작한 아닐 텐데.

“그, 그래도… 일부러 좋아하게 것도 아닐 텐데,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잘라서….

“야.

어딘가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하던 강태양을 둘러싼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너 보자 보자 하니까 웃긴다?

“형….

“어차피 너도 꼬셔서 어떻게 보려고 접근한 거면서, 그렇게까지 내숭이야?

“아니, 나는 그런 아니라….

“아니면 바람둥이 갱생시키는 페티쉬라도 있어? 원한다면 그런 컨셉으로 맞춰 수는 있어. 말만 .

말이 끝나자마자 강태양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두툼한 무릎뼈가 허벅지와 맞닿았다.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다리를 뒤로 빼고, 빈틈없이 오므렸다.

[️4]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은근한 유혹과는 대조적으로, 강태양의 호감도가 , 하락했다.

Comments